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에도 여행은 가고 싶은데 탄소배출량은 걱정되고. 그럼 탄소배출량이 낮은 기차로 떠나는 여행은 어떨까. 캐리어를 가득 채운 짐과 자동차는 놓아두고 배낭 하나 가볍게 메고 떠나는 여행. 빠른 고속열차보다는 느린 무궁화호를 타고, 고속철은 서지 않는 작은 역에 내려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자연과 지역을 경험하는 저탄소 여행. 내 건강에도, 지역에도, 지구에도 나쁘지 않은 여행. 지역을 소비하지 않고 알아가는 공감여행.
2028년이면 무궁화호가 사라질 예정이고, 그러면 작은 역의 운명도, 무궁화호가 서던 지역의 운명도 어찌될지 모른다. 사라지는 것들을 당장 지켜낼 방법은 없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애틋하게 사랑하면 뭔가 방법도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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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 구미역을 지나 내리는 약목(若木)역의 위치는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이다. 1918년부터 운영되어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오래된 역이지만 지금 건물은 2000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이제는 무궁화호조차 잘 서지 않아 출퇴근 시간에나 약목역에 내릴 수 있으니, 뚜벅이들은 아침에 서둘러야 한다.

약목역

지금은 여객보다 화물 중심이라 한 켠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약목역에 내려서 작은 역전으로 나오면 당황스럽게도 곧바로 큰 도로와 눈 앞에 시골 상가 풍경이 들어온다. 여기에 뭐가 있을까 의심이 들지만 일단 역전 횡단보도를 건너가자.

남계교

길을 건너 칠곡약목우체국을 보고 좌회전해서 조금 걸어가면 버스 정류장이 나오고(이 정류장 위치를 기억해 둘 것!), 약목전통시장을 지나 조금 더 걸가면 두만천의 남계교가 나오고 거기에 신유장군 유적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걷기의 시작이다.

그렇지만 시내의 상가를 그냥 지나치지 말고 점심을 어디서 먹으면 좋을까 식당을 찾으며 걷는 걸 추천한다. 오래된 중국집, 손칼국수, 순대국, 뚝배기해장국, 손국수, 추어탕 등 다양한 음식점들이 곳곳에 있으니 취향에 맞게 골라보자. 여행의 재미 중 하나는 식도락 아닌가.

유적지 가는 길

표지판 방향으로 인도가 이어지고 중간에 잠시 끊어져도 반대편에 인도가 있으니 걷기에는 크게 불편함이 없다. 개천 왼편에는 전형적인 시골마을 풍경이 보이고 앞에는 시묘산과 비룡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다면 잠시 이어폰을 빼고 개천 물 흐르는 소리와 바람이 대나무를 스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어보자.

곤산서원

조금 걷다 보면 오른편에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들이 사용하던 곤산서원(崑山書院)이 나온다(2004년에 복원된 건물). 인터넷을 찾아보면 사전에 협의할 경우 관람을 할 수 있다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다. 곤산서원을 지나 1킬로미터 정도 더 걸으면 신유장군 유적지가 나온다.

칠곡군 관광 안내도
인문학마을 표지판

유적지 입구 칠곡군 관광안내도를 보면 멀리 떨어진 호국평화기념관, 꿀벌나라테마공원, 칠곡왜관철교, 칠곡평화분수같은 관광지들도 표시되어 있다(이곳은 왜관역에 내리면 걸어갈 수 있다. 그것은 다음 왜관역 편을 참조!). 그것보다 더 호기심을 끈 것은 칠곡인문학마을이란 이정표이다(적정기술의 흔적도 보이고 커뮤니티센터 이름도 공평화락인데, 칠곡군이 한때 문화도시를 지향했다). 신유 노래비(신류 장군이 아니라 그 18대손인 가수를 기리는 노래비. 헷깔리지 말 것)를 지나 조금 위로 걸어올라가면 신유장군 유적지가 나온다.

신유장군 유적지

신유장군 유적지는 신류(申瀏, 1619~1680)를 모신 사당으로 신류는 1658년에 제 2차 나선정벌을 지휘했던 장군이다. 청나라의 요청으로 신류는 조총부대를 이끌고 파병을 가서 러시아군과 싸워 이겼고, 141일간의 일상을 빠짐없이 기록해 《북정록(北征錄)》이란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북정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더불어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신류가 당시 러시아에서 입수했던, 화승총보다 개량된 수석식 소총은 조선의 조총기술을 한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적지에는 신류 장군의 신주와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과 비석, 묘소를 볼 수 있다. 난세에도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장수는 말년에는 역모에 휘말리는 불운을 피하지 못했다(조선시대 뛰어난 장수들의 국룰!).

그때나 지금이나 동북아시아의 정치는 불안정하다. 당시 조선은 조공을 바치던 청나라의 요청으로 파병을 한 셈인데, 분단된 남북한은 중국, 러시아, 미국이라는 강대국들에게 휘둘리고 있다. 최근 북한과 러시아가 맺은 조러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은 한미일동맹과 충돌할 가능성을 점점 더 높이고 있고, 북한의 러시아 파병은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복잡한 정세에, 신뢰할 수 없는 청나라의 지휘를 받으며 2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오지로 떠나야 했던 장수의 마음은 어땠을까? 《북정록》은 1980년대에 번역되어 절판되었으니 도서관을 뒤지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두만저수지

신유장군 유적지는 공평화락 초록권역에 있고, 유적지 바로 옆이 두만저수지이다. 두만저수지는 1970년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홍수를 조절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둘레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길에 경사가 없어 걷기 편하고, 물결이 잔잔해 햇살이 반짝이는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걸을 수 있다.

시골 마을에 이렇게 산책로를 만들면 적지 않은 예산이 드는데, 보통 이런 사업은 농림부가 진행하는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으로 진행된다. 여러 마을들의 연계형 사업들을 발굴해 정주여건이나 복지, 문화를 강화시키려는 사업인데, 전국의 많은 농촌들이 이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사업예산이 수십억을 넘어 전국의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지원하는데, 주민들보다는 컨설팅업체나 건설업체들에게만 이로운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곳곳의 흔적으로 봐서 칠곡군은 인문학 관련 사업을 시도한 것 같은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입구에서 본 공평화락(公平和樂)이라는 말 자체는 참 뜻이 깊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즐거워한다, 요즘 참 그리운 단어 아닌가.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길을 걸으시는 분들 상당수가 마을 사람들이라 서로 인사를 나눈다. 여행객들로 붐비는 여행지보다는 시골 동네로 순간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다.

신유장군 유적지와 두만저수지를 둘러보고 다시 시내로 돌아오는 시간은 잘 걷는 사람이라면 3시간,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4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아까 유적지 표지판을 봤던 남계교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면 특이한 벽화들이 눈에 띈다. 2018년에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었던 《칠곡가시나들》의 배경이 바로 약목면이고, 할머니들이 쓴 시가 벽화로 남아 있다(관리는 잘 되고 있지 않은듯). 다들 시골마을 고령화되었다고 한마디씩 하는데, 인생 팔십줄 사는 기 와 이리 재민노라 하신다. 시골의 쇠퇴가 정말 고령화 탓일까?

칠곡가시나들 벽화 거리

시간여유가 있는 사람은 시장통에서 막걸리 한잔 기울이며 저녁까지 기다려 기차를 타도 좋고, 급한 사람은 버스정류장에서 11번이나 111번을 타면 40분 정도 걸려 구미역으로 갈 수 있다. 20분 정도 기다리면 버스를 탈 수 있으니 급한 사람은 구미로, 시간이 넉넉한 사람은 약목면의 풍경을 즐기며 공평화락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보자. 지금 우리는 어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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