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을 처음 접한 건 창간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시 프리조프 카프라의 신과학운동이나 한살림선언을 먼저 접했기에 <녹색평론>의 문제의식은 낯설지 않았다. 1989년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1991년의 소위 분신정국을 거치며 나는 뭔가 다른, 조금 더 근본적인 대안을 찾고 싶었다. 그러면서 <녹색평론>을 찾아 읽게 되었고, 1993년도엔 실리지 않았지만 당시 학생운동 내의 반(反)생명 분위기를 성토(?)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대학원을 가고, 군대를 다녀오면서 <녹색평론>을 볼 기회는 줄어들었지만 생태계의 위기와 진보역사관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고민은 이어졌다.

그 뒤로도 가끔 <녹색평론>을 뒤적이긴 했지만 독자로서만이 아니라 필자로 참여하게 된 건 2007년 이후였다. 당시 오창은, 이명원씨와 함께 <지행네트워크>라는 단체를 만들 때 김종철 선생을 처음 만났다. 교보문고 근처에서 밥을 먹으며 막걸리를 마셨고, 선생은 다른 지원 없이 각자의 돈을 모아 단체를 만드는 걸 무척 반기셨다. 하고 싶은 거 맘껏 해봐라, 내가 가끔 밥은 사줄게. 그렇게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김밥모임(김종철 선생과 밥을 먹는 모임)의 시작이었고, 각자가 초대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밥도 먹고 막걸리를 마셨다.

 

밥을 먹는다()는 것의 의미

 

한국에서 식구(食口)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끼리끼리 모여 이해관계를 나누며 먹는 밥이 짬짜미라면, 사람들과 어울려 토론하고 대안을 모색하며 나누는 밥은 대동미이다. 자신감은 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북돋우는 것이고, 밥을 나누는 건 그 자신감에 든든함을 더한다. 혼밥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밥모임은 어지러운 세상을 함께 견디게 한다.

매일의 일상이지만 먹는다는 행위만큼 이 세계의 질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은 없다. 김종철 선생은 녹색평론에 실린 마지막 글에서도 먹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평소에도 선생은 해월 최시형 선생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했고, 이번 글에서도 이천식천(以天食天)’을 언급했다. “이 세상의 뭇 생명체들이 모두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고 자기도 다른 생물들이 공여하는 먹이를 먹고 생을 누림으로써, 그런 순환적 증여의 질서 속에서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있는 근본이치를 말씀하셨다. 여기에도 밥은 결코 누구 혼자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들의 공희(供犧)의 산물이라는 것, 그러기에 밥을 먹는 행위야말로 가장 뜻깊은 공생공락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김종철,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 녹색평론20207~9월호, 178.) 순환적 증여의 질서, 이것이야말로 밥의 질서이다.

좀비처럼 자기 식욕만 남은 존재가 아니라면, 뭇 생명들은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또 그러면서 자신을 돌보기 위해 밥을 먹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위기는 이런 순환적 증여의 고리가 끊어지고 일방적인 먹이사슬이 만들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녹색평론>에 실린 글들이 강조하던 소농을 농업에 대한 강조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건 의미를 단편적으로 만드는 해석이다. 농업은 단순히 먹거리를 생산하는 산업이 아니라 순환질서를 유지시키는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농 중심의 사회는 순환이 기본질서인 사회이자 그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힘에 맞설 수 있는 사회이다. 따로 떨어진 개별 농가의 질서가 아니라 자급력을 갖춘 소농들이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자치를 행사하는 사회이다. 김종철 선생은 이런 자치와 자급의 힘이 만들어져야 순환적 증여의 질서도 회복,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순환의 질서가 농업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건 순간이고 자연으로 돌아가고 순환될 거라 생각하면 부의 독점이나 상속도 덧없는 일이 된다. 반면에 순환이 아니라 축적과 독점이 상식을 차지하면 부패는 자연스럽고, 약자의 처지는 갈수록 나빠진다. 선생에게 기본소득은 순환의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성장 중심의 산업사회에서 소농에 관한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 들렸지만 지금 우리는 더 이상 경제성장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가 경고하는 기후위기는 가장 구체적으로는 식량위기로, 그로 인한 갈등(전쟁)으로 경험될 것이다. 지금이야 버튼만 누르고 클릭만 하면 먹거리를 배송시키거나 음식을 사먹을 수 있지만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가 늘어나고 작물 재배지가 줄어들면 식량난이 심각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소득 상위층과 하위층의 장바구니는 유기농과 패스트푸드로 양분되고 있고, 이런 먹거리불평등은 건강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성장이 아니라 생존이 화두인 사회에서 소농은 순환의 고리를 다시 이으려는 노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만남을 막고 밥을 나눠 먹는 걸 금지하는 코비드19는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바이러스이다. 그런데 우리가 흩어지면 흩어질수록 약육강식, 각자도생의 질서는 강화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시대에 밥을 같이 먹는 모임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모임이다. 그 급진적인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든든했고, 이제 그 기반을 나누는 것이 산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를 생각하며

 

김종철 선생이 끝까지 놓치지 않았던 화두는 근대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마지막 글에서도 선생은 슬픈 미나마타를 쓴 일본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를 언급하며 근대를 돌아본다. 그리고 단상의 마무리는 장일순 선생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 잘남을 겨누며 이름을 날리려는 것이 근대의 허명이라면, 장일순 선생은 바닥을 기어라고 했고 세상 사람들 앞에 감히 나서지 않는다(不散爲天下先)”라는 노자의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 김종철 선생은 이를 비폭력주의 행동의 원칙으로 해석하며 이 세상의 모든 목숨붙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저마다의 타고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려면, 무엇보다 우리 각자가 자기중심적 배타적 권력욕망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가난해지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얘기라고 풀이했다(김종철.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녹색평론사, 2004), 71.). 성장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과잉이 아니라 검소이다.

개화기의 최시형 선생이 동학을 통해 비근대의 길을 열려 했다면, 장일순 선생은 소위 원주캠프를 통해 비중심, 비국가의 사유를 설파했다. 김종철 선생은 이 사상계보를 이은 사람이고 근대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비근대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지막 책인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는 그런 주장을 빼곡히 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전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까? 19891028일 한살림모임 창립기념식에서 장일순 선생은 ()에 관하여란 강연을 했다. “시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최시형 선생의 말을 인용하여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존경의 문화로 돌아가야, 생명을 모시는 경제로 돌아가야 본원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한살림이 그런 모심의 생활태도와 관계를 키워가는 틀이 되기를 원했다)(장일순 지음,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 1997), 70.).

이 시의 세계관은 자기 밖의 객체를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근대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그리고 동일한 이원론에 기초한 객체를 변화시켜야 나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 역시 거부한다. <녹색평론>에 실렸던 다양한 글들은 이런 세계관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고, 김종철 선생은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사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런 방식만으론 시의 태도와 관계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외려 성장을 반대하고 개발을 막으려면 그것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을 하지 않는 것에 써야 한다. 권력을 잡아 한방에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면 일상에서 전환의 기반을 닦는 일에 더 많은 힘을 써야 한다. 어떻게 보면 시는 존중과 기다림을 통해 더 많은 힘을 끌어내는 방법,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이미 가진 힘을 끌어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즘은 환대라는 말이 주로 쓰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말은 모심이라 생각한다. 시천주(侍天主)라는 말처럼 모심은 하늘과 땅, 돌이나 풀, 벌레까지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시려면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건 인간의 근본 한계를 자각하고, 자신의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126)을 기르는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 남들과 더불어서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겠다는소국사상(小國思想)이기도 하다(김종철,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년), 126, 143쪽.). 김종철 선생은 물질적 빈곤보다 사상적 빈곤을 채우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는 이 과제를 잘 풀고 있을까? ‘녹색’, ‘그린’, ‘인권마저도 더욱더 성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야기하는 사회라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런 점에서 김종철 선생이 채우던 자리의 공백도 더 크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일망정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일념으로 물을 길어 붓기를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그 마른 나뭇가지에 푸른 싹이 돋아나는 기적을 보는 행운이 우리에게도 찾아올지 누가 알겠는가.”(앞의 책, 9.) 밥을 먹던 식객이자 다른 세상을 함께 꿈꿨던 동지로서 선생의 명복을 빈다.

- 소개: 공공성 개념을 교통, 복지, 의료, 먹거리 등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서 어떤 변화가 가능한지를 알아본다. 공공성 개념의 기본적인 틀과 실제 쓰임새를 알아보고 한국사회의 대안을 모색하는 시간.

- 세미나는 요약강연과 강독으로 진행. 총 8회 매주 진행. 신청자는 기본적으로 책을 읽고 참석, 원하는 사람에게는 발제 기회 부여. 분할 신청 불가능.

- 이후연구소 회원은 신청 우선. 비회원은 신청 순서대로(회원신청이 늘면 비회원 신청이 불가능할 수 있음).

- 신청비는 이후연구소 회원이나 옛따책방의 친구일 경우 8만원, 비회원의 경우 13만원.

- 장소는 서울 옛따책방(홍대입구역 3번 출구 카페 본주르)

- 강독세미나 일정은 4월 21일(화)부터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반

신청은 다음 링크로. http://bitly.kr/zy4OBi2

- 진행 순서(가안)

1. 하승우, 공공성(책세상, 2014)

2. 오건호 등, 나라는 부유한데 왜 국민은 불행할까(철수와영희, 2018)

3. 김상철, 무상교통(이매진, 2014)

4. 김창엽, 건강의 공공성과 공공보건의료(한울, 2019)

5. 김흥주 등, 한국의 먹거리와 농업(따비, 2015)

6. 김조설, 한국 복지정책 형성의 역사(인간과복지, 2017) 또는 양재진,  『복지의 원리(한겨레출판, 2020) 

7. 파블로 솔론 등,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착한책가게, 2018)

8주. 교육과 도서관의 공공성(텍스트는 추후 공지)

9주. 에너지 공공성(텍스트는 추후 공지)

 

  1. 2020.03.27 15:55

    비밀댓글입니다

    • 네, 안그래도 그 생각 했는데요. 텍스트는 더 보완할 수 있으니... 좋은 텍스트 소개해 주세요. 보고서는 봤는데 책은 잘 못 봤어요.

  2. 이은영 2020.03.28 18:09

    홍보해도 되나여?

사회와 고통 강독 세미나

 

- 소개: 고통의 사회적 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 인간이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어떻게 인지하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야 할지, 어떻게 그 고통을 조절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 고통 앞에서의 무력감을 우회할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

- 세미나는 요약강연과 강독으로 진행. 11회 매주 진행. 신청자는 기본적으로 책을 읽고 참석, 원하는 사람에게는 발제 기회 부여. 11회 모두 참석이 요구되고 분할 신청은 불가능.

- 이후연구소 회원은 신청 우선. 비회원은 신청 순서대로(회원신청이 늘면 비회원 신청이 불가능할 수 있음).

- 신청비는 이후연구소 회원의 경우 5만원, 비회원의 경우 10만원. 80% 이상 수강시 신청비 절반 반환.

- 23일부터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또는 오후 7시 진행(신청자가 많은 시간대에 진행).

- 장소는 충북 옥천 포도밭출판사 모임방

- 신청은 다음 링크로. http://bitly.kr/zy4OBi2

 

이후연구소 강독세미나 참여신청서

강독세미나 참가비는 이후연구소나 관련 단체 회원 5만원, 비회원 10만원 입니다. 참석률 80% 이상일 때는 참가비의 50%를 돌려드립니다. 참가비를 입금할 계좌는 카카오뱅크 3333-13-7802423(예금주: 하승우) 입니다. 입금이 확인되면 3일 내에 확인 메일을 드립니다. 확인메일을 못 받으시면 hereandnowlab@gmail.com 으로 연락을 주세요.

docs.google.com

- 이후연구소 회원가입은 다음 링크로.https://docs.google.com/forms/d/1t1N-_eGlIAfIdJm48cQ7U4-oYomZRVzCYhRvfwseqRk/edithttp://bitly.kr/uHSUePLv

 

이후연구소 후원회원가입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지만 실은 과거에 대한 반성이자 현재의 조건에 대한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2050년, 많은 과학자들이 걱정하는, 미래가 달라지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미래라고 얘기하지만 이미 실현되고 있는 현재이고 파괴된 과거의 누적입니다.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야 하는 미래에 개입하기 위해 이후연구소는 창립합니다. 앞으로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docs.google.com

 

진행 순서(가안)

 

1. 김상봉, 철학의 헌정(, 2015)

1장 응답으로서의 역사

2장 그들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의 나라로

3장 항쟁공동체와 지양된 국가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http://www.nomadist.org/xe/?module=file&act=procFileDownload&file_srl=2444941&sid=e587b956b360098df671015963a32231&module_srl=25691)

 

 

2. 악셀 호네트, 비규정성의 고통(그린비, 2017)

1부 정의론으로서의 헤겔 법철학

2부 정의론과 시대진단의 결합

 

 

3. 악셀 호네트, 비규정성의 고통(그린비, 2017)

3부 근대의 규범 이론으로서의 인륜성 이론

 

 

4. 아서 클라인만 등, 사회적 고통(그린비, 2002)

고통과 구조적인 폭력 - 아래로부터의 조망 / 폴 파머

경험의 호소력, 영상의 당혹감 - 우리시대의 고통에대한 문화적 전유 / 아서 클라인만 & 조안 클라인만

남아프리카의 정치적 과부 생활 - 맘펠라 람펠레

 

 

5.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이후, 2004)

 

6주.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나무연필, 2018)

 

7. 천정환, 자살론: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문학동네, 2019)

 

 

8. 디디에 파생,리샤르 레스만, 트라우마의 제국(바다출판사, 2016)

 

 

9. 캐런 메싱, 보이지 않는 고통(동녘, 2017)

 

 

10.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2017)

 

 

11. 마지막 정리 세미나

  1. 해정 2020.01.01 15:05

    저요, 저요~~~!!!
    무조건 할테야.

  2. 윤자 2020.01.14 09:52

    세미나 참석은 어렵지만.. 랩 하나엔 들어가려구요!

  3. 2020.01.22 23:24

    비밀댓글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