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직접행동으로 주인임을 증명하다!

 

 

1919년 4월 1일 밤 11시, 경기도 화성시 수촌리의 주민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죽산 봉우리는 마치 산불이 난 듯 환했고 만세 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개죽산만이 아니라 쌍봉산, 천덕산, 당재봉, 무봉산 화성 일대의 산봉우리들이 붉게 타올랐고 깜깜한 밤공기를 타고 만세소리는 사방으로 퍼졌다. 일본 헌병대가 총을 쏘며 산기슭을 올랐지만 도망을 치면서도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입을 막지는 못했다. 지난 3월 말에는 인근 수원에서 위생검사와 도박을 핑계로 사람들을 괴롭히던 일본 경찰 1명이 주민들에게 맞아죽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칠흙같은 밤 수촌리 주민들의 마음은 산 위의 횃불처럼 불타올랐다. 이대로 꿇고 사느니 서서 죽자, 굳은 다짐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같은 날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 주민들은 몽둥이를 들고 일본인들이 사는 마을로 쳐들어갔다. 그 놈이 그놈이지만 일제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삶이 더 어려워졌다. 자기 땅을 짓던 사람들도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대부분이 높은 소작료에 시달렸다. 심지어 일제는 일본 모종을 심어라, 뽕나무를 키워라, 매달 가마니를 몇 장씩 짜서 내라는 온갖 무리한 요구를 했다. 그래서인지 주민의 82.9%가 소작농이던 칠곡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안성 주민들은 헌병주재소를 불태우고 전선을 끊었으며 우체국과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주민들은 일본인의 상점도 부쉈고 심지어 다리나 철도까지 끊으려 했다. 심지어 일본 군대가 공격할 것을 대비해 산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놓기도 해서 상해임시정부는 시위대를 ‘독립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제는 이날 경기도 안성의 만세시위를 평안북도 의주, 황해도 수안의 시위와 더불어 ‘전국 3대 폭동’이라 불렀다.

 

유관순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우리가 유관순 누나와 태극기, 만세 삼창으로만 기억하는 3․1운동은 조선 말기 수많은 민란들의 뒤를 이었고, 가까이는 1894년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았다. 이 땅의 민중들은 산꼭대기에 횃불이나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했다. 시골 장터가 열리는 곳마다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사람들은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학생들은 학교 문을,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닫았다. 농민들은 일제 품종이나 묘목을 심지 않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일제 상품을 사지 않으며 일상 속에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거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어린이, 거지, 기생들도 만세를 외치며 시위의 주체로 등장했다. 심지어 삼베 주머니로 도시락을 만들어 망태에 넣고 돌아다니는 전문 시위꾼인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데 누가 감히 운동을 이끌었다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참여한 사람들도 200만 명을 넘었다. 그리고 3월 1일만이 아니라 3월부터 4월 말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3.1~3.10

3.11~3.20

3.21~3.31

4.1~4.10

4.11~4.20

4.2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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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남

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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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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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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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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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

21.4

78.6

34.6

65.4

 

<표>에서 드러나듯 서울의 만세시위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 점점 수그러들었지만 오히려 전국 각지에서 그 기운을 이어받아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3월 말과 4월 초는 시위의 정점을 이뤘고 수많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목숨 걸고’ 거리에서 일제와 맞섰다. 때로는 태극기를 손에 들고, 때로는 돌멩이를 던지며, 때로는 낫과 몽둥이, 호미를 들고 경찰, 헌병과 맞섰다.

그 엄혹한 일제 시기에, 나라조차 없는 상황에서 거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은 저항했을까?

 

헐벗은 삶에서도 저항은 시작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목적은 단순히 조선이라는 영토를 지배하는데 있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인의 삶에서 자발성과 능동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수동적인 인간을 만들려 했다. 왜냐하면 일제는 동학농민전쟁을 경험했고 을사조약 이후에도 수많은 의병들의 저항을 강제로 억눌러야 했기 때문이다(일본 측의 통계를 따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 따라서 일제는 민중의 삶 자체를 뿌리째 뽑아 그 삶이 외부의 권력과 자본에 기생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일제는 행정부, 사법부의 주요 관리들을 일본인으로 교체할 뿐 아니라 헌병과 경찰의 수를 대폭 늘리고 이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헌병과 경찰은 단순히 범죄를 단속하고 첩보를 수집하는 역할만을 맡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심으라는 모종을 심지 않거나 토지측량을 거부하거나 위생검열에 응하지 않으면 헌병과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1910년에 제정된 ‘범죄즉결령’은 결찰서장이나 헌병분대장이 구류, 태형 등의 범죄나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를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1912년에 제정된 ‘조선태형령’은 조선인의 경우 징역이나 벌금 대신에 매질을 하게 했다. 따라서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자기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이면 아무나 끌고 와서 매질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소유가 분명하지 않은 땅들을 강제로 빼앗았고 이를 이주하는 일본인들에게 팔아넘겼다. 그리고 이들은 농민들에게 비싼 소작료를 걷었다.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비싼 소작료를 낼 뿐 아니라 일본 모종을 쓰고 일본식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다. 종자를 골라 모를 심고 수확하고 건조하고 탈곡하는 과정 모두에 식민권력이 간섭하며 일일이 명령을 내렸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모종을 밟아 뭉개고 벌금을 매겼다. 또한 도살세, 연초세, 주세, 학교조합비 등 각종 세금을 거뒀다.

일제의 만행은 이렇게 개개인의 삶을 억누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은 저항의 힘이 자치공동체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자치공동체인 동이나 구를 없애고 강제로 면으로 통합시켰고 대부분의 면장을 일제에 협조적인 사람으로 바꿨다. 일제는 지역의 자치공동체를 무너뜨려 중앙집권적인 식민지 지배구조로 흡수시키려 했다.

3·1운동은 이렇게 국가와 자본에 내몰리고 뿌리 뽑히는 사람들과 공동체들의 극렬한 저항이었다. 일제는 사람들이 저항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지고 있음을 눈치 챈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시위 때의 구호도 다양했다. 길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면장이든 면서기이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를 위하여 이렇게 우리들은 진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조금이라도 국가를 위하여 진력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놈은 때려 죽여라”, “지금부터는 모자리 일을 할 것도 없다. 송충이를 잡을 필요도 없다”, “바닷가의 간척공사도 안 해도 좋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 세금이 필요 없게 될 것이며”, “이제부터는 묘포(苗圃)일도 할 것 없고 라고 외쳤다.

이렇게 민중들은 자신이 이 땅의 주인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권력이나 자본의 간섭 없이도 자신들이 잘 살 수 있음을, 그리고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마련하는 삶이야말로 올바른 대안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 점은 자치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하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남 순천, 평안도 의주, 평안도 신미도 등지의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업무를 봤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다시는 헐벗은 삶으로 내몰리지 않으리라는 강한 의지가 국가의 폭력을 넘어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자기 목숨을 건 자발적인 정치의 운동이었기에 일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시위를 막아도 지방으로 들꽃처럼 번져가는 불길을 잡기는 어려웠다. 언제, 어디서 만세시위가 벌어질지 몰랐기에 일제는 가늠하지 못했다.

 

직접행동과 전쟁상태

 

이런 민중의 의지를 보았기에 일제는 이에 맞서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민중이 일제의 ‘치안’을 무너뜨리고 ‘정치’를 지향하자 일제는 경찰, 헌병만이 아니라 일본인 자위대, 소방대까지 동원해서 민중을 탄압했다. 그런 상태에서 폭력․비폭력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위들은 민족대표들이 주장했던 평화시위를 따랐지만 일제의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헌병이나 경찰이 총을 쏘고 주동자를 연행하며 강제로 해산을 시도하면,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도 돌멩이, 죽창, 삽, 도끼 등을 든 시위로 변했다. 그래서 <표>에서 드러나듯 3월 말이 되면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경기도 수원 화수리의 항쟁은 계획적으로 헌병주재소를 습격해 일본경찰을 때려죽이기도 했고, 평안도 안주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주재소장과 헌병 3명을 붙잡아 살해하기도 했다.

이런 직접행동에 일제는 마을 전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맞섰다. 화수리의 경우 일제는 마을의 집 30채를 불지르고 마을주민들을 끌고가 갖은 고문을 다했으며 주모자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안성 지역에서는 일제 경찰과 함께 보병부대가 주민들을 검거에 나서 1명을 죽이고 20명을 부상시켰으며 9채의 집에 불을 질렀다. 심지어 부대가 학교에 야영을 하며 한 달 동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이렇듯 무장하지 않은 민중이 무장한 권력에 맞섰던 전쟁의 결과는 비참했다. 역사가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창으로 찌르고 칼로 쳐서 마치 풀을 베듯 하였으며, 촌락과 교회당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잿더미 위에 해골만이 남아 쌓이고, 즐비했던 집들도 모두 재가 되었다. 전후 사상자가 수만 명이었고, 옥에 갇혀 형벌을 받은 사람이 6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늘의 해도 어두워져 참담하였으며, 초목도 슬피 울었다”고 적었다. 일제는 마을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을 저지른 뒤에야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런 피의 전쟁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민중의 정치를 다시 치안의 틀에 가두기 위해 일제는 ‘문화정치’를 펼쳤다. 이 문화정치는 민중들을 분열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상가 함석헌의 말처럼,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 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가와 타협하여 손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에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작가 이광수를 비롯한 거짓된 자치주의자들이 민중들의 자치의지를 대신하려 들었고 한국인 지주와 자본가들은 민중의 피를 팔아 자신들의 이득을 꾀했다.

스스로 다스리며 살겠다는 민중의 의지에 공포를 느낀 것은 일제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 기득권층의 국가는 역사를 왜곡해서 3․1운동의 다양한 목소리를 ‘독립’이라는 국가주의의 목표로 축소시켜야 했다. 그 다양한 목소리와 정치행동은 모두 사라지고 유관순 누나의 비폭력만 남아야 했다.

 

3·1운동과 촛불집회, 앞으로의 사회운동...

 

역사학자 이정은의 말처럼 “1919년 2월 28일 밤 서울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이튿날 아침 각처의 집 대문 앞에서 광무황제 독살설을 알리는 격문이 발견되었을 때 이를 발견한 일제 경찰도, 이를 추진했던 민족진영에서도 이 운동이 어떤 형태로 어디까지 파급되어 갈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네티즌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모이자는 제안을 했을 때, 청소년들이 청계광장에 모여 촛불문화제를 열었을 때, 이를 지켜보던 어느 누구도 이 운동이 어떤 형태로 어디까지 파급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누구도 싸움이 벌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사건은 터진다. 이런 사건은 아주 우연히, 우발적으로 터지기도 하지만 그 결과는 의도적인 운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3·1운동은 의도적인 운동으로 이어졌던 사건이다. 우리는 그 사건을 패배라 여기지만 1920, 30년대의 운동을 보면 그렇게 평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3·1운동으로 민중의 폭발적인 정치적 잠재력을 확인하게 된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이를 조직적인 운동으로 연결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1920년 4월 11일 창립한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로 노동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조직되었다. 소작농민들은 ‘불납동맹’, ‘아사동맹’, ‘소작권상실 걸인단’을 만들어 싸웠고 ‘소작인조합’, ‘농민조합’은 전통적인 자치공동체를 이용해 마을 지주들에게 기금을 걷고 민간의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동의 뿌리를 강화시키려 했다. 청년학생들은 민중을 대상으로 야학/여자야학과 강연회, 토론회 등을 열며 지역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지역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아나키즘, 맑스-레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강연회와 야학, 독서모임에서 대중과 더불어 논의되었다.

그리고 시위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은 것은 중앙의 지도부가 전국의 시위를 조직하지 않고 각 지역의 지식인들이 자기 동네에서 시위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그 전의 민란과 농민운동이 그러했듯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들불처럼 번져가는 시위는 쉽게 그 불길을 잡히지 않았고 민중의 삶이 그 운동과정과 방식에 반영되었다.

이처럼 3·1운동은 다양한 사회운동의 출현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3·1운동은 스스로를 거름으로 만들어 새로운 것의 불씨를 만드는 운동이었다. 이 점은 3·1운동의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3·1운동이 가장 극렬했던 곳은 예전에 동학농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 않은 곳이었다. 모를 돌아가며 심듯이 짓밟힌 곳은 잠시 숨을 죽였고 싹을 틔운 곳은 그 숨이 끊이지 않도록 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이 운동은 국가의 폭력에 ‘사상’과 ‘자기조직화’로 맞섰다.

3·1운동은 사회운동이 민중을 이끌려 하거나 민중이 사회운동을 배제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그러했기에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중들은 1920, 30, 40년대에도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그러니 3․1운동은 민중이라는 주체를 드러내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함석헌은 3․1운동 이전이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면, 그 이후는 “씨알의 역사다.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라고 말했다.

2009년을 마감하는 우리는 그동안 어떤 준비를 해왔고 어떤 운동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 2010년에 우리는 어떤 새로운 조직, 새로운 이념, 새로운 정치를 맞이할 수 있을까? 준비 없이 꽃은 피지 않는다.

 

 

참고한 책

 

이정은 지음, 『3․1독립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국학자료원, 2009).

박환 지음, 『경기지역 3․1 독립운동사』(선인, 2007)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소명출판, 2008)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엮음, 『3․1민족해방운동 연구: 3․1운동 70주년 기념논문집』(청년사, 1989)

조동걸 지음, 『일제하한국농민운동사』(한길사, 1983)

함석헌 지음, 『생활철학』(서광사, 1966)

함석헌 지음, 노명식 엮음, 『함석헌 다시 읽기』(인간과자연사, 2002)


[작가세계]에 쓴 글입니다.
요즘 분위기 돌아가는 걸 보면 심상치 않네요.
인터넷에서도 망명객과 난민들이 늘어날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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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라는 저잣거리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저잣거리에서 청년들에게 앎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가를 가르쳤다. 왜 그는 학교가 아니라 시장 저잣거리에서 청년들을 가르쳤을까? 당시 소피스트들이 돈 많고 힘있는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생활하던 것과 비교하면 소크라테스의 삶은 아주 엉뚱했다.

하지만 그에겐 그렇게 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앎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구두공은 구두를 만드는 삶에서, 목수는 나무를 깎고 다듬는 삶을 통해 자신의 지혜와 탁월함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지혜와 탁월함을 서로 견주는 과정에서 시민들은 공동체의 앎과 공공성을 구성했다. 이렇게 앎이 삶과 분리되지 않았을 때에만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좋은 시민이 될 수 있기에 청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되물어야 했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청년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도왔다.


소크라테스의 무대였던 그리스의 저잣거리 아고라(agora)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질문들이 오고가는 정치적인 장이기도 했다. 서로 가진 것을 나눠야 하는 삶의 필요가 만든 아고라는 앎과 삶이 함께 숨을 쉬는 만남의 장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만나 물건의 가치를 흥정하고 따지는 과정에서 앎의 폭은 더욱더 넓어졌다. 그리고 아고라에서 열리는 민회는 개인의 고민을 넘어 전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며 앎의 깊이를 더하는 소통의 장이었다.

고대 그리스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장이 서는 곳은 만남과 소통의 장이었다. 먹거리가 있고 축제가 있고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곳이 장이었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정보와 지혜를 나누고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할 수 있는 공간도 바로 장이었다. 이런 장은 일제 식민지와 군사독재의 탄압을 받으며 사라지거나 물건만 사고 파는 시장으로 변질되었지만 만남과 소통의 필요성은 그런 장의 부활을 기다려 왔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출현은 이런 장을 부활시켰다. 인터넷은 새로운 만남과 소통을 가능하게 했는데, 데이터로 구성된 이 세계에서는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고 그 범위도 확장되었다. 더구나 디지털 카메라나 캠코더의 등장, 자유자재로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환경 등은 만남과 소통의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인터넷은 이전 사회의 시․공간 개념을 뛰어넘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 있다.

이런 속도와 새로움에 힘입어 인터넷은 아고라로 대표되던 고대의 직접민주주의를 부활시키려 한다. 현대의 아고라에서는 내가 굳이 광장으로 나가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전자민주주의(teledemocracy)는 단순한 투표를 넘어 시민들이 많은 양의 문자와 영상정보를 서로 교환하며 의견을 나눌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텔레데모크라시](거름, 1994)를 쓴 아터튼(Christopher Arterton)은 인터넷이 커뮤니케이션과 대화, 정보교류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한국처럼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가 뿌리를 내린 곳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소통과 만남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인터넷은 그런 제약을 극복하도록 돕는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나이나 성별, 장애를 감추고 자신이 원하는 인물로 탈바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터(Mark Poster)는 컴퓨터 글쓰기가 고정된 역할을 없애고 기존의 위계질서를 혼란에 빠뜨려서 의사소통을 새롭게 배치하고 주체가 속한 시공간을 변화시켜서 주체를 분산시킨다고 본다.[각주:1] 이런 재배치와 분산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상상된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권력과 돈, 지식이 지배하는 현실세계에서는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들도 인터넷에서는 빛을 발하는 고수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인터넷 세계에서는 청소년들이 어른들과 동등하게 맞짱을 뜨며 논쟁을 벌일 수 있다(이명박 대통령 탄핵서명운동을 발의한 고교생 안단테를 보라!). 몇 살이냐를 따지고 초딩, 고딩이라 비난하기도 하지만 현실세계만큼 나이가 폭력적으로 상대방의 입을 막지는 못한다. 이렇게 누리꾼들은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고 현실에서는 만들기 어려운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도 사라진다. 미네르바같은 이가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할 수도 있고, 일반 대중이 진중권을 공격하기도 한다.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공격하는 방식을 문제삼을 수는 있지만 뒤집어 보면 그것은 전문가가 대중에게 개입하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작용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의견을 말하는 순서도 먼저 로그인한 순서를 따르니 각각의 의견이 똑같이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인터넷에서의 만남은 이미 만들어진 위계질서를 뛰어넘을 수 있다.

또한 인터넷은 소통의 방식도 새로이 재구성한다. 옛날에는 직접 참여한 사람들만 그 내용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은 여러 의견과 실천을 저장해서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도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은 정보를 직접 검색할 수 있고 자신의 견해를 보태어 위키피디아(http://www.wikipedia.org/)처럼 집단지성을 구현하거나 UCC로 재창조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아무리 하찮은 개인이라도 모든 지식에 접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꿈을 기술적으로 실현했다.[각주:2] 또한 동시에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토론에 동시에 참여하며 토론을 이끌어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소통은 기존의 시․공간 개념을 뛰어넘는다.

이렇게 다른 점도 그 장의 성격은 옛날 아고라와 비슷하다. 옛날 아고라처럼 인터넷에서도 물건을 사고 팔고 정보와 의견을 나눌 뿐 아니라 비슷한 취미와 정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뭉치기도 한다. 내가 관심을 두는 취미생활이나 상품 구매에 대한 품평과 정치적인 사안이 맞물릴 수 있다는 점은 그런 세계의 총체성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각주:3] 삶의 공간이기에 인터넷은 여러 가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의 참여를 자극하고 독려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권위적인 사회, 권력과 자본, 언론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시민들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2008년을 뜨겁게 달군 촛불집회이고, 미디어다음의 아고라(http://agora.media.daum.net/)는 그 변화의 중심에 섰다. 실제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던 대통령의 탄핵이 인터넷에서는 백  만명을 넘기는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촛불집회에 나가면 아고라라고 적힌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 사회, 문화를 토론하는 공간이 마치 정당이나 시민단체처럼 깃발아래 뭉쳤으니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촛불집회만이 아니라 그 뒤를 이은 촛불산책이나 명동 무한도전×2도 그런 변화를 반영한다. 아고라와 블로그, 카페 등의 인터넷 공간에서, 그리고 길거리와 광장, 학교와 동네같은 현실 공간에서도 변화의 싹은 조금씩 계속 자라고 있다. 이제 시민들은 영웅이나 지도자가 자신을 대신해주길 바라지 않고 스스로 주권(主權)을 행사하려 한다.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한 자기 모습을 반성하면서 책이나 교과서에서 외우기만 했던 민주주의나 민주공화국을 구체적인 삶의 물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각주:4]. 단지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인터넷은 현실세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가상‘현실’로 성장하고 있다.


인터넷 권력이동

2008년 미국 선거에서 오바마는 흑인으로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아주 먼 미래에나 가능하리라 믿었는데 오바마는 그런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오바마의 정치적인 성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오바마는 블로그 형태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유권자들과의 적극적으로 소통을 시도했고, 1천만 명이 인터넷 공간에서 오바마를 지지했다. 이 유권자들이 자발적으로 오바마의 전략과 정책을 복사해서 다른 곳으로 퍼날랐고, 그 중 3백만 명은 홈페이지를 통해 선거자금을 내기도 했다. 오바마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만드는 사이트(Social Network Site)인 페이스북(http://www.facebook.com/)과 마이스페이스(http://www.myspace.com/), 트위터(http://www.twitter.com/)와 동영상 제공 사이트인 유투브(http://www.youtube.com/) 등에 자신의 정보를 올리고 사람들이 이것을 자유로이 활용하게 했다.

물론 오바마가 선거에 인터넷을 활용한 최초의 정치인은 아니다. 그런데 오바마는 인터넷을 단순한 홍보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했다. 선거정보와 정책이 가공되고 복제되어 무수히 퍼져나감으로써 오바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선거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각주:5] 오바마만이 아니다. 유투트에서 진행되었던 정책토론회 역시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받았다. 2007년 미국 대선을 다룬 유투브 정책토론회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후보자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각 후보당 평균 조회수는 민주당이 약 8만 건, 공화당이 약 1만 6천 건이나 되었다.[각주:6] 그리고 이런 관심은 후보자들의 사이트나 블로그 방문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사람들은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다루는 이슈들, 국회나 청와대같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만이 정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고라의 저잣거리는 그동안 우리가 정치의 장이라고 믿어온 공간이 아주 좁은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시시껄렁한 동영상이나 드라마 등을 공유한다고 여겼던 유투브가 정책토론회를 진행하고, 블로거나 UCC가 독립언론을 외치며 블로거 저널리즘을 만들고 있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파워블로그들의 영향력은 정치인이나 기자와 맞먹거나 그것을 능가하고 있다. 그리고 블로그와 블로그를 이어주는 메타블로그의 등장으로 블로그 전문사이트도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다. 올블로그(http://www.allblog.com/)와 같은 메타블로그는 개별 블로그를 서로 묶어주면서 이용자들이 의견을 공유하고 덧붙어 더욱더 풍성한 콘텐츠를 만들게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각주:7]

이런 환경에서 스스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하여 판단을 내리고 그런 판단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려는 시민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인터넷은 정보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췄기 때문에 굳이 내가 정보를 만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자유로이 복사, 활용할 수 있게 했다(인터넷에서는 내가 직접 글을 쓰지 않아도 내 생각과 비슷한 사람들의 글을 퍼오는 것만으로 내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새로운 흐름은 ‘웹 2.0’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되고 있다. 기존의 인터넷이 정보를 제공하는 일차적인 역할만을 담당했다면, “웹2.0에서의 웹은 콘텐츠와 서비스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이용자 스스로가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정보는 양방향으로 소통하게 된다. 플랫폼으로써의 웹! 이것이 곧 웹2.0이다.”[각주:8] 그러니 ‘웹 2.0세대’라는 말은 인터넷에 능한 세대만이 아니라 현실의 부조리에 항의하고 참여하는 능동적인 시민세대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고라의 논객 권태로운 창은 이를 “21세기의 시민 민주주의”라 부르기도 했다.[각주:9]

웹2.0의 정신인 개방과 공유, 참여는 능동적인 시민의 가치와 어울린다. 웹2.0의 정신은 자신을 드러내며 개방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과 정보를 타인과 나누며 그것을 바탕으로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고 있다. 이 정신은 정보와 가치를 독점하며 대중을 계몽하고 이끌려 했던 기존의 사회운동이 가지지 못한 개방과 공유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한 블로거는 여기에 연결과 협업을 덧붙여 웹 2.0의 정신을 주장하기도 한다. “연결 = 경계를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자. 협업 =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시작하고 함께 완성하자. 나는 운동의 기본 중의 기본이 소통과 조직화라고 생각한다. 소통과 조직화를 위한 필수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위와 같은 개방, 공유, 참여, 연결, 협업의 정신이다.”[각주:10] 물론 이 정신이 누리꾼들의 삶에 지금 온전히 반영되고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많은 점에서 아직 인터넷은 가능성의 장으로 남아있고 이 정신은 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필요로 한다.

어쨌거나 인터넷은 현실의 장애물이 소통과 만남을 방해하는 한국사회에서도 새로운 장으로 떠올랐다. 과학수사대(CSI)를 능가하는 누리수사대, 공무원이나 학자를 능가하는 집단지성, 종이신문의 폭과 속도를 앞지른 블로그 저널리즘, 시사잡지를 능가하는 메타블로그 등은 대중의 참여문화를 퍼뜨리고 발전시키는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인터넷의 힘이 강해지는 만큼 현실의 권력과 자본은 그 힘을 길들이려 한다.


인터넷 디아스포라의 출현과 식민화

인터넷의 힘이 가상을 넘어 현실로 침투할수록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과 자본의 반격도 거세진다. 아고라에서 활동하던 권태로운 창이나 미네르바와 같은 누리꾼들을 수사하거나 체포, 구속하는 것은 그 반격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터넷의 힘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그 이전부터 있어 왔다. 이미 2007년에 정부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추진한 바 있고, 지금도 4월 국회 통과를 목표로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제안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수사기관의 감청대상을 확대하고 통신사업자가 의무적으로 감청설비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만일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수사기관은 법원의 영장 없이도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의 휴대전화기록이나 IP, 로그기록 등을 통신사에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 4월 1일 통과된 저작권법 개정안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불법 복제물을 올리는 인터넷 게시판에 대해 3회 이상 삭제 명령을 내린 뒤에 게시판을 최대 6개월동안 폐쇄시킬 수 있게 했다. 또한 정보통신망법안 개정안은 불법정보의 유통을 막는다는 취지로 불특정다수에게 제공되는 정보를 통신사가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상황은 더욱 심각한데, 현행 공직선거법은 선거 180일 전부터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글 또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금지한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범하는 것이다. 후보들간의 상호비방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 조항은 시민들의 정치적인 표현을 근본적으로 제한한다(실제로 선관위는 이 조항에 따라 UCC활용을 막았다). 더구나 이 법은 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의 선거운동도 금지해서 미래시민의 정치참여를 원천봉쇄한다.

이런 법안들이 다소 어지러운 인터넷 세계를 정화시키리라 기대하는 순진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면 그 힘은 언제나 강자보다 약자를 향해 행사되어 왔다(용산참사는 그 점을 비극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니 이런 법안들이 인터넷 세계를 공평하게 만들 것이라 기대하는 건 헛된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는 듯하지만 권력을 가진 자의 판단에 따라 이런 조항들은 악법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아렌트(H. Arendt)는 전체주의 국가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국가가 그 범죄를 정하고 모든 시민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한 바 있다.[각주:11] 독일 나치즘이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난민으로 만들었듯이, 이런 법안들은 수많은 누리꾼들을 인터넷 디아스포라[각주:12]로 만들 수 있다. 만일 현실세계라면 이런 법안들은 시민에게 정치적인 추방령을 내려 그들을 디아스포라로 만드는 법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법에 따라 경찰과 검찰은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구속하고 카페를 운영하는 운영진들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기 글을 지우거나 서버를 외국 사이트로 옮기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권력이 인터넷의 자유로움을 억압한다면, 자본은 그 자유로움을 변질시킨다. 자본은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을 사유화된 공간으로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을 기업의 마케팅 공간으로 변질시키거나 저작권을 내세워 디지털의 속성인 자유로운 복제를 사유화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이런 현상은 18세기의 인클로저 운동처럼 공유지인 인터넷을 사유화된 공간으로 바꾸고 있다. 권력이나 자본과 결탁해 독점적인 위치를 누려온 언론사들 역시 여론형성과 전파에 미치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을까 걱정하며 인터넷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려 애쓴다.

그리고 대형 포털회사들이 인터넷 세계를 관장하면서 여러 문제점들을 낳고 있다. 일단 누리꾼들이 네이버와 같은 대형 포털을 이용하다보니 그곳의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각주:13] 김헌식은 ‘포털 매트릭스’에 포획된 포털 네티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들이 활동하는 공간은 다른 곳이 아니라 포탈 공간이기 때문이다. 포털은 미디어의 블랙홀이다. 결국 포털은 대중을 다중으로 해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포털 대중을 만들어 냈다. 기존의 대중문화는 해체되고 포털 대중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각 매체로 분산되었던 것이 포털 안에 집적되어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 낸다.”[각주:14] 실제로 누리꾼들은 포털 사이트에서 토론이나 포털기자단에 참여하기보다 주로 실시간 검색어를 클릭하거나 커뮤니티 게시판의 글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블로그를 활용하는 방식도 자료저장(41.6%)이나 개인적인 기록공간(36.4%)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블로그의 일부 콘텐츠를 비공개를 설정하는 경우도 많다. 즉 누리꾼들 스스로가 블로그를 사적인 공간으로 인식하고 블로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네트워크(SNS)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는 능동적인 시민이 출현하기 어렵다.[각주:15]

이렇게 권력과 자본이 자유로운 생활공간를 장악하는 현상을 하버마스(J. Habermas)는 ‘생활세계의 식민화(colonization of life world)’라 불렀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공론장이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이제까지 의문시되지 않았던 주제를 다루며 공개적인 토론으로 비판적 공개성을 확립했다고 본다. 즉 공론장에서는 지위가 없는 사람들도 토론을 통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여론으로 정부나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수용성이 높고 침투성이 강한 대중매체(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등)의 발달과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의 성장이 이런 공론장을 점점 변질시켰다고 본다.[각주:16] 대중매체와 문화산업의 발달은 공중에게서 발언권과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관심을 제거할 뿐 아니라 사생활에도 개입하고 그 삶을 조작한다. 하버마스의 견해를 빌린다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론장의 출현은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을 극복하고 새로운 비판적 공개성을 확립하는 듯했지만 체계의 힘이 이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고 있다. 이런 식민화는 개방과 공유, 참여, 연결, 협업이라는 웹2.0의 정신을 파괴한다.

아직 결말이 나진 않았지만 권력이 누리꾼들을 디아스포라로 내몰고 자본이 인터넷 공간을 사유화하고 식민화하려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열심히 즐긴 당신, 떠나라는 그들의 요구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망명을 떠나지 말고 그들을 망명보내기

문화는 순간적인 변동보다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된 경험과 삶으로 구성된다.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이 불붙은 능동적인 시민참여의 문화 역시 그런 경험과 삶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현실의 권력과 자본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갑갑하고 두려워 짐을 싸 떠날 생각을 한다면, 능동적인 시민의 문화는 구성될 수 없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고 쟁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떠남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를 파괴시킬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권태로운 창은 아고라를 “모든 것의 근원이자 부활의 노래”인 바다라고 불렀다. 그의 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인터넷이 새로운 아고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옛날 아고라가 반역과 반란의 장이기도 했듯이, 누리꾼들은 인터넷을 식민화하려는 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 개입은 인터넷만의 저잣거리만이 아니라 실제 세계의 저잣거리에서도 등장해야 한다.

물론 2008년에 촛불집회가 몇 달 동안 이어졌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지 못한 걸 보면 실제 세계의 개입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짐을 싸 떠나야 할 사람은 시민이 아니라 부패한 권력자와 자본가들이다. 설령 디아스포라로 떠돌지라도 언젠가는 그들을 몰아내고 다른 시민들과 함께 자유롭고 억압이 없는 공동체를 만들고 말리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전두환이 아직도 발을 붙이고 사는 이 사회에서 그들이 망명을 떠나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다.

  1. 마크 포스터. 『뉴미디어의 철학』(민음사, 1994), 219~222쪽. [본문으로]
  2. 마크 포스터. 같은 책, 140쪽. [본문으로]
  3. 촛불집회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인터넷 동호회 82cook의 김수진은 이렇게 얘기한다. “요리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어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회원들의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요리에서 삶의 지혜, 주부들의 너무나 큰 관심사인 시댁 문제, 패션, 자식교육 등으로 옮겨갔고, 급기야는 그 관심사가 확대되면서 삶의 거의 모든 분야를 접할 수 있는 커다란 커뮤니티가 되었다.”(김수진. 「여성들이 뿔났다」. 『창작과 비평』 2008년 가을호. 102쪽). [본문으로]
  4. “그동안 나라 돌아가는 것에 무관심했던 점에 대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개인주의자였던 내가 ‘우리’라는 개념을 마음속에 품게 됐으며, ‘우리’나라에서 살아갈 후손들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하게 박혔다.”(김수진. 앞의 글. 107쪽) [본문으로]
  5. “웹에서 오바마 강세현상에 대해 미국 네티즌들은 오바마와 마니아(mania)의 합성어인‘오바마니아’, 버락(Barack) 오바마와 민주주의(democracy)를 합친 Barackacy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지지할 정도였다.”(송경재․민희. 「미국 유튜브 정치(YouTube Politics)의 시민참여: 한국적 함의를 중심으로」. 『정보화정책』 2008년 여름호. 51쪽). [본문으로]
  6. 송경재․민희. 앞의 논문. 50쪽. [본문으로]
  7. 이호영․정은희. 「블로그를 중심으로 본 디지털 콘텐츠의 사회적 확산」. 『KISDI 이슈리포트』. 17쪽. [본문으로]
  8. http://actionbasecamp.net/ [본문으로]
  9. 나명수. “이것이 아고라다”. 『창작과 비평』 2008년 가을호. 94쪽. [본문으로]
  10. 앞의 웹사이트. [본문으로]
  11.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박미애 옮김. 『전체주의의 기원1』(한길사, 2006), 192~201쪽. [본문으로]
  12.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본래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사전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diaspora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돌베개, 2006), 13쪽). [본문으로]
  13. 양적인 측면에서는 네이버가 전체 57.6%의 블로그를 유치하고 있으며 게시물(포스트)의 경우도 59.4%를 차지함으로써 전체 블로그 시장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이호영․정은희, 앞의 논문, 15쪽) [본문으로]
  14. 김헌식. 『포털 매트릭스: 포털 제국과 문화의 위기』(로크미디어, 2008). 27쪽. [본문으로]
  15. 이호영․정은희. 앞의 논문, 20~24쪽 [본문으로]
  16. “그것들은 공중을 시청자로서 자신의 궤도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공중으로부터 ‘성숙’의 거리, 즉 말하고 반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대중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표면상으로만 공론장이다. 게다가 대중매체가 그 소비자에게 보증하는 사적 영역의 고결함도 역시 환상이다.…공중은 비공공적으로 논의하는 소수 전문가들과 공공적으로 수용하는 소비대중으로 분열된다.”(하버마스. 한승완 옮김. 공론장의 구조변동](나남출판, 2001), 280~28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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