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님의 블로그(http://blog.jinbo.net/Darae/?pid=11)에서 퍼왔습니다.


 

한국은 죽음이라는 사건에 너무 민감하다. 죽음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사회의 모든 쟁점과 논쟁을 중단시키며 시민들의 관심을 빨아들인다. 일단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다른 얘기를 꺼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람이 죽은 마당에 정치는 무슨”이라며 도덕이 현실을 압도하고 시민들에게 추모를 강요한다.


천안함 침몰 이후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지방선거라는 중요한 정치결정이 불과 한 달 남짓 남았는데도 주요한 쟁점들에 관한 논쟁이 제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4대강 사업이라는 희대의 살상극이, 자연의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려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의 관심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수병들의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 MBC방송국에서는 낙하산 인사를 반대하는 파업이 한 달을 넘기고 있건만, 다른 언론들은 새만금방조제의 역사를 찬양하고 천안함의 병사들을 영웅으로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비리와 사법부의 스캔들이 매일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부패한 공화국인데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나라를 위한 추모와 성금의 열기가 뜨겁다.


지금까지 천안함 유족 성금이 250억 원을 넘고 조문객도 6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누군들 젊은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애도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개인이 그런 애도의 마음을 품는 것과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물론 칼로 도려낸 것처럼 그런 일이 분리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늘어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관심을 적절히 분산시켜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사건 앞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국가는 가치있는 죽음과 가치 없는 죽음을 구분하면서 존중받을 수 있는 삶의 대상을 정하려 한다. 국가는 병사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용사’로 추앙하지만 삼성반도체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불러온 박지연씨의 예고된 죽음을 은폐한다.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몰고 강바닥을 헤집으며 강의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면서도 ‘강 살리기’라는 말을 쓰듯이 국가는 자신에 맞서는 생명들의 죽음을 은폐하거나 왜곡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죽음만을 선택해서 그것을 미화한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유리한 것만 부각시켜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려 할 것이다.


이런 강력한 죽음의 정치에 맞서는 방법은 죽음의 의미를 애써 깎아내리거나 그것에 맞서는 것보다 국가가 은폐하고 감추는 죽음을 드러내고 저항하는 죽음, 억울하게 죽어간 죽음들을 소환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가오는 5월이 중요하다. 80년 5월, 91년 5월 등 우리의 현대사를 결정지었던 중요한 사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을 추모하는 것은 국가의 부조리와 실패를 드러내는 중요한 정치행위가 될 수 있다. 권력에 희생되고 짓밟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현실로 소환해서 우리는 새로운 권력을 구성해야 하는 필요성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권력에 맞서 우리는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사건은 의례적인 행사가 되면 그것이 지닌 전복적인 의미를 잃어버린다. 국가는 이런 사건들을 단순한 연례행사로 만들어서 그 의미를 축소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흐름에 맞서는 다양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서울에서 큰 행사를 치르는 것보다 지방에서 다양하고 작은 행사들을 치르면서 ‘저항의 지방화’를 모색해야 한다. 각 지방에서 시민들이 부패하고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어떤 저항을 펼쳤는지를 알리고 바로 지금 우리가 그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 우리의 무기인 말과 사상의 힘을 살려서 권력의 폭력에 맞서야 한다.


곧 500만 추모객의 애도를 받았던 노무현 대통령의 1주기가 찾아온다. 추모의 물결에 휩쓸려 때를 놓치지 않으려면 먼저 상황을 이끌어가야 한다. 이번 지방선거가 선거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단지 선거운동에만 집중한다면 진보정당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