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안철수 바람’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설마가 현실이 되니 온갖 예측이 난무하고,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시장 당선은 기성 정치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정말 정치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걸까? 허나 몇몇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제외하면 지금의 정치구도는 새로움을 논하기엔 여전히 낡고 칙칙하게 느껴진다. ‘나는 꼼수다’의 성공이 화려한 조명을 받지만 듣고 즐기는 것 이상의 정치참여가 활성화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 색깔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사회에서는 ‘소속 없음’도 하나의 소속이다. 왜냐하면 소속되지 않겠다는 것도 소속된 자들의 신념만큼 강한 하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무소속은 소속될 수 없는 사람을, 소속되기 싫은 사람을 뜻하기도 하니까.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속 없음을 ‘냉소’나 ‘무능력’의 상징으로 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한국의 정당법은 5개 광역시도 이상에서 1,000명 이상의 당원을 거느린 전국정당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선거법은 정당에 소속된 후보자들에게 선거기호나 운동기간 등의 면에서 지나치게 많은 이득을 준다. 한국의 정치구조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정치규칙이 소속 없는 사람들의 ‘능력’을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배제한다고 봐야 한다. 가령 2006년 지방선거 때 만들어진 <풀뿌리 옥천당>은 지역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정당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해산되었고 법적인 처벌까지 받았다. 자신이 속할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소속을 갖지 않는 건 당연한데도 정당정치를 외치는 사람들은 이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리고 정부선거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중앙/지방선관위는 어떠한가? 이 불필요한 조직이 온갖 유권해석을 독점하며 선거기간의 정치활동을 막는데도 이 기관을 문제 삼는 정당정치주의자들은 많지 않다. 그냥 닥치고 선거나 하란다. 이런 상황에서 소속 없음은 냉소나 무능력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다. ‘닥치고 정치’가 ‘닥치고 투표’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기권의 정치’도 필요하다.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이 기득권층을 위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나는 안철수의 등장이 흥미롭다. 준비 안 된 정치인이면 어떻고, 착한 자본가면 어떤가. 이 재미없고 갑갑한 한국 정치판을 뒤흔들 흥미로운 요소를 보탰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가 손쉬운 방식으로 명망가 정당을 창당하지 않으며 버티는 것만으로도, 기성 정당에 쓱 들어가며 권력을 움켜쥐지 않는 것으로도 나는 안철수가 반갑다.


물론 마냥 반갑지는 않다. 왜 우리는 정치를 ‘사건’이 아니라 인물로만 사유하는가?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 시장 당선도 마찬가지이다. 박원순이나 안철수라는 인물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거나 없다는 것보다 나는 그들의 등장이 일으킨 파장에 관심을 둔다. 그 사건이 한국사회의 정치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그런 흐름을 보려면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들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정치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기본적인 관점 말이다. 정치와 이념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권력의 장(長)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정당이 아니면 선거가 의미없다는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이 글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풀뿌리운동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한다. 국회의원 총선과 대통령선거라는 큰 선거가 모든 정치 쟁점들을 삼켜버릴 2012년에 풀뿌리운동이 어떻게 다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을지를 살펴보려 한다. 기존의 풀뿌리운동이 선거에 수동적으로 대응했다면, 최근 녹색당의 출현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녹색당이 풀뿌리운동과 맞물릴 수 있는 접점을 찾아보려 한다. 서구에서 68혁명이 녹색정치의 문을 열었다면, 한국에서는 지역의 다양한 풀뿌리운동의 힘이 녹색정치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정치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1. 정치를 오해하게 만드는 잘못된 프레임들


학자들이 쉽게 쏟아내는 추상개념들이 지금 이곳의 정치를 설명하는데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까? ‘탈(脫)’이라는 접두어를 단 여러 개념들, 예를 들어 탈이념, 탈물질, 탈정치, 탈정당이라는 개념이 현실을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까? 철저히 기득권화되고 사유화된 정치에 대한 시민의 허탈함과 냉소를 어찌 탈이념, 탈정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엄기호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2010년)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그 답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판단한다.” 탈정치는 타인에 대한 낙인이지 이해하려는 언어가 아니다. 즉 “‘탈정치화’라든가 ‘소비주의적’이라든가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도덕적 판단의 언어이다.” 이런 낙인이 자주 찍히는 청년들을 엄기호는 이렇게 옹호한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만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안다. 너무 잘 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냉소한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 없다.” 계몽의 깊이가 이해나 공감의 깊이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계몽되어 냉소하는 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옳을까? 어찌 부르건 그것을 단순히 탈정치라 정의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청년만이 아니라 지역의 풀뿌리운동에 대해서도 기존의 정치해석은 탈이념, 탈정치라는 낙인을 자주 찍는다. 풀뿌리운동이 좌우의 이념 스펙트럼에서 어느 편도 아니고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정치 풀뿌리운동’이라는 말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풀뿌리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강한 정치성을 띠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말은 선거나 정당같은 제도화된 정치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장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을 나누고 조절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뜻한다. 풀뿌리운동은 일상을 바꾸는 정치운동이다.


과거 식민지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시민들이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운동세력은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순수하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정치가 높은 선을 구현하고 악을 몰아내는 방법인양 사고되는데, 사실 정치는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한 단계씩 발전하는 불순한 개념이다. 그래서 정치에 문제가 있을수록 더욱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풀뿌리운동은 기성의 정치와 다른 정치를 추구한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생활로부터 벗어난 변화가 아니라 생활과 연계된 변화를 꿈꿔왔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풀뿌리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1991년 지방자치제도의 부활 이후에는 제도정치와의 접목을 모색하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풀뿌리운동은 주민자치운동,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참여예산운동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을 넓히고 있다. 풀뿌리운동은 당면한 쟁점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 시민을 참여시키고 그것을 통해 의식을 바꾸고 확장시키는 주체형성의 정치를 실천해 왔다.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탈정치라는 말이 낙인으로 찍히거나 남용되는 것은 현재의 정치현실이 과거의 언어로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울리히 벡(U. Beck)이 『정치의 재발견』(거름, 1998년)에서 얘기하듯이 “정치적인 갈등과 이해관계의 개성화는 또한 더 이상 탈참여도, ‘분위기 민주주의’도, ‘정치에 대한 염증’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모순적일 정도로 다양한 참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정치 스펙트럼의 고전적인 양극을 혼합∙조합하고 있다.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좌이면서 우로, 급진적이면서 보수적으로, 민주적이면서 비민주적으로, 생태적이면서 반생태적으로, 정치적이면서 무정치적으로 사고하며 그리고 행동한다.” 기성정치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기 싫은 다양하고 혼합된 참여형태들을 탈정치나 몰정치, 반(反)정치라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탈이념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이념이 없는 진공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다. 백지상태(tabula rasa)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겠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이미 이념이 존재하고 어떤 이념에 서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입장을 뜻한다. 이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지금 현실을 지배하는 이념에 투항하겠다는 것인데, 그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유지시키려 노력하든 현실을 배반하든 그 역시 하나의 선택이고 아무 것도 없는 진공상태는 불가능하다. 하워드 진(H. Zinn)이 얘기했듯이 달리는 기차에는 중립이 없다. 중립은 환상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중립’이라는 신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중립이 불가능하다. 좌파의 이념이 온전히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못했고 우파가 기득권으로 변질된 우리 사회에서 중립은 무기력이나 냉소와 동의어이다(‘닥치고 정치’가 가진 장점은 바로 그런 환상을 한칼에 베어버렸다는 점이다. 다만 ‘닥치고 정치’는 기차가 가야할 방향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개인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자신의 입장을 다시 고민해야 한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지금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들이다. 토미 더글러스(Tommy Douglas)가 ‘마우스랜드’라는 비유로 적절히 설명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검은 고양이에서 흰 고양이, 얼룩고양이로의 교체가 아니라 생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다.


정치의 의미가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 상황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한길사, 2006년)에서 유럽의 전체주의운동이 성장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급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정당들은 선전에서 더욱더 심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되었고, 정치적 접근방식에서 더욱더 옹호적이고 과거지향적으로 되었다. 게다가 정당들은 어느새 중립적 지지자들을 잃어버렸다. 이들은 어떤 정당도 자신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정치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유럽정당체제 붕괴의 첫 신호는 옛 당원들의 탈당이 아니라, 젊은 세대로부터 당원을 모집하는 데 실패한 것과, 조직되지 않는 대중의 무언의 동의와 지지를 상실한 것이었다. 이 대중은 갑자기 냉담해졌고, 격렬한 적대감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지금 한국의 정치를 정의하려면 탈정치나 탈이념이 아니라 정치가 벌어지는 ‘세계’의 파괴에 간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사유물인 정부이다. 한국에서는 정당만이 아니라 정부기구에 대한 신뢰가 낮은데, 이는 정부가 정치에서 벗어난 탓이 크다. 제주도 해군기지나 4대강 사업, 한미FTA처럼 정부가 정치의 틀을 벗어나 움직이고, 시민의 통제를 벗어나며 정치를 배반하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정치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고 비판해야 할 지점은 바로 이 점이다. 비판을 받지 않고 당연히 인정되어온 상식에 대한 부정, 정부를 중심에 놓고 정치를 사유하지 말고 정치를 중심에 놓고 사유해야 한다.


이제 정치를 사유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화두가 핵발전과 탈핵(脫核)이기 때문이다.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우리는 세계의 근본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핵이 폭발한 곳에 어떤 생명, 어떤 인간이 살 수 있단 말인가? 핵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정치의 미래는 없다. 이것은 이전의 인간들이 한 번도 부딪힌 바 없는 위기상황이고, 핵은 정치의 다양성을 가로막는 절대악이다. 핵은 정치를 절대폭력의 장으로 몰아간다.


더구나 한국사회에서 탈핵은 단순히 에너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에너지정의와 환경정의, 사회정의의 문제이다. 탈핵은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와 불균등발전, 중앙집권형 국가에 대한 비판이자 그들과 결탁한 독점재벌과 언론,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이고 기술과 정보를 독점하고 공개하지 않는 비민주적인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 점에서 탈핵은 반(反)자본주의, 반(反)국가를 선언하는 가장 정치적인 구호이고, 자치와 자급의 삶을 전제하는 근본적인 정치운동이다. 이것은 또 왜 정치나 이념이 아니란 말인가?


이런 흐름을 탈이념, 탈정치라 부른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위아래가 뒤바뀐 사고방식이고, 그런 삶이 우리의 미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국의 다양한 풀뿌리운동들이 탈핵이라는 구호를 중심으로 모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것이 하나의 이념으로 꼴을 갖추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이념이 탄생할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이념의 의미를 너무 완고하게 파악하지 않는다면 이념은 좌표나 지표의 역할을 한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총체적이고 전일적인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다. 과제는 우리가 이런 고민을 현실로 소환하는 방법이다.



2. 세계의 위기: 정치의 어버이화와 청소년의 배제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사이』(푸른숲, 2005년)에서 현재란 단순히 과거의 연장이나 미래의 전단계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지속적 투쟁, 즉 그가 과거와 미래에 대적하여 ‘그의’ 자리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시간 속의 틈새”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간의 틈새로 스며들어 자신의 토대를 세우는 만큼 과거와 미래가 나눠질 수 있다. 시간이라는 연속의 흐름을 분열시키는 이 힘이 어떤 사건의 시작이자 우리의 현재이다. 우리의 현재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동안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나서서 정치활동을 펼치기는 어렵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이런 주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과정을 마련해 왔다. 풀뿌리운동은 소외되어온 시민이 직접 참여하며 몸과 마음으로 자신의 ‘시민됨’을 자각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는 과정을 마련해 왔다. 단순히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을 몰아내자는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시민을 정치의 주인공으로 세우려 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이념이나 구호보다 실질적인 생활의 변화,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정치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왔다.


그리고 풀뿌리운동은 목적으로 치우친 정치행위를 정치과정으로, 권위적이고 중앙집중화된 권력에서 자율적이고 분화된 권력으로, 효율성에서 공감으로,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에서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로 정치의 무게중심을 옮겨 왔다. 그동안의 모든 새로운 움직임을 풀뿌리운동의 힘으로 소급할 수는 없지만 그 역동성이 한국의 시민사회에 영향을 미쳐왔음을 분명하다.


보통 풀뿌리운동의 의미를 지역공동체운동 정도로 제한하려 하지만 그것 역시 닫힌 프레임이다. 풀뿌리운동은 기득권층의 분할통치전략에 맞서 협동의 전략으로, 즉 “나도 그들이다.” “우리도 그들이다”이라는 자각을 일깨워왔다. 자기들끼리 잘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 풀뿌리정치의 목표였고, 더불어 사는 관계망의 범위를 확장시켜 왔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에서 청소년과 여성들이 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고 하지만, 사실 청소년과 여성들은 그 이전부터 정치의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기존의 성인 남성 중심의 정치제도가 이들을 정치주체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안철수 현상의 긍정성은 우리의 정치세계를 꿀렁거리게 만들어 시민들도 함께 들썩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자 시민들을 쳐다보지도 않던 기성정당들이 시민들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안색을 바꾸겠지만 시민들도 매번 당해온 배신을 똑같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건은 이 답답한 정치의 시간에 틈새를 만들어 현재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틈새를 만들지 못하면 현재의 사건도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런 틈새를 만들려면 새로운 정치에너지가 필요하다. 단순히 정치신인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정치라는 현상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정치주체, 세계에 새로이 출현한 존재가 정치세계로 충원되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런 존재가 없다면, 세계는 다양한 독특성을 흡수할 수 없어 파멸하게 된다(핵은 이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차단한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청소년과 청년의 정치참여를 금지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적하지 않는 또 다른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기성정당의 청년위원회를 살펴보면, 청년위원회는 대부분 유명무실한 조직이다. 청년위원회는 청년답지 않은 45세 까지의 연령대를 포괄하고, 실제 청년들은 그 과정에서 거의 역할을 맡지 못한다. 조직만 있을 뿐 기능이 없다.


국회의원 연령대를 보면 그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례대표를 포함한 제 18대 국회의원의 평균연령은 53.5세이다. 50대가 가장 많고, 40대, 60대가 그 뒤를 잇고 30대 당선자는 불과 7명이다(이런 현실을 감추기 위해 국회 홈페이지는 위원회나 소속정당, 당선회수, 당선지역별 현황을 두지만 연령별 현황을 두지 않고 있다). 적어도 국회 내의 정치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정당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사회단체에 소속된 활동가들의 평균 연령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90년대 후반에만 해도 시민사회단체의 핵심은 20, 30대 활동가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포가 점점 변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려는 청년들의 수는 줄고 있고, 시민사회단체 활동의 허리 역할을 맡을 활동가의 수도 줄어들고 있다.


<대한민국 어버이연합>보다 더 무서운 건 정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어버이화’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틈새를 만들 청년들이 정치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다.


청년에서 청소년으로 내려가면 더 끔찍한 현실이 기다린다. 한국의 교육은 정치를 금기어로 만들었다. 인터넷의 시대에 청소년들이 정보를 구하지 못할 리 없는데, 학교나 정부는 청소년들이 정보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못하게 한다. 2003년과 2008년의 촛불집회 때 좌우를 막론하고 반복되었던 폭력은 청소년들에게 입 닥치고 공부나 하라, 이제 알았으니 너희는 들어가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는 걸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을 것이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가부장적인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식들이 자신이 살아갈 세계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학교가 정치의 장으로 바뀌는 것도, 교사가 정당활동을 하는 것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이런 교육환경에서는 사회현상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입장’을 가진 청소년들이 등장하기 어렵다. 입장이란 건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겪으며 생기는 체험을 바탕으로 삼는데, 학교와 학원, 집을 오가는 청소년들이 입장을 가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똑똑하게 말하는 아이들은 많지만 그 똑똑함을 삶으로 드러내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갖가지 논리로 무장한 똑똑한 아이들이 정치에 냉소한다는 건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알면서도 그리 되지 않을 거라 미리 냉소하는 마음은 세계를 파멸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도 좋지만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연령을 낮춰야 한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시도들 중 하나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주체들이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등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2006년 9월에 설립된 독일 해적당(Piratenpartei Deutschland)은 2011년 베를린 시의원 선거에서 8.9%의 득표율로 15석의 의석을 차지하며 제 5당이 되었다. 소통과 공유를 중요한 기치로 내세우는 해적당의 평균연령은 30.2세로 녹색당의 평균연령 46.8세보다도 낮다. 더 놀라운 점은 16세 이상이면 당원이 될 수 있고 종교와 국적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독일 해적당만이 아니다. 한국에도 도입된 주민참여예산제도를 처음 실시한 브라질에서도 16세 이상의 청년들이 투표권을 가진다.


이것은 특정 이념이나 정파를 위한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정치적인 판단력을 기르고 연습해야 좋은 정치주체가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의미한다. 19세 이상의 정당가입과 만 20세 이상의 참정권만을 인정하는 한국의 법률은 과거의 정치세계를 그대로 지속시키겠다는 의도일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과거와 다른 정치가 불가능하다.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당정치가 구태의연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에도, 풀뿌리정치는 대안적인 정치참여의 틀을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1년 경기도 수원시에서는 청소년참여예산제가 진행되었다. 홈스쿨링을 포함한 15개 학교 만16세~18세까지의 학생 23명이 공개모집되어 방학 때 예산학교에 참여했다. 고등학생들이 모여 교육과 관련한 예산을 결정한다고 하니 그 수준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논의된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다(아주 독특한 제안들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른들이 모여서 논의한들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제안들이다).[각주:1]

순위

주  제

내   용

1

진로상담도우미(MY WAY HELPER)

학교상담가배치, 진로체험

1

학습공간 확충(우리들의 공부하는 행복한시간)

도서관열람실, 독서실 조성

3

청소년 동아리 지원(날개달기 프로잭트)

학교동아리공간, 동아리지원금

4

학교셔틀버스(학교가기가 제일 쉬웠어요)

학교 셔틀버스 운영

5

청소년 프로그램 홍보(니가 나를 알아?)

청소년 시설 및 활동홍보

6

청소년 놀이문화공간(노릿길)

청소년을위한거리, 문화공간

7

학교급식개선(잘 먹고 잘 삽시다)

위생과 질개선

8

봉사센터 네트워크

자원봉사연계시스템

9

길거리 동물구조대(청소년 119)

동물구조 청소년 활동지원

10

학교내 모의법정(청소년 배심원제)

학생자치권보장

순위외

무상교육실시

중,고등학교 의무교육실시



그리고 서울시에 주민발의로 제출된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은 학교 안팎에서 모임이나 단체활동 및 정치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는 점 역시 기대할 만한 일이다. 또한 다양한 지역의 풀뿌리운동이 진행하는 청소년의회나 청소년활동도 이런 정치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3. 풀뿌리정치와 징검다리 정당


그렇지만 이런 시도들만으로는 세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길 기대하기 어렵다. 일본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다양한 생활운동들이 활성화되어도 보수적인 정치기득권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흐름이 형성되는 건 긍정적이나 그 흐름이 이미 존재하는 현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현재를 만들어갈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기존 질서를 부정할 수는 있지만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스스로 만드는 질서가 중요하지만 이미 있는 질서에 포획된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풀뿌리정치가 자율적인 지역공동체를 꿈꾸지만 그들만의 리그로 끝난다면 그것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지금 한국의 풀뿌리정치가 새로운 정당을 고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양한 정치주체를 성장시킬 뿐 아니라 이들간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협동의 힘을 강화시키고 부당한 정치․사회질서를 재편해야 자치하고 자급하는 공동체, 공동체들의 공동체가 가능하다. 그런데 현실의 정치구조를 볼 때 정당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한(?) 시민정치의 힘만으로 정치세계를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국가 내에서 국가를 배제하고 시장 내에서 자본의 논리를 배격하자는 전략도 있지만 이것은 특정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한국처럼 권력보다 폭력의 논리가 앞서고 기득권이 거의 모든 사회자원을 독점한 사회에서는 소수의 엄청난 헌신과 순교에도 성공가능성을 장담하기 어렵다. 그리고 지나치게 많이 일하고 자기 목소리를 스스로 검열하는 한국사회에서 그 정도의 능동적인 에너지를 많은 시민들이 지금 당장 드러내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독일 녹색당의 탈정당정치 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 녹색당은 ‘장기적인 안목의 생태주의’, ‘사회적 관심’, ‘풀뿌리민주주의’, ‘비폭력’이라는 네 가지 기본원칙을 부각시키며 독일의 정치세계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의 독일 녹색당 활동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하지만, 녹색당이 독일 정치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었고 녹색당의 기본원칙들이 독일과 유럽의 정치세계에서 차츰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정치구조의 면에서 녹색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 경제의 독점과 중앙집권적 기구의 지속적인 성장 대신에 시민과 친숙하고 민주적으로 통제가능한 자기조정형태의 개발

• 행정업무의 단순화와 완전한 분권화

• 행정적 권한, 자치권, 그리고 주, 지역, 군, 자치단체, 이웃에 대한 재정세입 할당액의 증액

• 행정과 관련된 모든 정보의 검열 없고 신속한 공개

• 행정기관과 국회의 청문회에 참관하고 각 부문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시민단체와 결사체의 권리

• 시민으로부터 유리되고 직무가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은 많은 자문 상담실을 일반적인 자문과 의사결정위원회로 대체. 자치단체, 군, 지역, 주, 연방의 차원에서 중요한 경제계획과 결정에 대한 이런 위원회들의 발언권 보장

•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국민투표와 일반투표.[각주:2]


이런 내용들은 기성정당의 ‘집권전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대표를 자처하며 자신이 모든 권력을 가지려 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는 발상이,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시민이 정치세계를 활성화시킨다는 믿음이 여기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녹색당 덕분에 독일에서는 다양한 시민사회운동들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지금 한국의 풀뿌리운동이 녹색당을 고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녹색당 홈페이지(http://kgreens.org)에 따르면, 녹색당은 “환경뿐 아니라 농업 살리기, 비정규직 문제, 소수자 인권, 방사능 먹거리 문제와 원전 폐기, 재생가능에너지, 동물권, 청소년 인권과 참여, 노동시간 단축과 생활임금 보장, 지속가능한 지역계획,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과 마을 만들기, 반전평화, 풀뿌리민주주의 등”의 다양한 의제들을 제기하고 이런 의제들을 “생태적 지혜와 사회적 정의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풀어가고자” 한다고 밝힌다. 그 전에 없었던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무시되어온 제안들을 녹색당이라는 틀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녹색당의 사무책임을 맡고 있는 하승수에 따르면, 녹색당은 반정당의 정당(anti-party party)을 지향한다고 한다.[각주:3]
기존의 정당정치를 반대하는 정당이라니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정당정치가 가져온 폐해를 다시 정당정치로 돌아가서 해결하겠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렇지만 사유화되고 독점된 정치구조를 외면한 채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도 어렵다. 그래서 시민들이 부조리한 세상에 좌절하지 않고 정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줄 ‘징검다리 정당’이 필요하다. 누가 징검다리를 건너는가에 따라 구호와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징검다리 정당의 정체성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다만 독일 녹색당의 경험에서 드러났듯이 권력을 집중시키는 정당의 속성과 권력을 해체하는 반정당의 속성을 하나의 조직 속에 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허나 괜스레 기존의 정당조직을 모방해서 조직을 형식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연계에 변이하지 않는 생명체는 없고, 환경의 변화에 맞춰 자신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환경을 바꾸는 생명체만이 오랜 생명력을 가진다. 정당을 인공적인 조직체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로 본다면, 정당도 그런 적응력과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려면 당원 한 명, 한 명의 의미와 실천이 정당의 조직과 연결되어야 하고, 그들이 자신의 정치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원들이 직접 만드는 당헌, 강령이 중요하다. 그리고 당헌과 강령이 당원들에게, 그리고 시민들에게 쓸모와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당헌과 강령이 일상적인 언어로 술술 풀려야 하고, 당원들의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한다. 권력이나 집권이 아니라 당원의 욕구와 삶을 지지하는 정당은 생명력을 가지고 다양한 풀뿌리운동과 접속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정당들은 시민의 징검다리가 아니었다. 정치세계를 보존하고 활성화시킬 새로운 정당은 탈정당정치가 아니라 ‘비(非)정당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모든 정치과정을 제도정치 속으로 제한하는 게 아니라 정치의 과정 자체를 넓혀 제도와 일상 속에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건들은 이런 정치가 실현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4. 인공의 정치에서 번식하는 정치로


새로운 정치의 방식으로 많이 얘기되는 것이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팟캐스트이다. 실제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나 여러 정치적인 사건에서 이런 매체들이 TV나 신문같은 언론매체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고, 심지어 ‘나는 꼼수다’를 본딴 MBC의 ‘나는 하수다’처럼 공중파 방송이 이를 모방하는 특이한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정보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봐야 할까? 그리고 정치도 이런 변화에 발맞춰 변화해야 할까?


사람들이 만나고 관계를 맺는 방법이 달라지면 그에 맞춰 정치의 방식도 당연히 변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변화를 기술의 변화에 따른 정치변화로 해석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인터넷을 비롯한 소통기술의 발달은 현실의 닫힌 소통구조를 넘어서려는 욕망/열망과 맞닿아 있다. 현실세계에서 소외되고 배제당한 사람들이 사이버세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강화시켜왔고, 현실세계에서 바이러스로 규정되고 금지된 담론들이 사이버세계에서 확산되어왔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많은 에너지를 인터넷에 쏟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새로운 경향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흔히 인터넷의 구조가 고구마나 감자가 수평으로 넓게 퍼지는 구조인 리좀(rhizome)을 닮았다고 얘기한다.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인 연계망을 통해 비조직적으로 확산된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구조는 풀뿌리운동의 방식과 닮았다. 조양호는 『모이고 떠들고 꿈꾸다』(이매진, 2010년)에서 인터넷정치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터넷은 조직이 없이도 조직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세상의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지금, 고정된 조직이 아니라 유연하고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조직 아닌 조직이 필요하다. 조직의 규모를 키워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조직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사람들의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런 조직관은 다양한 접속을 가능케 한다.


사실 이런 조직관은 이미 풀뿌리운동에서 논의되던 바이다. 같은 책에서 이호는 풀뿌리운동이란 “‘권력에서 소외된 다수 대중’이 주체가 돼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사회운동”이라 정의하면서 풀뿌리운동의 활동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일상의 공감대를 좀 더 많이 형성하는 과정”이라 지적한다. 인터넷정치처럼 풀뿌리운동은 유연하고 개방적인 조직구조를 통해 다양한 주민/시민들이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호혜의 관계망을 맺으면서 세계를 변화시키도록 지원해 왔다. 풀뿌리운동은 개인이 사회라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서로 돕고 보살피는 호혜의 관계가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풀뿌리운동은 경쟁과 생존투쟁을 극복하고 공생과 자율의 삶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자 내 삶의 경험이나 의식과 분리되지 않은 정치구조를 만드는 방법, 나와 우리의 삶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한국의 풀뿌리운동은 지역사회라는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세계로의 확장요구 앞에서 머뭇거려왔다. 이제 풀뿌리운동은 ‘번식하는 정치’를 요구받고 있다. 자신을 복제하는 정치 말고 외부로 활발하게 접속하며 자신을 변형시키는 정치 말이다. 인터넷이 고구마나 감자 같은 식물의 구조를 닮았듯이, 정치세계도 자연세계를 반영할 수 있다. 스테판 하딩(Stephan Harding)은 『지구의 노래』(현암사, 2011년)에서 세균들의 증식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균류는 놀라운 지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특이한 자의식도 있다. 이것은 균사체 속에서 균사들이 꼭지에서 꼭지 또는 꼭지에서 측면으로 서로 연결하면서 경이적인 의사소통 능력이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 네트워크는 우리 혈액 체계나 뇌 속의 신경회로와 매우 유사하다.…생물을 포함하는 모든 복잡한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균사체는 지적이지만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인간의 파이프라인과 달리 균사체는 주위 환경을 파악하고 나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법을 배운다. 균사체는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세균 종들 간에도 의사소통을 하며 그 결과로 여러 종이 혼합된 군집이 나타날 수 있다. 이 혼합된 군집은 단일 종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한다.…세균의 화학적인 의사소통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이 의사소통은 인간언어의 기본적인 문법구조와 유사한데,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제 세균의 통사론(統辭論)과 사회적 지성에 대해서까지 말하고 있다. 이 정교한 세균의 언어는 미생물 군집 내에서 다른 종들 간의 긴밀한 조정까지 가능하게 할 정도다.”


우리는 정치가 인위(人爲)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동물이나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설명은 타당하지만 인위적인 정치의 논리가 반드시 인공(人工)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인공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욕망이 핵발전과 같은 파괴의 정치를 불러왔다. 그동안의 인공적인 정치는 사람의 관계와 정치적인 힘을 만들려(工)했고 그래서 더욱더 강한 힘을 욕망했다. 그래서 정파와 조직이 중요했고 규율과 규범이 강조되었다.


이제는 인공적인 정치에서 자연의 정치로의 인위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사람과 자원을 쓰고 버리는 근대적인 ‘소비의 정치’가 아니라 순환시키고 재활용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균류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생명이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것,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맺으며 번식해야 한다는 것, 경험에서 배우며 향상시키는 지성을 가져야 한다는 그 지혜 말이다.


세계의 근본적인 위기에 맞서 풀뿌리운동은 공통의 과제를 찾고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각자가 추구해온 정체성을 버리고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문법을 개발하고 이질적인 요소를 서로 소통하며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의제와 정책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우선순위를 정하고 관료제도와 자본의 저항에 맞설 수 있는 강한 정치력도 형성해야 한다. 가령 핵발전을 추진하는 원자력마피아를 해체하려면, 부패한 학자와 관료, 독점재벌, 언론들의 강력한 동맹을 해체시켜야 한다. 엄청나게 강한 정치적인 힘이 없다면 이런 카르텔을 깨기 어렵다. 단순한 구호만으로는 이런 힘을 만들 수 없다. 이미 기득권화된 정치구조에서 하나의 정당이 독자적으로 이런 힘을 만들 수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풀뿌리운동이 구성할 새로운 정당은 다양한 정치적 힘이 접속해서 활용할 수 있는 허브여야 한다. 그러려면 시민사회운동이나 풀뿌리운동이 만든 의제와 정책을 정당이 받아들이는 과거의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독일 녹색당도 고민했던 바이다. 독일 녹색당은 지방의회와 연방의회에서 여러 시민사회운동단체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곳에서 얻은 정보를 단체들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독일 녹색당도 정당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고 현실정치의 논리를 따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구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당이 풀뿌리정치의 허브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새로운 정당은 앞서 얘기한 균류의 생명력을 배워야 한다. 여러 종의 세균이 뒤섞여 군집해서 의사소통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떨어지며 한 종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하듯이, 정당도 그런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강한 정치적인 힘을 만들며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뒤섞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방식이 바로 ‘추첨제’이다. 추첨제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라는 점은 이미 『일본 정신의 기원』(이매진, 2003년), 『선거는 민주적인가』(후마니타스, 2004년), 『추첨 민주주의』(이매진, 2011년)와 같은 책들에서 진지하게 논의된 바 있다. 민주적인 원리라는 점 외에도 추첨제는 권력을 순환시켜 전문가나 정파의 출현을 막는다. 그리고 추첨제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고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연합하게 만들며 아마추어가 가진 경험을 중요한 지식으로 만든다. 마치 균류의 체계처럼.


그렇지만 추첨제만으로는 부족하다. 능동적인 참여의지를 가진 시민 없이 추첨제가 저절로 자리를 잡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뿌리정치의 역할이 중요하고, 정당 안팎에서 풀뿌리운동은 다양한 사건들을 계속 일으켜야 한다. 새로운 정당은 기득권화된 정치구조를 해체시키며 풀뿌리운동을 지원하고, 풀뿌리운동은 새로운 정당의 정치주체들을 발굴하고 성장시켜야 한다. 때로는 왁자지껄한 소란과 이질적인 대립이, 때로는 끈끈함 공감과 울림이, 때로는 화끈한 합의와 긴밀한 소통이 다양한 정치 에너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정당은 ‘공유지로서의 정당’이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 ‘번식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정당이 아니라 우리의 정당이 되어야 하고, 실제로 당원들이 당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자원과 기술, 사람이 접속하고 분화되는 플랫폼이어야 한다. 공유지로서의 정당을 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각자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것에서 공유는 시작된다. 나누는 것은 단지 물질만이 아니다. 내가 가진 지식, 물건, 공간 등 다양한 것을 나누면서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끈끈해지고 조금 더 안전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끈끈한 공유지가 정치의 힘을 발휘할 때 주권에 포획되지 않는 다양한 정치력이 발휘될 수 있다.



5. 풀뿌리정치의 꿈틀거림


그동안 질기게 이어진 풀뿌리운동은 선거라는 제도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제는 탈정치나 탈이념이라고 매도당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마련되었고, 풀뿌리정치는 기성의 권력정치(power politics)나 정당정치를 변화시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고, 사건이기에 미래는 기대할 만한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건이 특정한 방향의 지향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사건이 특정한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사건은 사건이기 때문에 터져 나오고 예측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가 『저항』(이후, 2003년)에서 말하듯 “사건은 늘 너무 조숙하게, 때맞지 않게 시간을 거슬러서 출현한다. 사건의 힘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사건은 ‘자신의 미래에서,’ 자신이 창시하는 새로운 가능성에서 의미 있게 된다. 사건은 ‘자신에 대한 이해의 조건’을 자신 안으로 운반해 온다. 사건의 후예만이 이런 새로움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건은 가능한 것들의 뿌리에서 올라오기 때문이다. 사건은 가능한 것들이 놓인 지평을 바꾸고 ‘시간의 혁명’을 선언한다.” 지금 우리가 지켜보며 준비하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다.


풀뿌리정치가 믿고 따라갈 모범이나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틀댈 뿐이다. 겨우내 움츠려 있으면서 꿈을 길러서 봄이 오면 꿈을 튼다는 것이 바로 꿈틀거림이라고 함석헌 선생은 강조했다. 이 꿈틀거림이 정말 “무서운 꿈틀”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나운 겨울바다, 같은 권세 밑에 갇히는 민중의 꿈”이고, “그 꿈이 터지고야 마는 봄”이 오기 때문이다. “삶은 절대이기 때문에 터지고야 만다. 말도 못하고 죽는 민중의 꿈틀거림은 생(生)의 항의(抗議)다. 삶의 외침이다. 삶의 음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이다. 말씀이다. 역사의 길이다. 내가 이름 없는 민중이라도 민중이기 때문에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각주:4]


그런 경계를 넘나드는 풀뿌리정치의 꿈틀거림이 2012년에 만들어낼 사건을 기대한다.

  1. 김광원, “참여예산, 제도보다 중요한건 주민참여!”, 2011년 11월 22일 ‘좌충우돌 참여예산, 우리 동네를 발견해줘’ 발표문. [본문으로]
  2. 스프레트낙․후리조프 카프라 지음, 강석찬 옮김, 『녹색정치: 전지구적 위기에 도전하는 녹색당의 이념과 활동』(정신세계사, 1990년) [본문으로]
  3. 하승수, “지금 왜 녹색당인가”, 《녹색평론》 2012년 1~2월호. [본문으로]
  4. 함석헌 지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 1979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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