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기술과잉, 초고령사회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주제들을 받고 부족하지만 최근의 고민들을 짧게 정리하려 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고민은 경제성장을 지상과제로 삼은 산업문명이 한계에 봉착했고 그로 인해 불거진 재난들이 잦아지는 상황에서 지역이 과연 전환의 기회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입니다. 왜냐하면 압축성장의 그늘과 문제점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분위기보다는 여전히 메가서울, 메가시티와 같은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 중요하게 다뤄지기 때문입니다. 지역과 다양성이 논의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따라잡기와 복제의 힘이 훨씬 더 큽니다.

성북구에서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지역과 지역학은 의미가 있고 진지하게 다뤄야할 주제입니다. 저 역시 지역의 가능성을 보고 오랫동안 자치와 자급의 힘을 강화시킬 방안을 찾기 위해 고민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회복과 재생에 대한 공동체적인 믿음을 넘어 다수를 설득하고 전환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만들기까지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연은 갑작스레 찾아오니까요. 그렇다면 우연을 기회로 만들 준비가 필요한데, 어떤 준비가 가장 중요할까요? 준비는 문제에 대한 진단에서부터 시작하기에 진단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려 합니다.

 

 

1. 진단: 문제에 대한 확인

 

최근의 지역과 로컬에 대한 논의를 따라가며 답답함을 느꼈던 부분은 장소성과 다양성, 회복력 등의 긍정적인 성격을 부각시키는 것에 비해 그것의 실현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장애물들에 대한 분석과 대응이 부족하다는 지점이었습니다. 마치 한편에서는 병원, 상점 등의 필요시설 부족으로 지방소멸이 얘기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지역의 문제를 창의적, 혁신적으로 해결하는 로컬 크리에이터가 마치 대안처럼 얘기된다고 할까요. 여러 위기를 고려해 자원의 동원을 신중하게 조절해야 할 시기에 대규모 자원을 투입하는 메가도시 전략이 얘기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력을 위해 서울을 더 키워야 한다는 주장과 균형발전을 위해 비수도권에도 서울과 같은 중심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에서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정부가 대규모 자원을 기획/투자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일정한 위치나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전략이 기후위기와 기술의 선택적 과잉, 불평등으로 인한 인구구조의 붕괴를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성장   중앙/지방정부 계획   글로벌 경쟁
   

 

기후위기는 산업문명의 이득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피해가 다수에게 전가되는 현상이 문제이고, 기술과잉이란 것도 기술의 편리성이 소수에게만 이득이 되고 위험성이 다수에게 전가되는 현상이 문제이며, 초고령화도 위협으로 느껴지는 건 소수를 위한 사회시스템을 지탱해줄 토대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성장의 서사구조와 불평등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사회의 전환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이런 고민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성장이 아닌 다른 가치지표를 찾고, 정부가 아니라 지역이 주도해서 그런 지표를 실현할 힘을 만들어 경쟁보다 순환공존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계속 있어 왔습니다. 그것이 현실의 운동으로 작은 성공들을 거둬왔지만 사회의 전환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봅니다.

대안적 가치지표   지역주도(자치/자급)   순환공존체계/지속가능성
   

 

그러면서 지금 목격하는 현상은 대안적인 가치와 언어조차도 성장담론에 포획되어 관료주의라는 깔때기를 거치면 획일화, 서열화되어 버리는 기묘한 상황입니다. 마을, 공동체, 대안경제, 공유지같은 가치와 언어들은 계속 사용되고 있지만 그 전환적 성격은 약화되고 기존 사회의 보완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성격변화에는 관료주의의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관료주의의 특성이라 할 도구적 합리성과 목표달성을 위한 공학적 접근, 선택적 자원동원, ()정치성이 이런 대안적 가치/언어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안마저도 획일화, 서열화되는 상황을 자주 목격하고, 그것이 내부의 경쟁을 초래하면서 애초의 가치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가치/언어의 포획   관료주의(중앙/지방)   획일화/서열화
   

 

재난의 시대에 지역이 대안이 되려면 다양성이 반드시 필요한데, 지금은 다양성조차 해법으로 제한되어 버립니다.

 

 

2. 준비: 우연을 가능성으로

 

서두에서 밝혔지만 저는 한국사회의 전환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입니다. 그렇지만 우연과 사건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으므로 저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준비는 앞서 했던 진단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저는 기후위기, 기술과잉, 초고령화가 어떤 지점에서는 사회전환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전환의 방향이 문제일 텐데요. 기후위기가 불러올 재난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재난이 초래할 상황에 대한 대비가 필요할 겁니다. 그런 대비에 지역이 어떤 역할이 할 수 있을까요? 한재각은 기본적 필요를 넘어서 더 많은 소비를 위한 부의 ()분배를 희망하며 이를 가능하도록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정책에 (암묵적으로나마) 동의해 온 관행과 결별하는 것”(기후정의, 2022)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탈성장과 좋은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하는데요, 저는 이 주장에 동의하고 나아가 좋은 삶에 대한 더 구체적이고 풍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좋은 삶과 그것을 가능케 할 공동의 토대에 대한 논의가 현실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선택지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국가의 관리대상으로서의 고령(인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농촌에서는 일흔 살도 청년이라는 말은 고령화의 그늘을 묘사하는 부정적인 말로 사용되지만 달리 보면 여전히 마을의 주체라는 점도 뜻합니다. ‘고령=무기력, 복지수혜층의 도식은 다분히 국가 중심적인 시각이고, 다양성은 각자의 쓸모를 찾아가는 사회를 요구합니다. 국가가 미래를 담보로 현재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지역은 현재의 행복을 바탕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구감소보다 1인가구의 증가가 사회시스템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봅니다. 서울시의 경우 1인 가구 비율이 200016.3%였다면 202034.9%로 증가했습니다. 2050년이 되면 고령 1인가구의 비율이 41.1%를 차지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의 주거형태와 공공서비스체계는 1인 가구가 절반을 차지하는 시대에 적응될 수 있을까요?

그런 적응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할 것이 권력화된 통제장치로서의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승일은 물리적인 환경만이 아니라 개인의 정신적인 능력과 활동까지 관리하는 이중관리사회에 저항하려면 현재의 우리가 어떤 합리성의 원칙으로, 어떤 메커니즘과 프로세스를 통해, 어떻게 통치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기계, 권력, 사회, 2021)고 봅니다. 기술과잉의 반대는 기술을 쓰지 않는 사회가 아니라 과잉의 이유와 방향을 통제하고 기술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스콧은 메티스라는 개념을 통해 변화하는 상황에 부단한 적응을 요구하는,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은 과업을 오랫동안 수행할 때에만 얻어지는 지식”, “지역적이고도 상황적인 지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국가처럼 보기, 2010). 이런 메티스가 활성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메티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중요성을 약화시켰던 반대의 지식, 강력하고 찬란한 진보를 확신했던 하이 모더니즘을 이해하고 해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크게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상징과 의식을 통한 공통감각의 회복   정치의 불씨 살리기   정답 없음의 인정을 통한 대안의 다양화
   

 

첫째, 포획된 가치/언어의 탈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상징과 의식(儀式)’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역이 집중해야 할 영역이 이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곳이 어떤 장소라는 것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그 장소를 통해그 가치와 언어를 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상징과 의식이 중요합니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기본적인 공통감각이 필요한데 그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상징과 의식을 거쳐야 할까요? 그 장소에 도달하기까지 서로를 알아볼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의식은 무엇일까요? 장소가 정체성과 공통감각을 체화시킬 수 있는 의식은 무엇일까요? 김광석은 인간 신체에 체화된 한 사회의 기술 정서”(포스트디지털, 2021)기술감각이라 부릅니다. 물리적으로 확장된 지역의 공간에서 기술은 관계밀도를 높이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둘째, 관료주의를 깨뜨릴 비판의 무기들을 벼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관료주의는 도구적 합리성과 목표달성을 위한 공학적 접근, 권위주의적인 선택적 자원동원, ()정치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티스는 관료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요?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개념을 굳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이미 시민사회의 많은 부분이 관료화되었다는 점에 동의할 사람이 많다고 봅니다. 관료주의를 통제할 정치는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역설이지만 그래서 더욱더 정치의 불씨를 살리는 과정이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봅니다. 비합리적인 것을 선택하거나 목표를 포기할 결단, 느리고 수다스러운 공론장, 민주적인 자원배분과 재조직 등이 정치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제도만이 아니라 정치문화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지역은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지역정당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과 변화의 지점들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획일화/서열화에서 벗어나 각각의 고유한 존재를 인정해야 할 뿐 아니라 기록 이후의 존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을 통해 재현된 존재는 정지된 물체가 아니고, 지역 역시 재현을 통해 계속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변화가 어디로 향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역학은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지역은 답일까요? 그렇지만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명은 꿈틀거릴 수밖에 없고, 모든 존재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밟는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이 부패할 수 있고 부패한 것에서 좋은 것이 생성될 수 있습니다. 작년에 함께 번역했던 심층적응(착한책가게, 2022)이라는 책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분은 붕괴는 피할 수 없다, 길을 찾는 지도는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생성하고 사라지고 부패하는 대안의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대에는 기술감각의 조절과 생태감각의 회복이 기후위기와 기술과잉, 초고령화 대응에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답을 내려놓아야 질문이 좀 더 분명하게 인식되고 더 풍부하게 논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답이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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