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던 5월 19일, 그 날로 예정된 토론회가 취소되었다. 사실 그 토론회는 우리 권력의 속살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토론회였다. “수상재난 상황에서의 안전확보를 위한 수영교육 활성화 방안 토론회”, 이 얼마나 솔직한 주제인가. 배가 침몰하면 각자 갈고 닦은 수영실력으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게 우리 현실 아닌가.
흥미로운 점은 이 토론회를 주최한 국회의원들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인데도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아마도 실제 차이보다 우리의 바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으로 한국사회가 바뀐 적이 있었나?
통치성에 관한 사토 요시유키의 분석에 공감하지만 노골적인 한국현실을 분석하는 이론틀이 되려면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민들을 함께 나누려 한다.
2. 공고해지는 기득권과 사업으로 변한 안전
(1) 유체이탈화법과 좀비정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공식발표라고 할 박근혜 대통령의 5.19 대국민담화는 참사의 원인은 없고 대책만 나열되는 이상한 담화였다.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 이상 지났건만 참사의 원인은 “선박 심사와 안전운항 지침 등 안전관련 규정들이 원칙대로 지켜지고 감독이 이루어졌다면 이번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원론에 머물렀다. 반면에 대책은 아주 구체적인데 박근혜 정부는 해경을 해체하고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고,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관행과 제도를 바꿔서 정상화하기 위한 개혁작업”을 진행하며,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끼리끼리 문화와 민관유착이라는 비정상의 관행”을 없애고,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끼리끼리 서로 봐주고, 눈감아주는 민간유착의 고리”를 끊고,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관피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책은 규제를 쳐부술 암이자 원수라고 밝혔던 기존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
아울러 대국민담화는 “폐쇄적인 조직문화와 무사안일이라는 문제”를 바꾸기 위해 민간전문가들을 대거 발탁하겠다고 밝혔다. 짧은 담화 중에 전문성, 전문가라는 말이 15회 반복된다. 그런데 안전을 점점 더 전문화시켜서 특정한 민간전문가를 참여시키고 대다수 민간의 참여를 배제하는 것은, ‘민간 전문가’를 과장급 이상의 직위에 배치하겠다는 것은 과거 김영삼 정부 때부터 반복되어온 관료제도의 경쟁 논리를 강화시킨다. 더구나 이는 나오미 클라인(N. Klein)이 정의했던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 즉 “비정상적 상황에서 급박하게 추진되는 영리 추구 정부 모델을 국가의 일상적 기능에도 도입하는 것”, “한마디로 정부를 민영화하겠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이 대국민담화는 안전을 더욱더 전문화시키고 제도화시켜 정부가 참사를 빌미로 시민의 삶을 더욱더 관리하겠다는 발상이고 국가안전처라는 신설부서 역시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지금 선임된 처장 역시 군 출신이다). 사고를 참사로 만든 주범이면서도 책임의 인정 없이 관리대책만 나열한 이 담화는 ‘유체이탈화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국회의원도 그 다음날 이를 비판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특별성명은 한국사회가 박정희 시대로 회귀한 것 같다고 질타한 뒤 “돈이 먼저인 나라에서 사람이 먼저인 나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성명은 규제완화를 비롯한 경제민주화의 후퇴에서 참사의 원인을 찾으며 “가장 안전한 사회는 ‘민주주의’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대책도 부처의 신설이나 전문가 활용보다 “여야는 물론 시민사회까지 함께 참여”해야 하고, 수명이 다한 노후 원전의 가동을 중단시키는 등 가시적인 노력을 먼저 보이라고 주장했다.
이 특별성명은 정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특별성명 역시 묘한 유체이탈화법의 경향을 띤다. 왜냐하면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에서 민주당은 다수당이 아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군소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창 신자유주의와 규제완화가 시행될 때 민주당은 무엇을 했었나? 그리고 문재인 국회의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의 제주해군기지나 부안/경주방폐장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민주주의를 문제삼을 자격은 문재인 의원에게도 부족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국회의원의 연설은 다른 듯 보이지만 묘한 공생관계를 감추고 있다. 문민정부라 불렸던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노선, IMF사태를 빌미삼아 금융/공공부분을 민영화시켰던 김대중 정부, 자유무역지대(FTA) 전략을 세웠던 노무현 정부, 그런 기반을 딛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등장하고 강화되고 있다는 공생관계 말이다. 그러니 누구도 이 정부 이후를 자신할 수 없다.
(2) 안전과 건설의 지방선거
세월호 참사 이후 6.4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지방선거임에도 초미의 관심사는 서울시장 선거였는데, 이명박 이후 한국 자본가를 대표하는 정몽준 국회의원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다. 정몽준 후보는 세월호 참사를 거론하는 것보다 “현재의 생활이 힘들고 장래가 불안한 시민에게 일자리는 최고의 복지”라고 주장하며 “서울로부터 3시간 비행거리에는 15억 명이 살고 있습니다. 15억 명이 찾아오고 싶은 서울, 장사가 잘 되는 서울, 청년들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서울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안전을 경제로 전환시키는 프레임, 한국 선거에서 잘 먹히는 프레임을 만들고서도 정몽준 후보는 선거운동과정에서 박원순 시장의 문제점을 드러낸다며 ‘불안한 서울’을 주로 언급했다. 농약급식, 지하철 공기질 등을 문제삼고 협동조합/마을공동체사업 폐지 등을 얘기하다 정몽준 후보는 네가티브 선거라는 역풍을 맞았다.
반면에 박원순 후보는 서울시정의 기조를 ‘안전·복지·창조경제’라고 정의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가 일어난 이후 피해를 최소화하는 ‘재난 골든타임 목표제’”라며 세월호 참사를 활용했다. 12대 핵심공약에서는 ‘1. 안전특별시 서울, 2. 어린이 안전도시 서울, 3. 주택안심 서울’처럼 안전과 안심이 전면에 등장했고, 60대 정책공약에서도 “사람중심의 안전패러다임 전환”, “시민의 안전이 보장되는 안전마을 50곳 만들기” 등 안전이 강조되었다. 박원순 후보는 안전을 중요한 화두로 내세우고 활용하며 선거를 이끌었는데, 이 때의 안전은 정부가 시민의 삶을 안전하게 ‘관리해주겠다’는 언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특정한 가치나 삶을 좋은 삶으로 전제하고 그 삶을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특히 이 안전담론은 여전히 노동을 배제한다. 예를 들자면, “시민을 위한 안전지하철! 노후차량‘노후시설 전면 교체”는 있어도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키겠다는 내용은 없다. “차량 노후화-인력감축-비용절감 위주 경영”이 전형적인 사영화의 과정인데, 박원순 후보의 공약에서는 시설 문제만 부각된다. 그리고 박 후보는 향후 가장 불안요인이 될 핵발전소정책에 대한 반대의지도 밝히지 않았고, 적자와 사고를 부르는 경전철 사업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외려 “창조 전문인력 10만명 양성, 공공형 사회․복지서비스 좋은 일자리 5만개 창출, 맞춤형 여성일자리 10만개 창출”같은 모호한 노동정책이 함께 등장한다. 창조 전문인력, 좋은 일자리, 맞춤형 여성일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지난 서울시정을 통해 유추한다면, 이 일자리들은 최저임금에 가까운 시급과 단기고용(11개월 이내) 일자리인데, 정말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이 가능할까?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박원순 시정의 창조경제는 얼마나 다를까?
또한 선거를 통해 드러난 안전담론은 안전을 내세워 시민의 삶을 관리할 뿐 아니라 이를 자본축적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 그런 점에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를 당한 안산시와 경기도가 총 900억원의 국비지원사업 추진을 밝히면서 안전체험테마파크 조성, 글로벌 안전시범도시 구축, 수도권 규제완화특별지구 지정 등을 내세운 것은 안전이 건설자본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안전을 내세운 여러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지만, 기득권들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결탁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안전담론은 경쟁과 배제라는 신자유주의 권력 또는 환경개입권력, 즉 “개개인에게 직접 개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환경에 개입해 그 게임의 규칙을 설계함으로써 환경의 최적화를 꾀하고자 하는 권력”의 성격과 무관하진 않지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규율권력과 환경개입권력이 복합적으로 작동하지만 한국의 통치는 노골적인 이해관계를 감추지 않고 그것을 정책으로 관철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한국에서 여당/야당은 서로를 뜯어먹으려고만 하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 생존에의 욕망만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좀비정치’이다.
3. 한국사회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1) 보이지 않는 강한 국가와 고착권력
국가가 자본과 결탁해 노골적으로 이해관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어렵게 증명하지 않아도 신문기사만 몇 개만 검색해도 나온다. 핵발전소 납품과 관련된 비리, 4대강 사업과 관련된 비리 등 많은 사건들이 이미 드러났다. 그리고 철도나 의료 등 한창 논쟁이 되고 있는 민영화 문제는 중요한 공기업이나 비영리법인들이 민간자본에게 매각되고 흡수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국가나 공공성의 민영화’로 볼 것인가? 물론 민영화가 맞다. 그런데 민영화가 되었다고 해서 국가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병참이나 전쟁까지 민간기업이 담당하는 시대이지만,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민간이 철도나 의료, 병참을 관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국가의 권한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재난자본주의'도 국가와 자본의 혼성, 뒤섞임을 뜻하지 한 방향으로의 이전을 뜻하지 않는다. 사실 재난자본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작은 정부’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강한 정부’를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런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다.
2014년 5월 29일 발표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법률지원 특별위원회’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17대 과제 중간검토 보고서」는 진상규명과 관련된 많은 질문들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참사 이전과 사고 당시, 사고 이후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잘 드러난다. 여객선 안전검사기준이나 차량적재기준, 선박연령기준, 안전점검기준, 선박운행기준 등은 정부의 소관이고, 부실한 관리감독의 원인인 해피아(해양수산부+마피아)나 해양경찰의 안전관리, 해양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능력, 재난관리시스템 역시 정부의 소관이다. 더구나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의 언론통제 및 사건은폐, 유가족에 대한 감시와 시위를 벌인 시민들에 대한 과도한 탄압, 전문가들의 개입 차단, 수사과정에서의 의혹 등은 정부가 생각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개입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즉 민간영역이지만 여전히 그 운영과 관련된 규칙은 정부의 권한에 속한다. 따라서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7개국의 민영화 과정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블랙딜>을 보면, 민영화 과정 뒤에는 언제나 정부와 기업의 검은 뒷거래가 있었다. 자연스러운 민영화란 환상이고, 민영화의 다른 이름은 부패이다. 한국이 식민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과대성장국가’(overdeveloped state, 함자 알라비H. Alavi의 개념)가 되었다는 점을 무시하면 안 된다. 복지국가와 국가의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들이 있지만 자본과 결탁한 부패한 관료제도가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가나 통치에 관한 분석이 간과하는 것은 그 시스템을 작동하는 관료제도이다.
또한 한국사회에서는 안전성의 기준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사실상 안전성을 논할 수 있는 기본정보와 기회 자체를 얻기 어렵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민간의 접근이 차단되고 진상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아직도 전혀 밝혀지지 않는 의혹과 진상규명 요구는 세월호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정부는 은폐와 여론통제, 폭력대응이라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이 면담을 청했을 때 드러났듯이, 정부는 ‘순수한 시민’이라는 자의적인 잣대를 활용해 시민/비시민으로 구분하고 비시민들을 고착시키고 있다. 가만히 있으라는데 가만히 있지 않으면 과거처럼 빨갱이로 몰려 잡혀가진 않지만 종북(從北)으로 몰려서 고립된다.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정부사업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과 다를 바 없다. 밀양송전탑이 그 전형이다. 정부는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4개 면의 농성장을 감시하고 철거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은 총 38만1000여명, 숙식비는 99억600만원에 달했다. 경찰이 직접 폭력을 행사해 농성장을 철거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2011년 1월의 용산참사에서 그러했듯이, 경찰과 용역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국가와 경찰이 일체가 된 근대의 경찰제도에서 경찰이란 단순히 법[법률]을 적용하는 법 보존적 폭력일 뿐만 아니라, 정부에 의한 행정명령의 공포와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법을 발명하며’ 그것에 의해서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는 기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전히 강력한 국가가 민영화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자본과 거래하며 이익을 취하고 이에 관한 정보와 개입을 통제하며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한국사회의 특징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최근 집회/시위현장에 자주 등장하는 “고착시켜”라는 경찰의 용어를 본 따 ‘고착권력(固着勸力)’라 부를 수 있다. 정부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감금당하고 고립된다. 집회는 금지되지 않지만 집회장 주변은 경찰버스로 꼼꼼히 차단되어 선전과 항의라는 집회의 목적은 금지된다. 감금이지만 감금이 아니기에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되는 고착, 폭력으로 고립시킴으로써 의지를 꺾고 능동성을 가로막는 고착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어떤 참사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의 지시 역시 고착 아닌가.
(2) 노동을 배제하는 자본의 노골적인 폭력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이자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고리원전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한 날이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노후한 선박, 인건비 절감을 위한 비정규직 고용, 감시감독의 부재 등이 기본적인 원인이고, 핵발전소들은 이런 문제를 똑같이 안고 있다. 핵발전소의 수명을 넘긴 노후시설, 납품비리와 수많은 사고, 감독기관의 이해관계집단화(핵마피아), 원전노동의 하청구조 등은 임박한 참사를, 엄청난 파국을 예고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되었고, 그와 비슷한 원인들이 철도, 지하철, 병원, 에너지, 공항, 건설 등 곳곳에 존재하고 있음도 지적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서울시장 후보였던 정몽준이 최대주주인 현대중공업에서는 지난 3월부터 한달 반 남짓 동안 7명의 사내하청노동자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적절한 안전장치가 없고 현장에 관한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었다. 하청노동자는 현장의 안전성에 관해 묻거나 안전장비를 요구할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한다. 사회에서 수많은 안전대책이 논의되고 있지만 위험한 공장과 사무실에서 노동자의 안전은 논의테이블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다. 위험에 가장 노출된 노동자들은 정작 안전에 대한 권리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노동자 개개인이 요구를 하지 못하면 조직된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관련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외려 현실에서는 노동조합이 체계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대표적인 회사가 돈을 받고 노조를 파괴하는 전략을 짜는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이다. 이들이 노조를 파괴하는 전략은 다음 순서를 따랐다. ‘회사의 갑작스런 교섭거부와 단협해지 ― 파업유도 ― 사측의 직장폐쇄 ― 용역깡패 투입 ― 노조에 대한 대량해고와 대량징계, 막대한 손해배상 요구 ― 조합원탈퇴 종용 ― 탈퇴 조합원 중심으로 기업노조 창립, 배타적 교섭권 부여’. 이런 전략은 효과적이었고, 많은 노동조합들이 이런 전략에 무너졌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창조컨설팅>은 2011년 1월부터 2012년 8월까지 총 23개 기업에게 무려 82억 4,500만원을 받았다.
이처럼 한국의 통치에서는 규칙을 설계하는 것보다 여전히 개개인과 개별 사안에 직접 개입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배제하는 방식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이 통치를 뭐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법으로는 분명히 불법이지만 검찰, 노동위, 기업주가 힘을 합쳐 규칙을 무력화시키는 사회에서 통치는 폭력과 얼마나 다를까(만도노조와 SJM노조를 습격했던 <컨택터스>의 유니폼과 장비는 공권력과 다를 바 없다).
직접적인 폭력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노동조합의 노동자들은 끊임없는 손해배상과 민사소송에 시달린다. 2003년 타워크레인 위에서 쓸쓸히 죽음을 택했던 김주익위원장은 유서에 “그래 당신들이 나의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제물로 바치겠다. 하지만 이 투쟁은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들에게 손해배상 가압류에 고소고발에 구속에 해고까지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노동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무정책을 이 투쟁을 통해서 바꿔내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승리할 때까지 이번 투쟁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같은 해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도 “두산이 해도 너무한다.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에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사원의 고용은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두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손해배상과 가압류는 계속 이어져 2014년 2월까지 각 노조가 청구받은 금액을 합하면 1,600억원이 넘는다. 물리적인 폭력과 돈의 폭력이 뒤섞여 노동자들의 삶을 고공농성과 죽음으로 몰아간다.
노동자가 돈과 고립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핵사고의 전례없는 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일상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도 두렵다. ‘배제’라는 단어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는 이 죽음은 우리 삶의 뿌리로 파고든다. 안전을 비용으로만 계산하는 기업이, 노동자의 발언 자체를 금지하고 농민의 삶을 고착시키는 권력이 안전을 내세우는 상황이다. 깔끔한 안전권력을 논하기엔 우리 사회에는 피비린내가 짙게 배어 있다.
노동자나 주민의 활동은 불법이 아니건만 막대한 손해배상과 용역깡패의 폭력은 노동자와 주민을 꼼짝 못하게 고착시킨다. 노동자와 주민의 관계마저 단절시키고 단속한다. 기업이나 송전탑, 핵발전소에 관한 정보는 접근 자체가 어렵고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그 진상에 접근하기 어렵다. 여전히 권력은 은폐하고 규율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이런 상황이니 민중의 권력이 다시 그 힘을 제자리로 찾아와야 하고, 그럴려면 국가와 자본의 연합전선에 맞설 힘이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국가를 활용하지만 국가권력을 강화시키지 않는, 제도정치를 활용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는, 집권의지를 갖지만 분권을 실현하려는 비(非)국가 전략이 중요하다고 본다.
(3) 안전담론과 안보담론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안전과 치안이 안보(安保)담론과 결합된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냉전상황은 위기의 내용이나 과정과 상관없이 정치, 경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이 된다. 실제로 국정원의 선거개입이나 간첩조작과 같은 치명적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는 안보담론을 활용했고 세월호 참사도 그런 사건을 은폐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안전이 화두로 떠오른 6.4 지방선거에서도 안전과 함께 활용된 말이 안보였다.
종북이라는 낙인은 한국사회에서 안보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뜻한다. 이 종북담론은 기존의 빨갱이담론과는 다르다. 빨갱이가 불온한 주체를 호명하는 단어라면, 종북은 그 주체만이 아니라 북을 추종하는 세력(從北)을 뜻한다. 종북은 빨갱이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사용된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정부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을 뿐 아니라 비판하지 않더라도 다른 삶의 태도를 보이면 바로 꼬리표가 붙는다. 심지어 밀양송전탑이나 지리산댐, 핵발전소를 반대해도, 세월호 참사를 문제 삼아도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보수파들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개새끼”라고 말하면 종북이 아니라는데, 바로 면전에서 그렇게 얘기하더라도 ‘진심(眞心)’을 문제삼을 수 있는 낙인이 바로 종북이다.
안보와 결합된 안전담론은 어떤 주장을 가로막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느낌의 발산 자체를 막는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침묵시위에서 드러났듯이 주장 이전에 흐느낌이나 침묵조차도, 노란 리본이라는 소품조차도 이미 불손하고 불온한 것으로 규정되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된다.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하고 열심히 참여하면 고착되는데도, 이 답답함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안보와 결합된 안전담론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의 통치이다. 내부의 적만이 아니라 외부의 적으로 몰아 그 존재 자체를 고착시키려는 이 흐름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고민이다.
물론 이런 고착을 뛰어넘으려는 운동도 존재한다. 존재 자체를 고립시키는 고착사회에 맞서 희망버스를 타고 직접 현장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희망버스를 타고 먼저 손을 잡으려는 사람들조차 고립시키고 경계를 지운다. 나서는 것 자체가 금지되지는 않지만 어느 선을 넘는 순간 고착된다. 누구의 명령에서 비롯되는지도 파악되기 어려운 고착명령은 예외상태의 규칙화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뭔가 고민의 꼬리는 계속 남는다.
또한 이런 고착의 흐름에 맞서기 위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국민대책회의가 구성되고 “존엄으로부터 안전을 세우기 위하여”라고 외치는 존엄과안전위원회가 출범했다. 존엄과안전위원회는 안전한 사회를 위해 당장 실천해야 할 일로 일곱 가지 과제를 요구했다.
1. 기업살인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2. 원전사고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 수명이 끝난 노후원전을 폐쇄해야 합니다.
3. 위험작업 중지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4. 생명과 안전에 관한 업무는 외주화를 금지하고 즉각 정규직화해야 합니다.
5. 기업활동규제완화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폐기하고 규제완화를 중단해야 합니다.
6.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주민 알권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7. 지역안전관리 시스템과 공공다중이용시설 안전에 시민 참여를 보장해야 합니다.
과제는 다 나온 듯하다. 문제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이다. 지금 정부가 이 일곱가제 과제를 순순히 받아들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일곱 과제의 ‘합니다’가 안보담론과 안전담론을 분열시키고 누구를 어떻게 설득하며 조직할 것인가에 관한 방법을 찾아야 현재의 안전담론에 균열을 만들 수 있다. 누구에게 말을 거는가에 따라 호명의 방식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4. 기민(棄民)과 자립인
사토 요시유키는 발제문에서 히로시마 자유농장의 발언을 인용하며 기민을 얘기한다. 사이토 준이치도 『민주적 공공성』에서 “약자의 기민화”를 우려한다. 그런데 버려진 민중이란 표현은 공공성 강화를 위한 국가의 책임을 자극하긴 하지만 민중의 가진 힘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하다. 2014년 1월, 일본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활동가들을 초청했을 때, 그들은 핵발전소에서 30km 떨어진 곳에 다시 마을을 세우고 있었다. 모든 문제를 후쿠시마로 몰아붙여 배제하려는 정부에 맞서 자립(自立)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그러면서 일본 활동가들은 한국의 상황에 굉장히 놀라워했다. 방사능에 그토록 민감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핵발전소를 그대로 둘 수 있냐고. 어떻게 시민들이 사는 도심에 핵연료 공장을 세우냐고. 어떻게 마을 한 가운데에 송전탑을 세우냐고.
물론 이런 물음이 안전에 대한 갈망을 더욱더 증폭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갈망은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는 욕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준비해야 할 생활이자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토론회에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런저런 진단이 나오지만 정부에 대한 무기력한 요구나 의지만 드러나는 결의 이상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두려움만으로는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연대는 가장 절실한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이라 배웠고 그렇게 생각한다. 앞서 가는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은 연대가 아니다. 넘어지는 사람을 받치는 것(人)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의식적인 연대이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손을 잡고 또 잡아야 국가와 자본에 맞서, 외려 그들을 버리면서 우리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