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몽똘 2019.08.27 12:51

주민소환제도와 주민소환운동은 같지만 다르다. 제도가 있다고 해서 그 제도의 목적이 자동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주민소환제도는 주민소환운동을 통해서만 자기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 즉 운동이 없다면 제도는 사문화된 규정일 뿐이다.

주민소환제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제도를 만드는 과정은 정치적인 협상과 타협의 과정이다. 2006년에도 지금과 비슷하게 국회가 부패와 무능에 빠진 상태였고, 여야가 지방부패 척결을 위해 주민소환제 입법을 약속했음에도 한나라당이 반대하던 상황이었다. 이에 국회의장이 동북아역사재단법 등 4개 법안을 직권상정하겠다고 하자 민주노동당이 표결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주민소환법을 직권상정법안에 포함시켰다. 이 표결이 통과되면서 2007년 7월 1일부터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대상으로 하는 주민소환제도가 시행되었다. 법률이 제정되는 과정에서도 정치가 작동한 셈이다.

사실 주민소환제도 자체가 무조건 민주적인 것도 아니다. 미국의 경우 2003년에 캘리포니아주에서 역사상 두 번째 도지사 주민소환이 이루어졌다. 전력위기와 재정위기에 대한 책임이 명분이었으나 기업의 자금이 동원됐고 소환을 뒤이은 선거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라는 보수파가 당선되었다. 주민소환제도의 부정적인 결과로 자주 거론되는 사례이다.

그러니 제도 자체는 ‘양날의 칼’이다. 칼의 쓰임새는 칼 자체가 아니라 칼을 쓰는 사람에 달려 있다. 정치인을 실제로 소환할 수 있는가 아닌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소환운동을 통해 칼잡이는 무엇을 하고자 하고, 더 중요하게는 소환 과정의 정치에, 소환 이후의 정치에 어떻게 개입하려 하는가, 라고 생각한다.

 

□ 탄핵의 복기, 소환의 준비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 제1조(목적)은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법은 「지방자치법」 제20조의 규정에 의한 주민소환의 투표 청구권자ㆍ청구요건ㆍ절차 및 효력 등에 관하여 규정함으로써 지방자치에 관한 주민의 직접참여를 확대하고 지방행정의 민주성과 책임성을 제고함을 목적으로 한다.” 즉 주민소환은 단지 정치인을 소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민의 직접참여와 행정의 민주성, 책임성 강화를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주민소환은 소환의 사유를 제한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 65조는 이렇게 적혀 있다. “①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행정각부의장, 헌법재판소 재판관, 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 감사원장, 감사위원 기타 법률이 정한 공무원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 ②제1항의 탄핵소추는 국회재적의원 3분의 1이상의 발의가 있어야 하며, 그 의결은 국회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다만,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국회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국회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탄핵은 정치인의 책임을 묻는 파면에 목적이 있지 시민과의 연관성이 없고 그 과정에 시민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지다. 탄핵은 시민의 투표가 아니라 국회와 헌법재판소를 통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제도로만 보면 주민소환보다 탄핵이 훨씬 어렵고 탄핵의 경우 이후의 정치적인 과정도 시민들이 개입하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주민소환이 계속 실패해 온 반면(경기도 하남시의 시의원 소환만 성공했다), 탄핵은 2017년 3월에 성공했다. 왜 그럴까? 주민소환의 요건이 탄핵보다 더 어려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왜 탄핵은 되고 주민소환은 안 되는가, 이것은 정치적인 질문이다.

탄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탄핵권한이 없는 시민들의 찬성율이 70%를 넘어서?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수가 100만명을 넘어서? 최순실 게이트와 부패, 무능과 같은 탄핵의 이유가 분명해서? 이런 여론에 떠밀려 야당들도 탄핵 찬성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아마도 다양한 이유들이 결합되어 탄핵 가결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2009년 김태환 도지사 소환에서 드러났던 문제들이 대통령 탄핵에서도 드러났을까? 당시 투표율이 낮았던 대표적인 이유는 공무원들의 조직적인 선거 방해였다. 탄핵과정에는 시민들이 개입할 통로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방해는 불가능했다. 도지사측이 만든 ‘선거 참여= 찬성, 선거 불참 = 반대’라는 강력한 프레임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도지사 소환과정에 대한 회고를 보면, 도지사의 실정에 대한 구체적인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매일 JTBC를 비롯한 뉴스가 탄핵과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고 해설하고 논쟁하는 과정이 도지사 소환과정에서는 없었다. 당시에 해군기지, 영리병원, 케이블카, 내국인 카지노 등 김태환 지사의 정책들에 관한 토론은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자연히 대통령을 탄핵하려는 마음만큼 도지사를 소환하려는 마음이 생기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만약 대통령 탄핵을 투표로 결정했다면 제주도의 투표율은 얼마나 나왔을까? 만약 박근혜가 제주도 출신의 정치인이었다면? 어떻게 보면 대의민주주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탄핵은 갈등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었다. 싸움은 계속 이어졌지만 그 싸움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투표라는 정치행위는 개인의 판단과 결심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분위기와 여론, 지지하는 대안 등의 영향을 받는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소환 자체는 권력을 비우는 것이지 권력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주민소환은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의민주주의의 보완제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주민소환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대의민주주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민소환은 모든 걸 거는 승부가 아니라 다음 승부를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원희룡 도지사의 독주는 원희룡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독주를 방치하는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의 위기이다. 이 시스템을 바로잡지 않으면 원희룡 도지사가 아닌 다른 누가 권력을 잡아도 또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이렇게 물어보자. 만일 2009년에 김태환 도지사를 소환했다면 원희룡 도지사가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제주사회는 이미 주민소환을 한번 경험했다. 2009년과 2019년은 같을까? 처음이 아니라면 상대가 어떤 수를 쓸 것인지 알고 있다면 그에 대응하는 수를 마련하며 맞대응할 수 있다. 모든 시민사회단체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건 당연한 것이고, 관권선거, 여론조작, 이슈 은폐 등에 대한 대응책을 하나씩 준비할 필요가 있다. 단지 수가 아니라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라면 전략이 필요하다.

 

 

□ 정치는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소환실패/성공의 정치적 효과

 

운동과 정치는 다르다. 운동은 목표한 성과를 달성하면 과정이 종결되지만, 정치는 특정한 목표를 달성해도 그 과정이 끝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정치에서 단기적인 성과를 기대하는 건 기대만큼 실망을 품게 된다. 애초에 기대를 달리 잡으면 실망도 달라진다는 얘기이다.

앞서 언급했던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민주당 주지사가 소환되고 공화당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도지사에 당선된다. 미국의 주민소환은 소환과 선거를 동시에 치르기 때문에 더욱더 정치적인 성격을 띤다(그래서 소환반대운동은 현주지사에 대한 신임이기도 하다). 2012년 위스콘신 주에서는 공화당의 스캇 워커 주지사가 소환되었지만 53.1%의 지지를 얻어 재신임에 성공했다. 워커 주지사가 소환된 이유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협상권을 제한했기 때문이었는데, 소환청구에 100만명의 서명을 받았기 때문에 무난하게 소환될 거라 예상되었다. 관건은 각자 서로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주지사를 비판하는 시민들도 소환까지는 아니라고 봤다. 명백한 부정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정책에 대한 찬반은 소환의 이유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워커 주지사는 노조의 단체협상권 제한이 노조의 이기주의 때문이라는 전략을 썼다. 즉 소환청구는 정치의 끝이 아니라 본격적인 정치의 시작이다.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2018년 6월까지 총 93건의 주민소환투표청구가 있었고, 이중 실제 투표로 이어진 사례는 8명(5건), 소환된 이는 2명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주민소환제도는 무의미한 것일까? 한 사례만 들어보자. 2008년 서울시에서 최초로 광진구의 시의원에 대한 주민소환청구활동이 시작되었다.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사퇴를 하지 않자 주민들이 서명을 받기 시작했고 결국 시의원은 사퇴하고 청구는 종결되었다. 미투표 종결된 85건 중 원인해소가 25.8%(24건)이다. 앞서의 광진구 사례에 견주어 본다면 만약 소환운동이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시의원이 사퇴했을까?

그리고 김태환 도지사가 주민소환투표 기간에 “1년이 아니라, 5년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퍼뜨린 것으로 안다. 다음 선거에 나올 생각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김태환 지사는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친척의 구속이나 공천 등 여러 문제가 있었겠지만 소환운동이 없었다면 과연 불출마했을까? 만일 김태환 지사의 소환에 성공했다면 그 다음 선거에서는 누가 도지사로 당선되었을까?

제 4회 도지사선거에서 득표율은 다음과 같았다.

구시군명

선거인수

투표수

후보자별 득표수(득표율)

열린우리당

진철훈

한나라당

현명관

무소속

김태환

합계

411,862

277,003

44,334

(16.15)

112,774

(41.10)

117,244

(42.73)

274,352

제주시

218,768

138,717

22,748

(16.49)

56,423

(40.91)

58,722

(42.58)

137,893

북제주군

74,387

51,650

10,793

(21.22)

16,607

(32.65)

23,455

(46.12)

50,855

서귀포시

62,209

43,561

5,087

(11.79)

19,930

(46.22)

18,098

(41.97)

43,115

남제주군

56,498

43,075

5,706

(13.42)

19,814

(46.63)

16,969

(39.93)

42,489

 

그리고 제 5회 도지사선거의 득표율은 다음과 같았다.

구시군명

선거인수

투표수

후보자별 득표수(득표율)

민주당

고희범

무소속

현명관

무소속

우근민

합계

424,098

276,056

48,186

(18.03)

108,344

(40.55)

110,603

(41.40)

267,133

제주시

305,765

195,450

36,447

(19.19)

74,905

(39.45)

78,514

(41.35)

189,866

서귀포시

118,333

80,606

11,739

(15.19)

33,439

(43.27)

32,089

(41.53)

77,267

 

만일 주민소환이 성공했다면, 다른 걸 떠나서 도지사직을 상실했던 우근민이 다시 후보로 나올 수 있었을까? 신구범씨가 제 6회 도지사선거에 나올 수 있었을까? 낡은 정치인들이 선거에 나올 생각을 버렸다면 제주의 정치지형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리고 위의 득표율을 보면 제 4회, 제 5회 민주당, 현명관, 김태환/우근민의 득표수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상 당시의 주민소환운동이 깨지 못한 건 김태환이 아니라 우근민이 다시 나와 당선될 수 있는 권력구조였다.

그렇다면 당시 주민소환운동은 단순히 김태환을 도지사직에서 끌어내리는 차원을 넘어 제주의 토호권력, 궨당정치를 바꿀 수 있는 급진적인 차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주민소환운동의 실패는 투표함을 열지 못한 게 아니라 이 급진적인 차원을 더욱더 활성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드러났다고 본다.

 

 

□ 소환과정도 정치다

 

만약 주민소환도 못할 거면 정치인을 어떻게 견제할 수 있을까? 대의민주주의가 분명한 한계를 보였고 그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장치가 주민발의, 주민투표, 주민소환같은 제도인데, 이 제도를 쓰지 못하는 건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피해를 받아들이겠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주민소환이 없는 지방자치제도는 지역의 기득권정치구조를 허용하겠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점에서 주민소환운동이 드러내는 건 보수적인 지역권력구조와 진작에 드러났어야 하는 지역사회 내부의 균열선이다. 이 구조와 균열선을 드러내지 않으면 지역사회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권력을 쥔 자들은 계속 바뀌겠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고 난개발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주민소환운동을 논한다는 것은 또다른 층위의 권력구조변화와 맞물려 있다. 바로 총선이다. 민주당 국회의원이 3명인데 이렇게 무기력한 때가 있었나? 국회의원도 소환하자는 국민소환제가 논의되는 시점에서, 도민의 뜻에 따르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경고장이 아니라 해임장을 보내는 건 매우 정치적인 사안이다.

그렇다면 주민소환운동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는 진정한 논쟁점이 아니다. 진짜 고민점은 우리가 주민소환운동을 할만한 의지와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 주민소환을 통해 제주의 권력구조를 변화시킬 전략을 짜고 있는가, 라고 본다. 그런 의지와 역량, 전략이 있다면 소환투표가 실패해도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쪽팔려도 계속 이런 구조에서 욕이나 하며 버텨야 한다. 불행은 현재의 생태, 정치, 경제상황을 고려하면 ‘존버’하며 버틸 날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민소환은 ‘못된 정치인’을 끌어내리기 위한 특정한 변수가 아니라 ‘말 잘 듣는 정치인’을 만들기 위한 상수일 수 있다. 주민소환운동은 매우 정치적인 운동이다. 현행 법률상 한계가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한계 때문에 제도를 사용할 수 없다면 그 제도는 정치의 소멸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시작하면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원희룡 지사 주민소환운동을 통해 제주의 시민사회운동은 어떤 정치판을 만들고자 하는가? 소환 과정의 정치, 소환 이후의 정치에 어떻게 개입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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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9.07.31 17:04

201957, 국토교통부는 제 3차 신규택지추진계획(신도시 3기 계획)을 발표하고 고양시 창릉과 부천시 대장 등을 추가입지로 지정했다. 이로써 정부가 2018913일에 발표했던 수도권 30만호 공급계획은 완료되었다. 국토교통부는 신규택지까지 지하철을 연장하고 간선급행버스체계(super-BRT) 등의 교통대책도 함께 발표했다. 서울과 가까운 곳에 30만호의 주택이 추가공급되니 수도권의 인구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서울특별시의 인구는 2016년부터 1천만명 선이 무너져서 2018년은 약 976만명이고, 경기도의 인구는 2003년부터 1천만명 선을 넘어서 2018년 약 1,307만명이다. 서울시에서 빠진 인구가 경기도로 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에 2018년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인천광역시의 인구를 합하면 약 2,579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49.77%를 차지한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의 전체 인구 대비 수도권 인구 비율 47.43%보다 2.34%, 121만명이 늘어났다. 인구가 늘어나 주택이 부족해진 걸까? 정부는 주택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공급한다고 하지만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보도자료를 보면 2022년까지 수도권 주택수급은 안정적이다. 그러니 신도시 3기 계획은 2022년 이후의 공급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분권형 국가와 충돌한다. 개헌안이 합의되지 않았지만 청와대가 제시했던 헌법개정안은 제 13항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고 명시했다. 이미 한국은 수도권으로 초집중화된 국가이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한데, 수도권 집중을 강화시키면서 분권을 표방한다니. 차라리 비수도권을 포기한다고 말하면 솔직하기라도 할 텐데, 정부는 다른 한편으론 분권과 균형발전을 얘기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불가능한데도, 어떤 정권을 막론하고 마치 이것이 가능한 것처럼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불가능한 두 마리 토끼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균형발전의 실체는 비수도권의 발전이 아니라 바로 토건정치이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토건정치,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한국의 정치는 전형적인 토건정치이다. 토건국가는 토건업과 정치권이 서로 뒤를 봐주며 재정을 낭비하고 기득권을 보호하는 부패한 국가이자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위기를 심화시키는 위험국가이다. 그리고 토건정치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며 이런 토건국가를 더욱더 강화시키는 정치이자 성장이데올로기를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강요하는 정치이다. 뭐라도 개발하면 삶이 좀 나아지겠지, 라는 주민들의 막연한 기대는 토건정치가 만든 세계관의 결과이다. 문제는 개발의 이익이 주민들에게 거의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 설령 돌아간다해도 개발의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가 더 크다는 점, 이런 부작용을 시작할 때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성장론을 내세웠을 때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기대는 대규모 사회기반시설(SOC)과 같은 토건사업보다 일자리와 소득을 통해 분배에 방점을 두리란 점 때문이었고, 우려는 그럼에도 여전히 성장론에 기반한 경제정책이란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나가면서 기대는 크게 줄어들었고 반면에 우려는 커지고 있다.

제주도민들의 반대에도 강행되는 제주 제2공항, 울릉도와 흑산도의 공항, 24조원 규모의 23개 예비타당성면제사업 허용 등 2년을 경과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대규모 개발사업들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지금 정부에서 시작된 사업은 아니라고 해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사업들이 분별없이 추진되는 상황은 초기의 주장을 의심케 만든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은 201928일에 열린 전국 시장·군수·구청장 오찬 간담회에서 예타 제도는 유지돼야 하지만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역 전략사업을 발굴하고 적극지원해서 지역경제를 도약시키고 국가균형발전의 원동력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더구나 213일 부산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동남권 신공항을 언급했다.

동남권 신공항이 무엇인가?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200510월에 영남권 시도지사들이 동남권 신공항을 만들자는 공동건의문을 올렸고, 노무현 대통령이 이에 관한 검토를 지시했고, 2007년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이를 선거공약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사업타당성이 부족했기에 2010년 지방선거 이후로 미뤄지다 결국 20113월에 신공항 사업은 경제성 부족으로 백지화되었다. 그렇지만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신공항만큼 좋은 선거공약은 없다. 그래서 신공항은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도 공약으로 발표되었지만 2016년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2018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이 가덕도 신공항을 또 꺼내면서 불이 붙었고,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언급했다(후보 시절에 신공항을 언급하기도 했다).

왜 그럴까? 동남권 신공항은 건설비용이 7조원~8조원 정도 되는 대형사업이다. 이 비용과 관련된 이해관계자들은 누구일까? 가장 단순하게는 건설업자, 계약은 대기업이 하지만 실제 공사를 담당할 수많은 하청업체들, 이익을 노리는 투자사들, 타당성 없는 사업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중앙정치인과 지역정치인들, 사업주체인 국토교통부와 산하 공기업인 한국공항공사, 용역계약이나 사업에 참여하는 대학교수를 비롯한 각종 전문가들, 떡고물을 노리는 지역언론사들,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거라 기대하는 자영업자들, 이해관계로 얽힌 각종 관변단체들 등이 이 사업과 연관되어 있다.

이익이 분명한 만큼 동남권 신공항사업은 지금 진행되지 않아도 선거 때마다 계속 등장할 것이다. 엄청난 사업비를 투자하지만 이 사업이 성공할 가능성은 낮다. 그렇지만 지역발전을 명분으로 이 사업은 계속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이명박의 4대강 사업을 비판하지만 이렇게 지역발전을 명분으로 내건 사업들에 대해서는 쉽게 비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대형개발사업들은 지역경제를 살리기는커녕 지주나 건설대기업만 배불리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차라리 주민들에게 현금으로 돈을 나눠주는 게 지역경제에 더 도움을 줄 거란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런 사업들은 매년 반복되고 있다. 그건 이런 토건사업들이 경기를 부흥시키고 유권자들의 표를 모은다는 거짓신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민운동 출신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광화문 지하화나 서부간선도로와 동부간선도로 지하화, 마이스산업과 같은 대형건설사업을 추진하는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 거짓신화를 실현하는데 시민들의 세금을 엄청나게 쓴다는 점이다.

 

2. 균형발전의 실체는 토건잔치!

 

노무현 정부는 2003년부터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공공기관 지방이전 추진 방침을 발표하고 20071월에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따른 혁신도시 건설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전국 10개의 지방자치단체, 부산광역시(동북아해양수도-영도·해운대·남구) 대구광역시(지식창조 브레인시티) 광주광역시·전라남도(그린에너지피아, 나주시) 울산광역시(경관중심 그린에너지폴리스) 강원도(비타민시티, 원주시) 충청북도(교육·문화이노밸리-진천군·음성군) 경상북도(IT·BT드림밸리, 김천시), 전라북도(농업·생명허브, 전주시·완주군) 경상남도(산업자원거점도시, 진주시) 제주도(국제교류·연수폴리스)가 혁신도시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혁신도시사업은 157개의 중앙정부 산하기관, 3만명 이상의 임직원들이 해당 지역으로 옮겨가고, 도시개발비로 당시 화폐로 44조원이 투자되는 대형 국책사업이었다. 1단계로 혁신도시가 건설되고, 2단계로 산학연 클러스터가 조성될 예정이었다.

문제는 정부가 중앙정부, 지방정부, 지역주민의 합의를 통한 정책이라고 밝혔지만 중앙정부가 설계하고 지방정부가 자기 지역의 낙후함을 앞 다투어 호소하며 경쟁하는 방식이었다. 더구나 광역자치단체가 중심이 되면서 혁신도시의 입지를 두고 기초자치단체들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래서 강원도에서 원주시가 혁신도시로 지정되자 강릉시와 춘천시의 주민들이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주민들은 혁신도시 선정을 반대하며 항의하기도 했다. 국가균형발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지역내 격차에 대한 대책이 없었고, 혁신의 성과가 인근 지역으로 전파될 것이라는 당위적인 설명만 있었다.

또한 공공기관의 지방이전이 부추긴 것은 지역들간의 경쟁만이 아니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5년 말까지 전국 10곳의 혁신도시 공시지가 상승률은 타 중소도시의 공시지가 상승률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진주 혁신도시를 포함한 전국 혁신도시 지구의 공시지가 상승률은 11.16%인 데 비해 중소도시 20여 곳의 공시지가 상승률은 4.44%에 불과했다. 혁신도시의 건설은 누구에게 많은 이득을 줬을까?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10곳의 혁신도시에서 토지보상금을 받은 사람들 중 32%가 외지인이었고, 그들 중 42%가 수도권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혁신도시가 만들어지면서 기존의 도심지가 공동화되고 지역 내에서 구도심과 신도심간의 격차가 생겼다. 이러니 문재인 정부는 또 도시재생사업을 한다며 5년간 50조원의 예산을 구도심에 쏟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업이 과연 누구에게 이득이 될까?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지만 혁신도시 건설로 발생한다던 효과들은 과연 어느 정도 검증이 되었을까? 인구가 유입되어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지방정부의 세수도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는 과연 실현되고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도 균형발전이 이렇게 강조될 이유도 없고 수도권 인구도 늘어날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제주도 서귀포시 서호동, 법환동 일원에 건설된 혁신도시는 건설비만 3,473억원을 썼는데, 9개의 공공기관이 이전될 예정이었으나 국토교통인재개발원, 국세공무원교육원, 국세청주류면허지원센터, 국립기상과학원, 공무원연금공단, 국세청 국세상담센터가 이전했고, 한국정보화진흥원의 경우 NIA글로벌센터만 제주에 만들어졌다. 이렇게 이전된 기관들만 보면 솔직히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리고 이 기관이전에 따른 임직원 이주는 8개 기관이 모두 이전해도 743명에 불과했다. 혁신클러스트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수도권 지방이전기업에겐 법인세소득세 6년간 면제, 이후 350% 감면, 지방세에서 취·등록세 면제, 재산세 10년간 100%를 감면한다는 특혜가 붙었지만 201512월 말까지 분양을 신청한 기업체는 10개 불과했다. 국제학교 설립, 외국 영리병원 유치, 전지훈련센터처럼 무리한 사업들만 늘어났다. 효과는 별로 없고 개발의 욕구만 더 강해졌다.

혁신도시정책을 이어받지 않았던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탓일까? 그렇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도 균형발전을 빌미로 광역경제권 활성화, 30대 지역발전선도과제, 지역특화프로젝트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실제 효과는 없었고 사실상 수도권으로의 집중 현상이 심화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만든 제 4차 국가균형발전 5개년계획(2018~2022)지역 주도 혁신적 포용국가라는 목표를 세우고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 추진, 균형발전총괄 지표 개발 및 지역차등지원, 생활밀착형 SOC사업 확대, 지역발전투자협약(계획협약) 본격 추진,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개편, 지역혁신체계 구축을 핵심과제로 제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변화는 지역발전투자협약으로 지자체가 지역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중앙정부와 협의 후 협약을 체결한 뒤 추진한다는 것이다. 걱정되는 점은 이런 계획이 지금까지 해왔듯이 대형개발사업을 부추기고 국공유재산까지 이런 개발을 위해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17개 시도별 역점과제를 보면 산업을 중심으로 한 공간재편전략들이 빼곡하다. 2022년까지 1748천억원을 투입한다는 이 균형발전계획은 과연 비수도권 지역을 활성화시킬 대안일까?

 

3. 균형이 안 되면 압축?

 

마강래는 지방도시 살생부에서 현재까지의 균형발전정책을 작심하고 비판한다. 시작부터 마강래는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지방 중소도시들은 정부예산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조만간 이 문제로 인해 온 나라가 골머리를 썩일 것이라 단언한다. 실제로 많은 예산들이 균형발전, 지역활성화란 명분으로 지방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로 온 나라가 골머리를 썩일 것일지는 잘 모르겠다. 지방소멸론, 한계마을, 인구절벽, 온갖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중앙정부는 토건정치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강래의 주장이 기존의 논의와 가장 다른 점은 쇠락하는 도시들을 위해서라도 지방에 거점 대도시들을 키워야하고, 중앙정부는 이 대도시들이 수도권에 꿀리지 않을 만큼 커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이것이 결론부에서 주장하는 압축도시’, ‘축소도시전략인데, 재정을 골고루 나누지 말고 집중하자는 논리이다.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지방 대도시 몇 개를 키우는 것’, 그리고 지방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상생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이것이 예산의 제약 아래에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진정한 국토균형발전이라고 마강래는 주장한다.

기존의 균형발전론에 대한 비판이 나온 것은 좋은 일이다. 지금까지는 균형발전이 절대선처럼 얘기되어졌으니까. 하지만 이 비판이 제대로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주거 및 상업 등의 도시 기능들을 혼합하고 높은 밀도로 이용하게 하는 실천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밀도 높은 개발을 하고 복합적으로 토지를 이용하고 대중교통을 활성화시키는 전략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도 정치인, 기업, 언론, 대학, 각종 단체 등 온갖 이해관계자들이 먹잇감을 노리고 뛰어드는 토건의 현장에서, 어디가 압축과 축소의 핵심지로 지정되어야 할까? 이미 세종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증명되지 않았나.

사실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잘 안 되었던 점은 아는 지 모르는지 지역사회를 지배해온 개발카르텔에 관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현재까지의 균형발전론이 보인 한계는 이론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요인이 컸다. 제 아무리 좋고 혁신적인 정책들도 한국에만 도입되면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이론적인 설계보다 정치적인 영향력 탓이 컸다. 지금의 기득권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압축/축소전략을 쓴다고 토건의 방향이 달라질까? 한국사회 대부분의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토건 카르텔의 해체 없이 정말 다른 대안이 가능할까?

마강래는 전략을 수정해야 하는 이유로 계속 재정문제를 거론하는데, 국가재정의 진짜 문제는 인구감소로 인한 재정감소보다 부패로 인한 재정낭비이다. “끝도 없는 예산낭비는 큰 효과없는 시장활성화나 조형물보다 단체장들이 치적사업으로 추진하는 대형개발사업에서 비롯된다. 예산의 제약을 논하기 전에 지금까지 예산이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우선일 것 같은데, 마강래는 어려운 과제를 피한다.

인구감소로 인한 공공서비스의 효율성 감소, 지방재정 위기, 고령화로 인한 중앙정부의 복지비용 증가는 최근 들어 새롭게 제기된 문제들이 아니다. 소위 전문가들이 각종 개발사업들의 연구용역사업, 예비타당성조사, 투자심사 등을 그동안 제대로만 했어도 막을 수 있는 사업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왜 그런 예방이 되지 않았을까? 그건 전문가들에게도 개발은 주요한 이해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 저런 전략 제안하는 게 그들에게는 또 다른 시장의 창출이다.

더구나 인구와 고용감소를 통해 위기에 접근하는 마강래의 방식은 사실 기존의 정부가 진행해온 균형발전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대에 닥칠 문제는 재정악화만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전혀 정치적인 의제가 되지 않고 있지만 201951일 영국은 기후변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에서는 오카시오 코르테즈 하원의원이 제시한 그린 뉴딜정책이 많은 관심을 받았고, 뉴질랜드에서는 제로탄소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전 세계에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움직임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4. 균형발전보단 지속가능한 분권을!

 

한국의 토건정치가 여전히 기세를 부리고 있을 때 전 세계 청소년들은 개발과 성장을 멈추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라며 동맹휴업에 나섰고 한국의 청소년들도 기후소송단을 꾸렸다. 2018년 인천 송도에서 열린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 48차 총회에 모인 전 세계 과학자들이 치열하게 토론을 벌여 하나의 문서에 합의했다.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가 바로 그 문서이다. 이 문서는 현재 속도로 지구온난화가 진행될 경우 2030년에서 2052년 사이에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지구 온도가 1.5높아지고 온난화를 줄이려는 노력이 없을 경우 2이상 높아질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1.52의 차이가 뭐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0.5의 차이가 생물종의 다양성과 질병, 가뭄, 태풍, 해수면 상승, 건강, 산업 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지구온난화의 효과가 전 지구인에게 동일한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이 보고서는 소외계층, 토착민, 농민, 도서국가 등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대규모 기후난민이 발생할 거라 예측한다. 실제로 심각한 식량난은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지금 북한도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

지구정치는 이렇게 기후변화에 진지하게 대응하고 있는데, 한국정치는 나 몰라라 토건정치이다. 그렇지만 지구를 떠나지 않는 이상 한국도 이런 세계적인 대응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이 가장 먼저 손봐야 하는 것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높은 산업들인 에너지산업, 제조업, 건설업 등이다. 탄소 배출량이 많은 산업의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고 토건산업도 없애며 효율적인 에너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지금 당장 정치의 과제이다.

현재의 에너지체계는 전국에서 에너지를 생산해서 수도권으로 송전하는 체계이다. 핵발전소 인근 지역들은 사고 위험에 시달리고, 석탄화력발전소 인근 지역들은 사고와 미세먼지에 시달린다. 태양열, 풍력같은 신재생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하지만 농촌 지역에서는 이런 시설들이 주민과의 협의 없이 만들어지며 새로운 갈등을 만들고 있다. 에너지를 많이 생산해서 다른 지역으로 송전하는 대규모 시설보다는 각 지역들이 에너지를 자급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사회가 지속가능할 수 있다. 더구나 한국은 고준위핵폐기물처리장이라는 희대의 숙제를 풀어야 한다. 이용량에 따라 부담을 진다면 고준위핵폐기물처리장의 입지는 수도권이어야 한다. 새로운 토건사업의 기획, 토건에 쏠린 균형발전 이전에 에너지 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라. 지금의 에너지체계에 문제가 생기면 어디서부터 큰 어려움이 생길까? 에너지 위기는 자급력은 떨어지면서도 집중되고 집약된 곳에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수도권과 경쟁할 수 있는 지역의 소중심지들을 만드는 전략은 건설도 문제이지만 그 유지를 위해 주변 지역들을 약탈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이미 소중심지들이 주변 지역 인구를 빨아들이고 있다). 이런 체계를 확산시키는 게 정말 필요할까?

이런 상황에서도 문재인 정부는 스마트공장, 스마트팜, 핀테크, 에너지신산업, 스마트시티, 드론, 미래자동차, 바이오헬스 등 8대 핵심 사업을 8대 혁신성장산업으로 성장하고 추진 중인데, 모두 성장을 전제한 산업들이다. 그런데 이런 성장에 필요한 자원과 에너지는 어떻게 준비될 수 있을까? 정부는 이런 산업을 지역화하기 위해 시험적으로 규제를 푸는 규제 샌드박스정책을 쓰고 국가혁신클러스트를 만든다고 하지만 정말 그것이 지역 특색에 맞는 산업을 만들 수 있을까?

오히려 지금 필요한 건 성장을 위해 만들어온 각종 산업단지와 농공단지 등을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재활용/재사용/자원순환 클러스터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어떤 대안을 제시해도 그것을 토건산업으로 변신시키는 한국에서는 새로운 성장산업보다 기성사회가 만든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가는 산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균형발전을 빌미로 토건산업을 추진하고 막대한 국가재정을 낭비하는 것보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준비할 수 있도록 각 지역이 지역에너지체계를 만들고 재활용/재사용산업을 활성화시켜 다양한 일자리를 마련하고 시설보다 사람에게 투자하도록 기본소득과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전환은 쉽지 않다. 선거제도 개혁을 비롯한 패스트트랙에 관한 합의는 험난하지만 예비타당성조사면제사업에 관한 협상은 놀라울 정도로 여야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국회의원들이 선물보따리를 들고 지역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2020415, 21대 총선이 1년도 남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의 시간이다. 그들은 어려운 과제는 다 피하고 손쉽게 개발공약들을 쏟아낼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미래세대의 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아니, 더 정확히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을까? 이제는 발전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당, 야당이 아니라 한국의 토건정치와 싸우고 성장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사회의 핵심 의제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전환 없이는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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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9.01.24 23:14

                                                                                                         하승우

자본주의 잔혹사와 연대의 전령

 

반가운 연대자, 아룬다티 로이는 가장 낮은 곳, 가장 깊은 곳을 들리는 사람이다. 로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벌거벗은 산과 죽은 강, 말라붙은 우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잡는 작가이다. 국내에 소개된 다른 저작들에서 그랬듯이,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에서도 로이는 생명을 갈아 이윤을 만드는 자본주의라는 악마의 맷돌과 그 회전력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 관해, 그들이 지키려는 생명에 관해 얘기하고,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작가의 통찰력으로 해석하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잔혹한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인도 카슈미르의 작은 사과 산지 쇼피안을 급하게 들렸다 나오던 로이는 희생자의 아버지에게 급하게 전해 받은 따뜻한 삶은 달걀의 전복적인 힘”(119)을 이야기한다. 온기가 남아 있는 삶은 달걀은 누구도 찾지 않는 곳을 방문한 반가운 이에게나 건네질 수 있는 선물이고, 그 힘은 연대자만이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아직 포기하지도 지지도 않았다는. 로이의 글에서는 이 작은 것들의 전복적인 힘이 느껴진다.

로이의 이야기가 우리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주변 곳곳에서도 이런 참상들을 목격할 수 있으니. 다만 이 이야기는 인도인의 삶 속으로, 신자유주의에서 배제당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러면서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냐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제주도를 떠올렸다. 미군정과 국가폭력이 만든 4.3이라는 비극적인 참사를 경험한 땅, 끔찍한 비극 이후에도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관광지로 끊임없이 소비된 땅. 섬을 찾은 외지인에게 슬퍼도 웃기를 강요당하는 섬. 민주화 이후에도 발전을 빌미로 1991년에 제주도개발특별법이 제정되고, 급기야 2006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와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합친 특별법이 제정된 섬.

1991년에 제주도개발특별법이 제정될 당시 고 양용찬씨는 나는 우리의 살과 뼈를 갉아먹으며 노리개로 만드는 세계적 관광지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 제주도를 원한다며 분신했다. 사람과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한다며 국제자유도시를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은 양용찬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의식했을까? 제주도민들은 국제자유도시라는 비전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더구나 2006년의 특별법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이하 개발센터)라는 특별한 기관을 승인했다. 제주공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들리는 면세점이 이 개발센터의 영업장이다. 당시 정부는 개발센터를 위해 내국인의 면세점 이용을 허용했고, 이로서 한 해에 면세점 수입만 5천억원 이상 거두는 대기업이 된 개발센터는 그 이윤으로 제주도를 난개발하고 있다. 신화역사공원, 헬스케어타운, 휴양형 주거단지, 국제문화복합단지, 영어교육도시 등 이름만 들어서는 그 성격을 알기 어려운 개발사업들이 하나둘씩 개발센터의 이름으로 추진되었고 개발센터는 대대적인 개발을 위해 싱가폴과 중국 등의 외국 자본까지 끌어들였다.

특이한 점은 개발센터가 오로지 국제자유도시 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국토교통부 산하의 공기업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제주특별법에 따르면 개발센터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제 147조에 따르면, “개발사업을 시행하려는 자는 도지사의 시행승인을 받아야 한다. 다만, 개발사업을 실행하려는 자가 국가 또는 개발센터인 경우에는 도지사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즉 개발센터는 도지사의 시행승인이 필요하지 않은 유일한 기업이다. 또한 제 164조 제 1항은 국가 또는 제주자치도는 개발센터가 과학기술단지의 조성, 투자진흥지구의 입주기업에 임대할 용지매입비의 융자, 토지 등의 임대료 감면과 그 밖의 개발사업에 드는 자금의 지원을 요청하면 최대한 지원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개발센터가 개발계획을 세우면 국가와 제주도청이 이를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개 기업이 주민들의 토지를 강제수용하고 마을공동체를 위협한다. 21세기 한국의 민낯인데, 육지 사람들은 이런 현실에 관심이 없다.

아룬다티 로이가 비판하는 인도의 대기업 타타 그룹, 진달 그룹 등은 정부를 등에 업고 군대의 폭력까지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인도가 똑같지는 않다. 인도에서는 마오주의 테러리스트라는 딱지가 붙으면, 개발에 반대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한국은 그 정도의 폭력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렇지만 용산참사 때 이미 경찰은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리적인 폭력의 강도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 둘의 방향이 다르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압도적 개발 규모 앞에선 그 어떤 반대도 무기력해진다. “길이 1500킬로미터에 너비 300킬로미터의 그 널따란 통로는 초거대 산업지대 아홉 곳, 고속화물 라인, 항구 세 곳, 공항 여섯 곳, 교차로 없는 6차선 고속도로, 그리고 4000메가와트급 전력공장을 포함하는 델리 뭄바이 산업회랑(이하 DMIC)과 연결될 것”(32~33쪽)이고, 그 프로젝트는 "18000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거라고 한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신도시 몇 곳이 건설될 것이라는 예측과, 그 지역 인구가 현재의 23100만 명에서 2019년에는 31400만 명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추산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7년 만에 말이다.”(33)

제주도에 제2공항을 지으려는 국토교통부나 제주도지사는 말한다. 2025년까지 관광객을 4천 5백만 명으로 늘리려면, 인구 1백만명이 되려면, 성산읍에 제2공항을 지어야 한다고. 7년 만에 관광객 수가 두 배 이상 늘어나고 주민이 1/3이상 늘어날거라 말한다. 하지만 공항을 지으려면 제주도의 오름을 10여개나 깎아내야 하고 천연동굴을 매립해야 한다는 사실은 가볍게 무시된다. 심지어 성산읍 주민들은 국토부가 제2공항 건설을 발표하고 난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주도청의 산하기관인 제주관광공사의 조사에 따라도 제주도의 환경수용력은 이미 포화상태이고 관광객 2천만명을 넘어서면 혼잡비용과 폐기물처리비용 등으로 사회적 비용이 관광수익을 넘게 된다. 무비자 입국까지 허용하며 국외에서 관광객을 모으고 있지만 정작 지역경제나 도민들의 삶이 더 팍팍해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무시된다. 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개발일까?

그리고 현지 주민들이 모르게 진행되는 인도의 공청회와 성산읍 주민들도 모르게 진행되는 제주도 제2공항은 얼마나 다를까? 지역 주민들의 생각도 묻지 않고 추진되는 온갖 개발사업들, 인도와 한국은 얼마나 다를까?

이렇듯 자본주의는 사람과 자연을 갈아 넣어 이윤의 재료로 삼는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조용히 진행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 정책과 기업에 맞서고 있다. 강정마을의 4천일이 넘는 투쟁과 삼성전자 사옥 앞 반올림 농성 1천일이 말해주듯 이미 끝나버린 압도적인 싸움처럼 보여도 여전히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그 존재는 늘 다른 존재의 등불이 된다그리고 언젠가는 로이의 말처럼 단테와다의 죽은 이들도 말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죽은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죽은 토지, 죽은 강, 죽은 산, 그리고 죽은 숲속의 죽은 생물들이 청문회를 요구할 것이다.”(105) 산 자들은 이 요구들을 들을 준비를 해야 하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요구를 준비할 연대의 전령들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로이가 비판하고 있듯이 한국에서도 이런 전령들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다. 지식인들이 주관하는 이런 저런 행사들은 많지만 죽어가는 것들 곁을 지키며 그 이야기를 전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누가 자본주의를 돕고 있나?

 

로이가 저주하는 대상은 대기업, 초국적 자본들이지만 분노하는 대상은 바로 지식인들이다. 국가와 기업들은 옛날처럼 노골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멈추진 않지만 그걸 드러내놓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언론과 지식인들을 길들이고 그들을 위한 축제를 연다. “숲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그 축제의 후원사들이 한 역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발 디딜 틈 없는 감옥들을 다룬 기사는 거의 없었다. 반정부적인 생각을 품는 것조차 재판심리 가능한 범죄행위로 만드는 불법행위예방법과 차티스가르 특별 대중보안법에 관한 기사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지역주민들의 진정을 처리하기 위한 타타 철강의 의무공청회가 실제 그 소재지인 로핸디구다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진 자그달푸르의 지방행정관청 구내에서, 용역 방청객 50명과 무장경비대의 감시 속에서 열렸다는 사실 역시 다루어지지 않았다.”(36~37)

한국의 상황도 비슷하다. 2016년에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제정을 막는다며 국회의원들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9일 동안 진행했다. 그런데 당시 반대와 개정 의사를 표명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지만 테러방지법은 전혀 개정되지 않고 있다. 테러방지법이 개정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이나 언론, 학자는 없다. 너희가 쓰면 위험하지만 우리가 쓰면 괜찮다는 식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당시 테러방지법은 테러를 예비 또는 음모하거나 그렇다고 의심할 이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국정원이다. 예를 들어, 테러방지법 제 9조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장은 테러위험인물에 대하여 출입국, 금융거래 및 통신이용 등 관련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정보원장은 대테러활동에 필요한 정보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대테러조사 및 테러위험인물에 대한 추적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전 또는 사후에 대책위원회 위원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로이가 얘기하는 반정부적인 생각을 품는 것조차 범죄행위로 만드는 인도의 불법행위예방법과 의심을 받을 만한 점이 있다는 이유로 추적을 하는 한국의 테러방지법, 얼마나 다를까? 공포를 이용한 통치는 누구에게 이로울까?

로이는 정부와 기업이 시민단체와 활동가들도 길들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민중이 더 이상 봉기하지 않도록 그들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대가로 이들은 정부와 기업의 지원을 받고 축제를 연다. 그래서 로이는 가난에는 큰 돈이 걸려 있고, 노벨상도 몇 개 끼어 있다”(49)고 비판한다. 한 때 가난한 사람들의 구세주처럼 얘기되고 노벨상까지 받았지만 그들의 등골을 빼먹고 있는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도 마찬가지이다(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은 라미아 카림의 가난을 팝니다』(박소현 옮김, 오월의 봄, 2015)에 적혀 있다). 그래서 로이는 "가난에는 큰 돈이 걸려 있고, 노벨상도 몇 개 끼어 있다"(49쪽)고 비판한다.

대다수 비정부기구들, 특히 기금이 빵빵한 기구들의 임무는 기업의 전 지구화라는 프로젝트를 밀어붙이는 것이지 방해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말이다. 수십억 달러의 돈으로 무장한 이런 비정부기구들은 세계 곳곳에 침투해 혁명가의 재목들을 월급쟁이 활동가들로, 펀드(공익기금) 유치 전문가로, 지식인들로, 그리고 영화제작자들로 바꾸어놓고, 그들을 살살 달래서 정면대결을 피하게 만들고, 다문화주의, 성 평등, 공동체 발전의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들의 담론은 정체성 정치학과 인권의 언어로 쓰인다. 정의의 개념이 인권산업으로 탈바꿈한 것은 비정부기구와 재단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개념적 쿠데타였다.”(59)

이는 로이만의 주장도 아니다. 피터 도베르뉴와 제네비브 르바론은 저항 주식회사: 진보는 어떻게 자본을 배불리는가』(황성원 옮김, 동녘, 2015)에서 전 세계의 많은 운동가들이 기업의 언어를 구사하고 기업이나 국가의 신경을 긁을 수 있는 부분들을 자기 검열하면서 한때의 저항이 저항주식회사로 화려하게 변신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그 증거로 운동이 기업의 원리와 방식을 받아들이고 기업형 모금 활동에 집중하며 운동이 브랜드화하는 현상을 지적한다. 안보와 안전을 내세워 시민사회운동을 탄압하는 국가와, 삶을 사유화하고 개인화하는 자본주의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데, 이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조직하는 시민사회운동의 힘은 약화되고 있다는 평가이다.

운동이 프로젝트화되고 비영리를 내세우며 운동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이곳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민운동가 출신의 시장이 통치하는 서울특별시를 보면 그 모순이 잘 드러난다. 한편으로 시민참여, 공동체, 혁신이 얘기되고 있지만 지한에선 도로가 뚫리고 터널이 만들어지고 지하광장까지 생긴다. 그런데 이를 비판하는 시민사회단체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서울의 그 많은 단체들은,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옮긴이에 따르면, 로이는 이 책의 주제를 현대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이라 말했다 한다. 예전의 작동방식이 가혹한 착취였다면, 지금의 작동방식은 우리를 길들이고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을 체제 속에 묶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로이는 그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등장하는 유령처럼 이제 밝은 빛에 대한 동경에서 벗어나 포근한 어둠에 안길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밤을 도둑맞은 사람들이 유령처럼 배회하며 기득권층에게 위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밝은 성벽을 넘으려는 민중들을 통해 가능할지 모른다.

 

 

유령을 불러들일 안두릴은 어디에?

 

2011년에 미국에서 시작된 오큐파이 운동은 99퍼센트 민중의 힘으로 1퍼센트 기득권의 힘에 맞서겠다고 선언했다. 로이는 오큐파이 운동을 지지하는 미국 뉴스쿨에서의 연설에서 스스로를 마개주의자와 뚜껑주의자로 소개한다. 불평등한 체제의 뚜껑을 덮을 뚜껑주의자, 고삐풀린 부와 재산축적에 마개를 꽂아넣을 마개주의자로서 로이는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건다.

첫째, 기업 교차소유를 금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무기제조사들이 텔레비전 방송국을 소유해서는 안 되고, 채굴기업들이 신문사를 운영해서는 안 됩니다. 기업들이 대학에 기금을 대서도 안 되고, 제약회사들이 공공보건기금을 멋대로 주물럭거려서도 안 됩니다.

둘째, 천연자원과 물, 전력, 건강, 그리고 교육 같은 필수적 사회기반시설은 민영화될 수 없습니다.

셋째, 모든 사람이 주거, 교육 그리고 보건의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넷째, 부자의 자녀들이 부모의 부를 물려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 투쟁은 우리의 상상력을 다시금 흔들어 깨웠습니다. 자본주의는 어느새 정의라는 개념을 그저 인권이라는 뜻으로 주저앉혔고, 평등을 꿈꾸는 것을 불경한 행위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싸움의 목적은 체제를 수선해보겠다고 찔끔찔끔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갈아엎는 것입니다.”(149~150)

 

로이의 말대로 체제를 수선하는 것이 아닌 갈아엎는 전복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파괴되고 짓밟히는 것들의 목소리를 들어온 로이에겐 이 부조리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답답함에 로이는 책 곳곳에서 인권운동이나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이 반자본주의 운동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권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엄청난 불의들을 인지하거나 어렴풋이라도 이해하기 위한 프리즘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개념적 쿠데타는 재단들이 페미니스트운동에 개입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인도의 대다수 공식적페미니스트들과 여성단체들은 어째서 그들 자신의 공동체 내의 가부장제와 단다카란야 숲에서 강제이주를 강요하는 채굴기업들에 맞서 싸우는 아디바시 여성 혁명위원회 소속 9만 명의 여성들과 거리를 두려 하는가? 수백만 여성들이 소유하고 일하던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는 것은 어째서 페미니즘의 문제가 될 수 없는가?”(60)


지금 이곳 한국에서도 정체성의 정치와 전복적인 상상력을 연결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다. 이미 제정된 인권조례들이 폐지되고 같은 사회운동단체에서조차 갈래치기 당하는 상황은 혼란을 낳고 있다. 더구나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논리적인 가치판단을 방해하고 특정 언론매체의 영향력이 기본적인 사실확인절차를 압도하는 한국사회에서 체제의 전복을 꿈꾼다는 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외려 한반도 평화라는 급진성이 통일대박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뒤섞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로이가 그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어디에 서야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은 안두릴이라는 칼을 이용해 유령들과 거래하고 적을 물리친다. 산자의 절박함과 죽은 자의 속죄를 이어줄 힘은 어디에 있을까? 가장 낮은 곳, 가장 엄습한 곳을 찾는 연대자의 눈에는 그 힘이 보일 거라 믿는다. 우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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