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이명박 대통령은 빡빡한 미국방문 일정에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만나 한미FTA 등 현안을 논의했다 한다. 연방국가인 미국에서 상원의원도 아닌 주지사를 만나 왜 한미FTA와 같은 국가간 협정을 논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미국경제가 먼저 살아나야 다른 나라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미국경제, 그 안에서 비중이 큰 캘리포니아 경제가 살아나는 것이 중요하다”며 미국경제를 걱정하는 발언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요즘처럼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도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경제까지 걱정해주니 그 따뜻한 연대감에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눈물을 흘렸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방문과 대화내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런 깜짝 이벤트는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취향인 듯하다.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고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어쨌거나 아놀드를 만나서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국내로 돌아오자마자 결연한 각오를 밝혔다. 지난 27일 “일시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목숨을 던질 그런 자세로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겠다고 말하지 않나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는 공자님 말씀을 인용하며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던져라”는 자세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28일에는 “먼 훗날 몸을 던져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한층 더 터프한 모습으로 돌아온 우리의 대통령, 우리는 박수치며 환영해야 할까?

무엇을 결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터미네이터의 장비는 곧 장만할 태세이다. 정부가 이번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에 따르면, 경찰청은 집회대응 예산으로 48억 5,400만원을 신청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만만치 않다. 야간 조명차 2대, 물대포 3대, 물보급차 4대, 차벽트럭 17대, 신형보호복 2,106벌, 무선망 수신기 3,606개, 중형소화기 255개, 소형소화기 2,106개, 첨단채증장치 3세트 등이다. 예산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업그레이드된 터미네이터 군단을 곧 거리에서 만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가 터미네이터식의 전쟁일 수 없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사회에서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고, 그래서 정치의 세계는 다양한 의견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보장해야 한다. 이상적인 정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현실 정치는 여러 협상과 타협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난 너만 구하면 된다’는 터미네이터식 발상은 정치의 세계가 구성되는 원리인 견제와 균형, 타협과 협상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영화를 보면 로봇조차도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은?).

목숨을 바쳐 일을 하겠다는 우리 대통령의 자세는 이번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가 화해와 통합을 강조한 것과 사뭇 대조를 이룬다. 대체 어떤 목표를 세웠길래 정치의 기본을 무시하고 온갖 첨단 장비로 무장하며 목숨을 바쳐 그것을 추진하겠다는 걸까? 아직 모든 게 분명하지 않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입장을 바꾸는 정부인지라 뭘 하겠다는 건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 대통령은 친절하게 라디오로 자신의 입장을 직접 밝히는 편이니 얘기를 들어보자. 귀국한 뒤의 첫 라디오연설 주제는 청년실업이었다. 그러면 청년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한 목숨 바쳐 일하겠다는 걸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자신의 경험담까지 들며 많은 얘기를 했지만 건질 만한 얘기는 이 정도인 듯하다. 세상에 경험만큼 소중한 스승은 없으니 비정규직이든, 임시직이든 무조건 취직해서 노조가 있건 없건 찍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라 일하라(월급은 제때 받으려나?). 이율곡 선생을 본받아 청년리더 10만 명을 양성하기 위해 7,500억원의 예산을 특별히 편성하겠으니 불만을 가지지 말라(1인당 750만원씩 나누나?). 그래도 국내에 일자리가 없으면 해외로 10만 명을 파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4대 보험은 되려나?)는 얘기이다.

허나 어떡하나? 실업자통계에 잡히지 않는 취업준비생까지 합치면 청년실업자는 수는 대략 15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10만을 양성하고 10만을 파견해도 청년실업율을 낮추기엔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대통령은 정말 목숨을 바칠 만한 필생의 역작을 슬며시 다시 꺼내고 있다. “4대 강 정비사업이면 어떻고, 운하면 어떠냐”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4대강을 정비하면 그것이 곧 대운하가 아니겠는가.

터미네이터를 좋아하는 명바기네이터가 돌아왔다. 그것도 예전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서 촛불시위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한반도의 생태계는 다시 한번 멸망의 날을 맞이하고 있다.



잘못된 권력에 시민들이 맞서 싸우지 않았다면 지금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우리의 신념과 자유를 짓밟을까 두려워하지만,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면 그들 역시 두 다리 뻗고 잠을 청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정치의 법칙 때문이다. 즉 제 아무리 강한 권력자라도 형식적으로는 국민의 ‘동의’를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도 어느 순간이 되면 ‘국민’ 또는 ‘시민’을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시켜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시민들은 왜 저항하는가?”라는 물음은 정치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언제나 권력의 부조리에 맞서 자유나 평등, 정의와 같은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라는 물음 역시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엄청난 권력에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지나친 권력이 있는 곳엔 언제나 시민의 저항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 역사를 살펴봐도 시민들은 언제나 저항해 왔다. 우리 헌법이 지목하는 대표적인 저항인 3․1운동과 4․19민주이념은 누가 어떻게 시작한 사건인가? 가장 억압적인 제국주의 지배나 잔혹한 독재를 경험하면서도 시민들은 각자 자기 삶의 터전에서 자발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동학농민운동이나 각종 민란, 제주도와 광주, 마산, 부산 등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저항들도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에 맞섰다는 점을 증명한다. 권력의 비리와 억압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시민들은 저항했다.

따라서 우리는 “권력이 어떻게 시민의 저항을 가로막고 그 의미를 왜곡시켜 왔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물어야 저항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다.

 

시민 없는 시민참여제도

 

한때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동안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에서 전문가나 활동가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들 역시 시민이라는 점에서 이 말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런 말을 열심히 퍼트려서 시민들이 시민사회운동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의 크기를 계속 키웠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공무원, 법관들은,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재벌과 중앙언론들은 평범한 시민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정보와 힘을 가진 채 시민들을 지배해 왔다. 관존민비(官尊民卑)라는 거짓된 상식을 널리 퍼트리면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거나 그 힘을 줄이려는 시도들을 억눌러 왔다.

시민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은 그런 시도를 잠재울 ‘시민 없는 시민참여제도’를 만들었다. 동(洞)에서 구(區), 시(市), 도(道)까지 설치된 각종 자문위원회들은 권력의 일방적인 정책결정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래서 소위 민의(民意)를 수렴한다는 절차들은 언제나 그들을 무조건 지지하는 배후세력이 되어 왔다.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말에 복종하는 자들만을 시민으로 인정하고 저항하는 자들을 시민이 아닌 폭도나 무지한 군중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化爲枳)는 말처럼, 좋은 제도들도 한국으로 건너오면 하나같이 시민참여를 가로막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도 ‘소리 소문 없이’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직접민주주의제도들이 도입되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여전히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신화’로만 얘기되고 있지만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서서히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주민발의, 주민소환, 주민투표처럼 널리 알려진 제도만이 아니라 주민참여예산제도나 시민감사옴부즈만같은 제도들도 이미 한국에 도입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은 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함께하는시민행동>의 조사에 따르면, 2002년 7월부터 2006년 6월까지 5년 동안 시민 138만 명이 총 123건의 조례를 발의했지만 그 중 원안대로 의결된 것은 12건 뿐이고, 54건은 수정된 채 의결되었다. 주민투표제도는 법 제정 이후 단 3건만 실시되었고, 3건 모두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추진한 관주도 주민투표였다. 주민소환제도는 여러 지역에서 추진했지만 실제로 소환한 곳은 경기도 하남시 뿐이다.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이라던 참여예산제도 역시 토호들의 민원청탁용 창구로 전락해 버렸다.

사실상 한국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하거나 힘을 가진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제도를 활용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들 뿐 아니라 설령 활용하더라도 그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시의 경우 주민발의를 하려면 약 14만 명의 서명이 필요하고, 서울시장을 소환하려면 약 80만 명의 서명이, 주민투표를 신청하려면 약 40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그냥 서명을 받으면 되는 게 아니라 서울시의 경우 선관위에 미리 신고한 사람들이 주민발의나 주민투표의 경우 90일, 주민소환은 120일 이내에 서명을 받아야 한다. 시보다 작은 구로 내려가도 용산참사를 빚었던 용산구의 경우, 주민발의는 90일 동안 약 4천 6백 명, 주민투표는 약 1만 7천 명, 주민소환은 약 2만 8천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돈을 주고 사람들을 사서 서명을 받지 않는다면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중앙정부는 주민발의나 주민투표, 주민소환의 내용을 정해서 시민의 참여를 차단한다. 국가의 권한이나 사무에 속하는 사항, 법률에 위반되거나 행정기구에 관한 사항, 자치단체의 예산과 관련된 내용들은 아예 투표나 발의의 대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한국의 시민참여제도는 하나같이 토호들을 위한 참여제도이거나 허수아비/꼭두각시 참여제도인 셈이다. 이렇게 힘을 가진 자들은 이런 허울뿐인 제도로 시민들의 참여의지를 꺾고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변하지 않으니 자기 몸이나 잘 간수하라는 생각을 심어 왔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입을 막으며 언제나 자신들을 통해서만 얘기하라고 강요했다.

흥미로운 점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미 자신의 발언권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직접민주주의를 싫어하며 자신을 통해서만 말할 것을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2008년을 밝혔던 촛불집회는 바로 이런 잘못된 상식에 도전했다.

 

촛불이 밝힌 시민저항의 가능성

 

보통 온라인에서의 다양한 소통이 오프라인의 활동으로 직접 연결되기는 쉽지 않다. 근본적인 면을 따지면 그것은 ‘속도의 차이’ 때문이다. 온라인에서의 정보와 논의는 망을 타고 빠른 속도로 퍼지지만 현실에서의 삶은 삶의 다양한 조건들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다. 마우스를 클릭하기만 하면 되는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의 실천은 항상 참여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오히려 시민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고 조금씩 퍼지고 있다. 경제가 나빠지면 시민들의 마음이 온통 4대강 정비사업이나 대운하로 몰릴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상과 달리, 시민들의 관심은 다양한 방면으로 퍼지고 있다(사실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고 난 뒤 그런 암울한 예상을 뒤엎은 것도 촛불문화제였다).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발언권을 가진 엘리트들은 시민들의 저항을 낮게 평가하지만, 시민들의 움직임은 그런 평가를 비웃듯이 활발해지고 있다.

촛불집회 이후 시민저항이 다양한 형태로 이미 퍼지고 있다. 비리나 부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사람들이 촛불을 손에 들고 나온다. 그러면서 촛불이 일종의 저항의 상징으로 규정되었고, 촛불을 드는 행위 자체가 저항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었다(대표적인 예가 촛불산책이다). 그리고 이런 저항은 한동안 한국사회에서 자취를 감췄던 ‘참여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작년 연말을 달궜던 명동 무한도전×2 ‘널 기다릴께’ 역시 시민들의 뛰어난 아이디어가 빛을 발했던 저항이다. 매일 2배의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생각은 경찰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추운 거리를 밝히는 횃불이 되었다. 그리고 ‘반쥐원정대’나 ‘보신각 촛불타종’ 역시 시민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드러낸 사건들이다. 기륭전자와 KBS, YTN, 여의도 등을 누비는 촛불의 발걸음은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을 예고한다.

왜 시민들은 이런 어려움을 몸소 겪으려 할까? 자신이 거리로 나서도 세상을 전혀 바꿀 수 없으리라 믿었다면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시민들은 권력을 쥔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진리, 시민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정부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열심히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을 대변한다는 세력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거리에 나서야 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더구나 시민들은 저항을 통해 권력의 억압성을 몸으로 느끼며 그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던질 즐거움과 여유도 만들어가고 있다. 권력을 조롱하고 비웃는 시민들의 저항은 기성 권위와 질서를 파괴하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에 지상의 그 어떤 권위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이 터져 나온 순간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진실이 되어 인터넷에서 무수히 복제되어 전파된다. 그렇게 시민의 웃음으로 폭발한 촛불의 힘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저항카페와 커뮤니티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자신의 취미가 이 정부와 쉽게 어울릴 수 없음을 여러 동호회들도 자각하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화면이나 텔레비전 앞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거리로 나가야 할 이유를 찾으며 시민으로 변하고 있다. 이미 진실이라는 바이러스는 온/오프를 넘나들며 사람들을 감염시키며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다만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그리고 경찰이나 검찰의 탄압을 받더라도 자신의 삶을 심하게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저항을 펼칠 방법을 시민들은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저항이 단지 권력의 나쁜 면을 폭로하거나 다그칠 뿐 아니라 우리의 공적인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 역시 고민한다. 그렇게 고민하고 스스로를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며 시민들은 다음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저항을 북돋우며 손을 맞잡을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의 시민들이 저항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세계를 보수적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저항의 흐름은 끊이지 않았다.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으려는 새로운 스파르타쿠스, 새로운 만적과 망이, 망소이들이 반란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시작해 지금 유럽 전역을 달구고 있는 시민들의 저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 군부에 맞섰던 70년대의 역사를 딛고 ‘700유로 세대’라 불리는 그리스 청년들과 시민들은 경찰과 정부에 맞서 저항을 벌이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열악한 교육환경,경제정책의 실패, 경찰의 만행 등을 비판하는 시위가 매일 이어지고 있고,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고 농민들이 국경을 봉쇄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시위는 경제위기를 맞이해 전 유럽으로 퍼지고 있다. 누가 이 저항의 불길을 다스릴 수 있을까?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의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2008)이나 에이프릴 카터(April Carter)의 『직접행동』(교양인, 2007)을 보면 인류가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지가 잘 묘사되어 있다. 굳이 두 사람의 말을 인용하자면, 진은 “시민들이 복종하지 않을 때,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거부할 때, 군인들이 총을 들지 않을 때, 기존 권력은 힘을 잃고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확신을 가지고 얘기한다. 초강대국 미국 내에서 미국에 저항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즉 백인-남성-부자에 맞서는 노동계급, 빈민, 흑인, 여성, 원주민들의 불복종과 저항들이 이런 힘을 만들고 있다.

카터 역시 대의정치에서 소외된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운동, 석유회사와 같은 다국적기업을 반대하는 불매운동이나 저항운동,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는 댐건설을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운동, 최빈국을 위해 외채탕감을 주장하는 직접행동, 다자간투자협정을 반대하는 운동, 세계무역기구(WTO)를 반대하는 운동, 토지를 요구하는 농민들의 직접행동,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원주민 공동체, 농민, 학생, 노동자, 실업자의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운동들을 얘기한다. 이런 운동을 통해 시민들은 역량을 강화하는 효과(empowering effect), 즉 “공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냄으로써 자부심과 존엄함을 얻을 수 있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며, 타인과 연대감을 고양”시키는 경험을 얻게 된다. 이렇게 담금질을 경험하며 시민은 타인의 고통에도 귀를 기울이는 세계시민으로 거듭난다.

물론 자연발생적인 시민들의 운동은 흐름을 형성할 뿐 그 힘을 집중시키지 못한다. 이미 조직화된 정당이나 단체들이 스스로를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시민들의 힘을 증가시키고 그 힘에 일정한 방향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세력들이 시민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변화의 성과를 시민들의 것으로 돌릴 때에만 그런 어울림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권력은 결코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은 시민을 이길 수 없고 속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를 속이기에 거짓을 줄이려면 정당이나 단체의 내부구조나 성격 자체가 분권화되고 투명해야 한다. 그런 자기변화 없이 시민과 어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런 점에서 반이명박 연대는 또 다른 거짓말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시민들은 이미 존재하는 방식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미 만들어진 참여제도를 활용하는 법도 그 중 하나이다. 4월에 있을 재보선이나 2010년의 지방선거를 활용하거나 기득권층의 독점물로 전락한 참여제도들을 시민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제도는 참여를 감싸는 껍데기일 뿐이다. 제 아무리 훌륭한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제도를 활용하려는 능동적인 참여의지와 그런 의지를 자극하는 정치문화가 없다면 그 제도는 쓸모 없는 것이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를 다룬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리북, 2009)에서 우리는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나누고 시민들의 통제를 받는 제도, 시민권을 실현하려는 시민들의 의지, 민회를 통한 참여의 전통과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먼 길일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역사의 경험은 저항의 불꽃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 땅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서로 나누며 함께 결정해야 한다. 시민저항의 싹은 자급(自給)과 자치(自治), 자결(自決)의 기반을 마련할 때 활짝 피어날 수 있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그런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시민저항은 언제나 권력의 거짓말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 조급하지 말고 기반을 튼튼히 다질 때이다.



한국의 현대사에 여러 비극이 있었지만 제주도 4․3만한 비극은 없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이 기념행사를 치르던 주민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 뒤 1년 동안 2,500여명의 주민이 감금되거나 고문을 당했고, 48년 4월 3일 무장대가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1954년 한라산 금족지역이 개방될 때까지 7여년 동안, 4․3사건 위원회 보고서를 따르면 제주도민의 약 10%인 2만 5천명에서 3만명이 희생당했다(그 중 86.1%가 군대나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저질러진 이 학살은 제주도민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 증언자는 누이를 산에 묻고 돌아오니 온가족이 죽어 있더라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2003년 10월 노무현 정부는 4․3에 대해 공식적으로 과거 권력의 잘못을 사과하며 상처를 달래는 듯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국방부는 교과서에서 4․3을 “남로당의 폭동지시에 의해 발생한 좌익세력의 반란”이라 규정할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 소설가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라는 작품을 ‘불온서적’으로 규정했다. 최근 벌어지는 많은 다른 일들처럼 역사의 시계바늘도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는 더 이상 역사이기를 포기하고 바늘을 멈춘 채 권력을 가진 자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역사만 노리개감이 되는 건 아니다. 제주도민들의 삶은 또다시 육지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2007년 국방부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규모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그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다.

얼마 전 강정마을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서귀포에서 제주도 올레길을 따라 걸으며 찾아간 그곳은 아름답고 고즈넉한 포구였다. 해군기지추진단이라 이름붙인 콘테이너 박스만 없다면 아주 평화로울 곳이었다.

그런 곳에, 소위 세계평화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는 해괴한 발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을까? 주민들의 반대를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해괴한 말은 핵을 사용하지 않는 대규모 재래식 폭탄을 뜻하는 ‘친환경 폭탄’처럼 기괴한 우리 현실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뒤섞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그런 말들이 우리를 속일 수는 없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 본토 상륙을 막는 최후의 전쟁기지로 사용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육지에서 건너온 우익단체의 발에 짓밟혔던 제주도는 지금 시험대에 서 있다. 한반도 최남단에 만들어지는 해군기지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리라 생각하는 무뇌아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해군기지의 건설은 외부의 정치상황, 정확히는 동북아나 국제정세가 또 다시 제주도민과 한반도 주민의 삶과 생명을 좌우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평택에서 그랬듯이 정부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것에도 호소할 길 없는 힘없는 주민들은 또다시 돈 몇 푼 쥐어든 채 쫓겨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사건이 그렇게 끝날까? 그 무엇도 자신들을 돕거나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언제나 순순히 물러나기만 할까?

최근 어느 정치인은 무더기 법안통과를 시도하며 ‘전쟁’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에게는 이 표현이 하나의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그 표현은 단지 수사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드러난 일그러진 현실의 진실인 셈이다. 정치가 극단으로 치닫을수록 비극은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방치된 세상은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그 끝으로 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호소할 곳 없는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전쟁을 막을 정치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잠들지 못하는 남도는 우리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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