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기도민이다. 팍팍한 서울 생활에 질려서 2년 전에 서울을 탈출했다. 그래서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심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내게 투표권이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박원순 변호사가 당선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치열한 경합이라는 언론 기사는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얘기로 들릴 뿐 결과가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 관심은 박원순 변호사의 당선 이후에 있었다. 적대적인 중앙정부 아래에서 가장 큰 지방자치단체를 박 시장이 잘 이끌 수 있을까? 선거 공약이야 참여연대부터 희망제작소까지 시민단체를 이끌어온 실력으로 충분히 채우겠지만 정치가 종합선물세트는 아니지 않은가? 타협이 정치의 미덕이지만 갈등과 충돌 없이 정치가 이뤄질 수는 없는데 ‘친절한 원순씨’가 잘할 수 있을까 염려도 되었다.

예상대로 박 시장은 취임하자마자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초등학교 무상급식이 실시되고, 서울시립대의 등록금이 반값으로 떨어졌으며, 서울시의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예정이다. 대규모 토건사업이 재검토되고 어린이집이 확충될 예정이다. 심지어 한·미 FTA에 대한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박 시장의 행보는 ‘신자유주의의 마녀’ 마거릿 대처 정부 아래에서 런던 시를 이끌었던 켄 리빙스턴 시장과 비슷하다. 영국 노동당의 후보였고 ‘레드 켄’(우리 식으로는 ‘빨갱이 켄’)이라 불리던 이 사람은 대중교통 요금을 인하하고 탁아시설을 늘렸으며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지켰다. 공공 서비스를 확충하며 시민참여를 활성화시켰다.


   
보수 언론이 그의 사생활을 헐뜯기도 했지만 켄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대처 정부는 런던을 비롯한 광역시의 자치권을 폐지해서 강제로 켄의 반란을 진압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의 상황도 비슷하다. 보수 언론은 박 시장을 흠집 내느라 바쁘다. 박 시장이 한·미 FTA에 관한 의견서를 내자 정부 5개 부처가 합동 브리핑을 열어 이를 비판하는 등 중앙정부도 박 시장을 경계하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다. 리빙스턴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엔 영국 노동당을 바꾸고 영국을 바꾸려는 동지들이 있었다. 영국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신좌파의 이상이 있었다. 그렇다면 박 시장의 뒤에는 누가 있을까? 민주당? 새롭게 탄생하는 어떤 정당? 그들이 과연 근본 변화를 꿈꾸고 있을까?


노동조합 힘 강화한 리빙스턴 시장


리빙스턴은 대처 정부에 맞설 뿐 아니라 대기업의 부당한 노동조건을 바로잡고 노동조합의 힘도 강화하려 했다. 이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서울의 ‘협찬 시장’에게도 이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회구조의 문제에서 개인의 창의와 선택으로, 재벌 개혁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관점을 바꿔온 박 시장이 시민운동 시절 들었던 ‘노동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주노동자나 여성을 차별하는 기업, 부당한 노동조건을 강요하는 기업, 백혈병 환자를 양산하는 삼성전자의 물건을 더 이상 구매하지 않겠다는 서울시의 선언을 기대할 수 있을까.

리빙스턴은 주민이 직접 지역사회를 바꾸는 다양한 자치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박 시장도 서울 곳곳에 마을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는 외부의 공조직이 줄 수 있는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의 몫은 그런 공동체 구성을 방해하는 기성 관변단체들의 힘을 빼고 해체시키는 일이다.

내 기억에 역대 서울시장 선거에서 가장 본질적인 구호는 2002년 사회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내걸었던 ‘해체 서울’이었다. 식량과 에너지를 거의 생산하지 않으면서 가장 많은 양을 소비하는 서울시민의 행복은 뭔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서울시장은 서울을 넘어서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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