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대통령을 바꿔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우리의 바람은 그들의 허무한 죽음만큼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거꾸로 도는 시계처럼 이명박 정부는 허무하리만큼 이제껏 이뤄온 민주화의 성과들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센 놈만 살아남고 센 놈이 모든 걸 다 가지는 승자독식의 경쟁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검사가 온갖 접대를 요구하는 건 나쁜 놈들 능력이고, 이건희가 국민들의 정직성을 탓하는 건 강자의 도덕이다. 우리 가족이라도 살아남아야 하니 주위의 고통에 눈을 감고, 그 부끄러움을 감추려 자신을 정당화한다. “괜찮다”, “이번 한번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뭘”, “애들 생각해서.” 날이 갈수록 핑계는 늘어나고 지고 가야할 삶의 무게도 늘어난다. 이 무게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며 자신을 위안한다. 이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굴하게 만들고 있다.


조세희 선생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우리 모두가 난쟁이라는 냉혹한 비밀을 고백했고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용산참사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망루에 오르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팔당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던 농민들 중 어느 누구도 유기농지가 강을 죽이니까 자전거도로와 생태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리라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터전이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가 풀뿌리정치를 말하는 건 다시 떳떳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풀뿌리정치는 단순히 아래로부터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 ‘운동의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풀뿌리정치는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권력이 우리를 밀어내고 갈아엎으려 해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버텨보자는, 서로의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이다. 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야 하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그래서 운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를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다. 풀뿌리정치는 변화의 과정이면서 그 자체가 변화의 목표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풀뿌리정치가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이다. 사람들의 자질이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국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처참한 현장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치는 4년, 5년마다 한번 찾아오는 투표로 제한되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산업역군에서 찾고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지 못했다. 회의하자고 하면 빨갱이, 말 많으면 빨갱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런 얘기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적어도 정신의 면에서 식민지는 계속되고 있다. 교육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의 교육방식은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요즘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또 다른 식민지를 따르고 있다. 무릎 꿇고 기어서라도 남을 제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식민지의 본능이 강해질수록 더불어 살려는 의지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이 들어설 자리는 줄어든다.


이렇게 억눌려 사니 냉소할 수밖에 없다. 자기 힘이 약하니 강자들에게 지배를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냉소의 효과는 두 가지인데, 강자에게 맞서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약자들이 서로에게 폭력을 쓰게 만든다. 내가 나서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나설 때 격려하고 도와줘야 할 텐데 오히려 그런 사람을 시기하고 왕따를 시킨다. 부끄러운 자신을 감추려 다른 사람을 비난하다보면 약자들도 체제를 지키는 부속품이 되어버린다.


정신적인 면과 더불어 참여를 가로막는 실제 장벽도 높다. 지방정부는 주민들을 무시하며 일방적으로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고, 이들과 결탁한 토호들과 관변단체들이 여러 사업들을 펼치며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가부장적인 지역문화는 여성들의 지역활동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 모든 조건들이 풀뿌리정치의 활성화를 가로막고 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정치의 과제는 냉소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풀고 참여를 가로막는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두 가지 과제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마음을 풀려면 정치의 즐거움을 직접 느껴보고 명예로운 삶을 맛봐야 한다. 누가 대신 해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자기 몫을 걸어봐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힘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점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풀뿌리정치가 희망이려면 서로의 삶이 지금보다 더 많이 얽혀야 한다. 지금 나와 함께 생활하는 이들이 소중하지만 더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의 관계를 더 찢어놓고 경쟁을 시키려는 사회에 맞서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 손조차 쉽게 내밀 수 없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끌어주고 그들이 스스로 자기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한다. 그러려면 내가 사는 지역사회를 경험하고 분석하며 누구와 더불어 살고 있는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선거는 ‘뜨거운 감자’이다. 다가올 6월의 지방선거에서 단체장이나 교육감을 당선시키고 괜찮은 지방의원이나 교육의원을 많이 당선시킨다면 풀뿌리정치를 가로막는 장벽들은 무너질 것이다. 괜찮은 후보들이 제법 그럴싸한 지역을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거는 사람들이 정치를 바라보는 수동적이고 냉소적인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거는 ‘잘난 사람’들의 치열한 ‘경쟁’이고 친구보다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선거는 나를 ‘위해서’ 일하겠다는 사람을 뽑는 자리이지 나와 더불어 살 사람을 선택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리고 당선을 목표로 삼는 순간 사소한 차이도 비난의 이유가 되고 다른 사람을 깎아 내려야만 조금 더 당선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니 선거에 들어가면 친구도 적이 되고 득표로 연결되지 않는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은 무시된다.


따라서 선거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선거를 뛰어넘는 정치전략이 필요하다. 표심이 아니라 진심을 파악할 수 있는 관계맺음이 필요하고 그런 진심을 자극하고 만나며 다른 꿈을 꾸는 활동이 필요하다. 선거가 중요하지 않으니 관심을 끊어라가 아니라 선거가 중요한 만큼 우리 일상의 정치도 중요하다. 우리 스스로가 정치를 좁게 보면 풀뿌리정치가 살아나기 어렵다. 아무리 권력을 바꾸더라도 그런 권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가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나부터 꿈을 품어야 한다. 풀뿌리가 희망이려면 나부터 꿈을 꾸고 그 꿈이 서로의 관계를 타고 퍼지며 힘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고, 풀뿌리정치 없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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