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인의 '라 광야' 전시회에 가는 걸 조금은 망설였다. 온갖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평화라는 가냘픈 가치를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폭력에 밥숟갈 하나 얹으려 파병을 결심하는 나라에 사는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래서 카메라 셔터에 담긴 순간적인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도 함께 손을 잡고 갈 각시(나는 아내라는 말보다 각시라는 말이 좋다)가 있고, 박노해 시인이 기록한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느린걸음, 2007)이란 책을 읽었기에, 강연으로 맺은 나눔문화 사람들과의 인연이 있었기에 전시회로 향할 수 있었다.
전시회장에 들어서면 외지인을 반기는 차라는 샤이와 함께 박노해 시인이 팔레스타인과 터키, 시리아 국경을 넘나들며 찍은 삶을 접하게 된다. 예상대로 마음이 무겁다. 폭력과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앙상한 자연과 파괴된 건물이 남아 있고 그 폐허 속에 사람이 산다. 아무도 살지 못할 것 같은 그곳에 사람들이 짧은 미래를 살아가고 있다.
마음 한 켠에서는 내가 그곳에 살지 않기에, 내가 사진의 주인공이 아니기에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나 역시 그 곳의 주민임을 자각하게 된다. 사진 속의 마을은 저기 먼 나라의 풍경이 아니다. 그곳에 용산이 있고 새만금이 있다. 그 속에 해군기지 때문에 쫓겨날 제주도 강정마을의 주민들이 있고, 생태공원 때문에 밀려날 팔당의 농민들이 있다. 사진 속에는 4대강 사업이 파괴할 생명들이 보인다.
우리는 진정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까? 지금 이 땅에서도 소리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총을 든 폭력과 서서히 숨을 죄어오는 개발의 폭력에서 무겁고 가벼움을 구분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착각’은 눈 앞의 진실을 가린다. 하루 아침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평생의 터전에서 쫓겨날 사람들의 마음을 우리는 정녕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다르게 살고 있다 자신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래도 폐허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희망이 싹튼다. 폐허를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고, 먼 길 찾아온 시인을 반기는 사람들의 ‘환대’가 있다. 메마른 땅이라고 어찌 생명과 반가이 맞이하는 문화가 싹트지 않겠는가? 가톨릭노동자운동을 벌였던 피터 모린의 말처럼 모든 곳에는 하느님의 집과 방이 있고, “아무도 부유해지려고 하지 않으면 모두가 부유해질 것”이고,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아직까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구걸하지 않고 ‘존엄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며 평화를 요구한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시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 풍경이 아니라 삶을 담고자 흑백사진을 고집한다는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아마도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박노해 시인이 평화와 나눔을, 소박한 삶을 선택한 건 그런 만남의 덕이 아닌가 한다. 이제 그 자신이 새로운 만남의 끈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진이 이렇게 쓰이게 되리라는 것은 짐작도 못했다. 저마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 종종걸음으로 외면하고 지나가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레바논을 살립시다, 이스라엘의 폭격을 중단시킵시다, 정말이지 위축되는 목소리로 외치며, 한 사람의 눈길이라도 더 붙잡아 보려 기를 쓰며 서명을 호소하다 ‘우리의 미약한 행동이 과연 이 거대한 전쟁 앞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무력감에 몸서리를 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 광경을 담은 사진 한 장이 발휘하는 힘을 보면서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평화는 힘이 세다. 평화는 무력하지만, 평화는 힘이 세다.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이 어디 있겠는가?” 어쩌면 이 사진전은 그런 다짐을 확인하는 시인의 마음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 만남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당당히 평화를 요구하고 있는가? 진실이 무겁게 어깨를 누르며 짐 하나를 더 얹는다.
전시회를 다녀온 뒤 새벽에 일어나 잠든 각시의 얼굴을 봤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각시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다.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며 한편으론 두려움이 들었다.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게 좋은 일일까 생각을 했었다.
이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저 세상에서 나와 함께 짐을 나눠질 새로운 사람이 오는구나, 그 사람을 반가이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구나,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만들어갈 세계를 고민한다.
전체 글
- 라 광야, 폭력의 세상에서 만나는 환대와 희망 2010.01.20
- 오 헨리와 비정상의 사회(경인일보) 2010.01.08
- 3·1운동, 직접행동으로 주인임을 증명하다!(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0.01.07
라 광야, 폭력의 세상에서 만나는 환대와 희망
오 헨리와 비정상의 사회(경인일보)
미국의 작가 오 헨리(O. Henry)의 단편소설 ‘경관과 찬송가'에서 주인공 소피는 추운 겨울을 교도소에서 보내기 위해 일부러 범죄를 저지른다. 자존심 강한 소피는 자선단체의 적선을 받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교도소에서 지내려 한다. 교도소에 가기 위해 무전취식을 하고 무단횡단을 하고 우산을 훔치지만 소피의 소원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찬송가 소리를 들은 소피는 마음을 고쳐먹고 새 삶을 시작하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소피는 경관에게 붙들려 금고 4개월의 형을 선고받는다. 이 작품에서 오 헨리는 불평등한 사회의 아이러니한 단면을 드러냈다.
그런데 오 헨리의 소설은 점점 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유아사 마코토(湯浅誠)는 『빈곤에 맞서다』라는 책에서 경제대국 일본 내의 빈곤을 다루며 현실의 소피를 얘기한다. 마코토는 고용과 사회보험, 생활보호제도라는 3중의 사회안전망이 붕괴하자 가난한 사람들이 제 4의 대안으로 교도소를 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범죄자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교도소를 가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늘어나면서 소설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도 생계형 범죄라는 말이 심심찮게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2009년 통계청이 발표한 ‘2008 사회조사’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10명 중에 4명이나 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드러냈다. 그리고 작년 연말에는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하지 못한 노숙자들이 교도소를 택한다는 소식이 언론을 타기도 했다. 이정도면 소설 속 아이러니는 더 이상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그런 사람들을 교도소에 가두는 건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올 해부터 국민기초생활수급자나 저소득층에 대한 난방비 지원금이나 월세 지원금 등 각종 지원예산을 없애거나 줄이고 있다. 연말이라 각계각층의 따뜻한 온정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자선은 불평등한 현실을 바로잡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를 택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은 더욱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인지 올해 10월 민간업체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교도소가 최초로 등장할 예정이다. 법무부의 ‘2010 주요업무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민영교도소를 허가해서 교도소 신축 비용을 줄이고 다양한 교화프로그램을 실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기독교 재단법인 아가페가 경기도 여주시에 300여명의 수형자를 수용할 수 있는 민영교도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정부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바로 잡지 않고 오히려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드는 나쁜 방향을 택하고 있다.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는커녕 벼랑 끝으로 내몰고 그들이 교도소라는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과연 법치주의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인식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불법시위와 불법파업을 엄단하겠다고 경고하면서도 경영권 편법승계와 조세포탈 및 배임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천 100억 원을 선고받은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을 불과 4개월 만에 특별사면하는 사회에서 법치주의란 비정상적인 상황을 강요하는 정상적인 언어일 뿐이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과연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비극을 부를까? 새로 태어난 이들이 부모의 굴레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더 깊은 나락으로 미끄러지는 곳에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가 없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기에 충동을 억누르지도 동기를 묻지도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 누가 자신의 안전을 장담할 수 있을까?
미래를 꿈꾼다면 우리 곁의 소피에 관심을 쏟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3·1운동, 직접행동으로 주인임을 증명하다!(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3·1운동, 직접행동으로 주인임을 증명하다!
1919년 4월 1일 밤 11시, 경기도 화성시 수촌리의 주민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죽산 봉우리는 마치 산불이 난 듯 환했고 만세 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개죽산만이 아니라 쌍봉산, 천덕산, 당재봉, 무봉산 화성 일대의 산봉우리들이 붉게 타올랐고 깜깜한 밤공기를 타고 만세소리는 사방으로 퍼졌다. 일본 헌병대가 총을 쏘며 산기슭을 올랐지만 도망을 치면서도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입을 막지는 못했다. 지난 3월 말에는 인근 수원에서 위생검사와 도박을 핑계로 사람들을 괴롭히던 일본 경찰 1명이 주민들에게 맞아죽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칠흙같은 밤 수촌리 주민들의 마음은 산 위의 횃불처럼 불타올랐다. 이대로 꿇고 사느니 서서 죽자, 굳은 다짐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같은 날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 주민들은 몽둥이를 들고 일본인들이 사는 마을로 쳐들어갔다. 그 놈이 그놈이지만 일제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삶이 더 어려워졌다. 자기 땅을 짓던 사람들도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대부분이 높은 소작료에 시달렸다. 심지어 일제는 일본 모종을 심어라, 뽕나무를 키워라, 매달 가마니를 몇 장씩 짜서 내라는 온갖 무리한 요구를 했다. 그래서인지 주민의 82.9%가 소작농이던 칠곡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안성 주민들은 헌병주재소를 불태우고 전선을 끊었으며 우체국과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주민들은 일본인의 상점도 부쉈고 심지어 다리나 철도까지 끊으려 했다. 심지어 일본 군대가 공격할 것을 대비해 산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놓기도 해서 상해임시정부는 시위대를 ‘독립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제는 이날 경기도 안성의 만세시위를 평안북도 의주, 황해도 수안의 시위와 더불어 ‘전국 3대 폭동’이라 불렀다.
유관순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우리가 유관순 누나와 태극기, 만세 삼창으로만 기억하는 3․1운동은 조선 말기 수많은 민란들의 뒤를 이었고, 가까이는 1894년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았다. 이 땅의 민중들은 산꼭대기에 횃불이나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했다. 시골 장터가 열리는 곳마다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사람들은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학생들은 학교 문을,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닫았다. 농민들은 일제 품종이나 묘목을 심지 않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일제 상품을 사지 않으며 일상 속에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거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어린이, 거지, 기생들도 만세를 외치며 시위의 주체로 등장했다. 심지어 삼베 주머니로 도시락을 만들어 망태에 넣고 돌아다니는 전문 시위꾼인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데 누가 감히 운동을 이끌었다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참여한 사람들도 200만 명을 넘었다. 그리고 3월 1일만이 아니라 3월부터 4월 말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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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10 |
3.11~3.20 |
3.21~3.31 |
4.1~4.10 |
4.11~4.20 |
4.21~4.20 |
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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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
비폭력 |
폭력 |
비폭력 |
폭력 |
비폭력 |
폭력 |
비폭력 |
폭력 |
비폭력 |
폭력 |
비폭력 |
폭력 |
비폭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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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 |
충돌 |
발포 |
충돌 |
발포 |
충돌 |
발포 |
충돌 |
발포 |
충돌 |
발포 |
충돌 |
발포 |
충돌 | |||||||
서울 경기 충북 충남 강원 경북 경남 전북 전남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 |
3 14 2 2 |
2 2 8 4 3 1 |
10 6 3 1 3 3 1 18 48 35 13 1 |
3 3 2 6 1 4 2 7 3 |
1 3 10 2 2 2 1 1 |
1 6 1 10 3 7 15 7 8 19 2 8 38 15 |
28 3 4 2 6 10 5 9 2 |
13 24 4 2 1 4 2 1 6 2 1 |
39 90 3 8 5 7 24 11 7 11 5 10 2 8 |
23 10 19 11 1 15 1 1 14 1 13 1 2 |
9 8 9 4 5 3 1 12 10 |
23 15 17 34 10 25 4 13 26 5 17 1 9 |
2 1 1 1 3 1 |
1 1 |
2 4 7 4 2 2 13 9 1 1 4 |
1 1 |
1 |
1 1 6 3 7 |
0 56 14 27 14 9 34 1 4 27 15 26 12 5 |
14 38 12 11 6 19 8 4 0 21 8 18 5 2 |
51 127 23 38 50 32 72 27 45 83 61 71 54 44 |
계 |
21 |
20 |
142 |
31 |
22 |
|
69 |
60 |
230 |
112 |
61 |
199 |
9 |
2 |
|
2 |
1 |
18 |
244 |
166 |
778 |
비율 |
22.4 |
77.6 |
26.7 |
73.3 |
35.9 |
64.1 |
46.5 |
53.5 |
18.3 |
81.7 |
21.4 |
78.6 |
34.6 |
65.4 |
<표>에서 드러나듯 서울의 만세시위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 점점 수그러들었지만 오히려 전국 각지에서 그 기운을 이어받아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3월 말과 4월 초는 시위의 정점을 이뤘고 수많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목숨 걸고’ 거리에서 일제와 맞섰다. 때로는 태극기를 손에 들고, 때로는 돌멩이를 던지며, 때로는 낫과 몽둥이, 호미를 들고 경찰, 헌병과 맞섰다.
그 엄혹한 일제 시기에, 나라조차 없는 상황에서 거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은 저항했을까?
헐벗은 삶에서도 저항은 시작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목적은 단순히 조선이라는 영토를 지배하는데 있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인의 삶에서 자발성과 능동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수동적인 인간을 만들려 했다. 왜냐하면 일제는 동학농민전쟁을 경험했고 을사조약 이후에도 수많은 의병들의 저항을 강제로 억눌러야 했기 때문이다(일본 측의 통계를 따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 따라서 일제는 민중의 삶 자체를 뿌리째 뽑아 그 삶이 외부의 권력과 자본에 기생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일제는 행정부, 사법부의 주요 관리들을 일본인으로 교체할 뿐 아니라 헌병과 경찰의 수를 대폭 늘리고 이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헌병과 경찰은 단순히 범죄를 단속하고 첩보를 수집하는 역할만을 맡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심으라는 모종을 심지 않거나 토지측량을 거부하거나 위생검열에 응하지 않으면 헌병과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1910년에 제정된 ‘범죄즉결령’은 결찰서장이나 헌병분대장이 구류, 태형 등의 범죄나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를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1912년에 제정된 ‘조선태형령’은 조선인의 경우 징역이나 벌금 대신에 매질을 하게 했다. 따라서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자기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이면 아무나 끌고 와서 매질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소유가 분명하지 않은 땅들을 강제로 빼앗았고 이를 이주하는 일본인들에게 팔아넘겼다. 그리고 이들은 농민들에게 비싼 소작료를 걷었다.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비싼 소작료를 낼 뿐 아니라 일본 모종을 쓰고 일본식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다. 종자를 골라 모를 심고 수확하고 건조하고 탈곡하는 과정 모두에 식민권력이 간섭하며 일일이 명령을 내렸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모종을 밟아 뭉개고 벌금을 매겼다. 또한 도살세, 연초세, 주세, 학교조합비 등 각종 세금을 거뒀다.
일제의 만행은 이렇게 개개인의 삶을 억누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은 저항의 힘이 자치공동체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자치공동체인 동이나 구를 없애고 강제로 면으로 통합시켰고 대부분의 면장을 일제에 협조적인 사람으로 바꿨다. 일제는 지역의 자치공동체를 무너뜨려 중앙집권적인 식민지 지배구조로 흡수시키려 했다.
3·1운동은 이렇게 국가와 자본에 내몰리고 뿌리 뽑히는 사람들과 공동체들의 극렬한 저항이었다. 일제는 사람들이 저항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지고 있음을 눈치 챈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시위 때의 구호도 다양했다. 길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면장이든 면서기이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를 위하여 이렇게 우리들은 진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조금이라도 국가를 위하여 진력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놈은 때려 죽여라”, “지금부터는 모자리 일을 할 것도 없다. 송충이를 잡을 필요도 없다”, “바닷가의 간척공사도 안 해도 좋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 세금이 필요 없게 될 것이며”, “이제부터는 묘포(苗圃)일도 할 것 없고 라고 외쳤다.
이렇게 민중들은 자신이 이 땅의 주인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권력이나 자본의 간섭 없이도 자신들이 잘 살 수 있음을, 그리고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마련하는 삶이야말로 올바른 대안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 점은 자치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하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남 순천, 평안도 의주, 평안도 신미도 등지의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업무를 봤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다시는 헐벗은 삶으로 내몰리지 않으리라는 강한 의지가 국가의 폭력을 넘어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자기 목숨을 건 자발적인 정치의 운동이었기에 일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시위를 막아도 지방으로 들꽃처럼 번져가는 불길을 잡기는 어려웠다. 언제, 어디서 만세시위가 벌어질지 몰랐기에 일제는 가늠하지 못했다.
직접행동과 전쟁상태
이런 민중의 의지를 보았기에 일제는 이에 맞서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민중이 일제의 ‘치안’을 무너뜨리고 ‘정치’를 지향하자 일제는 경찰, 헌병만이 아니라 일본인 자위대, 소방대까지 동원해서 민중을 탄압했다. 그런 상태에서 폭력․비폭력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위들은 민족대표들이 주장했던 평화시위를 따랐지만 일제의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헌병이나 경찰이 총을 쏘고 주동자를 연행하며 강제로 해산을 시도하면,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도 돌멩이, 죽창, 삽, 도끼 등을 든 시위로 변했다. 그래서 <표>에서 드러나듯 3월 말이 되면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경기도 수원 화수리의 항쟁은 계획적으로 헌병주재소를 습격해 일본경찰을 때려죽이기도 했고, 평안도 안주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주재소장과 헌병 3명을 붙잡아 살해하기도 했다.
이런 직접행동에 일제는 마을 전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맞섰다. 화수리의 경우 일제는 마을의 집 30채를 불지르고 마을주민들을 끌고가 갖은 고문을 다했으며 주모자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안성 지역에서는 일제 경찰과 함께 보병부대가 주민들을 검거에 나서 1명을 죽이고 20명을 부상시켰으며 9채의 집에 불을 질렀다. 심지어 부대가 학교에 야영을 하며 한 달 동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이렇듯 무장하지 않은 민중이 무장한 권력에 맞섰던 전쟁의 결과는 비참했다. 역사가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창으로 찌르고 칼로 쳐서 마치 풀을 베듯 하였으며, 촌락과 교회당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잿더미 위에 해골만이 남아 쌓이고, 즐비했던 집들도 모두 재가 되었다. 전후 사상자가 수만 명이었고, 옥에 갇혀 형벌을 받은 사람이 6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늘의 해도 어두워져 참담하였으며, 초목도 슬피 울었다”고 적었다. 일제는 마을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을 저지른 뒤에야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런 피의 전쟁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민중의 정치를 다시 치안의 틀에 가두기 위해 일제는 ‘문화정치’를 펼쳤다. 이 문화정치는 민중들을 분열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상가 함석헌의 말처럼,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 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가와 타협하여 손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에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작가 이광수를 비롯한 거짓된 자치주의자들이 민중들의 자치의지를 대신하려 들었고 한국인 지주와 자본가들은 민중의 피를 팔아 자신들의 이득을 꾀했다.
스스로 다스리며 살겠다는 민중의 의지에 공포를 느낀 것은 일제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 기득권층의 국가는 역사를 왜곡해서 3․1운동의 다양한 목소리를 ‘독립’이라는 국가주의의 목표로 축소시켜야 했다. 그 다양한 목소리와 정치행동은 모두 사라지고 유관순 누나의 비폭력만 남아야 했다.
3·1운동과 촛불집회, 앞으로의 사회운동...
역사학자 이정은의 말처럼 “1919년 2월 28일 밤 서울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이튿날 아침 각처의 집 대문 앞에서 광무황제 독살설을 알리는 격문이 발견되었을 때 이를 발견한 일제 경찰도, 이를 추진했던 민족진영에서도 이 운동이 어떤 형태로 어디까지 파급되어 갈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네티즌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모이자는 제안을 했을 때, 청소년들이 청계광장에 모여 촛불문화제를 열었을 때, 이를 지켜보던 어느 누구도 이 운동이 어떤 형태로 어디까지 파급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누구도 싸움이 벌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사건은 터진다. 이런 사건은 아주 우연히, 우발적으로 터지기도 하지만 그 결과는 의도적인 운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3·1운동은 의도적인 운동으로 이어졌던 사건이다. 우리는 그 사건을 패배라 여기지만 1920, 30년대의 운동을 보면 그렇게 평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3·1운동으로 민중의 폭발적인 정치적 잠재력을 확인하게 된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이를 조직적인 운동으로 연결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1920년 4월 11일 창립한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로 노동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조직되었다. 소작농민들은 ‘불납동맹’, ‘아사동맹’, ‘소작권상실 걸인단’을 만들어 싸웠고 ‘소작인조합’, ‘농민조합’은 전통적인 자치공동체를 이용해 마을 지주들에게 기금을 걷고 민간의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동의 뿌리를 강화시키려 했다. 청년학생들은 민중을 대상으로 야학/여자야학과 강연회, 토론회 등을 열며 지역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지역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아나키즘, 맑스-레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강연회와 야학, 독서모임에서 대중과 더불어 논의되었다.
그리고 시위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은 것은 중앙의 지도부가 전국의 시위를 조직하지 않고 각 지역의 지식인들이 자기 동네에서 시위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그 전의 민란과 농민운동이 그러했듯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들불처럼 번져가는 시위는 쉽게 그 불길을 잡히지 않았고 민중의 삶이 그 운동과정과 방식에 반영되었다.
이처럼 3·1운동은 다양한 사회운동의 출현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3·1운동은 스스로를 거름으로 만들어 새로운 것의 불씨를 만드는 운동이었다. 이 점은 3·1운동의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3·1운동이 가장 극렬했던 곳은 예전에 동학농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 않은 곳이었다. 모를 돌아가며 심듯이 짓밟힌 곳은 잠시 숨을 죽였고 싹을 틔운 곳은 그 숨이 끊이지 않도록 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이 운동은 국가의 폭력에 ‘사상’과 ‘자기조직화’로 맞섰다.
3·1운동은 사회운동이 민중을 이끌려 하거나 민중이 사회운동을 배제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그러했기에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중들은 1920, 30, 40년대에도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그러니 3․1운동은 민중이라는 주체를 드러내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함석헌은 3․1운동 이전이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면, 그 이후는 “씨알의 역사다.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라고 말했다.
2009년을 마감하는 우리는 그동안 어떤 준비를 해왔고 어떤 운동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 2010년에 우리는 어떤 새로운 조직, 새로운 이념, 새로운 정치를 맞이할 수 있을까? 준비 없이 꽃은 피지 않는다.
참고한 책
이정은 지음, 『3․1독립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국학자료원, 2009).
박환 지음, 『경기지역 3․1 독립운동사』(선인, 2007)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소명출판, 2008)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엮음, 『3․1민족해방운동 연구: 3․1운동 70주년 기념논문집』(청년사, 1989)
조동걸 지음, 『일제하한국농민운동사』(한길사, 1983)
함석헌 지음, 『생활철학』(서광사, 1966)
함석헌 지음, 노명식 엮음, 『함석헌 다시 읽기』(인간과자연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