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이명박 대통령은 빡빡한 미국방문 일정에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만나 한미FTA 등 현안을 논의했다 한다. 연방국가인 미국에서 상원의원도 아닌 주지사를 만나 왜 한미FTA와 같은 국가간 협정을 논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미국경제가 먼저 살아나야 다른 나라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미국경제, 그 안에서 비중이 큰 캘리포니아 경제가 살아나는 것이 중요하다”며 미국경제를 걱정하는 발언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요즘처럼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도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경제까지 걱정해주니 그 따뜻한 연대감에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눈물을 흘렸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방문과 대화내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런 깜짝 이벤트는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취향인 듯하다.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고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어쨌거나 아놀드를 만나서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국내로 돌아오자마자 결연한 각오를 밝혔다. 지난 27일 “일시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목숨을 던질 그런 자세로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겠다고 말하지 않나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는 공자님 말씀을 인용하며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던져라”는 자세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28일에는 “먼 훗날 몸을 던져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한층 더 터프한 모습으로 돌아온 우리의 대통령, 우리는 박수치며 환영해야 할까?

무엇을 결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터미네이터의 장비는 곧 장만할 태세이다. 정부가 이번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에 따르면, 경찰청은 집회대응 예산으로 48억 5,400만원을 신청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만만치 않다. 야간 조명차 2대, 물대포 3대, 물보급차 4대, 차벽트럭 17대, 신형보호복 2,106벌, 무선망 수신기 3,606개, 중형소화기 255개, 소형소화기 2,106개, 첨단채증장치 3세트 등이다. 예산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업그레이드된 터미네이터 군단을 곧 거리에서 만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가 터미네이터식의 전쟁일 수 없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사회에서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고, 그래서 정치의 세계는 다양한 의견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보장해야 한다. 이상적인 정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현실 정치는 여러 협상과 타협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난 너만 구하면 된다’는 터미네이터식 발상은 정치의 세계가 구성되는 원리인 견제와 균형, 타협과 협상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영화를 보면 로봇조차도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은?).

목숨을 바쳐 일을 하겠다는 우리 대통령의 자세는 이번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가 화해와 통합을 강조한 것과 사뭇 대조를 이룬다. 대체 어떤 목표를 세웠길래 정치의 기본을 무시하고 온갖 첨단 장비로 무장하며 목숨을 바쳐 그것을 추진하겠다는 걸까? 아직 모든 게 분명하지 않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입장을 바꾸는 정부인지라 뭘 하겠다는 건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 대통령은 친절하게 라디오로 자신의 입장을 직접 밝히는 편이니 얘기를 들어보자. 귀국한 뒤의 첫 라디오연설 주제는 청년실업이었다. 그러면 청년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한 목숨 바쳐 일하겠다는 걸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자신의 경험담까지 들며 많은 얘기를 했지만 건질 만한 얘기는 이 정도인 듯하다. 세상에 경험만큼 소중한 스승은 없으니 비정규직이든, 임시직이든 무조건 취직해서 노조가 있건 없건 찍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라 일하라(월급은 제때 받으려나?). 이율곡 선생을 본받아 청년리더 10만 명을 양성하기 위해 7,500억원의 예산을 특별히 편성하겠으니 불만을 가지지 말라(1인당 750만원씩 나누나?). 그래도 국내에 일자리가 없으면 해외로 10만 명을 파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4대 보험은 되려나?)는 얘기이다.

허나 어떡하나? 실업자통계에 잡히지 않는 취업준비생까지 합치면 청년실업자는 수는 대략 15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10만을 양성하고 10만을 파견해도 청년실업율을 낮추기엔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대통령은 정말 목숨을 바칠 만한 필생의 역작을 슬며시 다시 꺼내고 있다. “4대 강 정비사업이면 어떻고, 운하면 어떠냐”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4대강을 정비하면 그것이 곧 대운하가 아니겠는가.

터미네이터를 좋아하는 명바기네이터가 돌아왔다. 그것도 예전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서 촛불시위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한반도의 생태계는 다시 한번 멸망의 날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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