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일을 하며 지내온 시간이 십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풀뿌리운동을 보며 희망을 얻었고 그 운동에 관련되어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어느 순간부터 풀뿌리운동을 사랑하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때론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환상을 낳기도 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방의 모습을 규정하고 그렇게 규정된 모습을 사랑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괜한 질투와 타박을 하기도 하구요. 이 글은 풀뿌리운동에 대한 저의 사랑고백이자 당신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사랑하던 그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담은 고백입니다. 제가 만든 이미지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괜히 오해하고 있는 건지,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1. 우리는 왜 이 운동을 시작했을까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살아남기도, 살아가기도 힘든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관계망은 끊어지고 마을이나 공동체도 해체되고, 노동강도나 생활의 속도는 점점 더 강해지고 빨라져서 운동을 하기에 좋지 않은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운동의 목적은 다양할 수 있지만 주민 주체의 역량을 강화시켜 시민자치에 이르도록 하는 것, 이것이 풀뿌리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일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목표는 어떻게 실현되고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통해 실현되고 있나요? 이런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재활용가게, 나눔장터, 동네카페, 도서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풀뿌리운동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솔솔 흘러나옵니다.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습니다. 눈에 띄는 사업에 단체들이 몰리고 때로는 단체들이 서로 경쟁하며 기본적인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도 들립니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성장해온 과정이나 그 힘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의 부활 이후 행정이 풀뿌리운동을 중요한 파트너로 여기게 된 건 그 과정과 힘 때문입니다. 주민들의 지지가 높아지고 행정의 파트너로 인정받게 된 건 분명한 성과입니다. 관이 맡는 것보다 풀뿌리단체가 맡는 게 주민들에게 더 좋고 올바르다는 인식도 확산되었습니다. 이건 그동안의 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변화였습니다.

 

그런데 민관협력이나 거버넌스가 원래의 취지와 달리 ‘관주도’라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민관협력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관이 기획하거나 공모하는 사업을 단체가 지원해서 진행하는 식이고, 대충 기획된 것을 제대로 집행하느라 너무 힘이 든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이런 식이라면 당장 사업을 때려치고 싶지만 우리가 아니면 안 될 사업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때로는 성장이 위기를 불러온다고 했던가요. 어느 순간 풀뿌리 운동은 체계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제는 일방적으로 판을 깨고 나오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계속 들어가기에는 뭔가 곤란한, 모호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노동자들에게 최후의 무기가 파업이라면 풀뿌리운동에게 최후의 무기는 무엇일까요? 어떤 힘이 있으면 이 모호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에 대한 고민이 ‘지금’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완전히 무장해제되어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정신승리법으로 버티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물어볼까요. 관이 해야 할 일을 대행하는 것이 풀뿌리운동이나 풀뿌리단체의 역할일까요? 물론 주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칠 사업들을 제대로 실행하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업들에 모두 ‘운동’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운동은 전체적인 사회발전의 목표를 주민들과 함께 정하고 그 목표에 비춰 사업을 평가하는 과정인데, 사업에 대한 ‘평가의 권한’은 풀뿌리단체들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외려 관이 그런 평가의 권한을 가지고 사업에 개입합니다. 사업을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이 사업을 하는 것인가’, ‘사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우리는 주민들과 어떻게 논의하고 그 사업에 개입하고 있나’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면, 많은 사업들은 운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핑계일 뿐입니다. 주민의 삶과 결정을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민 스스로가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촉진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풀뿌리운동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로 우리가 어떻게 많은 일들에 일일이 다 관심을 가질 수 있냐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인정하고 싶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렇기에 사업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역단체들이 지원한 사업과 관련된 심사를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난감한 경우는 단체들의 고유활동을 지원사업으로 신청할 때나 그 단체의 설립목적과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행사를, 소위 ‘뜨는 행사’를 사업으로 만들어 지원할 때입니다. 비슷한 유형의 사업이 동시에 신청되거나 그런 사업이 반복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제 그런 관행을 스스로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는 과정이야말로 운동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순간 단체들도 쉬운 길만을 선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단체들의 사업이 비슷해지고 있고, 지역특성을 반영한 활동들, 아니 유기체처럼 변화하는 지역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반영하는 활동들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공무원들이 바보는 아닙니다. 자원이 제한되고 부족한 시민사회의 상황을 알고 있기에 더욱더 거만하게 나옵니다. 때로는 일부러 단체들끼리 경쟁을 붙이고 자기 말을 잘 듣는 단체들을 밀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운동의 목적은 자꾸 사라지고 사업만 남게 됩니다. 행정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감시하고 비판하는 단체의 목적보다 앞서 나가고 운동은 뒷전이 됩니다.

 

따라서 국가나 시장에 끌려가지 말고 우리의 자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기획서를 작성하고 사업에 공모해서 자원을 얻으려 말고 지역의 주민들 속에서 자원을 발굴하는 과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눈먼 돈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어찌 눈먼 돈일까요. 주민들의 세금, 시민들의 피땀입니다. 운동에 필요한 자원을 모으는 과정이 운동의 방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저는 풀뿌리운동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배움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소비자생협 진영에서는 아주 오랜 논쟁이 있습니다. 협동조합의 기본이 사업이냐 운동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고, 이제는 사업 쪽의 힘이 훨씬 강해진 것 같습니다(물론 둘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인데요). 풀뿌리운동이 이런 흐름을 따라가야 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풀뿌리운동이 시민사회운동의 전부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제를 풀뿌리운동이 떠안을 수도 없습니다. 각각의 운동은 제각기 자기 목표를 가질 겁니다. 다만 현재 풀뿌리운동의 목표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주민자치를 실현하고 마을과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 지역사회 복지체계를 마련하고 주민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것? 하지만 마을과 공동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이려면, 관계와 사회에 기반한 복지가 살아나려면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이 시민사회운동과의 강한 고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요즘은 어디에 가나 박원순 시장 얘기를 듣습니다. 박원순 시장과 같은 사람이 앞으로 더 나올 수 있을까요? 운동이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활동가, 뛰어난 활동가도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겁니다. 솔직히 묻겠습니다. 단체의 활동가 충원구조는 마련되어 있습니까? 과거에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이런저런 시민사회운동의 활동가로 충원되었지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경쟁적인 교육체계, 대학 중심, 학벌 중심의 교육체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제 그런 충원구조는 사라졌습니다. 10년 뒤, 20년 뒤에는 누가 어떤 과정을 밟아 운동에 참여할까요? 아이디어나 기획력이 뛰어나고 사회정의감을 가진 대학생들도 아마 단체가 아니라 행정조직을 택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실행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활동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목적을 공유하더라도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는 ‘세대단절’의 문제가 풀뿌리운동 내에서도 보입니다. 이런 단절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풀뿌리운동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고민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 고민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거의 못 봤습니다. 10년 정도 더 지나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생활리듬과 가치관을 가진 이질적인 존재가 한 단체 안에서 (그것도 운이 좋아야)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될 겁니다.

 

물론 풀뿌리운동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전업주부들도 활동가로 일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지요. 하지만 사업을 중심에 둘 경우 활동가들은 사업단위로 결합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업의 전망’밖에 주지 못하면서 ‘운동의 헌신’을 요구하는 모순은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합니다. 활동의 폭이 넓어질수록 대표나 소수의 핵심활동가들이 전체적인 의사결정과정을 쥐고 흔든다는 비판도 들립니다. 사람을 성장시키고 역량을 강화시키는 풀뿌리운동의 ‘대의(大義)’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건 풀뿌리운동의 목적으로 본다면 심각한 위기입니다.

 

 


2. 10년, 20년 뒤에 풀뿌리운동은 어떻게 될까요?


지금 서울시는 마을공동체사업을 한창 추진하고 있고 언론도 이 사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기대만큼 잡음도 생기고 추진과정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에 관한 성명서는 풀뿌리단체들이 아니라 진보신당 서울시당에서 나왔습니다. 진보신당의 성명서와 김상철 처장의 발표문을 읽으며 한편으로 참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좀 씁쓸해졌습니다. 마을은 안 보이고 사업만 보인다는 지적, 사업추진의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 추진과정의 폐쇄성과 관 주도에 대한 비판 등은 특별한 분석이나 논리가 아니었고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지속적으로 관에 문제제기해온 바입니다. 그런데 왜 정작 풀뿌리운동은 이런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을까요?

 

박원순 시장이 되고 난 뒤에 서울시가 달라졌다는 얘기가 많이 들립니다. 시장 한 사람 바뀌었을 뿐인데, 라는 말을 활동가들에게서도 듣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지요. 무상급식에 반값등록금에 저소득층 지원에, 공공임대주택 확충,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중증장애인 활동보조 자기부담금 폐지, 중소상인을 위한 대형마트나 SSM의 영업규제 등 취임한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상황이야말로 풀뿌리운동의 위기상황입니다. 지역에서 몇 년 동안 빡세게 일할 필요가 뭐 있어, 시장 한 명, 구청장 한 명 바뀌면 이렇게 분위기가 확 바뀌는데, 라는 생각을 시민들이, 심지어 활동가들마저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풀뿌리운동의 위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위기일까요?

 

풀뿌리운동이 바꾸고자 한 건 시장이라는 직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풀뿌리운동은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구조’를 바꾸려고 한 거죠. 그렇다면 지금 서울시의 의사결정구조, 정책결정구조는 어떻게 바뀌고 있나요? 몇몇 시민사회단체 인물이 행정체계나 위원회에 들어가는 건 이전 정부 때도 자주 있던 일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시장이 현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목소리를 듣고 챙기는 것이 한편으론 좋아 보이지만, 달리 보면 지방자치의 근본정신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시장님의 트위터에 글을 남겨라, 이건 구조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사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경계해온 것은 ‘해결사’가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지방자치법에 따르면 서울시장은 자신의 권한에 속하는 사무 중 일부를 자치구에 위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시의 거버넌스 구조가 실질적으로 바뀌고 있나요? 물론 박원순 시장 개인의 활동을 보면 눈물겹기도 합니다. ‘박원순 프로세스’라는 말이 나올만큼 소통과 청책(聽策), 협치가 강조되고 요일별로 시장의 일정이 짜지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시장의 변화가 일선 공무원들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공무원들이 생각하는 제3섹터, 주민단체의 범주가 풀뿌리단체로 이해되는지도 의문입니다. 기존의 관변단체에 대한 지원과 묵인이 바뀌고 있는지도 살펴야 하고, 제 3섹터를 양성한다는 목적 하에 허투루 사업이 진행되는 건 아닌지 꼼꼼하게 감시해야 합니다.

 

물론 지방자치제 하에서 자치구의 변화가 중요하지 광역단체의 변화가 뭐 그리 중요한가, 풀뿌리운동이라면 자치구에 집중해야 하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자치구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지방자치제도와 행정체계에서는 자치구가 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서울시의 권한도 중앙정부의 권한과 맞물려 제한을 받지만 자치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사업기획은 중앙정부와 광역단위에서 꼬리표가 매겨진 뒤에 자치단체로 이관됩니다. 예산은 기초자치단체에서 집행하지만 기획과 평가의 권한은 여전히 중앙정부나 광역자치단체가 가지고 있습니다. 공무원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책임을 회피합니다. 상급기관에서 명확한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다며, 또는 예산이 없다며 시민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구조의 변화 없이 운동의 성공을 얘기할 수는 없고, 지금은 감시와 비판마저 사라지고 있기에 심각한 위기상황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서울광역자활센터의 운영, 교통체계의 개선(버스준공영제), 도시기본계획, 제3섹터영역의 활성화, 세제개편 등 자치구의 경계를 넘어 서울시 차원에서 기획되는 사업들이 많습니다(서울시정개발연구원 홈페이지에 가면 이와 관련된 연구보고서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권을 중심으로 한 통합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광역행정구역 논의로 볼 때 실제로 그렇게 진행될 가능성도 큽니다. 서울 시민들의 생활을 볼 때 삶터와 일터가 분리되고 생활반경이 넓어져서 마을이나 공동체를 거주지 개념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풀뿌리운동은 이런 서울시 차원의 사업, 하지만 자치구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사업들에 대해, 그리고 행정체계와 생활권의 변화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한국 사회의 빠른 변화 속에 풀뿌리운동은 어떤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을까요?

 

저는 풀뿌리운동이 고립된 공동체, 폐쇄된 해방구를 만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려 그런 경계를 없애고 주민과 공동체의 관계를 새로이 구성하는 것이 풀뿌리운동의 역할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서울의 풀뿌리운동이 서울이라는 공간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하라면 저는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와 지방의 ‘내부식민지화’를 얘기할 겁니다. 핵발전소 문제가 계속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데, 서울시는 원전 한기 줄이기 운동을 힘겹게 벌이는 정도이고, 햇빛발전소와 수소연료전지발전소를 공공건물과 학교에 설치한다는 계획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전력 생산량은 전국의 0.28%에 불과한데, 전력 소비량은 전국의 10.9%를 차지합니다). 4대강 사업도 서울시민들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입니다. 직접적인 피해는 없으니까요. 오히려 재벌건설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한 곳이라 서울은 깔때기처럼 그 이윤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서울이 모든 걸 빨아들이는 곳에서 서울 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운동의 목표일까요?

 

더 이상 이런 과제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치구 단위의 행정교섭만으로는 풀리지 않을 수밖에 없고, 그 사업의 기획과 평가에 자체에 개입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개입과정에서 약 1만 6천명에 달하는 서울시의 공무원, 전문화된 관료조직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그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런 경쟁이 불가능하다면 각종 공모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명확한 권한과 충분한 사업기간이 보장되지 않는 사업에 대해서는 집단적인 보이콧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민간단체가 관료조직으로 편입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참여예산제가 활성화된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시에서는 이런 문제가 이미 드러났다고 합니다. 포르투알레그레시의 참여예산제를 연구한 학자 마리옹 그레와 이브 생또메는 시민사회가 자율성을 잃고 국가에 흡수되는 문제를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삼는데, 참여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며 시정부에 의존하게 되는 면, 시민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이 지방정부의 비공식적인 상임 간부가 되거나 결정권자 집단 안에 비공식적으로 흡수되면서 풀뿌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면,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신들의 활력과 논리를 잃어버리고 국가권력의 구성부분이 되는 면을 지적합니다. 참여예산제 안에서 활동가들이 모든 열정을 불태우다보니 단체가 비어버렸다고 합니다. 한국 시민사회도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저는 지역 경험이 많은 사무국장 이상의 활동가들이 서울시를 대상으로 활동을 펼치는 중간지원조직을 구성하고 그곳에서 활동하면 좋겠습니다. 그 활동가들이 기존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른 시민사회운동이나 정당과 연계하는 몫을 맡길 권합니다. 그 분들의 연륜과 활동경험, 인적 네트워크라면 분명히 좋은 효과를 발휘하고, 이는 자치구에서 활동하는 단체활동과 연계될 수 있습니다. 제도정치인이 되는 것 말고 별다른 출구가 없는 풀뿌리운동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서울시와 서울시민의 일터와 삶터에 관한 현황을 정리한 구체적인 자료도 필요합니다. 자치구를 넘나들며 자신의 생활권과 동선에 맞춰 서울시민들이 스스로 뭔가를 의식하고 조직할 수 있도록 이를 지원할 중간지원조직이 필요합니다. 이 중간지원조직이 주민들의 실제 생활동선과 지역사회의 변화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아울러 중간지원조직이 서울시가 아닌 서울시에 사는 시민들의 10년, 20년 장기비전을 구상하는 역할을 맡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정당의 정책연구소들이 응당 그런 기능을 맡아야 하겠지만 한국 정당정치의 현실을 고려할 때 서울시당이 그런 기능을 맡을 가능성은 당분간 없어 보입니다. 저는 서울의 풀뿌리단체들이 ‘서울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스스로 강구하면 좋겠습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말했듯이 ‘타이타닉 현실주의’에서 벗어나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 빙산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풀뿌리운동의 힘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이라고 믿습니다. 이 고백이 좋은 시작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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