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때마다 ‘민주주의 꽃은 선거입니다’라는 현수막을 곳곳에 내건다. 중앙선관위가 그동안 보여왔고 또 지금 보이는 행태를 보면 이 기관이 선거를 맡는 게 과연 민주적일까 의문이 들지만, 일단 그건 넘어가자.

 

투표와 선거가 민주주의에 중요하다는 점을 받아들여도, 찍을 만한 사람이 없어도 정당투표라도 하러 투표장에 가야 한다는 현실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여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은 일이 내가 사는 동네에서 벌어지고 있다. 내가 사는 상현 2동은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속하는데, 이번 총선 때 기흥구의 후보자에게 투표를 해야 한다. 2012년 2월 27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선거구의 인구상한선을 맞춘다는 명목으로 선거구를 이렇게 만든 탓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는 용인을 선거구 후보자와 용인병 선거구 후보자 현수막이 동시에 붙어 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누가 이 동네 후보자인지를 알 수 없다. 길 하나를 두고 동네 사람들이 서로 다른 후보자에게 투표한다. 3만 2천명의 상현 2동 주민이 다른 구와 합쳐지는 게 정치개혁일까? 옆 동네에 사람이 부족하니 옆 동네에 가서 대표를 뽑으라는 얘기에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생각해야 할까?

 

물론 지도상으로 보면 수지구가 기흥구와 붙어 있다. 하지만 생활권으로 보면 두 구의 사이를 경부고속도로가 가로질러 두 지역간의 연계는 거의 없다. 그리고 지방자치제의 실시로 주요한 문제들이 시 단위에서 결정된다지만 이건 아니다. 어쨌거나 지금의 소선거구제 하에서는 국회의원이 지역주민들의 대표 아닌가?

 

그런데 이 문제는 내가 사는 동네만의 것이 아니다. 용인시 기흥구의 동백동과 마북동 주민들은 처인구로 선거구가 묶였고, 수원시의 서둔동 주민들도 팔달구로 묶였다. 늘어난 기흥구와 권선구의 인구수를 조절하기 위해 동을 빼고 집어넣는 과정에서 이런 해괴한 사건이 터졌다. 주민들에게 한 마디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정치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선거구를 쪼개고 붙였다.

 

선거구의 인구편차가 3 대 1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이런 ‘선거구 짜깁기’는 앞으로도 계속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경기도권의 신도시들은 계속 이런 일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용인시와 수원시, 경기도가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지만 얼마나 효과를 볼지는 알 수 없다.

 

그동안 이 문제를 다룬 언론기사가 많지 않지만 문제를 다룬 언론사들도 정치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거구를 개편한다는 ‘개리맨더링’의 관점에서만 이 문제를 다뤘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선거구 획정이 아니라 선거제도이다. 현행 소선거구제 하에서는 ‘선거구 짜깁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의 한국정치에서 목격했듯이 당리당략 앞에 원칙이나 논리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의과정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데, 대의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인가? 비단 선거구를 정하는 일만이 아니다. 후보자를 정하거나 후보를 단일화하기 위한 각종 여론조사결과가 결코 정확하지 않고 조직적인 개입이 가능하며 소위 ‘셋팅선거’가 일반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매번 정책선거를 떠들어대지만 각 정당이 발간하는 두꺼운 자료집을 제외하면 선거에서 정책을 구경하기 어렵다.

 

그러니 이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전국적으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런데 선거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지금과 같은 ‘이익연대’ 구도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변화가 가능하려면 녹색당이나 진보신당같은 소수당이 국회로 진출해야 한다.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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