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7(201211/12월호)에서 나는 한국에서도 연방주의가 사회변화를 위한 전략으로 진지하게 고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집권형 국가를 연방헌법에 기초한 연방국가로 바꿔야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언론과 표현, 결사의 자유같은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짓밟는 권력에 맞설 힘은 몇몇 정치인이나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거나 몇몇 제도를 개선하는 것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연방국가라는 정치제도를 만들려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이는 연방주의라는 이념을 좁게 해석하는 것이다. 연방주의는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 등을 자유와 협동의 원리에 따라 재구성하려는 이념이고, 연합의 원리에 따라 지속적으로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전략이었다.

 

역사를 따지면 연방주의는 고대부터 있었던 체제나 자연적인 필요에 따라 구성된 체제가 아니었다. 연방주의는 중세 자유도시들의 동맹에서 생겨났고, 신분에 따른 차별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사회를 지향했다. 하지만 상비군과 행정조직을 갖춘 중앙집권형 근대국가가 등장하고 그것이 강화되면서 연방주의는 이에 맞서는 저항의 전략이자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창조의 전략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연방주의는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구조를 만들려는 이들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이념이자 전략이었다. 정치 면에서 연방주의란 정부 안에 정부를 만들어 일종의 이중권력을 만들고 주권이 작동되는 방식을 바꿀 뿐 아니라 주권 자체를 시민들이 직접 정의하게끔 하는 새로운 이념이었다.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문화 면에서 연방주의는 표준어와 표준지식, 통일된 기준을 거부하고 지역적인 지식과 문화를 강화시키려는 방법이었다.

 

각 시민과 지역이 자유를 확보하고 서로를 지원하며 그 자유를 지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연방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서구 자유주의의 연방주의 논리가 연방주의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주의의 전제와 달리 연방주의에서 개인은 고립된 단자가 아니다. 그 개인은 사회적 개인으로 자신 속에 사회성과 전체성을 품고 있다. 그러하기에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연방은 이런 개별자들이 직접 맺는 관계를 지지하고 그들간의 평등을 유지시키는 틀이다.

 

그렇다고 연방이 사회변화의 전망을 지역 속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만 전망을 찾을 거라면 굳이 연방을 만들 이유가 없다. 지역이 자립의 기반이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급이 가능하려면 안팎의 다양한 연계가 필요하다. 필요한 인력과 자원, 더 중요하게는 경험과 지혜를 공유할 관계망이 필요하다. 연합의 연합(association of association)은 서로를 구속하려는 전략이 아니라 서로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전략이다. 연방주의 하에서의 한 시민은 지역이나 연방정부와 분리되지 않고, 자신이 속한 다양한 공간에서 연방의 원리를 실현해야 한다.

 

1871년의 파리꼬뮌은 이런 관련성을 분명한 선언으로 만들었다. “꼬뮨의 절대적인 자치는 각 꼬뮨의 완전한 권리를 보장하고 모든 프랑스인이 인간이자 시민, 노동자로서 자신의 소질을 완전히 발휘하도록 보장함으로써 프랑스의 모든 지방으로 확대된다. 꼬뮨의 자치는 약속에 따라 다른 모든 꼬뮨의 자치를 똑같이 제한할 것이다. 즉 꼬뮨들의 연합은 프랑스의 해방을 보장해야 한다.” 파리꼬뮌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지역과 연대해야 했다는 현실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연합과 연방의 사상은 당시의 분명한 지향이기도 했다.

 

파리꼬뮌에 앞서 연방주의 이론의 기초를 닦았던 프루동은 민족주의와 중앙집권화가 지배하던 당시 유럽의 민주주의에 반대하며 연방주의를 제안했다. 아래로부터, 가장 단순한 단위에서 시작되어 시민의 직접 통제를 받는 연방은 행정기관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들 사이의 협력기관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프루동은 가장 작은 지역의 이해관계가 가장 큰 지역의 이해관계와 동등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연방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이 파리코뮌의 이념으로 이어졌고 연방주의 제도를 만들었다.

 

그런데 제도는 어떠한 환경에서건 똑같은 효과를 만들지 않는다. 인간사회의 제도는 통제된 실험실의 가설이 아니다. 예측 불가능한 수많은 요소들의 영향을 받는 제도가 자기 목적을 실현하도록 만드는 건 사회의 힘이다. 그리고 때로는 제도가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회의 힘이 제도의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동안의 시민사회운동의 전략들은 제도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정작 제도를 만들고 난 뒤에 그 제도를 올바르게 작동시킬 힘을 만들지 못했다.

 

연방주의 역시 비슷한 과정을 밟을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 제도의 설계도 중요하지만 그와 관련된 사회의 힘을 만들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연횡을 넘어선 합종의 전략이 필요하다

 

연방주의는 지역에 기반한 다양한 실험들이 가능하도록 지지하는 제도이자 이념, 전략이다. 한 개인, 다양한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관계망을 형성하듯이 여러 지역들이 모여 하나의 연방을 구성하는데, 그 목적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자유가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 우리는 그것을 실현하고 보장받기 위해 만나야 하고, 연방주의는 그 만남을 지속시킬 수 있는 틀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강력한 기득권층이 만들어졌고 이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중앙집권적인 전략을 주도해 왔기 때문에, 자유를 위한 연방주의 전략이 쉽게 실현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기득권에 맞서 연방을 구성하려는 저항의 방법과 자유를 실현하려는 창조의 방법이 동시에 필요하다. 기득권에 맞서 연방주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은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할까?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보면, 소진(蘇秦)은 강력한 진나라에 맞서 남북의 여섯 나라가 연합하는 합종(合縱)의 전략을 외쳤고, 장의(張儀)는 각 나라가 진나라와 불가침조약을 맺는 연횡(連橫)의 전략을 외쳤다. 소진이 합종을 성사시킨 전략은 각 나라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그 부족한 부분을 다른 나라를 통해 보완하는 것이었다. 소진은 각 나라가 힘을 모은다면 지금 가진 힘으로도강대국인 진나라를 능히 상대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진나라가 만약 초나라를 공격한다면 제나라와 위나라는 정예병을 보내 지원하고, 한나라는 진나라의 식량 수송로를 끊고, 조나라는 장수를 건너고, 연나라는 상산 북쪽을 고수한다. 진나라가 만약 한나라와 위나라를 치면 초나라는 진나라의 배후를 끊고, 제나라는 정예병을 보내 도우며, 조나라는 장수를 건너고, 연나라는 운중을 지킨다. 진나라가 만약 제나라를 치면 초나라는 진나라의 배후를 끊고, 한나라는 성고를 지키며, 위나라는 하내로 통하는 길을 막고, 조나라는 장수와 박관을 건너고, 연나라는 정예병을 보내 돕는다. 진나라가 만약 연나라를 치면 조나라는 상산을 지키고, 초나라는 무관에 진을 치며, 제나라는 발해를 건너고, 한나라와 위나라는 모두 정예병을 보내 돕는다. 만약 진나라가 조나라를 치면 한나라는 의양에, 초나라는 무관에, 위나라는 황하 남서쪽에 진을 치고, 제나라는 청하를 건너며, 연나라는 정예병을 보내 돕는다. 제후들 가운데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가 있으면 다섯 나라의 군대가 함께 그 나라를 친다.”

 

강자에게 맞서는 방법은 약자들의 연합이다. 나의 자유가 너의 자유와 얽혀 있음을 깨닫고 힘을 공유한다면 패권을 가진 강자에게 맞서 자신의 질서를 실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신뢰를 쌓기 위해 소진이 한 일은 그 나라의 존재를 충분히 받들어주는 것이었다. 그 나라의 약함을 부각시키지 않고 그 강점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폐하의 현명하심과 제나라의 강대함은 능히 당할 자가 없습니다와 같은 수사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건 합종을 가능케 할 서로간의 관계와 신뢰인데, 그것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각 나라를 설득할 방법이 있어야 그런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합종의 전략을 실현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건 아니다. 합종을 반대하고 연횡을 주장했던 장의가 각 제후들을 설득한 방식은 각 나라의 이해관계만을 드러내고 합종을 하는 것은 양떼를 끌고 맹호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설득하는 것, 여섯 나라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이간질하는 것이었다. 이런 꼬드김을 억누를 만한 신뢰가 있어야 합종이 가능한데 그런 신뢰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합종의 전략이 한 국가 내에서 실현되지 못할 법은 없다. 우리 시대에 국가의 경계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고 자연재해나 사고의 규모는 국경을 넘나든다. 그리고 한 지역만의 자급이나 자립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각한 지역들이 서로 뭉친다면, 그 힘은 불어날 수 있고 때로는 중앙정부나 외부의 힘을 거스를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지방의 시민이나 지역사회의 힘이 약하게 보이지만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강화시킨다면 합종의 힘을 만들어질 수도 있다.

 

혼란은 약자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고, 혼돈은 사물이 스스로 자신의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새로운 관계와 신뢰의 기반을 만들며 합종을 가능케 할 집단과 전략이 필요하고, 그런 집단은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각 지역의 상황과 조건을 차분히 분석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줄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절실히 필요한데, 다른 지역은 고사하고 자기 지역의 강점과 약점마저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소진처럼 지역을 돌며 깨달음을 주고받을 사람이나 집단을 만나기 어렵다.

 

오랜 세월 중앙집권형 국가의 지배를 받아온 한국에서 지역간의 연대는 없거나 명목상일 뿐이고 중앙정부가 권한을 독점하며 나라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지난 20133월에는 사회연대경제를 위한 지방정부협의회가 구성되기도 했지만 명목상의 연대를 넘어 실질적인 연대가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자신이 가진 장점을 내놓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야 합종의 전략이 가능할 텐데, 지역의 경계를 뛰어넘는 연대의 전략은 구호로만 존재하지 구체적인 관계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의 시민사회운동을 보면 서울의 큰 단체들이 주요한 의제를 독점하며 운동을 주도해 왔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서도 상급단체들이 운동의 방향을 결정하고 협상을 주도한다(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에서 상급은 어디일까? 현장에 있는 단체들이 가장 상급이고 이들의 연합체는 현장단체들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여야 하지 않을까?). 이런 단체들은 합종의 전략을 모색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단체의 이해관계나 의제를 위해 중앙정부와 협상하고 서로간의 관계나 신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니 합종보다는 연횡의 전략에 가깝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겐 합종과 연방의 전략이, 그 전략을 현실에 펼치려는 사람이나 집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20126월에 만들어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비정규직 문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용산참사 진상규명 등의 사회문제를 직접행동으로 해결하는 시민들의 공동연대인 <SKY 공동행동>은 이런 합종과 연방의 전략을 실현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쫓겨나는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SKY 공동행동>은 서울을 출발해 지역문화제를 열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전국순회투쟁을 벌였다. 강력한 국가폭력에 상처를 입고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힘을 북돋우는 과정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었다.

 

자유를 위한 연방의 전략

 

2012년 제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후보는 51.6%, 1,500만 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박근혜씨는 천오백만 명의 사람에게 어떤 책임을 지고, 천오백만의 사람들은 박근혜씨에게 무엇을, 어떻게 요구할 수 있을까?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정황이 계속 드러나고 있지만, 만일 다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면 정말 세상이 바뀌었을까? 지금 겪고 있는 당혹감이 사라졌을까? 분명히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사회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으리라 기대하긴 어렵다(이 점은 선거 이후 민주당의 모습을 보면 잘 드러나기에 굳이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한 번의 선거로 세상이 바뀌면 좋겠지만 그렇게 세상이 바뀐 경우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한 번의 선거에 지나친 기대를 거는 것이야말로 실패를 반복했던 이유일지 모른다. 선거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우리의 정치로 끌어들이고 그것을 활용할 전략을 세워야 했는데, 지금까지의 운동전략은, 적어도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전략들은 선거에 많은 기대를 걸면서도 수동적으로대응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거에 참여하는 방식은 주로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거나 특정 의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기성정당과 연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운동은 자신의 정치전략을 만들지 못했다.

 

진보정당의 등장 이후에도 이런 상황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진보정당이 지역에서 무상급식이나 의료, 참여예산같은 의제를 쟁점으로 만든 적은 있으나 지역사회의 질서를 바꾸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출신 구청장이 선출되고 민주노동당이 구의회의 다수의석을 차지했던 울산에서도 지역사회의 구체적인 변화를 감지하기는 어렵다. 주로 진보정당은 전국적인 사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지역사회에 밀착해서 아래로부터 변화의 동력을 만드는 일에는 소홀했다.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지역당/지구당이 적극적으로 의제를 만들지도 못했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늘어나고 관심도 적지 않지만 그것을 실질적인 사회변화로 이어가고 그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과정이 마련되지 없다보니 냉소만 심해졌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더욱더 수동적으로 변하고 있고, 자신과 지역의 삶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중요한 갈등에 개입하려는 능동성 또한 사라지고 있다. 정치는 점점 우리 삶과 무관한 것으로, 정치인들이 전유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변하고 있다. 경제는 재벌들에게 점점 더 독점되고, 생산과 소비의 단절, 농촌의 몰락, 심각한 양극화로 시민의 살림살이는 몰락하고 있다. 문화 역시 점점 산업으로 변해가면서 독점/집중되고 있고, 한 국가 차원을 넘어 전 세계적인 획일화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지역사회는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구상하고 다른 지역과 연대하려는 전략과 의지 자체를 상실해 버렸다. 나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타자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은 거의 사라졌다.

 

그럼에도 연방주의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건 싸우는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소를 보존하고 자기 지역을 지키려는 끈질긴 시도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희망버스나 탈핵희망버스처럼 수도권의 사람들이 역으로 지방으로 내려가서 그 장소를 느끼고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기존의 사회운동전략이 중앙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이었다면, 이 저항은 그냥 그 자리에서 장소를 고집한다. 청도나 밀양 주민들의 저항을 단순히 핵발전이나 송전탑에 대한 반대로만 해석할 수 없는 건 자신의 장소를 지키며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안이 주어지면 포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서 장소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가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성이란 단순히 지역의 특성이나 지역주민들의 의견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장소가 지켜지고 그 공간에 담긴 감수성과 사람들의 관계와 역사가 지속되며, 그것이 다른 지역과 동등한 가치로 인정됨을 뜻한다. 이런 저항 속에 지역의 의미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역사회 내의 역량만으로 사안을 해결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앙일간지나 언론사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지방의 언론들도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상황이라 지역의 사안이지만 실제로는 전국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제대로 알리기도 어렵다. 그리고 수도권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지역간의 연계나 관계망을 만들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야 손을 잡을 수 있을 터인데, 지금은 그조차도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나 집단이 매우 중요하다. 연방주의 전략이 가능하려면 중앙에서 지역으로 의제가 내려오는 방식이 아니라 각 지역들이 만나 서로 얘기를 나누며 전국적인 의제를 만들고, 또 전국적인 단위의 기구가 지역들을 지도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지역의 자유를 고민하고 활성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정보와 행동방식을 제안해야 한다. 아울러 한 지역의 자유를 위해 다른 지역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지역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전국적인 노력이 필요한지, 이런 고민들을 나누는 과정이 필요하다(예를 들어 새마을운동이나 자유총연맹처럼 오랫동안 지역에 뿌리내려 있지만 전국적인 규모를 갖춘 단체들을 통제하려면 전국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과 관련해서는 민주노총 영남권 5개 지역본부(부산, 울산, 경남, 대구, 경북)와 전국건설노동조합 영남권 2개 지역본부(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가 공사 강행을 규탄하는 합동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고,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마창지역금속지회와 대림자동차 해고자 복직투쟁위는 오리털 점퍼를 구입해 전달하기도 했다. 밀양의 친구들이라는 모임이 만들어져 송전탑 반대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이런 자발적인 노력들이야말로 연방주의를 실현할 주요한 전략이고, 이런 전략들을 통해 참여자들은 자신이 자유로운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다.

 

운동차원에서만 이런 고민이 필요한 건 아니다. 가령 내년의 지방선거를 미리 대비해서 자기 지역의 미래구상을 세우고 이런 구상들을 모아 연방국가의 상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중앙정치의 바람이 지방선거를 좌지우지했다면, 이제는 지역정치의 사안이 중앙정치에 영향을 미치도록 준비해야 한다. 연방국가의 상이 필요한 이유는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 지방선거에서 우리가 원하는 나라의 모습을 정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모든 자원이 집중되는 대통령선거가 아니라 그것이 분산되는 지방선거에서 연방국가의 비전이 만들어지는 게 원칙에서도 올바르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를 사유하고 문제해결방법을 찾는 우리의 관점 자체가 변해야 한다. 연방주의의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시민과 지역, 연방이 서로 연계되어 자신의 뿌리를 내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연방국가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연방의 전략을 실천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연방주의의 원리

 

그렇다면 연방을 고민하는 우리는 어떻게 만나야 할까? 사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서로를 만나본 경험이 없다. 같은 무리에서 다름을 참지 못해 쪼개질지언정 다른 무리가 서로 섞여본 경험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는 이것이 꽤 어려운 숙제이다. 그런 점에서 추상적이지만 연방주의를 고민하며 만날 때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연방주의는 정부 속에 정부를 만들고 자율적이면서도 협동의 삶을 살려는 전략이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각 시민, 지역의 자율성이다. 연방은 자유를 위해 존재하기에 먼저 각 단위가 자신의 자유를 상상하고 그 자유를 실현할 방법을 찾도록 보장해야 한다. 다만 자율성은 절대고독이 아니라 타자를 대면함으로써 드러난다. 원칙적으로 각 지역이나 정당, 시민사회운동은 자신이 구상하는 기획을 스스로 실현해야 하지만 지역의 운명이 다른 지역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능력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합종의 전략을 구상한 세력이나 집단이 현실적으로 없다면 합종의 전단계로서 각자의 강함과 약함이 솔직하게 드러나야 한다. 자율적인 관계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움직이거나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는 게 아니다. 내가 남을 채워주고 남이 나를 채워주려면 서로의 모습이 솔직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타자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않고 기득권에 맞서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지지할 때에만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은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진정 자율적인 존재라면 스스로의 선택으로 타자의 뒤에 서서 그 뒤를 받쳐줄 수 있다. 이런 자율적인 존재들이 만나야 연방의 원리가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서로 연대한다, 는 마음가짐이 만남에서 가장 중요하다.

 

한국사회에서 대부분의 연대전략이 성공하지 못한 건 이런 마음가짐이 없어서였다. 연대를 내세운 회의가 많고 연대라는 이름을 붙인 단체들도 많지만 연방을 구상하진 못했다. 각자가 서로에게 바라는 마음만 컸지, 상대의 자유를 생각하고 지지하는 마음이 부족했다. 선거 때도 이해관계를 따지는 연합은 했지만 서로의 몫을 챙겨주는 합종은 구성하지 못했다. 사람의 본성에 맞는 사회를 지향하는 일본의 <에즈원 커뮤니티>“‘다른 사람과 함께 즐겁게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떤지, ‘자유롭게 쭉쭉 자랄 수 있는 직장에서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자유롭게 쭉쭉 자랄 수 있는 직장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떤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위해서는 자기를 검토하는 기회를 통해 자기를 아는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도 나를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서로 만나고, 만남을 통해 서로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둘째, 일제 식민지 이후 지역사회의 공공성은 파괴되거나 관에 독점 당했다. 일제 식민권력과 군사독재는 시민들의 함께함을 금지하고 탄압해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장을 붕괴시켰다. 공설(公設), 공안(公安), 공권(公權), 공직자(公職者)같은 말들은 공공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지칭하는 말들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자유는 개인의 사생활이 되었고 행정은 자신과 대립하는 시민의 자발적 관계들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사회의 관계에 개입했다. 각종 참여제도들이 도입되었지만 민주주의가 힘을 갖지 못하는 건 공공성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공()이 적극적으로 공()을 확보하려는 전략 속에서만 공공성이 확장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공공성은 고립된 개인으로 변한 시민들이 자신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공유지를 비롯한 공적인 장을 되찾고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 속에서만 확장될 수 있다. 그러려면 개인이 공공성의 주체로 등장하고, 서로의 삶을 섞고(共有) 함께 가진 것을 확장해야 한다(公有). 치열하게 토론하고 합의를 보는 과정만이 아니라 함께 먹고 즐기며 삶을 공유하는 과정, 지금 없는 결핍을 채우려는 과정만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나누는 과정이 중요하다. 아울러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고 새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께 공적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운동의 주체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그 주체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행동이, 그리고 그것을 지속시킬 수 있는 살림살이가 서로 연계되고 확장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표준화된 지식이나 관행보다 자신이 누구임을 드러내는 고유하면서도 다양한 문화 관행과 관습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만남이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자면, 미국의 <블랙팬더당>은 과격한 테러단체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벌였던 단체이다. 빈곤과 질병, 범죄, 각종 중독으로 신음하던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블랙팬더당>은 적혈구 이상을 확인하는 무료테스트와 아이들의 무료 아침식사, 무료진료, 무료 구급차, 호신술 강의,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 치료프로그램 등을 열었다. 그리고 수감자들이 많은 동네에서는 가족들이 면회를 갈 수 있도록 무료버스를 제공했다. 이런 공동체 활동을 펼치는 한편 <블랙팬더당>은 경찰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감시하는 무장순찰대를 조직했다. 심지어 1969년에는 미국이 정치범을 석방하면 북베트남이 미국인 포로를 석방하는 포로교환 전략을 세웠고, <베트남인민해방전선>측이 이에 합의했다고 한다. <블랙팬더당>은 지역을 가로지르고 국가를 가로지르며 다양한 만남을 실현시켰다. 우리에게도 이런 만남이 필요하지 않을까?

 

셋째, 서로가 서로를 대할 때 평등이 중요하지만, 그 평등은 기계적인 평등이 아니다. 평등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하고,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할 때 나를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은 모든 이의 권리라는 추상적인 선언보다 참여를 제한하지 않고 누구나 의제를 제안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런 발언과 제안을 책임지게 하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은 모든 것이 동일함을 뜻하지 않고 모든 것이 같은 가치를 가짐을 뜻한다. 매우 다른 조건을 가진 도시와 농촌이 같은 가치를 가지고 노동과 자연이 동등하게 대우를 받으며 생산과 소비가 비슷한 무게로 다루어질 때 평등은 실현될 수 있다. ‘중심성이라는 말을 내려놓으면 중심만을 통해 볼 때와는 다른 세상이 보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원칙은 포기할 수 없겠지만 혼자에게만 중요한 고립된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평등은 그 원칙이 존중받고 공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나는 연방주의란 미래를 살아가는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라고 본다. 보통 prefigurative예시적’, ‘()형성적’, '구성적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나는 미래를 살아가는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것은 미래의 유토피아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지금 유토피아가 온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미래를 살아가는 정치는 현재의 행복을 미래로 미루지 않는다. 미래의 연방주의를 위해 활동하는 게 아니라 지금 현실 속에 연방의 원리에 따르는 장소를 하나씩 마련해가는 활동이다. 이미 실천하고 실현되고 있기에, 그것에 감염되고 전염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연방주의의 힘은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연방주의 국가는 반()국가나 반()국가가 아니라 비()국가의 원리에 기초한 국가이다. 연방주의는 연방에 속한 정치단위들이 새로운 정치연합을 구성할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연방은 제도로 완성될 수 없고 지속적인 노력으로만 가능하다. 연방주의는 연방을 실현하려는 힘과 전략이 있을 때에만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는 완성될 수 없는 이념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지금은 그런 이념을 실천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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