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즐겨찾기에 나쁜놈들이란 '폴더'가 있다.
언론기사를 읽다 눈에 걸리는 기사들을 즐겨찾기하는 폴더인데, 이제 기사가 넘쳐 난다.
매달 칼럼을 쓸 때마다 한번씩 쓰고 정리하곤 하는데도 줄어들기는 커녕 달이 지날수록 늘어나기만 한다.
까칠한 내탓이냐, 미쳐 돌아가는 세상 탓이냐...

용산참사 유족들의 신변문제가 합의되었다고 한다.
간만에 본 9시 뉴스 첫보도이다.
다들 자기 성과, 누구 탓이라고 떠들어댄다.
합의금은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는데 35억이라는 얘기가 버듯이 보도되고...

허나 이미 구속된 사람들은 여전히 징역을 살아야 하고,
명동성당에 있는 래군이형과 대책위 사람들은 곧 감방에 가야한다.

다시 또 싸울 수 있을까?
사건은 어느날 갑자기 불현듯 다시 찾아올 거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생각이 많은 밤이다.

서울 동북여성민우회 소식지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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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풀뿌리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대통령을 바꿔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던 사람들의 바람은 그들의 허무한 죽음만큼 뿌리 깊은 변화를 이루지 못한 듯합니다. 오히려 거꾸로 도는 시계바퀴처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에는 모든 것이 허무하리만큼 이제껏 이뤄온 민주화의 성과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센 놈만 살아남고 센 놈에게 모든 걸 다 바치는 승자독식의 경쟁사회는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나 혼자, 우리 가족이라도 살아남아야 하니 주위의 아픔과 고통에 자꾸 눈을 감고, 그 마음을 다스리려 자꾸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괜찮다”, “이번 한번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뭘”, “애들 생각해서.” 날이 갈수록 핑계는 늘어나고 내가 혼자 지고 가야할 삶의 무게도 늘어납니다. 이 무게를 견디며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스스로 위안합니다.

하지만 조세희 선생님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소설책에서 이런 우리 모두가 난쟁이라는 냉혹한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용산참사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망루에 오르게 되리라 생각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팔당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던 농민들 중 어느 누구도 그 농지가 강을 죽인다고 매도당하며 자전거도로와 생태공원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를 듣게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어느 순간 내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 때는 어쩌면 이미 늦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죽어버린 땅을 등 뒤에 남기고 소설에서처럼 우리는 달나라를 갈망해야 할지 모릅니다.

아마도 우리가 풀뿌리라는 말을 되뇌는 건 이런 불안감 때문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는 단순히 아래로부터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 ‘운동의 전략’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풀뿌리는 우리의 삶이 더욱더 단단히 이 땅에 뿌리를 내려 권력이 우리를 밀어내고 갈아엎으려 해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보자는, 그리고 서로의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야 하겠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운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를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풀뿌리는 그런 점에서 변화의 시작이면서 그 자체가 변화의 과정입니다.

올해는 여성민우회 생협이 2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여성민우회와 민우회생협이 지난 세월 한국의 지역사회에서 만들어온 변화는 아주 소중합니다. 민우회의 ‘사회주부’는 여성대중을 조직화하고, 대중의 참여 증진을 통해 여성을 세력화하며 대중 속에서 리더십을 발굴하고, 여성대중의 지지를 받는 운동을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민우회생협의 조합원선언은 환경, 여성, 지역사회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여성적 관점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민우회와 민우회생협은 가치와 생활의 변화를 함께 모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소소한 생활의 변화부터 지방선거에 참여하는 것까지 민우회는 다양한 변화의 물꼬를 터왔습니다.

하지만 개발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의 지역사회를 바꾸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지방정부는 주민들을 무시하며 일방적으로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며, 이들과 결탁한 토호들과 관변단체들이 여러 사업들을 펼치며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한국문화는 여성들의 지역활동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아이들이나 가사일을 여성에게 떠맡기려 합니다. 이 모든 조건들은 가치가 삶으로 녹아드는 걸 방해합니다.

그래서 풀뿌리가 희망이려면 서로의 삶이 지금보다 더 많이 얽혀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서로가 서로의 역할과 활동방식을 이해하는 단계가 필요한 듯합니다. 다양한 재료를 섞은 음식이 조화로운 맛을 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듯이, 가치와 생활이 잘 버무려져 새로운 삶이 드러나려면 여유가 필요합니다. 각자의 고유한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화로이 섞이려면 자기 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화백회의는 만장일치로 운영됩니다. 드라마에는 마치 그 회의가 정치적인 음모의 장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의견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전체 회의장에서 토론될 수 있었고 차이가 합의로 이어질 시간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생활하는 이들이 소중하지만 더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관계를 더 찢어놓고 경쟁을 시키려는 사회에 맞서 손을 잡아야 합니다. 손조차 쉽게 내밀 수 없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끌어주고 그들이 스스로 자기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든든한 디딤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사는 지역사회를 경험하고 분석하며 내가 누구와 함께 사는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2010년에는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머슴임을 주장하며 지지를 호소할 겁니다. 그런 장에서도 관계는 만들어지겠지만 기본적으로 선거에서 후보자는 상대가 내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보다 내게 표를 찍을 건지 안 찍을 건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내 진심(眞心)보다는 표심(票心)에만 관심을 쏟는 게 바로 선거입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지역사회가 자연스레 바뀌리라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따라서 선거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선거를 뛰어넘는 정치전략이 필요합니다. 표심이 아니라 진심을 파악할 수 있는 관계맺음이 필요하고 그런 진심을 자극하고 만나며 다른 꿈을 꿀 수 있어야 합니다.

나부터 꿈을 품어야 합니다. 풀뿌리가 희망이려면 나부터 꿈을 꾸고 그 꿈이 서로의 관계를 타고 퍼지며 힘을 만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나키즘이 국가와 자본의 능력을 무시하는 비현실적인 대안이라 비판한다. 우리는 그 비판에 옳다고 박수칠 뿐 그것을 반박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 없다. 콜린 워드는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에서(원래 제목인 anarchism in action을 ‘대안의 상상력’이라 번역한 이유가 참으로 궁금하다. 아마도 책이 번역될 당시의 ‘상상력 유행’ 탓인 듯하다), 자신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책에서 이렇게 답한다. “아나키즘은 역사의 낭만적 샛길이 아니라 인간 조직을 대하는 한 가지 태도”이기에 “지금 아나키즘은 그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한 태도가 되었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감을 내세우는 주장이다. 아나키즘은 정치변혁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회적 자기결정 행동이다.”

워드는 국가를 없앤다는 것이 대통령이나 수상직을 없애는 것과 다르다고 본다. 독일의 아나키스트 란다우어의 말처럼 국가는 “혁명에 의해 없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이자 하나의 인간관계이자 하나의 인간 행동양식”이기에 “다르게 관계를 맺고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국가를 없앨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란다우어는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 국가와 공존하는 것, 파묻히고 버려져 있는 것을 현실화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워드는 이런 ‘오래된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조정하는 개인과 집단의 확장된 네트워크”라는 현대어로 번역한다. 그리고 많은 예를 들며 이런 네트워크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도시계획과 사회복지, 마을자치회, 스쿼터, 협동조합, 청소년의 집, 모험놀이터, 탈학교․탈대학운동 등 대중의 자발적인 질서가 만들어온 수많은 대안들이 존재한다. 이런 수많은 대안들이 존재하는데도 왜 우리는 아나키즘을 비현실적이라 생각하는 걸까?

아마도 그건 국가와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하기에 조직적으로 맞서지 않고는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고 믿어왔고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 자본의 힘을 상대할 만큼 강한 힘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국가의 관료제와 자본의 자원동원력에 맞설, 폭력과 무한경쟁에 맞설 힘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소수의 전위정당이나 전위조직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그 힘을 만들 수 있을까? 전 지구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에 맞설 또 다른 힘은 구성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사회를 바꾸는 방법으로 ‘대항(counter)’을 생각한다면, 아나키즘은 대항과 더불어 그 강력한 힘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다. 상층의 기득권자들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그들에게 공포를 불어넣을 뿐 아니라 ‘협력하지 않음’, ‘협조하지 않음’으로 그 힘의 기반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자급과 자치로 그들을 더 이상 ‘필요없게’ 만들려 한다. 그런 점에서 워드의 말처럼 “아나키즘의 접근방식은 분명하다. 제도들을 파괴하여 사회적 차원에서 자조(self-help)와 상호부조(mutual support)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작은 단위로 쪼개는 것이다.”

워드가 분명하게 강조하지 않지만 나는 아나키즘에 내포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지고 규정되는 ‘피동형’ 인간들은 성장의 경험을 갖지 못한다. 부딪치고 깨고 파괴하는 능동적인 인간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위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우두머리가 필요없다는 점을, 자신의 자아를, 자존감을 깨닫는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만큼 국가와 자본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만큼 기성체제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대안들을 통해, 그 대안들을 더욱더 넓혀서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아나키즘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에 한국의 백무산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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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기댈 곳

 

백무산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
검은 얼굴의 두 사내가 쇼핑을 나왔다
할인매장 계산대에서
기름때가 다 가시지 않은 손으로
라면과 야채를 넣었다 뺐다 들었다 놓았다
돈에 맞추느라 줄였다 늘렸다 했다

계산서를 구기던 여직원이 무전기 든 덩치를 불렀고
덩치는 주먹을 흔들고 욕을 퍼붓고 침 튀겼다
깜둥이 새끼들 돈 없으면 처먹지 말지
여기까지 와서 지랄은 지랄이야!
옆 계산대를 빠져나오던 자그마한 한 비구니가 그 소리를 들었다
두 배는 됨직한 그 덩치를 무릎 꿀렸다

저 자리에서 절절매며 살던 덩치가
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치던 때가 엊그제였다
힘있는 덩치와 문명의 나라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맑스였고
희망없는 '인류의 쓰레기'들과 땅을 잃은 뜨내기들이 우글거리는 나라에
새로운 역사의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바꾸닌이었다
한줌 가진 것에 기대 비굴하게 오염되어
열정을 잃어버린 덩치들을 그는 경멸했다
그로 인해 그는 패배자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더렵혔지만 진실은 그의 것이었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마음에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비구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순결은 것은 스스로 기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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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선을 넘지 못하는 자에게 꿈은 공상일 뿐이다. 꿈이 현실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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