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아나키즘의 정치관


□ 인민의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믿음. 스스로 삶을 결정할 조건이 갖춰진다면, 아직은 억압을 경험하며 노예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적절한 상황이 마련되면 인민은 올바른 사회구조를 만들어갈 것이다. 인민의 자치역량에 대한 믿음. 어떤 완성된 개념이나 이론을 습득하는 것보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수련(修鍊)’의 의미가 강조된다.

□ 자율적인 개인과 연합하는 공동체. 각 개인의 자율적인 힘과 그렇게 드러나는 힘이 서로를 돕고, 이런 상호부조의 관계망이 개인과 공동체의 힘 모두를 강화시킬 것이라고 바라본다. 고립된 개인은 존재할 수 없고, 스스로 선택하고 약속할 수 있는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는다. 위계질서의 구성보다는 자유로운 협약, 관습의 힘을 믿는다.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든다.

□ 직접민주주의와 대리인 정치. 아나키즘은 정치를 특정한 사람이나 세력이 전담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사실 마을마다 전통적인 의사결정기구나 관습들이 있다. 없던 조직을 새로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일상적인 조직들을 활성화시키는 것, 그것이 아나키즘의 정치이다. 아나키즘의 반(反)정치노선은 근대국가의 등장이라는 상황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그 대안으로 대리인 정치, 즉 권한이 제한되고 소환되는 대리인의 정치가 등장하기도 했다.

□ 국가와 정부의 구분. 국가는 중앙집권화된 체제이고, 정부는 일종의 통치형태이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에 절대적으로 저항하고 정부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태도를 보였다. 하나의 공동체가 아나키즘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공동체들이 필요하고 이런 공동체들은 또 자기 나름의 협약을 맺을 수 있다. 아나키즘에서 연방주의가 가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II. 아나키즘의 경제관


□ 아나키즘의 경제관은 기본적으로 자급(自給)이다. 작은 공동체를 지향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생산과 소비가 연계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아울러 도시와 농촌이 연계되고 다양한 농촌들, 다양한 도시들이 등장해야 한다. 전원도시, 소공업도시 등은 이런 이상을 반영한다.

□ 아나키즘이 제기하는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사적 소유권의 부정이다. 점유는 가능하지만 소유는 불가능하고, 설령 한 세대의 소유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상속될 수는 없다고 봤다. 사유(私有)는 홀로 가지기 때문에 나쁜 것만이 아니라 공통의 기반을 파괴하기 때문에 나쁘다. 사실 사회의 약자들에게 공유지는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채울 수 있는 발판이었다. 사회주의는 이를 국유화로 대체하려 했지만, 국유화는 민중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기며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지만 민중이 스스로 그 권리를 지키고 권리를 확장시킬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유화가 되면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며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기회나 그럴 이유도 줄어든다. 따라서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저항은 국유보다 공동의 소유(共有)와 공적인 소유(公有)를 지향해야 한다. 이미 기본적인 연대감과 자유가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연대감과 자유를 끌어내는 다양한 실천들이 중요하다. 이런 형태의 협동운동들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자존감을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 아나키즘의 또 다른 본질적인 비판은 임금제도이다. 임금제도는 노동을 유일한 생존방식으로 만들었다. 자본가들이 만든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은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논리를 노동자들이 스스로 각인하게 만들었다. 허나 일하지 않는 자는 정녕 먹지도 말아야 하나? 그렇다면 일하지 않는 아이, 노인, 전업주부는 먹지 말아야 하나? 이런 물음을 피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가족임금제도를 마련했다. 남성이 생계임금을 버는 동안 여성은 가족과 가계를 부양한다. 그러면서 국가와 자본은 생계를 지탱해왔던 다른 사회적 관계들을, 자립경제의 기반들을 하나씩 파괴했다. 그런 면에서 임금제도는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시민권을 보장받은 사람이라도 공장에서 굴욕적인 노예노동을 한다면 자신의 주체성을 온전히 실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시민이 일터의 굴욕을 감당해야 한다면 그의 주체성도 수그러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뭔가? 크로포트킨은 『빵의 쟁취(The Conquest of Bread)』에서 이 유쾌하고 자유로운 노동에 한 가지 중요성을 더하는데, 그것은 이런 노동들이 서로 자유로이 협약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공동으로 일하고 공동으로 즐기는 관계 속에서 노동은 자유로이 서로 협동하고 그것에 관한 협약을 맺는다. 최근의 기본소득 논의도 이와 결합될 수 있다.

□ 아나키즘은 농민의 사상이다. 이런 생각을 모아 크로포트킨은 『전원, 공장, 작업장』(형설출판사, 1983년)에서 경제학이 어떻게 이윤을 늘릴 것인가보다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그 물음에 “농업이 공업을 성립시키고, 공업이 농업을 지지”하는 통합된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땅과 인간의 다양성에 발맞춰 공업은 분산되어야 하고 “재배하고, 생산하는 사람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곡식이 재배되고 공업제품이 만들어지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크로포트킨은 인류의 진보가 자급(producing for home use)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III. 아나키즘의 문화관


□ 자치조직을 통한 다양한 의식. 크로포트킨은 촌락공동체가 “공유지에서 공정한 배당을 각인에게 보증하기 위한 동맹”이었고 “공통의 문화, 가능한 한에서의 상호지지, 폭력으로부터의 방위, 보다 일층의 지적 발달, 민족적 결속, 도덕관념을 위한 동맹”이었다고 지적한다. 바로 이런 것에서 민회가 필요했고 자치조직이 활성화되었다. 시민들은 공유지를 통해 민주주의를 몸에 익히고 공동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 대안문화 형성을 통한 지금 현실을 살기. 미국으로 이주한 이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을 만들어 자본주의 속에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사회를, 국가 속에 또 다른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빵집과 버스회사, 채석장, 공장 등에서 노동자협동조합을 만들었고 공동주택을 세우려는 주택협동조합도 만들었다. 그리고 실업여성들은 일공동체를 만들고 석공들은 공동보험을 만들었다. 이렇게 같은 작업장과 마을에서 일하고 사는 주민들이 함께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이런 활동을 통해 아나키스트들은 대항문화를 만들어 전통적인 대중활동에 새로운 혁명적인 내용을 덧붙이며 다른 삶을 꿈꿨다. 이들의 직접행동은 폭력이나 파괴보다 자치공동체, 대안경제, 대안교육, 대안문화를 만들며 다른 사회를 구성하는 걸 의미했다.

□ 자유학교(free school)와 도서관운동.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프란시스코 페레(F. Ferrer)의 ‘모던스쿨(modern school)’은 그런 생각을 잘 보여준다. 페레는 학교의 설립선언문에서 학교의 목표가 “학교에 다니는 소년소녀들이 진실하며, 정의롭고, 그리고 편견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아동들의 자연적 능력을 자극하고, 발달시키고, 지도하여, 충분한 개인적 가치를 지닌 쓸모 있는 사회 구성원이 되게 함으로써 전체 공동체의 발전에 헌신하게 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아이들만이 아니라 학부모들도 일요일 아침마다 함께 출석해서 수업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학교 수업 때는 상벌이나 시험을 폐지하고 아이들의 자율성을 키우려 노력했다. 학교만이 아니라 도서관도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인류의 지혜를 저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개방되고 이들이 실제로 그 지혜를 활용한다면 민중의 성장은 불가능한 얘기일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들은 도서관과 독서실을 세우고 문학모임을 조직해서 사람들이 다른 사회를 꿈꿀 수 있게 했다. 이런 도서관에서는 다양한 강좌들이 개최되어 시사적인 이슈와 인문학적인 관점을 갖게 했다. 그리고 호주의 아나키스트 플레밍(J. W. Fleming)은 협동조합의 설립을 도왔을 뿐 아니라 멜버른 공공도서관의 일요일 개관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1. 세진 2014.09.19 00:52

    출처가 어딘가요?

  2. 몽똘 2014.09.21 22:09

    출처는 제가 쓴 글입니다.^^

십만을 넘긴 잔치라고 해야 할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자료나 꾸준히 업데이트 해야지.ㅎ

  1. 문화파괴 2014.08.13 01:15 신고

    꾸준한 글 기대하고 있습니다. ^^

 


하승우(땡땡책협동조합 땡초)


“그게 정말 대안이야?”, “본질적인 해결책이 맞아?”, 어떤 문제에 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흔히 받게 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이 나오는 순간부터는 토론이 어렵다. 합리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믿음의 문제로 토론이 전환되기 때문이다. 근본과 본질이 중요하다는 점은 알지만 무엇이 근본이고 본질인가에 관한 생각은 모호해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질문은 답을 찾기 위한 것인데, 보통 이런 질문들은 말문을 막는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행동은 늦춰지고 대안은 아닐지라도 디딤돌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은 바다에 떠보지도 못한 채 좌초한다. 그러면서 “야, 그거 예전에 해봤는데 안 돼!”라는, 선배라 불리고 싶은 사람들의 흐릿한 기억들이 후배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새로운 시도조차 가로막는다.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는 어느새 진부한 논리싸움으로 전락한다.

 

물론 이런 전락이 그런 물음을 던지는 개인들의 탓만은 아니다. 권력이 일상을 억압하고 자본이 노골적으로 착취하는 한국사회는 자꾸 이런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 제정신이라면 단 하루도 분노하지 않고선 살기 어렵게 만드는 현실은 다양한 혁명들이 있음에도 ‘단 하나의 혁명’, 모든 것을 한순간에 뒤바꿀 수 있는 혁명만을 상상할 것을, 아니면 그냥 냉소할 것을 강요한다. 단단하게 가로막고 선 현실의 벽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어쩌면 호연지기일 수도 있는 자세를 가학적인 희망고문으로 만들기도 한다. 벽을 피해 우회하다 보면 맞닥뜨리는 건 변화보다 우리가 이 일을 왜 시작하게 되었을까라는 ‘초심’이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열심히 하는’데, 기우뚱한 현실에서는 한순간 삐끗하면 동지(同志)들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이러니 사는 게 어렵고 피곤하다. 피로도를 따지면 한국이 세계 최강 아닐까. 그리고 대안을 찾는 사람들일수록 더 피곤하다. 피곤해도 언젠가 낙이 온다고 믿을 만하면 기다리기라도 할 텐데, 그런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본질적인 질문과 피로에 지친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줄 시원한 책 한권이 나왔으니, JK깁슨-그레엄의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알트, 2013년)가 그것이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그동안 여성주의를 추상적으로 인식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여성주의가 다른 학문체계를 자극하고 무너뜨릴 주요한 방법일 거라 생각만 했지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할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다. 민주주의 이론을 뒤흔들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민주주의들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걸 구체적인 일상에 적용하지 못했다. 그런 무능함은 나 역시 기존의 관행에 길들여져 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여러 ‘중심주의’에 대한 깁슨-그레엄의 비판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줬다(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함께 읽고 토론하며 공동의 이름으로 책을 쓰는 작업을 남성들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이런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솔직히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많은 민주주의‘들’이 있음은 생각했지만 자본주의‘들’이 있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풀뿌리운동이나 협동조합운동이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대안이라고 믿지만, 중앙집권형 국가와 재벌 중심 경제의 결탁이라는 강력한 장벽을 넘어서려면 일단은 힘을 더 길러야 한다고 믿어왔다. 단단한 벽이니 우리도 더 단단해질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쯤이면 우리의 단단함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매일 들리는 소식은 나조차도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1. 자본주의 앞에서 쫄지마!


깁슨-그레엄도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 비슷한 고민을 많이 했고 어떤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양한 경제diverse economy’라는 이름으로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경제의 자연화된 지배를 무장해제하고 탈구시키며, 새로운 경제적 생성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자고 제안한다(15쪽).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유기체적 사회 개념, 영웅적인 역사의 서사, 진화론적 사회발전의 시나리오, 본질주의적 남근중심적 이원적 사고 패턴의 복합적 산물”(74쪽)이라고 비판한다.

 

시장과 비시장,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라는 이분법을 피해 그 내부의 다양한 균열들을 접하고 보고 관계를 맺어 가면 대안은 도래할 미래의 것이 아니라 이미 실현되는 중인 가능성이다.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설정하는 방식은 경제적 차이를 이론화하고, 자본주의 헤게모니 담론을 경제적 복수성과 이질성으로 보완할 가능성에 덫을 놓는다. 이 가능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중요한 목표인 반본질주의 기획”이다(82쪽). 이 책은 본질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이런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 좌파의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주장이 깁슨-그레엄만의 생각은 아니다. 그동안 균열을 찾아내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 중에서 깁슨-그레엄은 중층결정에 바탕을 둔 포스트모던 맑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적 여성주의 전략을 강조한다. 이 전략은 기존의 이론구조에 강한 충격을 준다. 여성주의자들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관계를 재구성하려는 것은 개념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위계질서를 깨기 위해서이다.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은 이미 그 자체가 어떤 틀에 갇혀 있다. 마찬가지로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비자본주의라는 구도를 거부한다. 말로는 쉬운데, 참 쉽지 않은 주장이다(이 주장의 오류가 아니라 곤혹스러움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룬다). 깁슨-그레엄은 이런 위계 때문에 “비자본주의는 이질성과 차이의 다양한 영역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헤게모니 담론에 포섭되는 것으로 재현”되고 자본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본다. 마치 “여성이 남성의 대립물이나 보완물이 아니라 특수성의 집합으로 인식되려면 남성 또한 특수성의 집합이 되어야” 하듯이, 자본주의도 그 자체로 통일되거나 완결된 틀이 아니라 특수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특수한 것들의 공존으로 이해하는 순간, 비자본주의도 “긍정적이고 특수한 존재로 이해할 조건”이 마련된다(85쪽). 특히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경제가 없는 것처럼 말했던 가정경제를 끌어들임으로써 경제를 재구성한다. 즉 “가정경제의 다양성과 착취에 대한 강조는 가정 이외의 분야에서의 계급다양성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준다.”(212쪽) 또한 깁슨-그레엄은 알튀세르에게 영향을 받은 중층결정이라는 렌즈로 보면 자본주의 각각이 환원불가능한 특수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이렇게 “대문자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차이들에게 길을 양보할 때, 비자본주의적 타자는 단수성과 종속에서 해방되어 차별화된 다중성으로 드러날 잠재력을 지닌다.”(88쪽)

 

요즘 내 고민 중 하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체념이 이 빌어먹을 사회를 지속시킨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자본주의의 착취와 영향력이지 대안이 아니다.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불가능을 얘기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자가발전하는 시스템이 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것으로 변한다. 그러면서 “지배하는 쪽은 독립적인 것”이 되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 자신의 타자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망각”된다. “반면 종속되는 쪽은 상대방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지배하는 쪽과 달리 지배당하는 쪽은 항상 부정적으로 규정된다”(193쪽) 이런 인식틀을 깨지 않으면 현실에 순응하거나 체념하게 된다. 그래서인이 깁슨-그레엄은 파격적으로 마커스의 강간 스크립트 분석을 자본주의에 적용한다.

슬럿워크가 성폭력에 관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듯이, 마커스는 여성이 강간의 희생자라는 인식에 도전한다. “지배적인 강간 스크립트에 도전하기 위해 마커스는 상당히 다른 두 개의 행동 경로를 제시한다. 하나는 스크립트 자체를 내부로부터 변화시키는 것, 즉 희생자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스크립트의 전형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강간 스크립트에 각인된 섹슈얼리티 담론과 거기에서 도출되는 합법성과 자연스러움에 도전하는 것이다. 두 방법 모두 지구화에 대한 대안적 대응을 고려할 때도 도움이 된다.”(222쪽) 초국적 자본에 짓밟히는 불쌍한 노동자라는 서술에서,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노동은 자본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이 남근을 비틀고 고환을 걷어찰 수 있듯이, 노동자도 자본가에 맞설 수 있고 때로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관계, 비자본주의 기업을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삼성이 한국을 떠나면 어떡할까’라는 걱정보다 ‘어차피 삼성은 한국을 떠나지 못하니 그들을 제대로 바꾸자’라는 투지가 생긴다. 모든 악의 근원인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만든 환상이다. ‘지구화의 희생양’이라는 도식을 버려야 비자본주의의 투기가 살아날 수 있다. 깁슨-그레엄은 “지구화의 각인들 중에서 다양한 과잉의 지점들을―즉 그러한 각인이 통제불가능한 것 혹은 확정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곳들, 혹은 비자본주의적 정체성이 새겨질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우리는 지구화에서 남성의 생식기나 남근의 속성을 약화시키고자 시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247쪽).

 

이렇듯 파격적인 주장을 일삼지만 이 책은 어떤 분명한 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시하지 못한다. 무엇을 규정하고 경계 지움으로써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다양한 시도들을 말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깁슨-그레엄의 공동체 경제를 어떤 특정한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속에 포함되지 못하는 시도들은 다른 시도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변할 수 있다. “사회와 경제의 재현들 그 자체가 하나의 탈중심적이고 무정형인 실재에 중심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탈 중심의 실재 그 자체가 항상 서로 상이하니까, 또 항상 변화하는 외부가 이들에게 변화무쌍하고 모순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들을 중층결정하니까 말이다.”(121쪽) 그러니 대안을 논하는 것이 다른 중심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어떤 해답을 제공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경제 현존 양측 모두에서 나타나는 이질공간heterospace을 해방시키려는 시도”(75쪽)이다. 이런 시도는 모든 형태의 착취를 한번에 없애겠다고 주장하지 않고 착취를 낳는 상황을 분석하고 그런 착취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나 조건을, 다양한 주체들이 접합될 수 있는 과정을 찾으려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가령 이런 질문들이다. “으레 좌절된 자의 처지라고 여겨지곤 하는 반자본주의 주체의 부정적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생각과 정서를, 어떤 기질과 태도를 지녀야 하며, 어떤 힘들을 길러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단순한 자본주의의 적대자를 넘어 ‘비자본주의’를 욕망하고 빚어낼 주체로 우뚝 설 수 있을까?”(22쪽)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헤게모니, 자본중심주의, 본질, 대문자 자본주의, 남근성을 전복시키려면 세 가지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언어의 정치: 경제와 경제적 가능성에 대해 참신하고 풍부한 그 지방만의 언어들을 만들어 내기”, “주체의 정치: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주체로 육성하기”, “집단행동의 정치: 대안적인 경제조직과 공간들이 특정 장소에 싹틀 수 있도록 공동 협력하기”(12쪽). 이런 정치를 통해 이미 그 끝을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민낯이 드러난다.


2. 한국 사회의 특이성은?


사실 한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비자본주의적 경제실천들이 있었으나, 한국 자본주의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그 영향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무시되어 왔다. 그렇게 평가할 수는 있지만 이미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경제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깁슨-그래함의 관점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편견을 부수는데 효과적이다. 아니, 강력하다.

 

다만 그 관점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경험들이 더 첨부되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깁슨-그레엄이 많이 거론하지 않는 건 국가이다. 한국의 역사를 반영하면 ‘그냥’ 국가나 근대국가가 아니라 식민지국가, 반공국가, 개발독재국가이다. 한국 자본주의‘들’의 발전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재벌을 뒷받침한 국가, 재벌과 결탁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깁슨-그레엄의 관점에 따른다면, 국가도 다양한 통치형태‘들’로 분해될 수 있다. 하지만 주체들이 어떻게든 시작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달리, 한국의 국가영역은 의지하는 주체가 진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어렵고 국가에 진입할 수 있는 주체는 제한된다. 이는 다양성을 억압하고 중심성을 강요한다. 그리고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년)에 나오듯, 정부와 재벌은 ‘유착’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넘어서 ‘합병’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명박과 정몽준이 그 단계를 현실화시켰고 나오미 클라인은 이를 ‘재난 자본주의’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국가를 고려하지 않으면 깁슨-그레엄이 말하는 정치의 가능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주체적인 역량이나 전략의 부재보다 주체의 등장 가능성 자체를 철저히 말살하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현실은 녹녹치가 않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은 비자본주의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논하는 곳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금융회사를 논하는 부분에서 깁슨-그레엄은 “어떤 회사는 독립적 상품생산의 현장으로서 비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원주의 ‘밝음신협’같은 곳을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금융회사를 자본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없기는 하다. 그렇지만 역으로 농협이나 수협, 축협같은 관제 협동조합이 존재하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특히나 이런 협동조합들이 “잉여노동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전유”하며 “생산관계에서의 이러한 차이들”을 낳지 않는다(90쪽)는 점을 고려한다면, 깁슨-그레엄의 관점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현실은 더욱더 복잡해진다.

 

이런 복잡함은 자영업에 대한 관점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깁슨-그레엄은 “라우즈는 미국 내 도시의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멕시코계 이주노동자들이 어떻게 임금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내면서 동시에 멕시코에서 소규모 가족농장이나 상점 운영과 같은 구분되는 삶의 형태를 유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에서 임금으로 벌어들인 돈이 생산 투자금으로 흡수되어 멕시코 경제 안의 비자본주의적 활동에 투자되는 것이다.…이 경우는 감염의 메타포를 통해 만들어지는 생산적 불일치의 놀라운 사례이다”(242쪽)라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한국은 자영업의 비중이 매우 높은 나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영업의 활성화가 한국 자본주의 내에 다양한 틈을 만들어왔는가, 라고 질문하면 그렇지 않다는 답을 얻을 수 있다.

 

그건 우리 삶의 거대한 힘들이 재벌들로 흡수되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정녕 한국의 자영업들이 비자본주의적인 경로를 만들고 있나? <알바연대>가 조사해서 발표하는 사례들을 보면, 많은 자영업자들이 ‘노동력의 판매’와 ‘인격의 판매’를 혼동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선 착취논리에 젖어 있다. 이는 자본주의 고용과 착취에 대한 긍정적인 대안을 한국의 자영업이 자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이 영세 자영업자에 머물고 있고, 프랜차이즈에 종속된 자영업 노동자로 변하고 있다는 점은 그 가능성을 자신할 수 없게 한다.

 

또한 공정무역은 ‘원조가 아니라 무역’을 주장했지만 사실상 원조의 색깔을 벗어나지 못했고, 우리사주조합이 노동자의 개별화를 부추기며, 소액주주운동이 주주자본주의를 강화시키며,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이 비자본주의를 확장시키기는커녕 정부에 포획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작년 11월 깁슨의 한국 방문에서도 이 의문은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아울러 깁슨-그레엄의 관점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농사이다. 굉장히 많은 경제들이 있을 수 있지만 살림살이의 기본은 먹는 것이다. 농업은 단지 산업의 문제로, 특히 1차 산업의 문제로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이 대안경제의 핵심이라 얘기할 수 있다. 그래서 미즈와 벤홀트-톰젠은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도서출판 동연, 2013년)에서 명확하게 소농경제가 자급경제의 기초라고 주장하면서 “자급을 위한 생산수단인 땅에 대한 접근을 기초로 하는, 상향식의 상호관계를 통해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이런 어려움들이 깁슨-그레엄의 관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이 관점은 본질과 중심의 논리에 빠져 사람과 삶을 보지 못하는 이론, 도플갱어식 논리에 빠져 있는 이론을 극복하게 한다. 다만 이 관점을 한국 현실에 뿌리내리게 하려면 현장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이 마주 앉아 차분히 방법을 찾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한국의 특이성을 찾고 다시 이론을 가공하는 그런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는 정말 그 끝을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를 맞닥뜨릴 수 있을 것 같다.

1. 들어가는 말


협동조합‘과’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건 어떤 효과를 가진다. 구분되어야 하지만 분리될 수 없는 두 개념이 그냥 병렬적으로 나열된 느낌이다. 구분이 분리는 아니어야 하는데, 한국사회에서는 분리의 느낌이 강하다. 여유가 있으면 필요할 때 한번 접목해 봐야지, 이런 느낌을 준다.

 

이렇게 바꿔서 물어보자. 흔히 협동조합을 사업체이자 결사체라고 한다. 흔히 사업체의 운영방식을 경영으로 표현하고, 결사체의 운영원리를 민주주의라 표현한다. 그런데 이게 맞을까? 그렇다면 협동조합 활동가, 실무자, 조합원들은 경제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협동조합은 민주적인 통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으니 자연스레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민주적인 통제’는 뭘 말하는 걸까? 조합원이 통제하는 민주적인 조직이고 1인 1표를 가지고 있다는 2원칙에 대한 설명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민주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협동조합 7원칙 중 두 번째 원칙은 다른 여섯 가지 원칙과 어떤 연관성을 가질까?

 

또 협동조합운동의 오랜 역사를 말한다. 그런데 역사는 끊임없이 현실과 맞닥뜨리며 전진하고 후퇴한다. 협동조합운동의 역사가 만들어온 구조가 있다면 현실의 변화에 맞춰 바뀌어야 할 구조도 있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은 현실의 변화에 발맞춰 어떻게 자신의 구조를 변화시켜 왔을까? 협동조합기본법에 따라 대다수 협동조합들의 정관이 똑같이 만들어지고 있고 그건 내부구조나 활동양식도 동일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똑같은 구조를 가진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의 다양한 욕구와 열망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까?



2. 서기 2020년의 협동조합운동은?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는 『래디컬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여러 가지 오해들을 지적한다. 지금 현실과 관련된 오해들을 추려서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 민주주의는 민중의 복지를 돌보는 것이다.

- 민주주의는 민중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가지는 것이다.

- 민주주의는 경제발전이다.

- 민주주의는 자유선거이다.

- 민주주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이다.

- 민주주의는 민중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다.

 

러미스는 이런 오해들을 반박하면서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를 가지는 게 아니라 민중이 중요한 결정을 직접 내리는 것이고, 발전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규모를 결정하는 것이며, 정치가 선거라는 형식적인 장으로 제한될 수 없으며,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다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갈라질 수 없고, 민주주의는 민중이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제도나 원리를 일방적으로 따르는 게 아니라 민중이 힘을 가지고 있는 상태, 출렁출렁 유동적인 상태라는 게 러미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은 어떠한가?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이 출렁거리며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장인가? 1980년에 레이들로 박사는 그 유명한 『레이들로 보고서』에서 협동조합의 민주적 특성이 협동조합의 모든 측면에서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특히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안했다.


- 조합원간에 어느 정도의 균질성과 연대의 기초가 되는 조직적 결속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각각 2ha의 농지를 가진 빈농 500명과 2000ha씩 소유한 부농 5명으로 조합원이 구성될 경우, 대농의 큰 사업량이 협동조합의 생존능력에 기여할지 몰라도 민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농업협동조합의 기반은 되지 못할 것이다.

- 민주주의는 투표율만이 아니라 조합원이 얼마나 참여하느냐에 의하여 측정된다. 

- 완전히 민주적인 협동조합에서는 서비스의 실제 이용자인 조합원만이 임원과 이사를 임명하고 선출할 권리를 가진다.

- 민주적인 협동조합은 효과적인 교육프로그램과 모든 단계의 지도자 훈련의 기회를 제공한다.

- 민주적인 협동조합에서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상징적 지위가 아니라 완전한 의미에서 조합원자격을 가져야 한다. 별도의 “남성의 역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차별적인 “여성의 역할”도 존재하지 않는다.

- 사업장에서 종업원 사이의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협동조합은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한다고 할 수 없다.

- 조직의 민주적인 성격은 조합원에게 자유롭게 정보를 제공하고, 정책결정 과정에서 조합원이 의견을 제출하고 피드백(feed-back)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느냐에 의하여 판별할 수 있다.

-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는 협동조합에서는 모든 보고나 정보는 알기 쉬운 형태로 제공되어야 하며, 소수민족을 위해서도 그들의 언어로 작성되어야 한다.

- 중요한 결정은 위계질서에 따른 명령보다도 전체의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민주주의의 깊이는 관리구조의 최하위 단위에서 제출된 제안에 따라 얼마나 결정되느냐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

- 민주주의에서는 전문가나 전문기술관료가 조합원에게 상담과 조언, 그리고 권고를 듣고, 최종적으로는 평조합원이 결정한다.


레이들로 박사는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을 내다보며 이를 과제로 제시했는데, 이 과제들 중 지금 해결되고 있는 건 얼마나 될까? 조합원들 사이에는 빈부를 넘어선 조직적인 결속이 이루어지고 있나? 조합원의 참여율은 어떻게 측정되고 있나? 임원과 이사는 어떻게 선임되고 있나? 조합은 어느 정도의 교육과 지도자 훈련 기회를 제공하고 있나? 조합 내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구분되지 않고 다양한 남성들/여성들의 정체성이 인정되고 있나? 실무자나 활동가들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나? 조합의 정책결정과정에 조합원들은 어느 정도로 개입할 수 있나? 조합은 다양한 언어, 쉬운 언어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나? 가장 아래에서 제출된 제안이 어떻게 전체의 합의로 모아지고 있나? 평조합원이 조합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있나?

 

현재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이런 물음에 어느 정도로 답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아뿔싸, 이미 시간은 2000년을 훌쩍 넘어 2014년이 되었다. 과거의 협동조합운동은 시대를 앞선 과감한 결정들을 내렸다. 그런데 지금의 협동조합운동은 어떠한가?

 

2013년 1월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은 2020년을 내다보면서 『협동조합 10년을 위한 청사진』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있지만 눈에 띄는 내용은 조합원제도와 지배구조에 있어 참여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골자를 살펴보면,

 

- 구체적으로 청소년과 젊은이에 초점에 맞춰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구조를 탐색하여 참여와 관계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 구조가 조정될 수 있고 그럴 필요가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 민주적 참여와 관계, 관여에 혁신을 유도하고 모범사례를 찾아내서 전파하고 유지시킨다

- 모든 협동조합이 조합원 전략을 채택하고 매년 전략을 보고하도록 지원한다.

- 소셜미디어를 통한 논평, 대화, 논쟁, 관계와 같은 여타의 혁신적이면서 전통적인 참여의 형태가 조합원제도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리고 조합원, 후원자, 추종세력과 같은 서로 다른 참여의 형태가 이러한 상황에서 적절한지 여부를 고려해서 전통적 조합원제도의 요소들을 검토한다.

- 공동생산과 인적자원관리를 포함하여 기업조직의 맥락에서 혁신분야의 리더십을 확보한다.

- 개별적인 추진과제로서 자본이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협동조합 특성을 저해하거나 손상시지 않으면서 자본 제공자를 위한 조합원과는 다른 제한적인 형태의 참여를 검토한다.


아이쿱생협연구소가 번역한 이 보고서를 여기저기서 읽은 것으로 아는데, 협동조합운동의 전략으로 어느 정도로 고민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청소년과 청년의 특성을 반영하는 참여구조가 고민되고 있는지, 협동조합 내의 혁신적인 참여 사례가 전파/공유되고 있는 건지, 조합원의 참여를 끌어낼 전략이 매년 수립되고 있는 건지, 단순 홍보용 수단을 넘어 소셜 미디어가 쌍방향 소통의 수단이 되고 전통적인 참여형태와 접목되며 새로운 의사소통/의사결정구조를 만들고 있는 건지,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인 리더십이 확보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맨 마지막의 자본확보와 관련해 조합원의 참여형태를 다각화하는 문제 정도만 사업의 필요성 때문에 논의되고 있다.

 

『레이들로 보고서』나  『협동조합 10년을 위한 청사진』과 더불어 우리는 한국의 협동조합운동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그런 노력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나? 협동조합기본법, 사회적경제기본법 등의 제도화와 관련된 논의들은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지만 협동조합의 내실을 다지려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우리는 정말 서기 2020년의 협동조합운동을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매번 땜질하듯 단기적인 방법을 얘기하는 것 말고 어떤 장기적인 전망을 세우고 있나? 20세기 협동조합은 21세기 협동조합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새로운 세대구성과 사회조건의 변화를 반영할 수 있을까?



3. 한국사회와 협동조합, 민주주의


협동조합이 ‘섬’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협동조합의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수준인가?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장은 어디인가? 마을, 학교, 공장, 사무실,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미디어, SNS, 어디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느끼고 경험하며 그 감각과 방법을 키우고 있을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조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조직은 어떤 조직일까? 우리는 어디서 고정되고 획일화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민주주의‘들’을 활성화시키고 있을까? 무기력한 대의민주주의와 당위적인 직접민주주의의 대립을 넘어설 방법들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을까?

 

최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무슨 민주주의가 더 필요하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지금으로도 민주주의는 충분하고 민주주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지나쳐서 문제이고, 외국에서 얘기되듯이 현재의 문제는 과잉된 민주주의(demorecracy)라는 거다. 지금껏 자기 몫을 주장하지 못했거나 자기 삶과 연관된 결정들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공론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기득권층은 기함하며 이들을 막아선다. 마치 당장 무슨 변고가 일어날 것처럼, 사회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한 때 몫 없는 자들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유행했다. 몫 없는 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주체이니 치안의 질서에서 벗어나 강하게 ‘아니오’라고 외치며 정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건데,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치안의 힘이 너무 강하다. 제주도 강정마을, 밀양, 청도, 여러 지역에서 마을이 위협받고 있고,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콜트콜텍, 여러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내몰리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권리의 목록을 제 아무리 길게 만들고 읽어줘도 그것을 실제로 쓸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다. 몰라서 못 쓰는 게 아니라 알아도 못 쓰고 쓸 수 없는 게 약자의 권리 아니던가. 몫을 논하는 순간 돌아오는 이 폭력 앞에서 민주주의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한때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말도 유행했다. 개념에 앞서 한국에서 노동자와 청소년, 소수자들은 이미 헐벗은 삶을 살고 있다. 내가 그 현장과 자리에 서지 않기를 원할 뿐 우리는 ‘죽음의 뺑뺑이’를 돌고 있다.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존재들이다. 무기력한 민주주의가 이 뺑뺑이를 멈출 수 있을까?

 

사실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좀 과잉될 때에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을 동등하게 대해달라는 목소리와 개입이 있어야 기득권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치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잉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기득권이 위협받고 있음을 뜻하기에, 어쩌면 우리가 조금 더 본질에 다가서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누가 과잉을 주장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누가 민주주의의 과잉을 이야기하는가?

 

그리고 단순히 자기 몫을 못 챙기는 사람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몫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장 자체가 없다. 중요한 정치의제는 언제나 중앙이나 외부에서 논의되다 삶으로 툭 떨어진다. ‘자아성찰’과 ‘자기판단’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이고 실제 삶에는 그런 과정이 없다. 수많은 착시현상들이 판단을 방해하니 판단력은 더욱 떨어지고, 똑똑한 사람들이 반드시 좋은 시민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대략난감이다.

 

이런 한국사회에서 스스로 주체로 서지 못하는 민주주의, 서로를 알아보고 동등하게 인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 새로운 관계와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 민주주의는 가식이다. 내가 저들을 위해 권리목록을 만들고 보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같이 살고 있는가?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마주보고 있는가?

 

우리 시대의 어려움은 정치와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공공영역이나 공론장은 계속 줄어드는데, 권리를 교육받은 시민들은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도 생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건 공리이지만,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공리는 분노보다 냉소를 낳기 쉽다. 이 냉소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 다른 권리목록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의식화와 교육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지만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공공성은 더욱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것은 국가와 시장, 시민 사회의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엉키거나 충돌하는 지점이 늘어나고, 기후 변화나 먹을거리, 에너지 문제 등 국경을 넘나드는 사안들이 많아지는 우리 삶을 반영한다. 더 이상 혼자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고, 다가올 파국을 함께 대비해야 하기에 공공성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물론 공공성 자체가 그런 다양한 사안에 관한 모범 답안은 아니다. 공공성은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같은 세계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안을 함께 논의하며 민주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민주주의 없이도 공공사업의 진행은 가능하지만 공공의 이익은 민주주의 없이 확보될 수 없다. 우리가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사고해야 하는 건 우리의 자유를 위해, 더 솔직하게는 우리의 삶을 위해서다. 협동조합운동은 조합원의 자유와 공공성 확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협동조합운동이 힘을 가지려면 이런 많은 질문들에 하나씩 답을 찾으며 사회의 변화에 동참해야 한다. 협동조합이 모든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사회의 변화가 조합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끌려가지 말고 이끌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리차드 세넷(R. Sennett)은 『투게더』(현암사, 2013년)에서 협동과 관련해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협력에도 기술이 필요하고, 세넷은 실험과 소통이라는 기술에 주목한다. 이 둘은 서로 연관되는데, “실험은 새로운 일을 하는 것,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를 구축하는 것을 뜻한다. 젋은이들은 반복적으로, 점점 더 큰 규모로 연습을 해나가면서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초기의 소통은 모호하다. 아기들이 보내는 신호가 애매모호한 것처럼 말이다. 놀이 규칙을 협상할 수 있을 만큼 자라면 아이들은 그 애매모호성을 협상하고 해소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방이 대답하기 전에 무엇을 말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해석하는 기술, 발언만이 아니라 동작과 침묵까지 파악하는 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잘 관찰하기 위해 스스로는 말을 자제해야 할지는 몰라도, 그 결과 나누게 되는 대화는 더 풍부한 보상을 가져다줄 것이다. 더 협동적이며 더 대화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이런 기술들을 연마해야 한다.

 

엄기호 역시 소통을 얘기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 “우리에겐 소리로만 전달되는 고통을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하고요. 그런데 누구나 자신의 고통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하면서, 말 아닌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고통의 목소리마저 독점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지금 누가 고통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했는가를 먼저 관찰하고 찾아내서 그 소리와 말을 공적인 무대에 세우는 것이 민주주의라 생각하고, 이런 점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운동을 외치면서 우리 사회가 단속사회, “자기를 ‘단속(團束)’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차단하며 동일성에만 머무르며 자기 삶의 연속성조차 끊어져버린 상태”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사회를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더딘 민주주의이지만 한국사회에서도 이미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참여예산제도, 타운홀미팅, 어큐파이(occupy), 공유공간, 희망버스, SNS를 통한 이슈화 등. 이변 변화와 협동조합이 무관할까? 사회는 변하고 있는데 협동조합은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섬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4. 조합원주권과 민주주의


한살림운동은 생산자/소비자협동조합을 뛰어넘는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라는 중요한 화두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이 화두는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조합원주권은 이 하나됨 속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조합원이라는 부름은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규정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역사를 보면 생산자/노동자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은 갈등을 거듭해 왔다. 소비자협동조합은 소비하는 조합원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사실 소비자협동조합이라 하더라도 조합원 주권은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조합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요구한다. 협동조합은 소비자에서 조합원으로 건너갈 징검다리를 놓아야 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계되는 협동조합이라면 같은 조합원으로 묶이는 이 양자에게 어떤 역할과 권한을 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안 맥퍼슨 교수가 지적했듯이 협동조합은 주권을 조합의 여러 의사결정기구가 아니라 조합원에게 줘야 한다. 조합원에게 주권이 있다 함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무기력한 반복이 아니라 조합 내의 주요한 의사결정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하고 조합원들이 그 과정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이 그런 과정을 조직의 목적 중에서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개별 소비자로서가 아니라 공통의 필요와 열망을 가진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시민들이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 한살림운동에서도 이런 주장이 등장한다.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이었던 이순로는 “죽어가는 밥상, 생명을 살리고 갈라진 삶을 더불어 사는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길, 그것은 미리 깨달은 사람, 올바른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해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씩하나씩 실천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같은 뜻으로 그동안 한살림을 많은 가족들이 이용해 왔지만 이용만 해왔지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 발짝 더 나아가 손님의 자리에서 적극적인 살림꾼으로 탈바꿈한 것이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이라 하겠습니다. 협동조합에 참여하게 되면 계획소비와 책임생산이 가능해져서 개별단위로 남아 있을 때 이용할 수 없었던 물품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고, 공동구입, 공동나눔 속에 개인발전과 참삶의 맛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살림운동은 무농약 농산물을 어떤 특정한 계층에 공급하는 이기주의적인 활동을 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협동적으로 만나 인간과 대지의 거룩한 생명을 살려내며 불합리한 삶의 모습을 걷어치우는 ‘함께 살림’ 운동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며 작은 힘을 모아서 꼭 해야 할,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함께 합시다.”라고 강조했다.2) 이순로는 물품을 이용하는 손님이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되려는 노력을, 공동체 속에서 참삶을 찾는 협동운동을 강조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래서 소비에는 ‘공부’가 중요하다. 소비영역의 활동에서 한살림의 특징을 찾는다면 공부모임에서 찾을 수 있다. “초창기 한살림을 더욱 한살림답게 한 것은 회원들과 진행한 공부였다. 1990년 4~5월에 걸쳐 열린 과천지역 한살림 공개강좌는 ‘공부하는 어머니는 생명을 키우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주제를 내걸었다. 매월 정기강좌가 진행되고, 화곡이나 관악, 과천 등 활동 주체가 꾸려지고, 모임이 튼튼하게 꾸려진 곳에서는 지역강좌도 마련되었다. 공동체에서 스스로 교육 자료를 발행하기도 했다.”3) 외부의 전문가나 지식인을 불러오는 강좌나 스스로 만든 교육과정, 이런 다양한 공부들이 소비자의 의식을 조합원으로 변화시켰다. 이는 개별화된 소비자를 함께 소비하는 공동체로 조직했다. 지금도 이런 활동들이 ‘교육’과 ‘자주공부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역한살림이 다양한 주제로 교육을 진행하고 지역의 식생활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조합원 중 기초조직에 참여하는 비율이 1% 대라는 점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황이다. 마을모임, 소모임, 매장모임 등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그 모임들이 조합원의 ‘필요’와 ‘열망’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장이 되고 있는지는 점검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한살림 회원 생활 수칙’4)은 지금도 되새길 만한 수칙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이웃과 더불어 깨끗한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입니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사회 속에서 이 세상은 온갖 오염으로 정작 모든 생명체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눈앞의 이익과 남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천하여 한살림을 이루고자 합니다.

- 언제나 나의 존엄함을 생각합니다.

- 나를 솔직하게 느낄 수 있는 기도와 수행을 생활화합니다.

- 힘닿는 대로 봉사하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 우리말 우리 글을 바로 씁니다.

- 음식은 먹을 만큼만 간단하게 조리합니다.

- 합성세재 대신 비누를 씁니다.

- 천기저귀와 면생리대를 씁니다.

- 쓰레기 양을 최소로 줄입니다.

- 유행을 따르지 않습니다.

-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무분별한 토지개발을 반대합니다.

-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합니다.

- 내가 먼저 인사합니다.

- 아이들에게 공동생활에 필요한 예의를 가르칩니다.

- 시간을 잘 지킵니다.

- 적은 액수라도 매달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고, 사회운동단체에 가입해서 후원합니다.

- 지역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합니다.

- 생산자에게 편지를 하거나, 생산지를 방문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육류의 소비를 줄이고, 자급 가능한 곡식과 채소 중심의 식생활로 바꿔나갑니다.

- 에너지를 절약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 작은 생명체라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 서로를 존중하는 말을 씁니다.

- 길에서 마주하는 아이도 우리 아이로 보살핍니다.

- 시설을 이용하는 놀이보다 자연 안에서 놉니다.

- 한살림 물건을 집을 때 ‘내가 작은 것 고르면 누가 큰 것 먹겠지’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한살림운동을 이웃에 권하여 함께 펼쳐갑니다.

- 환경보전형 농업(유기농업) 육성에 힘씁니다.


수칙은 존재하는데 이 수칙에 따라 지금 이곳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은 존재하는가? 수칙을 수련하는 조합원은 얼마나 존재할까?

 

그리고 조합원 주권이 실현되는 장은 어디인가? 총회인가, 이사회인가? 매장인가? 인터넷 장보기인가? 조합원의 주권이 실현되는 구체적인 장이 있고, 조합원이 그 장의 영향을 받으며 조합원 의식을 강화시켜야 협동조합이 정체성이 강화되고 협동운동이 확장될 수 있다. 마거릿 콘(M. Kohn)은 이런 협동조합운동의 확장을 ‘감염’으로 본다. “물리적 접촉으로 새롭고 위험한 이념의 확산이 촉진된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출신이 다양한 회원과 연대 구조, 영토적 기반을 확보하며 정치 동원의 토대로 구실하기에 아주 적합한 조직”이었고, “생계를 위해 충분한 수입을 얻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기부금에 기댄 것이 아니라 상인이나 중개인에게로 돌아갈 잉여가치의 일부를 자원으로 나누어” 줬다. 그러면서 협동조합은 “다양한 농민과 노동자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정치적․경제적 투쟁을 위한 자원을 획득하는 방식이 되었”고, “그러한 자원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대감, 즉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발생한 구조적 변화의 결과로 비슷한 지위 하락을 경험하던 다른 개인들과의 수평적인 유대감이었다.”5) 주권은 수평적인 유대감 속에서만 제 몫을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를 이룰 방법을 찾는 건 여전히 과제이다.



5. 나가며


이 많은 과제들을 한꺼번에 모두 해결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회현실의 변화에 맞추어, 때로는 그 변화를 거스르며 자기 정체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협동조합이 무엇을 할 것인지, 그 속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그와 관련해 조직구조를 어떻게 바꾸고 내부의 역량을 강화시킬지, 조합원들과의 접점을 어떻게 만들고 주권을 강화시킬지, 이런 부분들에 대한 고민이 하나씩 진행되며 협동조합운동의 중장기적인 발전계획을 구상해야지만 2020년의 협동조합운동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나하나의 협동조합들이 자본주의 속에 틈을 만들고 조금씩 역량을 강화시켜도 그것이 하나의 섬이 되어버린다면 그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

 

요즘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이념에 치우쳐 있다는 평가를 간혹 듣는데, 대체 그 이념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형태도 없이 공허하고 흐릿하게 나열된 것은 이념이 아니다. 이념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좌표이다. 사기업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만 협동조합이 존재한다면 그건 사회현실을 바꿀 수 없을뿐더러 대안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망감을 안겨준다. 우리 시대의 냉소주의와 맞서려면 운동이 자기 원칙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념을 바로 세워야 한다. 녹색이 ‘녹색성장’으로 왜곡된 시대, 협동조합이 ‘창조경제’로 둔갑되는 시대일수록 이념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도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에 이념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이념과 그 이념을 실현할 구체적인 사업들이 드러나지 않는 한, 우리는 매우 공허한 이야기들만 서로 주고받을 것이라 믿는다. 반면에 이념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방법은 생존전략이기에 구체적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마취제 놓듯이 몽롱하게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진짜 실용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생존을 이야기할까? 세월호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은 몇몇 정치인의 무능이 아니라 정부시스템의 무능이고, 삼성그룹을 통해 증명된 것은 시장의 부패이다. 이 무능과 부패 속에서 침몰하는, 어쩌면 이미 침몰해버린 것은 사회이다. 이 침몰을 이야기하지 않고 대안을 얘기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에 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풀뿌리 보수주의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실감없이 겉도는 민주주의를 내실 있게 만들려면 삶의 현장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민주주의의 원리는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치’다. 그런데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는 민중이 권력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자처하는 ‘민중의 정치’라는 의미를 제거하고, ‘민중에 의한 정치’를 선거로 제한했으며, ‘민중을 위한 정치’를 민중을 대상화하는 정치적 수사로 만들었다. 특히 한국처럼 매우 중앙 집중화된 대의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권력과 화폐, 언론을 소유한 기득권층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정당화하고 민중의 이름을 팔아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변질됐다. 기득권층에 맞서 민주 정부를 수립하려는 열망은 있었지만, 그 열정이 정작 자신이 일하고 생활하는 지역사회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아 민주주의는 겉도는 말이 돼버렸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의 증대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 민주주의는 다시금 자신의 본래 의미인 ‘민중성’을 확보하고 실현할 것을 요구받고 있고, 풀뿌리민주주의는 이런 요구에 보내는 시대적인 응답이라 얘기할 수 있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주체에 관련해서 보면 풀뿌리민주주의는 ‘시민없는 시민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시민들을 삶의 주체로 세우려는 이론이다. 과거의 사회운동이 ‘민주 대 반민주’나 ‘국가 대 시민사회’, ‘합리성 대 비합리성’이라는 대립 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이제는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시민운동 단체들이 양적인 면에서 성장을 거듭하지만, 여기에 발맞춰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증가하거나 시민사회의 구조가 내부적으로 탄탄해지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한국의 시민사회가 내부 구조 면에서 아주 취약하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시민운동 단체들의 내부 의사 결정 과정이나 의사소통 구조가 비민주적이라는 지적도 계속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그리고 단순히 제도나 정책을 바꾸는 게 아니라 시민 주체를 부각하고 성장하게 하는 ‘과정’으로 풀뿌리민주주의는 주목받고 있다.


또한 수도권 집중도가 매우 심각한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은 지역과 지방을 향한 관심이기도 하다. 수도권 문제는 단지 인구 집중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간 불균등 발전과 지역 격차를 가져온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부 식민지’라는 개념이 주장될 정도로 한국의 상황은 심각하다.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 체계는 거의 변화 없이 지금까지 유지돼왔다. 해방 이후 실시된 지방자치 제도가 박정희 정부 때 중단된 뒤 1991년에 부활하기는 했지만 중앙이 기획하고 지방/지역이 실행하는 구조는 지금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은 지방자치와 주민자치, 자치와 자급을 향한 관심에도 맞닿아 있다. 지역사회의 역량을 강화하고 대안적인 지역사회 비전을 만드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풀뿌리민주주의가 강조된다.


그런데 이렇게 높아지는 관심에 견줘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진행된 연구들을 살펴보면, 풀뿌리민주주의라는 말은 주로 진행 중인 지방자치 운동이나 지방정부의 성과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 독자적인 이론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진지한 이론적 고찰보다는 지역운동 사례를 다루기 위한 방법으로 풀뿌리민주주의가 거론되는 정도였다. 상향식 민주주의라는 관점이나 시민사회 이론으로 풀뿌리민주주의를 설명하려 했지만, 개별 사례를 부각시키거나 부분적인 설명을 시도할 뿐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인 지향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또한 시기 측면에서도 기존 연구들은 한국 사회의 풀뿌리민주주의의 역사를 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시기에서만 찾고 한국 현대사와 풀뿌리민주주의의 관계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논의가 부족하고 논의 방식이 협소한 현실은 한국뿐 아니라 해외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영미권에서 진행된 논의들도 주로 지역 거버넌스local governance나 지역 정치local politics, 공동체 권력community power 차원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다룬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작은 지역사회나 소규모 지역 공동체에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개념의 타당성을 주로 공동체운동 같은 실증적인 사례 연구를 통해서만 증명하려 하고, 하나의 이념과 지향으로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의미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론적인 기반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운동은 1968년 이후 전세계에서, 그리고 한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삼은 풀뿌리 주민운동 단체나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경험을 축적하고 역사를 만들어왔다. 국가권력과 재벌의 억압과 간섭을 받으면서도 풀뿌리운동은 지역사회에 서서히 뿌리를 내려왔고, 1991년에 지방자치제가 부활된 뒤에는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을 넓히고 있다. 참여예산운동, 학교급식이나 보육, 주민 참여에 관련된 조례제정 또는 개정 운동, 마을 만들기, 협동조합운동, 정보 공개와 주민참여운동 등 한국 사회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풀뿌리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렇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운동의 경험을 비교하고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 필요해졌지만 관련된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 풀뿌리민주주의에서 이론과 경험의 불균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려 한다.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접근하는 것은 크게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책은 아나키즘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전통을 복원하려 한다. 보통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연구들은 1987년 이후 시기만 다루거나 1991년 지방자치 제도가 부활된 이후의 시기만을 다룬다. 그 전까지는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에 군사독재가 지배하던 시기라 사실 민주주의를 얘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떤 제도가 뿌리를 내리려면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된 전통이 필요하다. 특히 시민 참여의 경우에는 그런 전통이 더더욱 절실하고 또 필요하다. 그런데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논의들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런 전통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가 풀뿌리민주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조선 후기에 생겨난 두레 같은 공동 노동 조직이나 계 같은 자조 모임들은 내부에 민주주의의 맹아를 품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회의하는 전통’이 두레나 동계, 촌회 같은 마을 단위 모임에 전해지고 있었고, 일터와 삶터에서 모두 협동이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그런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수용된 아나키즘은 대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사상이나 공자나 맹자의 원시 유교나 노자의 무치주의無治主義 등 한국의 전통사상하고 어울리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1930년대까지 주요한 사회사상으로 자리 잡은 아나키즘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이런 흐름은 직간접으로 풀뿌리민주주의에 연관된다. 예를 들어 1945년 9월 해방 직후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단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우리는 독재정치를 배격하고 완전한 자유의 조선건설을 기한다. 우리는 집산주의 경제제도를 거부하고 지방 분산주의의 실현을 기한다. 우리는 상호부조에 의한 인류일가이상人類一家理想의 구현을 기한다”는 강령을 선포했는데, 이런 주장은 풀뿌리민주주의하고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전통과 그 맥을 살리는 일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우리 전통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한편 이론 연구하고 다르게 현실의 실천 운동은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논의들을 민초민주주의民草民主主義라는 형태로 발전시키기도 했다(민초라는 표현은 동학의 뜻을 이어받아 근대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려한 생명운동에서 주로 사용됐다). 1970년대 이후 원주에서 무위당 장일순 등이 시작한 생명운동은 그 뒤 한살림모임이나 생명민회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이런 시도들은 “낭비와 파괴를 구조적으로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기구로부터 가능한 한의 독립성을 유지하여, 자치적 ‘해방구’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장일순 2005)인 동시에 “민초들은 스스로 그 무의의 탁월한 자연 생명의 질서를 깨달아 스스로 변화하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여 나아간다”(김지하 2003)는 점을 강조했다. 아나키즘이 내포한 사회혁명의 문제의식 역시 이런 지향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아나키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사회 풀뿌리민주주의의 전통은 훨씬 넓게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전통과 그 맥을 살리는 것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우리 전통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런 내용을 2부에서 다루려 한다.


둘째, 아나키즘의 이론적 특징, 특히 분권과 연방주의는 풀뿌리민주주의에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권력을 거부한다는 오해에 시달리고 무정부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프루동P. Proudhon이나 크로폿킨P. Kropotkin 같은 아나키스트들은 자유로운 코뮌에서 권력의 존재를 인정했다. 프루동은 자치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위대한 원리가 연방주의에서 자연스레 구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 지방의 자치를 보장하고 권력이 상향식으로 구성되는 연방주의만이 시민의 참된 주권을 보장하고 시민이 대표/대리인들을 해임하거나 소환하면서 자신들의 일반의지를 실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크로폿킨 역시 캐나다와 미국의 연방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러시아로 돌아간 뒤에는 소비에트의 연방화를 주장했다. 크로폿킨의 아나키즘은 권력 자체를 전면 거부하는 방식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하향식으로 강요당하는 국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민중의 의지를 거부하는 국가를 반대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크로폿킨은 국가를 부정했지만 권력이 분산된 연방 공화국을 지지했고 실제로 자치가 보장되는 연방 정부를 구상했다.


아나키즘의 이런 권력관과 정치 이론은 시민 참여의 활성화와 자치를 주장하는 풀뿌리민주주의하고 잘 어울린다. 그리고 풀뿌리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한 지류가 아니라 ‘민주주의 이론’으로 다루려면 작은 지역 공동체뿐 아니라 국가 단위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에서는 개별 정치 공동체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 안의 국가’를 지향하는 연방주의야말로 풀뿌리민주주의가 지향할 사회 모델로 이야기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풀뿌리민주주의와 연방주의를 함께 다루는 논의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3부에서는 아나키즘의 권력관과 연방주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려 한다.


셋째, 아나키즘의 원리를 따르는 협동조합운동이나 대안 공동체, 대안 학교 등은 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흐름이다. 아나키즘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을 장려해왔다. 예를 들어 공동육아나 대안 학교를 만드는 실천, 생산협동조합이나 소비협동조합을 만들어 농촌과 도시의 ‘서로 살림相生’을 앞당기려는 실천, 농촌과 도시에 대안적인 마을 공동체를 세우려는 실천, 대안적인 의료 체계를 만들려는 실천 등 다양한 실천이 있었고, 아나키즘은 이런 삶의 변화를 통해서만 국가를 대신할 힘이, 국가 없이 살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크로폿킨은 협동조합의 ‘보편적인 복지와 생산자들의 복지’라는 특성이 사회적이고 건전한 정신을 기르는 중요한 기구라고 봤다. 이런 협동조합들이 사회의 계급 구조를 직접 해체하지는 못하지만, 작은 마을에서는 사회적인 차별을 실질적으로 완화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돕고 향상시킬 뿐 아니라 공통의 필요를 구성함으로써 생활을 조직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런 활동이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국제적인 활동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활동으로 다져진 경험은 시민의 자존감을 높인다.


또한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임금 제도의 폐지 또는 개인이나 코뮌 간의 자유로운 협약을 통한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은 경제를 이해관계나 수익이나 화폐가치의 관점이 아니라 필요와 호혜와 상생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마땅한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이 대안으로 얘기되지만 전체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자치가 자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살림살이는 풀뿌리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제다. 아나키즘은 이런 과제를 푸는 데 여러 시사점을 준다. 이런 내용을 4부에서 다루려 한다.


넷째, 풀뿌리민주주의는 단순히 아래에서 시작해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 ‘운동의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풀뿌리민주주의는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권력이 우리를 밀어내고 갈아엎으려 해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버텨보자는, 그리고 서로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이다. 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따라서 운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변화의 과정이면서 그것 자체가 변화의 목표다.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은 특정한 역사 법칙을 따르거나 특정한 세력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은 역사가 역사적 유물론이나 과학적 사회주의 같은 특정한 발전 법칙에 따라 실현된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을 거부했다. 새로운 사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이 미리 그려질 수 없다고 본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사회란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집단적 활력을 통해 구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정치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 중심의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풀뿌리민주주의의 특징도 이런 특성에 무관하지 않다. 최근 ‘오큐파이occupy 운동’을 비롯해 새롭게 등장하는 아나키즘 운동도 이런 점을 강조한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가치 또한 자기의식을 되찾은 시민이 스스로 세상을 바꾸는 데 있다. 정치적으로 소외된 시민이 정치의 주체로 성장해 공동체를 이끈다는 생각은 각각의 시민이 정치적 가능성과 잠재성을 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시민운동이 일방적인 선동보다 지속적인 대화와 상호 이해를 지향할 때만 가능하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여러 논의들이 이 점을 늘 강조했지만, 당위적인 수준이었을 뿐 이론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아나키즘은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다. 5부에서 이런 내용을 다루려 한다.


마지막 6부에서는 아나키즘의 이념을 통해 한국 풀뿌리민주주의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려 한다. 아나키즘의 연방주의는 한국의 풀뿌리운동이 지방자치라는 다분히 형식화된 틀을 넘어 새로운 국가 구조를 고민하게 한다.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고 연합의 논리를 실현하는 연방주의는 다양한 풀뿌리들이 상생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호혜와 자급의 경제는 풀뿌리운동이 협동조합과 다양한 형태의 공동 노동 형식을 통해 살림살이의 사회성을 다시 실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윤을 넘어서는 관계의 형성과 확장을 목적으로 하고, 상품이 아니라 생활재를 생산하면서 살림살이를 지키는 실천과 자급의 운동이 풀뿌리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바탕이다. 또한 아나키즘이 제기하는 사회적 개인과 주체성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할 다양한 주체들을 구성할 것이다. 이런 주체의 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기본소득과 지역화폐의 활성화는 다른 경제를 구현할 힘을 마련할 밑바

탕이 된다.


사실 모순되지만 이 책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대학을 떠날 준비를 했고, 이를 위한 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대비 덕분인지 2012년부터는 대학 강의도 관둘 수 있었다(그 시점부터 지원이 끝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상근저자’를 모색할 정도로 글을 파는 처지라 이 책에 담긴 고민들은 내가 써온 여러 글들에서 조금씩 드러난 바 있다. 그리고 긴 호흡으로 썼지만 지금 시점으로 끊어보면 내가 봐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들이 보인다. 그 부분은 더 치열한 고민과 삶으로 채워야 할 것 같다. 부족한 면이 많지만 하고 싶은 일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금껏 살고 있다. 아나키즘은 그런 마음을 지켜주고 삶을 살아가게 한다.


또 모순되지만 이 책을 쓰는 동안에 아이도 한 명 태어났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고 아나키즘을 얘기하는 사람으로선 분명하지 않은 삶이다. 어느 순간부터 흐릿한 경계인으로 사는 게 약간 몸에 익었다. 경계에 있기에 만날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이 내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흐릿하게 살 것 같다. 그 삶의 과정에서 만난 각시, 솔랑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사람들, 땡땡책협동조합 사람들, 협동조합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대안을 일구는 사람들, 독서회를 통해 만난 사람들, 함께 하지 못함에 가슴 졸이게 만드는 사람들, 여전히 지키며 싸우고 있는 사람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

  1. 보스코프스키 2014.06.01 16:34

    새로 발행할 도서이군요... 미리 축하 드립니다. 어제 5월 마지막날 책세상 개념서 <<공공성>>은 뒤늦게 축하 드렸는데 서문을 보니 도서에 대한 기대를 크게 할 수 있군요.... 도서의 탄생을 다시 한 번 미리 축하 드립니다.

    • 몽똘 2014.06.01 21:26

      네, 고맙습니다.^^

 

우리의 선거제도는 대의민주주의라 불린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우리의 뜻은 대의(代議)되고 있는가? 지방의원, 단체장, 국회의원, 대통령은 우리를 대신해서 주요한 현안을 해결하고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가? 권력은 적절히 나눠져서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잡고 있는가? 선출되는 공무원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선출되지 않는 공무원들을 잘 관리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대의제 민주주의라 불릴 수 있다. 한국은 진정 대의민주주의 국가인가?

 

배가 침몰해서 많은 청소년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정치인과 공무원들은 시민을 대신하기는커녕 책임을 떠넘기느라 바쁘다. 대의민주주의 국가라면 시민이 그런 무능과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데, 정말 그러한가? 시민들의 분노가 권력을 바꿀 수 있는가?

 

비극은 우리가 그런 국가에 살지 않는데 그런 국가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서, 그런 착각으로 현실의 폭력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힘을 가진 자들은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 정치가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소용없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이 수준이 힘을 가진 자들에게 가장 유리하기 때문이다.


선거, 매번 똑같다.


선거(選擧)는 가려서 올린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선거를 통해 대표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후보자가 다른 후보자보다 더 똑똑하고 능력 있는지를 가리는 게 아니라 정치무대에 올라가서 내 의견을 제대로 대리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매번 우리를 배신한다. 한참을 욕하다가 선거 당일이 되면 울며 겨자먹기로 투표한다. 최악이 안 되면 다행이고, 최악이면 술을 들이킨다. 정치하는 인간들도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시민의 가슴이 뛰길 원치 않는다. 그냥 표만 찍어주길 원한다. 니들이 찍지 별 수 있겠냐, 그런 똥배짱이다. 이런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세월호 사건으로 지방선거 국면이 주춤하고 있다. 사실 정당공천을 하네, 마네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한국의 특성상 지방선거는 중앙권력에 대한 심판론이 지배한다. 정책선거, 지역후보, 이런 건 그냥 말 뿐이다. 사실 지역당(local party)이 불가능하고, 지역언론도 제대로 없는 한국 현실에서 지방선거는 중심에 설 수 없는 변방의 선거이다. 당연히 지역의 중요한 현안도 논의되지 못하고 온갖 개발공약만 난무한다. 선거가 개발을 부르짖는 공약들을 부추기고,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착각은 선거가 끝나면 주민들을 몰아내는 폭력으로 변한다.

 

그러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르는 건 아주 나쁜 일이다. 만약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일까? 아니, 한국에는 정치에 관심이 아주 많기 때문에 무관심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후보자들 중에서 가려서 뽑을 사람이 없는 건 유권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하나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민주주의‘들’이 있다. 당연히 선거제도도 여러 가지이다. 어느 하나가 잘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데, 그게 민주주의인데 새로운 투표방법이나 대표자 선출방식을 도입하는 건 한국사회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우리는 투표를 하자는 투표독려행위까지 법으로 금지하려는 나라에 살고 있다.

 

정치판이 변하지 않는 데에는 우리의 ‘이율배반’도 한 몫을 한다. 우리는 후보들이 우리 의견을 대변해주기를 ‘내심’ 기대한다. 그런데 표가 보이면 어디든 달려갈 것 같은 사람들이 우리 편에는 거의 오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찍지 않을 것이라 믿는 합리적인 행위자이다. 당연히 오지 않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화를 내는 우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선거 이후를 바라보자!


선거도 중요하지만 선거 이후가 더 중요하다. 정책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책을 보자는 것은 후보자나 선거캠프가 얼마나 똑똑한지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선거 이후에 뭘 하려 하는지를, 그것을 통해 좋은 삶이 가능한지를 따져보자는 거다. 이 편, 저 편을 나누는 목소리에서 사라지는 건 정책이고 선거 이후이다. 여야 할 것 없이 말들의 잔치이고 이후를 얘기하지 않는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으려면 그 공약을 뜻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 한 명 달랑 당선된다고 정책결정이 내려지는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선거‘까지’만 얘기한다. 사실 선거를 통해 어떤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끝나는 순간 선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기성 정치인들이 선거를 통해 진심이든 뻥이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면, 새로운 정치를 바란다는 우리는 늘 익숙한 사람들 사이를 헤맨다. 당연히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복직을 하더라도 기업의 주인으로 복귀하지 않는 이상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제 손으로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자들이 노동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굴욕을 감수하고 공장에서 일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외국이 자신들의 천국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기에 그들은 국내에서 세게 나가고 공권력을 포섭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노조를 깨려고 한다.

 

마찬가지이다. 이제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살겠다고 결의할 수는 없을까? 노동자가 기업의 주인일 수는 없을까? 다른 나라, 다른 기업을 만들어 우리끼리 재밌게 살면, 그들도 좀 머리를 숙이지 않을까? 맨 날 제왕적 대통령제라 욕하면서 대통령 제도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 태도를 버리고 헌법 자체를 뜯어고칠 수는 없을까? 검사나 판사, 공무원들을 또라이라고 욕하면서 그 또라이들에 의지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역할을 축소시킬 수는 없을까? 우리가 정당을 만들 수는 없을까? 경찰이 깡패라고 욕하지 말고 경찰서장을 우리 손으로 뽑을 생각을 할 수는 없을까? 선거 이후를 보며 칼을 벼리는 정치는 불가능할까?

 

민주주의는 민중이 좋은 정치인이나 정당을 뽑거나 민중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이 권력을 가져야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할 정치인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정당이 아니라 우리가 조직화되어야 하고, 그런 관계맺음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다. 선거판을 보며 던지는 질문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삶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질문을 바꾸고 우리의 행동을, 우리의 삶을 바꾸자.

 

  1. 보스코프스키 2014.06.01 16:31

    1893년 신서란/뉴질랜드에서 처음 시작한 (남녀 동연령 투표권을 부여한) 보통선거는 한 편으로는 참정권 확보를 인정한 승리를 반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현상유지에도 기여한 단점 투성이의 제도이긴 합니다. 아직 한국에선 정신적 근대의 경험도 부족하고 이 맹아도 부족해서인지 선거회의론이 극히 엷은데 이미 해외에선 정당들 중에도 이 선거회의론을 채택한 곳이 많습니다. 물론 선거자체를 거부하는 것을 (강령등에) 명문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선거회의론 내지는 선거의 성격에 대한 인식론이 극히 희박한 것은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 '도서출판 삶창'에서 나올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가제)에 실린 모임 후기이다.

대화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각자 후기를 쓰기로 했는데, 이건 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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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을 마치고 난 뒤 가장 큰 변화는 가족과 함께 옥천으로 이주를 했다는 점이다. 꼭 이 모임 때문에 이사를 한 것은 아니다. 2006년부터 수도권을 떠나야 제대로 지역을 고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도권을 제외하면 곳곳에서 마을이 무너지고 있는데, 살만한 곳을 끼고 마을 운운하긴 싫었기 때문이다. 삶이 앎을 받쳐주지 못하면 언젠가는 폭삭 내려앉을 것 같았다.

 

이 모임을 진행하는 중에도 어디로 내려갈까 계속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그러다 애초에 계획에 없던 옥천으로 이사를 한 건 우연한 선택이었다. 옥천이 가장 이상적이어서 옥천을 택한 건 아니었다. <옥천신문>이 있다는 점, 주민들의 다양한 시도가 있다는 점, 농촌과 소도시라는 점이 옥천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고 일을 찾기도 어려운 옥천을 선택한 건 역설적이지만 당장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옥천으로 내려오기까지 몸도 힘들었고 맘고생도 심했지만 오고난 뒤엔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짐정리가 대충 끝나고 난 뒤에는 옥천 시내를 천천히 걸어다닌다. 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때로는 혼자서. ‘거리가 왜 이리 한산하지’라고 생각했다가 ‘내가 참 붐비는 곳에 살았구나’로 생각을 고쳐먹고, 지방에 강연을 가기 위해 여러 번 차를 바꿔 타며 ‘왜 이리 불편하지’라고 생각했다가 ‘그동안 참 편리한 곳에 살았구나’라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오니 직접 손을 대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거참, 번거롭네’라고 생각했다가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의 손을 빌리며 살았구나’라며 반성한다.

 

옥천에 와서도 계속 느끼는 건 안전한(?) 지역이 없다는 거다. 한국 어디건 지역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개발사업이 들어온다. 열심히 마을을 만들어도 이런 노력을 한 번에 밀어버리는 것이 바로 개발사업이다. 이 사업은 우리가 발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미 발전의 극단을 달리는 수도권에 살고 있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지방에 내려가면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건 외지인의 땅이다. 농사를 짓지도, 살지도 않는 사람들이 땅을 소유하고 있다. 살지 않으니 이런저런 계획만 잡히면 냅다 땅을 판다. 토지문서만 있고 주인이 없는 땅은 지역을 힘들게 만든다.

 

그리고 마을에 아무리 좋은 말을 갖다 붙여도 지금의 마을은 불안하다. 이웃끼리 얼굴 알고 수다떨며 잔치도 열고,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건 서로의 관계가 좋을 때이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충돌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 얼굴과 수다와 잔치는 고통으로 변한다. 나는 천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걸 경험했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편이다. 비단 마을만 그럴까? 시민사회단체나 마을과 공동체를 얘기하는 기업, 협동조합에서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환상은 자꾸 깨진다. 다행이다.

 

또한 마을에서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대체 누구를 만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자급하는 삶이 아니라면 아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마다 마음도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를 알면 눈이 올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계단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를 알면 왠지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같은 마을에 살지 않아도 박영길 샘을 알고 난 뒤 청소노동자가 보이기 시작하고, 김신범 샘을 알고 난 뒤 마을에 있는 기업들이 보이기 시작해 고민이 많아진다. 모든 관계는 친밀하고 가깝다고 하나 모든 관계를 그렇게 만들어야 할까, 그리고 그걸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든다.

 

사실 나는 마을과 관계를 강조하지만 그것을 통해 모든 걸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친밀한 관계 속엔 나름의 독도 있다. 그 아름다움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불편한 것들은 모두 감춰진다.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것들만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는 것들만 나눈다. 누군가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순간 그 사람은 왕따가 되고 마을에서 밀려난다. 왕따를 만들어 단합되는 마을은 마을운동이 아니다. 불편한 타자와도 공존할 수 있을 때에만 마을은 마을운동이 될 수 있다. 사실 그 불편함이란 것의 속내는 결국 이기적인 것이 아니던가. 더 이상 불편해지기 싫다는, 때때로 고통을 통해 맞보는 기쁨이 싫어지고 그냥 편해지고 싶다는. 이기적인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아니지만 그것을 이기적이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 문제들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이기적인 불편함을 보편타당함으로 포장하려 할 때 무리한 논리가 만들어지고 편견과 강압이 생긴다.

 

이 모든 문제가 개인의 탓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장벽들이 개인의 편견을 재생산하고 확대시킨다. 마을이 이런 편견과 구조적인 문제 밖에 존재한다고 믿는 건 큰 잘못이다. 이 모임에서 확인한 건 개인의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들이 그렇게 마을을 몰아가기도 한다는 점이다. 개인과 구조,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지금의 사회분위기는 개인을 지나치게 몰아세운다. 개인의 가능성이 구조를 뛰어넘을 수도 있지만 그건 가능성일 뿐이다. 마치 그 가능성이 보편적인 것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다양성을 파괴한다. 마을이 만능의 법칙처럼 논의되면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 모임에서 많이 논의된 바는 바로 이 다양성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함께 사는데,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색깔만을 골라낸다. 아이 하나가 자라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듯이, 마을이 제대로 서려면 다양한 운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역 내에선 복지 따로, 노동 따로, 교육 따로, 모두가 따로따로이다. 이러니 체계를 갖추고 밀어붙이는 정부와 기업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뭉쳐도 시원찮을 판에 쪼개지고, 마을만들기사업은 이해관계까지 만들어 단체들이 비슷한 사업을, 선정될 만한 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이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의 성장을 지원해줘야 정부와 기업에 맞설 힘을 만들 텐데,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말로만 떠드는 연대로는 지역의 작은 개발사업조차 감당하기 어렵다. 이렇게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 무슨 마을의 힘을 논하나.

 

그리고 우리는 아직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 강정마을이나 밀양, 청도의 마을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참여한 적은 있으나 그 싸움이 우리의 싸움은 아니다. 뭔가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싸움이지 우리의 뜻과 의견을 실현할 공격적인 싸움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은 이런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좋은 진지여야 하는데,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마을은 마치 행정이 지역 속에 투입한 ‘트로이의 목마’같다. 행정의 언어가 마을의 언어를 대체하고 행정의 관점이 마을의 경계를 정한다. 행정과 기업의 자원이 마을을 움직일 동력을 만들고, 행정의 지표로 마을의 활동이 평가를 받는다. 놀라운 건 마을이 스스로 이런 순응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니 이제 마을 쪽에선 비판이나 감시, 투쟁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렵다. 현실은 개판인데 주옥같은 말만 들린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는데 벌써 무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이 모임 때문에 마을에 대한 생각과 걱정이 더욱더 많아졌다. 그러니 마을운동과 공동체운동을 지지하는 내게 이 모임은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떠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심각한 단면이 드러났다. 내가 앞으로 마을운동과 공동체운동을 등진다면 그건 이 모임의 탓이다.

 

그래도 나는 마을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들을 연계하고 공유지를 늘려가는 일에 계속 관심을 두며 활동할 것이다. 비어 있는 곳이기에 누군가는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옥천으로의 이주는 그런 활동을 더 정색하며 하겠다는 결의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현의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사고현장에는 사람의 접근이 금지되고, 내부상황에 대한 보도는 통제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대기에 노출되었고, 국내의 버섯과 녹차에서 세슘이 검출되고 있다. 그리고 원자로를 식힌 바닷물이 다시 바다로 매일 수백 톤씩 쏟아지면서 수산물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되고 있다.

 

옥천은 일본 원자력발전소 사고에서 비교적 안전한 곳이다. 그리고 한국의 원자력발전소들이 대부분 바닷가에 있기 때문에 한국의 사고에서도 비교적 안전하다. 그래서 옥천 주민들은 이런 문제에 비교적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런데 실상을 따지면 그렇게 안심하기 어렵다. 원자력발전소는 아니지만 대전에는 우라늄을 가공해서 핵연료로 만드는 한국원자로연구소가 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사용하는 연료들 대부분을 이곳에서 가공한다. 그리고 대전의 한국원자력연구원 안에는 정부나 병원 산업체에서 사용되고 남은 폐기물을 보관하는 방사능폐기물관리공단이 있고, 연구를 위한 원자로도 가동되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 옥천읍까지의 거리는 20km를 조금 넘는다. 보통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면 원전 반경 20km 내의 주민들은 긴급대피된다. 그리고 후쿠시마 사고 이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원전 반경 30km로 긴급보호조치계획을 확대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니 대전에서 사고가 나면 옥천도 긴급대피구역에 포함된다.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만일 사고가 터진다면 옥천도 이 끔찍한 재앙에서 자유롭지 않다.

 

더구나 충청남도 금산에는 우라늄 매장지역이 있다. 작년에 이 광산을 개발하려다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우라늄 가격과 사용량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개발시도는 계속 있을 예정이다. 우라늄 광산이 개발되면 방사선이 유출되고 광물찌꺼기가 주위를 오염시키기 때문에, 보통 주거단지와 멀리 떨어지게 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 광산과 주거지가 가장 가까운 거리는 65km인데, 금산과 옥천의 거리는 그보다 훨씬 가깝다. 그러니 광산개발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수 없다.

 

원자력과 방사능만이 아니다. 2013년 국립환경과학원이 발표한 「2011년 전국 화학물질 배출량 조사결과」에 따르면, 전국 발암물질 배출량 총 7921톤 중 충청북도가 3109톤(전체의 39.3%)으로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청주의 오창공단에는 발암물질을 배출하는 공장들이 주택가에 버젓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청주 지역의 유해물질을 다루는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화재가 폭발사고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충북발전연구원이 2013년에 발표한 「충청북도 유해화학물질 위험성 완화방안」보고서에 따르면, 옥천에도 유독물질과 발암물질을 다루는 기업이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옥천군민이 안전하다고 믿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방사능이나 화학물질은 공기 중으로 빠르게 퍼진다는 점에서 관리하기 매우 어려운 물질이고 또 위험한 물질이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2013년 중앙정부도 화학물질관리법을 전면 개정하고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그리고 충북도청은 청주권역에서 실시하고 있는 화학물질 배출을 줄이는 SMART 프로그램을 충북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다. 옥천군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현재까지의 논의과정을 살펴보면 그런 계획을 찾기 어렵다.

 

옥천은 수질보전을 위해 개발이 제한되고 관리되는 청정지역이지만 주위에는 많은 위험요인들이 있다. 그러니 나와 가족, 지역의 안전을 마냥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계획에만 의존하지 말고 주민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행정구역상 우리 지역은 아니더라도 주의를 기울이며 다른 지역 주민과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안심하며 살 수 있다.

옥천군의 재정상황을 보자. 2013년 8월말 옥천군의 재정공시에 따르면, 2012년 세금수입은 3천 777억원, 세금지출은 2천 979억원이다. 지방정부 자체수입을 기준으로 삼는 재정자립도는 18.1%로 2012년 전국의 군 단위 재정자립도가 16.4%이니 나쁘지 않다. 더구나 지방정부가 사용처를 정할 수 있는 예산을 기준으로 삼는 재정자주도는 71.7%로 높은 편이다. 옥천군의 자체 수입은 적지만 국비나 도비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있다.

 

문제는 국비나 도비를 받으려면 중앙정부나 충청북도의 사업계획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즉 지역의 기획과 힘이 아니라 외부의 계획과 재원에 따라 옥천군의 주요 사업이 결정된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국비나 도비를 받는 사업들은 언제나 지방정부가 그에 상응하는 돈(매칭 펀드)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즉 국비나 도비를 받으려면 지방정부도 그만큼 투자를 해야 한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돈을 지원받는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다 중앙정부나 광역자치단체가 중간에 사업을 변경하면 기초자치단체가 말 그대로 ‘독박’을 쓰기도 한다. 실제로 강원도의 어느 기초자치단체는 사업의 실패를 알면서도 지원받은 국비를 다 쓰기 위해 불필요한 예산을 집행하는 기이한 일을 벌이고 있다.

 

악순환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데, 자기 돈이 부족한 지방정부가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지방채를 발행하기도 한다. 주민과 법인이 내는 지방세가 지방정부의 재정인데, 지방채는 지방세를 담보로 발행하는 채권, 즉 빚이다. 안전행정부의 ‘2012년말 지방채무 현황’에 따르면 옥천의 채무는 200억원으로 예산대비 채무비율이 6.0%이다. 인근의 영동군은 0.9%이고, 옥천군은 충청북도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청주시(12.0%)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 높은 비율은 옥천군이 2011년까지 산업단지와 농공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약 200억원의 지방채를 발행한 것과 연관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18년 완공을 목표로 488억원을 투자하는 제2의료기기 산업단지 조성사업이 곧 시작된다. 이 사업은 옥천군과 주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흥구 부군수는 2013년 11월 《충북일보》에 제 1단지가 100% 분양되고 959억원의 투자를 유치하고 940명의 고용을 창출했다고 썼는데, 실제로 그런지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사실 기업이 투자한들 그건 기업의 자산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세금이 공제된다. 의료단지에 입주하는 기업들은 법인세와 소득세, 취득세, 재산세를 감면받고 물류비와 오폐수처리비용 등 온갖 지원을 받는다. 실제로 옥천군은 지난 5년 동안 기업들에게 133억원의 지방세를 감면했다. 투자가 유치되는 만큼 걷지 못하는 세금이나 세금지출도 늘어나는 셈이다. 그리고 실제로 940개의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졌는지도 따져봐야 하겠지만 그 중 옥천주민이 일하는 곳은 얼마나 될까? 옥천의 물류창고업이 옥천군민의 일자리가 되지 못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조차도 미지수이다.

 

사실 의료기기 산업단지는 옥천군만이 아니라 충청북도가 함께 추진하는 사업이다. 제 2의료단지 사업을 충북개발공사가 맡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지방선거로 충청북도의 사업방향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산업단지를 지어야 할까?

 

이런 상태에서 지역주민들의 여론도 반영되지 않고 관련된 정보도 공개되지 않는다. 작년 5월에 완료되었다는 단지조성 타당성 용역보고서도 비공개 상태이다. 그리고 1단지에 새로 들어왔다는 기업들이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지역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알 수 없다. 옥천군의 많은 토지는 환경정책기본법에 따라 수질보전지역으로 묶여 있어 유해물질의 영향을 적게 받는 편이지만, 정보가 공개되지 않으니 알 수 없다. 그러니 주민들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고, 군민들은 그 효과도 분명하지 않은 의료단지를 더 큰 규모로 짓겠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대규모 단지를 만들고 외부기업을 유치해서 지역경제를 살리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끔찍했다. 머리로는 핵발전소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재앙이 펼쳐지니 머리가 멍해졌다.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는 이미지로만 다가와 느낌이 없었는데 후쿠시마의 사고는 달랐다.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 벌어진 사고는 팔짱 끼고 관전할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를 계기로 ‘탈핵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난 만큼 핵발전소나 방사능에 대한 정보의 양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후쿠시마에서 날아오는 방사능 물질, 해류를 타고 퍼지는 방사능 물질, 버섯이나 생선에서 검출되기 시작한 세슘, 아스팔트에서 검출된 방사능 등 여기저기의 정보들은 탈핵운동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론 시민들의 공포심을 계속 자극하기도 했다. 나도 그랬다. 오뎅을 즐겨 먹는지라 이 오뎅의 재료는 어디서 왔을까, 수산물은 괜찮나, 이런 걱정만 계속 늘었다. 사실 먹는 것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데, 어찌할 수 없는 큰 것보단 작은 것에 대한 걱정들만 자꾸 늘어났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핵과 방사능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한치도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는 핵발전소를 계속 짓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송전탑으로 전국을 도배하고 있다. 국토 면적 대비 핵발전소 밀집도가 세계 1위인 한국, 핵발전소 보유 개수가 세계 5위인 한국, 끊임없이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한국에서 우리는 대체 어떤 삶을 기획하고 있는 걸까?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쏟아도 공사는 중단되지 않는다. 공권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포악하고 염치없는 상황들이 이어져도 딱히 대안은 없다.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자신들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뭐, 국정원이 대통령선거에 개입하고 증거를 조작해 간첩사건을 만들어도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며 넘기는 쿨한 국민들이 사는 나라. 너무 많은 사건들이 터져서일까? 이제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면 관심조차 못 받고 사라진다. 이러니 힘을 가진 자들은 언제나 시간을 질질 끄며 망각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렇지만 핵은 삶과 직결된 문제이다. 사고가 터지면 4년이나 5년 뒤에 보자고 말할 새도 없이 한 지역이 폐허로 변하고 수많은 생명들이 그 영향을 받는다. ‘뒤’가 없다는 점에서 핵은 인류가 직면한 완전히 새로운 공포인데, 문제는 경험이 없기에 그 결과를 예감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핵발전소 사고가 나거나 핵폭탄을 실험했던 수많은 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지금도 공유되지 않고 과학의 장벽에 막혀 있다. 그러다보니 생각은 있지만 느낌은 없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 절실함이 없다.

불량부품들로 삐거덕거리며 움직이는 핵발전소들과 버릴 곳 없이 계속 쌓이는 핵폐기물, 여기저기서 들리는 사고 소식들. 방사능 유출이나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공포는 확산되고 있지만 정작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다. 사실 솔직하게 얘기하면 핵사고는 이미 진행 중이지 않은가. 불량부품들로 작동되는 원자로와 그 위험한 곳에서 방사능에 노출된 노동자들, 핵발전소 근처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주민들, 그들에게 핵사고는 다가올 사건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사건’이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 《변호인》을 본 사람이 천 만명을 넘어도 눈 앞의 간첩조작사건에 분노하며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건 생각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아직 절실하지 않다.

후쿠시마 이후 한국사회가 변하고 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 노력들은 보이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하다고 답하련다. 인간의 노동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핵발전이 가능하며, 지금의 산업구조를 볼 때 핵발전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경제성장이 가능한가? ‘전력=산업화’라는 등식에서 우리는 핵발전과 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경제가 계속 성장하길 기대하는 사회, 그러기 위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눈 감아 주는 사회에서 탈핵은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삼성전자, 노동자의 노동을 분단위로 쪼개어 착취하는 삼성전자서비스사가 성장하는 사회, 온갖 화학약품에 노출된 노동자들이 고통을 겪는데도 친환경 상품을 수입하는 소비자들의 사회는 비정상이다. 이런 사회를 유지시키는 대통령이 비정상성의 정상화를 떠드는 사회야말로 정말 비정상이다. 그렇지만 이런 비정상성을 끝내려는 용기를 낼 만큼 우리는 절실하지 않다.

어느 순간 우리는 ‘나는 괜찮을 거야’라고 속삭이는 내부의 망명객이 되었다. 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사회를 등지고 있다. 허나 내가 ‘잠시’ 사회를 등졌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외려 사회가 우리를 등지고 있다. 자기 노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배제시킨다. 그러니 대안은 우리도 국민이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이 뻔뻔한 사회를 갈아엎는 것이다. 고전적인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혁명이 불가능하다거나 의미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데 미래를 어떻게 다 구상하고 시작하나. 뭔가 분명하지 않지만 일단 용기를 내어 일어서 보자는 것이다. 이 사회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들 중 하나 이상을 그만두며 저항을 해보자는 거다.

그리고 탈핵은 우리만 잘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일본은 핵발전 중단 상태이나 언제 다시 가동할지 모르고,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은 엄청난 수의 핵발전소를 세울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빽빽한 핵발전 단지의 중심에 놓인다. 방사능만이 아니라 황사와 미세먼지가 알려주듯, 우리는 이미 연결된 삶을 살고 있다. ‘한중일 시민사회가 연대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주장을 넘어 사람들이 직접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늘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대안일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나? 일본, 중국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민족주의의 불길에 휩싸이는 한국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기억과 연대를 혼동하는 순간 대안의 힘은 사그라진다. 손을 내밀길 기다리지 말고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다.
  1. 보카 2014.03.13 09:02

    안녕하세요~ '약자의 무기~' 링크를 타고 들렀네요. 좋은 생각 많이 접할수있기바래요~

    • 몽똘 2014.03.13 10:05

      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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