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사에 여러 비극이 있었지만 제주도 4․3만한 비극은 없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이 기념행사를 치르던 주민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 뒤 1년 동안 2,500여명의 주민이 감금되거나 고문을 당했고, 48년 4월 3일 무장대가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1954년 한라산 금족지역이 개방될 때까지 7여년 동안, 4․3사건 위원회 보고서를 따르면 제주도민의 약 10%인 2만 5천명에서 3만명이 희생당했다(그 중 86.1%가 군대나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저질러진 이 학살은 제주도민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 증언자는 누이를 산에 묻고 돌아오니 온가족이 죽어 있더라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2003년 10월 노무현 정부는 4․3에 대해 공식적으로 과거 권력의 잘못을 사과하며 상처를 달래는 듯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국방부는 교과서에서 4․3을 “남로당의 폭동지시에 의해 발생한 좌익세력의 반란”이라 규정할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 소설가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라는 작품을 ‘불온서적’으로 규정했다. 최근 벌어지는 많은 다른 일들처럼 역사의 시계바늘도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는 더 이상 역사이기를 포기하고 바늘을 멈춘 채 권력을 가진 자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역사만 노리개감이 되는 건 아니다. 제주도민들의 삶은 또다시 육지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2007년 국방부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규모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그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다.

얼마 전 강정마을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서귀포에서 제주도 올레길을 따라 걸으며 찾아간 그곳은 아름답고 고즈넉한 포구였다. 해군기지추진단이라 이름붙인 콘테이너 박스만 없다면 아주 평화로울 곳이었다.

그런 곳에, 소위 세계평화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는 해괴한 발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을까? 주민들의 반대를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해괴한 말은 핵을 사용하지 않는 대규모 재래식 폭탄을 뜻하는 ‘친환경 폭탄’처럼 기괴한 우리 현실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뒤섞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그런 말들이 우리를 속일 수는 없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 본토 상륙을 막는 최후의 전쟁기지로 사용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육지에서 건너온 우익단체의 발에 짓밟혔던 제주도는 지금 시험대에 서 있다. 한반도 최남단에 만들어지는 해군기지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리라 생각하는 무뇌아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해군기지의 건설은 외부의 정치상황, 정확히는 동북아나 국제정세가 또 다시 제주도민과 한반도 주민의 삶과 생명을 좌우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평택에서 그랬듯이 정부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것에도 호소할 길 없는 힘없는 주민들은 또다시 돈 몇 푼 쥐어든 채 쫓겨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사건이 그렇게 끝날까? 그 무엇도 자신들을 돕거나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언제나 순순히 물러나기만 할까?

최근 어느 정치인은 무더기 법안통과를 시도하며 ‘전쟁’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에게는 이 표현이 하나의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그 표현은 단지 수사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드러난 일그러진 현실의 진실인 셈이다. 정치가 극단으로 치닫을수록 비극은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방치된 세상은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그 끝으로 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호소할 곳 없는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전쟁을 막을 정치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잠들지 못하는 남도는 우리의 미래이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법치주의’(法治主義)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편은 법치주의의 원칙에 따라 불법 행위가 드러나면 엄하게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강하게 밝혀 왔다. 그리고 다른 편에서는 법의 잣대에 현실을 끼워 맞추는 형식적인 법적용이고 국민을 법의 적용대상으로만 보는 오만한 발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한 편이 법에 따른 집행만을 강조한다면, 다른 편은 누가 법을 정하고 해석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군사독재 시절의 터무니없는 말은 교과서에서 사라졌지만, 현실은 이런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12월, 한미FTA와 관련된 문건을 유출했다는 혐의를 받던 정창수 씨가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징역 9개월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구속되었다. 그리고 올 1월에는 삼성그룹의 ‘X파일’ 사건을 폭로했던 노회찬 씨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구형받았다.

응당 국민도 그 내용을 알아야 할 FTA관련 문건을, 그것도 공청회나 토론회에서 이미 드러난 내용의 문건을 유출한 것이 구속의 이유일 수 있을까? 그리고 언론사와 대기업 간부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전․현직 검찰간부에게 떡값을 준 엄청난 비리를 폭로한 것이 처벌의 대상일까?

공공의 이익을 심하게 해치는 사건들을 폭로해서 사회적인 쟁점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잇달아 징역형을 선고받고 있다. 물론 법이 정한 과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이 없었다면 그런 중요한 사안들이 논의조차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행동은 사회에 이로웠다. 더구나 정치과정이 그 내용을 감추며 국민을 속이려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법부가 더러운 거래와 연관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문제는 법치가 아니라 ‘법의 권위’인 셈이다.

그런데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검찰과 법원은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법을 앞세운 칼날을 겨누고 있다. 검찰은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람을 무리하게 구속해서 수사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일 검찰은 조선․중앙․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말자는 운동을 이끈 혐의로 기소된 누리꾼 16명에게 업무방해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구형했다. 시민이나 소비자로서 자기 의견을 드러내고 운동을 펼친 것이 처벌의 대상이라니, ‘소비자운동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외친 랄프 네이더는 미국에 태어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할 일이다.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판결들이 권력의 영향을 받아왔다는 점이다. 한국의 사법부는 항상 ‘소신’을 강조해 왔지만, 그 소신은 시민이 아니라 권력이나 자본으로 기울어졌다. 힘없고 약한 시민들이 냉혹한 법의 심판을 받았다면,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은 국가나 경제에 기여해 왔다는 핑계로 후한 면죄부를 받아 왔다(영화 <공공의 적>의 강철중 검사처럼 권력에 맞서는 법관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일 뿐이다).

법은 강자와 약자가 같은 울타리 내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합의이다. 그런 법이 제 역할을 못하니 힘을 가진 자들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은 법이 무서워 자꾸 피하려 한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하고 조롱해서 그들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이에 약자들은 강자에게 분노와 복수심을 품으며 법을 무시한다. 각자가 능력껏 자기 삶을 알아서 지켜야 하는 곳에서 법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법치주의만을 강조하는 것은 법의 권위를 더 빨리 파괴할 뿐이다. 법을 무너뜨리는 것은 시민들이 아니라 바로 검찰과 법원이니, 자기 집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다. 외부의 혼란이 아니라 내부의 부조리가 법과 법치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법치주의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바로 정의와 평등이다. 헌법이 보장하듯이 법의 권위가 시민으로부터 나오고 법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할 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법을 지킬 것이다. 법의 뿌리를 지키려는 법관들의 소신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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