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장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이동놀이차에서 장난감을 꺼내어 흥겹게 뛰어놓고 있고, 어른들은 토론장 여기저기에 모여 앉아 구청이 제안한 내년 예산집행계획과 올 해 예산집행과정을 검토하고 있다. 아이들은 갑갑한 집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 놀아서 좋고, 어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자기 뜻대로 만들어갈 수 있어 좋아한다. 그래서 참여예산제 회의가 열리는 날엔 언제나 축제가 열리는 것처럼 마을 전체가 들썩거린다.


회의장은 아이들이 노는 소리와 어른들의 토론하는 소리로 가득 차고, 때로는 서로 대립하는 주민들의 야유나 함성소리가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나 쉽게 회의장을 떠나는 사람들은 없다. 참여예산제 회의장은 예산에 관한 실질적인 결정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스스로 판을 뒤엎는 불이익을 감당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에 참여예산제가 도입된 지도 4년, 이제는 제도가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더 이상 연말이면 한 해 예산을 소모하기 위해 거리 곳곳의 보도블록을 파헤치는 일이 없어졌다. 무리한 대규모 사업계획을 잡아서 시민들의 세금을 낭비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학교, 도서관, 공원 등을 가꾸기 위한 예산이 훨씬 늘어났고,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필요한 시설들이 조금씩 들어서고 있다.


취지는 좋지만 예산이 없어서 사업을 할 수 없다며 발뺌하는 공무원들도 줄어들고 있다. 공무원들은 주민들을 ‘지역의 주인’으로 대접하며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주민들 역시 지속적인 학습과정을 밟으며 공무원과 동등한 위치에서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갈등도 많았다. 자기 동네에 필요한 것만을 고집하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무시하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그런 갈등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장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점을, 그리고 때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주민들은 ‘나’의 욕구, ‘타자’의 욕구, 나를 타자로 바라보는 ‘우리’의 욕구가 모여 마을의 욕구를 형성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사람들은 ‘말로만 이웃사촌’에서 벗어나 자기 동네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알게 되었으며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말뿐 아니라 각자 서로의 동네를 직접 방문하고 교류하면서 지역 전체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아졌다. 그러다보니 참여예산제가 실시된 이후 자연스레 마을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낯설고 차가운 도시에서 정감 어리고 따뜻한 마을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대신해줄 누군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스스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방자치의 진정한 의미가 참여예산제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오늘의 논의안건은 시민노동의 창출과 사회적 기업의 설립에 관한 것이다. 지역 내 청년실업의 해소를 위해 구청이 예산을 지원하고 지역 내 복지서비스를 담당할 기업은 지난 몇 달 동안 마을의 중요한 화두가 되어 왔다. 지역 내 여러 단체와 구청의 사회협약으로 세워질 시민기업은 지역 내 고용수요 창출과 그것을 통해 지역예산을 확충하는 선순환을 가져올 획기적인 방안으로 얘기되고 있다. 오늘 내려질 결정은 우리 구를 발전시킬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다. 그 일에 참여하는 내가 자랑스럽다.



영국은 참여예산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네요.
아래 사이트를 클릭하시면 각종 정보와 참여예산제 실행방법(tool kit)을 구할 수 있어요.^^

http://www.participatorybudgeting.org.uk/

예산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미리 시범지역을 정하고 거기서 나온 경험들을 정리하고 지속적으로 보완하는 걸 보면,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려는 의지가 잘 드러납니다.
참여예산제도를 기획, 추진하는 Participatory Budgeting Unit이 멘체스터에 있네요(좋겠어요, 오처장님...ㅎㅎ).
우리도 이런 사이트를 하나 운영하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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