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역사를 정리한 알랭 로랑은 자유주의의 개인이 “분리할 수 없고 서로 환원되지 않으며 실제로 홀로 느끼고 행동하며 생각하는 인간”, “독립을 추구하는 자율적 존재로 만드는 내면적 특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얘기한다. 이런 고유한 존재이기에 개인은 “외부의 강제 없이 자신의 고유한 삶의 주체가 되고, 선택하지 않은 집단의 강요 없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창조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각주:1]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고유함을 실현하는 존재라니 개인은 참으로 중요한 존재이다. 허나 한국사회에서 이런 개인/주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국가나 자본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내면성을 사회에 실현할 수 있는 존재, 얼마 전에 그런 사람을 책에서 보기는 했다.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비평, 2010)를 읽으니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그런 개인에 가까운 듯하다.[각주:2]
이처럼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주체를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근대적 개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런 엄격한 조건(?)을 부각시키려고 등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강력한 집단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자율적인 개인의 중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다. 개인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사회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박노자의 얘기가 우리 사회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박노자는 민주적이며 개인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여러 계급과 계층들의 이해관계가 자유롭게 표현되며 자율적으로 조절될 수 있는 시민사회”를 구성해야 하고 이를 위해 국경을 초월해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각주:3]
그러면서 박노자는 그동안 한국사회의 지식인이나 운동이 개인주의에 “애매하고 불철저한 관심과 두려움”을 가졌다고 비판한다.[각주:4]


자율적인 개인과 그들의 연대에 관한 얘기가 한편으로 희망을 심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늘리기도 한다. 세계화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논리는 홀로 떨어지거나 남겨지는 것을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고유함과 차이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고립되는 것도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애매하고 철저하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각 개인의 경험과 우리의 근대사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 삶과 역사에 대한 분석 없이 개인에 대한 환상과 신화만을 강조하는 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에 대한 기대치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성찰적 근대(reflexive modernity)를 주장하면서 울리히 벡은 개인화가 전통적인 의무를 피하거나 극복하고 새로운 형태의 행동과 공존형식, 자유를 추구할 기회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이 개인화는 “에로틱하며 성적인 욕구를 그대로 즐길 뿐만 아니라 삶을 먼 미래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즐길 것을, 또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로부터 시작해 ‘즐김의 문화’를 개발하고 세련화시킬 수 있는 자유를 지향”하고 “자기 자신의 욕구를 권리로 변형시켜 제도적 규범과 의무에 저항할 수 있는 자유, ‘외부’의 간섭에 맞서 자기 자신의 삶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말 그대로 또 비유적 의미에서) 삶에 ‘삶 나름의 공간’을 제공하고 이러한 사적 공간이 위협받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사회적․정치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겨냥”한다.[각주:5]


하지만 이런 희망적인 전망도 우리사회에서는 뭔가 어정쩡한 상태로 드러나고 있다. “부모에게 상처 주는 일을 차마 못하는 ‘착한 심성’을 가졌다는 것, 그렇게 용기있게 사고를 쳐 본 경험이 없다는 것, 여전히 여자들에게 약간의 정절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요구되는 봉건 사회라는 것, 여기에 미래가 너무 불투명하고 불안한 것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집 마련이 힘들고, 특히 그간 유지해온 생활수준을 대폭 낮추어야 하는데 그것도 행동을 결정하는데 암암리에 크게 작용한다.…분명한 것은 근대화/개인주의화/합리화가 진행되던 한국사회가 21세기에 들어서서 개인주의도 집단주의도 아닌 아주 이상한 어떤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각주:6]
이것이 우리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건 사실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 그리고 그들간의 촘촘한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사회변화는 분명 희망적이다. 다만 우리는 이런 개인이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경험한 사회에서, 아직도 그 잔재를 털어버리지 못한 사회에서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외부의 강제 없이도 ‘자기 삶’의 주체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까?

 


식민성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의도적으로 식민성을 다루지 않는다. 개화기의 지식인들이 보여줬듯이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지만 그 자유의 속내는 문명사회에 대한 동경과 사회진화론, 제국주의 미화, 민중에 대한 불신이다.[각주:7] 그들에게 개인은 ‘강한 타자’이기에, 그런 타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은 ‘태생적으로’ 개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불황의 문제도, 도산하거나 실업하는 것은 각 개인의 책임이니까 사회적인 대처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고 자유주의를 “결코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존하려는 인간의 치열한 철학이나 세계관”으로 생각한다.[각주:8] 이러니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식민성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억울하면 너도 강해져라, 강하면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의 개인주의이다.


이제 세계화의 물결은 더 이상 타자를 동경할 필요가 없는 시대, 힘과 돈으로 치장하면 타자로 살 수 있는 시대를 불러왔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건 강한 타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기꺼이 희생할 약한 내부인들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도 공동체를 얘기하고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거짓 개념을 만들기도 한다. 이 거짓 개념은 “자유주의를 통한 개인의 자아실현과 공동체주의를 통한 공동체의 재창조와 발전”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공동체만이 아니라 “자연공동체와 역사공동체”로 확장되려 하고 심지어 식민주의의 주인공이 되려 한다.[각주:9]
이 괴물에게 식민성은 빨리 버려야 할 부끄러운 약자의 과거이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기득권층에 속하고 역사를 자기 식대로 해석하려 든다. 억압적인 권력과 결탁해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 왔기에 그들은 식민성을 인정하는 순간 본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 식민성은 반드시 숨겨야 하는 기록이다.


식민성을 은폐하지는 않더라도 그 의미를 낮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최장집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공익을 위해 참여하는 ‘적극적 시민’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 “내면적 자아의 공허함, 내면적 정신세계의 황폐화”를 문제삼는다. 한국의 시민들은 “스스로의 가치와 내면의 정신세계를 갖지 못하고, 바깥에 존재하는 가치와 기준에 의해 그리고 여론의 헤게모니적인 힘에 의해 휩쓸리고 동원”되기 쉽다.[각주:10]
내면적 자아가 없어 외부의 환경에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히 그에게는 개인보다 제도와 대의기구를 통한 사회변화가 중요하다.


그런데 왜 내면적 자아가 공허하고 황폐해졌을까? 그의 분석처럼 반공이데올로기와 협소한 이념적 대표체계 탓일까? 하지만 원인은 조금 더 멀리 있다. 일제 식민권력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억압했다. 식민권력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소화되지 못한 외래사상으로 배격하려 했고 이를 위해 공동체주의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각주:11]
식민권력은 “식민지의 주민들을 통치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 동시에 식민지적 질서 속에서 각 개인들을 스스로 그것을 유지, 재생산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려고 시도하였다.”[각주:12]


한국사회의 식민성은 단지 의식적인 차원에서 강요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식민성은 일본의 이에를 본 딴 가부장제도, 병영같은 학교와 기업만이 아니라 군대와 경찰이라는 폭력기구를 통해 실현되었다. 이런 가공할 폭력은 강자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을 내면화하고 그 굴욕감을 약자간의 폭력으로 해소시켰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았기에 내면은 황폐해지고 개인은 외부의 가치와 기준에 휩쓸리기 쉽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식민성이 유지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프란츠 파농은 알제리를 분석하면서 식민권력의 폭력으로 인한 수치심과 공포이 원주민들의 자아를 붕괴시켰다고 얘기한다. “흑인은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 흑인의 목적은 (백인으로 가장한) ‘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타자만이 그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13]
이렇게 보면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에서 근대적 개인의 출현은 불가능하다. 식민권력과 결탁해 승승장구해온 기득권층, 타자를 닮으려 애쓰는 지식인들 제외하면 말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이름으로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출현을 가로막아 왔다면, 최근에는 자율적인 개인의 출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각자의 고유함과 독특성을 공통성 또는 코뮨으로 녹여내려는 흐름이, 자율주의나 코뮨주의를 실천하는 흐름이 한국에서도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에 맞서는 다중에 관한 논의들은 “개인성이 단순히 집단적인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 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인정되고 진실로 해방되는 커뮤널한 생활양식”을 추구한다.[각주:14]
자율주의는 개인과 집단성을 결합한 독특한 양식의 출현에, 내부의 차이를 서로 소통하고 함께 행동하면서 공통된 것(the common)을 ‘생산’하는 다중의 출현에 기대를 건다. 그리고 그런 다중의 저항이 제국의 주권까지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것이라 예상한다.


허나 그런 고유함을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당해온 사람들은 그 고유함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학교를 그만두고 주유소나 편의점에서 알바를 뛰며 생활의 달인이 되어가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자율성은 긍정의 힘으로만 작용할까? 생필품을 구할 수 없어 가게나 공공시설을 터는 사람들에게, 4대강 살리기 때문에 농지를 잃게 된 농민들에게 노동거부는 어떤 의미일까? “‘~이(가) 없는’ 사람들―고용이 없고, 주소지가 없고, 주택이 없는 사람들― 모두는 실제로 부분적으로만 배제되어 있”고 “실제로 그들이 사회적․삶정치적 생산의 회로들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네그리와 하트의 얘기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까?[각주:15]
사회적 안전망 없이 노골적인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도 차이를 서로 소통하고 함께 행동하면서 공통된 것(the common)을 ‘생산’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성은 불현듯 찾아온다. 허나 그 가능성의 싹이 자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땅에 씨앗을 심고 똑같은 조건을 마련해도 빨리 싹을 틔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햇빛이 비치는 각도와 양, 땅의 질과 수분처럼 아주 미세한 차이들이 큰 차이를 만든다. 씨앗의 고유함도 있지만 이런 환경도 그 고유함에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개개인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해서 그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네그리와 하트가 구상하는 권력의 양면성과 다중의 네트워크는 다분히 당위적이다. 물론 ‘~되기’라는 능동성은 당위를 현실로 바꿀 잠재성의 실현을 전제한다. 하지만 저항할 수 있다고 해서, 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저항하거나 네트워크가 구성되지는 않는다. 저항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라는 물음은 현실에서 조금 더 깊은 차원의 분석을 요구한다. 우리사회에서도 소수자운동의 가능성이 얘기되고 있지만 흑인여성도 여성인가라는 물음처럼 모든 소수자가 똑같은 소수자는 아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학교를 떠났지만 대안학교를 다니는 청소년과 거리에서 생활하는 청소년의 처지가 같을 수는 없다. 이들이 서로의 삶을 낯설지 않게 보지 않는 공통의 장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현재 한국사회의 상황을 보면 그런 장이 만들어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코뮨주의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문이 든다. 코뮨주의 선언은 “가장 고독한 순간에도 우리는 고독한 채로 무리를 이룬다. 우리에게는 ‘고독’조차 ‘고독들’이다. 모든 것들이 더불어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더불어 있는 것만이 실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라 선언한다. 타자들을 억압하는 공동체로 변질되었던 과거의 코뮨을 반성하면서 이 선언문은 코뮨주의를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언제든 도달할 수 있고 언제든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 주장한다.[각주:16]


그런데 대안학교의 학생은 “대안학교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으로 자율성을 꼽는다. 학생들은 “자율성은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성실하고 진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약이 될 수 있다”며 자신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 “아이들이 알아듣고, 느낄 수 있는 언어”로 조금 더 사랑해줄 것을 요구한다. 또 “대안학교에서는 너무 ‘좋은 것, 건전한 것’만 가르치고 경험시킨다”고 딴지를 걸면서 그 역시 일종의 세뇌가 아닌지를 묻는다.[각주:17]
 놀기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고 성품도 좋은 아이로 키우고 싶어하는 ‘부모들의 귀족학교’로 변질되어버린 대안학교는 더 이상 기성학교에 대한 대안이 아니다. 대안공동체의 상황은 이와 다를까?


매우 거칠지만 북친의 지적 역시 귀담아 들을 만하다. “아무런 분류도 등급도 조정도 시도하지 않는 접근법은 우리의 역사관을 통찰력있는 논리성보다는 조야한 절충주의로 축소시키거나, 의미와 보편성보다는 차이와 독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상식적인 개개인이 자유 극대화를 지향하는 사회 운동을 재구성하도록 도와주기보다는 심리적인 안락의자로 숨어들도록 한다.”[각주:18]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건 차이나 고독보다 약자들의 삶이 자연스레 서로 엮일 수 있는 생활의 망일지 모른다. 일본에서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대안공간을 운영하는 마쓰모토 하지메는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개인 차원에서 아이디어를 내서 생활하는 것에 비해 가게를 통해 마을에서 공동체를 조직하면 훨씬 다양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세상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우선 어중이떠중이가 모이면 공공의 재산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점, 신명이라도 나면 공공시설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두자. 우리 가난뱅이, 얼간이, 오합지졸은 이제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결탁해서 무언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동네를 둘러보면 여기저기 가난뱅이 천지인데도 왠지 한 사람 한 사람 고독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시시껄렁하게 뼛골 빼먹는 직장에서 일만 죽도록 하거나 중류 계급인 척하면서 번화한 중심가로 놀러 가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뱅이 제군! 이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자.”[각주:19]


다행히도 우리 사회에서도 바보짓을 그만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 고병권은 2008년의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에서도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서로 융합한 일종의 ‘질적 다양체’”가 등장했다고 평가한다. “아주 다른 커뮤니티들이 자신들의 색깔을 살린 채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국가와 개인의 이분법이 아니라, 비국가적이지만 공통적인 ‘공공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 수십 년간 한국 사회의 방향을 크게 좌우할 성취”
라는 지적[각주:20]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허나 그 성취는 여전히 가능성일 뿐이고 그 공공성의 실현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다. 조지 오웰은 너무나 냉정한 언어로 그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차별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차별의 산물이다. 나의 모든 관념은 (선악에 대한, 유쾌와 불쾌에 대한, 경박과 경건에 대한, 미추에 대한) 어쩔 수 없이 ‘중산층’의 관념이다. 책과 옷과 음식에 대한 나의 취향, 명예에 대한 나의 감각, 나의 염치, 나의 식사예절, 나의 어투, 나의 억양, 심지어 나의 독특한 몸동작도 전부 특정한 훈육의 산물이며, 사회 위계의 윗부분에 있는 특정한 지위의 산물이다. 그런 사실을 이해할 때, 나는 프롤레타리아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나를 철저히 변화시켜야 하며, 결국엔 같은 사람인 줄 모를 정도로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현실을 개선하는 것으로도, 더 어리석은 형태의 속물근성을 억제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삶에 대한 상류층적, 중산층적 태도를 완전히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번거롭게 자신의 습성과 ‘이데올로기’를 바꾸지 않고도 계급차별을 철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각주:21]


덧붙여 말하자면 대안을 추구하는 여러 운동들은 한국의 사회운동에 내재된 문제점들, 예를 들면 학벌이나 가부장성, 엘리트주의를 극복했을까? 즉 80년대 운동권 문화라 불리는 “위계질서나 보이지 않는 권위에 대한 순응성, 조직에 대한 충성도, 조직에 가족주의적인 가치관의 적용”은 이런 운동들 속에서 사라졌을까?[각주:22]
쉽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사실 자유주의, 자율주의, 코뮨주의를 막론하고 그 모두가 주목하지 않는 건 생태주의이다.[각주:23] 그들의 공통성은 인간들의 공통성으로 제한되고, 세계체제라는 개념 역시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개념이다. 세계체제가 생태계의 위기를 다루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위기의 해법은 다분히 인간중심적이다. 생태주의에 대한 이런 무관심은 “합성 물질이든, 단순한 것이든 아니면 기계적이든 간에 이것들이 현존하는 생명체와 생태적인 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연 세계의 파괴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위험한 사고방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각주:24]


허나 생태주의가 정녕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이성과 감성 모두에서 전일성(全一性)을 회복하도록 돕기 때문이다.[각주:25]
전일성을 회복하지 못한 차이는 서로를 보살피는 것이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차이와 독특성을 유지하는, 심지어 차이들의 어떠한 종속도 가져오지 않는 네트워크가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절된 섬이라면 어떤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을까?


함석헌은 고립된 개인이란 거짓말이고 인간의 사회조직은 “하나 하나의 개체들이 보다 높은 하나를 드러내는 방법”이라 주장한다.[각주:26]
그러므로 “각 개체가 다 전체를 가능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체의 발전은 개체의 발전을 통해서만 되게 되어 있다. 민족적인 본성은 개인의 자아 속에서만 볼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각주:27] 개인의 타락이나 제도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전체의 통일이 깨어질 때 불안과 공포가 우리의 삶을 덮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전체의 통일과 균형을 회복하는 일다. 그러려면 각자가 서로의 삶에 의존해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자기 품을 내어주는 게 필요하다. 차이와 긍정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베풀고 내어주고 자기를 버려야 비로소 전체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각주:28]


이것은 관념적인 얘기가 아니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은 이를 생물학적으로 증명한다. “진화의 원동력으로서 공생이 지니는 힘은 개체성을 확고하고 안정된 신성한 그 무엇으로 생각하는 현재의 통념을 가차없이 깨부순다. 특히 인간은 단독자가 아니라 복합체이다. 우리들 개개인은 여러 박테리아와 균류, 회충, 진드기 등 우리 피부와 몸속에서 살고 있는 생물에게 훌륭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각주:29]
보이지 않고 인정하지 않지만 이미 우리는 그런 복합체 속에서 생활하고 있고, 우리 스스로가 그 복합체를 파괴하고 있다.


영화 <아바타>의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네가 보여(I see you)”라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을까?


  1. 알랭 로랑 지음, 김용민 옮김, 『개인주의의 역사』, 한길사, 2001, 10~12쪽. [본문으로]
  2. “언제나 그렇듯, 어떤 유형의 사회에서든, 개인성이란 많은 이의 부러움을 사며, 엄중한 보호와 경호를 받는 소수만의 특권이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대중에서 벗어나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얼굴이 널리 알려지고, 유명해진다는 뜻이다.”(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2009, 64쪽) [본문으로]
  3. 박노자, 『나를 배반한 역사』, 인물과 사상사, 2003, 55쪽. [본문으로]
  4. 같은 책, 82쪽. [본문으로]
  5. 울리히 벡 지음, 정일준 옮김,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새물결, 2000, 110쪽. [본문으로]
  6. 조한혜정, 『다시, 마을이다: 위험사회에서 살아남기』, 또하나의문화, 2007, 44쪽. [본문으로]
  7. 이나미,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 2001. [본문으로]
  8. 장상환, “공병호: 신자유주의보다 더한 보수주의 찬미론자”, 최종욱 외, 『보수주의자들』, 삼인, 1997, 216쪽. [본문으로]
  9. 박세일, 『대한민국 선진화전략』, 21세기북스, 2006, 159~160쪽. [본문으로]
  10.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한국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후마니타스, 2002, 226쪽. [본문으로]
  11. 박세훈, 『식민국가와 지역공동체: 1930년대 경성부의 도시사회정책 연구』, 한국학술정보(주), 2006, 99~105쪽. [본문으로]
  12. 김진균․정근식, “서장: 식민지체제와 근대적 규율”, 김진균․정근식 편저,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1997, 24쪽. [본문으로]
  13.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 191쪽. 그렇다고 파농이 자아를 찾으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아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자아를 재포착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 자아를 음미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또한 자유의 지속적인 긴장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 세계를 위한 이상적인 존재 조건을 창출해낼 수가 있다. 우월감? 열등감?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그런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같은 책, 291쪽) [본문으로]
  14. 안또니오 네그리․펠릭스 가따리 지음, 조정환 편역, 『미래로 돌아가다』, 갈무리, 2000, 103쪽. [본문으로]
  15.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정남영·서창현 옮김, 『다중』, 세종서적, 2008, 168쪽. [본문으로]
  16. 고병권․이진경 외 지음, 『코뮨주의 선언: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 교양인, 2007, 5~29쪽. [본문으로]
  17. “기획: 아이들, 대안교육을 까다”, 《민들레》67권, 2010, 6~45쪽. [본문으로]
  18. 머레이 북친, 문순홍 옮김, 『사회생태론의 철학』, 솔, 1997, 211~212쪽. [본문으로]
  19.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가난뱅이의 역습』, 이루, 2009, 102쪽. [본문으로]
  20. 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2009, 107쪽. [본문으로]
  21.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위건부두로 가는 길』, 한겨레출판, 2010, 217~218쪽. [본문으로]
  22. 권인숙, 『대한민국은 군대다』, 청년사, 2005, 205쪽. [본문으로]
  23. 변화의 실마리는 보인다. 이진경은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그 경계를 근본에서부터 변환”하고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권력에 분노하면서도 인간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착취하고 쉽사리 버리거나 파괴하는데 아무런 불편함도, 부당함도 느끼지 않는 우리의 감각을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이나 사물에 대한 관계의 변화 없이 코뮨주의를 적절하게 구성했다고 말해선 안 된다.”(이진경, “코뮨주의와 휴머니즘: 휴머니즘 이후의 코뮨주의”, 『코뮨주의 선언』, 226쪽) [본문으로]
  24. 머레이 북친, 『사회생태론의 철학』, 110쪽. [본문으로]
  25. “개인이 하루에 할 수 있는 많은 일의 하나로(푸리에의 조건을 따른다면) 유기 농업은 우리의 일상 생활이 갖는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성장과 분해에 대한 자연적인 감성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며, 우리를 자연의 리듬에 순응시킨다. 따라서 오직 하나의 보기일 뿐이나, 유기 농업은 생태적인 사회에서는 단순한 영양 문제의 해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문화적, 생물학적인 자각이 있는 존재로서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있다.”(머레이 북친 지음, 박홍규 옮김,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8, 214쪽). [본문으로]
  26. 함석헌, 『들사람 얼』, 한길사, 2001, 34쪽. [본문으로]
  27. 같은 책, 42쪽. [본문으로]
  28. “밖에서 사람을 만나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꼭 강가로 난 방축 길을 걸어서 돌아옵니다. 혼자 걸어오면서 '이 못난 나를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또 '오늘 내가 허튼소리를 많이 했구나. 오만도 아니고 이건 뭐 망언에 지나지 않는 얘기를 했구나.'하고 반성도 합니다. 문득 발 밑의 풀들을 보게 되지요. 사람들에게 밝혀서 구멍이 나고 흙이 묻어 있건만 그 풀들은 대지에 뿌리내리고 밤낮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해와 달을 맞이한단 말이에요. 그 길가의 모든 잡초들이내 스승이요 벗이 되는 순간이죠. 나 자신은 건전하게 대지 위에 뿌리박고 있지 못하면서 그런 얘기들을 했다는 생각에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장일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시골생활, 2010) [본문으로]
  29. 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 지음, 황현숙 옮김, 『생명이란 무엇인가?』, 지호, 1999, 34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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