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끝! 정치 끝?

: 축하의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이르다



6․2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완패로 끝이 났다. 한나라당은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자리를 지켰지만 서울시 내 25개 구청장 중 단 4개만을 차지했다. 서울시의회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전체 106석 중 27석을 차지했다. 경기도에서도 한나라당은 31개 시장․군수 선거에서 단 10개를 차지했고, 도의회 전체 124석 중 42석을 차지했다. 어렵게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자리를 지키긴 했지만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기는 어렵게 되었다.


허나 한나라당의 완패가 ‘선거의 승리’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번 선거결과를 보면 한나라당이 빠진 자리를 대부분 민주당이 채웠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 공천과정 때 민주당 내부에서는 전략공천, 이중당적, 공천뒤집기 등의 잡음이 터져 나왔다. 개혁정당의 공천과정에서 벌어지면 안 될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투표가 권력을 이겼다”는 민주당 정세균 대표의 말은 본질을 감추려는 시도이다.


교육감 선거에서는 곽노현, 김상곤 등의 진보교육감 후보들이 6명이나 당선되며 교육정책의 변화를 예고했지만 정치인을 뽑는 선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여러 지역에서 착실히 활동을 해 왔던 풀뿌리 후보들이 중앙정치의 바람에 밀려 낙선한 점은, 그리고 민주당이라는 이유만으로 검증되지 않은 후보들이 다수의 표를 얻은 상황은 그 불안함을 예고한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정당득표율을 봐도 비슷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더욱더 불안한 건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이기려는 ‘반MB연합’, 선거연합이 선거 이후에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상급식 찬성, 4대강 반대 외에 ‘반MB연합’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며 공통의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당선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민주당 후보로 단일화했고 그렇게 당선된 지역에서 야권연대는 어떤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 지금처럼 단체장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지방자치제도 하에서 공동지방정부는 어떻게 작동될까? 특히 단체장만이 아니라 지방의회에서도 민주당이 많은 의석을 확보한 상황에서 권력분점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번 선거에서 표를 몰아줬던 지역주민들은 이런 권력구조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이런 정치구조에 대한 논의 없이 무조건 단일화한 지역일수록 선거의 후폭풍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선거 결과는 한나라당과 청와대의 오만함과 독선에 경고를 보냈다는 점만을 보장할 뿐이다. 그마저도 저들이 정책을 얼마나 변화시킬지는 지켜봐야 할 부분이고 어쩌면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어서 여론을 바꾸고 조작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니 선거로 경고했으니 알아서 하겠지라며 손을 놓을 게 아니라 더욱더 적극적으로 각각의 사안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리고 민주당이나 다른 정당이 집권한 지역에서도 후보들이 제대로 일하는지 감시해야 한다. 무상급식이나 4대강사업 반대 외에 지역사회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사실 무상급식은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한나라당 후보들조차 공약으로 내걸 정도로 많은 예산이나 정책전환이 필요하지 않은 공약이고, 4대강사업 반대는 국책사업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지방정부의 간섭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민주당 후보들이 내건 공약들을 살펴보면 그 규모만 작을 뿐 4대강사업과 비슷한 형태의 개발공약들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쓸데없는 개발사업들로 지역토호들의 배를 불리지는 않는지, 선거를 도왔다는 이유로 특혜를 받는 사람들은 없는지, 내가 낸 세금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틈틈이 지방자치단체의 홈페이지에 들려서 지역사회의 비전이 제대로 만들어지고 정책이 집행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가끔 지방의회에 방청을 가서 뽑아준 의원들이 제 몫을 다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지역의 학교와 복지관, 도서관, 주민자치센터 등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겉만 뻔지르르하고 속은 곯아서 우리 삶을 위협하는 정책은 없는지 계속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경기도지사, 서울시장을 지지했던 표의 수라면 주민들이 직접 조례를 발의할 수 있고 중요한 정책에 관한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도 있다. 만일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이 선거 때 약속했던 것과 다른 행동을 하거나 실패할 정책을 추진한다면 주민소환제도를 통해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다.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정치인들이 긴장하며 일꾼 역할을 제대로 한다.


잘 뽑아줬으니 정치인들이 알아서 잘 하리라고 믿는다면 큰 착각이다. 주인이 일을 제대로 시키지 않으면 머슴들은 주인을 깔보기 마련이다. 그러면 “갈아봤자 소용없다”는 우리사회의 정치불신은 또다시 높아질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늘어났다면, 지금 우리는 그런 불신과 냉소를 가라앉힐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


 

모두들 살기 힘든 세상이라 얘기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는데도 도무지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삶에서 어떤 부분이 부족해서 행복을 예감하기 어려울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저는 중요한 원인이 자발성의 부족과 공적 행복에 대한 무지라고 봅니다. 한때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는 효율적인 사회를 만들려면 그들 사이에 신뢰와 규범, 연결망이 필요하다는 얘기였지요. 그런 사회자본이 형성되려면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런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며 파트너십을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관계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도시화된 한국사회에서 ‘이웃사촌’은 이미 옛날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요즘처럼 남과 경쟁하느라 바쁜 시절에 누가 남과 관계를 맺으려 할까요? 오히려 관계를 맺으면 맘 편히 경쟁하기 어렵고 내 요구를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어려우니 모르고 사는 게 더 좋고 편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사회처럼 개인주의를 따르는 합리성이 옳다며 스스로를 위안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상황은 이미 변하고 있습니다. 실업과 에너지 위기, 식량위기, 온갖 위기들을 헤쳐가려면 혼자 힘으론 불가능하다는 점을 미국인들도 차츰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젖어왔던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볼링을 즐기던 생활에서 벗어나 공동체에서 자원활동을 하며 관계의 가치를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개인주의를 보지만 정작 미국사회는 공동체주의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다양한 자원활동이 시도되며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라고 생각하면 등을 돌리게 됩니다. 자원활동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려면 주어진 역할보다 스스로 계획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즉 자원활동가들의 권한이 커져야 합니다. 자원해서 하는 일이니만큼 반드시 참여자들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평범한 시민이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때 첫걸음을 떼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꼭 내가 해야 하나?”, “괜히 참여했다가 나만 피곤해지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계속 머리를 떠돕니다. 그러다보면 조심스런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첫걸음을 쉽게 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과정은 먼저 걸음을 뗀 사람들의 모습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아, 나도 관심을 가지고 자원활동을 시작하면 저런 행복을 느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첫걸음을 떼기가 쉽습니다. 반면에 “와, 저거 굉장히 귀찮고 어렵겠구나


시작부터 이런 계획이 성공하긴 어렵습니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사람이 성장하듯이 자원활동도 처음에는 더디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관심도 넓어지고 활동력도 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실패의 여부가 계획의 의미와 중요성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패보다는 그 일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길 수 있도록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시민들의 역량이 강화되어야만 자원활동의 힘도 강해집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건 구체적인 정보입니다. 함께 하자고 아무리 권해도 정보가 없으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마을이나 공동체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가 참여자의 눈높이에 맞춰져서 제공되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마을에 대한 꼼꼼한 조사를 진행해서 주민들의 욕구나 공동체의 필요를 밝혀내고 그 조사과정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참여의 장으로 유도할 수 있습니다. 정보 없이는 참여가 어렵습니다.


구체적인 권한과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사람들의 선한 마음에만 매달리면 자원활동이 계속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한국처럼 노동시간이 길고 보육, 교육 등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이 높은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그런 점에서 자원봉사센터가 그런 정보를 제공하고 시민들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풀뿌리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풀뿌리라는 말을 되뇌는 건 다시 떳떳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풀뿌리는 단순히 아래로부터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 ‘운동의 전략’이 아닙니다. 오히려 풀뿌리는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보자는, 서로의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입니다.

따라서 자원활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야 하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그래서 자원활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를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자원활동은 변화의 과정이면서 그 자체가 변화의 목표여야 합니다.


그런데 풀뿌리가 희망이려면 서로의 삶이 지금보다 더 많이 얽혀야 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생활하는 이들이 소중하지만 더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관계를 더 찢어놓고 경쟁을 시키려는 사회에 맞서 손을 잡아야 합니다. 손조차 쉽게 내밀 수 없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끌어주고 그들이 스스로 자기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서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사는 지역사회를 경험하고 분석하며 내가 누구와 함께 사는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는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독립운동을 분석하면서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는 행복이라는 말을 개인의 생활에만 쓰는데, 아렌트는 혁명과 독립이라는 큰 사건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자유에 행복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독재자 밑에서 개인들의 삶이 행복할 수 없듯이, 참된 행복은 건강하고 올바른 공동체에서 생활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 그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요즘처럼 어지럽고 복잡한 시대에 진정 자유로운 자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아렌트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원활동은 단순히 남을 위한 활동이 아닙니다. 자원활동은 나를 위한 활동이고 내게 도움을 주는 사회적인 관계를 위한 활동입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 부족에는 “아이 하나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 하나 키우는 게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지를 알려주는 말이지만 아이 한 명에 온 마을의 관계가 얽혀있어야 한다는 말도 됩니다. 이렇게 관계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게 살려면 다른 사람도 더불어 행복해야 하고, 마을에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나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원활동도 결국에는 나의 행복을 위한 활동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행복해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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