진보정당에게 고민거리를 던지는 사건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진보정당 소속의 시의원이 주민자치센터 직원에게 행패를 부렸던 사건에 뒤이어, 서울시의 한 구의원은 연수를 빙자한 해외관광에 동참해서 물의를 빚고 있다. 그리고 전라남도에서는 도의원이 술을 마시고 차량사고를 낸 뒤에 뺑소니를 쳤다 경찰에 붙잡히는 사고가 터지기도 했다.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건들이 계속 터지면서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의심하거나 되묻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물의를 빚은 의원을 징계하거나 그 의원을 탈당시켜서 이런 문제를 해결될 수는 없다. 근본적인 원인을 짚지 않으면 이런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고, 진보정당이 제도권으로 더 많이 진입하면 할수록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단지 선거에 나갈 후보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것만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뺑소니를 제외하면 이런 일은 정치‘현실’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방의원이라는 ‘직책’에서 생겨난 이런 문제들은 후보자 개인의 품성이나 자질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진보정당의 의원이 지방의회에서 경험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 보수정당의 의원들이 키득거리며 몰려다니고 이해관계에 따른 표결을 할 때, 한 명의 의원이 이에 대처할 방법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더구나 비협조적인 공무원들도 많고 지역토호들이 호시탐탐 허점을 노린다. 그렇다고 중앙당이 적절히 지원을 해주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험난한 가시밭길을 홀로 걷는 기분일 게다. 한 치만 삐끗해도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싸움터에서 지방의원은 활동해야 한다.


그래서 왜 유독 진보정당 소속 의원들의 문제만 파헤치고 보수정당 소속 의원들의 수많은 문제점들은 덮어 두냐며 불만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리고 왜 정치의 기준이 도덕성이어야 하냐고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허나 의정활동의 어려움들이 앞서의 문제들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진보정당의 의원들은 바로 그런 문제점들을 해결하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으며 지방의회로 진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보수 정치인들과 똑같이 행동할 거라면 진보정당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진보적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사명의 문제이다. 지방의원들은 정치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사명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의원은 중요한 사안을 이해하고 판단해야 하지만 개인의 상식과 기준이 아니라 ‘진보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수언론들이 유독 진보정당의 문제점만 파헤친다는 푸념은 타당한 지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지적은 아니다.


대중이 정치에 관심을 쏟기 어렵다, 정치인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권력을 몰아주고 밀어주자는 식의 논의가 있는 것 같은데, 참으로 진보적이지 않고 부끄러운 소리이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대중의 정치흐름에 관심도 없고 그것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으면서 권력에 대한 욕망만 키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방의원의 활동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여러 기준들이 있겠지만 진보적인 지방의원은 자신의 경쟁자들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즉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역할과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원외 지방의원들’이 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진보적인 지방의원은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는 역할이 아니라 시민들과 정보와 권력을 공유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래야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역사회가 변할 수 있고 정치의 역할이 바뀔 수 있으며 진보정당의 기반이 넓어질 수 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리더십에 관한 얘기들은 이미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의 ‘동원욕구’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바로 이 점에 우리 사회의 슬픈 딜레마가 있다. 진보적인 지방의원이라면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

김남곡 지음, 『진보를 연찬하다』(초록호미, 2009년)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직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지만 우연히 선생님 책을 접하고 한편으로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었기에 그 고마움을 전할 겸 무작정 글을 씁니다.

요즘 들어 대체 진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한때 진보적인 민족작가라 불렸던 황석영 씨가 이명박 대통령을 따라다니고, 자신을 진보적이라 주장하던 사람들이 생전 그렇게 비판하던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를 미화하거나 정치적 기회로 삼고. 그런 모습을 보며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대체 무엇인지, 그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걸 유연함이라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원칙을 버린 변절이라 비판해야 할지, 그런 혼돈 속에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혼란이 꼭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거의 만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소위 진보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눌 때 간혹 당혹스러움을 감축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자기가 진보적이라 믿는 걸까, 그리고 최소한 자신이 말한 바는 지키며 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진보적이라 불리는 정치세력들이 보이는 그 강한 배타성과 고통의 불가능,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써도 좋다는 생각들. 그런 것들은 언제나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당혹스러움과 혼란에 빠져있던 터라 선생님의 책이 반갑고 고마웠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답답함을 많이 풀 수 있었습니다. 책의 제목인 연찬(硏鑽)이란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서로 맞서려는 방식의 토론이나 다수결에 의한 결정방식이 아니라, 단정(斷定)하지 않고 끝까지 진리를 함께 규명해가는 방식”인 연찬은 “누가 옳은가를 서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같은 방향으로 서서 무엇이 진리인가를 함께 물어가고 끝까지 규명해가는” 것이라 하셨지요. 나는 선이고 반대편은 악이기에 서로 말을 섞을 필요가 없고 그렇게 섞지 않는 게 올바른 태도라는 생각은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소통을 가로막아 왔습니다. 진보라 불리던 사람들도 맑스나 엥겔스같은 사람들의 ‘원전’에 맞춰서 모든 걸 판단하려 들었지 소통의 자세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연찬은 진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연찬방식이야말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말에 공감하고 또 공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보 역시 “특정한 사상이나 실천을 고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굳어져서 완고한 것은 진보가 아니다. 진리를 향해 고정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라는 말씀도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틀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하셨지요.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면 보수, 시장을 규제하는 국가의 역할을 진보라 부르던 낡은 틀에서 벗어나 “인간의 궁극적 진화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사회와 인간 그 자체의 변화에 대해 낙관적이며 그것을 위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부단히 혁신하려는 ‘열린 사고’의 실천을 ‘진보’라고 부르고 싶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감했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여러 가지 글을 모은 책이라 하지만 글 전체에 그런 연찬의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질과 의식, 제도와 자아,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두루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 “물질적 생산력과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 그리고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혁명이 서로 보완․조화되는 새로운 진보의 지평”을 열려는 치열한 고민이 앞서 가는 선배님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런 진보의 방향과 더불어 선생님은 진보적인 제도와 의식을 실천할 방법도 알려주셨지요. 선생님이 진보의 방법을 크게 세 가지로 알려주셨지요. 첫째는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침범하지 않도록 그 경계를 자유롭고 평등하게 정하는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 둘째는 자연과 조화되는 생산력을 발전시켜 물자를 넉넉히 해서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발전시키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셋째는 의식을 혁명해서 다른 사람을 침범하는 행동의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기중심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정리하자면 제도, 물질, 의식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변화가 필요하고 선생님은 세 번째 의식이 가장 중요한 진보의 조건이라 지적하셨습니다. 더불어 분노와 증오보다 사랑과 협동을 통해 점점 더 삶의 범위를 넓혀가는 변화가 진보라는 지적은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진보의 방향과 방법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건 보수만이 아니라 분명 진보에게도 문제가 있을 겁니다. 선생님은 그 문제를 “자유로운 개성의 신장을 바탕으로 한 평등사회로서 주로 연대․공존․상생의 상호작용이 내용으로 되는” 횡적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소유의식과 차별의식에 바탕을 둔 종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점에서 찾으시더군요. 이런 종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협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을 전개하는 사람들도 동료들을 배반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우리 사회의 운동가들이 뼈저리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로 진실한 인간, 진실한 사회를 원한다면 자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지적 또한 가슴에 깊이 새겼습니다.

특히 저는 그런 횡적인 삶의 방법으로 공동의 ‘마을지갑’을 만들자는 말씀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마을의 가족들이 일해서 얻은 것 중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을 제하고 자유의사에 따라 남는 이익을 마을지갑에 넣어 모은다는 생각은 참 좋았습니다. 야마기시회의 공동체원리와 비슷하지만 우리 전통과 맞닿아 있는 듯해서 좋았습니다. 선생님은 이렇듯 연찬과 다양한 접합으로 우리가 걸어갈 길을 더 분명하고 풍부하게 보여주셨지요.

그런데 선생님의 연찬이 중도(中道)를 향하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나름의 삶을 통해서 진리 그 자체도 ‘중도’(中道)요, 진리에 이르는 길도 ‘중도’라고 생각하고”,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도, 한 사람의 관념계의 변화도 바로 이 ‘중도’를 발견하고 실현해가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뉴라이트나 뉴레프트가 “인간에 대한 본질적 성찰과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움”을 갖춘다면 서로의 공통분모를 키워 좌와 우가 제대로 자기 역할을 맡을 기반을 만들 것이라 기대하셨지요. 그러면서 이런 “새로운 진보와 보수의 연대, 인간화의 길과 선진화의 길의 연대, 세계화의 길과 지방화의 길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명박 정부 하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하기에 의식적으로 선진화와 인간화를 합쳐 중도를 찾으려 하신 듯합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선진화’가 민주주의 제도와 물질적 조건을 더욱 개선하는데 강조점을 둔다 하더라도, 성숙한 시민의식, 즉 ‘상생 협력’의 의식을 결코 경시할 수 없고 경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또 ‘인간화’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시정하고 ‘인간의 향기’가 느껴지는 삶과 의식에 그 강조점을 둔다 해도 민주주의 제도와 물질적 조건들을 결코 경시하거나 배척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진보나 보수가 각각 최선의 길이라고 여기는 ‘인간화’와 ‘선진화’의 길이 사실은 크게 다른 길이 아니라는 공동의 자각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이 선진화와 인간화가 서로 배치되거나 대립하는 목표가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침투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필요한 때이다. 이렇게 될 때 상생과 협력의 대통합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보수는 지속가능한 번영을, 진보는 실현가능한 새로운 문명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 숨은 선생님의 속뜻을 헤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생각이 단순히 좌와 우를 뭉뚱거리자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압니다. 아마 남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를 강요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쪽으로 다가서는 것을 ‘신뢰’라고 여기시기에, 신뢰 없는 우리 사회에 신뢰와 희망을 만들기 위해 먼저 몸을 낮추신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세상의 변화란 게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믿기에 그렇게 주장하신 거라 믿습니다. 인류가 문명의 길을 걷고 있다면 자본주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선진화도 인간화와 만날 수 있다고 믿으시는 거겠죠.

선생님의 진심을 의심하거나 무시하진 않지만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자본주의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끊고 인간을 생명없는 기계로 만드는 ‘악마의 맷돌’이라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증명해온 바입니다. 자본주의의 생산력이란 것이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자본주의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살리는 ‘좋은 생산’이나 협동의 경제가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흉내를 내고 협동을 이용할 수 있을 지언정 그 정신을 자본주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요.

물론 연찬은 옳고 그름을 미리 정하지 말고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물어가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파괴하는 참됨, 사람을 죽이는 참됨이 가능하지 않듯이 그 연찬에도 어떤 ‘결의’가 필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떤 듯을 품는가에 따라 묻고 답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얼마 전 생명평화탁발순례단과 함께 오체투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고작 하루를 지내고 그에 관해 얘기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지만, 오체투지를 하며 진정 우리가 소통해야 할 대상은 보수가 아니라 바로 생명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싫어하던 아스팔트조차도 이마를 대고 있으니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느껴지더군요. 아스팔트에 누우니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가슴이 뭉클했던 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렇게 지구를 안아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지구의 숨통을 틀어막고 살을 파내어도 당신은 이렇게 모진 우리를 떠받치고 있구나,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껴안고 평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생명, 지구와 함께 연찬의 장을 펼쳐야 하겠지요.

그리고 저는 좋은 생산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자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진화 담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구조를 강화시킬 뿐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함께 누리는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급할 수 있어야 자치할 수 있는데, 선진화는 그런 자급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대외의존도는 97년 IMF 외환위기 전에 약 50% 정도였는데, 지금은 70%를 넘나든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세계화의 바람이 불수록 의존도는 심해지고, 한미FTA가 실현되면 그런 흐름은 걷잡을 수 없겠지요. 그러니 선진화와 인간화가 손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진보가 더욱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상황은 그런 당위가 빛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보수는 이념적인 보수가 아니라 기득권층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보수가 선생님의 말처럼 단지 시장의 자율성을 보장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일까요? 재벌들에게 특혜를 주고 그들이 온갖 죄를 저질러도 사면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국가를 동원해서 자기 이익을 취할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더구나 보수라면 적어도 자기 전통과 자주성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져야 할 텐데, 이 땅의 보수에게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미국식 합리성(요즘은 글로벌 스탠다드)을 따르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미국과 하나 되는 걸 더없는 영광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이 땅의 아이들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목숨을 잃어도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무슨 보수입니까? 제가 보기엔 그들은 보수가 아니라 기득권층입니다. 오랜 시절 자신들이 누려왔던 특권을 단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더 많은 특권을 가지려 그들은 사회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화물연대> 故박종태 씨가 요구했던 건 건당 920원하는 배달수수료를 30만원, 3만원도 아니고 단지 30원 인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용산 철거민들이 요구했던 건 수 억원의 보상금이 아니라 다른 곳에 둥지를 틀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건 극단적인 내몰림이었고, 그 결과 어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떤 이는 망루에 올랐다 공권력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야만을 그대로 둔 채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런 기득권층을 내버려두고 진보만 변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물론 선생님의 말처럼 분노와 증오만으론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가 동일한 차원에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 십년 살아온 삶의 터전을 하루 아침에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 망루에 올라간 부모가 까맣게 탄 시체로 돌아오는 걸 보는 사람들, 아침에 깨워서 보낸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 아들이 분노와 증오를 품는 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는 생명을 그 파괴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라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구조화된 폭력이 존재합니다.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구조의 문제가 있고 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분노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구조와 그것을 무조건 지키려는 기득권층에 더욱더 분노하는 게 오히려 문명의 역사를 여는 길이 아닐까요?

선생님은 뉴라이트나 뉴레프트가 그런 극단을 바로 잡아 중도의 길을 열어 가리라 기대하시지만 그건 그냥 희망사항일 듯합니다. 아시겠지만 뉴라이트라 자처하는 자들 역시 분명한 자기 이념 없이 기득권층에 빌붙어 떡고물이나 주워 먹으려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원로들이 조화나 협력처럼 누구나 좋아할만한 단어가 아니라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그 극단에 서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사람들이 더욱더 분노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현실’을 내세운 알리바이를 깰 수 있지 않을까. 청년들이 한다면 욕을 먹을 말들을 원로들이 해야 하지 않을까. 중도를 얘기하며 정도(正道)를 걷는 분도 있어야 하겠지만 극단을 고집하며 사도(邪道)를 걷는 분도 있어야 새로운 대안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아쉬움이 들 때가 많습니다.

다행히 조세희 선생님같은 분이 계셔서 아쉬움을 달래곤 합니다. 2005년 농민대회가 열리던 날에도, 2009년 용산참사가 벌어졌던 현장에도 선생님은 달려와 우리 사회의 야만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증언이 있기에 우리는 그 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단단하게 제 길을 걸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부대껴야 우리 시대의 진정한 연찬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남주 선생님이 자신의 시에서 노래했듯이 사상은 “썩고 병들어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는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는 그런 세상”에서 태어나고, 그렇기에 사상의 머물 곳은 “한두 놈이 얼굴 빛내며 밝히는 상아탑의 서재”나 “한두 놈이 머리 자랑하며 먹물로 그리는 현학의 미로”도 아니고 “노동의 대지이고 거리와 광장의 인파 속이고 지상의 별처럼 빛나는 반딧불의 풀밭”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진보는 보수가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 자기 자리를 마련할 때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힘을 얻게 됩니다. 진보가 배워야 할 것은 보수의 싱크탱크나 여론몰이 전략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의 마음에 깃든 ‘진심(眞心)’이라 생각합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꿈을 잃어버립니다. 저는 꿈꾸는 자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아마 선생님과 저도 서로 연찬할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논하며 맺었던 말을 그대로 남깁니다. “이상 두서없이 선생님의 글을 함께 읽으면서 느꼈던 소회를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선생님의 뜻을 오해했거나 왜곡한 부분이 있다면 저의 부족함 탓이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고, 더욱 건필하십시오.”


진보의 위기’라는 말이 지난 몇 년간 유행어처럼 되풀이되었다. 위기라는 말의 등장보다 더욱더 긴장감을 주는 것은 좀처럼 그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한국의 진보는 위기를 불러온 원인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보는 위기의 원인을 정치개혁이나 민생정책의 실패에서 찾거나 정부와 언론의 ‘진보 흔들기’에서 주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더 낫다”는 한탄(恨歎)까지 나오는 걸 보면 시간이 위기를 해결해주기는 어려울 듯하다. 도대체 얼마나 무능하다고 여겨졌으면 차라리 부패가 더 낫다고 얘기할까? 어쨌거나 이런 한탄은 진보의 위기가 매우 근본적인 것임을 알려준다.만일 무능함만이 문제라면 진보는 자신의 능력을 길러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소위 진보인사라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리 능력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무능한 사람들이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나선 게 실제로 위기를 불러왔을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진보의 실패는 무능함보다 무책임함과 종파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속 빈 진보의 무책임함

 

무엇이 진보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박정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김영삼, 김대중이 진보였고, 김영삼보다는 김대중, 김대중보다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진보이다. 진보는 어느 정도 상대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적인 진보와 함께 이념적 진보(좌파)는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다양한 사상들, 즉 사회주의, 아나키즘, 생명사상 등을 뜻한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같은 정당들은 상대적인 진보주의자들을 자유주의자라 부르며 자신들과 구별을 짓고 진정한 진보를 자처해 왔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의 교체는 사회가 진보에서 보수로 흘러가고 있음을 뜻한다. 상대적인 흐름이 바뀌더라도 이념적 진보가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으면 사회 전체의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이념적 진보의 뿌리는 매우 약하다. 소위 ‘원전’을 들이밀며 누가 더 노선에 충실한가를 따지고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데 힘썼지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회를 강화시키려는 진보의 노력은 그동안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의 위기는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따져보면 이념적 진보는, 특히 사회주의 세력은 1989년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자기 이념을 새로이 구성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사회주의 전략은 ‘혁명’과 ‘집권’을 강조했는데, 그럴 가능성이 없다보니 진보는 자기 이념을 구체화시킬 필요가 없었다. 이념을 외치기만 하고 정작 그 이념의 쓸모를 밝히지 않은 채 한국의 진보는 민중에게 무조건 자신을 따르라고 외쳤고 따르지 않는 민중을 비난해 왔다. 더구나 그 이념을 설명하는 언어들조차 이미 낡은 것들이었다. 진보는 국가나 자본을 비판하는 것 외에 딱히 자신의 대안적인 담론을 만들지 못했고, 새로운 주체를 발굴하거나 성장시키지도 못했다. 그러니 무능력보다는 오히려 무책임함이 한국 진보의 특징이라 하겠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무책임함은 이념의 기준을 좌에서 우로 옮긴 소위 뉴라이트(어떤 점이 new인지 도통 알 수 없지만)나 권력의 떡고물을 따라다니는 소위 진보인사들의 모습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념을 자신의 삶으로 녹여내지 않았기에 그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 이익에 맞춰 입장을 바꿀 수 있었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박박 기며 삶을 이념에 맞추려 했던 사람들을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마치 대단한 애국자인양 미화해 왔다. 민중이 바보가 아닌 이상 어찌 이런 진보를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신좌파는 없다!

 

물론 이런 문제가 한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이런 문제가 드러났고 그 과정에서 신좌파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도 신좌파가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좌파가 존재하려면 구좌파가 정치세력으로 미리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신좌파의 등장을 설명하려면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와 체제 내로의 흡수, 그에 따른 좌파 내부의 이념적, 정책적 갈등을 함께 얘기해야만 한다. 그런 갈등이 진보정당의 정강이나 정책을 바꾸고 새롭고 대중적인 사회운동이 권위적이고 관료화된 구좌파의 의사결정구조를 비판하면서 신좌파는 형성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조건들이 없었다. 아직도 빨갱이라는 비난이 등장하는 한국사회에서 좌파는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아직도 머나먼 과제이고, 좌파 내부의 갈등은 이념이나 정책 갈등보다 정파의 싸움에 가까웠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차이가 아니라 잘못이라 비난하니 비판이나 대결은 곧바로 분열로 이어졌다. 이념이 추상의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런 갈등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웠다. 겉으론 대단한 이념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인물을 따르거나 특정한 원칙만 고집하며 정파의 이익을 따지기 때문에 타협이 안 되면 보따리를 싸서 떠나버린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정치경쟁이 있을 수 없다.

분명히 억압적인 사회 환경이 정파의 비밀스런 대립을 강화시킨 면도 없지 않지만 한국의 진보는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서구의 신좌파는 ‘대항문화(counter-culture)’운동과 결합해 권위주의적이고 교조적이며 가부장적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했다. 아래로부터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자발성이 신좌파의 성장을 도왔다. 하지만 한국의 진보는 권위주의와 교조주의, 가부장주의만이 아니라 학벌과 연고주의에서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 Lakoff)는 진보가 자기 프레임(frame)을 개발하지 못하면 보수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는 오히려 ‘이익집단’이라는 보수의 프레임에 갇혀 버렸고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단체들의 비리사건들은 그런 프레임을 정당화시켰다. 자연히 시민운동으로 대표되던 NGO와 사회운동단체, 진보정당 모두의 사회 신뢰도가 함께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의 진보는 ‘녹색’이라는 대안가치마저도 ‘저탄소 녹색성장’에 빼앗겨 버릴 정도로 자신의 프레임을 확장시키지도 못했다(이제는 ‘공동체’라는 가치마저 시장에 빼앗길지 모른다).

 

관점의 진보가 필요하다!

 

자기 가슴과 몸으로 진보의 내용을 새로 채우지 않는다면 진보정치의 가능성은 없다. 자신을 진보라 주장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많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경우는 드물다. 말만 뻔지르르하고 실제 사는 모습은 개판인 경우가 많고,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자신의 진보성을 풀어내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러니 진보의 이념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보다 조금 더 상대적으로 진보한 사람은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위기의 시대는 그런 상대적인 진보로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경제위기와 식량, 에너지 위기의 시대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념적 진보가 새로운 틀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는 마음이 미래의 해법일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보의 관점이 새로워져야 한다. 자신은 내버려둔 채 남을 변화시키겠다는 건 오만한 발상이다. 일찍이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진보에게 바닥으로 기어라고 말했다. 오만함을 버리고 낮은 시선에서 민중의 삶을 바라보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만나고 반기고 사랑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책임감을 지닌 진보적 리더십은 혁명을 이끄는 전위조직이 아니라 더불어 살려고 치열하게 움직이는 모임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이나 청년실업을 비롯한 사회현안을 해결하는 것은 분명 진보의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정규직으로의 전환, 무상교육, 무상의료같은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정책들이 민중의 조건 없는 지지를 받으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그런 정책들이 실현될 수 있는 자발적인 문화를 만들고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을 끌어내지 못하는 한 그런 정책들은 지지의 기반을 만들 수 없다. 그러니 구좌파/신좌파의 무의미한 논쟁에서 벗어나 즐거운 진보의 양산박을 만들어야 한다(최근 일본청년 마쓰모토 하지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런 필요성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관점과 삶의 변화가 쉽게 이루어지리라 기대할 순 없다. 허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진보가 망한들 우리네 살림살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한국의 기득권 보수만큼 부패할 뿐 아니라 무능한 세력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지 않으면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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