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 대학원보에 쓴 글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공포의 실체가 무엇인지 좀 드러내보려 했다.
어쩌면 드러난 명박이보다 그것의 실체 없음, 사람들의 생각하지 않음이 그 실체일지 모르겠다는 추측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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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족족’ 검거하기 바라고 설사 인도에 산재되어 있더라도 공격적으로 쫓아가서 검거해 주길 바랍니다. 검거위주로 해서 시위대를 좀 많이 잡아야 돼”, 시위대를 보면 무조건 쫓아가서 잡으라는 경찰의 섬뜩한 무전내용이다. 그런데 이 무전의 시점은 과거 군사정권 때가 아니다. 2009년 5월 촛불 1주년 집회 때 주상용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일선 경찰에게 내린 명령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최근의 상황을 보면 그런 면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서 다시 ‘반대’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했던 단체들은 불법폭력시위단체로 규정되어 정부지원이나 기업지원에서 배제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국가브랜드와 국가경쟁력을 갉아먹는 집단이기주의로, 철거민들은 도심 테러리스트로 내몰리고 있다. 얼마 전 박원순 변호사는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기도 했고, 군조직인 기무사가 움직인다는 소문도 솔솔 퍼지고 있다. 또한 정부는 새로운 저항의 양산박으로 떠오른 인터넷을 저작권법, 통신비밀보호법, 정보통신망법 등 각종 법들로 규제하려고 들고 있다.

정부에 반대하기 때문에 사회의 악으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은 대화와 설득의 대상이 아니기에 더 이상 정치는 필요 없다. 이렇게 정부의 억압이 강해지고 정치가 사라지면서 ‘파시즘’, ‘파쇼’, ‘전체주의’같은 단어들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면이 공포의 전부는 아니다.

 

플루토크라트와 대중의 공포

 

옆 나라 일본에서는 불안을 뜻하는 precarious와 노동자를 뜻하는 proletariat의 합성어인 프리케리아트(precariat)라는 말이 유행이라 한다. 미래를 계획하며 삶을 준비할 수 없는 비정규직/일용직 시대, 효율성과 경쟁력만을 강조하는 승자독식의 시대를 사는 노동자는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불안을 나눠 갖는 건 아니다. 금권정치(金權政治)를 뜻하는 플루토크라트(plutocrat)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나라, 한국을 잘 설명해주는 단어이기도 하다. 재벌 총수들은 줄줄이 사면되고 파업노동자와 촛불시위대는 줄줄이 감옥으로 향하는 나라, 고위공직자들의 부패가 능력으로 가난한 이들의 몸부림이 떼잡이로 낙인을 찍히는 나라에서는 공포도 사람을 가린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안함을 견뎌야하는 대중은 자기 삶을 틀어쥔 금권정치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재래시장이 대형마트나 기업형슈퍼만한 경쟁력을 갖추는 ‘미션 임파시블’을 강요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도 못내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건 권력의 무서움보다 삶의 가벼움 때문이다. 사람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건 폭력적인 이명박 정부보다 갑작스런 경제위기나 철거, 실업, 비참한 상처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1920년대의 대공황과 혼란 역시 사람들에게 이런 두려움을 줬다. 그리고 그 시대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체제를 출현시켰다. 이 체제는 수많은 유대인, 집시, 빈민들을 죽음의 벼랑으로 밀었을 뿐 아니라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8)를 쓴 힐베르크(R. Hilberg)의 표현을 빈다면) 독일인의 일상을 ‘파괴기계’로 만들었다. 600만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Eichmann)의 인상은 피에 굶주린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공무원이자 옆집 아저씨였다. 악마는 사악한 의도를 가진 범죄자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협조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숨은 악마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사람을 생명이 아니라 사물로 대하는 사회 시스템이었다.

 

불확실성의 생존경쟁, 전체주의의 작동방식

 

사실 그 원인을 분명하게 알면 사람들은 그다지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화장실의 귀신, 거울 속의 내 모습이 공포스러운 건 그것이 우리 일상 속에 잠재해 있을 뿐 아니라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식으로 등장할지 모르는 공포, 규칙도 합리성도 없는 공포, 그런 점에서 바우만(Z. Bauman)은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에서 불확실함이야말로 공포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얘기한다. 정체를 모르기에 맞서 싸워볼 의지조차 품을 수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공포이다. 그리고 그런 공포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전벨트를 단단히 차고, 한층 더 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홀로 남겨지는 공포, 추방당하는 공포”야말로 공포의 최고봉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한길사, 2006)에서 전체주의 지배의 가장 큰 특징이 비밀경찰이나 친위대같은 폭력적인 국가기구보다 ‘무정형(無定形)의 지배구조’라고 지적했다. 공무원과 정당, 정당 밖의 돌격대 등 여러 세력들이 제각기 지도자의 뜻을 받들고 있다며 주장하고 경쟁하는 구조에서는 어떤 사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6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어느 누구도 용산참사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고 4대강 사업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회, 그러면서도 “지도자의 의지는 모든 곳에서 언제나 구현될 수 있으며, 지도자는 어떤 위계질서에도, 심지어 그 스스로 구축한 것에도 묶이지 않”는 사회가 바로 전체주의 사회이다.

더 나아가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불러오는 공포에 대한 오해도 지적한다. 전체주의 공포정치는 정치적인 반대파를 제거할 때가 아니라 그들을 제거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공포정치의 필수품인 숙청과 비밀경찰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파가 사라지고 난 뒤에 등장하고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시민을 감시한다. 이들은 국가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객관적인 적’을 규정하고 “생각할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용의자”를 만든다. 지목된 용의자들은 갑자기 ‘수용소’에 갇히고 이 사회에서 사라진다(올 10월 7일 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이주노동자 미누가 잠복해 있던 출입국관리소 단속반원들에게 갑자기 표적단속되어 추방을 기다리고 있듯이). 어느 순간에 어떤 이유로 용의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시민들은 서로를 고발하며 충성을 증명하고, 그렇게 서로에게 죄를 지으며 그 체제의 공범자가 되고,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그 정권을 지키려 안간힘을 다한다. 전체주의는 모래알처럼 분리된 대중에 의해 힘을 얻고 그렇게 지속된다.

전체주의의 진정한 무서움은 드러난 억압보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서로를 불신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에 있다. 눈에 드러난 독재자보다 형체 없는 지배가, 승자독식의 파괴적인 사회에 홀로 버려져 있다는 대중의 두려움이 전체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다.

 

공포와 희망의 변증법

 

허나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암울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저항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우리 역사를 살펴봐도, 언제나 시민들의 수많은 저항이 강력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려 왔다. 현실세계의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사람들은 사이버 세계에 진지를 구축하고 키보드 워리어로 변신하기도 한다. 한편으론 공포에 시달리지만 그 공포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스스로 희망의 뿌리를 내리려 한다. 억압을 감내하는 능동적인 정치행위와 동료 시민에 대한 믿음․연대는 전체주의 체제에 조금씩 균열을 내면서 희망을 퍼트리고 공포를 몰아낸다.

하지만 단지 눈에 보이는 정치인을 바꾸거나 정권을 바꾸는 것으론 부족하다. 권력의 형체를 드러내고 승자독식의 경쟁구도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시민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공포의 정치는 언제든 다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생산하고 함께 다스리는 삶의 기반을 다질 때에만 우리는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

가장 급한 과제는 모래알처럼 분리되어 적대적으로 경쟁하는 대중에서 벗어나 서로 보살피고 협동하는 시민이 되는 것이다. 공포를 희망으로 만들 변증법의 힘은 서로의 고통에 슬퍼하고 연민하는 시민들의 소통과 공감, 울림에서 나온다. 의심을 거두고 먼저 손을 내밀어야 희망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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