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인의 '라 광야' 전시회에 가는 걸 조금은 망설였다. 온갖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평화라는 가냘픈 가치를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폭력에 밥숟갈 하나 얹으려 파병을 결심하는 나라에 사는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래서 카메라 셔터에 담긴 순간적인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도 함께 손을 잡고 갈 각시(나는 아내라는 말보다 각시라는 말이 좋다)가 있고, 박노해 시인이 기록한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느린걸음, 2007)이란 책을 읽었기에, 강연으로 맺은 나눔문화 사람들과의 인연이 있었기에 전시회로 향할 수 있었다.

전시회장에 들어서면 외지인을 반기는 차라는 샤이와 함께 박노해 시인이 팔레스타인과 터키, 시리아 국경을 넘나들며 찍은 삶을 접하게 된다. 예상대로 마음이 무겁다. 폭력과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앙상한 자연과 파괴된 건물이 남아 있고 그 폐허 속에 사람이 산다. 아무도 살지 못할 것 같은 그곳에 사람들이 짧은 미래를 살아가고 있다.



마음 한 켠에서는 내가 그곳에 살지 않기에, 내가 사진의 주인공이 아니기에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나 역시 그 곳의 주민임을 자각하게 된다. 사진 속의 마을은 저기 먼 나라의 풍경이 아니다. 그곳에 용산이 있고 새만금이 있다. 그 속에 해군기지 때문에 쫓겨날 제주도 강정마을의 주민들이 있고, 생태공원 때문에 밀려날 팔당의 농민들이 있다. 사진 속에는 4대강 사업이 파괴할 생명들이 보인다.

우리는 진정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까? 지금 이 땅에서도 소리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총을 든 폭력과 서서히 숨을 죄어오는 개발의 폭력에서 무겁고 가벼움을 구분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착각’은 눈 앞의 진실을 가린다. 하루 아침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평생의 터전에서 쫓겨날 사람들의 마음을 우리는 정녕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다르게 살고 있다 자신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래도 폐허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희망이 싹튼다. 폐허를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고, 먼 길 찾아온 시인을 반기는 사람들의 ‘환대’가 있다. 메마른 땅이라고 어찌 생명과 반가이 맞이하는 문화가 싹트지 않겠는가? 가톨릭노동자운동을 벌였던 피터 모린의 말처럼 모든 곳에는 하느님의 집과 방이 있고, “아무도 부유해지려고 하지 않으면 모두가 부유해질 것”이고,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아직까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구걸하지 않고 ‘존엄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며 평화를 요구한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시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 풍경이 아니라 삶을 담고자 흑백사진을 고집한다는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아마도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박노해 시인이 평화와 나눔을, 소박한 삶을 선택한 건 그런 만남의 덕이 아닌가 한다. 이제 그 자신이 새로운 만남의 끈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진이 이렇게 쓰이게 되리라는 것은 짐작도 못했다. 저마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 종종걸음으로 외면하고 지나가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레바논을 살립시다, 이스라엘의 폭격을 중단시킵시다, 정말이지 위축되는 목소리로 외치며, 한 사람의 눈길이라도 더 붙잡아 보려 기를 쓰며 서명을 호소하다 ‘우리의 미약한 행동이 과연 이 거대한 전쟁 앞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무력감에 몸서리를 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 광경을 담은 사진 한 장이 발휘하는 힘을 보면서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평화는 힘이 세다. 평화는 무력하지만, 평화는 힘이 세다.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이 어디 있겠는가?” 어쩌면 이 사진전은 그런 다짐을 확인하는 시인의 마음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 만남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당당히 평화를 요구하고 있는가? 진실이 무겁게 어깨를 누르며 짐 하나를 더 얹는다.

전시회를 다녀온 뒤 새벽에 일어나 잠든 각시의 얼굴을 봤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각시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다.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며 한편으론 두려움이 들었다.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게 좋은 일일까 생각을 했었다.

이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저 세상에서 나와 함께 짐을 나눠질 새로운 사람이 오는구나, 그 사람을 반가이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구나,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만들어갈 세계를 고민한다.

나눔문화가 보내주는 숨고르기에 실린 박노해 시인의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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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을 먹을 때
가위로 자르지 마라
그 사람과 절교의 식사가 아니라면

김치를 먹을 때
가위로 자르지 마라
오랜 인연과 결별의 만찬이 아니라면

끈을 묶을 때
풀 때를 생각하며 사려 깊게 매듭을 지어라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게 하지 마라

가위는 반듯이 오릴 때만 써라
단절과 파괴를 위해 가위를 들지 마라
가위는 오직 창조를 위한 단절에만 써라

사람 관계도 일의 정리도
세상을 바꾸는 투쟁도 그러하다
살리고 나누고 창조를 위해서만 가위를 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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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된 저작권법에 따르면 이렇게 시를 나누는 것도 문제삼을 수 있다는 말씀.
그러니 이 얼마나 각박한 세상인가.
법을 어기는 게 바로 사는 법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저작권법에 대해서는 가위를 써야 할 듯.^^

그나저나 박노해 시인은 아나키스트로 전향했나?
파괴를 향한 열정이 창조를 향한 열정이라는 바쿠닌의 느낌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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