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협특별위원회가 주관하는 대학생협 아카데미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일상을 비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부딪쳐보는 수밖에...^^;;
헐, 전날에 강의하는 분이 고미숙 선생이시네.
어쩌면 적절한 배합일지도...^^;;
프레시안에 보낸 글인데, 제목이 바뀌었다.

가급적 예의를 지키려 한 글인데 제목이 바뀌어 좀 그렇게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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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불편했다기보다는 내용을 다루는 방식과 문체 때문이었다. 문체를 누누이 강조해온 분이 이런 좋은 얘기를 왜 이런 문체로 썼을까?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은 이후 고미숙 선생의 책을 읽을 때면 비슷한 불편함이 느껴진다. 우린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얘기하면 될 것을, 너네는 왜 우리처럼 못 사니라고 쪼아대니 불편할 수밖에.


그래서 서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지 않았다면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읽지 않았을 책을 굳이 읽고 서평을 쓰는 오지랖은 불편함을 전하고 다음번에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수다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 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서평을 부탁받기 전에 알고 있었다. 동네 청년들과 함께 책을 읽는데, 그 모임에서 고미숙 선생의 『호모 에로스』를 읽었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에로스를 글로 배웠습니다’라는 감상문을 썼다. 책의 제목은 에로스인데 몸이나 에로스에 관한 구체적인 실화는 없고(심지어 원나잇스탠드에 대한 적개심이 드러나고!) 난데없이 세미나 얘기가 튀어나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니 <지붕뚫고 하이킥2>의 ‘애교를 글로 배웠습니다’ 편이 생각났다, 이런 감상문이었다. 그런데 출판사가 이 글에 새 책이 나왔다는 트랙백을 걸어 놨다(불편한 글에도 트랙백을 거는 출판사의 센스?).


사실 『호모 코뮤니타스』도 비슷한 느낌으로 읽었다(이게 나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호모 코뮤니타스』의 구성은 『호모 에로스』와 비슷했다. 요즘 세태에 대한 적당한 비판(주변 사람들에게 적절히 모은 정보들), 돈을 잘 벌고 쓰는 노하우, 돈에 대한 상상력, 에필로그이다. 두 책의 다른 점은 고미숙 선생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한 세 사람의 글이 함께 들어가 있다는 점 정도? 구성이 책의 내용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리고 시리즈라서 구성이 비슷할 수도 있지만, 그 구성상 현실에 대한 재기발랄한(?) 비판이 달인의 노하우로 잘 연결되지 않는다.


모두가 부유한 삶이라는 헛된 꿈을 향해 질주하는 우리 사회의 풍경이야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이 책은 그 대안으로 학교에 다니지 말고 가족에 얽매이지 않고 젊었을 때 사서 고생하라고, 비슷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과 더부살이하며 공동체를 꾸리라고 충고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좋은 얘기들이다.


그런데 이 얘기들은 몇 권의 책을 읽는 세미나 시간에 나눴던 수다를 책으로 옮긴 듯하다. 물론 그런 수다의 내용이 소중하지만 그런 수다가 책으로 나오려면 적어도 몇몇 사람들의 “개별적이고 일상적 차원의 윤리나 실천”만이 아니라 “경제구조나 정책적 사안”도 담아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요즘 부모들이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명분 가운데 하나가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다.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자식들이 기죽지 않고 살려면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명목하에서”라는 현실진단이나 “이게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아주 평균적인 행보다. 이 행보가 주욱 이어지다 보면 ‘쇼핑족들의 헤븐’이라는 홍콩까지 드나들게 된단다”라는 진단은 좀 당황스럽다. 수다를 떠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현실일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진단을 현실감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몇 사람의 수다가 아니라 사회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면 조금 더 사회계층 피라미드의 밑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대안을 자유로이 선택하며 누릴 수 있는 사람들보다 대안에 냉소하고 때론 대안을 증오하기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책의 좋은 얘기들은 불가능한 것의 상상이 아니라 가능한 사람들의 여유로 그치지 쉽다.


예를 들어, 책은 가족과 분리된 삶을 찬양하지만 사실 그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이다. 마치 몇몇 대안학교들이 ‘자기 아이들’을 공부도 잘 하고 놀기도 잘 놀고 예술적인 아이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욕망을 반영하듯이. 하지만 가족을 거북이등껍질처럼 이고 살아 온 사람들에겐 “부모의 가난은 자식한테는 차라리 축복”이라는 말처럼 불편한 말도 없다.


격월간 잡지 《민들레》 69호에서 현병호 선생은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에 대한 불편함을 털어놓았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단지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을 만든 사람은 아마도 지독한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리라. 가난은 불편을 넘어 생존을 위협하는 두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아침에 배달되는 도시락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독거노인이나, 아이를 키우면서 끼니 걱정을 해본 사람이라면 저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게다.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무료 급식을 받아야 점심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도 가난은 불편을 넘어서 자존감을 갉아먹는 벌레 같은 것이다.” 책을 읽으며 비슷한 불편함을 느꼈다.



우리들의 탐욕 아니면 청승, 그들의 공동체?



책을 읽으며 가장 당혹스러웠던 부분은 강연료 얘기를 할 때이다. 자신의 얘기를 듣고자 청한 단체에게 강연료 얘기를 꺼내고 정신노동의 화폐가치를 얘기하며 “풋, 더 어이없다”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게 우연한 만남의 기회와 장을 마련해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책 곳곳에서 비노바 바베나 마하트마 간디의 얘기를 칭송하니 어리둥절하다. 바베나 간디도 자신의 얘기를 듣고자 청한 단체에게 그렇게 반응했을까?


이런 불일치가 실수로 느껴지지 않는 건 마쓰모토 하지메의 행동을 “화폐에 대한 통쾌한 복수”라고 얘기하면서 <수유+너머>가 보증금 1억에 월세 천만 원을 내며 돈이 “흘러오는 만큼 다시 흘러가게” 하는 단체라고 자랑(?)할 때이다. 허나 일본에서 곧 헐릴 건물을 수리해서 활용하는 ‘아마추어의 반란’과 비교한다면 <수유+너머>는 이미 가난뱅이와 무관하다(오히려 서울 해방촌의 ‘빈집’이 하지메와 더 가깝다). 책을 읽다 문득 개그 콘서트의 행복전도사가 생각났다. “이 정도는 누구나 하잖아요. 이 정도도 못하면 그건 공동체가 아니잖아요, 그냥 청승이지.” 옛날 살던 옥탑방에서 길 건너편 래미안 아파트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한겨울에 수도파이프 얼어 터질까 걱정하며 주방창문 열고 담배 한 대 피는데, 저쪽에서는 반팔 입은 사람들이 거실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책에서 고미숙 선생이 예로 드는 대안은 좋은 세상이지만 <수유+너머>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만의 세상이다. 그 공동체 밖의 세상에 관한 얘기는 거의 없고 가끔 있더라도 언론에서 다뤄지는 기사처럼 매우 추상적이고 현실감이 떨어진다(참고로 얘기하자면 한국에 분당시는 없고 <문탁네트워크>는 용인시 수지구에 있다). 자기 공동체의 단단함과 이런 삶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 밖의 세계를 접하지 않고 자기 세계의 원리가 보편타당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수유+너머>가 쪼개져서 전국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다지만 그 공동체는 여전히 자기만의 원리로 움직이는 공동체이다(<수유+너머>라는 이름을 내건 단체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는 게 인문학적으로 긍정적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 역시 공동체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가급적이면 말을 가려서 쓰는데, 그 이유는 공동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자기만족감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즐기는 건 그들의 자유이다. 허나 그런 공동체가 대안공동체를 자처하며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면 좀 불편해진다. 화폐 없이 생활하는 공동체들이 많아지는 건 분명 우리사회의 축복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재미있고 행복하게 사니 우리의 방식을 따르라고 말하는 건 오만이다.


이 세상에는 몰라서 못 사는 사람보다 알아도 못 사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나름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는 생각대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디딤돌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디딤돌이 될 때 운동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 공동체는 공간 내에서의 차이와 증여보다 공간 밖과의 강한 충돌을 겪으며 조금씩 확장될 것이다. 독자로서 나는 그런 충돌에 관한 얘기가,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보다 실패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사람들의 얘기가 더 궁금하다.


돌아가신 장일순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도둑을 만나면 도둑이 돼서 얘기를 나눠야 해요. 도둑은 절대 샌님 말은 안 들어요.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도둑이다 싶으면 그때부터 말문을 열기 시작한단 이 말이에요. 그때 도둑질을 하려면 없는 사람 것 한두 푼 훔치려 하지 말고 있는 사람 것을 털고 그것도 없는 사람과 나눠 쓰면 좋지 않겠냐고 하면 알아들어요. 부처님은 마흔네 개의 얼굴을 갖고 계시다는 말이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이 말이에요.”


미숙씨가 쓴 [호모 에로스]라는 책을 읽었다.
느티나무 도서관에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책을 읽기로 했는데, 어떤 책을 읽었으면 좋겠냐는 말에 역시 그 또래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주제가 선택되었다.
한 친구가 고미숙씨의 [호모 에로스]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말에 그러자고 답을 했다.

사실 나는 고미숙씨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뭐랄까, 지나친 자기확신이랄까,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으며 느꼈던 불편함과 몇몇 잡지 인터뷰를 보면서 느꼈던 뜨악함, 그리고 최근 [열하일기] 번역과 관련된 여러 가지 얘기들, 뭐 이런 것 때문에 좋아하진 않지만, 그 친구들이 좋아할 이유도 있겠다 싶어 한번 읽어봤다.

내가 나이를 먹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내용은 별로 없다.
내 사랑을 타인에게 투영하지 말고 내 자신을 찾아라, 과잉하지도 냉소하지도 말라, 자기의 몸과 정직한 대화를 나눠라, 몸의 감응력, 내공을 길러라, 뭐 이정도...

그런데 나는 책을 읽으며 자꾸 지붕뚫고 하이킥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애교를 글로 배웠습니다'라는...
사랑과 에로스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사랑에 대한 원론적인 주장이나 분석이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만들어내는 그 다양한 변주에 대해서는 별반 내용이 없다.
마치 글로 배운 듯한 얘기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으니 웃음이 날 수밖에...

사람의 손을 잡고 만지고 껴안고 키스하고 애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그 많은 에너지와 생각들, 사람을 생각하는 것과 사람을 만지고 느끼는 것 사이에 놓인 그 차이를 고미숙씨는 잘 모르는 듯하다.
정말 쿵푸하듯 열심히 에로스를 배운 듯한 느낌만이(왜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니 책 제목은 에로스이지만 에로스에 관한 얘기는 없다. 아마도 고미숙씨는 에로스를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지 않는 '원나잇스탠드'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고, 설령 '원나잇스탠드'라 할지라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양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하다.
그냥 누군가의 이야기에 기대어 얘기를 풀어갈 뿐 실감나는 얘기가 없다.

그러다 마지막 부분에서 고미숙씨가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하며 "사랑을 할땐 공부를 하라"는 얘기에선 웃음이 아니라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랑을 할 때 세미나를 하라니, 이게 무슨 에로스적이지 않은 소리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고미숙씨가 인용한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이라는 책을 진정 열심히 읽어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마음과 몸으로 나누는 그 많은 대화들이, 다양한 생활들이 그렇게 간단히 재단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울러 나는 평론가인 고미숙씨가 김선우 시인의 '목포항'이라는 시를 잘 이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무쪼록 사랑과 에로스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호모 에로스]를 읽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알랭 드 보통의 표현을 빌린다면, [호모 에로스] 역시 '쾌락 파시즘'의 변종일 뿐이다.

김선우 시인의 '목포항'은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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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때 아니게 <열하일기>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문학자인 영남대 김혈조 교수가 <열하일기> 완벽본을 내면서 기존 번역본의 오역을 조목조목 지적했기 때문이다. 특히 김혈조 교수는 작년에 <열하일기>를 세계 최초의 여행기라 소개한 고미숙 등의 번역본이 북한의 리상호 번역본을 그대로 따랐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녹색평론> 2009년 11-1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김혈조 교수는 "고미숙본은 리상호본에 윤색을 가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예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난해한 문장의 오역일수록 더욱 베낌의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인명․지명 등의 고유명사와 전고 부분에 집중된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자신을 <열하일기>의 전령사라 자처했고 길진숙, 김풍기 등과 함께 <열하일기> 번역본을 낸 고미숙 평론가는 아마도 이 지적에 충분한 답을 해야 할 듯하다. 고미숙 평론가는 "꼬박 5년"  동안 이 책을 번역했고, 원문을 꼼꼼히 새기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찾기 위해 한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김풍기, 길진숙 등과 공동작업을 추진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도중에 보리출판사에서 북한판 완역본이 나와 "완역의 부담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밝히긴 했지만 풀어쓰기가 아니라 번역이란 말을 썼다면 답해야 할 부분이 분명 있는 셈이다. 더구나 최근 들어 [열하일기]가 잇따라 번역된 건 고미숙 평론가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고 더구나 고미숙 평론가가 그토록 강조했던 부분이 박지원의 '문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한 입장이 필요하다 하겠다.

번역이 반역이 되지 않으려면 많은 논쟁이 필요하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논쟁을 통해 더욱더 풍성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면 그건 학문의 발전에도 큰 도움을 준다. 어떤 이야깃거리가 나올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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