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지기에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무엇을 꿈꿨을까? 제국의 심장부에서 강권을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어떤 활동을 펼쳤을까? 따지고 보면 한국으로 아나키즘이 전파된 경로가 일본이고 일본의 아나키스트들도 한인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활동을 펼쳤기에, 일본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반란의 사상이 제국의 심장부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흥미로운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 작업에서 김명섭의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은 좋은 출발점이 된다.

일본의 한인 아나키즘 운동은 공부를 하러 온 유학생들의 모임에서 그 싹이 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일자리를 구해 찾아온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더욱더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지주제의 확립,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 등은 많은 자작농과 소작농을 도시빈민으로 내몰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 했다. 낯선 땅 일본에서 이들이 겪어야 했던 민족차별이나 계급모순은 이들이 일본 사상단체의 시국 강연회나 노동쟁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인 고토쿠 슈스이나 구즈미 겟손, 오스기 사카에 등은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하면서 한국 유학생이나 노동자들과 적극적으로 연대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연대에 힘입어 도쿄의 유학생과 고학생들은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는 의거단(義擧團), 혈권단(血拳團), 박살단(搏殺團) 등의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리고 오사카 등지의 노동자들은 오스기 사카에의 아나코 생디칼리즘을 따라 노동조합과 공제조합, 협동조합을 만드는 활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김명섭은 ““도쿄 지역의 항일운동이 주로 사상단체를 중심으로 한 이념투쟁으로 전개되었다면, 오사카 등 기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에 의한 노동운동과 주거권 확보 투쟁 등 일상 투쟁과 지역 내 인권운동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각자 자신의 생활영역에서 사상을 실천하고 이념을 구성하는데 집중되었다. 김명섭은 1920년대 후반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을 자본주의․제국주의 전쟁 반대,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비판, 공산주의 비판, 자유연합주의, 순정 아나키즘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으로 설명한다.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다양한 활동은 당시 확산되던 볼셰비즘과 충돌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 점은 한인 아나키스트들도 예외는 아니다. 192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러시아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공산주의 운동이 성장하고 <흑우연맹>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친일단체와 공산주의를 똑같은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런 대립을 거치면서 일본 내 아나키즘 운동은 서서히 쇠락하거나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30년대를 넘어서면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일본무정부공산당>이나 <농촌운동사>같은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단체에서도 활동하기도 했다.

낯선 땅에서 일본 군국주의와 친일 세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모두와 싸워야 했던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삶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들의 삶과 활동은 자기 뿌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외부적인 조건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국내나 만주에서와 달리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이 허무주의와 개인주의를 넘어서 자유연합주의와 상호주의로 나아갈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따라서 비밀결사가 일반적인 활동이었고, 생협이나 주거권 확보 투쟁 역시 노동운동과의 연관성 속에서 가능한 활동이었는데 노동운동이 공산주의로 전환되면서 그 힘은 약화되었다(고순흠의 노동운동과 해운운동이 실패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일본 내 한인아나키스트들은 ‘민족’이라는 관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는 박열의 삶에서 잘 드러난다. 보통 일본의 한인 아나키스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가 박열로 꼽히지만 나는 그보다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에서 더 강한 인상을 받았다.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 밑바닥 계층의 여성이 국적과 신분을

넘어 연대와 사랑의 삶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몸소 증명했기 때문이다. 『가네코 후미코: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산처럼, 2003)을 지은 야마다 쇼지의 말처럼,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는, 후미코의 가난과 고통이 개인적인 원인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발생한 것이며, 따라서 그녀가 지배하는 자에게 품고 있던 반항심이나 자신과 같이 지배를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품고 있던 연대감각”은 다른 이의 모범이 된다. 특히 “후미코가 자기를 철저하게 투시함으로써 비전향 즉 반천황제를 꿰뚫고자 했던 데 비해, 자기 사상의 기저에 민족을 두고 있었던 박열은 그녀만큼 자아를 깊이 있게 탐색하지는 않는다. 제국주의 나라의 국민은 내셔널리즘으로부터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리고 당연하게도 억압받는 식민지 민족의 구성원에게는 개인의 해방보다 민족해방이 우선하는 과제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민족과 개체로서의 자아의 관계를 심도 있게 묻지 않은 것이 박열이 얼마 안 있어 옥중에서 조선민족으로부터 이반하여 천황제에 굴복하고 전향한 내적 원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야마다 쇼지의 지적은 따끔하다(1930년대 일본사회 내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대량 전향 사건은 우리 시대 뉴라이트들의 모습과 관련지어 한번 따져볼 만한 사건이다). 그 지적처럼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그룹 내에서 민족과 국가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아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관한 진지한 탐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감옥에서 쓴 수취인 불명의 편지는 지금 시대에도 다시 읽어봄직하다.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닙니다. 여자도 아닙니다. 인간일 뿐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상의 이유에 기초하여 ‘연약한 성을 지닌’ 여성으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런 전제 위에서 내게 제공되는 모든 은혜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상대를 주인으로 간주하여 시중드는 노예, 상대를 노예로 간주하여 딱하게 여기는 주인, 이 둘 모두를 나는 배척합니다. 개인의 가치와 평등한 권리 위에 선 결속 그것만을, 오로지 그것만을 긍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상호간의 정당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와 타인의 모든 교섭을 그 기초 위에서 구할 것임을 나는 다시금 소리 높여 선언합니다.” 일본이라는 네이션 속에서 반일이라는 민족감정을 품었던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새로운 자아를 구성하는 차원으로 확장되기 어려웠다.

김명섭의 말처럼 일본 지역에서 전개된 아나키스트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 점에서 책 뒤의 부록인 재일 아나키스트운동 관련 인명록은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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