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 <배틀로얄 1, 2>은 실업자 1천만 명, 등교거부학생 80만 명이라는 일본의 가까운 미래를 다룬다. 일본정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학교의 한 반의 학생들을 무작위로 뽑아서 무인도에 가두고 3일 동안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게 하는 ‘배틀로얄법’을 선포한다. 이 법의 목적은 한 가지!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경쟁’에 복종하도록 청소년들을 가르쳐서 ‘가치 있는 어른’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무인도에서 탈출한 청소년들은 <와일드 세븐>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쌍둥이 빌딩을 폭파하며 모든 ‘어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는 총이 아니라 미디어와 화폐를 들고 저항하는 일본의 청소년들을 다룬다. 더 이상 어른들에게 미래를 맡기길 거부하는 중학생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인터넷과 미디어를 기반으로 기업을 만들고 호텔을 인수해 자신들의 직업훈련소를 만들고 어른들을 고용한다. 어른들의 세상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청소년들이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간다.

 

이 두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바는 미래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점과 기성세대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렵고, 과거의 지식이 쓸모없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야 할까? 분명한 건 혼자 살아남는다는 게 이미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같이 살아남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꿈꾼다. 영화와 소설에서도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조직화와 공동체이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뭔가 과거의 공동체와 다른 느낌을 준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에게 공동체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이 공동체는 과거의 공동체와 무엇이 다를까?


공동체는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일까?

 

 

프랑스의 사상가 장 뤽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공동체에 대한 사유나 욕망은 근대적 경험에 나타난 가혹한 현실에 응답하기 위해 뒤늦게 창조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근대로 접어들며 공동체가 사라졌다는 기독교나 휴머니즘의 안타까움은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던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공동체라고 믿는 것은 부족이나 제국의 다른 형태였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낭시에 따르면, 공동체의 이상이라 불리는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one for all, all for one)’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타인들의 공동체”이고, 일시적으로 서로 일체감을 느끼는 상태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런 상태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는 사회는 없다.

 

공동체는 이미 규정된 것을 실현하는 관계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관계이고, 사회 바깥에서 일방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무위(無爲)의 장소이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공동체라 불리지 않아도 사랑하고 우정을 맺으며 그런 공동의 관계를 사는 삶이 훨씬 더 중요한 장이다. 낭시의 논리를 따르면, 무엇을 공동체라 부를 것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때로는 위험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위한 공동체,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라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공동체가 아닐 뿐 아니라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는 타자들을 위협하거나 지배하려는 위험한 도구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에서 “흔히 공통언어나 공통개념형식 같은 공통적인 것을 공유하고 국가나 도시나 제도같은 공통적인 것을 공립하는 다수의 개인들로 구성되는 것”이라 여겨지는 ‘합리적 공동체’가 타자를 배격한다고 비판한다. 타자의 얼굴을 마주보길 거부하며 “세계의 잡음을 제거하는 과정은 합리주의자가 되는 과정”이다. 주변의 무수한 웅성거림이야말로 우리에게 소통이 필요한 이유이고, 우리와 다르다며 배척한 사람들이야말로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인데, 우리는 그 무거운 이유를 대면하지 않고 피하려 한다.

 

우리 삶에 필요한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방인들, 그들과 우리가 마주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만 공동체가 출현할 수 있다. 타자를 마주할 때에만 우리는 공동체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링기스는 우리에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들과 동반해야 하는 근본적인 의무”가 있다고 얘기한다. “병원들에서든 빈민촌들에서든 외롭게 홀로 죽어가는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는 급속히 자멸하는 사회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는 ‘공통적인 것을 공유하고 공립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을까?”라고 링기스는 묻는다. 직장에서 쫓겨난 노동자, 고향에서 내쫓긴 농민, 경쟁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죽어가는 한국사회에서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 두 서양 사상가의 철학은 우리에게 아주 낯설다.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집단적이고 비슷한 느낌을 주는 집단인데, 이들은 그것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그건 공동체의 가면을 쓴 다른 무엇이라는 거다. 이런 해석을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봐야 할까? 농업사회와 산업사회의 차이라고 볼 수는 있으나 동서양의 차이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와 우주의 전일성(全一性)은 이런 사상과 연결되기도 한다.

 

문제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과 우리의 실제 삶이 매우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TV드라마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그리워 할 때도 있지만 실제 삶은 CCTV와 출입증으로 도배된 아파트촌에서 이루어진다. 마을공동체, 마을기업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사업으로 홍보되는 세상이지만, 바로 그 점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공동체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점을 반증한다.

 

자연스러운 공동체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를 상상하고 있다. 공동체의 진위(眞僞) 여부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공동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말 함께 살려는 준비를, 타자들을 환대할 준비를 하고 있나?

 

 


문턱있는 공동체의 번성, 환대하는 공동체의 소멸

 

 

안락하고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주로 그 공동체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유지된다는 역설! 공동체에 사는 사람과 공동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구분된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에서 현대의 공동체란 “그 내부의 모습보다는 울타리가 빈틈없이 경계된다는 사실로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한다. 문턱이 만들어지고 울타리가 세워진 곳에서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공동체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은 울타리를 세우고 경비원들을 고용한다.

 

“끊임없이 예측을 불허하며 혼란을 가중시키는 사나운 바다에서 길을 잃은 선원들에게 안전한 항구, 꿈의 종착지를 약속”하는 공동체는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림을 아름답게 그릴수록 그 상상은 공동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어떠한 잡음이나 혼란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위험에 처한 몸 주변에 있는 분명한 위험들을 거부하고 밀쳐내고 싶은 욕구는 ‘외부’가 비슷한 것이 되도록, 외부를 거의 ‘비슷’하거나 일치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 ‘저 바깥’을 ‘이 안’과 비슷한 형태로 다시 만들고 싶은 욕구로” 번진다. 이 욕구가 강렬해질수록 공동체의 문턱은 높아진다.

 

그리고 바우만이 지적하는 또 하나의 문제! 매일매일 즐거운 축제가 열리는 공동체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공적인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잃고 살만하지 않은 세상을 살만한 것으로 위안하는, 그래서 실제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 수동적인 삶을 정당화시킨다. 외부에 관심을 두지 않고 내부의 즐거움만 추구하는 공동체는 세계의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외려 그것을 심화시킨다.

 

 

이렇게 외부와 담을 쌓고 지내려는 공동체들이 있는 반면, 외부인들을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공동체도 있었다. 도로시 데이는 노숙자들이 맘 편히 먹고 쉴 수 있는 ‘환대의 집’을 미국 곳곳에 세웠다. 도로시 데이에 관한 평전 《환대하는 삶》을 쓴 로버트 콜스는 환대의 집을 “복지국가라는 익명의 관료적 체계와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즉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방식으로 자선행위가 이루어지고 인정되는 곳”이라 설명한다. 환대의 집은 “창고 하나와 아파트 하나를 빌리고, 빵과 버터를 사고 커피를 만들고 수프를 준비하고 노숙자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옷가지를 구해 주고, 가능하다면 잠잘 곳을 마련해 주고, 가장 중요하게는 어떻게든 그들에게 우정과 애정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들과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 비전을 현실화시키는 일을 함께 시작했다.” 이런 환대의 집이야말로 낭시나 링기스가 말하는 공동체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곳에는 같이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동등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가 환대의 집에만 관심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가톨릭노동자신문을 만들었고 전쟁을 반대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도로시 데이는 “누군가는 거대 기업과 싸우러 나서야 하고, 누군가는 정부를 압박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만들어야 하고, 또 누군가는 일하는 사람을 옹호해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워싱턴에는,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권력에는 등 돌린 채 공동체주의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는 건 바보같은 일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서로 동등하게 마주보려면 우리는 그런 마주침을 방해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마주보며 함께 살려고 결심할 때 우리는 공동체를 ‘경험’한다.

 

문제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늘어나는 반면 환대하는 공동체는 계속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홀로 고립되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고립된 공동체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공동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 아니라면, 안에만 신경을 쏟지 말고 밖을 주시해야 한다. 그렇게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 섞이면서 공동체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위축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하며 존재를 이어간다.

 

 


공동체는 가족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바는 공동체를 가족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처럼 국가와 학교, 가정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건 속성이 다른 모임을 하나의 질서 속에 통합하려는 시도이고, 우리가 지향할 공동체의 모습은 아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공동체를 표방하는 곳들은 지나칠 정도로 가족 중심이다. 공동체를 만들 필요가 주로 보육이나 교육에서 생긴다는 점이 그런 특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한국의 전통 공동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묘사되듯이 공동체는 세상 만물을 품는 장소였다. 그리고 권정생의 작품에서 묘사되는 공동체는 가족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이 해체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가족을 그리워하긴 하지만 그 가족들로만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고, 낯설고 찢어진 관계의 사람들이 서로 기대어 생활하는 곳이 바로 공동체이다. 가족의 사랑을 강요할 수도, 친구와의 우정을 조작할 수도 없는 곳이 공동체이다.

 

물론 가족이라 불리지 않던 사람들을 관계망 속으로 끌어들이고 더불어 산다면, 송해성 감독의 영화 <고령화 가족>처럼 ‘새로운 가족’이 구성되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곳은 공동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가족처럼 얽혀 살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공동체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없애줄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 자체가 대안이라기보다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어떤 삶을 꿈꾸는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려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정책의 효과는 짧은 시간에 드러날 수 없다. 불과 2년밖에 안된 정책을 가지고 그 실제 효과를 따지는 건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효과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없는 상황에서 효과를 예측해서 비판하는 것만큼 잘못된 비판은 없다. 기존의 정책이 보완되고 수정된 것이라면 그 방향이라도 예측할 수 있겠지만 새로 시작된 정책이 어디로 어떻게 갈지를 미리 예측하는 건 예언의 영역이지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약간이나마 의지할 수 있는 틀은 ‘경로의존성’이다. 과거에 어떤 정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보면 비슷한 정책이 어디로 갈지를 알 수 있다. 행정조직의 경우, 특히 그 관행이 잘 바뀌지 않는 한국의 행정조직 경우에는 그 방향이 잘 보인다. 민관협력, 거버넌스를 아무리 얘기해도 잘 바뀌지 않는 것은 행정구조와 관행, 문화이다.

 

그런 점에서 혁신정책의 방향은 민이 아니라 관이어야 한다. 그런데 서울시의 혁신정책은 대부분 관이 아니라 민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솔직히 혁신정책이라 부르기 어렵고 시민운동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관의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이라 평가할 수 있다. 시민사회와 행정이 함께 변해야 하겠지만 ‘취약한 시민사회와 과도한 행정’이라는 현실을 고려하면 행정의 혁신이 두드러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발제문은 크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지려 한다. 첫째, 혁신이 어느 한 편의 과제인가? 함께 변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변해야 한다는 걸까? 둘째, 변화의 구체적인 힘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까? 개인의 자율성과 함께 사회의 공공성(公共性)을 강화시킬 전략은 어떻게 마련될 수 있을까?



1. 서울시 마을공동체 정책: 의도는 좋다고 하나 방법이...


<서울특별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의 유창복 씨는 《마을공동체 1년 시민토론회 자료집》에 실은 “서울시 마을만들기 사업과 거버넌스의 과제”라는 글에서 이런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 사업을 하며 가장 염두에 둔 문제가 “칸막이행정, 형식적 거버넌스, 조급한 성과주의”라고 지적했다. 타당한 지적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업은 실국이 담당하며, 마을공동체 담당관실과 마을지원센터가 정책조율 기능을 담당한다. 공동체위원회가 실질적인 심의기구로서 실국에 대한 지배력을 가진다”는 거버넌스 원칙을 세웠고 ‘맞춤형 지원’과 ‘당사자주의와 보충성 원리’를 사업의 원칙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민과 관의 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상호협업의 경험과 소통의 경험”을 쌓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아울러 “마을 차원의 사회적 자본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마을 공공성, 주민들의 관계망, 사업의 주민주도성과 자립성, 장소성 등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합리적인 측정과 평가기준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런 노력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발제문에 따르면 그럼에도 서울시의 칸막이 행정을 넘어서기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마을사업이나 주민이 시의 재정지원을 받는 “보조사업”이나 “보조사업자”가 아니라 “시의 주인으로서 시정에 참여하는 주체”임을 인정하라는 주장은 증명의 주장보다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는 주장처럼 들린다. 민관협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지난 1년 동안 쌓은 경험을 논하는데 사업에 관한 부분이 매우 구체적이나 ‘구조’를 논하는 부분은 매우 추상적이다. 사업의 기획과 평가 과정에서 민간의 주도성이 살아나고 행정의 권력이 이양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발제문은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좋은 물음을 만들고 그 질문을 공유하는 과정에서만 좋은 고민과 해답들이 나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질문은 아니고 앞서 《마을공동체 1년 시민토론회 자료집》에 실린 구자인 연구소장의 “마을현장 거버넌스와 중간지원체계”, 최순옥 위원의 “마을공동체 사업 1년 성과와 발전방향”, 박현찬 연구원의 “마을공동체 사업, 성과와 비판, 그리고 발전과제”, 신원철 의원의 “마을사업 예산지원과 주민 자생력 제고”를 참고했고, 조정래 입법담당관의 “서울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 추진방향 연구”(《입법담당관 정책보고서 제 3호》), 김은희 <도시연대> 사무처장의 “서울특별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에 대한 질문들”(2012년 4월 6일 간담회 발제문), 양재섭, 김인희 연구원의 “서울의 마을단위계획 운영실태와 자치구 역할 개선방향연구”(《서울연구원 보고서》)를 참고했다.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정책과 관련해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첫째, 서울시의 행정은 마을공동체 정책을 통해 어떤 변화를 경험했나? 이 부분은 측정할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다만 구조적인 면을 한번 점검할 수 있다. 서울시의 조직도를 보자. 혁신을 담당하기 위해 서울시장 밑에 서울혁신기획관이 만들어졌다.

 

구조적으로 서울혁신기획관이 시장 직속으로 서울시의 행정을 관장하는 지위에 있다. 이런 구조가 혁신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직속의 행정조직이 신설된 것일 뿐 이 자체가 조직의 혁신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구조가 시민사회로 행정의 권한이 이전되었음을 증명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별도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칸막이행정을 무너뜨릴 계기가 되지도 못한다. 다른 나라의 행정혁신모델은 대부분 시민사회로 상당한 권한과 예산을 넘겨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행정구조의 개편만으로는 그 혁신성을 증명하기 어렵다.


둘째,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의 역할분담은 잘 되고 있나? 여러 자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는 광역자치단체가 실제 사업을 하지 말고 기초자치단체의 시스템 개선을 정책적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광역자치단체가 신규사업을 만드는 걸 자제하고 기존 사업의 연계를 중시하며 업무의 질을 높여야 한다. 예를 들어 양재섭, 김인희 연구원은 서울시 추진과 자치구 추진의 장단점을 다음과 같은 표로 정리한다.

구분

서울시 주도형

자치구 주도형

장단점

▶충분한 계획 수립 역량으로 안정화된 사업추진 가능

▶충분한 예산의 운용 가능

▶객관적인 기준으로 공정한 평가와 모니터링 가능

▷기본계획과 실시설계의 주체 변경으로 인한 단절 발생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여러 사업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기에는 한계

▶지역 이해를 통한 장소중심의 통합적 정책시행 가능

▶창구의 단일화를 통해 주민과 밀착되고 피드백이 가능한 소통 가능

▶지역과 밀착하여 주민과 지속적 소통으로 사후관리 용이

▷전문부서 마련의 어려움과 절대적인 담당 인력의 부족

▷자치구 자체적 예산 마련에 한계

그런데 현재의 서울시 정책에서 이런 역할분담을 확인하기 어렵다. 역할분담이 없지는 않지만 광역자치단체가 기획하고 자치구가 실행하는 식의 역할분담이 사라지지 않았다.


셋째, 행정의 조급성은 정말 사라졌나? 사업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질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나? 유창복 센터장은 마을공동체사업이 ‘마을지향행정’을 만들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처럼 분명 일정한 변화는 있었다. 마을거버넌스를 만들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거버넌스의 마지막 단계는 평가가 아니다. 평가가 다시 기획으로 환류(feedback)되어야 거버넌스이고, 그 환류과정에서 민간의 주도성이 살아나야 거버넌스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거버넌스가 구현되고 있을까? 예를 들어, “마을의 역사와 경험을 공유하는 마을, 마음껏 상상하고 함께 꿈꾸는 마을, 서로가 서로에게 들려주고 듣는” 자리라는 00마을이야기의 2012년 지원사업 보고서 양식을 보자. 참여회원수, 축제참여자수가 전체적인 사업개요이다. 양식이 간소화된 건 분명 긍정적인 면이지만 양적 평가가 아닌 질적 평가가 어떻게 반영되는지 알 수 없다. 민간의 주도성이 살아나고 있는 걸까?

 

진정 주민주도성이 살아나고 있을까? 신원철 의원의 지적처럼, 일방적인 지침과 선정, 평가 등은 시민사회를 규율하는 장치가 되고 있는 것 아닌가? ‘기획→계획→예산편성→제안접수→심의․선정→지원→평가’라는 집행과정은 철저한 관주도 방식이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넷째, 서울에 마을이 만들어지지 않는 건 사람들이 친하지 않아서일까?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서울시의 인구밀도는 16,483명으로 전국 평균 499명보다 약 33배 높고, 전국 최저인 강원도의 90명보다 약 183배 높다. 인구밀도만으로 서울시민보다 강원도민의 삶이 더 행복할 것이라 예상할 방법은 없지만 생명체가 좁은 공간에 몰려 살 때 불행해지고 밀집하면 도시문제가 반드시 생긴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마을공동체가 형성되려면 사실 서울시는 인구를 분산시킬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서울시 전체 가구 약 350만 가구 중 집을 소유한 가구는 약 143만 가구이다. 전월세 가구가 약 199만 가구이다. 결국 약 57%의 가구는 정주하지 못하고 전월세 시세에 따라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마을공동체는 어떤 의미일까? 아파트소유자 중심으로 움직이는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가 주도하는 아파트공동체는 세입자들에게 어떤 느낌일까?

 

<도시연대> 김은희 사무처장의 지적처럼, 우수사례지역이 보편적인 삶의 질 향상의 계기가 되기보다는 고립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성공사례보다는 마을이 무너지는 이유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구자인 연구소장의 말처럼 “서울시는 지나친 과밀에서 나타나는 폐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국적 동향을 보면서 ‘지역이 살아야 서울이 산다’는 관점에서 국토 균형발전에도 기여해야” 하는 것 아닐까?


다섯째, 이미 모임들이 많이 만들어진 지역이나 단체활동이 활발한 곳으로 자원이 집중되는 것은 아닌가? 일반 시민들의 인식이나 정보부족으로 혜택이 편중된다는 우려가 실제로 제기되고 있다. 새누리당 남재경 서울시의원이 제기한 사업편중에 대한 지적이 정말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인지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사)마을이 제작한 《마을공동체기업 육성프로세스》(2012. 08)의 평가지표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마을의 필요를 파악할 정도의 안목과 조합원을 모을 자립도, 마을 내 취약계층을 파악하고 조직의 이익을 마을의 이익으로 연결지을 능력은 이미 드러난 조직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특히 서류를 준비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이나 주민들과 사업을 진행했던 경험은 기성단체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주민들을 위해 멘토단이나 인큐베이터, 컨설턴트가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이 과정에서는 이들의 통일되지 않은 관점이 주민들의 혼란을 늘리기도 하고, 불필요한 사업을 만들기도 한다.

 

사실 마을의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공적인 지원을 받아야 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시민참여의 효율성이 시민참여의 민주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스카치폴(T. Skocpol)과 피오리나(M. P. Fiorina)가 지적하듯이 시민참여는 ‘대표되지 않은 참여자’(unrepresentative participators)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업이 다른 사업보다 더 절실하다는 기준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고 그것의 민주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나? 특히 마을공동체사업을 위탁받은 조직의 민주성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나?


여섯째, 모든 마을활동이 마을공동체사업이어야 하나? 마을공동체사업들이 진행되면서 정말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런저런 사업들은 많지만 그 사업들을 통해 주민들은 어떤 경험을 하고 있나? 외려 지원사업 때문에, 지원을 받은 쪽과 지원을 받지 못한 쪽으로 나눠지고, 되는 사업일수록 그와 관련된 기획이 공유되지 않는 것을 보면 마을이 더 분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을공동체사업을 통해 통반장, 지역단위 직능 사회단체, 자원봉사센터, 주민자치위원회가 민주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야 사업의 의미가 살아날 것인데, 그런 소식을 듣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마을활동이라는 것이 매우 정형화되고 그것에 대한 다른 목소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닌가? 갈등이 없는 아름다운 마을을 지향하는 게 정치없는 마을을 지향하는 건 아닌가? 스카치폴과 피오리나는 질서와 안정이 아니라 갈등이 시민의 민주적인 능력을 강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즉 갈등하는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시민들의 적극적인 행동과 시민단체들의 확산이 민주주의를 강화시킨다. 갈등을 회피하는 마을공동체, 정치를 배제하는 마을공동체는 어떤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 강화시키려는 것일까?

 

이 와중에 서울시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종교를 전파하려는 목적을 가진 마을공동체에는 행정,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며 조례를 개정했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미 마을의 관변단체들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정치성을 배제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우리는 어느 정당을 지지하겠다며 마을사업을 하는 곳이 어디 있겠나? 이런 판단은 특정 정당의 당원들이 마을에서 배제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고 이 효과는 소수당에게 집중될 것이다. 이것이 마을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결과를 가져올까?


일곱째, 마을공동체 사업과 무관하게 한 가지를 더 지적한다면, 박원순 시장은 SNS행정을 자신의 치적으로 평가했다. “지난 6개월간 1만 4,000여건의 의견을 받아 98%의 민원을 해결했다”며 “SNS 행정이 세계 최초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자평했다. 민원을 해결했다니 좋은 듯하지만 시장을 통한 민원해결은 새로운 형태의 후견주의(clientalism), 주민들의 뒤를 봐주고 지지를 확보하는 방식이지 혁신정책이나 민주주의는 아니다. 사안을 공식적인 과정을 통해 해결하고 개인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한국의 지방자치제도에서 절실히 필요한데, SNS 행정은 이런 노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2. 서울시 사회적경제 사업: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구별이...


<서울사회적기업개발센터>가 2013년 2월에 발표한 “2013년 서울특별시 사회적 경제 현황과 정책흐름”이라는 PPT자료를 보면,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 정책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세우고 있다.

 

개발 중심의 하드웨어 전략을 추진했던 기존 서울시정에 비하면 긍정적인 전략이라 얘기할 수 있다. 제시하는 목적처럼 시민의 관점에서 생활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통해 지역경제를 강화시키며 경제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다만 관건은 지방정부가 경제 영역에 어느 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야 하는가이다.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는 것이나 일치되는 것 모두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서울특별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이은애 센터장은 센터장이 되기 전인 2012년 1월에 발표한 “서울시 사회적 기업 육성정책의 평가 및 개선과제”(《서울경제》)에서 서울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여섯 가지를 제안했다.

 

①서울형 사회적 기업의 개념 및 정책목표 재설정. 한시적 재정지원에 의존한 ‘일자리 창출’을 너머, 지역사회 특유의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함으로써 내발적 발전을 이끄는 사회적 기업의 지역화와 이를 가능케할 생태계 조성이 핵심과정으로 제기되게 된다. ‘서울시민의 주도적이고 민주적인 참여와 사회․경제․문화적 수요에 기반하여 지역 활성화를 위한 혁신적 해법을 제시하는 가운데 다양한 지역자원을 연계하므로써 사회적 목적 수행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해 나가는 예비 및 인증 사회적 기업’으로 재정의. 마을기업이나 자활공동체, 협동조합을 포괄하는 접근.

②창업단계 인건비 지원 중심에서 기업의 생애주기별 맞춤지원 전략으로 이행. 창업, 인증, 성장, 폐업이라는 주기. 인건비, 시설설비비, 무료 사회서비스 파일럿 사업비 등을 지원기관이 선택하도록. 우호적 시장 확보(공공기관 및 대기업 연계를 통한 조달시장 확대, 사회적 기업간의 내부시장 구축을 활성화, 서울 특유의 공공의 적극성과 정책역량을 활용하고 시민의 지지기반 형성. 칸막이 행정 제거하고 연계.

③서울시의 수요 및 자원조사를 통한 전략분야 및 전략지역 시범사업 필요. 서울시의 우선사업분야로 대학생 및 청년 주거문제 해결, 낙후지역 대안개발형 쇼셜 하우징, 도시농업, 로컬푸드 연계형 친환경 공공급식시스템 구축, 전통시장 및 소상인 지원, 지역공동체형 보육시설 확충, 자치구 특화산업 연계형 사회적 기업 창업.

④시민사회 역량 제고 및 네트워크 강화. 인력양성 지원사업.

⑤민관 거버넌스에 기반한 시너지 확보. (가칭)서울 사회적경제위원회 구성.

⑥사회적 기업의 개별 생존을 너머 생태계 조성을 돕는 풀뿌리 중간지원조직 확충.

 

이런 제안이 거의 반영되어 <서울특별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는 2013년 9월 12일 미래복지포럼에서 발표한 “서울시 사회적 경제 현황 및 활성화 전략”이라는 PPT 자료에서 아래와 같은 지원계획을 밝혔다.


좋은 내용이고 동의할 만한 내용인데, 여러 가지 다양한 사업들을 다루는 것 말고 이런 사업들을 어떤 관점에서 진행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렇게 만들어진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마을기업이 서울시민의 살림살이를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는 기존의 경제를 보완하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 목적을 보면 보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정책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서 시작해 다른 물음으로 넘어가려 한다.


첫째, 한국사회의 경제 집중도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1997년 IMF 이후에는 국제금융자본과 재벌, 자유주의 정부의 삼각동맹체제(이병천)가 한국사회를 지배하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모토로 삼는 ‘기업사회’를 만들고 있다. 이 와중에 고용없는 성장과 비정규직 양상은 바꿀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하도급거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재벌의 사회적인 지배력은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

 

자, 이런 현실을 두고 판단할 때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정책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나? 기존의 영리경제와 사회적 경제를 ‘공존’하게 만들겠다는 서울시의 구상은 정말 실현가능한 것인가? 예를 들어, 서울시가 선포한 ‘협동조합도시 서울’은 ▲공공서비스 영역에 시민 주도의 협동조합 참여 보장과 서비스 질 개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참여하는 협동조합 설립 촉진과 경쟁력 강화, ▲근로자 협동조합의 원활한 설립을 위한 지원, ▲다양한 생활협동조합 설립으로 지역 공동체성 회복, ▲시민 교육 체계 마련과 지도자·전문가 육성, ▲협동조합 활성화 조례 제정과 기금 조성을 통한 자립·성장지원 등을 내세웠다. 만일 이런 협동조합정책이 기존의 경제정책을 보완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체하려 한다면 재벌과의 대결이 필수적인데, 그런 전략이 있는가? 특히 한국사회의 모순이 집약된 서울시가 그런 대결을 주도할 수 있을까?

 

서울시가 보완전략을 대체전략인 것처럼 홍보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물음을 떨칠 수가 없다. 더구나 민주화 이후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시장에 개입하는 신자유주의 관료집단을 견제할 힘이 구성되고 있는가? 민주화 이후 더욱더 적극적으로 국가를 포섭하는 재벌들의 지배전략에 대항할 힘이 마련되고 있는가? 사회경제적 시민권과 정치적 시민권이 상호 연관을 맺으며 향상될 수 있는 전략이 세워지고 있는가? 사회적 경제는 노동자이자 동시에 투자자인 노동자들을 조직할 전략을 가지고 있나? 자본파업에 대항할 힘이 형성되고 있나? 재벌의 지배구조를 변화시킬 전략이 마련되고 있나? 사회적 경제는 한국 자본주의의 특징인 하도급거래구조를 변화시킬 힘이 있나? 재벌들의 골목 상권 침해를 막을 힘을 가지고 있나? 이런 물음들이 뒤따라 나온다.


둘째,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계급불평등의 심화라는 상황에서 사회적 경제는 노동과 복지를 연계시키는 전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사회적 경제가 교육, 주거, 고용에서 격화되는 경쟁과 불평등을 바로잡을 힘을 기르고 있나? IMF 이후 등장한 노동복지(workfare)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복지의 축소를 동반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사회적 경제의 의미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다만 제도가 사회에 실제로 미쳤던 영향을 잘 따져봐야 한다. 사회적 경제의 경로는 사회적 기업의 경로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정부는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을 만들면서 사회적기업 인증제도라는 것을 도입했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노동부 장관의 인증을 받아야 하고, 인증을 받지 않으면 과태료를 내도록 했다.

 

이렇게 인증을 내세웠지만 정부의 인증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었다. 그리고 정부의 인증이 신규사업보다 기존에 이미 진행되어오던 사업들, 즉 이미 인력과 자원을 가진 곳으로 집중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또한 사회적 기업이 사회성보다 일자리를 만드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비판, 정부가 최저임금만을 보조하고 나머지 부족분을 사업을 통해 보충하도록 해서 저임금 일자리가 확산된다는 비판, 정부가 노동복지(workfare)를 강조하면서 기본적인 복지를 축소시키고 있다는 비판 등이 계속 제기되었다.

 

협동조합은 사회적 기업의 경로와 다를 것이라 자신할 수 있을까? 사실 협동조합기본법도 이런 경로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협동조합기본법에서 협동조합은 (일반)협동조합과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구분된다. (일반)협동조합은 5인 이상의 결의로 설립되고 신고만 하면 등록절차를 거쳐 활동할 수 있다. 반면에 지역사회에 공헌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월평균 소득의 60% 이하, 고령자, 장애인, 결혼이민자, 경력단절여성, 갱생보호 대상자 등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이들을 고용하는 비중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은 5인 이상의 결의로 가능한데, 기획재정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설립될 수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일반)협동조합과 달리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업과 비슷하게 ‘인가’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사회적기업육성법의 경험을 통해 협동조합기본법을 해석한다면 그 결과는 사회적 기업과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단기간의 지원을 통해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날 수 있지만 사회성이나 협동의 강화보다 고용 창출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고, 시장경쟁에 내몰린 협동조합들이 실패를 경험할 것이고, 협동조합이 공공서비스 민영화의 명분(사회적 협동조합은 국가와 지자체의 사무 중 일부를 위탁받을 수 있다)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협동조합운동의 강화가 아니라 왜곡이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사회적 경제라는 것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진다. 현재의 사회적 경제 정책은 이런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셋째, 사회적 경제가 확장되고 비가시적인 경제 영역을 가시적인 경제활동으로 만드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일일까? 즉 화폐경제에 포함되지 않았던 살림살이의 영역을 임금노동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이 반드시 올바른 일일까?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 정책이 주력하는 7대 분야는 공동육아, 돌봄, 보건의료, 임대주택, 전통상인 및 소상공인, 베이비 부머,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그중 공동육아, 돌봄, 보건의료는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이 영리영역으로 가시화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일까?

 

청년이나 경력단절여성, 이주민들이 직업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노동을 경험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부장적이고 비민주적인 기업문화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사회에서 노동은 어떤 의미이고 노동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부분을 고민하지 않으면서 정책을 구상하는 것이 과연 사회성이나 호혜성을 강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사회적 경제가 지속되려면 다른 경제활동이 지속될 수 있는 다른 시장이 필요할 텐데 그것이 공공조달과 내부거래의 확대, 기업의 협조로 가능할까? 신경희 연구원의 “서울형 마을기업을 통한 지역공동체 활성화”(서울시정개발연구원 보고서, 2012년)에 따르면, 2010~2012년 65개 마을기업의 담당자들은 마을기업의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마을기업 유지를 위한 수익창출”(26.2%)과 “마을기업 운영자금 부족”(13.8%)을 들었다. 사실 수익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다른 가치는 쉽게 무기력해진다. 사회적 기업에 민주주의가 부족한 이유는 그것이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박원순 시장은 이를 ‘유통’이라는 말로 정리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경제나 빈곤에 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 현대의 빈곤은 단순히 실업이나 저소득으로만 발생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배제의 차원은 매우 다양하고 우리의 상식과 달리 배제의 중요한 원인이 경제적인 변수보다 사회적 관계망과 교육에서 비롯된다. 물론 경제적인 빈곤이나 실업이 중요한 변수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사회적 배제의 현상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소외는 경제적인 상황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실존적인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사회적 경제정책은 이런 소외에 대해 어떤 해법을 가지고 있을까?

 

더글러스 러미스는 쓰지 신이치와의 대담(『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에서 가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가난이 왜 고통스러운가 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난하기 때문에 관리나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고,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니까 그것이 고통스러운 거죠. 물질이 풍요롭지 않다는 것, 즉 가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의 문젭니다. 관리되는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위험이 상처받는 것이 고통스러운 게 아닐까요?” 우리는 가난을 빈곤의 문제로 생각하는데 러미스는 관계의 문제로 본다. 가난이 가졌던 관계는 현대 사회에서는 계속 파괴되고 있다. 특히 세계화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이제는 가난이 아니라 ‘잉여’가 되는 사회이니까. 잉여사회에서는 가난한 사회가 가졌던 관계망이 유지될 수 없다.


넷째,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정책은 경제의 사회성을 확장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나? 과거와 달리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다. 도시농업이 의도치 않게 농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듯이,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가 도시의 소상공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서울시 전체 취업자 약 503만명 중에서 자영업주가 97만명, 무급 가족종사자가 약 16만명에 달한다. 합하면 약 113만명으로 22.4%이다. 그리고 임금근로자 중에서 임시직이 113만 6천명, 일용직이 39만 6천명이다. 사회적 경제는 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들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지원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앞선 신경희의 연구를 보면, 마을기업의 설립목적 중 가장 높은 비율이 “지역기반 주민 일자리 창출”(81.5%)이고 두 번째가 “주민교류와 지역공동체 활성화”(64.6%), “취약계층 주민 일자리 창출”((60.0%) 등이고 “전통상가, 지역경제 활성화”는 (18.5%)이다. 새로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경제 영역들이 기존의 지역경제 영역과 잘 접목되지 않는 징조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아름다운재단>의 월간지 《콩반쪽》2005년 5월호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05년 4월까지 언론에 보도된 김밥할머니의 기부금을 모으면 95건, 약 1,149억원이라고 한다. 사회적 경제가 없었을 때에도 그런 경제를 실현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사회적 경제는 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려 하는가?



3. 서울시 정책에 대한 총평


중간지원조직을 위한 중간지원조직이라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컨설턴트나 상담원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지역의 입장을 대변하기는커녕 행정의 방침을 강요한다는 항의도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내 귀에만 들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는 얘기도 들린다.

 

사회적 경제라는 것이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의 수를 늘리는 것은 아니다. 살림살이의 사회성이 실현되는 것이 사회적 경제이다. 그렇다면 살림살이를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전환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벗어나 때로는 대결을 통해 새로운 건설을 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착한 경제’를 외칠 뿐 현실의 악과 싸우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혁신은 자기성찰을 동반할 때에만 지속가능하다. 서울시의 자기성찰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시기이다. 원전 1기 줄이기 캠페인으로 밀양 송전탑에 맞서 싸우는 할머니들의 고통과 신음을 감출 수는 없다. 한편에서는 마을공동체사업이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있던 마을이 처절하게 짓밟히는 이 모순을 둔 채 아름다움을 논할 수는 없다.

1. 고수와 선수, 우리는 무엇이 되려 할까?


고수와 선수는 다른 존재입니다. 보통 고수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깊이를 알고 있기에 낄 곳과 끼지 말아야 할 곳을 잘 가리지요. 그냥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합니다. 그래서 고수가 드러나는 계기는 아주 우연적입니다. 반면 선수는 잘 드러납니다. 드러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선수는 스스로를 드러내고 드러낼 만큼의 자기 역량을 잘 포장합니다(그런 역량조차 없으면 사기꾼이겠지요). 고수와 선수들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고수와 선수 중 누구의 힘이 더 셀까요? 때로는 선수의 힘이 더 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수는 자신의 힘만을 운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수는 주위의 힘을 모을 줄 알고 그러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힘을 누그러뜨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잘 드러나지 않죠. 한 사람의 힘만 보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고 결과적으로 보면 고수의 힘이 더 센 거고, 고수는 세계와 사회를 조직합니다. 고수는 이해관계에 따른 사회가 아니라 공적인 장을, 협동의 관계망을 조직합니다.

 

현재의 협동조합운동판을 보면 선수들만 보이고 고수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일단 저부터가 만나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이 별로 없습니다(전혀 없지는 않아 다행일까요?). 고수이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더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럴 거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베스트 키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성룡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 되었는데요, 저는 원작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원작에서는 사부가 제자를 그냥 엄하게 훈련시키는 게 아니라 정말 생활에 필요한 모든 부분에 써먹거든요. 밥하고 걸레질하고 빨래하고. 그런 일상의 동작 하나하나가 쿵푸의 초식이 됩니다. 이를 ‘도제(徒弟)’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어려서부터 시작하면 좋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하면 몸에 익숙해지기(體化) 쉽다는 거죠.

 

이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또 다른’ 고수가 됩니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모두 고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중간에 힘들어서 떨어져 나가기도 하지요. 고수가 되는 과정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각’과 ‘성찰’입니다. 깨달음만이 아니라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지요. 처음에는 자기만 있다가 나중에는 ‘싸부’도 마음에 들어오고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함께 있음을 깨닫는 사람이 고수가 됩니다.

 

반면에 선수는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똑같은 훈련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훈련은 생활에서 단련된 훈련이 아닙니다. 교사라 불리는 사람에게 학습된 것입니다. 영화에도 보면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겁니다. 생활과 잘 맞지 않고, 생활에 반하기도 하는 전문기술입니다. 나와 상대에 대한 고려 없이 근육과 힘을 강화시키는 기술입니다. 더구나 그 기술을 어떻게 써먹을지에 대해 교사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자각’이나 ‘성찰’의 과정이 없는 거지요. 당연히 누구누구 라인은 있겠지만 ‘싸부’도 없지요. 다른 사람은 대상일 뿐 자기 속의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선수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선수가 여기저기서 마구 등장하는 상황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수가 판을 주도하는 상황은 분명 어떤 큰 문제를 불러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선수는 자신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활동과 영역을 부정하기 때문에 지극히 위험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고수는 자신이 고수인지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반성합니다. 자신이 고수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을 ‘과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부정하지도 않고 그 사람과 자신의 영역을 굳이 나누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그런 고수들을 찾고 만나야 합니다.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죠.


이 대목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고수가 되려는 걸까요, 선수가 되려는 걸까요?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한다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는 걸까요? 그런 가르침을 받을 자세, 고수를 찾아 접하려는 태도는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민 없이 협동조합을 시작합니다. 정부가 홍보하듯이 협동조합이 기업체보다 나쁜 틀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것이기에 무조건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리라 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준비 없이 시작된 협동조합은 한국 현실에서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실패의 경험이 누적되면 또 냉소로 바뀔 겁니다.

 

물론 협동이라는 것이 내 몸에 충분히 녹아들어 있기에 사업만 펼치면 그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라면 문제는 다릅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문화를 설명하는 단어는 협동이 아니라 무한경쟁, 승자독식입니다. 협동도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하고, 이기기 위해 내부의 갈등을 억지로 무마하는 것이 협동문화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의 악조건을 극복하려면 좋은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직접 얼굴을 대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고수들에게 가르침을 얻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상 속에 숨겨진 고수를 찾아내기 위해 안목을 기르고 그 사람들을 인정하며 내 일상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공부모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세 명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임을 만드는 순간 이미 스승이 우리 옆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런저런 책이나 자료로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고수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거기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내가 뭘 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전문가라 자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해볼까요? 내가 원주에 다녀왔다고 해서 내가 장일순 선생님이나 지학순 주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주의 다양한 협동조합들을 보고 왔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알 수는 없습니다. 그 역사와 사업, 조합원수를 따질 수는 있겠으나 그 속엔 ‘체화’의 과정이 없고, 자연히 ‘자각’과 ‘성찰’의 과정도 없습니다. 정말 깊이 활동을 하고 있다면 자기 속의 고민을 충분히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지식이 아니라 일상 속의 깨달음을 전해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도제를 악용해 청년들을 부려먹는 사람이나 제도들도 생깁니다. 고수인체 하지만 선수일 뿐입니다.

 

저는 그런 활동들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엔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질문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과 그 질문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모호한 상태로 지식만 교류하는 것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2. 나 없는 협동이 가능한가?


한국의 협동조합 활동가들이 지금은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 많이 가지만 예전에는 일본엘 많이 갔습니다. 일본 생활클럽 생협은 ‘타자 속의 나’, ‘I among others’라는 개념을 쓰더군요. 저는 이 말을 처음 봤을 때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기는 이미 타자라는 말을 익숙하게 쓰고 있구나. 섬나라의 특성일 수 있겠지요. 제주도에 가면 육지 것이라는 말을 쓰듯이요. 섬에는 외부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나갑니다.

 

그런데 단지 새로운 사람을 타자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는 타자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와 그 존재 사이에 관계가 생기는 거지요. 옛날에 유럽인들은 식민지 사람들을 타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죠. 그러니 그 사이에는 타자라는 관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타자로 부르려면 그 사람을 타자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타자에는 사실 나의 무엇도 포함됩니다. 꽃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만나 다른 존재가 되고, 나와 그 사이에 무언가가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관계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클럽 생협의 I among others는 좀 감동적이었습니다. 많은 타자들 사이에 내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거죠. 나는 무수한 타자들 속에 있다. 그리고 그 타자 역시 나를 타자로 여기는 나이다. 그걸 인정하자는 거죠. 그걸 인정할 때 협동의 힘이 생긴다고 보는 겁니다.

 

한국의 집단주의에는 일본이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처럼 원래 유교에는 없는 개념들이 일본과 한국에는 강하게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식민지가 아닌 모국이었던 일본은 한국보다 개인주의가 강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극단적이기도 한데요, 어떤 때는 사무라이처럼 공을 위해 자신의 배를 가르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아주 개인주의적인 거지요. 일본 만화책들을 보면 이런 경향을 느낄 수도 있는데요.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는 무수한 타자 속의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요? 그 관계망 속의 자신을 인식하고 있을까요? 관계의 주고받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을까요? 혹시 우리는 협동이라는 말로 다른 관계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혹시 협동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거나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협동인 것처럼, 고만고만한 형식적인 관계를 협동이라 여기는 건 아닐까요?

 

한국사회에서 많이 오해되는 말 중에 하나가 상호부조입니다. 상부상조, 상호부조의 삶이란 게 어떤 일방적인 이타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혼자 감당하기 힘든 내 속에 있는 에너지를 분출하며 우리가 되는 과정이고, 우리 속에서 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과정입니다.

 

협동조합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무수한 타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타자 속에는 내가 있습니다. 내 속에도 타자가 있지요. 때로는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하고, 때로는 정말 싫은 타자를 만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억지로 참고 목적의식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협동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분명히 드러낼수록 협동은 더욱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 드러냄의 방식이 문제인 거죠.

 

요즘 보면 울림, 공명(共鳴), 이런 말을 많이 씁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이 말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사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울림, 공명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건 어떤 영향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共感)의 문제입니다. 예전 드라마 대사처럼 “아프냐? 나도 아프다”가 공감의 시작인 거죠(물론 말로만 그러는, 타자를 지배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계해야죠). 타자의 감정을 내 속에서 형성하게 될 때 우리는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협동조합을 통해 어떤 영향을 주고 받으려 하는 걸까요? 1980년대 초반 일본의 제4회 전국 유기농업대회에서 발표된 '생산자와 소비자의 제휴방법'이라는 글의 발췌번역문입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1. 생산자와 소비자의 제휴의 본질은 물건을 팔고 사는 관계가 아니고 사람과의 우호적인 만남과 사귐의 관계이다. 즉 양자는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 돕는 관계이다. 그것은 생산자, 소비자로서의 생활을 새롭게 보는 데에 기초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제휴는 소비자 측에서 사용되는 산지와 직거래라든가 생산자 측에서 사용되는 소비자에게 직접판매라고 하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싸게 사고 싶다.” 또는 “될 수 있는 대로 비싸게 팔고 싶다.”는 생각에서 중간단계를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고 목적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우리들이 제창하는 것은 신뢰를 토대로 하여 상호부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제휴(서로 손을 잡음)이다.

생산물이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제공되는데 대해서 소비자는 서로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대가와 사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통상 금전을 가지고 하는 외에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물건과 금전이 교환되는 형식으로 본다면 팔고 사는 것이며 법률적으로는 거래에 불과하다. 그러나 본래의 성격은 상호증여적인 성질의 행위이다. 즉 물건을 교환가치로서 평가하지 않고 사용가치로서 평가한다. 금전을 주고받는 형식으로서는 물건의 대금이지만 실질은 대상(代償)과 사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액면도 시장에서 형성되고 항상 변동할 필요가 없고 당사자끼리 자유롭게 결정할 수가 있고 고정시킬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상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쌍방이 상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고 어디까지나 대등의 자세를 흐트려서는 안 된다. 또한 전제로서 필요한 것은 오늘날 사회에서 삶으로 해서 우리들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되어온 습성에 대한 반성이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에 있어서 경쟁심리에 쫒기고 있으며 남의 일에 대해서는 모른 체 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사는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거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는 상태에 있다. 즉 금전보다 생명이 중하다든가, 행복은 꼭 금전으로 살 수가 없다는 아주 분명한 사실을 잊기 쉬우며, 편리한 것보다 안전한 것이 중요하다든가, 물건에는 상품보다도 상품이 아닌 것에 치중한 물건이 많다는 것을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2. 생산자는 소비자와 상담하여 그 토지에서 가능한 한 소비자가 희망하는 것만큼 생산하는 계획을 수립한다. 생산자는 수확한 것을 확실하게 모두 소비자가 인수하게 하고, 소비자는 원하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생산자가 생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생산계획을 양자가 협의해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매년 소비자는 원하는 작물의 품목과 수량을 생산자에게 제시하고 이것에 따라 생산자는 그 토지에서 생산 가능한 작물을 받아들여서 각각의 희망수량을 생산목표로 하는 농사를 계획한다. 이렇게 작성한 영농계획을 생산자는 충실하게 이행하고 수확을 볼 때까지 사이에 비배관리네 만전을 기한다. 그리고 그간에 소비자가 작황의 관찰이나 농사 일손을 돕기 위해 생산자를 찾는 것은 농민들에 의해 크게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수확량은 여간해서 목표대로 실현되지 않고 언제나 다소의 상이는 면할 수가 없다. 때로는 대풍작이거나 대흉작이 있다는 것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산자가 계획대로 작물을 실수 없이 재배관리 하는 한은 소비자로서는 어떠한 불평불만을 가질 수가 없다.

 

3. 소비자는 그의 희망에 따라서 생산된 것은 그 전량을 인수하고 식생활을 될 수 있는 대로 전면적으로 이것에 의존한다. 일찌기 공동으로 세운 생산계획에 의해 수확된 농산물이 그 때에 그 양만큼 제공되기 때문에 소비자로서는 새삼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지만 항상 신선하고 가장 맛이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한다. 제공되는 가지 수와 양은 날짜에 따라, 계절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그날그날에 원하는 가지 수와 양에는 과부족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조리나 보존에 연구를 거듭함으로써 잘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4. 가격결정을 하는데 있어서는 생산자는 생산물의 전량이 인수될 것, 선별이나 묶음, 포장의 노력과 경비절약이 되는 것 등을, 소비자는 신선하고 안전하며 맛이 있는 물품이 되게끔 하는 등의 것을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가격이라고는 하지만 물품대금이라고 하기보다는 행위에 대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이므로 그것을 결정하는 데는 가격이론을 생각할 필요가 없고 양자가 납득이 되는 것이면 어떠한 방법이라도 상관없다. 상품의 질을 소비자가 생각할 때에는 마치 손으로 그린 그림과 복사한 그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5. 생산자와 소비자가 제휴를 지속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상호의 이해를 깊이하며 우정을 두텁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쌍방의 구성원들이 서로 접촉하는 기회를 많이 해야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접촉이 원만히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특히 대도시의 주부들이 농촌을 방문하고 농가의 생활과 농사일에 대해서 작은 부분이라도 접하는 것은 생산자의 환경과 입장을 이해하는데 매우 좋은 것 같으며 그것은 생산자에게 있어서는 적지 않은 격려가 되는 것 같다.

 

6. 운반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제3자에게 의뢰하지 않고 생산자집단 또는 소비자집단의 손에 의해서 소비자 집단의 거점까지 운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7. 생산자, 소비자 집단 내에 있어서 소수의 지도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삼가해야 할 것이며, 될 수 있는 대로 전원이 책임을 분담해서 민주적으로 운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구성원 개개인의 가정사정을 잘 파악하고 상호부조적인 배려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8. 생산자 및 소비자의 각 집단은 소집단 내의 학습활동을 중시하고 단지 안전 식량을 제공, 획득하는 것만으로 그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건강의 문제, 식생활전반에 관해서 눈을 떠야 할 문제가 많고, 자체의 운동이나 농약 등 환경오염 문제 등 학습하고 눈을 떠야 할 것이 많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주적인 학습에 의해서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될 무수한 위험 가운데에 매몰되고 있다. 모두가 참가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학습회를, 정기적으로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가요? 타자 속의 나가 어떤 말인지 좀 느껴지시나요?

 

저는 서로를 살리는 경험을 하는 것이, 서로가 서로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하고 디딤돌이 되려면 일단 만나야 하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모든 만남이란 낯선 것이라는 점입니다. 낯설기에 익숙하지 않고 두렵지요.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익숙한 것들만 접하는 것을 만남이라 부릅니다. 물론 익숙한 것들과의 관계도 필요하지만 진정한 만남은 낯선 것을 접하고 그것을 그대로 두는 것에서, 억지로 나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 것에서, 그러면서도 손을 잡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영글면 굳이 우리라고 칭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공감하고 손을 잡게 될 겁니다.

 

그런 관계가 성공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건 아닙니다. 협동조합의 성공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실패를 통해 더 단단해지는 관계가 있는 반면, 성공하면서 무너지는 관계도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무엇을 지향하려는 걸까요? 우리는 왜 성공하려는 걸까요? 이런 물음을 던지며 강의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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