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의 서평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아직 프레시안에 올라오진 않았는데, 연휴 때문인지 아니면 글에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쓴 글이니...^^
----------------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되기 전,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아직 개발이 덜 됐어.” 그리고 얼마 전 여성계 신년인사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의 “보육은 이미 사실 무상 보육에 가까이 왔다”는 충격적인 발언에 이어 무상급식과 관련해 “대기업 그룹의 손자, 손녀는 자기 돈 내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 손자 손녀는 용돈 줘도 10만원, 20만원 줄 텐데 5만원 내고 식비 공짜로 해준다면 오히려 그들이 화가 날 것”이라 말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나도 화가 났다. 한국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이렇다. 그들은 이 세계에 어떤 생명/사람이 사는지를 모른다.


딱딱한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다면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진심’을 느끼고, 그럴 때마다 그가 지닌 강한 힘을 의식하고 우리 사회의 정의를 의심하게 된다. 내게는 참으로 불편한 ‘복불복의 공정사회’가 그에게는 기회의 땅이다.


가장 춥고 눈이 많이 온다는 이 겨울에 어떤 이는 얄팍한 비닐천막에 의지해 농성장을 지키고 어떤 이는 35미터 높이의 고공크레인에 올라 있지만, 힘을 가진 사람들의 눈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치열한 몸부림이 힘 있는 자들의 눈에는 돌파해야 할 장애물이나 발전에 뒤따르는 부수적인 피해로 비친다. 그래서 힘 있는 자들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철거와 벌금으로 맞선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왜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볼까? 왜 우리와 비슷하게 보이던 사람도 힘을 가지는 순간 전혀 다른 인물로 변신할까? 제임스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는 이런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준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스콧의 얘기를 정리하면, 그들의 눈은 숲이 아니라 팔 수 있는 나무만 보도록 맞춰져 있다. 그들의 눈에 “가치 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농작물에 기생하는 벌레는 ‘해충’으로 낙인찍힌다. 또한 가치있는 나무는 ‘목재’가 되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종은 ‘잡목’이 되거나 ‘덤불’쯤으로 여겨진다. 이와 동일한 논리는 동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높은 가격이 매겨진 동물은 ‘사냥감’이나 ‘가축’이 되지만 그것과 경쟁하는, 혹은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은 ‘약탈자’나 ‘야생동물’쯤으로 간주된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진보적으로 믿는 “시민권, 공공위생 프로그램, 사회안전, 교통, 커뮤니케이션, 보편적인 공교육 그리고 법 앞의 평등 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국가중심적, 하이 모더니즘적 단순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된 게 아니라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순해진 지도와 세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아직도 애써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미 피부로 서서히 느껴지는 지구세계의 파멸이다. 이 비극적인 상황을 감추기 위해 힘을 가진 자들은 ‘복원’과 ‘살리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스콧은 그런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가상적’ 생태를 만들기 위한 ‘삼림 복원’이 시도되어 뒤섞인 결과를 드러냈지만, 숲을 지탱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을 여전히 부정하고 있었다. 바로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조건인데, 획일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다양성은 여전히 어려운 선택이다.


그렇다면 눈앞으로 다가온 파멸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스콧은 국가처럼 보지 않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우리 눈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인정하도록 노력하자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힘을 가진 자들의 ‘하이 모더니즘’을 견제할 강한 시민사회이다. 그런 점에서 스콧은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그 민주주의란 토착적이고 경험적인 지혜를 뜻하는 “시민의 메티스가 조정이라는 방식으로 그 나라의 법과 정책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조금 식상할 수 있지만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되듯이 우리가 기댈 곳은 역시 민주주의 뿐이다.


‘또 다른 경제가 가능하다’가 아니라 ‘또 다른 경제가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던 스콧의 『농민의 도덕경제』처럼, 『국가처럼 보기』는 ‘또 다른 삶의 질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렇다고 스콧이 지금껏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세계를 통제해서 생산을 확대하고 사회질서를 합리적으로 바로 잡으며 이 세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욕망이, 스콧의 표현을 빌면 “행정적 질서화에 대한 열망”이 ‘아방가르드’나 ‘전위’,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지적해온 바이다.


그럼에도 스콧의 얘기가 흥미로운 것은 그것을 ‘보는 법(seeing)’으로 설명하고, 국가가 파괴하고 무시해온 평범한 사람들의 지혜가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단지 바라보는 사고틀(프레임)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그동안 하이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이 다양성을 파괴하고 지역적 지식의 중요성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개인의 자율적인 역량을 파괴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다시금 과거의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목소리를, 농민과 “전통적인 사람들”, TV프로그램인 ‘생활의 달인’에 나올 법한 평범한 사람들의 지혜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 열정적인 책이 한국에서 차갑게 ‘소비’된다는 점이다. 이 책에 대한 언론사들의 서평을 보면 그들의 ‘책을 보는 법’이 드러난다. 《조선일보》의 서평은 이 책을 두 번이나 다루지만 소련의 집단농장 실험에 대한 비판, 외국의 국가공공사업에 대한 비판으로 다룰 뿐 지금 우리의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 반면에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서평은 박정희와 4대강사업을 비판하지만 정작 스콧에 강조했던 농민과 공동체, 전통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이념의 틀을 뛰어넘어 삶과 그 터전을 지키려는 열정이 우리 사회에서는 기존의 앎을 확인하거나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책을 번역한 사람으로 넘어가면 안타까움이 궁금증으로 바뀐다. 책을 번역한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전상인 교수는 소위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여기서 이념을 문제삼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왕 시작된 4대강 사업이 100년 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르는 성과를 낳겠다는 꿈과 각오를 함께 다지면서 말이다. 문제는 시간도 아니고 예산도 아니다. 정답은 정성이다.”  “지역주민 대부분이 원하는 데다가 사법부도 적법하다고 판단한 4대강 사업, 그리고 당사자인 자동차업계가 환영한다는 한·미 FTA를 민주당이 '절대 반대'로 임하는 자세는 공당(公黨)의 몫이 아니다”라고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는 분이 스콧의 책을 번역했다는 사실은 좀 생뚱맞다. 이런 관점이 바로 스콧이 비판하는 관점 아닌가? 그렇다면 왜 이 책을 번역했을까? 자신이 동의하지 않지만 중요한 얘기니 알려야 한다는 지식인의 사명이었을까?


이 궁금증을 풀려면 책의 본문과 각주 뒤의 ‘옮긴이의 글’을 읽어봐야 한다.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 뒤에 이런 문장이 있다. “박사과정에 속한 김동완(현재는 박사다), 김민희, 김성연, 김예성, 여희경, 장지인, 정유진, 최민정은 이 책의 번역 과정에 참여했다.” “생애 최초의 번역 작업이 정말로 지긋지긋하고 힘들었”을 수 있지만 많은 대학원생들과 함께 했다면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 듯싶다. 『우리 시대 지식인을 말한다』라는 책에서 권력과 지식의 유착을 비판하며 지식인이 연구라는 자신의 본령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분이, 사회 정의나 이념과 무관한 진리 추구를 부르짖는 분이 학생들과 함께 번역한 책에 자기 이름만 덜컥 올린 점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이렇게 국가처럼 보는 분이 이로써 공직을 맡기 어려운 근거 하나를 만들었다는 점, 메마른 현실에 단비가 될 책이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