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땅과 자유 모임의 노래...

 

야간자율학습을 받는 우리에게 자원봉사는 그다지 매력적인 말이 아니다. 자율이나 자원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강요나 강제에 의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 자원할 사람?”이라며 돌아보는 가족, 교사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얼마나 불편한가. 이럴 거면 그냥 시키지 왜 자원하라고 하는 거야?

 

지금도 공공장소에서 중고등학생들이 자원봉사 띠를 두르고 어색한 표정과 자세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교육이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자원봉사시간을 인증하면서 관리하는 건 매우 어색하다. 어느 누가 다른 이의 자발성을 평가할 수 있을까?

 

이런 한국 현실에 대해 이 책은 자발성 없이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란 강제노동과 다를 바가 없다며 돌직구를 날린다. 이 책은 자원봉사의 의미를 설명하고 활동을 권하는 책이지만 자원봉사에 관한 환상을 심어주지 않고 우리의 고정관념들을 바로잡는다.


자원봉사는 착한 사람들의 몫인가?

자원봉사는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자는 활동이 아니다. 저자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 자원봉사라고 얘기한다. 상대방의 ‘편에 서는’ 활동이기에 자원봉사자는 싸움에 끼어들 수도 있다.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무조건 갈등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원봉사는 어려운 일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활동, 자신의 개인적인 경력을 쌓으려는 활동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편에 선다고 해서 자원봉사가 마냥 이타적인 활동은 아니다.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그리고 새로운 만남을 통해 우리는 자기 속에 갇힌 자신을 대면하고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이나 가치만을 위해 살 때와는 다른 자아, 본디 자신이 되고 싶었던 자아를 만나는 과정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자원봉사란 “자기 자신을 닦아 나가는 과정”이고 “‘착한 사람’이라는 자기 평가를 중요시할 것인가,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버리고라도 상대방의 입장에 설 것인가”라는 물음의 과정이다. 자원봉사는 일종의 연대이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체험하며 나의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경력을 쌓기 위해 국제기구에 지원하는 자원봉사활동을 비판한다. “그 사람에게 가난한 이들이란 자신의 ‘경력’을 높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현장에 가서 변하는 사람도 많지만, 변화를 가져오는 만남이 없다면 여전히 자기 사정으로밖에 상대방을 보지 못한다. 오직 자기 사정뿐이고 자원봉사를 하는 ‘체’ 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과장하고 광고하는 활동은 자원봉사가 아니다.


자원봉사는 힘 있고 한가한 사람들의 몫인가?

자원봉사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활동이다. 그래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시간도 많은 사람들이나 자원봉사를 한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자원봉사 현황을 보면, 중상위층보다 중하위층이 더 많이 참여한다. 자원봉사를 하려면 서로의 삶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힘을 가진 계층일수록 타인의 삶에 관심이 없다. 과부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는 말이 있듯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많이 한다.

 

그리고 성인만이 아니라 청소년이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저자는 ‘아이라서’ 할 수 있는 일도 많다고 강조한다. 똑같은 주장이라도 청소년들이 하면 사회적인 관심을 모으기 쉽다는 거다. 그리고 그런 효과성을 넘어 저자는 “학교를 벗어나면 모두 한 명의 인격체”라고 강조한다. 자원봉사는 자신의 인격을 만들어가는 활동이니 자격요건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자원봉사가 힘 있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건 막아야 한다. 최근 한국에도 주민자치형 도서관을 내세우며 사서를 두지 않고 자원봉사를 강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자는 자원봉사자가 사서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고 “인건비를 싸게 하려고 자원봉사 활동이 이용되면 모두의 생활이 불행해진다. 내가 자원봉사를 해서 불행한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비판한다. 타인에게 불행과 고통을 줄 수 있는 자원봉사는 하지 말라는 지당하신 말씀이다. 자원봉사라는 가면을 쓴 무보수노동을 경계해야 한다.


자원봉사는 정말 자발적인가?

자원봉사는 자발적인 활동이니 남의 강요에 의한 봉사는 자원봉사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억지로 시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하도록 만드는 강요가 있었다면? 가령 봉사시간이나 학점 때문에 봉사를 한다면 그것도 자원봉사일까?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그것은 자원봉사가 아니다. 자원봉사는 내가 즐거우니까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그 일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봉사할 자유도 있지만 봉사를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자원봉사를 할 이유도 없다.

 

자발성은 자기 의지를 펼치는 과정이다. 그래야 자발적이라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한다. “자원봉사라는 것은 자기를 다시 돌아보고 자기를 닦아 가는 것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자기 모습은 거울에 비춰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 너무 깊이 생각지 말고 해 보자. 자기 나름의 자원봉사를!”


자원봉사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자원봉사자들의 수가 늘어나면 세상이 바뀔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자원봉사자가 적을 때보다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세상이 무조건 좋은 세상은 아니다. 쓰레기 문제가 심각하니 분리수거를 해야 하고 그와 관련된 일손도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장 좋은 방법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고 쓰레기를 생산하는 기업이 책임지고 이를 회수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사회구조를 바로잡아야 세상이 바뀐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우선 문제의 원인을 조사해야 한다. 그 다음에 가장 큰 원인에서 순서대로 문제를 삼아 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자원봉사자는 자기 눈에 들어오는 세상만 보려 하지 말고 사회의 구조적인 부분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생태계의 파괴가 경제발전과 무관하지 않고 빈곤이 전쟁과 무관할 수도 없다. 자연을 보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는 자원봉사가 파괴적인 발전과 엄청난 돈을 쏟아 붇는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건 ‘위선’이다.

 

그래서 자원봉사를 다루는 책이 글로벌 텍스(국제연대세), 다국적기업과세, 지구탄소세, 천연자원세, 무기거래세처럼 사회구조를 바꾸는 전략을 고민한다. 이렇게 구조를 바꾸려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원봉사와 관련된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얘기이다.


자신의 삶과 세상을 뜨겁게 달구자!

자원봉사처럼 미지근한 방법으로 정말 세상이 바뀔까? 뜨거운 혁명이 필요한 게 아닐까? 저자는 “일시적으로 뜨거워지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생 동안 줄곧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의지를 지니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 했다. 어리석게 보이는 사람이 진정 큰 역사를 일군다. 우리에게 힘이 없는 게 아니라 그 힘이 약한 것일 뿐이니 뭉치면 큰 힘을 만들 수 있다. 다만 묵묵히 역사를 밀고 갈 지속적인 의지가 중요하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큰 에너지를 품고 있다. 그리고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 즐거움을 나누며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명령에 따르는 자원봉사가 아니라 나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자원봉사, 그 속에 세상을 바꿀 힘이 들어 있다.

 

“가장 나쁜 것은 포기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망해 버리면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절망한 사람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불평밖에 안 될 이야기 따위는 들어도 의미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 그것 자체가 ‘자원봉사’다.”

1. 지방자치제 ≠ 풀뿌리민주주의


정치는 단지 권력을 잡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적인 장에서 펼치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주로 정치를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의 무대로 좁혀서 보거나 정치적인 사건을 흐름보다 인물로 본다. 그러다보니 실제 생활에서 겪는 문제들을 정치의 눈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정치인에게 의존하지 정치인을 활용하지 못한다. 그리고 과거 권력에게 감시나 탄압을 받은 경험들(직접 경험한 건 아니라도 친지나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의 간접경험으로)은 정치의 장에 들어서는 걸 움츠리게 만든다. 제도정치, 생활정치, 삶정치, 여러 개념들이 떠돌고 있지만 정치는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과제이다.

 

그리고 제도는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 제도를 원래 목적에 맞도록 운용할 사람과 문화가 필요하다. 목적에 맞도록 제도의 방향을 정하고 논의할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치열하게 갈등하고 소통하고 합의하며 공존할 문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상황은 사람을 지원하고 문화를 만드는 흐름을 부수적인 것들로 여긴다. 조례나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과정에는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의 힘이 집중되지만, 정작 그 제도를 운용할 사람을 교육하고 지원하며 문화를 만드는 과정에는 힘이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도는 상당히 빨리 만들어지지만 정작 제도가 제대로 성과를 거두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민주주의의 학교라 불리는 지방자치제도가 1991년에 부활되었지만 자치를 실현하고 있는 지역은 드물다. 모범사례로 얘기되는 몇몇 지역들이 있지만 그 지역들도 꼼꼼하게 살펴보면 몇몇 인물이나 몇몇 단체가 밖으로 부각되는 것이지 지역사회 자체가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자고로 풀뿌리민주주의는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공개적인 장에서 발언하고 행동하며 삶의 주체로 성장하고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결정들에 개입할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노력들이 끊임없이 제도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역사회를 변화시킬 때 풀뿌리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지역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여전히 권력에서 소외되고 정치를 경험하지 못하며, 제도를 활용하거나 참여문화를 만들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풀뿌리민주주의가 공허한 가치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뜻은 좋지만 현실에서는 무기력한 가치. 그러다보니 풀뿌리민주주의라는 말보다 풀뿌리보수주의라는 말이 더 익숙하고, 시장이나 군수같은 단체장들은 지역사회의 ‘제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왕이 있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을 찾으려면 먼저 지금 이곳 현실을 분석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지배구조를 분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지를 분석하는 방법도 있고, 어떤 정책이 기획되고 집행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방법도 있고, 지역사회 내의 평판이나 명망을 수집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를 분석하려면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군사독재라는 역사적인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만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의 관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의 지역사회지배구조를 분석하면 그 실체가 조금 드러난다. 일단 구조적인 면에서, 지역사회라 해서 중앙정부와 재벌의 힘이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지방정부로 많은 권한이 넘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중앙정부가 돈줄을 쥐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입에서 국세와 지방세의 비중이 7: 3이라면 지출에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비중이 3: 7로 역전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여전히 중앙이 기획한 사업을 지방이 집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앙정부가 기획한 사업을 지방정부가 대행하고 있기에,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정부의 운영구조가 분권화되어 있지 않고, 지방선거 공천권이나 공무원 인사권은 정치인과 공무원의 활동범위를 통제한다. 그리고 소수의 재벌들이 한국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지방의 지사들이 거둔 수익은 수도권의 본사로 송금된다. 지역의 토착기업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고, 대형할인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 편의점, 프랜차이즈산업이 지방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또한 중앙언론이 한국사회의 여론을 지배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어도 한국은 여전히 중앙집권형 국가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정부에 위임된 집행권을 단체장이 자기 마음대로 행사한다. 대통령처럼 막강한 힘을 가진 단체장은 지방정부의 예산을 쌈짓돈삼아 부패를 일삼기도 하고 재선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다면 터무니없는 사업들도 집행한다. 지방정부의 예산집행권과 각종 사업의 인․허가권, 공무원 인사권 등을 가진 단체장에게 맞설 지방의회의 힘은 약할 뿐 아니라 단체장과 연관된 보수정당이 지배하니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더구나 선거 때의 공약을 지켜야 하는 지방의원들은 그 권한을 가진 단체장과 어느 정도 결탁할 수밖에 없다. 지방공무원들(또는 그들의 관료주의)은 한편으로 인사권을 가진 단체장에 복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 조직이나 개인의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한다. 아무리 강한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이런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이런 대형사업들을 기획하는 건 어떻게 보면 지방선거 때문이기도 하다. 지방선거가 실시되면서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은 자신의 임기 중에 자신을 대표할 만한 대형사업을 하려하고, 공무원들은 인사권을 쥐고 있는 단체장을 만족시키려 국내외의 사례를 짜깁기해서 사업계획서를 만들기 때문이다. 지방선거가 이를 부채질하니 지방선거의 역설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리고 이런 사업기획을 돕는 온갖 ‘업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이권을 노리는 단체들도 많다.

 

그리고 이런 제도화된 권력을 뒷받침하는 각종 관변단체들이 지역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다. 각 동단위까지 뿌리를 내린 새마을운동협의회, 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협의회를 빼고도 대한노인회, 각종 보훈단체, 체육단체, 한국예총, 여협, 로타리, 라이온스, 청년회 등의 단체들이 지방정부의 사회단체보조금을 독점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지방정부의 각종 자문위원회와 주민자치위원회, 청소년선도위원회,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읍․면개발위원회 등 수십 개의 위원회들을 장악하고 있다.

 

또한 지역의 상공회의소들도 정치인, 관료, 학계, 관변단체들을 연계해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주로 건설업자들의 소유인 지역언론사들도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며 개발사업을 정당화시키고, 지역의 대학들도 지방정부의 각종 용역을 받아 지방권력을 비호한다(대학교수들이 공무원 다음으로 위원직을 많이 차지하고, 각종 재단과 시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의사, 약사, 각종 직능단체들의 지역조직도 지역사회에서 이익을 거래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다양한 사람과 집단들이 중앙에서 지역까지 다양한 권력망들을 구성하고 서로 이해관계를 타협하며 공생하고 있다. 한번 움직이면 수백에서 수천 명이 조직적으로 동원되고, 공권력이나 자본이 그들의 뒤를 적극적으로 봐준다.

 

이렇게 서로 끈끈하게 결탁되어 있으니 비리가 잦을 수밖에 없다. 《경남도민일보》 2012년 7월 8일자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1년 사이에만 비리에 연관되어 징계를 받은 국가 공무원과 지방 공무원의 수가 17,000명에 달한다. 그리고 2013년 5월 1일 감사원이 매년 발표하는 ‘지역 토착비리 기동점검’ 결과발표를 보면, 입찰 부정, 인․허가 및 채용 비리, 금품수수, 공금횡령 등으로 총 33개 기관에서 70건의 비리가 적발되었고 68명의 공무원이 고발 또는 징계처분을 받았다. 진천군, 단양군, 용인시, 부안군, 전주시, 가평군, 동두천시, 남양주시, 안산시, 서울시, 해남군, 강원도, 영광군 등으로 지역도 참 다양하다. 사회가 바뀌고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공직사회의 정책기획이나 집행과정은 투명하지 않다. 지역주민들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사실 공무원도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몇몇 주민들이 지역사회에 해를 입히는 것보다 공무원 몇 명이 입히는 해가 훨씬 더 크다.

 

그리고 문제는 관련된 공무원들의 개인비리만이 아니다. 2013년 6월 20일 감사원이 발표한 ‘지방자치단체 주요 투자사업 추진실태’ 감사결과는 “지자체에서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편법으로 민간업체의 대출을 채무보증하여 불필요한 금융비용을 부담하는 등 예산 낭비”가 일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예산을 낭비할 뿐 아니라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타당성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사업을 추진하거나 지방의회의 승인조차 받지 않는 경우도 적발되었다. 또한 세부기준을 마련하지 않고 타당성 조사를 일관성 없게 추진한 사례도 적발되었다. 감사원은 이 결과를 토대로 관련자 7명을 파면 등 징계하고 범죄혐의자 6명을 검찰에 고발하는 등 총 69건의 조치를 요구했다. 이와 관련된 사업들을 보면 나주시의 미래일반산업단지(사업지 2,650억원)의 업무부당처리, 함평군의 동함평산업단지(사업비 711억원)의 업무부당처리, 음성군의 생극산업단지(사업비 451억원)의 부당지원, 충남개발공사의 청당지구 공동주택사업(사업비 3,497억원)의 채무보증 및 출자의 부적절함, 시흥시의 군자배곧신도시사업(사업비 2조 5,981억원)의 사업추진 부적정함, 경기도의 타당성조사 66건 중 15건의 경제성 조사 미실시, 9건의 타당성 조사 미실시였다.

 

또한 2013년 6월 4일 감사원이 발표한 ‘도서지역 개발사업 추진실태’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가 국고보조금을 받아 추진중인 도서개발사업 중 통영시와 완도군의 사업을 표본으로 감사한 결과 전체 317건의 사업 중에서 74.4%인 236건 1,280억원의 사업이 취소 또는 변경이 불가피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형식적으로 도서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해서 국보보조금을 지원받고, 특정업체의 부탁을 받고 부당한 수의계약을 체결하거나 부적격 업체와 부당한 수의계약을 맺는 관련자 16명에게 정직 등 중징계를 요구했다. 지방정부의 재정이 취약하다고 하지만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고 민간자본과 계약을 맺으면 그 액수가 이렇게 커진다. 중간에 사고가 나면 지방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니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국책사업이니 공적인 사업이라며 밀어붙이지만 정부의 사업이니 무조건 정당하다고 판단할 근거는 전혀 없다.

 

또한 전국 검찰청이 2012년부터 2013년 6월까지 정부보조금 비리를 집중 수사한 결과발표에 따르면, 약 70여 개의 업체와 단체가 약 631억원의 보조금을 허위수령했고 이와 관련해 312명이 입건되고 이 중 93명이 구속되었다. 사회일자리창출 지원금, 시민․사회․종교단체 보조금, 사회복지시설 지원금 등의 명목으로 보조금을 부정수령한 사람은 대학 총장부터 농어민까지 다양했고, 이 돈을 생활비나 카지노 도박자금, 주식투자비, 변호사비용 등으로 사용했다. 정부에 붙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고, 시민들의 생활을 위해 집행되어야 할 돈이 몇몇 사람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부분은 피해를 직접 입는 건 주민들이라는 점이다. 중앙정부, 지방정부 가리지 않고 정부를 운영하는 예산은 기본적으로 시민의 세금이다(기업에서 걷는 법인세도 있지만). 시민의 돈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쓸 건지는 시민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기에 그 부분을 반드시 물어보고 궁극적으로는 시민들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리자는 것이 풀뿌리민주주의이다. 지금은 그런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세금이 낭비될 뿐 아니라 공공의 자산이 되어야 할 것들이 사유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부당한 사업들이 기획되고 집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고향에서 쫓겨나거나 고향을 잃는다. 마을이 파괴되고 뿔뿔이 흩어진다. 전국적으로 마을공동체가 유행하는 사업으로 되고 있지만 이미 마을인 곳들은 하나둘씩 파괴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고 있어도 풀뿌리민주주의는 여전히 과제로만 남아 있다. 그러니 지방자치제도의 실시가 풀뿌리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활성화시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여러 가지 다양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2. 지방권력의 민주화 = 주민의 자치역량과 공론장


가장 기본적으로 지방정부와 공무원들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 지방행정이라는 건 중앙행정과 달리 주민들의 직접적인 필요와 연관되는 부분들이 많다. 지역발전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진행되는 대부분의 사업들은 주민들의 필요와 무관한 것들이 많다. 중앙정부의 사업비를 따기 위해 이름만 거창하게 부풀리거나 다른 지역의 사례에서 이름만 따오는 사업, 주민들의 눈을 현혹시키려 규모만 키워놓은 사업들이 꽤 많다. 이런 사업들에 허투루 들어가는 세금을 주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일에 쓰도록 해야 한다. 제 아무리 새롭고 흥미로운 일을 상상하고 기획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방치하면 상처는 곪기 마련이고 심각한 병으로 발전되어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다. 곪은 곳을 찾아 도려내고 상처를 치료해야 지역사회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官)과 민(民) 사이의 무게중심을 잡는 일이다. 거버넌스라는 말이 여기저기 사용되지만 민과 관의 ‘협력’은 아직 요원한 숙제이다. 협력을 논하기에 앞서 서로가 서로를 어떤 눈높이로 바라보고 있는지 현실을 먼저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전제하고 서로 좀 부대끼며 서로의 역할을 생각하고 좀 맞춰보고 난 뒤에야 협력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지방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지방정부를 제대로 견제하고 시민사회의 힘을 강화시켜야 관으로 기운 지역사회의 권력기반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외부에서 그런 변화를 자극해야 한다. 그러니 시민사회의 감시와 비판의 기능은 제 아무리 민관협력과 거버넌스를 떠들어도 결코 사라지면 안 되는 중요한 기능이다.

 

특히 지방정부가 가진 예산이나 주요한 자산들은 정부의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위탁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의 사용을 결정한 권한은 당연히 시민들이 가져야 한다. 단체장이나 지방의원, 공무원이 공공성의 대변자인양 행세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사적인 의견이라 무시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 기본적인 관점이 바뀌지 않는다면 풀뿌리민주주의는 실현되기 어렵다. 아무리 거버넌스를 떠들어도 ‘통치’의 관점이 ‘자치’로 바뀌지 않으면 풀뿌리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주민의 자치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주민자치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되었지만, 실제로 그 힘을 만들 방법은 쉽게 찾기 어렵고, 때로는 그 방법을 찾더라도 행정의 영향력과 개입으로 변질되곤 했다. 예를 들어, 주민참여예산제도처럼 자치역량을 강화시킬 것이라 기대를 받은 제도조차도 명목상의 제도로 전락해버린 곳들이 많다. 조례만 덩그러니 제정되고 예산위원회가 열리지 않는 곳도 많고 열리더라도 형식적으로 열리는 곳들이 많다. 더구나 민중권력을 구성하고 그 힘을 강화시킨다는 주민참여예산제도의 원래 취지는 주민들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창구로 변해버린 듯한 느낌이다. 그러니 좋은 제도를 도입한다고해서 주민의 자치역량이 자동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치역량이 형성되려면 지역정치에 참여하고 개입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특히 여성이나 청소년처럼 기성정치에서 소외된 주체들이 지역정치에 참여하면서 자치를 경험하고 그런 관점으로 지역사회를 바라보고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문화는 매우 중요하다. 지방정부의 위원회나 참여과정에 일정 비율을 여성과 청소년의 몫으로 할당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다. 자격을 제한할 경우 대부분 관변단체나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위원회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직 제대로 활성화되고 있지 않지만 수원시의 시민배심원제처럼 시민들을 무작위로 추첨해서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던 사람도 몇 번의 참여과정을 거치면서 지역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질 수 있다. 처음부터 잘 되진 않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시민들을 자극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는 몇몇 시민사회단체들이 전문적으로 지방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맡았다면 이제는 그런 기능을 대중화시켜야 한다. 가장 중요하게는 정보가 공개되어야 하고, 이런 정보를 가공해서 시민들에게 알려줄 매체가 필요하다. 자기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시민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행정구역상 자기 동으로 분류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알지도 못한다. 그러니 서울시나 경기도같은 광역자치단체 규모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방법이 없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중앙언론이 여론을 독점하는 상황이다보니 한국에서는 풀뿌리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지역언론사의 상당수는 지방정부에 기생하는 계도지나 지역여론에 영향을 미쳐 이권에 개입하려는 거짓언론이다. 지역의 소식을 전할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공론(公論)을 자극할 수 있는 풀뿌리언론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부족하니 무조건 만들어야 한다는 건 아니고 풀뿌리언론의 역할을 담당할, 지역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할 사람이나 단체가 필요하다. 충청북도 옥천군의 <옥천신문>처럼 지역의 여론을 만들고 공론장을 구성하는 곳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인터넷이나 입소문을 통해서라도 여론을 만드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작은 모임이라 하더라도 지역의 소식을 나누고 고민할 수 있는 다양한 모임들이 생겨야 한다.

 

그리고 시민사회운동은 시민들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고 그런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하다못해 민원을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 주민감사청구제도, 주민투표제도, 주민발의제도 등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이런 구체적인 방법을 서로 공유해야 한다. 단체가 일방적으로 시민에게 방법을 전수하는 게 아니라 시민이 알고 있는 지역의 문제나 현안을 단체가 함께 고민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도 필요하다. 시민은 지역의 기술이나 지혜를 알고 있고,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은 제도와 방법에 능하기 때문이다. 이 둘이 만나야 문화와 제도의 힘이 결합될 수 있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개별적인 사안도 있지만 지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바로잡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선거 때만 반짝 연대하지 말고 지역의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속적인 논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지역의제를 서로 선점하려 하지 말고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며 지속적인 논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내년 지방선거를 고민한다면 정당과 지역단체들이 구체적인 연대방안을 마련하면 좋겠다. 단순히 선거연대만이 아니라 ‘선거 이후’에 지역사안을 함께 논의할 과정을 미리 준비하고 합의해야 한다. 그러려면 미리 신뢰관계를 만들고 서로의 눈높이를 맞출 필요가 있다. 선거나 사업을 위해 만나면 목적이 너무 앞서서 기본적인 신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그것이 선거나 사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광역자치단체 규모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역단체들이 분석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정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14년 지방선거의 정당공천제도를 가지고 입씨름이 많은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단체장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고 지방의회를 강화시키며 지역사회의 정책결정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런 제도의 변화는 지역사회의 힘만으로 진행되기 어렵다. 중앙정치와 지역정치가 서로 매개되어 풀려야 하고, 장기적으로 연방구가 형태로 중앙정부의 성격을 바꿔야 한다. 이런 전환을 위해서는 풀뿌리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만이 아니라 정당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약자들의 연대라는 말은 그 약자가 다수라는 현실의 구조를 은폐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오큐파이 운동에서 ‘1% 대 99%’라는 구호가 나온 건 약자가 다수임을, 다수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지역사회는 중앙정부나 국가에 비해 언제나 약한 곳으로만 여겨져 왔다. 하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공간은 지역사회라는 점에서 이곳은 세상변화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기도 하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모두가 흐트러지듯이, 지역사회에서 시작하는 변화는 모든 사회변화의 기본이다. 물론 반대로 중앙의 변화가 지역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도 있지만 각 지역의 특수성에 맞게 그 변화를 적용하는 힘은 지역사회에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지역사회의 힘이 중요하다.



3. 지역살림살이의 민주화 = 자급역량과 공공성의 강화


노동운동에서 ‘함께 살자!’라는 구호가 나왔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의 뒤를 잇는 구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모호한 것은 누구와 함께 살고자 하는가, 라는 부분이다. 시민들이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함께’만이 아니라 ‘살자’라는 얘기가 들어가려면 뭔가 더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하다. 어떻게 살자는 건가? 노동운동이 다른 시민사회운동 또는 지역사회와 함께 살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그 내부에 노동조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보수는 보수적이라서 노동조합 자체를 무조건 거부하고 진보는 내가 진보인데 노동조합이 왜 필요해, 이런 식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가 조직화되고 사회적인 발언권을 얻는 건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 뒤이다. 발언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누구와 어떻게 만나고 서로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가.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로, 노동조합이 고민하는 사회변화가 시민들의 ‘지역발전’으로 여겨지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여러 가지 고려할 점이 많겠지만 일단 서로 소통이 되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지역화라는 주제가 꽤 오래 논의되어온 것으로 안다. 그런데 어떤 뚜렷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은 것은 ‘관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노동운동이 지역사회를 대상화시키고 시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거나 지역사회를 보수의 아성으로 전제하고 계몽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버리지 않는 이상 노동운동의 지역화는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지역사회에 시설을 만드는 것으로만 보자면 노동조합보다 기업이 훨씬 더 많은 돈을 쏟아 붓는다. 사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라는 명목으로 쏟아지는 지원금들은 지역사회를 길들이는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요즘 같은 시절에는 공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겠다는 결정만큼 지역사회를 협박하기에 좋은 일도 없다. 이렇다보니 노동조합이 쉽게 지역사회로 스며들기 어려운데 시혜적이거나 계몽적인 관점을 가지면 그런 스며듦은 더욱더 어려워진다.

 

물론 진주의료원의 폐원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노동문제는 지역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학교나 병원같은 생활과 밀착된 의제를 제외하면 노동문제는 지역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연대에 앞서 먼저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런 과정이 없다. 이것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대공장의 노동자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많은 노동시간과 척박한 문화가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지역사회 활동을 가로막는 면도 있지만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울산광역시와 같은 대공장 밀집지역을 가더라도 지역사회가 활성화되었다는 느낌은 받기 어렵다.

 

그런데 2013년 7월 24일 민주노총 부산ㆍ울산ㆍ대구 경남ㆍ경북본부, 전국건설노동조합 부산ㆍ울산ㆍ경남본부와 대구ㆍ경북본부가 밀양 송전탑 공사를 거부한다고 밝힌 것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민주노총과 건설노조는 "주민의 생명권과 생존권, 재산권 등을 송두리째 빼앗고 주민을 전력난의 주범으로 내모는 한국전력공사의 송전탑 공사에 반대한다"며 송전탑 공사를 거부할 뿐 아니라 노동자들을 설득해 밀양 주민들과 연대해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반대로 지역사회가 노동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도 드물다. 노동조합과 지역사회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건 더 이상 당위가 아니다. 지역의 불확실한 미래를 고려할 때 서로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는 그나마 티라도 나지 구미나 수원의 불산유출사고처럼 공장에서 다뤄지는 물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생활하는 지역주민들은 화약고를 안고 사는 셈이다. 발암물질을 다루는 노동자의 삶이 그렇게 발암물질을 포함한 제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법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가? 자치가 가능하려면 먹고 사는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송전탑이 들어설 밀양과 청도의 주민들, 용산참사로 목숨을 잃은 유족들,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강정마을주민들이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현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지했던 SKY 액트나 ‘현대차 희망버스’는 좋은 사례이다.

 

이렇게 삶터와 일터를 연계시키려는 전략 속에서만 진정한 자치가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생산과 소비가 연계되어야 하고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생산과 소비를 연계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면, 응당 노동운동과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이 서로 만났어야 할 텐데,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솔직히 말해 운동의 연대에 앞서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나 있을까?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를 따져보면 생산과 소비를 연계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틀은 협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이 협동조합과 무관할 이유는 없다.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이라 불리는 로치데일 협동조합도 노동자들이 만든 조합이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적당한 가격에 정직한 생활재를 거래할 수 있도록 매장을 만들고 노동조건이 좋지 않거나 실직한 노동자들이 더 나은 노동환경에서 일하며 좋은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을 기획하는 곳이 협동조합이었다.

 

그리고 생산과 소비를 따질 때 사회적 경제, 자급의 가장 기본은 먹고 사는 문제이다. 그리고 먹는 건 노동만이 아니라 먹거리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이 농민운동이나 협동조합운동과 무관할 수 없다. 노동운동 쪽에서는 시민들이 노동과 관련된 사안에 무관심하다고 비판하지만, 노동만이 아니라 농민, 농적인 삶에 대해서도 시민들은 더 무관심하다. 귀농, 귀촌이 한때 사회의 관심을 받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농민과 농촌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은 바뀌지 않았다. 농촌은 도시에 먹을거리를 공급하는 배후지로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고, 귀농이나 귀촌은 도시민들의 목가적인 선택처럼 여겨지는 실정이다. 하지만 외국의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와 농촌이 몰락하는 상황에서 농민이 살아날 방법, 더구나 농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이어갈 방법은 먼 숙제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도시와 농촌이 서로의 삶을 지지해야 한다. 노동조합이 농민회와 손을 잡고 농산물을 구입하거나 농활을 떠나는 예는 있었다. 기아자동차노동조합 광주 지부가 구례군 농민회와 함께 공동경작단을 운영하고 식당에서 쓸 쌀을 수매하는 건 좋은 사례이다. 이런 연계망도 매우 중요하지만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는 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부산에서는 민주노총부산본부의 결의로 만들어진 노동자생협이 농민회와 연계해 활동하는 건 좋은 사례이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시도를 잘 살려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운동에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는 농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농민은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런 과정에 노동조합과 농민회만이 아니라 다양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들이 힘을 모은다면 더 큰 힘을 만들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보육, 교육, 의료, 복지서비스 등 다양한 방향으로 새로운 시도들이 등장할 수 있다. 어찌보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함께 살자’의 과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사회적 경제를 실현하겠다는 운동이 지역의 노동운동에 관해 무관심하거나 그들과 연대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 협동조합이 아무리 붐이라도 협동조합 한 두 개가 지역의 살림살이를 책임질 수는 없다. 다양한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기업,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힘을 모으고 서로의 존재와 역할을 이어갈 때에만 자급하는 살림살이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 지역만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들이 서로의 필요와 욕구를 연계하는 연계망을 만들 때 서로의 삶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실질적인 기반이 될 수 있다. 사회적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생태계’는 지방정부가 만들어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지원을 통해 만들어진 관계는 지원이 끊어지는 순간 지속되기 어렵다.

 

서로 돕고 보살피는 과정(相互扶助)은 내가 남에게 의존할 뿐 아니라 남이 나에게 의존할 수 있도록 힘을 기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로 약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 강해지는 과정이 상호부조이다. 풀뿌리민주주의는 그런 상호부조를 통해서만 힘을 강화시킬 수 있다. 지역 내에서 중요한 자원이 공유되고 순환되며 지역의 자급역량이 강화되며 함께 쓰고 공유하는 것(公共性)이 확대될 때에만 자치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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