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청와대는 한 달에 한번이나 격주에 한번씩 ‘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라는 코너로 대통령이 라디오에서 연설을 한다고 밝혔다. 인터넷과 웹 2.0의 시대에 대통령은 왜 케케묵은 라디오를 선택했을까? 그리고 방송사의 PD들이나 언론단체들은 대통령이 라디오에서 말 좀 하겠다는데 왜 난리를 치며 반대할까? 도대체 라디오가 뭐 길래?

 

괴벨스의 입

 

세계 최초의 라디오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무선으로 전신 신호를 주고받는 단순한 기계였다. 라디오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보통 독일의 마르코니(G. Marconi)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세르비아 출신의 미국 과학자 테슬라(N. Tesla)가 처음 발명했다. 한때 발명왕 에디슨(T.A. Edison)과 일을 하기도 했던 테슬라는 마르코니보다 먼저 라디오를 발명하고 1897년에 미국 특허를 출원했지만 1904년 마르코니에게 특허권을 빼앗긴다(에디슨은 우리가 위인전에서 받았던 좋은 이미지와 달리 이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어쨌거나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탄생한 라디오는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괴벨스(P.J. Goebbels)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독일 나치당의 선전장관으로 활동하던 괴벨스는 독일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라디오를 활용했다. 나치는 독일의 모든 가정에 라디오를 보급하고 그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와 자신들의 계획을 국민들의 귀에 반복해서 불어넣었다(나중에 괴벨스는 세계 최초로 정기TV방송을 시작했고 올림픽을 그 기회로 삼았다).

당시의 라디오는 ‘괴벨스의 입’이라 불렸다. 괴벨스는 “우리는 방송중계를 통해서 민중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청취자에게 우리 집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서 조형적인 그림을 전달해야 한다. 지도자의 연설을 준비하는 도입 연설을 언제나 내가 맡아 하면서, 청취자에게 우리 대중집회의 마법과 분위기를 전달하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요아힘 C. 페스트 지음, 안인회 옮김, 『히틀러 평전』, 푸른숲, 723~724쪽). 라디오는 연설만이 아니라 각종 집회의 분위기도 그대로 각 가정으로 전달했다. 집에 있는 사람들도 마치 나치당의 집회에 와 있는 것처럼 함께 호흡하며 흥분과 전율에 몸을 떨었다.

거짓말도 자꾸 들으면 진실처럼 들리듯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라고 괴벨스가 자신 있게 말할 정도였다.

한때 자신들의 이웃이었던 유대인들을 무조건 잡아가고 가둘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거짓말 탓이었다. 심지어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할 때조차도 국민들은 독일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소년병들이 그 거짓 승리를 위해 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그렇지 속지 않았다면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패배한 전쟁에 내보낼까).

라디오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효과는 또 다른 사건으로도 증명되었다. 1938년 10월 미국 CBS방송국의 PD였던 오슨 웰즈(O. Welles)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자신이 쓴 『화성침공』이라는 드라마 대본을 방송했다. 외계인의 침입을 알리는 속보가 나오자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짐을 싸서 피난을 떠나거나 총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 사건은 라디오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시켜 줬다.

그래서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원하는 바대로 그들을 조종하기 위해 라디오를 이용했다.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언제나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의 귓속으로 바로 전달할 수 있으니 누군들 그 힘을 이용하고 싶지 않을까? 인터넷의 시대에 좀 구리긴 하지만 라디오를 이용하려는 권력자의 발상은 이런 의도를 담고 있다.

일본의 작가 요시미 슌야(吉見俊哉)는 『소리의 자본주의』(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5)에서 그 의도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현대사회에서 라디오가 소통보다 일방적인 주장을 전하며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을, 나아가 사회적 현실의 성립을 거의 전면에 걸쳐 점령해버렸다”는 점은 분명하다(25쪽). 라디오를 통과한 소리는 장소를 초월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세계를 동질화시킨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매개이자 “‘소리’를 부르주아적인 기호로서 유통시키고 소비해가려는 사회적 전략”인 ‘소리의 자본주의’를 구성했다(45쪽).

 

당신의 취향, 라디오

 

영화 <아는 여자>에서 이연(이나영 役)의 취미는 라디오 듣기이다. 이연은 말 그대로 라디오를 들으며 일하고 휴식을 취한다. 버스기사나 택시운전사처럼 혼자 일하는 사람들에게 라디오는 작은 즐거움을 준다.

현대사회에서 라디오는 상품과 초대권이 뿌려지는 행운의 장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정겨운 얘기가 공유되며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이는 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운과 기억을 통해 라디오는 아직 살만한 현실이라며 사람들을 ‘위안’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과 정겨운 이야기들은 우리의 마음을 다독이며 위로한다.

그런데 그렇게 긴장이 풀어지면서 슬그머니 광고 메시지가 끼어든다. 텔레비전과 달리 라디오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요즘은 인터넷을 이용해 보이는 라디오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흘러나오는 전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누가 노래와 사연을 고르고 왜 그런 물건을 상품으로 주는지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냥 라디오의 ‘수다’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맡길 뿐이다.

피카르트(M. Picard)는 그런 수다가 사물 속에 깃든 신성(神性)인 ‘침묵’을 파괴한다고 얘기했다. 잡스러운 소리를 생산하는 라디오가 침묵의 모든 영역을 점령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서히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간다. “인간의 모든 느낌, 의욕, 지식이 라디오에 의해서 생기고 인간 자체가 라디오를 통해서 비로소 인격체가 된다. 라디오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이 생긴다. 라디오를 통해서 처음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느낀다.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려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어떤 사람 혹은 일거리를 필요로 하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된다.”(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침묵의 세계』, 까치, 201쪽)

라디오가 전달하는 많은 메시지에 익숙해지면 그 무엇도 판단할 수 없고, 의미 있는 말조차 수다에 묻혀버린다. 결국 “라디오는 인간을 더 이상 말에 귀 기울이지 않도록 길들인다. 그것은 곧 인간이 인간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인간을 당신으로부터, 당신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당신을 떼어놓는다는, 따라서 사랑으로부터 당신을 떼어놓는다는 뜻이다.”(같은 책, 209쪽)

 

볼륨을 높여라!

 

그런데 이런 라디오도 한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이크를 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라디오는 전혀 다른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예술가 찰리 채플린(C. Chaplin)은 자신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 라디오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히틀러를 꼭 빼닮은 주인공은 히틀러 대신 마이크를 잡고 괴벨스의 입을 통해 자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비행기와 라디오 방송은 우리를 더욱 가깝게 연결 시켰습니다. 이러한 발명의 진짜 의도는 인간의 선함에 전 지구적 형제애와 우리 모두의 화합을 호소하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내 목소리가 세계 방방곡곡에 울려 퍼져나가 인간을 고문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가두는 제도에 희생된 수백만의 절망하고 있는 남녀노소에게까지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채플린이 마이크를 잡는 순간 라디오는 괴벨스의 입에서 자유의 나팔수로 변한다.

이처럼 현실에서 강제로 입막음을 당한 사람들은 권력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신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그 논리에 도전하는 발신자가 되기도 한다. 영화 <볼륨을 높여라>에 등장하는 마크(크리스챤 슐레이터 役)도 발신자의 입장에서 위안이 아니라 ‘비판’을 가한다.

캄캄한 지하실, 레너드 코헨의 “Everybody knows”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면 고등학생 마크는 디제이 ‘해피 해리’로 변신한다. 마크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세상과 학교, 가족, 친구들에 대한 불만은 무형의 전파를 타고 비슷한 응어리를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마크의 독백은 학교 친구들의 호응을 얻으며 어느새 ‘해적방송’으로 성장한다. 진실은 바이러스처럼 퍼진다(실제로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무선라디오를 기반으로 한 지역공동체와 네트워크가 구성되었다).

영화 <라디오스타>에서도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열정을 잃어버린 락가수 최곤(박중훈 役)이 조그만 도시의 라디오 DJ를 맡으면서 마을에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아니, 사실은 최곤이 DJ 역할을 성실하게 하지 않아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마이크를 잡으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일방적으로 방송을 내보내던 라디오는 어느 순간 마을의 소식통이 되고 사람들이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라디오는 잡스런 소리가 아니라 의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가 된다.

이런 이야기는 영화 속에만 있지 않다. 전파법이 개정되어 소출력라디오방송이 허용되면서 한국에서도 마을라디오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의 <마포 FM>이 대표적인 예이다(http://www.mapofm.net). 마포 주변에서 FM 100.7Mhz에 주파수를 맞추면 들을 수 있는 <마포 FM>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와 함께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있다.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L양장점’, 여성주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꽃다방’, 장애인들이 마이크를 잡는 ‘함께쓰는 희망노트’, 노점상인들을 위한 ‘희망마차’ 등의 프로그램은 그 성격을 잘 보여준다.

라디오 자체는 비어 있는 물건이다.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파시즘의 매체로, 아니면 민주주의의 매체로도 활용될 수 있다. 그것은 침묵을 파괴하는 소외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희망을 기르는 공동체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진정한 라디오스타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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