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共同體)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영어 community는 라틴어 communis에서 유래되었는데, 『옥스퍼드영어사전』에 따르면 이는 ‘함께’를 뜻하는 com과 ‘의무나 책임, 선물을 준다’는 뜻의 munis의 조합어이다. 즉 공동체는 함께 어떤 책임을 지거나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들이다. 공동체는 그 나름의 관습에 따라 같이 일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공동의 목적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런 관계가 맺어진 곳은 어디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공동체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가난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혼자서도 잘 살아갈 사람들에게는 공동체가 그리 절실하지 않고, 반면에 같이 아파하고 기뻐하며 힘을 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공동체는 참으로 절실하고 소중한 것이다.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을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관계를 뜻하지 않기에 공동체의 힘은 관계를 통해 서로의 힘을 북돋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이런 점을 자각할수록 그 힘은 강해진다.

 

구성원들이 서로 책임을 지거나 살림살이를 나누는 곳이기에 공동체는 어느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규정한 목적을 실현하거나 이미 규정된 목적만을 실현하지 않는다. 그곳은 구성원들이 관계를 만들어가는 장이고, 그래서 공동체의 경계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문턱은 아니어야 한다. 타자를 배제하는 유명한 공동체보다 공동체라 불리지 않아도 우정을 맺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훨씬 더 공동체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동서양 어디서나 인류 역사에서 이런 공동체들을 수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고,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기에 예전에는 공동체가 절실히 요구되지 않았다.

 

공동체가 사회의 중요한 대안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이다. 칼 폴라니(K. Polanyi)가 블레이크(W. Blake)의 싯구를 인용해 표현했듯이 자본주의는 ‘악마의 맷돌’이었다. 자본주의는 이전의 관계를 완전히 해체시키고 인간과 자연을 화폐로 측정되고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끊고, 우리 삶에 필요한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방인들을 계속 만들었다. 이렇게 맷돌에 갈려나간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지지해줄 관계를 다시 찾게 되었다. 지금도 신자유주의라 통칭해서 불리는 여러 사회변화들은 공동체의 필요성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다.

 

협동조합은 이렇게 가난해진 사람들이 다시 서로를 마주보고 서로에 의지하며 사회의 주체로 서려는 곳이다. 그래서 협동조합은 타자를 만나는 공간이자 자신을 만나는 공간이다. 자신을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자를 인정하거나 존중할 수 없듯이, 나와 약속할 수 없는 사람은 타자와 약속할 수 없다. 내가 남에게 기댈 수 있어야 남도 나에게 기댈 수 있고, 내가 스스로 일어서야 타자도 일어설 수 있다. 협동조합은 타자와 더불어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한 나의 조건을 만드는 곳이고, 협동조합은 그 목적을 공통의 것으로 조직하고 실천하는 곳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마주 보고 투명인간과 이방인들이 그 재화와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마주볼 방법을 찾을 때 다시 공동체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은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를 활용하려는 곳이 아니다. 협동조합은 관계망을 찢는 자본주의에 맞서 싸워야 하고, 때로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은 공통의 필요를 조직하고 공통의 열망을 실현하려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협동조합과 공동체는 매우 비슷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곳이다.

 

그렇지만 생활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만의 공동체, 폐쇄적인 공동체가 공동체란 말의 의미를 왜곡하듯이, 자본주의 영리기업과 비슷해지는 협동조합이 협동조합의 공동체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 협동조합도 협동보다 경쟁을, 관계보다 소유를, 연대보다 시기를, 사랑보다 무관심을 퍼뜨리는 곳이 될 수 있다. 그 옛날 예수의 공동체가 기독교로 제도화되었듯이 협동조합도 공동체성을 포기할 경우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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