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청탁을 받은 내용은 ‘협동조합 신드롬’이었다. 협동조합기본법이 만들어지면서 협동조합들의 수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내실 있게 성장할 것인가라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주제는 이미 여러 차례 논의된 바이고(나도 한 편의 글을 쓴 적이 있다1)), 당분간 그 진행과정을 보며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그래서 이 글은 지금 이곳의 소비자생활협동조합으로 초점을 맞췄다. 새로운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협동조합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불협화음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가장 많이 드러나는 불협화음은 매장을 둘러싼 문제이다. 급기야 지난 5월 2일에는 광주광역시에서 생협매장 문제로 <아이쿱 광주권 생협>과 <한살림광주생협>의 토론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매장 문제가 현재 소비자생협들의 가장 큰 쟁점일까? 매장이나 그 입지가 중요하다는 건 일반 유통기업들과 다를 바가 없고, 공급에서 매장으로 생협의 물류망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갈등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왜 그동안 서로 의논해서 원칙이나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을까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협동조합간의 연대라는 원칙이 희미해진 상황에서 이런 갈등을 둘러싸고 ‘협동조합간의 경쟁’이라는 논리가 등장한 것은 유감이지만 매장 외에도 소비자생협의 정체성과 방향을 놓고 진지한 논쟁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녹색평론》에 실린 박승옥 선생과 신성식 경영대표의 논쟁은 의미가 있다. “망하지 않고 사업체로서 살아남고 사업이 지속되는 것과 성장신화에 갇히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박승옥 선생의 지적과 “성장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에 맞는 경영원칙을 세워야” 하지만 한국에서 소비자생협의 성장은 불가피하다는 신성식 대표의 반박은 곱씹어 볼만한 주제이다.

 

이 논쟁을 시작으로 다양한 논쟁들이 활성화되면 좋겠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이나 비전, 그 사업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협동조합운동역사에서도 주요한 주제였다. 이런 물음들이 있었에 협동조합운동이 지금껏 자기 몫을 충실히 해 오고 있었던 거라 믿는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논의를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들 이야기꺼리들을 제안하려 한다.

 

협동조합의 탈협동화, 다른 나라의 일일까?

 

《살림이야기》제 17호(2012년 여름호)에 “살리지 못하면 죽는다― 유럽 탈협동화 경향이 주는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협동조합의 탈협동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 글은 주로 갈러(Zvi Galor)의 글을 인용했는데, 이 글은 탈협동화 문제를 더 깊이 다룬 볼로냐대학의 바띨라니(Patrizia Battilani)와 베르겐대학의 쉬뢰터(Harm G. Schröter)의 공동연구 “탈협동화와 그 문제점들(Demutualization and its Problems)”(Quaderni DSE Working Paper, 2011년)을 소개하려 한다.

 

탈협동화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지만 이 연구는 기본적으로 소유권 구조의 변화, 전통적인 협동조합에서의 이탈, 협동조합의 사회적 가치변화를 특징으로 본다. 바딸라니와 쉬뢰터는 20세기부터 탈협동화가 진행되어 왔고, 1980년대 이후 특히 미국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탈협동화 경향이 두드러졌다고 지적한다(그래서 2007년에는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탈협동화를 심층적으로 조사할 연구위원회를 소집하기도 했다). 반면에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탈협동화되었던 협동조합들이 다시 협동조합으로 변신하는 재협동화(re-mutualization)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기본적으로 탈협동화가 미국식 경쟁 자본주의와 비슷하고,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이 연구에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의 원인을 다섯 가지로 지목한다.

 

첫째, 기업이나 정치․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협동조합이 사기업이나 투자자소유기업의 절차와 전략을 따르면서 협동조합의 조직이 점점 비슷해지는 경향(organizational isomorphism)

둘째, 공동소유구조가 너무 경직되어 급변하는 현실을 따라잡기 어렵다며 사유화를 지지하고, 급속도로 강화되는 경쟁에 적응해야 한다는 문화적 요인(cultural reasons)

셋째, 일반경제학 교육을 받고 상호성을 옹호하지 않는 경영진이 취임하고 이들이 조합원을 희생시켜 자기 이득을 취하려 하면서 생겨난 경영진의 착취(expropriation by managers)

넷째,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협동조합에 대한 반감이나 협동조합을 낡은 모델로 보는 의식이 확산된 정치적인 요인(political reasons)

다섯째, 자본이 제한되고 관리자에 대한 통제체계가 없는 협동조합의 비효율성 또는 성장전망의 부재(inefficiency or lack of growth perspectives)

 

이런 요인을 정리하면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지난 20년 동안 ①조합원제도에 바탕을 둔 상호부조라는 전통적인 인센티브가 흐려질 경우(협동조합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때), ②정부가 탈협동화를 유도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할 경우, ③미래의 전망을 발전시킬 방법에 관한 대안적인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더 매력적일 경우에 탈협동화가 진행되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강조하는 건 협동조합이 기업으로 전환되기가 쉽지 않은데 정부가 탈협동화를 가능케 하는 법률들을 제정함으로써 여러 협동조합들(특히 보험과 관련된 협동조합들)이 탈협동화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탈협동화가 적절한 법적인 틀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런 법적인 틀이 탈협동화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보통 탈협동화가 성과와 성장을 내세우지만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가 더 나은 효율성과 성과를 보장한다는 명확하고 보편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아울러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미국과 캐나다의 신세대협동조합과 같은 혼성조합(hybridization)이 탈협동화와 관련되어 있고 탈협동화가 혼성조합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의 연구를 통해 탈협동화의 경향이 수십년 동안 강화되어 왔고 미국식 경제의 확산과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미FTA를 체결하고 세계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지적한 탈협동화의 원인이 한국의 소비자생협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협동조합의 대의원총회나 이사회가 형식적인 의결기구로 변하고 일반기업과 비슷하게 관리자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1인 1표와 민주적 참여의 원칙을 훼손하는 현상, 일반기업의 경영전략이 협동조합에 적용되는 현상 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그리고 한국에서 보편화된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논리가 협동조합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까? 그러다보면 조합원들이 협동조합을 ‘조합’으로만 인식하게 되지는 않을까? 아울러 자본출자를 둘러싼 논쟁과 협동조합의 전략부재에 관한 논쟁 등도 불거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협동조합을 일자리 창출의 도구로 보는 정부의 시각은 어떤 형태로든 협동조합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가 외부의 우려처럼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을 동원하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경우, 탈협동화 경향은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다.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지적하듯이 협동조합에 대한 정부정책이 탈협동화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생협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일단 ‘협동조합간의 경쟁’이라는 틀은 이런 현실의 경향에 저항하고 그것을 바로잡기는커녕 탈협동화 경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한살림광주생협>과 <아이쿱 광주권 생협>의 토론회에서 매장경쟁과 관련해 어느 한 매장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서 그 지역에 다른 매장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독점’이고 협동조합 사이에도 경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조합원을 위하고 전체 협동운동의 몫을 고려한다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이것은 경쟁이 시장을 활성화시킨다는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독점의 반대말이 경쟁이라는 것은 하이예크를 비롯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한국에서는 주로 자유기업원)이 강조하는 논리이다. 소비자생협이 이런 논리를 따라야 할까?

 

자유주의 경제학과 다른 관점에 따르면 독점의 반대말은 경쟁이 아니라 공유나 경제민주화, 자급자족이다. 생협매장의 지나친 경쟁을 막고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경쟁을 방해한다는 논리로 빠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설령 어쩔 수 없이 경쟁을 고려하더라도 그건 일반기업과의 경쟁에 대처하는 방법이어야지 협동조합 간에는 적합하지 않다. 외려 소비자생협이 일정한 매장운영협정을 만들고 그런 규칙이 사회적 시장을 만들도록 자극해야 하지 않을까?

 

멘자니(Tito Menzani)와 자마니(Vera Zamagni)는 “이탈리아 경제의 협동조합 네트워크(Cooperative Networks in the Italian Economy)”(《Enterprise&Society》, 2010년)에서 이탈리아 협동조합운동의 성공이 네트워크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한다. 보통 네트워크라고 하면 하나의 중심을 가진 중앙화된 네트워크나 이리저리 분산된 탈중심화된 네트워크를 생각하지만 이탈리아의 협동조합들은 수평적인 네트워크(horizontal network)를 구성했기에 강한 힘을 키울 수 있었다는 거다. 이 네트워크에서 한 단위는 단순한 구성원일 수 있지만 때때로 다른 단위와 선으로 연결되거나 전체 네트워크를 코디네이터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다른 단위들이 자신에 의지하게 되면 전체 네트워크의 주요한 단위가 될 수 있다. 이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시장경쟁력을 증가시키고 생산을 합리화시키며 공동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위험과 기회를 공유했다는 게 멘자니와 자마니의 평가이다.

 

국내에서도 ‘사회적 경제블록’이라는 말이 등장했지만 그것이 멘자니와 자마니가 말한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지향하고 그렇게 형성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더 중요하게 소비자생협들은 그런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주요한 단위가 되고자 하는가?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그런 경험을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축적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협동조합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기업문화가 바뀔 수 있다. 그래야 끊임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을 받는 조합원들이 현실의 경쟁논리에서 벗어나 협동의 논리로 현실을 바라보고 삶을 기획할 수 있다. 만일 그런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경쟁의 논리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협동조합을 탈협동화시킬 수도 있다. 소비자생협들이 경쟁논리를 도입해 서로간의 적대적인 경쟁을 강화시킨다면, 당장은 개별 생협들이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탈협동화의 경향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한살림>도 예전에 이랬다, <아이쿱>도 그랬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자기 살을 깎아먹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보면 소비자생협의 구조가 비슷하게 적대적인 합병을 시도하려는 외부의 기업들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의 차이를 만들어야!


협동조합이 현실에 기반한 실사구시 운동이라지만 협동조합‘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소비자생협은 언제든 탈협동화의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한 안창호 선생은 그 방식이 정의돈수(情誼敦修), 사랑을 도탑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동은 내가 더 이상 홀로 살 수 없음을 자각하는 과정이고, 협동조합은 그렇게 자각한 사람들이 서로를 떠받치는 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소비자생협은 여러 가지 외부위협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운동, 21세기의 대안》(들녘, 2003년)의 저자로 국내에 알려진 존스턴 버챌(Johnston Birchall)은 “소비자협동조합의 합병시도에서 배우는 이론적, 실천적 함의(Some theoretical and practical implications of the attempted takeover of a consumer co-operative society)”(《Annals of Public and Cooperative Economics》, 2000년)라는 글에서 협동조합이 외부의 자극과 영향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버챌은 1997년에 앤드류 리건(Andrew Regan)이라는 민간업자가 유럽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이던 영국의 도매협동조합(Co-operative Wholesale Society, CWS)을 합병하려 했던 과정을 분석하면서 협동조합이 미디어의 영향이나 내부매수 등에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이런 문제가 2차 대전 이후 진행된 사업(business enterprise)과 결사(membership association)의 분리에서 불거졌다는 점도 지적한다. 버챌은 협동조합이 사업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보다 잠재적으로 이로운 건 조합원들 때문이라는 점을 경영진이나 관리자들이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점을 자각하고 잘 활용한다면 소비자생협이 시장에서 제한되지만 잠재적으로 아주 유용한 위치(limited but potentially quite fruitful place in the market)를 점할 것이라는 거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세인드 메리 대학 경제학과의 노브코비츠(Sonja Novkovic)는 협동조합/신용조합과정(MMCCU, the Master of management : Co-operatives and Credit Union)을 소개하는 자료에서 협동조합이 ‘협동조합의 차이(Co-operative difference)’를 사회적으로 인식시켜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이나 시민들이 이 차이를 이해하고 믿도록 하고 이 가치를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거다. 노브코비츠는 아래와 같은 것이 협동조합의 차이라고 본다.


표1. 협동조합의 차이 이해하기

 

투자자 소유 기업

협동조합

가치 기준

상장과 경영

실질성과 고유함

목적

투자자 수익 극대화

조합원과 공동체의 필요

윤리적 태도

자선

정의

요점

단일함, CSR= 비용

다차원성; 최적화된 사회

출처: http://www.vtsummit.coop/pdf/Novkovic-Managing_the_Co-operative_Difference.pdf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의 사업은 이런 차이를 마케팅하는 것이고 마케팅이 곧 교육이고 교육이 마케팅이라는 점, 시설이 교육이고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노동자(활동가)가 생산품에 대한 이야기, 우리 사람과 큰 뜻에 관한 이야기,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비자생협이 활동하는 장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버챌과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이 적대적인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의 논리를 내부에서 더 많이 교육하고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은 조합원들이 협동조합을 성장시키는 것이고 조합원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협동조합의 전략이다.

 

플레차(Ramon Flecha)와 크루즈(Ignacio Santa Cruz)는 “경제적인 성공을 위한 협력: 몬드라곤 사례(Cooperation for Economic Success: The Mondragon Case)”(《Analyse & Kritik》 2011년)에서 협동조합의 민주주의가 경쟁력을 만들고 협동조합간의 연대나 이익의 공유, 매우 평등한 봉급체계, 안정적인 고용구조 등이 협동조합의 차이를 만들고 확산시킨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노동인민금고나 인도주의적인 경영만이 아니라 공개적인 지적 토론과 풀뿌리민주주의가 있었기에 몬드라곤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서도 많이 거론되는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이나 8시간노동제, 연금같은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보장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회를 보는 눈과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선구자조합>이 매장에 읽을거리를 비치하고 대규모의 도서관을 만들었던 것은 당시 노동계급에게 절실했던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보면,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공간에서의 토론과 학습을 통해 계급의식을 형성해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이 <선구자조합>의 성공을 보장했다고 나는 본다.

 

그렇다면 지금 소비자생협에게도 ‘협동과 연대의 의식’을 만들고 확산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사회 조직화에는 식생활이나 취미 등을 매개로 하는 모임도 필요하지만 사회적인 의식을 형성하며 지역사회의 변화를 도모할 모임도 필요하다. 가령, 소비자생협의 주요한 조합원인 주부들이 가부장적이고 자본화된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다른 사회의 전망을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도 필요하다. 각자의 다양성과 차이를 드러내고 무엇이 소비자생협의 전망인가를 토론할 수 있는 다양한 장도 필요하다. 1978년에 부산에서 만들어진 <양서협동조합>이 단순히 좋은 책을 거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1978년에 협동서점을 만들고, 1979년에는 협동출판사, 1985년에는 협동도서관, 1990년에는 협동연구소, 2000년에는 협동대학을 설립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소비자생협들이 빠른 속도의 성장에도 이런 장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차이가 부각되지 않다보니 ‘의식과 삶의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소비자생협들이 이런 괴리를 조장하는 면도 없지 않다. 이것은 소비자생협이 생산에 대한 관심을 놓고 소비와 매출고를 높이는데 관심을 두면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윤리적 소비와 생산-소비의 연대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호세 존스턴(Josée Johnston)은 “시민-소비자 혼성의 이데올로기 긴장과 홀 푸드 마켓 사례(The citizen-consumer hybrid: ideological tensions and the case of Whole Foods Market)”(《Theor Soc》 2008년)에서 윤리적 소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존스턴은 윤리적 소비운동이 역사적으로 네 단계, ①소비자의 힘을 조직해서 지역 내 생산에 개입하려 했던 19세기 영국의 협동조합운동, ②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포디즘에서 출현했고 생산자보다 소비자의 정체성에 주목했던 소비자 행동주의, ③미국의 소비자운동으로 유명한 네이더주의(Nadersim)가 통제받지 않는 기업자본주의를 비판하며 공정한 정보와 기업의 책임성을 강조한 시기, ④개인소비자에게 안전한 시장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서 지속가능하지 않은 집단적인 소비에 관심을 두고 환경과 같은 후기 산업사회의 가치에 주목했던 1980년대 이후의 대안적인 소비운동 시기를 거쳤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역사를 거치면서 기업들도 소비자운동에 대응하기 시작했고 일정 부분 적응하며 심지어 이런 운동을 새로운 사업기회로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존스턴은 윤리적 소비운동이 이런 현실적인 맥락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존스턴은 해외에서 유기농 시장이나 대안적인 식생활문화를 개척한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 <훌 푸드 마켓>을 분석하면서 윤리적 소비운동이 일정한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고 본다. 이 어려움은 그 개념 자체의 모순에서 생기기도 하는데, 존스턴은 소비자운동(consumerism)과 시민의식(citizenship)이 원론적인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차이를 가진다고 본다.


표2. 소비자운동 대 시민의식

 

소비자운동: 개인이익의 최대화

시민의식: 사회와 생태계의 공공재에 대한 공동책임

문화

개인의 선택과 다양성에 우선순위

개인의 선택과 다양성을 제한하고 공동의 해결책을 모색

정치경제학

소비자시장에 우선순위; 소비를 통한 사회지위

사회 모든 계급의 공평한 접근과 역량강화; 시장을 제한함

정치생태학

소비를 통한 보존

소비의 감소; 욕구와 필요의 재평가

출저: 앞의 논문


이 구분은 원론적인 의미이고 현실의 소비자는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존스턴은 <훌 푸드 마켓>을 분석하면서 이 두 모습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더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본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개인의 자발적인 선호가 강조되다보니 절제하며 공공재를 보존하도록 국가를 압박하는 시민의 책임은 최소화되는데, 기업은 이런 편리하고 즐거운 쇼핑을 부추긴다. 그리고 좋은 맛과 영양, 건강함을 강조하는 <훌 푸드 마켓>의 홍보전략은 엘리트 계층의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을 정당화시키고 불평등한 소득구조를 바꾸려하지 않는다. 또한 소비를 통한 보존이라는 전략은 더 많은 욕망과 소비를 자극하고, 자급하고 짧은 거리 내에 유통되며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지 않는 포장, 상품화되지 않은 식재료 등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존스턴은 이런 결과를 토대로 “시민-소비자를 섞는 기업의 프레임이 녹색을 팔아먹는 전략과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프레임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훌 푸드 마켓>의 윤리적 소비라는 프레임을 통해 시민-소비자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사회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깨달아가는 대중적인 관심과 더 높은 소비생활로 기업이윤을 늘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겉으로는 일치시킬 수 있었다. 시민-소비자는 약간의 제한요건만 받아들이면 영원한 경제성장과 소비자 주권이라는 소비자 이데올로기에 계속 몰입하면서도 시민으로서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관심사를 표현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한국의 소비자생협들은 이런 존스턴의 비판에서 자유로울까?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키고 개인의 소비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환상’을 주입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자료를 보면, <한살림>의 ‘2009 수도권 지역 한살림 조합원 의식조사’에서 조합원의 자가주택 소유율이 74.7%, 월평균 가계소득이 454만원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2012년 아이쿱생협 조합원 소비생활과 의식에 관한 조사’에 따라도 응답자의 77.6%가 대졸이고, 64.9%가 자기 집을 소유했으며, 가구의 평균소득은 약 422만원이다. 그렇다면 소비자생협운동 자체가 중산층의 전유물이라고 보지는 않더라도 현재 한국 소비자생협의 조합원 구성이 중산층을 반영하고 그들을 마케팅목표로 삼는 전략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면 야박한 평가일까? 또한 소비자생협들 조합원들에게 무조건적인 소비의 확대보다 자기 욕구와 필요를 평가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나?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조합원의식이 충돌할 경우 소비자생협은 어떤 대안을 마련하고 있나? 직거래되는 농수산물에서 가공품으로 생활재의 비중이 변하고 있는데 소비자생협들은 생산자, 노동자의 삶에 어떤 관심을 쏟고 있나? 그리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 ppm을 넘은 기후변화 시대를 맞아 소비자생협은 어떤 대안을 준비하고 있나?

 

이런 물음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소비자생협에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단지 조합원 교양이나 교육의 차원이 아니라 조직의 정체성과 사업 차원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 자신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협동조합운동의 지속을 쉽게 장담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생산과 노동자를 고민하지 않는 소비자생협이 대안적인 사회를 만들기는 어렵다. 리스트(Gilbert Rist)는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봄날의 책, 2013년)에서 “‘발전’은 분명히 한정된 자원을 끊임없이 수탈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은 풍요의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보편적인 결핍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얼버무리는 실체적인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즉 소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생산과의 연계를 고려하지 않는 소비자협동조합은 경쟁 자본주의에 쉽게 동화될 뿐 아니라 자신의 뜻은 아니라 할지라도 타자에 대한 수탈을 정당화시킬 수밖에 없다.

 

소비자생협에서 소비자라는 단어를 부담스러워하는 <한살림>은 이런 물음을 더욱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한살림>이 <한살림농산>에서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으로, <한살림생활협동조합>으로 변해온 역사는 이런 고민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초기의 고민은 지금의 정체성과 방향, 사업방식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최혜성 선생은 1989년 7월에 발표된 “한살림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생명의 세계관이란 “인간이 사회 안의 공동체적 협동, 자연과의 조화된 공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음”을 밝히는 것이고 한살림의 이념은 “사회적 노동에 의해 창출되는 모든 생활가치가 협동적으로 생산되고 공정하게 배분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고, 생활가치가 인간노동의 소산이자 자연의 소산임을 인식하고 인간에게 생명의 젖을 먹여주는 자연의 생태균형을 유지시키고, 정의의 사회적 실천, 자연과의 조화된 생활을 통하여 내면적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것을 그 실천목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살림 초창기의 소식지나 가입안내서를 살펴보면 유기농산물 거래의 목적은 안전한 먹을거리가 아니라 자연과 외국농산물의 수입으로 쓰러져가는 농촌 살리기, 농약으로 신음하는 농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이런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지향하는 (사회)운동과 소비자생협이라는 틀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제가 <한살림>에 있다고 본다. 즉 한살림은 윤리적 소비운동을 넘어서는 인식틀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스스로 실현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조합원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린비출판사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카페를 만들기 위해 언론기사를 검색하다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린비출판사'라는 검색어를 넣고 언론기사를 검색하다 아래의 기사를 봤습니다.
http://news.donga.com/3/all/20130206/52848959/1

흠. 그렇지. 삐뽀삐뽀가 그린비출판사의 효도상품이랬지.
헛, 그런데 왜 '그린비라이프'이지?
기자가 잘못 썼나?

그래서 출판사/인쇄소 검색시스템(http://61.104.76.20/html/) 에 들어가 그린비라이프를 검색했더니,
동대문구 휘경동에 그린비라이프라는 회사가 따로 있더군요.
그린비출판사는 마포구 서교동으로 등록되어 있구요.

대표는 유재건으로 동일합니다.

 

 

그린비라이프의 등록일자는 2012년 6월 11일.
그린비출판사의 등록일자는 1990년 9월 27일.

우리가 아는 삐뽀삐뽀는 분명 그린비출판사의 것인데 왜 그럴까요?
그래서 우리 집에 있는 삐뽀삐뽀 119 소아과를 펴서 확인했지요.
2010년 2월 25일에 개정9판1쇄로 나왔습니다.
펴낸이는 유재건, 펴낸곳은 그린비출판사.

동아일보 기사가 틀린 게 아니라면 삐뽀삐뽀의 판권이 그린비라이프로 옮겨졌단 얘기이지요.
그린비라이프의 등록일자가 2012년 6월 11일이니 분명 2012년 6월과 동아일보 기사가 나온 2013년 2월 6일 사이에 판권이 옮겨졌단 얘기겠지요.
동아일보 기사가 나온 2013년 2월은 그린비 노조가 외부에 그린비출판사의 사정을 알리기 전입니다.

어이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노조는 이런 일을 알고 있을까요?

시점이 좀 공교롭긴 한데요, 검색해보니 그린비노조의 창립총회는 2012년 7월 25일.
창립총회가 7월이니 그 전부터 논의가 있었겠죠.
유재건 대표는 왜 6월에 별도의 출판사를 설립했고, 2013년 2월 전에 그린비출판사의 효도상품이라 불리는 '삐뽀삐뽀' 시리즈의 판권을 왜 그 출판사로 이전했을까요?
무슨 목적일까요?

유재건 대표는 2004년 5월 22일 <세계일보>에 이런 글도 썼더군요. "출판계의 저임금이나 낮은 복지는 부분적으로 이런 현실의 반영이다. 노조가 있는 출판사는 거의 없으며, 전문경영자가 경영하는 출판사도 거의 없다. 주식회사인 경우에도 실질적이고 신뢰할 만한 기업결산 보고서를 공개하는 출판사는 없다. 출판계의 모든 얘기는 그저 바람결에 떠도는 풍문일 뿐이다."
http://www.yemoon.com/webzine/viewbody.php3?code=webzine&page=1&number=160&keyfield&key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을 스스로 풀어주시겠죠?

이래저래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일을 하며 지내온 시간이 십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풀뿌리운동을 보며 희망을 얻었고 그 운동에 관련되어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어느 순간부터 풀뿌리운동을 사랑하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때론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환상을 낳기도 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방의 모습을 규정하고 그렇게 규정된 모습을 사랑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괜한 질투와 타박을 하기도 하구요. 이 글은 풀뿌리운동에 대한 저의 사랑고백이자 당신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사랑하던 그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담은 고백입니다. 제가 만든 이미지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괜히 오해하고 있는 건지,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1. 우리는 왜 이 운동을 시작했을까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살아남기도, 살아가기도 힘든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관계망은 끊어지고 마을이나 공동체도 해체되고, 노동강도나 생활의 속도는 점점 더 강해지고 빨라져서 운동을 하기에 좋지 않은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운동의 목적은 다양할 수 있지만 주민 주체의 역량을 강화시켜 시민자치에 이르도록 하는 것, 이것이 풀뿌리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일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목표는 어떻게 실현되고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통해 실현되고 있나요? 이런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재활용가게, 나눔장터, 동네카페, 도서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풀뿌리운동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솔솔 흘러나옵니다.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습니다. 눈에 띄는 사업에 단체들이 몰리고 때로는 단체들이 서로 경쟁하며 기본적인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도 들립니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성장해온 과정이나 그 힘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의 부활 이후 행정이 풀뿌리운동을 중요한 파트너로 여기게 된 건 그 과정과 힘 때문입니다. 주민들의 지지가 높아지고 행정의 파트너로 인정받게 된 건 분명한 성과입니다. 관이 맡는 것보다 풀뿌리단체가 맡는 게 주민들에게 더 좋고 올바르다는 인식도 확산되었습니다. 이건 그동안의 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변화였습니다.

 

그런데 민관협력이나 거버넌스가 원래의 취지와 달리 ‘관주도’라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민관협력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관이 기획하거나 공모하는 사업을 단체가 지원해서 진행하는 식이고, 대충 기획된 것을 제대로 집행하느라 너무 힘이 든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이런 식이라면 당장 사업을 때려치고 싶지만 우리가 아니면 안 될 사업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때로는 성장이 위기를 불러온다고 했던가요. 어느 순간 풀뿌리 운동은 체계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제는 일방적으로 판을 깨고 나오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계속 들어가기에는 뭔가 곤란한, 모호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노동자들에게 최후의 무기가 파업이라면 풀뿌리운동에게 최후의 무기는 무엇일까요? 어떤 힘이 있으면 이 모호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에 대한 고민이 ‘지금’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완전히 무장해제되어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정신승리법으로 버티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물어볼까요. 관이 해야 할 일을 대행하는 것이 풀뿌리운동이나 풀뿌리단체의 역할일까요? 물론 주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칠 사업들을 제대로 실행하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업들에 모두 ‘운동’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운동은 전체적인 사회발전의 목표를 주민들과 함께 정하고 그 목표에 비춰 사업을 평가하는 과정인데, 사업에 대한 ‘평가의 권한’은 풀뿌리단체들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외려 관이 그런 평가의 권한을 가지고 사업에 개입합니다. 사업을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이 사업을 하는 것인가’, ‘사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우리는 주민들과 어떻게 논의하고 그 사업에 개입하고 있나’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면, 많은 사업들은 운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핑계일 뿐입니다. 주민의 삶과 결정을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민 스스로가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촉진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풀뿌리운동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로 우리가 어떻게 많은 일들에 일일이 다 관심을 가질 수 있냐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인정하고 싶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렇기에 사업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역단체들이 지원한 사업과 관련된 심사를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난감한 경우는 단체들의 고유활동을 지원사업으로 신청할 때나 그 단체의 설립목적과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행사를, 소위 ‘뜨는 행사’를 사업으로 만들어 지원할 때입니다. 비슷한 유형의 사업이 동시에 신청되거나 그런 사업이 반복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제 그런 관행을 스스로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는 과정이야말로 운동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순간 단체들도 쉬운 길만을 선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단체들의 사업이 비슷해지고 있고, 지역특성을 반영한 활동들, 아니 유기체처럼 변화하는 지역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반영하는 활동들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공무원들이 바보는 아닙니다. 자원이 제한되고 부족한 시민사회의 상황을 알고 있기에 더욱더 거만하게 나옵니다. 때로는 일부러 단체들끼리 경쟁을 붙이고 자기 말을 잘 듣는 단체들을 밀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운동의 목적은 자꾸 사라지고 사업만 남게 됩니다. 행정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감시하고 비판하는 단체의 목적보다 앞서 나가고 운동은 뒷전이 됩니다.

 

따라서 국가나 시장에 끌려가지 말고 우리의 자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기획서를 작성하고 사업에 공모해서 자원을 얻으려 말고 지역의 주민들 속에서 자원을 발굴하는 과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눈먼 돈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어찌 눈먼 돈일까요. 주민들의 세금, 시민들의 피땀입니다. 운동에 필요한 자원을 모으는 과정이 운동의 방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저는 풀뿌리운동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배움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소비자생협 진영에서는 아주 오랜 논쟁이 있습니다. 협동조합의 기본이 사업이냐 운동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고, 이제는 사업 쪽의 힘이 훨씬 강해진 것 같습니다(물론 둘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인데요). 풀뿌리운동이 이런 흐름을 따라가야 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풀뿌리운동이 시민사회운동의 전부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제를 풀뿌리운동이 떠안을 수도 없습니다. 각각의 운동은 제각기 자기 목표를 가질 겁니다. 다만 현재 풀뿌리운동의 목표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주민자치를 실현하고 마을과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 지역사회 복지체계를 마련하고 주민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것? 하지만 마을과 공동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이려면, 관계와 사회에 기반한 복지가 살아나려면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이 시민사회운동과의 강한 고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요즘은 어디에 가나 박원순 시장 얘기를 듣습니다. 박원순 시장과 같은 사람이 앞으로 더 나올 수 있을까요? 운동이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활동가, 뛰어난 활동가도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겁니다. 솔직히 묻겠습니다. 단체의 활동가 충원구조는 마련되어 있습니까? 과거에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이런저런 시민사회운동의 활동가로 충원되었지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경쟁적인 교육체계, 대학 중심, 학벌 중심의 교육체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제 그런 충원구조는 사라졌습니다. 10년 뒤, 20년 뒤에는 누가 어떤 과정을 밟아 운동에 참여할까요? 아이디어나 기획력이 뛰어나고 사회정의감을 가진 대학생들도 아마 단체가 아니라 행정조직을 택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실행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활동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목적을 공유하더라도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는 ‘세대단절’의 문제가 풀뿌리운동 내에서도 보입니다. 이런 단절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풀뿌리운동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고민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 고민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거의 못 봤습니다. 10년 정도 더 지나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생활리듬과 가치관을 가진 이질적인 존재가 한 단체 안에서 (그것도 운이 좋아야)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될 겁니다.

 

물론 풀뿌리운동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전업주부들도 활동가로 일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지요. 하지만 사업을 중심에 둘 경우 활동가들은 사업단위로 결합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업의 전망’밖에 주지 못하면서 ‘운동의 헌신’을 요구하는 모순은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합니다. 활동의 폭이 넓어질수록 대표나 소수의 핵심활동가들이 전체적인 의사결정과정을 쥐고 흔든다는 비판도 들립니다. 사람을 성장시키고 역량을 강화시키는 풀뿌리운동의 ‘대의(大義)’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건 풀뿌리운동의 목적으로 본다면 심각한 위기입니다.

 

 


2. 10년, 20년 뒤에 풀뿌리운동은 어떻게 될까요?


지금 서울시는 마을공동체사업을 한창 추진하고 있고 언론도 이 사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기대만큼 잡음도 생기고 추진과정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에 관한 성명서는 풀뿌리단체들이 아니라 진보신당 서울시당에서 나왔습니다. 진보신당의 성명서와 김상철 처장의 발표문을 읽으며 한편으로 참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좀 씁쓸해졌습니다. 마을은 안 보이고 사업만 보인다는 지적, 사업추진의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 추진과정의 폐쇄성과 관 주도에 대한 비판 등은 특별한 분석이나 논리가 아니었고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지속적으로 관에 문제제기해온 바입니다. 그런데 왜 정작 풀뿌리운동은 이런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을까요?

 

박원순 시장이 되고 난 뒤에 서울시가 달라졌다는 얘기가 많이 들립니다. 시장 한 사람 바뀌었을 뿐인데, 라는 말을 활동가들에게서도 듣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지요. 무상급식에 반값등록금에 저소득층 지원에, 공공임대주택 확충,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중증장애인 활동보조 자기부담금 폐지, 중소상인을 위한 대형마트나 SSM의 영업규제 등 취임한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상황이야말로 풀뿌리운동의 위기상황입니다. 지역에서 몇 년 동안 빡세게 일할 필요가 뭐 있어, 시장 한 명, 구청장 한 명 바뀌면 이렇게 분위기가 확 바뀌는데, 라는 생각을 시민들이, 심지어 활동가들마저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풀뿌리운동의 위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위기일까요?

 

풀뿌리운동이 바꾸고자 한 건 시장이라는 직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풀뿌리운동은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구조’를 바꾸려고 한 거죠. 그렇다면 지금 서울시의 의사결정구조, 정책결정구조는 어떻게 바뀌고 있나요? 몇몇 시민사회단체 인물이 행정체계나 위원회에 들어가는 건 이전 정부 때도 자주 있던 일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시장이 현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목소리를 듣고 챙기는 것이 한편으론 좋아 보이지만, 달리 보면 지방자치의 근본정신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시장님의 트위터에 글을 남겨라, 이건 구조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사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경계해온 것은 ‘해결사’가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지방자치법에 따르면 서울시장은 자신의 권한에 속하는 사무 중 일부를 자치구에 위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시의 거버넌스 구조가 실질적으로 바뀌고 있나요? 물론 박원순 시장 개인의 활동을 보면 눈물겹기도 합니다. ‘박원순 프로세스’라는 말이 나올만큼 소통과 청책(聽策), 협치가 강조되고 요일별로 시장의 일정이 짜지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시장의 변화가 일선 공무원들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공무원들이 생각하는 제3섹터, 주민단체의 범주가 풀뿌리단체로 이해되는지도 의문입니다. 기존의 관변단체에 대한 지원과 묵인이 바뀌고 있는지도 살펴야 하고, 제 3섹터를 양성한다는 목적 하에 허투루 사업이 진행되는 건 아닌지 꼼꼼하게 감시해야 합니다.

 

물론 지방자치제 하에서 자치구의 변화가 중요하지 광역단체의 변화가 뭐 그리 중요한가, 풀뿌리운동이라면 자치구에 집중해야 하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자치구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지방자치제도와 행정체계에서는 자치구가 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서울시의 권한도 중앙정부의 권한과 맞물려 제한을 받지만 자치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사업기획은 중앙정부와 광역단위에서 꼬리표가 매겨진 뒤에 자치단체로 이관됩니다. 예산은 기초자치단체에서 집행하지만 기획과 평가의 권한은 여전히 중앙정부나 광역자치단체가 가지고 있습니다. 공무원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책임을 회피합니다. 상급기관에서 명확한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다며, 또는 예산이 없다며 시민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구조의 변화 없이 운동의 성공을 얘기할 수는 없고, 지금은 감시와 비판마저 사라지고 있기에 심각한 위기상황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서울광역자활센터의 운영, 교통체계의 개선(버스준공영제), 도시기본계획, 제3섹터영역의 활성화, 세제개편 등 자치구의 경계를 넘어 서울시 차원에서 기획되는 사업들이 많습니다(서울시정개발연구원 홈페이지에 가면 이와 관련된 연구보고서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권을 중심으로 한 통합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광역행정구역 논의로 볼 때 실제로 그렇게 진행될 가능성도 큽니다. 서울 시민들의 생활을 볼 때 삶터와 일터가 분리되고 생활반경이 넓어져서 마을이나 공동체를 거주지 개념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풀뿌리운동은 이런 서울시 차원의 사업, 하지만 자치구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사업들에 대해, 그리고 행정체계와 생활권의 변화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한국 사회의 빠른 변화 속에 풀뿌리운동은 어떤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을까요?

 

저는 풀뿌리운동이 고립된 공동체, 폐쇄된 해방구를 만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려 그런 경계를 없애고 주민과 공동체의 관계를 새로이 구성하는 것이 풀뿌리운동의 역할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서울의 풀뿌리운동이 서울이라는 공간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하라면 저는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와 지방의 ‘내부식민지화’를 얘기할 겁니다. 핵발전소 문제가 계속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데, 서울시는 원전 한기 줄이기 운동을 힘겹게 벌이는 정도이고, 햇빛발전소와 수소연료전지발전소를 공공건물과 학교에 설치한다는 계획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전력 생산량은 전국의 0.28%에 불과한데, 전력 소비량은 전국의 10.9%를 차지합니다). 4대강 사업도 서울시민들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입니다. 직접적인 피해는 없으니까요. 오히려 재벌건설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한 곳이라 서울은 깔때기처럼 그 이윤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서울이 모든 걸 빨아들이는 곳에서 서울 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운동의 목표일까요?

 

더 이상 이런 과제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치구 단위의 행정교섭만으로는 풀리지 않을 수밖에 없고, 그 사업의 기획과 평가에 자체에 개입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개입과정에서 약 1만 6천명에 달하는 서울시의 공무원, 전문화된 관료조직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그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런 경쟁이 불가능하다면 각종 공모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명확한 권한과 충분한 사업기간이 보장되지 않는 사업에 대해서는 집단적인 보이콧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민간단체가 관료조직으로 편입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참여예산제가 활성화된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시에서는 이런 문제가 이미 드러났다고 합니다. 포르투알레그레시의 참여예산제를 연구한 학자 마리옹 그레와 이브 생또메는 시민사회가 자율성을 잃고 국가에 흡수되는 문제를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삼는데, 참여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며 시정부에 의존하게 되는 면, 시민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이 지방정부의 비공식적인 상임 간부가 되거나 결정권자 집단 안에 비공식적으로 흡수되면서 풀뿌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면,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신들의 활력과 논리를 잃어버리고 국가권력의 구성부분이 되는 면을 지적합니다. 참여예산제 안에서 활동가들이 모든 열정을 불태우다보니 단체가 비어버렸다고 합니다. 한국 시민사회도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저는 지역 경험이 많은 사무국장 이상의 활동가들이 서울시를 대상으로 활동을 펼치는 중간지원조직을 구성하고 그곳에서 활동하면 좋겠습니다. 그 활동가들이 기존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른 시민사회운동이나 정당과 연계하는 몫을 맡길 권합니다. 그 분들의 연륜과 활동경험, 인적 네트워크라면 분명히 좋은 효과를 발휘하고, 이는 자치구에서 활동하는 단체활동과 연계될 수 있습니다. 제도정치인이 되는 것 말고 별다른 출구가 없는 풀뿌리운동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서울시와 서울시민의 일터와 삶터에 관한 현황을 정리한 구체적인 자료도 필요합니다. 자치구를 넘나들며 자신의 생활권과 동선에 맞춰 서울시민들이 스스로 뭔가를 의식하고 조직할 수 있도록 이를 지원할 중간지원조직이 필요합니다. 이 중간지원조직이 주민들의 실제 생활동선과 지역사회의 변화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아울러 중간지원조직이 서울시가 아닌 서울시에 사는 시민들의 10년, 20년 장기비전을 구상하는 역할을 맡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정당의 정책연구소들이 응당 그런 기능을 맡아야 하겠지만 한국 정당정치의 현실을 고려할 때 서울시당이 그런 기능을 맡을 가능성은 당분간 없어 보입니다. 저는 서울의 풀뿌리단체들이 ‘서울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스스로 강구하면 좋겠습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말했듯이 ‘타이타닉 현실주의’에서 벗어나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 빙산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풀뿌리운동의 힘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이라고 믿습니다. 이 고백이 좋은 시작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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