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사회연구소의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민주화 이후 관료주의의 경향이 더욱더 강해졌다는 느낌을 글로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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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학자 베버는 관료제를 쇠창살(iron cage)이라 불렀다. 베버는 근대사회의 도구적 합리성이 다른 가치나 윤리, 초월성을 압도하면 기계적인 계산과 영혼 없는 통제와 관리가 사회를 지배할 것이라 봤다. 민주주의가 이런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베버는 믿지 않았다. 외려 관료제가 민주주의를 압도할 것이라 그는 믿었다.

안타깝게도 베버의 오래된 예측은 지금 이곳 한국에서 실현되고 있다. 경제나 행정의 합리성이 생활세계의 합리성을 식민화해도 생활세계의 의사소통 합리성이 이런 침입을 막아낼 것이라는 하버마스의 기대는 우리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 권력과 화폐의 힘이 소통의 힘을 압도하고 있다.

물론 동물원의 동물들이 살아있듯이 쇠창살에 갇힌다고 우리가 죽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때로는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우리 스스로가 그런 관리를 택하기도 한다. 개발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거나 풍요롭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거나 알아도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한다. 힘겹게 싸워서 막아도 몇 년 뒤에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현실은 힘든 싸움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허나 그렇게 물러서면 우리의 삶, 미래세대의 삶은 어찌할 것인가? 창살에 갇혀 있어도 우리의 의식이 그 창살을 넘어서고 끊임없이 탈출을 꿈꾼다면 언젠가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1. 왜 변화가 어려운가?

 

개발주의나 신개발주의의 문제는 이미 여러 차례 다뤄진 주제이다. 그런데도 왜 변화가 없을까?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는 건 무지나 정보의 부족보다 현실적인 힘의 역학관계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시민단체나 시민사회의 힘보다 정부나 대기업, 그들의 지배를 받는 대중매체의 힘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바꾸기 어렵다는 얘기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시민단체나 시민사회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해지거나 정부나 대기업, 대중매체의 힘이 급격하게 약해지지 않는 한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일처럼 결론은 분명하지만 현실적인 방법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를 조금 꼼꼼히 뜯어보면 정부나 재벌, 언론사라는 개별 정치세력만큼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중앙정부가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점, 중앙정부에서도 대통령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점(제왕적 대통령제도), 지방정부에서도 단체장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점(로컬 로얄 패밀리), 토건자본과 권력의 결탁관계, 중앙언론이 전국을 지배하는 현상 등이 개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구조만 바뀌더라도 개발주의의 힘이 제법 약해지겠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은 과제이다. 더구나 세계화가 개발주의를 부추기는 측면도 나타나고 있고, 전 지구적인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논리가 개발과 발전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구조적인 문제이기에 쉽게 해결되기 어렵지만 다른 한편으론 민주화가 이런 문제점들을 서서히 해결하리란 기대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도 있다. 시각을 조금 더 넓혀보면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직도 개화기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19세기 개화를 이끌었던 인물들은 백성이 근대적인 국민으로 거듭나서 주체로 성장할 때까지 입헌주의를 유보하고 관료들의 효율적인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관료들이 국정 운영의 주체가 되어 국가 자원과 국민 역량을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배분․조직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과거제 폐지와 성과급 제도의 도입, 그리고 관리의 상공업 종사 허용 등”을 생각했다(허동현, 2000: 257). 한국사회에서 국익이나 공공성은 시민사회의 합의가 아니라 정부조직의 지시나 발표로 정의된다.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는 이런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인식이 이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한편으론 지식인들의 탓도 크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시민사회의 힘을 강화시키는 본래의 역할보다 권력이나 자본과 결탁해서 이익을 보는데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의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후마니타스, 2008)은 지식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노골적인 결탁이 아니더라도 지식인의 자율성 자체가 정부나 자본의 영향을 받으며 흔들리고 있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와 관련된 연구들은 “제도도입과 분권 등 전체적으로 ‘제도’의 수준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지방자치의 발전에 대한 평가 역시 제도적 변화수준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띤다. 반면에 “궁극적인 서비스의 개선과 자치과정 그리고 실제적 삶의 질은 연구의 대상에서 미미한 부분을 차지”하고 “그 결과 주민들이 체감하는 지방자치의 효능감 내지 소망성과 연구자의 시각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존재”한다(이종수, 2008: 45). 지난 20년 넘게 민주화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시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들은 아직도 지식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지식사회와 시민사회가 괴리되면서 묘한 긴장관계마저 생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구조를 변화시킬 새로운 합리성이 등장하기 어렵다.

이런 다양한 조건들이 맞물려 한국사회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이런 조건들을 강요하는 한국의 강력한 관료제도가 존재한다.

 

 

2. 민주화와 한국의 관료제의 확장

 

경기도 성남시의 경우 민선 1기부터 4기까지 단체장 모두가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현재의 시당국은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국민이 반대의사를 밝혔지만 4대강사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 왜 이런 어이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질까? 정치학자 조현연은 이렇게 답한다. “민주화는 국가를 운영할 집권 정치 엘리트와 선출되지 않은 국가행정관료 엘리트 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요구하면서 일종의 권력투쟁이 개시된다. 정치 엘리트들이 선거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국가관료에 반대해서 자신들의 목표를 촉진하기 위해 투쟁하게 된다는 사실 자체는, 투쟁의 결과가 어떻든 관료제의 권력 표시인 동시에 선거와 민주적 절차에 대해 위협을 제기할 수 있는 관료제의 능력 표시인 것이다. 결국 ‘국가관료제가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창출’하는 가운데 정치 엘리트와 국가관료 엘리트 사이에는 끊임없이 긴장과 갈등이 발생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은 하나의 공생적 관계를 이룬다.”(조현연, 2009: 139) 즉 민주화가 진행되더라도 관료제의 능력과 힘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관료들과 협조하며 공생해야 한다. 소수의 진보적인 인물들이 권력을 잡더라도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힘든 건 바로 이 강력한 관료제 때문이다. 민주화가 진행되더라도 자동적으로 관료제가 몰락하지는 않는다.

일찍이 베버는 이런 현상을 예언했다. 중앙집권화된 거대국가가 자신의 행정적인 업무를 양적으로 늘려가면 대중정당이나 다른 정치세력도 그에 발맞춰 관료화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관료와 대표자의 유착 현상은 이미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관료제는 '수동적 민주주의(passive democracy)'의 출현, 즉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평준화(the leveling of the governed)와 동시에 진행된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는 관료제의 힘을 빼기는커녕 그 힘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 전체 관료기구의 규모가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시민의 삶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국가기구를 운영하는 관료들은 끊임없이 지식의 체계를 축적 발전시켰다. 한 국가나 지역의 인구이동․기예․농업기술․주민의 건강상태․산업기술에 대한 조사는 특정한 권력과 지식이 연관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지식의 확보 없이는 통치가 매우 잠정적이고 불안정한 수준에 머물 것이기 때문에, 지식은 그 지식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권력 체계와 순환관계로 이어져 있다. 마찬가지로 지식은 권력 효과들을 유도하고 확장한다(윤평중, 1992). 즉 지식과 권력은 분리되지 않고 바로 지식이 국가의 행정적 능력을 강화시키고 권력효과를 확산하는데 일조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중립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를 관리하고 감시하기 위한 장치이다. 민주화 시기에 관료제는 자기 조직의 합리성을 더욱더 부각시키면서 권력을 효과를 극대화시키려 한다.

물론 관료들이 대통령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의 의지를 무조건 거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합리성이 침범당한다고 느끼면 관료조직은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이를 민주화의 논리로 포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대중 정부가 관료제의 개혁을 위해 개방형 임용제도를 마련하자 관료들은 강하게 저항했다. 군사정부 시절과 달리 민간정부 하에서 한국의 관료들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위의 안정성과 재량권이 이미 제도화됨에 따라” “최고지도자를 1차적인 봉사대상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제도적 이익을 1차적인 봉사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주경일․김미나, 2006: 188) 이런 저항은 고위관료일수록 더욱더 강해지는데, 그것은 이들의 태생 탓이기도 하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사관학교 출신들을 대거 일반직 5급 공무원으로 특별채용하는 유신사무관제도가 실시되었는데, 2001년까지도 육사출신이 중앙부처의 1~3급 고위직 중 7%를 차지할 만큼 그 잔재가 남아 있다(주경일․김미나, 2006: 283).

민주화를 거치면서 과거 권위주의적인 지도자에게 복종하던 관료제는 이제 상급자, 명령권자에 대한 복종으로 자신을 변화시킨다. 이런 변화는 특정한 효과를 불러오는데, “최고 위치의 한 사람을 제외하면 한 상급자는 또 다른 상급자의 부하이며, 위에서 받은 명령을 아래로 전달하고 그 성취 여부를 평가하는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모든 관료들은 아닐지라도 거의 대부분의 관료들은 자신에게 떨어지는 명령의 기원을 모호하게, ‘저기 위에서’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이중의 효과를 낸다. 첫째, 책임의 ‘부동浮動’이다. 책임의 소재를 정확하게 짚고 묻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며, 단지 실제적인 목적에서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는 결론으로 몰리게 된다. 둘째, 이들 관료들이 따라야 할 명령은 절대적이고 저항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신의 명령’에 비해 결코 덜 강력하지 않다”(바우만, 2009: 146~147). 이런 관료조직의 성격은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훼손시킨다.

한국에서는 관료제가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과정에 다른 요인들도 개입한다. “1960년대 이래 본격화된 산업화와 도시화는 엄청난 공공수요를 유발시켰고 이 과정에서 관료들은 예산, 인력, 규제행위 등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는 점,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권위주의, 정의(情誼)주의(personalism), 가족주의 문화에 숙달된 국민들의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관존민비’ 의식”, “분단 상황에서 조성된 반공과 안보 이데올로기, 그리고 성장 이데올로기는 흑백논리와 비밀주의를 조장하고 관료의 독주를 가속화시킴으로써 국민들에게 관료의존적 사고를 뿌리내리게 하였다”는 점, “국회를 비롯한 여타 정책 행위자들이 관료제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였으며, 정치권력의 전문성 저하는 관료제 권력을 상대적으로 신장시키는데 한몫을 하였다”는 점(오재록, 2007: 60~61), “관료들 대부분이 지역적 기반 하에 혈연, 지연, 학연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박기관, 2004: 45), 5․16쿠데타 이후 관료제 내에 자리잡은 군사문화 등은 한국사회의 특징이다. 따라서 민주화가 진행되더라도 관료제의 힘은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다.

또한 관료제를 개혁하려는 정책이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참여정부가 추진한 관료제 개혁의 결과는 그것이 목표했던 ‘자율성’의 향상을 가져오기보다는 하부조직의 ‘자율성’을 축소시키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조성익은 이런 결과가 나타난 이유를 “정부가 추진한 관료제 개혁의 두 가지 측면인 ‘수평적인 의사결정구조’와 ‘표준화된 평가체계’의 작동원리”에서 찾는다. 수평적인 의사결정구조로의 개편은 조직간의 현실적인 힘의 격차를 무시함으로써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해소시키기는커녕 외려 힘의 집중화를 가져왔고 기존의 피라미드식 관료제 하에서 하부조직들이 ‘해석’을 통해 누리던 자율성마저 축소시킨다. 그리고 표준화된 평가시스템은 중앙이 사업의 목표와 계획을 제시할 뿐 아니라 모든 과정을 표준화하고 표준화된 기준에 따라 평가하기 때문에 각 조직의 장이 발휘할 리더십마저 줄이고 획일화시켰다(조성익, 2007: 147~150).

그런 점에서 관료제의 철창을 벗어나려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평론가 김종철은 이렇게 얘기한다. “민주주의는 몇몇 제도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단계에 이르러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돌보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고, 순간순간 되풀이하여 쟁취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트에 의한 권력독점 현상이 구조적으로 강화되기 쉬운 오늘의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의 생명은 풀뿌리 민중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거리로 나오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음이 분명하다. 정말로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정당하게 요구하고, 그들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으냐 없으냐가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김종철, 2007: 5)

나아가 러미스는 정치와 경제를 다른 차원으로 여기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문제라 지적한다. 역사상 어느 사회도 그것이 분리되지 않았고 그런 분리를 이용한 자들이 기득권층이라고 러미스는 지적한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복종에 길들여지는 사람들이 정치영역에서 능동적인 시민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기득권층은 일자리와 임금 등을 무기로 시민들의 발을 묶으려 든다는 얘기이다(러미스, 미출간). 정치민주화에만 매달려온 우리사회의 민주주의가 이토록 취약한 것도 그 때문이고 재벌그룹의 사장이 대통령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민주화는 단순히 민주적이라 불리는 제도의 도입을 뜻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합리성과 이성, 감성을 가지지 못한 제도는 관료제의 틀 속으로 쉽게 포섭될 수 있다. 민주화와 민주주의는 민중이 권력을 가지고 실제로 통치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민중이 그럴 의사를 비치고 실제로 행동할 때에만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정당과 선거로만 논의된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 껍데기나 신기루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관료제의 독자세력화와 난개발의 확대

 

과천청사에서 근무했던 한 공무원의 자기고백적인 이야기는 한국의 관료제가 다른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만들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이경호, 2006).

 

“재무부가 조감법 폐지와 금융업의 공정거래법 적용에 결사 반대하는 이유는 관치금융 때문이야. 관치금융을 펴야 지금처럼 계속 낙하산 타고 금융기관에 내려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관치금융을 펴야 정책자금 갖고 장난칠 수 있고, 조세나 관세를 감면해주면서 술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어. 그래서 금융발전법 제정을 반대하는 거야.”

……

“용역비 있잖아? 난 용역비가 아까워죽겠어. 연구할 게 뭐가 있다고 왜 매년 수천억 원의 용역비를 낭비하는 거야?”

“용역비, 그거 눈먼돈이야. 먼저 보는 놈이 임자야.”

“정말이지 그런 놈의 용역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어.”

“소용이 있지. 건설부와 상공부는 산하연구기관에 용역을 주면서 용역보고서에 자기네가 원하는 내용을 써넣어 작성하라고 한 대. 그래서 소용이 있는 거야!”

“자자, 술이나 먹어. 쓸데없는 예산이 어디 용역비 뿐이겠어? 판공비, 출장비, 일반수용비도 다 쓸데없잖아?”

“그런 그렇고 우린 언제까지 가라공문을 작성해야 하는 거야? 가짜 공문으로 예산을 빼내자니 일말의 양심이 느껴져.”

“판공비를 차라리 장관․차관․국장에게 월급으로 줘버렸으면 좋겠어. 어차피 그 사람들 주머니로 들어갈 거니까”

……

“건교부는 택지개발을 위해 평소 산하 연구기관에 신도시개발관련 용역을 주고 있어요. 이 용역에는 토질 전문가, 지질학 전문가, 문화재 전문가 등이 다수 참가해요. 이들은 지표조사를 통해 지질조사, 토양조사를 하고, 조사가 끝나면 어느 지역이 양토인지 사토인지 파악을 하지요. 동시에 어느 지역이 택지개발지역이고 택지개발가능지역인지를 결정하구요. 그리고 용역기관은 이런 결과를 담은 ‘신도시 개발 용역보고서’를 건교부에 제출하지요. 그런 후 입소문을 통해 관련 개발정보가 좌악 퍼져 건교부 직원들은 다 알게 되요. 그리고 그들은 이 정보를 자기 친인척에게 알려주고 땅을 구입하라고 하지요.”

“아니? 그게 사실이야?”

“네, 사실예요. 그리고 건교부 주택국은 이런 ‘신도시개발 용역보고서’를 항상 몇 건씩 비치해 놓고 있어요. 그러다가 아파트 투기가 일어날 때마다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용역보고서를 끄집어 내어 ‘어디어디 신도시개발!’하고 떠드는 거예요. 그러니 판교신도시 개발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그래서 1989년도에 아파트 200만호 건설할 때, ‘분당․일산 신도시건설!”, “평촌․산본․중동 신도시건설!’하면서 호들갑을 떨었군.”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이런 ‘신도시 개발 용역보고서’가 5년 전부터 강남 중개업소를 돌아다녔다는 거예요. 중개업자나 기획부동산 놈들이 돈주고 개발정보를 빼낸 거지요. 이들은 땅투기꾼․복부인․건설사에게 이 용역보고서를 보여주면서 땅을 구입하라고 부추기지요. 그래서 정작 건교부장관이 신도시개발정책을 발표할 때는 그 지역은 이미 건교부 고위직․건교부 직원 친인척․투기꾼․복부인․건설사 놈들이 땅 구입을 완료한 상태지요.”

“건교부 놈들이 부동산투기를 완전 조장하고 있군!”

 

그리고 예전에는 관료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면, 이제는 퇴직 이후를 염두에 두고 은밀히 기업과 결탁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회전문 현상’이다. 관료들은 퇴직한 뒤에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기업이나 이익집단에 취직해서 공직에 있었을 때의 지식과 경험, 인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정책을 관철시키고 많은 이득을 취한다. 그리고 퇴직 이전에도 그런 관계를 염두에 두고 주요 정책을 결정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09)에서 드러나듯이 기업들은 관료들의 이런 관심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정책의 방향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든다.

그러다보니 한국의 개발사업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큰 사업으로 변한다. 경인운하가 대표적인 사업이다. “경인운하 사업은, 굴포천 유역의 홍수 예방을 위해 1992년 확정된 2710억 원 규모의 ‘굴포천 종합치수사업’이 3년 만에 국비 4382억 원을 포함해 총 1조 8429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바뀐 것이다. 이는 결국 중동 건설경기와 수도권 신도시 붐이 사라진 1990년대 중반 건교부․수자원공사․건설업계 등 거대 토목세력들이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이 사업을 창조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업은 현재 총 사업비 1조8429억 원 중 4382억 원의 정부예산이 투자되어, 2001년 하반기 착공하고 2005년 1차 완공 및 운영을 시작할 예정으로서, 향후 40년간 민간이 운영한 뒤 국가로 반납하게 되어 있는 민관 합동의 대규모 국책사업이다.”(오관영, 2005: 115~116)

이렇게 관료들이 공공성을 내세워 ‘사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 아니라 관료조직들은 ‘조직의 이해관계’를 놓고 조직간의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관료 개인이 가지는 권력도 있지만 하나의 집단으로서 관료조직이 가지는 권력도 있는데, 정부조직 내에서 이 권력은 편차를 가지고 같은 기관 내에서도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6개의 중앙부처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분석결과를 보면, 외부로 공개되지 않는 부처간의 이해관계 갈등이 빈번하고, 이런 갈등은 정책집행단계보다 정책입안단계에서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권력을 더 많이 가진 부처에 유리한 쪽으로, 즉 예산이나 인력규모, 기관의 법적․공식적 권한, 대통령의 관심과 지지를 더 많이 받는 부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결되고, 그러다보니 정책의 종합성과 일관성이 손상되기도 한다. 이 조사는 비교적 권력이 강한 부처로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중앙인사위원회, 행정자치부, 외교통상부, 법무부를 꼽는다(박천오, 2005: 22~23). 그리고 45개 중앙행정기관을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조사는 재정경제부, 검찰청, 국방부, 교육인적자원부를 ‘빅4 권력기관’으로 꼽는다(오재록, 2007: 324).

이런 다양한 부처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면서 자기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업들을 벌이고 있는데, 아래의 표처럼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도시․지역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진미윤, 2005).

중앙부처나 광역․기초자치단체의 관련 부서가 이런 개발사업을 직접 추진하거나 개발공사, 소속․산하․유관기관들이 경쟁적으로 지역개발사업을 추진한다. 심지어 아래의 표에서 드러나듯이 같은 부처 내에서도 비슷한 사업이 진행되기도 한다(차미숙․박준화, 2008: 123)

분야별

유사사업

소관부처명

농산어촌 및

낙후지역개발사업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어촌종합개발사업

농림수산식품부

․어촌체험마을 조성사업

․어촌관광 활성화사업

농림수산식품부

지역혁신사업

․지역연고진흥사업

․지역혁신센터

․지역혁신인력양성사업

․산학협력중심대학육성

지식경제부

․지방중심대학육성사업(NURI)

․산학연협력체제활성화

․지방대학특화분야육성

지식경제부

 

자신의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관료조직들의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는 반면,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조직내 또는 조직간의 시스템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직접 사업대상을 선정하다보니 지방자치단체의 사업기획은 중앙정부의 기획을 따를 수밖에 없고 공모로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지방자치단체간의 과도한 경쟁이 유도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래 그림에서 드러나듯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업이 중복되어 진행되고 있다(진미윤, 2005). 한마디로 지역발전을 내세운 난개발 사업들이 전국을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다.

이처럼 관료와 관료조직이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가지다보니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개발사업이 줄어들기는커녕 난립하는 모순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사업들은 주민/시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관료조직이나 그들과 결탁한 개발동맹에만 이득을 가져다주지만, 관료조직이 공공성을 독점하다보니 시민사회의 목소리나 전략이 반영되지 않고 있다. 더구나 민주화의 영향으로 시민사회의 당파성이 사라지면서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관료조직이 의도적으로 만든 관변조직의 목소리와 뒤섞이거나 그것에 묻히기도 한다.

 

 

4. 결론: 풀뿌리의 전략과 인권에 기반한 발전

 

관료제가 공공성을 독점하고 자신의 합리성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동안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시민단체나 지역단체의 활동이 힘겹게 이어져 왔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건 관료제의 합리성을 비판하며 쇠창살을 벗어날 수 있는 대안적인 합리성을 체화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 국가가 독점해온 공공성의 영역을 해체하거나 대체하려는 시도들도 매우 부족했다. 그런 점에서 국가나 시장에 대항할 수 있는 사회의 밑천을 모으고 강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하승우, 2010). 단 그런 노력은 관료주의 방식을 통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요구하는 풀뿌리의 전략이 중요하다.

관료제의 특성을 보면, 일단 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되기 시작하면 그것을 막을 방법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용역보고서로 시작되는 정책의 입안과정에 관심을 두며 참여해야 하고 겉으로 드러난 단기적인 사업만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계획․투융자심사에도 관심을 둬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는 러미스의 주장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전 세계에서 온 토착민들의 대표들은 자신들의 전통 공동체의 가치를 강하게 주장했고 댐계획과 벌목, 리조트 건설, 다른 형태의 ‘개발’로 파괴되어가는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국제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 그리고 그들의 지역적이고 지구적인 행동 모두에서 이런 종류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는 집단을 형성하곤 했다. ‘경향(tends)’이 아니라 그것이 이런 집단을 조직할 때에만 운동은 존재하고 권력을 가졌다. 이것은 사람들이 얼굴없는 대중으로 단지 ‘담고’ 있는 국가나 정당, 제도가 아니다. 운동은 자율적으로 서로 연결된 집단들의 네트워크로 존재했고 그렇지 않고는 존재하지 못한다.”(러미스, 미출간)

이런 경향을 더욱더 강화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인권에 기반한 접근법(HRBA, Human Rights Based Approach)’을 들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HRBA는 그와 관련된 발전의 전 과정, 즉 발전정책의 기획, 수립, 이행, 평가 및 발전 이익의 향유에 있어 발전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활동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개별 국가의 법률만이 아니라 국제인권규범에 근거해서 국가에게도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

HRBA는 참여와 북돋움(empowerment), 책무성(accountability)을 중요한 원리로 제시한다. 참여는 실질적이고 능동적이고 자유로워야 하고 그 과정에서 배제되기 쉬운 소수자나 취약계층의 참여를 정책의 기획, 결정, 이행, 평가, 발전이익을 누리는 전 과정에서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참여의 방식도 공청회나 설명회, 토론회 뿐 아니라 시위 및 피켓팅, 항의방문 등 사람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의미있는 참여를 위해 표현의 자유나 단체 행동권 등의 권리만이 아니라 교육권과 정보 접근권 등도 보장되어야 한다. 북돋움은 개인이나 집단이 역량을 서로 북돋우면서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며 존엄성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책무성은 개인이나 집단이 스스로 발전의 주체가 되어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과 권한을 합당하게 행사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을 뜻한다(유해정, 2009).

<국제앰네스티>의 아이린 칸 사무총장은 리우선언 이후, 아후스협약Aarhus Convention으로 알려진 국제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고 정부행정과 공공참여에 대한 내용이 그것에 포함되어 있다고 얘기한다. 특히 정부는 참여자들에게 다섯 가지 기준을 지켜야 한다(칸, 2009: 240)

①정부의 결정 이전에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선택사항들이 효과적으로 개방된 상태에서 공공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함.”

②중요한 사항들은 정부가 먼저 공지해야 하며 과정과 참여 가능성에 대해서도 알려줘야 한다.

③참여자는 청문회나 공청회 등을 통해 의견을 전달하거나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④정부당국은 의견을 수렴할 의무가 있다. 근거 없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진지한 검토 없이 전달된 의견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정책결정시에는 적절한 근거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⑤법에 의해 공인받은 단체나 독립기관, 혹은 법원에 의한 합법적 승인이 있어야 정책결정과정이 마무리된다. 실질적인 참여란 이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된다.

따라서 국제적인 기준에 따라 국내의 변화를 요구하는 전략도 고민할 수 있다.

어느 한 가지 방법이 만병통치약으로 작용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다양한 노력이 모인다면 숨을 쉴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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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강의를 나가던 대학에서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있었다. 선언문을 읽다 한 구절에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학문과 양심의 전당인 대학’, 아니 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한국의 대학에서 학문과 양심을 논하다니. 파견직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들이 넘쳐나는 대학, 온갖 가게와 커피 체인점들이 점령한 대학, 포스코, 삼성 등 대기업의 이름을 딴 건물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은 대학, 88만원 세대를 양성하는 취업의 최전선인 대학에서 학문과 양심이라니, 고상하신 교수님들의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대학이 학문과 진리의 전당이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얘기는 무의미하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대학이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나날이 오르는 등록금으로 학문의 전당이라는 상아탑이 부모와 학생들의 등골을 휘게 하는 우골탑으로 변한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교수가 권력의 해바라기(폴리페서)로 나서고 자기 제자를 성추행하기도 하는 이곳의 대학에서 다시 학문과 진리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 국립대는 실용주의를 내세운 체질 개선에 바쁘고 사립대는 학생들 등록금 모아 적립하고 기업 후원 받기에 정신이 없는데도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까?

 

한국의 대학, 단추를 잘못 꿰다

 

유럽의 대학들은 낭만의 공간이나 취업시장이 아니라 치열한 논쟁의 장으로 등장했다. 왜냐하면 대학은 당시 교단의 독단적이고 획일적인 종교해석에 도전해 학문의 자유를 외치며 등장했기 때문이다. 대학은 몇몇 뛰어난 교수가 일방적으로 학생을 지도하지 않고 교수와 학생의 ‘공동체(universitas)’를 만들려 했다. 초기 대학은 학생과 선생이 서로 상대방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진행했기 때문에 ‘토론 공동체’라 불렸다.

때로는 대학이 위치한 지역사회로 그런 교육이 확장되기도 했다. 학교 캠퍼스는 지역사회와 분리되지 않고 서로 뒤섞여 있었고, 대학생은 능동적인 지역시민이었다. 주민들에게 개방된 대학은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토론과 논쟁을 자극했고, 그렇기에 대학의 학풍은 지역사회의 분위기와 여론을 결정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런 과정에서 마련된 능동적인 정치행위는 때론 국가권력과 대립하면서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기도 했다. 대학이 자리를 잡은 지역사회는 혁명적인 사상의 근원지였고 때론 실제 혁명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혁명성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대학은 국가의 ‘억압’이나 자본의 ‘유혹과 조작’에 시달렸고, 대학 내부의 ‘권위주의’와 ‘부패’는 대학의 공동체성을 뒤흔들었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 원래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몸부림쳤던 사건이 바로 1968년 전 세계를 뒤흔든 대학생들의 반란이다. 미국에서는 대학생들이 베트남전과 징병을 반대하며 주방위군과 충돌했고, 대자본이나 권력과 연결된 대학 당국에 항의하기 위해 대학을 점거했다. 이탈리아의 대학생들은 교과과정과 교실, 그리고 대학 생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요구했다. 일본의 대학생들은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마오쩌뚱의 포스터를 정문에 내걸었다. 폴란드의 대학생들은 “자유 없이 학문 없다”고 외치며 군대와 충돌했다. 프랑스의 대학생들은 다시금 대학을 토론과 자치를 위한 코뮌으로,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장으로 만들었다. 지금 유럽 대학에서 드러나는 자유로움과 연대성은 68년의 사건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 대학의 역사는 서구와 다른 과정을 밟아 왔다. 대한제국과 식민지기에 한국의 대학은 ‘서구 따라잡기’와 ‘식민지 엘리트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즉 시대정신을 밝히는 토론공동체라는 원래의 정신은 무시된 채, 형식적인 교과과정과 같은 껍데기만 이식되었다. 우리의 것은 시대에 뒤쳐진 낡은 것으로 여겨졌기에 대학교육은 외국물을 먹은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학생이 외우고 따르는 것을 뜻했다. 한국에서 대학은 토론과 혁명적인 사상의 근거지가 아니라 서구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배우는 공간이었다(식민지 시기 대학생들이 공부했던 사회주의 사상도 이런 이데올로기의 일종이었다).

대학의 교육과정을 성실히 따르는 사람들은 엘리트의 지위를 얻었다. 대학은 출세와 권력획득의 수단이 되었고, 지배이데올로기를 배우고 신분상승을 꾀하는 보수적인 공간이 되었다. 엘리트 구조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대로 이어져 ‘동문들의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도권으로 집중된 한국사회의 자원은 서울대학과 지방대간의 격차를 늘려 학벌사회를 심화시켰다.

이런 엘리트 구조는 대학가 문화를 만들었을지 모르나 대학과 지역사회의 관계를 만들지 못했다. 대학과 지역사회는 분리된 두 개의 공간으로 존재했다. 대학에서 저항문화가 싹텄던 때에도 국가 차원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은 있었을지언정 대학이 지역사회와 밀착해 지역토호를 몰아내거나 부패한 지방권력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물론 이런 문제점은 대학이나 대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라 군사독재가 지방자치제를 유보시켰고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지연시켰던 탓도 있다. 그리고 좌우를 막론하고 지역보다 국가 차원의 연구에만 집중했던 지식인들의 연구경향도 이런 분리에 기여했다. 어쨌거나 한국 사회에서 대학의 기원과 발전과정은 토론공동체나 자율적인 코뮌을 만드는 과정과 무관했다.

 

대학과 지역사회의 부적절한 관계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1991년에 부활된 지방자치제도는 국가로 집중된 권력을 지역으로 분산시키고 있다. 이와 더불어 중앙정부는 지역혁신전략의 하나로 대학과 지역사회의 연계를 강조하고 있고, 이런 권력의 변화를 눈치 챘는지 대학들도 지역사회에 조금씩 관심을 돌리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전국의 각 대학들이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강화하겠다며 제안하는 방안은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대학들이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강화하겠다며 가장 많이 얘기하는 사업은 담장허물기와 도서관의 개방이다. 대학의 담장을 허물어 주민들이 캠퍼스를 공원이나 운동장으로 자유로이 이용하게 하고 도서관의 자료를 열람하게 하는 것은 대학공간을 지역주민들과 공유하는 좋은 방안으로 애기되고 있다. 그런데 담장허물기는 대학의 자체 재정이 아니라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손 안 대고 코푸는 식의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서울시는 서울시 42개 대학의 담장허물기 비용을 전액 시비로 지원할 예정이다). 그리고 도서관 개방은 주민들의 대출이나 열람실 이용을 제한하고 있어 동네의 공공도서관보다 발걸음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지역사회와의 연계는 말 그대로 생색내는 것으로 그치고, 이런 시설 개방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거의 없다.

담장허물기나 도서관 개방 외에도 대학들은 학생들의 졸업작품전시회나 행사, 대학 축제 등을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문학강좌를 개최하기도 한다. 서울시 성북구의 고려대, 국민대, 동덕여대, 서경대, 성신여대, 한성대 등 6개 대학은 성북구청과 협력해 지역주민들에게 인터넷 교육을 진행하기도 한다. 또 대학이 나서서 지역의 저소득층 자녀들과 대학생들을 연계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이나 지역청소년들의 논술이나 창의력, 생활과학교실 등을 운영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교수나 학생들의 사회봉사활동을 지역사회와 연계시키고 있다.

이렇게 대학생과 지역주민의 삶이 서로 연계되고 대학의 교육과정이 지역사회에 개방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사업들은 대학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고 대학의 공공성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것보다 일시적으로 지역주민들에게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대학생들을 동원하는 수준에 그치고 대학의 교육과정이나 대학운영이 지역사회와 연관성을 맺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잘라 말하자면 대학이 지역사회를 ‘위해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대학과 지역사회를 여전히 나눠서 생각한다는 점을 뜻한다. 대학 자체의 경계나 엘리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역사회와 대학의 공공성이 자연스럽게 섞이기는 어렵다.

사실 대학이 지역주민이나 지역사회의 발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쪽은 지방자치단체와의 ‘사업’이다. 예를 들어, 안동대는 안동시, 안동교육청과 함께 안동영어마을을 설치하는 협약을 체결하고 운영 중이다(말도 많고 도움도 안 된다는 그 영어마을을 대학이 나서서 한다!). 그리고 대학의 산학협동과정이 지역의 중소기업이나 대기업과 손을 잡고 진행되기도 하고, 대학이 지역사회에 직접 투자해서 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최근 평택시와 성균관대는 도일동 일대를 산업, 주택, 학교 등 복합단지로 개발하는 협약을 맺었다. 이 과정에서 땅값을 지나치게 낮게 정해 특혜시비가 일고 있고 있는데, 성균관대는 헐값에 공급받은 땅을 일반 기업이나 연구기관에 분양할 것으로 알려져 대학이 땅장사를 한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대학이 이렇게 지역의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2008년 정부가 법을 개정해 사학재단이 적립금을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연세대와 이화여대 학생들은 ‘부자학교 펀드감시단’을 구성해 학교 측에 적립금 투자 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상태라면 대학과 지역사회의 결합은 긍정적인 영향보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높다. 그것은 대학이 그 결합의 의미를 공공성보다 자기 살을 찌우는 사업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은 지역사회 커뮤니티가 될 수 있을까?

 

방글라데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은행인 그라민 은행을 만든 유누스(M. Yunus) 교수는 캠퍼스 근처의 노는 땅을 지역주민이 활용할 수 없다면, 대학이 자신의 지식에 도취되어 주민들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대학이 이 사회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유누스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경제학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없다면 학문의 의미가 없다고 믿으며 현실로 뛰어들었다.

대학의 공공성은 단순히 대학이 지역사회에 몇 가지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서 생기지 않는다. 대학이 지역사회와 섞이며 소통하고 새로운 변화의 기반을 닦는 일을 담당할 때에만 대학의 공공성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이나 대학생의 삶과 지역사회가 사실상 서로 분리될 수도 없다. 서울시의 뉴타운 계획에 따르면, 중앙대(흑석동)와 이화여대·추계예대(북아현동), 경희대·한국외대(이문·휘경동), 서울시립대(전농동·답십리) 등 6곳이 뉴타운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니 뉴타운 개발은 대학생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이미 치솟는 등록금에 신음하는 대학생들이 비싼 하숙비나 월세를 내지 못해 길거리로 내몰릴지도 모른다. 기숙사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재개발은 대학과 대학생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지역사회의 변화는 그 속의 대학이나 대학생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니 대학은 지역사회에 관한 총체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대학의 교육과정 자체가 이런 지역사회의 변화를 다루고 대안을 모색할 때에만, 대학이 지역학의 기반이 될 때에만 대학의 공공성이 살아날 수 있다.

상상력을 동원하면 앞으로 닥쳐올 사회적 위기를 대비하며 대학이 지역사회의 거점으로 될 수 있는 방안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다가올 식량위기를 대비해 대학이 지역사회 먹거리 순환(로컬푸드)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다. 대학이 학교 내 급식을 친환경 유기농 먹거리로 전환하고 지역 내의 초․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학교급식센터를 설립해 운영할 수도 있다(원주 상지대는 이런 전환의 기반을 닦고 있다). 대학이 캠퍼스 안의 자투리 공간을 이용해 도시농업을 하고 그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를 책임지고 진행할 수도 있다.

그리고 대학의 화장실과 식당에서 나오는 자원(쓰레기가 아니다!)을 발효시킨 바이오메탄은 지역사회의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녹색연합>은 2007년 국내 대학들이 사용한 에너지의 양을 분석한 결과 2000년과 비교할 때 84.9%나 소비량이 늘어났다고 주장한다(같은 기간 한국사회의 전체 에너지 소비량 증가폭보다 무려 3.7배나 높다). 각 대학들이 캠퍼스에 건물을 신축하거나 증축해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에너지 효율을 감소시켰기 때문이다. 학교자산만 불리는 나쁜 확장을 그만두고 에너지를 생산하는 기지로 변신한다면 대학은 지역사회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 대학이 에너지를 잡아먹는 블랙홀에서 에너지 농장으로 변신할 수 있다.

식량위기와 에너지 위기의 시대에 대학은 지역사회 대안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대학의 교과과정이 이런 대안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대학은 명실상부한 대안적인 지역사회의 거점이 될 것이다. 대학의 각 전공학문이 그 지역에 맞는 대안을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간다면 생각은 결코 꿈으로 그칠 수 없다.

 

대학을 어떻게 접수할까?

 

어떻게 하면 한국의 대학들이 이런 대안의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예전 사립학교법 개정 때 대학이 보였던 모습을 생각하면 대학을 접수한다는 건 거의 꿈에 가깝다. 대학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사학재단들은 대학이 공공성의 거점이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구의 68년 때처럼 바리케이트를 쌓고 강의실을 점거하는 방식으로 대학을 접수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학생들이 그런 움직임을 약간만 보여도 바로 공권력 투입을 요청할 것이 뻔하고, 한국 경찰의 우수함은 이미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러니 대학이라는 공간을 포위하고 서서히 압박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대학생들이 대학이 있는 지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지역주민들도 대학의 일에 관심을 둬야 한다. 아직까지 대학생들은 지역주민들과 머리를 맞대고 지역사회의 발전방향을 고민해본 시간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대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생들은 자신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대학공간에서조차 자율적인 소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역이나 대학 어디에도 참여할 수 없는 대학생에게 민주주의는 현실의 과정일 수 없다.

따라서 대학생과 지역주민의 소통이라는 과제는 단순히 지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계몽적인 호소로 해결될 수 없다. 정치와 민주주의는 일종의 연습과정이다. 즉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참여하는 사람만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더욱더 익숙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따라서 대학의 여러 가지 일에 관해 대학생들과 주민들이 만나 일상적으로 얘기를 나누고 토론할 수 있는 주제와 장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의 대학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일은 학내 민주화이고 이것은 지역사회 민주화와 맞닿아 있다. 대학에서 일하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삶이 지역사회와 무관할 수 없고, 교수들이 맡는 다양한 연구용역은 지역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니 지역주민들도 대학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지고 그런 변화를 지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일본청년 마쓰모토 하지메의 저항방식을 참조할 만하다.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영화나 『가난뱅이의 역습』이라는 책으로 한국에 소개된 하지메는 학교가 알아서 졸업을 시켜줘야 할 만큼 ‘말썽꾸러기’였다. 캠퍼스에서 난로를 피우고 찌개를 끓여 술을 마시고 페인트를 집어던지는 습격을 감행하면서 하지메는 조금씩 대학을 변화시켜 나간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싸움의 기술이었기에 대학은 하지메를 졸업시키는 것 외에 이에 대항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하지메는 사회적인 대안을 지역사회와 연결시켜야 한다는 점을 자연스레 깨닫는다. 저 멀리 높이 솟은 래미안 아파트를 동경하지 않고 가난뱅이들이 모여 있는 우리 마을에 눈을 돌리는 순간 새롭고 재미난 일들이 계속 우리를 기다린다.

대학을 접수하자는 얘기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꼭 대학의 총장실을 점거하고 대학의 운영권을 빼앗아야 대학을 접수하는 게 아니다. 뭐 좀 재미나고 새로운 일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며 찾을 때, 같은 대학에 다니지만 인사 한번 나누지 않았던 친구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무언가를 도모할 때, 지역주민들과 만나고 떠들며 경계를 없앨 때 이미 대학은 접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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