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은 그것이 뿌리를 내리는 환경에 맞춰 자신의 형태를 조금씩 바꾼다. 사상의 본뜻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는 없겠으나 그 뜻이 드러나는 방식과 강조점은 조금씩 바뀌는 듯하다. 이것을 ‘변화’라 얘기하기는 어렵겠고 일종의 ‘접목’ 또는 사상을 현실에 ‘접붙이는’ 과정으로 봐야 할 듯하다.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아나키즘의 역사, 아나키스트의 삶을 봐도 그런 접붙이기가 드러나고 있다.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일본 군국주의의 성장을 보며 반전평화운동을 강조했고 그런 군국주의 성장을 방치했던 무능한 의회주의를 반대하며 직접 생산을 통제하는 생디칼리즘을 자기 신조로 삼았다. 이런 성격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빠른 산업화 과정을 밟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출현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개화에 앞장섰던 만큼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은 선진 제국의 문물과 사상을 빠르게 받아들였던 듯하다.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중국사회의 봉건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령 왕조나 군벌, 보수적인 유교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노장사상이나 고대 사상이 강조했던 이상사회의 모습을 자기 속에 품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류스페이는 전통사상과 아나키즘을 뒤섞어 중국식 아나키즘을 만들려 했던 것 같다. 신세기파 역시 서구 문물을 빠르게 수용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 충(忠)이나 효(孝), 족(族)을 강조하는 중국 전통과 단절하려 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고 약육강식의 민족주의를 완화시키는 방식으로 아나키즘의 상호진화론을 수용했다. 민족주의는 한국 아나키즘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이자 그것을 한계짓는 요소이기도 했다. 아나키즘은 대동사상을 비롯한 민족주의운동과 손을 잡으면서 그들을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그만큼 국가나 민족을 부정하는 성격이 약화되기도 했다. 신채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인상적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으니 이를 특색이라 칭하면 노예의 특색이다.” 신채호가 뜻한 바는 분명 왕이나 특정 인물의 나라가 아니겠으나 조선의 의미는 우리가 밝혀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이렇게 조금씩 나라마다 그 특성이 다르기는 했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로를 집어삼키려 으르렁 거리던 시절에도 아나키스트들은 국경을 넘어, 애국심이라는 틀을 넘어 서로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실천을 공유했다. 인상적인 구절을 소개하면, “중국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일본 아나키스트의 활동, 일본과 중국 아나키스트의 지원을 받아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한인 혁명가들, 아나키즘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조직들, 상하이노동대학이나 푸젠성 농촌자위운동에 참여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연합 활동 등이 그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이들의 초국가주의 연대의식은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매우 이채로운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45쪽)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떠한가?

역사가 뒤엉켜 있기에 동아시아의 민중들이 함께 고민하고 미래를 모색해야 할 다양한 과제들이 있다. 식량, 에너지, 생태 등 식민지/제국의 관계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연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민중이 공동의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동아시아의 민중이 상호부조를 실현하며 국가가 아닌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 방법은 있을까? 만일 그런 방법이 있다면, 우리는 과거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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