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를 넘어 삶의 변화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촛불행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광경이지요. 단지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놀라운 건 아닙니다.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참지 않겠다라는 분노와 권력에 대한 조롱이 거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에, 내가 권력의 주인이라고 자각하며 정치가 그들의 독점물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권력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한국의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왕에 맞서 일어난 수많은 민란들, 일제 식민지 권력에 맞섰던 평범한 민초들의 3․1운동, 부패하고 정당성을 잃은 권력에 맞섰던 4․19, 부마항쟁,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 91년 5월, 2002년 촛불집회 등 수많이 사례들이 우리 역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촛불행진을 새롭고 특별한 일로만, 그리고 준비되지 못한 우발적인 사건으로만 기록하는 건 그런 저항의 역사를 망각하길 바라는 강자들의 바람에 말려드는 겁니다. 맨 손으로 권력에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의지는 매우 강하고 그렇기에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지 진심을 담은 것 같지는 않지만 대통령이 사과하고 미국과 추가협상도 진행되며 조금씩 촛불의 힘을 빼려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앞으로 촛불행진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촛불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한편에서는 이제 정당과 대의민주주의로 저항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언제까지 거리로 나와 요구를 주장할 수는 없지 않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정당과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그리고 앞으로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시민의 뜻과 바람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시민을 소외시키는 정당 내부의 잘못된 구조와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바로잡지 않은 채, 제도정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건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는 건 대중을 신뢰하지 않아서일 겁니다. 권력이 시민의 것이라는 주장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이고, 실제로는 자신들이 권력과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를 독점해야 한다고 믿는 엘리트주의자들이라 대중의 정치를, 거리의 정치를 믿을 수 없는 겁니다.

또 다른 편에서는 국민소환제나 국민투표, 정권퇴진을 주장합니다.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몰아낸다고 해도 그 뒤를 이을 사람들이 없다는 겁니다. 사실상 그런 제도들이 한 번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듯 하지만 그런 바람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저항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도에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죽 쒀서 개 준다는 속담을 실현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도는 언제나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요? 요즘 ‘생활정치’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데, 가만히 보면 좀 이상하게 사용되는 듯합니다. 단순히 먹거리의 문제, 생명을 위협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그리고 생명과 건강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생활정치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활정치는 기존 정치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할 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이번 촛불행진에서 청소년과 여성들이 새로운 운동의 주체로 등장했다고 하지만, 사실 청소년과 여성들은 그 전부터 정치의 주체가 되려고 꾸준히 노력해 왔습니다. 기존의 성인 남성 중심의 정치제도가 이들을 정치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 뿐이지요.

그런데 ‘새로운 등장’을 강조하는 세력들은 기존의 정치구조를 전혀 바꾸지 않은 채 그 성과를 자신들의 것으로 가져가려 합니다. 이런 세력들은 청소년과 여성의 참여를 놀라워 하지만 정작 그들이 살고 있는 일상의 문제에 대해 여전히 무관심합니다. 참여를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무한경쟁이 지배하는 학교와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가정으로 청소년과 여성을 다시 돌려보내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기득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는 기존 정치구조의 교묘한 방식이고, 소위 진보세력이라는 사람들조차 그런 구조와 은밀히 타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촛불은 일상의 삶 속으로 뿌리를 내려야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일상의 장을 참여의 장으로 만들며 성인 남성 중심의 대의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힘을 축적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경험하는 장으로 가정과 학교를 바로 세우고 더 많은 청소년과 여성들이 정치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수동성과 냉소를 심는 일상의 생활과정을 능동적인 정치참여의 과정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진정한 생활정치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뜻을 바로 세우고 그 뜻을 지키고 키우려 노력해야 합니다. 반드시 거리에 나와 촛불을 켜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내 맘 속의 촛불이 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거리로 나설 수 있습니다(아마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거리로 뛰쳐나올 일은 수없이 많을 겁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수를 두려워하는 듯하지만, 그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건 복종하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뜻, 자발적으로 검열을 하지 않으려는 뜻입니다. 냉소하며 물러서려는 마음이야말로 권력을 쥔 자들이 가장 기뻐할 상황입니다.

그렇게 뜻을 키우면서 우리 사회에서 더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손을 잡고 그들도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연대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촛불은 더욱 밝아질 겁니다. 오래 타오를 뿐 아니라 더 크게 타오르면 촛불은 세상을 바꾸는 횃불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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