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출판사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카페를 만들기 위해 언론기사를 검색하다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린비출판사'라는 검색어를 넣고 언론기사를 검색하다 아래의 기사를 봤습니다.
http://news.donga.com/3/all/20130206/52848959/1

흠. 그렇지. 삐뽀삐뽀가 그린비출판사의 효도상품이랬지.
헛, 그런데 왜 '그린비라이프'이지?
기자가 잘못 썼나?

그래서 출판사/인쇄소 검색시스템(http://61.104.76.20/html/) 에 들어가 그린비라이프를 검색했더니,
동대문구 휘경동에 그린비라이프라는 회사가 따로 있더군요.
그린비출판사는 마포구 서교동으로 등록되어 있구요.

대표는 유재건으로 동일합니다.

 

 

그린비라이프의 등록일자는 2012년 6월 11일.
그린비출판사의 등록일자는 1990년 9월 27일.

우리가 아는 삐뽀삐뽀는 분명 그린비출판사의 것인데 왜 그럴까요?
그래서 우리 집에 있는 삐뽀삐뽀 119 소아과를 펴서 확인했지요.
2010년 2월 25일에 개정9판1쇄로 나왔습니다.
펴낸이는 유재건, 펴낸곳은 그린비출판사.

동아일보 기사가 틀린 게 아니라면 삐뽀삐뽀의 판권이 그린비라이프로 옮겨졌단 얘기이지요.
그린비라이프의 등록일자가 2012년 6월 11일이니 분명 2012년 6월과 동아일보 기사가 나온 2013년 2월 6일 사이에 판권이 옮겨졌단 얘기겠지요.
동아일보 기사가 나온 2013년 2월은 그린비 노조가 외부에 그린비출판사의 사정을 알리기 전입니다.

어이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노조는 이런 일을 알고 있을까요?

시점이 좀 공교롭긴 한데요, 검색해보니 그린비노조의 창립총회는 2012년 7월 25일.
창립총회가 7월이니 그 전부터 논의가 있었겠죠.
유재건 대표는 왜 6월에 별도의 출판사를 설립했고, 2013년 2월 전에 그린비출판사의 효도상품이라 불리는 '삐뽀삐뽀' 시리즈의 판권을 왜 그 출판사로 이전했을까요?
무슨 목적일까요?

유재건 대표는 2004년 5월 22일 <세계일보>에 이런 글도 썼더군요. "출판계의 저임금이나 낮은 복지는 부분적으로 이런 현실의 반영이다. 노조가 있는 출판사는 거의 없으며, 전문경영자가 경영하는 출판사도 거의 없다. 주식회사인 경우에도 실질적이고 신뢰할 만한 기업결산 보고서를 공개하는 출판사는 없다. 출판계의 모든 얘기는 그저 바람결에 떠도는 풍문일 뿐이다."
http://www.yemoon.com/webzine/viewbody.php3?code=webzine&page=1&number=160&keyfield&key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을 스스로 풀어주시겠죠?

이래저래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일을 하며 지내온 시간이 십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풀뿌리운동을 보며 희망을 얻었고 그 운동에 관련되어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어느 순간부터 풀뿌리운동을 사랑하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때론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환상을 낳기도 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방의 모습을 규정하고 그렇게 규정된 모습을 사랑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괜한 질투와 타박을 하기도 하구요. 이 글은 풀뿌리운동에 대한 저의 사랑고백이자 당신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사랑하던 그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담은 고백입니다. 제가 만든 이미지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괜히 오해하고 있는 건지,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1. 우리는 왜 이 운동을 시작했을까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살아남기도, 살아가기도 힘든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관계망은 끊어지고 마을이나 공동체도 해체되고, 노동강도나 생활의 속도는 점점 더 강해지고 빨라져서 운동을 하기에 좋지 않은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운동의 목적은 다양할 수 있지만 주민 주체의 역량을 강화시켜 시민자치에 이르도록 하는 것, 이것이 풀뿌리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일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목표는 어떻게 실현되고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통해 실현되고 있나요? 이런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재활용가게, 나눔장터, 동네카페, 도서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풀뿌리운동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솔솔 흘러나옵니다.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습니다. 눈에 띄는 사업에 단체들이 몰리고 때로는 단체들이 서로 경쟁하며 기본적인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도 들립니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성장해온 과정이나 그 힘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의 부활 이후 행정이 풀뿌리운동을 중요한 파트너로 여기게 된 건 그 과정과 힘 때문입니다. 주민들의 지지가 높아지고 행정의 파트너로 인정받게 된 건 분명한 성과입니다. 관이 맡는 것보다 풀뿌리단체가 맡는 게 주민들에게 더 좋고 올바르다는 인식도 확산되었습니다. 이건 그동안의 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변화였습니다.

 

그런데 민관협력이나 거버넌스가 원래의 취지와 달리 ‘관주도’라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민관협력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관이 기획하거나 공모하는 사업을 단체가 지원해서 진행하는 식이고, 대충 기획된 것을 제대로 집행하느라 너무 힘이 든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이런 식이라면 당장 사업을 때려치고 싶지만 우리가 아니면 안 될 사업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때로는 성장이 위기를 불러온다고 했던가요. 어느 순간 풀뿌리 운동은 체계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제는 일방적으로 판을 깨고 나오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계속 들어가기에는 뭔가 곤란한, 모호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노동자들에게 최후의 무기가 파업이라면 풀뿌리운동에게 최후의 무기는 무엇일까요? 어떤 힘이 있으면 이 모호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에 대한 고민이 ‘지금’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완전히 무장해제되어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정신승리법으로 버티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물어볼까요. 관이 해야 할 일을 대행하는 것이 풀뿌리운동이나 풀뿌리단체의 역할일까요? 물론 주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칠 사업들을 제대로 실행하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업들에 모두 ‘운동’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운동은 전체적인 사회발전의 목표를 주민들과 함께 정하고 그 목표에 비춰 사업을 평가하는 과정인데, 사업에 대한 ‘평가의 권한’은 풀뿌리단체들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외려 관이 그런 평가의 권한을 가지고 사업에 개입합니다. 사업을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이 사업을 하는 것인가’, ‘사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우리는 주민들과 어떻게 논의하고 그 사업에 개입하고 있나’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면, 많은 사업들은 운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핑계일 뿐입니다. 주민의 삶과 결정을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민 스스로가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촉진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풀뿌리운동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로 우리가 어떻게 많은 일들에 일일이 다 관심을 가질 수 있냐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인정하고 싶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렇기에 사업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역단체들이 지원한 사업과 관련된 심사를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난감한 경우는 단체들의 고유활동을 지원사업으로 신청할 때나 그 단체의 설립목적과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행사를, 소위 ‘뜨는 행사’를 사업으로 만들어 지원할 때입니다. 비슷한 유형의 사업이 동시에 신청되거나 그런 사업이 반복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제 그런 관행을 스스로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는 과정이야말로 운동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순간 단체들도 쉬운 길만을 선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단체들의 사업이 비슷해지고 있고, 지역특성을 반영한 활동들, 아니 유기체처럼 변화하는 지역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반영하는 활동들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공무원들이 바보는 아닙니다. 자원이 제한되고 부족한 시민사회의 상황을 알고 있기에 더욱더 거만하게 나옵니다. 때로는 일부러 단체들끼리 경쟁을 붙이고 자기 말을 잘 듣는 단체들을 밀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운동의 목적은 자꾸 사라지고 사업만 남게 됩니다. 행정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감시하고 비판하는 단체의 목적보다 앞서 나가고 운동은 뒷전이 됩니다.

 

따라서 국가나 시장에 끌려가지 말고 우리의 자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기획서를 작성하고 사업에 공모해서 자원을 얻으려 말고 지역의 주민들 속에서 자원을 발굴하는 과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눈먼 돈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어찌 눈먼 돈일까요. 주민들의 세금, 시민들의 피땀입니다. 운동에 필요한 자원을 모으는 과정이 운동의 방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저는 풀뿌리운동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배움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소비자생협 진영에서는 아주 오랜 논쟁이 있습니다. 협동조합의 기본이 사업이냐 운동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고, 이제는 사업 쪽의 힘이 훨씬 강해진 것 같습니다(물론 둘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인데요). 풀뿌리운동이 이런 흐름을 따라가야 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풀뿌리운동이 시민사회운동의 전부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제를 풀뿌리운동이 떠안을 수도 없습니다. 각각의 운동은 제각기 자기 목표를 가질 겁니다. 다만 현재 풀뿌리운동의 목표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주민자치를 실현하고 마을과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 지역사회 복지체계를 마련하고 주민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것? 하지만 마을과 공동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이려면, 관계와 사회에 기반한 복지가 살아나려면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이 시민사회운동과의 강한 고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요즘은 어디에 가나 박원순 시장 얘기를 듣습니다. 박원순 시장과 같은 사람이 앞으로 더 나올 수 있을까요? 운동이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활동가, 뛰어난 활동가도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겁니다. 솔직히 묻겠습니다. 단체의 활동가 충원구조는 마련되어 있습니까? 과거에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이런저런 시민사회운동의 활동가로 충원되었지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경쟁적인 교육체계, 대학 중심, 학벌 중심의 교육체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제 그런 충원구조는 사라졌습니다. 10년 뒤, 20년 뒤에는 누가 어떤 과정을 밟아 운동에 참여할까요? 아이디어나 기획력이 뛰어나고 사회정의감을 가진 대학생들도 아마 단체가 아니라 행정조직을 택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실행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활동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목적을 공유하더라도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는 ‘세대단절’의 문제가 풀뿌리운동 내에서도 보입니다. 이런 단절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풀뿌리운동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고민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 고민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거의 못 봤습니다. 10년 정도 더 지나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생활리듬과 가치관을 가진 이질적인 존재가 한 단체 안에서 (그것도 운이 좋아야)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될 겁니다.

 

물론 풀뿌리운동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전업주부들도 활동가로 일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지요. 하지만 사업을 중심에 둘 경우 활동가들은 사업단위로 결합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업의 전망’밖에 주지 못하면서 ‘운동의 헌신’을 요구하는 모순은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합니다. 활동의 폭이 넓어질수록 대표나 소수의 핵심활동가들이 전체적인 의사결정과정을 쥐고 흔든다는 비판도 들립니다. 사람을 성장시키고 역량을 강화시키는 풀뿌리운동의 ‘대의(大義)’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건 풀뿌리운동의 목적으로 본다면 심각한 위기입니다.

 

 


2. 10년, 20년 뒤에 풀뿌리운동은 어떻게 될까요?


지금 서울시는 마을공동체사업을 한창 추진하고 있고 언론도 이 사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기대만큼 잡음도 생기고 추진과정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에 관한 성명서는 풀뿌리단체들이 아니라 진보신당 서울시당에서 나왔습니다. 진보신당의 성명서와 김상철 처장의 발표문을 읽으며 한편으로 참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좀 씁쓸해졌습니다. 마을은 안 보이고 사업만 보인다는 지적, 사업추진의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 추진과정의 폐쇄성과 관 주도에 대한 비판 등은 특별한 분석이나 논리가 아니었고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지속적으로 관에 문제제기해온 바입니다. 그런데 왜 정작 풀뿌리운동은 이런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을까요?

 

박원순 시장이 되고 난 뒤에 서울시가 달라졌다는 얘기가 많이 들립니다. 시장 한 사람 바뀌었을 뿐인데, 라는 말을 활동가들에게서도 듣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지요. 무상급식에 반값등록금에 저소득층 지원에, 공공임대주택 확충,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중증장애인 활동보조 자기부담금 폐지, 중소상인을 위한 대형마트나 SSM의 영업규제 등 취임한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상황이야말로 풀뿌리운동의 위기상황입니다. 지역에서 몇 년 동안 빡세게 일할 필요가 뭐 있어, 시장 한 명, 구청장 한 명 바뀌면 이렇게 분위기가 확 바뀌는데, 라는 생각을 시민들이, 심지어 활동가들마저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풀뿌리운동의 위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위기일까요?

 

풀뿌리운동이 바꾸고자 한 건 시장이라는 직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풀뿌리운동은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구조’를 바꾸려고 한 거죠. 그렇다면 지금 서울시의 의사결정구조, 정책결정구조는 어떻게 바뀌고 있나요? 몇몇 시민사회단체 인물이 행정체계나 위원회에 들어가는 건 이전 정부 때도 자주 있던 일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시장이 현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목소리를 듣고 챙기는 것이 한편으론 좋아 보이지만, 달리 보면 지방자치의 근본정신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시장님의 트위터에 글을 남겨라, 이건 구조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사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경계해온 것은 ‘해결사’가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지방자치법에 따르면 서울시장은 자신의 권한에 속하는 사무 중 일부를 자치구에 위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시의 거버넌스 구조가 실질적으로 바뀌고 있나요? 물론 박원순 시장 개인의 활동을 보면 눈물겹기도 합니다. ‘박원순 프로세스’라는 말이 나올만큼 소통과 청책(聽策), 협치가 강조되고 요일별로 시장의 일정이 짜지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시장의 변화가 일선 공무원들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공무원들이 생각하는 제3섹터, 주민단체의 범주가 풀뿌리단체로 이해되는지도 의문입니다. 기존의 관변단체에 대한 지원과 묵인이 바뀌고 있는지도 살펴야 하고, 제 3섹터를 양성한다는 목적 하에 허투루 사업이 진행되는 건 아닌지 꼼꼼하게 감시해야 합니다.

 

물론 지방자치제 하에서 자치구의 변화가 중요하지 광역단체의 변화가 뭐 그리 중요한가, 풀뿌리운동이라면 자치구에 집중해야 하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자치구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지방자치제도와 행정체계에서는 자치구가 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서울시의 권한도 중앙정부의 권한과 맞물려 제한을 받지만 자치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사업기획은 중앙정부와 광역단위에서 꼬리표가 매겨진 뒤에 자치단체로 이관됩니다. 예산은 기초자치단체에서 집행하지만 기획과 평가의 권한은 여전히 중앙정부나 광역자치단체가 가지고 있습니다. 공무원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책임을 회피합니다. 상급기관에서 명확한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다며, 또는 예산이 없다며 시민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구조의 변화 없이 운동의 성공을 얘기할 수는 없고, 지금은 감시와 비판마저 사라지고 있기에 심각한 위기상황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서울광역자활센터의 운영, 교통체계의 개선(버스준공영제), 도시기본계획, 제3섹터영역의 활성화, 세제개편 등 자치구의 경계를 넘어 서울시 차원에서 기획되는 사업들이 많습니다(서울시정개발연구원 홈페이지에 가면 이와 관련된 연구보고서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권을 중심으로 한 통합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광역행정구역 논의로 볼 때 실제로 그렇게 진행될 가능성도 큽니다. 서울 시민들의 생활을 볼 때 삶터와 일터가 분리되고 생활반경이 넓어져서 마을이나 공동체를 거주지 개념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풀뿌리운동은 이런 서울시 차원의 사업, 하지만 자치구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사업들에 대해, 그리고 행정체계와 생활권의 변화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한국 사회의 빠른 변화 속에 풀뿌리운동은 어떤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을까요?

 

저는 풀뿌리운동이 고립된 공동체, 폐쇄된 해방구를 만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려 그런 경계를 없애고 주민과 공동체의 관계를 새로이 구성하는 것이 풀뿌리운동의 역할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서울의 풀뿌리운동이 서울이라는 공간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하라면 저는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와 지방의 ‘내부식민지화’를 얘기할 겁니다. 핵발전소 문제가 계속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데, 서울시는 원전 한기 줄이기 운동을 힘겹게 벌이는 정도이고, 햇빛발전소와 수소연료전지발전소를 공공건물과 학교에 설치한다는 계획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전력 생산량은 전국의 0.28%에 불과한데, 전력 소비량은 전국의 10.9%를 차지합니다). 4대강 사업도 서울시민들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입니다. 직접적인 피해는 없으니까요. 오히려 재벌건설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한 곳이라 서울은 깔때기처럼 그 이윤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서울이 모든 걸 빨아들이는 곳에서 서울 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운동의 목표일까요?

 

더 이상 이런 과제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치구 단위의 행정교섭만으로는 풀리지 않을 수밖에 없고, 그 사업의 기획과 평가에 자체에 개입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개입과정에서 약 1만 6천명에 달하는 서울시의 공무원, 전문화된 관료조직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그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런 경쟁이 불가능하다면 각종 공모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명확한 권한과 충분한 사업기간이 보장되지 않는 사업에 대해서는 집단적인 보이콧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민간단체가 관료조직으로 편입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참여예산제가 활성화된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시에서는 이런 문제가 이미 드러났다고 합니다. 포르투알레그레시의 참여예산제를 연구한 학자 마리옹 그레와 이브 생또메는 시민사회가 자율성을 잃고 국가에 흡수되는 문제를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삼는데, 참여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며 시정부에 의존하게 되는 면, 시민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이 지방정부의 비공식적인 상임 간부가 되거나 결정권자 집단 안에 비공식적으로 흡수되면서 풀뿌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면,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신들의 활력과 논리를 잃어버리고 국가권력의 구성부분이 되는 면을 지적합니다. 참여예산제 안에서 활동가들이 모든 열정을 불태우다보니 단체가 비어버렸다고 합니다. 한국 시민사회도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저는 지역 경험이 많은 사무국장 이상의 활동가들이 서울시를 대상으로 활동을 펼치는 중간지원조직을 구성하고 그곳에서 활동하면 좋겠습니다. 그 활동가들이 기존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른 시민사회운동이나 정당과 연계하는 몫을 맡길 권합니다. 그 분들의 연륜과 활동경험, 인적 네트워크라면 분명히 좋은 효과를 발휘하고, 이는 자치구에서 활동하는 단체활동과 연계될 수 있습니다. 제도정치인이 되는 것 말고 별다른 출구가 없는 풀뿌리운동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서울시와 서울시민의 일터와 삶터에 관한 현황을 정리한 구체적인 자료도 필요합니다. 자치구를 넘나들며 자신의 생활권과 동선에 맞춰 서울시민들이 스스로 뭔가를 의식하고 조직할 수 있도록 이를 지원할 중간지원조직이 필요합니다. 이 중간지원조직이 주민들의 실제 생활동선과 지역사회의 변화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아울러 중간지원조직이 서울시가 아닌 서울시에 사는 시민들의 10년, 20년 장기비전을 구상하는 역할을 맡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정당의 정책연구소들이 응당 그런 기능을 맡아야 하겠지만 한국 정당정치의 현실을 고려할 때 서울시당이 그런 기능을 맡을 가능성은 당분간 없어 보입니다. 저는 서울의 풀뿌리단체들이 ‘서울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스스로 강구하면 좋겠습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말했듯이 ‘타이타닉 현실주의’에서 벗어나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 빙산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풀뿌리운동의 힘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이라고 믿습니다. 이 고백이 좋은 시작이 되면 좋겠습니다.

 협동사회경제란 말은 낯설다. 사회경제란 말도 익숙하지 않은데 협동사회경제라니... 낯설지만 이미 ‘협동사회경제’라는 말을 쓰는 곳들이 여럿 있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외국에서도 협동사회경제라는 말을 쓸까? 찾아보면 ‘cooperative/social economy’라는 말은 쓰지만 협동사회경제라고 붙여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말을 쓰게 되었을까?

 

한국협동사회경제연대회의는 자신의 출범배경으로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을 위해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협동조합기본법제정연대회의>와 ‘사회적기업육성법’의 올바른 제정을 위해 구성되어 6년 여 동안 활동한 <한국사회적경제연대회의>가 통합된 조직으로, 2012년 11월 21일 출범하였습니다. 연대회의는 한국의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 활동하는 제 단체들이 연대하고 협력하는 네트워크 연대조직으로서 한국의 사회적 경제운동의 활성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활동할 것”이라 밝힌다. 이 맥락을 읽어보면 협동사회경제란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진영과 사회적 기업을 중심으로 한 진영의 결합체를 뜻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경제운동의 활성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듯하다. 그렇다보니 두리뭉술하고 ‘협동사회경제’라는 말이 뭔가 입에 짝짝 달라붙지는 않고, 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약간 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강의의 주제인 협동사회경제의 사례를 본다는 것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의 사례들을 본다는 것일까? 어느 협동조합의 규모가 어떻고 어떤 사회적 기업이 잘 된다는 얘기는 이미 언론이나 출판을 통해 여러 차례 다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기획재정부가 만든 협동조합 사이트에서 알림마당→자료실로 들어가면 ‘아름다운협동조합 만들기’를 다운받을 수 있다. 거기서 기본적인 자료들을 얻을 수 있고, 서울시청 홈페이지에서 사회적 경제→사회적 경제 자료실에 들어가면 ‘협동조합 운영 사례집’을 다운받을 수 있다. 그 사례집에는 국내외 50개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김현대 등의 『협동조합, 참 좋다』(푸른지식, 2012년), 김성오 등의 『우리, 협동조합 만들자』(겨울나무, 2013년)를 참조해도 좋다.

 

이 이상의 사례들을 논하는 건 나의 능력 밖이다. 심지어 나는 외국에 사례를 보러 나가본 적이 없고 그런 욕망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 사례 얘기를 들어야 하니 좀 우울하실 터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자리에 섰을까? 몇 가지 고민을 나누고 싶어서이다.

 

 

1. 사례를 본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는 왜 사례를 보고 듣고 싶어 할까? 한국사회는 좀 과다한 싶을 정도로 사례에 집착한다. 어느 곳이 주목을 받으면 그곳을 도는 것이 일종의 코스가 되고, 외국 사례도 그곳 관계자들이 힘들어할 정도로 주목을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방문한다. 왜 그럴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을 믿어서일까?

 

사례를 보고 온 사람들은 그 사례의 전도사가 되어 여기저기서 많은 얘기들을 한다. 그런데 정말 사례를 논할만 할까? 내 경험상 하루 들린 사람들은 견학 정도이고 보름 정도 지긋하게 눌러 있어도 그곳의 역사나 사회조건, 문화적인 특징 등을 잘 모르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사천 지역을 알아보겠다는 사람이 하루 돌고 난 뒤에 사천에 관해 얘기하면 어떻겠는가?). 그래서 나는 직접 가서 보고 듣는 것도 필요하지만 잘 정리된 연구들을 보는 게 때로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꼭 가서 보고 싶은 곳도 있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마음을 흔든 사례는 없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사례를 보려 할까? 뭔가를 빨리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이 사례를 보게 만들 수 있다. 우리도 빨리 저런 걸 만들고 싶다, 우리 지역도 빨리 저렇게 변하면 좋겠다. 그러니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듣고 빨리 그 방식을 우리 삶에 적용하고 싶어진다. 직접 보고 와서 얘기하면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쉽다. 내 눈으로 봤다 아이가,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럴 경우 사례와의 만남은 우리를 억압한다. 내 옆의 사람과 손을 잡고 그를 신뢰하는 게 아니라 어떤 틀을 만들고 사람과 관계를 그 속에 밀어 넣게 된다. 잘 안 되면 그 탓은 틀이 아니라 내 옆의 사람 탓이다. 이렇게 되면 사례는 성공의 지름길이 아니라 실패의 지름길이 된다.

 

그렇다고 사례를 보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례를 보려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적어도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그 사례에서 내가 필요한 부분을 취할 수 있다. 보통 나는 나라서 나를 매우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타자의 얼굴에 비친 내 모습을 통해 자기를 알아 간다. 어쩌면 사례의 진정한 의미는 따라가고픈 그 모습이 아니라 그것에 비친 내 모습일 수 있다. 우리가 만남을 가지는 이유는 타자에게 종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사례에 들뜨거나 사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사례를 보는 자신의 모습을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사례를 본다는 것의 의미는 그냥 들어보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좋은 얘기 잘 들었습니다’로 그치지 않고 그 사례가 실제 내 삶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나의 준비를 확인해야 한다. 다른 지역의 특수한 사례로 여기지 말고 우리 지역 내에 그런 특수성을 접목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례를 볼 때는 그 맥락을 조심스레 살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방식이나 제도를 금방 수입하고 만드는데, 그렇다보면 그것의 정신이나 문화를 무시하게 된다. 외국의 좋은 제도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다들 이상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제도를 성공하게 하는 건 탁월한 리더십의 역할도 있지만 전체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구조의 탓도 크다. 우리는 사례를 볼 때 사람이나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만 보는데, 보이지 않는 구조들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과 뭔가 변화를 도모하려는 의지, 맥락을 읽는 눈이 없다면 사례를 봐도 아니 봄만 못하다. 이를 전제하고서 사례를 보자.

 

한국에서 협동사회경제를 이룩한 지역이 어디 있을까? 협동조합 메카로 유명한 강원도 원주? 마을만들기로 유명한 전라남도 진안군? 커뮤니티 비즈니스로 유명한 전라북도 완주군? 풀무학교로 유명한 충청남도 홍성군? 성미산마을로 유명한 서울시 마포구 성산1동?

 

협동사회경제를 이룩한 외국 지역은 또 어디일까? 스페인의 몬드라곤? 이탈리아의 볼로냐? 캐나다의 퀘벡? 영국의 토드네스? 유럽의 또 어느 지역?

 

 

2. 원주의 이야기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공동체운동기관 등 19개 단체가 모인 네트워크 조직이다. 2003년 6월 5일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로 시작했고, 200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각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는 460여 명이고, 조합원과 회원 수를 합하면 원주시 전체 인구의 10%인 3만 5천여 명에 이른다. 네트워크의 각 구성단체는 조합원 수와 매출액에 따라 회비를 낸다. 네트워크 내에는 정책위원회, 지역농업위원회, 식생활교육위원회, 협동기금위원회, 편집위원회, 국제교류위원회 등 6개 위원회가 있어 사업을 담당한다.

 

2011년 3월에 네트워크의 구성단체들은 원주 사회적 경제 블록화 사업 심포지엄에서 ‘생명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경제 조직 협약문’이라는 것을 작성했다. 이 협약문은 ‘공동 소유, 민주적 운영, 인간적 사회 서비스 실현, 협동을 통한 사회적 목적 구현’을 목적으로 삼는 조직을‘사회적 경제 조직’이라 정의했고, 다섯 가지 내용을 담았다.

 

①사회적 경제 조직 간 협동정신을 바탕으로 상호 발전을 위한 시스템을 안착시키자.

②둘째는 상호 발전을 위한 시스템을 통해 각 조직의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이를 통해 창출되는 잉여는 사회적 목적 실현에 재투자하자.

③민주주의를 바탕으로 각 조직의 주인인 조합원 및 회원 등의 참여 보장과 이들에 대한 정보 전달에 힘쓰며 사회적 경제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하자.

④우리 모두를 위해 각 조직은 민주성, 투명성, 신뢰성 확보에 힘쓰고 인적·물적 서비스에 대한 자율 구제 등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⑤경쟁과 이윤 추구로 대변되는 주류 경제 질서에 대항하여 돈보다는 사람이 우선되는, 생명이 살아 숨쉬는 지역공동체를 만들자.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아래와 같은 비전을 가진다.

①사회적 협동조합: 기아 및 식량 문제 대응,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일자리 제공, 상업적 성공으로 머물지 않고 사회 보전자 역할로서의 임무 확대.

②협동조합의 사회적 기여 : 한살림 등 기존 생협의 지역사회 기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운동 모색

③사회경제 운동을 통한 지역 공동체 건설: 이윤보다 회원과 공동체를 위한 운영, 국가로부터의 자율성, 민주적 경영(1인 1표), 자본에 대한 개인과 노동의 우위, 참여의 원칙과 개인 및 집단의 권력화(empowerment)

풀뿌리 민주주의 확립

 

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사회적 경제 영역 발전을 위한 방안’을 다음과 같이 마련한다.

①협동조합 정신 등 사회경제 영역의 가치와 지향점 대중적 공유: 원칙을 바탕으로 한 사회경제 영역의 운영 및 협동조합 정신의 대중적 공유와 미래비전 제시→ 제도화되지 않은 자기 원칙의 설립과 준수
선순환 구조와 사회적 경제 블록 구축을 위한 상호부조 시스템 확립: 사회적 경제 블록의 선순환 구조의 시스템화

③영역확대를 위한 노력: 네트워크 내 회원단체 확대와 영역별 구축

사회적 경제 지표를 통한 네트워크의 가능성과 규모 파악(인적 능력과 인간적 연대포함): 사회적 경제 지표를 통한 역량 파악 및 홍보, 제도개선에 활용

⑤역사와 브랜드 홍보를 위한 체계 확립: 역사와 현재 역량을 바탕으로 한 브랜드 가치 창출 및 홍보, 축제 및 세미나, 포럼 개최

⑥사회적 경제 가치를 통한 발전계획 및 지역의 미래상 정립: 협동의 도시 트렌토 등의 방식으로 지역의 미래상 정립

⑦정부 - 자치단체 간 교류협력 및 투쟁(제도 및 지원): 생협법 개정 및 조례 제정(사회적 경제 지원 및 육성에 관한 조례), 기금조성 등

⑧국제·국내적 연대와 연구: 지속적인 교류활동을 통한 가치 및 제도, 시스템의 학습

⑨주민 삶을 책임지는 새 영역 구축: 새로운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창립 지원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영역 확장을 위한 기금 조성 및 운영: 협동기금 설치 및 운영

매체의 안정적 발행과 내용의 대중화

사회경제 일꾼 재생산을 위한 비전의 공유와 교육의 장 마련: 미래 비전을 통한 재생산 및 지속적인 만남과 교육의 장 마련

네트워크의 서비스 프로그램 정착 및 안정화, 체계화: 네트워크 강화 및 서비스 프로그램 창조

⑭한국식 전형 창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공동체 운동기관, 협동조합 형 사회적 기업 등

⑮민주주의 확립

⑯지역사회와의 연대와 기여: 시민사회단체, 정당, 노동조합, 주민조직


이런 역사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졌을까?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의 전신(前身)인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는 10년 전에 만들어졌고, 네트워크는 2009년에 만들어졌다. 원주 협동조합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지학순 주교의 부임은 1965년의 일이다. 밝음신협은 1972년에 설립되었고, 한 살림의 전신인 원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은 1985년에 설립되었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역사 속에 수많은 인물과 단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졌다. 다양한 사람과 단체가 만나 사건을 일으키고 서로 충돌하고 화합하며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왔다.

 

그렇다고 원주시 협동사회경제의 미래를 무조건 낙관할 수는 없다. 협동조합운동은 초기 운동가들의 연로와 후진양성의 미흡, 신자유주의와 제1금융권의 팽창, 정부 개입의 증가, 조합원 활동의 위축, 새로운 협동조합 정책 및 이론 생산의 미흡 등 운동과 경영 양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원주시청이나 원주시의 경제상황, 문화적인 조건들이 협동사회경제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렇다면 사천시에는 어떤 역사가 있는가? 협동사회경제와 관련된 인물과 단체들을 꼽는다면 누가, 무엇이 있을까? 협동사회경제를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사람과 단체, 자원은 무엇일까? 네트워크가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는 자산은? 민주적으로 회의하고 공동으로 결정해본 경험은 있는가? 여러 단체들이 공동으로 대처하여 성공했던 경험은 있는가?

 

단체 회원이나 조합원, 구성원들은 협동사회경제를 이해하고 이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가? 서로 기꺼이 역할을 나눠가지려는 자세는 되어 있는가? 협동사회경제의 확대/확장을 위해 기꺼이 내 자원을 공유할 의지는 있는가?

 

한국정부나 사천시청은 협동사회경제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품고 있는가? 한국의 경제구조나 사천시의 경제현황은 협동사회경제에 유리한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는가? 지역에 활용할 만한 기술이나 자원은 있는가?

 

 


3. 해외 사례 이야기


사례라고 해서 꼭 잘되는 사례만 들을 이유는 없다. 때로는 안 되는 이유를 듣는 것이 훨씬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의 바띨라니(Patrizia Battilani)와 베르겐대학의 쉬뢰터(Harm G. Schröter)는 “탈협동화와 그 문제점들”(Demutualization and its Problems)”(Quaderni DSE Working Paper, 2011년)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는 기본적으로 소유권 구조의 변화, 전통적인 협동조합에서의 이탈, 협동조합의 사회적 가치변화에서 탈협동화의 원인을 찾는다. 바딸라니와 쉬뢰터는 20세기부터 탈협동화가 진행되어 왔고, 1980년대 이후 특히 미국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탈협동화 경향이 두드러졌다고 지적한다(그래서 2007년에는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탈협동화를 심층적으로 조사할 연구위원회를 소집하기도 했다). 반면에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탈협동화되었던 협동조합들이 다시 협동조합으로 변신하는 재협동화(re-mutualization)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기본적으로 탈협동화가 미국식 경쟁 자본주의와 비슷하고,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이 연구에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의 원인을 다섯 가지로 지목한다.

 

첫째, 기업이나 정치․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협동조합이 사기업이나 투자자소유기업의 절차와 전략을 따르면서 협동조합의 조직이 점점 비슷해지는 경향(organizational isomorphism)

둘째, 공동소유구조가 너무 경직되어 급변하는 현실을 따라잡기 어렵다며 사유화를 지지하고, 급속도로 강화되는 경쟁에 적응해야 한다는 문화적 요인(cultural reasons)

셋째, 일반경제학 교육을 받고 상호성을 옹호하지 않는 경영진이 취임하고 이들이 조합원을 희생시켜 자기 이득을 취하려 하면서 생겨난 경영진의 착취(expropriation by managers)

넷째,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협동조합에 대한 반감이나 협동조합을 낡은 모델로 보는 의식이 확산된 정치적인 요인(political reasons)

다섯째, 자본이 제한되고 관리자에 대한 통제체계가 없는 협동조합의 비효율성 또는 성장전망의 부재(inefficiency or lack of growth perspectives)

 

이런 요인을 정리하면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지난 20년 동안 ①조합원제도에 바탕을 둔 상호부조라는 전통적인 인센티브가 흐려질 경우(협동조합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때), ②정부가 탈협동화를 유도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할 경우, ③미래의 전망을 발전시킬 방법에 관한 대안적인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더 매력적일 경우에 탈협동화가 진행되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강조하는 건 협동조합이 기업으로 전환되기가 쉽지 않은데 정부가 탈협동화를 가능케 하는 법률들을 제정함으로써 여러 협동조합들(특히 보험과 관련된 협동조합들)이 탈협동화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탈협동화가 적절한 법적인 틀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런 법적인 틀이 탈협동화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보통 탈협동화가 성과와 성장을 내세우지만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가 더 나은 효율성과 성과를 보장한다는 명확하고 보편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아울러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미국과 캐나다의 신세대협동조합과 같은 혼성조합(hybridization)이 탈협동화와 관련되어 있고 탈협동화가 혼성조합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의 연구를 통해 탈협동화의 경향이 수십년 동안 강화되어 왔고 미국식 경제의 확산과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미FTA를 체결하고 세계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지적한 탈협동화의 원인이 한국의 협동사회경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의 대의원총회나 이사회가 형식적인 의결기구로 변하고 일반기업과 비슷하게 관리자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1인 1표와 민주적 참여의 원칙이 훼손되는 현상, 일반기업의 경영전략이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현상 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그리고 한국에서 보편화된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논리가 협동사회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일자리 창출의 도구로 보는 정부의 시각은 어떤 형태로든 협동사회경제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가 외부의 우려처럼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을 동원하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경우, 협동사회경제의 탈협동화 경향은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협동사회경제를 준비하는 진영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최근에 등장한 ‘협동조합간의 경쟁’이라는 틀은 이런 현실의 경향에 저항하고 그것을 바로잡기는커녕 탈협동화 경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예를 들어, 소비자생협의 매장경쟁과 관련해 어느 한 매장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서 그 지역에 다른 매장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독점’이고 협동조합 사이에도 경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조합원을 위하고 전체 협동운동의 몫을 고려한다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이것은 경쟁이 시장을 활성화시킨다는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독점의 반대말이 경쟁이라는 것은 하이예크를 비롯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한국에서는 주로 자유기업원)이 강조하는 논리이다. 소비자생협이 이런 논리를 따라야 할까?

 

자유주의 경제학과 다른 관점에 따르면 독점의 반대말은 경쟁이 아니라 공유나 경제민주화, 자급자족이다. 생협매장의 지나친 경쟁을 막고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경쟁을 방해한다는 논리로 빠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설령 어쩔 수 없이 경쟁을 고려하더라도 그건 일반기업과의 경쟁에 대처하는 방법이어야지 협동조합 간에는 적합하지 않다. 외려 소비자생협이 일정한 매장운영협정을 만들고 그런 규칙이 사회적 시장을 만들도록 자극해야 하지 않을까?

 

멘자니(Tito Menzani)와 자마니(Vera Zamagni)는 “이탈리아 경제의 협동조합 네트워크(Cooperative Networks in the Italian Economy)”(《Enterprise&Society》, 2010년)에서 이탈리아 협동조합운동의 성공이 네트워크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한다. 보통 네트워크라고 하면 하나의 중심을 가진 중앙화된 네트워크나 이리저리 분산된 탈중심화된 네트워크를 생각하지만 이탈리아의 협동조합들은 수평적인 네트워크(horizontal network)를 구성했기에 강한 힘을 키울 수 있었다는 거다. 이 네트워크에서 한 단위는 단순한 구성원일 수 있지만 때때로 다른 단위와 선으로 연결되거나 전체 네트워크를 코디네이터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다른 단위들이 자신에 의지하게 되면 전체 네트워크의 주요한 단위가 될 수 있다. 이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시장경쟁력을 증가시키고 생산을 합리화시키며 공동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위험과 기회를 공유했다는 게 멘자니와 자마니의 평가이다.

 

그런 점에서 국내의 협동사회경제 네트워크가 멘자니와 자마니가 말한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지향하고 그렇게 형성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더 중요하게 지역의 다양한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단체들은 그런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주요한 단위가 되고자 하는가?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그런 경험을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축적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협동사회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기업문화가 바뀔 수 있다. 그래야 끊임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을 받는 조합원/회원/자원활동가들이 현실의 경쟁논리에서 벗어나 협동의 논리로 현실을 바라보고 삶을 기획할 수 있다. 만일 그런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경쟁의 논리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협동사회경제를 탈협동화시킬 수도 있다.

 

《협동조합운동, 21세기의 대안》(들녘, 2003년)의 저자로 국내에 알려진 존스턴 버챌(Johnston Birchall)은 “소비자협동조합의 합병시도에서 배우는 이론적, 실천적 함의(Some theoretical and practical implications of the attempted takeover of a consumer co-operative society)”(《Annals of Public and Cooperative Economics》, 2000년)라는 글에서 협동조합이 외부의 자극과 영향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버챌은 1997년에 앤드류 리건(Andrew Regan)이라는 민간업자가 유럽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이던 영국의 도매협동조합(Co-operative Wholesale Society, CWS)을 합병하려 했던 과정을 분석하면서 협동조합이 미디어의 영향이나 내부매수 등에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이런 문제가 2차 대전 이후 진행된 사업(business enterprise)과 결사(membership association)의 분리에서 불거졌다는 점도 지적한다. 버챌은 협동조합이 사업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보다 잠재적으로 이로운 건 조합원들 때문이라는 점을 경영진이나 관리자들이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점을 자각하고 잘 활용한다면 소비자생협이 시장에서 제한되지만 잠재적으로 아주 유용한 위치(limited but potentially quite fruitful place in the market)를 점할 것이라는 거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세인드 메리 대학 경제학과의 노브코비츠(Sonja Novkovic)는 협동조합/신용조합과정(MMCCU, the Master of management : Co-operatives and Credit Union)을 소개하는 자료에서 협동조합이 ‘협동조합의 차이(Co-operative difference)’를 사회적으로 인식시켜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이나 시민들이 이 차이를 이해하고 믿도록 하고 이 가치를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거다.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의 사업은 이런 차이를 마케팅하는 것이고 마케팅이 곧 교육이고 교육이 마케팅이라는 점, 시설이 교육이고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노동자(활동가)가 생산품에 대한 이야기, 우리 사람과 큰 뜻에 관한 이야기,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비자생협이 활동하는 장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버챌과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이 적대적인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의 논리를 내부에서 더 많이 교육하고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은 조합원들이 협동조합을 성장시키는 것이고 조합원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협동조합의 전략이다. 마찬가지이다. 협동사회경제를 강화시키는 힘은 막대한 자원의 투입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강화시키고 신뢰와 협동을,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확대시켜야 한다. 정치적인 시민권과 사회경제적인 시민권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플레차(Ramon Flecha)와 크루즈(Ignacio Santa Cruz)는 “경제적인 성공을 위한 협력: 몬드라곤 사례(Cooperation for Economic Success: The Mondragon Case)”(《Analyse & Kritik》 2011년)에서 협동조합의 민주주의가 경쟁력을 만들고 협동조합간의 연대나 이익의 공유, 매우 평등한 봉급체계, 안정적인 고용구조 등이 협동조합의 차이를 만들고 확산시킨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노동인민금고나 인도주의적인 경영만이 아니라 공개적인 지적 토론과 풀뿌리민주주의가 있었기에 몬드라곤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서도 많이 거론되는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이나 8시간노동제, 연금같은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보장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회를 보는 눈과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선구자조합>이 매장에 읽을거리를 비치하고 대규모의 도서관을 만들었던 것은 당시 노동계급에게 절실했던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보면,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공간에서의 토론과 학습을 통해 계급의식을 형성해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이 <선구자조합>의 성공을 보장했다고 나는 본다.

 

따라서 ‘협동과 연대의 의식’을 만들고 확산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1978년에 부산에서 만들어진 <양서협동조합>이 단순히 좋은 책을 거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1978년에 협동서점을 만들고, 1979년에는 협동출판사, 1985년에는 협동도서관, 1990년에는 협동연구소, 2000년에는 협동대학을 설립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 라면상무와 감정노동의 현실

 

얼마 전 포스코의 한 상무가 비행 중에 스튜어디스를 모욕하고 “밥이 설익었다”, “라면이 짜다”, “라면이 익지 않았다”며 폭행하는 일이 발생해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면서 감정노동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비행기만이 아니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같은 유통업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식당과 술집같은 외식업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콜센터나 공공부문에서 서비스를 담당하는 노동자들, “매우 만족했다”는 고객의 평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서비스노동자들의 감정노동이 매우 심각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노동과정의 스트레스 때문에 지난 4년 동안 정신질환 자살자나 산재신청 횟수가 계속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 4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우리나라 감정노동 실태와 개선방향’ 토론에서 임상혁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은 감정노동이 감정적 부조화(자아의 이중화), 낮은 직무만족(높은 직무 스트레스), 정신적 고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음주, 흡연, 약물, 도박 중독을 불러온다고 지적했다. 사례조사 결과 서비스업 종사자의 절반 정도가 가벼운 우울증 이상의 질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개인의 의지나 감정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 누구의 감정이 더 힘드나?

 

전 세계적으로 항공기 객실 승무원은 감정노동을 가장 많이 하는 직업으로 분류된다. 앨리 러셀 혹실드는 항공 승무원의 노동을 분석한 《감정노동》(이매진, 2009년)에서 “감정을 상품으로 바꾸거나, 감정을 관리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도구로 바꾸는 데 자본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는 감정 관리를 사용할 방법을 찾았고, 그렇게 감정관리를 좀더 효율적으로 조직하면서” “감정노동을 경쟁과 연결 짓고, 실제적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광고하고, 그런 미소를 만들도록 노동자를 훈련시키고, 노동자들이 미소를 만드는지 감독하고, 이런 활동과 기업의 이익 사이의 연결 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혹실드는 “여성이 남성보다 감정 관리를 더 많이 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고, 감정노동이 남녀의 성역할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여성에게 어머니 노릇을 요구하고, 이 사실은 묵묵히 직무 내용의 많은 부분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감정노동은 주로 여성, 나이로 보면 30대 이하에서 가장 많이 요구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판매․서비스 분야에서 일하는 전체 노동자의 수가 약 314만 명인데, 서비스 종사자의 약 66%, 판매 종사자의 약 50%가 여성이다. 특히 전화로 고객을 상담하는 콜센터에서 일하는 100만 명의 상담원 중 약 89만명이 여성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 2011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여성감정노동자 인권가이드’를 제작해 배포하고, 2012년에는 ‘여성 감정노동자 인권수첩’을 발간하기도 했는데, ‘인권수첩’은 여성감정노동에 대한 정보와 감정노동자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꿀 방법, 감정노동자가 보장받는 권리의 내용 등을 담고 있다(인권수첩은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 생협매장과 감정노동

 

생협이 운영하는 매장에서는 감정노동이 없을까? 매장의 매니저나 활동가는 무조건 친절하고 웃어야 한다고 강요받지 않을까? 조합원들은 매장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을 같은 조합원으로서 동등하게 대하고 있나? 생협의 매장이 무조건 친절해야 할까? 외려 조합원들이 소비자의 관점에서 매장활동가들에게 감정노동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질문들에 답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협동조합의 정신에 따른다면, 조합에 감정은 넘쳐 흘러야 하지만 그것이 노동으로 강요되면 안 된다. 그리고 물품의 유통에서 공급보다 매장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는데, 매장에서의 관계와 역할, 활동에 관한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앞서의 임상혁 소장은 고객에게 무조건 사과를 하라는 회사의 매뉴얼 말고 고객이 요구할 수 있는 서비스와 수용의 기준, 지속적으로 웃지 않을 권리, 고객과 마찰이 생겼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는 지침 등을 담은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생협에서도 이런 매뉴얼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 죽음의 무기, 확산탄

확산탄은 공중에서 폭발해서 많은 작은 폭탄들을 흩뿌리는 폭탄으로 군사목표와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고 넓은 지역에 피해를 입히는 끔찍한 살상무기임. 확산탄 피해자 중 98%가 민간인이고 이중 1/3이 어린아이로 알려짐. 이런 비인도적인 피해 때문에 2008년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탄금지협약이 추진, 체결되었고 2010년 8월부터 이 협약이 발효되고 있음. 이 협약에 따라 확산탄의 사용, 생산, 비축, 이전이 국제적으로 금지되었고, 2013년 4월까지 전 세계 80개국이 협약을 비준한 상황임.

 

확산탄의 사용을 금지하는 차원을 넘어 벨기에, 아일랜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스위스 등 7개국은 확산탄에 대한 각종 투자를 법으로 금지함. 7개국 외에 21개국도 확산탄금지협약에 의거 투자를 금지한다는 해석 성명을 발표함. 실제로 노르웨이연금기금이 2006년과 2008년에 각각 풍산과 한화에 대한 투자를 철회한 것도 이런 윤리지침에 따른 것이었음.

 

그런데 확산탄에 대한 전 세계 투자현황이 기록된 《확산탄 세계투자: 공동의 책임보고서》(2012년 6월 개정판)에 따르면 한국의 한화와 풍산은 세계 8대 확산탄 생산기업임. 그리고 이 두 기업에 가장 많이 투자한 곳이 국민연금이라 기록됨.

 

 


- 무기생산기업에 대한 투자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투자로

2011년 말 국민연금은 세계 4대 공적연기금으로 성장함. 국민의 생활안정과 노후행복에 공헌하겠다는 국민연금공단이 전 세계적으로 금지되고 있는 무기생산에 투자하는 것은 모순임. 더구나 국민연금은 투자할 때 투자대상의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고려해야 한다는 유엔책임투자원칙(UN PRI)에 2009년 7월에 가입했음. 또한 국민연금은 사회책임경영, 윤리청렴경영, 사회공헌, 동반성장 등을 중요한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음.

 

전 세계적인 흐름과 자신의 원칙에 부합하려면 국민연금은 무기나 사회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생산하는 대기업보다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에 투자해야 함. 그러나 국민연금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벤처기금을 운용하고 있지만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지원한 사례는 없었음.

 

만일 국민연금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국민연금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이유가 있을까? 국민연금이 미래를 파괴하는 생산에 투자하는 건 자기모순임. 그런 의미에서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국민연금이 제대로 투자될 수 있도록, 우리 삶의 기반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사회적인 합의를 만들고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듯.

 

- 참고: 무기거래를 감시하는 단체 <무기제로>의 ‘국민연금에 보내는 공개서한’

 - 일베만의 문제인가?

<일간베스트 저장소>라는 인터넷 사이트의 줄임말인 ‘일베’가 사회적인 논쟁의 화두가 되고 있음. 2009년에 만들어졌고 대표적인 우파 사이트로 불리는 일베에서는 하루 동안 게시물을 조회하는 수가 400만을 넘는다고 하니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 그동안 일베 게시판에서 여성이나 다문화 여성, 장애인 등 사회의 소수자를 비난하거나 모욕하는 일이 잦았음. 그러다 최근 일베 게시판에 “광주 5·18은 고정간첩들과 북괴놈들 내려와서 벌어진 일”이라느니 희생당한 광주시민을 “홍어 택배”라고 부르는 글이 올라오면서 사회적인 파장이 커지고 있음.

 

그동안의 일베 게시물을 분석한 ‘일베 리포트’를 보면, 게시물에 사용된 주요 단어는 “씨발, 존나”(5,417건), “여자”(4,321건), “노무현”(2,339건), “盧”(1,564건), “광주”(1,622건), “종북”(1,633건), “민주화”(1,204건), “섹스”(616건)임. 노무현과 광주, 종북, 민주화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된 건 민주화에 거부감을 가진 일베의 성향을 보여줌.

 

그런데 이런 현상이 일베만의 특징은 아님. 일베의 등장은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와 무관하지 않고, 특히 경제적, 문화적인 면에서 배제되고 있는 청년층의 확대와 연관성을 가짐.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거나 사상을 주입당해 보수화된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반감과 불만이 기존의 권위에 대한 파괴적인 성향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음. 그래서인지 힘에 대한 강한 욕망을 보임.

 

하지만 이런 상황논리로 일베의 등장을 분석하는 건 단편적일 수 있음. 과거에는 보수적인 분위기에서도 민주화를 외치며 많은 청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단편적인 분석은 어려움. 그리고 일본에서도 ‘넷 우익’이라 불리는 집단이 세를 불리고 있고, 유럽에서도 인종주의가 강해지고 있다는 현실 변화를 고려해야 함. 특히 논란 이후 중앙 일간지들은 일베를 문제집단의 집합소로 몰아세우고 있는데, 이는 우리 스스로 깊이 성찰해야 할 지점을 놓치게 함.

 


- 누가 일베인가?

 

일베가 대중의 관심을 받은 건 걸그룹인 시크릿의 일원인 전효성이 방송에서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고 말한 일 때문임. 일베에서 민주화는 반대나 싫다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를 사용한 것임. 그리고 최근 밝혀진 것을 보면 일베에는 교사나 의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음. 즉 특정한 연령이나 직업, 계층으로 정의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일베에 접속하고 있음.

 

일베가 문제되자 민주당의 몇몇 국회의원은 일베의 운영을 법적으로 중단시키고, 광주시는 광주와 관련된 발언을 한 일베 회원을 고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힘. 이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그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더 큰 위험을 낳는다는 지적이 있음. 냉소와 분노가 동시에 공존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상식으로 평가되기 어렵고, 실체를 드러낸 극우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잠재된 냉소하는 사람들임.

그러니 일베를 법에 따라 처벌하거나 일베를 무시하거나 그것에 관심을 끊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님. 물론 표현의 자유를 넘어서는 폭력에 가까운 발언들이 있고 그 말을 통해 자기 힘을 과시하고 쾌감을 느끼려는 태도는 지극히 위험해 보임. 하지만 그 극도의 위험성은 불안감의 정점에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함.

 

어쩌면 우리 아이, 내 친구, 내 동료들이 일베에 들어가 글을 남기는 사람일 수 있음. 그렇다고 우리 속에도 일베가 있으니 모두가 내 탓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님. 한국사회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개인화해서 어떤 사회적 조건으로 만들곤 함. 가령 어려운 삶을 산 개인이 순간적인 분노로 범죄를 저지를 경우 ‘사이코패스’로 분류하며 이를 그의 성장과정 탓으로 몰아붙이곤 함. 최근 일베 사이트에 ‘인증’이 자주 올라오는 건 그런 규정에 대한 반감이기도 함.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서로 마음의 심연(深淵)을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함. 타자의 눈에 비친 내 속의 심연을 대면해야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김.

지난 5월 2일, 광주광역시에서는 생협매장 문제로 <아이쿱 광주권 생협>과 <한살림광주생협>의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아이쿱 생협이 한살림 매장 근처에 연이어 대형매장을 내어 한살림매장이 큰 위기를 겪거나 폐점되자 한살림이 먼저 토론회를 제안했다. 아이쿱 생협은 신설 매장이 조합원 협동의 결과물이고 먼저 매장이 들어섰다고 그것이 기득권이나 독점일 수 없으며 협동조합도 서로 경쟁할 수 있다고 답하며 토론회를 수락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토론회는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렇지만 이 토론회가 시작이어야지 끝이면 안 될 것 같다. 이제 그럴 때가 되었다. 가끔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도 생협과 관련된 논쟁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생협 매장이 지역의 작은 가게들에 영향을 미치거나 문을 닫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생협과 거래하는 생산지들이 커지고 사업화되면서 자기 지역 먹거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 생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털어놓는 어려움을 접한다. 그럴 때마다 놀란 가슴을 달랜다. 생협은 자기 길을 잘 걷고 있나?

그 많은 이야기들이 그동안 우리에게 들리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피해온 걸까? 이러다간 어느 순간 생협도 점점 일반 기업처럼 변해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생긴다. 살림이나 호혜의 경제학이 아니라 자유주의 경제학, 시장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건 아닐까? 조합원이나 협동조합의 숫자는 늘어나지만 사회의 의식이나 문화는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시민의 삶은 더욱더 치열한 승자독식의 경쟁으로 내몰리는 건 아닐까?

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에서 적자생존을 위한 경쟁만이 상호부조가 만물의 진화를 돕는다는 이론을 사회에도 적용시켰다. 경쟁이 없다거나 무조건 경쟁을 배제하자는 게 아니라 경쟁만이 사회를 움직이는 건 아니고 외려 상호부조와 상호지지를 통해서 경쟁이 제거되면 더 좋은 조건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하는 삶이 경쟁하는 삶보다 훨씬 오랜 전통과 문명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이것은 단지 ‘성장이냐 아니냐’라는 미래의 가능성을 점치는 물음이 아니고 지금 현재 우리 삶과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인식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경쟁이라는 말이 이미 나왔으니 그 말을 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경쟁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경쟁은 더 다양한 말로 치장될 것이다. 아마 적대적인 경쟁과 호의적인 경쟁이 다르다는 말도 나올 것이다. 허나 그런 차이가 만들어지려면 사회적인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협동조합들을 지원하고 우호적인 경쟁자를 만든다는 이탈리아의 협동조합기금이 이탈리아라는 사회적 조건을 무시하고 논의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환경은 이탈리아와 비슷한가? 협동조합에 이로운 외부 환경이 조성되어 있나? 그런 환경이 없는 상태에서 조합원들이 경쟁을 당연한 원리로 받아들일 때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을까? 무조건 규모를 계속 키워야 하는 매장, 같은 조합원임에도 일방적인 친절함을 강요당하는 매장 활동가나 실무자, 일반 기업이 겪는 문제를 협동조합은 겪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단지 매장의 입지만이 아니라 이런 여러 가지 물음들을 놓고 다양한 토론이 벌어지면 좋겠다.

협동조합 7원칙 중 여섯 번째 원칙은 ‘협동조합간의 연대’이다. 그런데 연대 이전에 서로의 존재에 대한 자각과 인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역 내의 다른 생협이나 협동조합들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서로를 어떻게 모시고 있나? 이 물음에 답을 찾아야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다.

함께 살자, 이것은 결코 당위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관한 이야기인지 모른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에서 “가난이 왜 고통스러운가 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난하기 때문에 관리나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고,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니까 그것이 고통스러운 거죠.”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핍을 보상받을 물질이 아니라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관리나 억압에 저항할 수 있으며, 경멸당하고 무시당하지 않아도 살 수 있도록 서로를 지탱해주는 관계이다. 남을 타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는 사람을 받쳐주는 것이 사람(人)이고 협동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떤 완성된 과정이나 단계로 생각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도입하면 곧바로 뭔가가 이루어지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정답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 아닌가. 정답이 없기에 둥글게 모여 앉아 서로의 지혜를 모아 보자는 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물론 어떤 과정이나 단계가 그렇게 지혜를 모으기에 좋은 조건을 마련할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가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의 관점으로 본다면 모범 사례모델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 곳의 성공이, 어떤 다양한 경험과 문화, 생각들이 하나의 모델로 정리되어 다른 곳에 이식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나 정치에 관해 강의할 때 가장 많이 요청받는 것이 그와 관련된 사례이다. 사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완벽하게 실현하고 있는 사례가 있을까? 내가 보기엔 없다. 밖으로는 민주적이라고 알려진 공동체나 출판사, 단체들도 막상 가 보면 몇몇 사람들이 주요한 결정들을 내리고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으는 과정은 결정을 보완하는 수단 정도로 여겨진다.


반면에 민주주의가 실패한 사례들은 주변에 널려 있다. 왜 실패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민주적인 사회구조를 이유로 든다. 이런 구조에서는 민주주의가 어렵고 때론 비효율적이라고 얘기한다. 타당한 지적이지만 충분한 지적인지는 모르겠다. 바로 그런 구조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더욱더 필요한 게 아닐까?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조차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더더욱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운동을 하는 거지?


어느새 이런 부조리가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어 버렸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사회에 살지만 정작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규정하거나 요구하지 못한다. 생각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삶의 과제로 가져오는 건 목숨만큼 큰 대가를 요구한다. 공부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살 수는 없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불온한 민주주의. 이미 법정에서 판결이 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탑에 올라야 하는 노동자에게, 학생의 인권이 조례로 보장된다는 사회에서 홀로 고립되어 아파트 난간에 올라선 청소년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일까? 삶은 이렇게 절박한데 민주주의는 박제된 골동품처럼 느껴진다.

 

아직도 민주주의가 더 필요한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무슨 민주주의가 더 필요하냐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지금으로도 민주주의는 충분하며 민주주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지나쳐서 문제이고, 외국에서 얘기되듯이 현재의 문제는 과잉된 민주주의(demorecracy)라는 거다. 지금껏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거나 자기 삶과 연관된 결정들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공론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기득권층은 기함하며 이들을 막아선다. 마치 당장 무슨 변고가 일어날 것처럼, 사회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런데 이건 그들의 과장이 아니라 그들의 실감일 수 있다. 비교적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로 평가받는 송호근의 입장을 살펴보자. 송호근은 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에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평등 지향적 심성을 지적한다. 원인보다는 결과에 더 민감한 평등주의 심성이 한국 사회를 하향 평준화시켰고, 이런 습속folklore이 누적됨으로써 책임과 의무가 결여된 평등주의가 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평등주의 자체가 해로운 것은 아니지만 비난의 심성, 분노와 적개심의 에너지 등이 공정성을 권리 투쟁의 대상으로 만들어 한국 사회를 파괴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송호근이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다원적 평등과 관용이다. “똑같은 양의 재산을 소유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다양한 분배 기준을 요구하는 다원적 평등 개념을 주장하고, “양보의 기억을 쌓는관용을 강조한다. 도발적인 문제 제기에 비해 모범생 같은 결론이다.


어쨌거나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평등을 지향하면서 사회의 반목만 낳았다는 것이 송호근의 분석인데, 이 분석은 좀 문제가 많다. 일단 사회적인 평등을 논하는 전제가 잘못되었다. 송호근은 사회주의권을 제외하고 자본주의권에서 한국은 소득 불평등이 비교적 낮았던 국가에 속한다. 적어도 금융, 토지, 주택 소유를 논외로 하고 소득만을 비교했을 때에 한국은 급속한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소득 불평등이 낮은 매우 모범적인 국가로 꼽혀 왔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는 소득만이 아니라 그가 배제한 금융, 부동산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에 따르면, 1988년과 2006년 사이에 토지 소유자 중 상위 50%가 소유한 면적 비중은 98.2%에서 99.6%로 늘어났다. 소위 민주화 이후 토지 소유에서 빈부의 격차가 더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사회가 평등해지는데 반목만 늘어났다고 주장하기는 어렵고, 외려 실질적인 평등이 더욱더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보통 과잉을 주장하는 얘기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시도일 때가 많다. 이들은 본질을 제대로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본심이 드러날까 봐 아프다며 엄살을 떤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과잉을 주장해야 하기에 실제 역사가 왜곡되기도 한다. 가령 송호근은 “1987년 민주화 과정은 재산 축적을 향해 무한 질주를 해 온 교양 없는 중산층결과의 평등을 앞세운 노동계급 간 전면 대결로 촉발되기에 이르렀다. 민주화 과정이 재분배 문제를 둘러싸고 각 집단과 계급의 이해 충돌과 갈등으로 점철된 이유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 역사와 다르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민주주의는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대결이 아니라 기득권층과 새롭게 구성되는 정치 주체의 대결이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묘사했을까?


이런 잘못된 정보는 한국 사회가 공정 사회나 기회 균등을 부르짖어도 사실상 두 개의 질서로, 즉 특권을 남용하는 소수의 기득권층과 주어진 권리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시민들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감춘다. 인사 청문회에서 보이듯 기득권층에겐 부동산 투기가 상식이고 직위를 남용한 특혜가 권리이며 학벌은 상속되는 재산이다. 재벌가의 후손들에겐 불법 증여나 분식 회계가 상식이고 특별사면이 권리이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인지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를 원인 없는 적개심이라 불러야 할까? 민주주의가 사회를 하향 평준화시킨 게 아니라 기득권층과 시민들의 삶이 완전히 분리된 건데, 이것이 평등주의 탓일까?


과잉을 주장하는 기득권층에게는 지금껏 눈에 들어오지 않던 사람들이 자신과 동등해지는 것이 싫다. 민주주의는 그런 동등함을 전제하기에 불손한 것이고, 과잉과 문란의 위험을 내포한 민주주의는 절제되어야 한다. 1987년 민주화 당시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은 단지 임금 인상이 아니었다. 구해근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보면, 당시 노동자들은 임금 및 상여금 인상, 노동 시간 단축, 조장組長에 의한 자의적인 평가 폐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노동자 간의 지위 구분 철폐, 식사의 질 개선, 복장과 머리 길이에 대한 규제 철폐, 강제적인 아침 체조 중단을 포함한 정말로 긴 요구 목록을 제시했다”.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최소한의 조건이지만 이들을 관리하는 사람에게는 과잉이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이다. 법으로 보장된 휴일을 쉬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고 계약서를 쓰자고 맘 편히 얘기 할 수 없는 사회,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배제되는 사회에서 우리도 그들과 동등하다고 얘기하는 평등은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송호근의 모범 답안 같은 다원적 평등과 관용은 현실의 불평등과 반민주주의를 지속시킬 뿐이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순수관용비판A Critique of Pure Tolerance에서 한쪽 편을 들지 않는 정파적인non-partisan 관용을 추상적또는 순수한관용이라고 부르면서 이런 관용이 현재의 차별과 착취, 억압을 지속시킨다고 비판했다.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선전할 수단을, 자기 삶과 연관된 결정을 내릴 힘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모두가 똑같이 관용해야 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보편적인 관용이 아닌 차별하는 관용discriminate tolerance을 제안했다. 이는 루쉰이 물에 빠진 개를 때릴것을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왕의 머리가 잘리지 않았다면 과연 프랑스혁명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때로는 불공정한 조건을 바로잡기 위한 과잉된 개입이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좀 과잉될 때에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을 동등하게 대해 달라는 목소리와 개입이 있어야 기득권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잉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기득권이 위협받고 있음을 뜻하기에, 어쩌면 우리가 조금 더 본질에 다가서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누가 과잉을 주장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학교와 연관 지어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학교가 과잉을 외치며 지키려 하는 본질적인 이해관계나 기득권은 무엇일까? 학교가 학생회 선거에 개입하고 학생들의 삶을 규율하려는 이유는, 국가와 사회가 청소년의 삶을 규율하려는 이유는 뭘까? 이런 부조리한 현실과 학교를 바로잡기 위해 교사와 학생은 같은 세계에 살고 있고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 있어야 민주주의는 때에 따라 필요한 게 아니라 언제나 필요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

 

몫 없는 자들의 민주주의, 그게 가능할까?

노동자나 소수자의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상황에서 다른 한쪽에선 인권조례가 논의되고, 주민들의 참여를 님비라 매도하거나 폭력으로 진압하는 상황에서도 어느 한쪽에선 주민참여조례들이 제정된다. 이렇게 이상한 나라에 살다 보면 사람의 판단력도 흐려질 수밖에 없다.


학교를 봐도 그렇다. 무상급식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지만 그것을 함께 밥을 먹는 공동체 문화, 즉 식구食口라 부를 수는 없다. 대학 등록금이 반값으로 떨어질 수는 있으나 대학의 교칙이나 수업 과정에 대한 권리는 오로지 대학 당국의 것이다(학생회마저 조폭들이 장악하는 대학에는 정치의 자리가 없다). 단지 수업만이 아니라 학교의 공간을 구성하고 학생들이 생활할 권리조차 학교 당국의 손에 좌지우지된다. 설령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더라도 그 사안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가 교사나 학교에 있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제도가 권리를 보장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치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한때 몫 없는 자들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유행했다. 몫 없는 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주체이니 치안의 질서에서 벗어나 강하게 아니오라고 외치며 정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건데,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치안의 힘이 너무 강하다.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서귀포경찰서장이 수배자를 찾는다며 온 마을을 뒤지고, 서울시 중구청장이 대한문 앞 농성장을 부수고 화단을 만드는 건 수많은 사례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권리의 목록을 제 아무리 길게 만들고 읽어 줘도 그것을 실제로 쓸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다. 몰라서 못 쓰는 게 아니라 알아도 안 쓰는 게 약자의 권리 아니던가.


그리고 우리는 계속 한계를 넘어선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쇠사슬을 감고 저항하던 제주도 강정마을 강동균 회장이 경찰에 끌려가는 사진에서는 치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건 그냥 폭력, 공권력의 탈을 쓴 노골적인 폭력이다. 몫을 논하는 순간 돌아오는 이 폭력 앞에서 정치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한때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국에서 노동자와 청소년, 소수자들은 이미 헐벗은 삶을 살고 있다. 내가 그 현장과 자리에 서지 않기를 원할 뿐 우리는 죽음의 뺑뺑이를 돌고 있다.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존재들이다. 무기력한 민주주의가 이 뺑뺑이를 멈출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새로운 정치의 등장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다. 아니, 자기 자신과 우리의 몫을 사유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얼마 전 의정부의 한 고등학교에서 고등학생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눴다. 정치에 관한 궁금증을 질문지로 미리 받았는데, 인상에 남은 질문들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국회는 왜 말로 할 것이지 맨날 주먹다짐이나 하나요. 다 큰 어른들이……. 다들 생각도 있고 연세가 있으신 분들일 텐데 왜 그리들 스트리트 파이터가 되는지 궁금해요.” “박근혜가 이번에 18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박정희 정권 당시 독재정치가 맞는 건가요?” “보수 진영은 왜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는 걸 좌빨이라며 비난하나요?” “보수와 진보는 왜 항상 싸우기만 하나요? 보수와 진보의 각각 제대로 된 정의는 무엇이고 둘 다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나요?” 이런 심도 깊은 질문들에 나는 국회란 원래 논쟁하고 싸움하라고 만들어 놓은 장이니 더 열심히 싸워야 하고, 다만 지금처럼 카메라가 켜진 곳에서만 싸우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박정희가 독재정치를 했냐는 질문에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긴급조치를 남발한 사람이니 당연히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 다음 질문들은 좀 어렵다. 질문 자체에 답하는 게 어렵다기보다는 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궁금해서였다. 왜 고등학생의 정치의식에서 보수와 진보가 중요한 질문이 되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신문이나 매체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계속 부각시켜서일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정치와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건 보수와 진보 이전에 자신과 우리의 몫이다. 보수와 진보는 그 몫을 인지하고 난 뒤에야 의미 있는 질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참정권이다. 17세부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무엇이 바뀔까? 고등학생들이 스스로 교육감을 선택할 수 있다면 학교가 어떻게 바뀔까? 지금처럼 정치인이나 교육 공무원들이 시혜의 관점으로 학생이나 청소년의 권리를 접근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학생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면 유권자들이 가득한 학교 앞은 선거철마다 후보자들의 주요 무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교사 역시 수업 외의 시간에 학생들을 대하는 시선이 바뀔 것이다. 자기 몫을 생각한다면 보수와 진보보다 이게 더 중요한 문제 아닐까?


찾아보면 정보가 없지도 않다.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내놔라 운동본부)’는 이미 5가지의 명쾌한 요구안, 선거권·피선거권 내놔라’, ‘모이고 외칠 권리 내놔라’, ‘학교 민주주의 내놔라’, ‘판단할 권리 내놔라’, ‘우리 동네 내놔라를 요구하고 있다. 너무나 훌륭한 요구이다. 문제는 이런 요구를 실현할 방법이다. 어떻게 하면 이 요구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누구에게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할까? 나는 알고 있는 내놔라 운동본부를 정작 당사자인 고등학생들은 모르는데 어찌해야 할까? 이런 물음을 던지다 보면 희망이 그려지지 않는다. 정치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이미 고등학교부터 대상화되어 관전 포인트를 찾는 객관적인문제가 되어 버린 듯하다.


그렇다고 자기 몫을 못 챙기는 사람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몫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장 자체가 없다. 중요한 정치 의제는 언제나 중앙이나 외부에서 논의되다 삶으로 툭 떨어진다. ‘자아 성찰자기 판단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이고 실제 삶에는 그런 과정이 없다. 수많은 착시 현상들이 판단을 방해하니 판단력은 더욱 떨어지고, 똑똑한 사람들이 반드시 좋은 시민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대략 난감이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정치학교를 열고 싶어 하는 선생님도 만났는데, 쉽지 않을 꺼라 얘기했다. 정치는 동등한 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장이기 때문에 현재의 학교는 정치에 적합한 장이 아니다. 어느 한편을 시혜나 훈육의 대상으로 보는 곳에서는 정치가 시작될 수 없다. 정치에 관한 지식을 교육할 수는 있겠지만 그곳이 정치의 장일 수는 없다. 그곳을 지배하는 원리는 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주체로 서지 못하는 민주주의, 서로를 알아보고 동등하게 인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 새로운 관계와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 민주주의는 가식이다. 내가 저들을 위해 권리 목록을 만들고 보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같이 살고 있는가?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마주 보고 있는가?

 

의식과 교육이 민주주의를 체화시킬 수 있을까?

사람들과 정치를 얘기하다 보면 종종 냉소를 경험한다. 이런저런 일에 개입해 봐야 별 효용도 없고 나만 피해를 볼 것이라 생각하고, 나아가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을 지지하지 않고 주저앉히며 원래 다 그런 거라고 한다. 현실에 무심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밝을수록 더 심한 냉소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이렇게 이미 냉소를 품은 사람들을 의식화시키고 교육한다고 한들 그 삶이 바뀔 수 있을까?


재작년에 관둔 대학에서 나는 시민교육이라는 과목을 담당했다. 인문 정신을 내세운 교양 과정 개편이 그 과정을 이수할 사람들과 합의 없이 진행되었고, 학생들이 무슨 과목인지도 모른 채 수강 신청을 해야 하는 수강 대란이 벌어졌다(좋은 내용이면 과정이 중요치 않다는 생각은 그곳에서도 반복되었다). 시민교육도 그 교양 과정의 일부였고, 심지어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었기에 학교 내외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시민교육의 방법에 관한 합의가 없었고, 가장 심각한 건 강사들이 학생들을 시민으로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설령 내가 좋은 시민의 삶을 살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 삶과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 사실 시민으로서의 삶이란 학습되는 게 아니라 경험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최상의 교육은 내가 시민의 삶을 더 열심히 살아 그 삶이 주변에 울림을 만드는 것이다. 굳이 따라오라 설명하지 않아도 공명할 수 있는 교육의 관계, 그것이 민주주의 아닐까?


하지만 강사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빈약해진 채, 시민교육은 학생들이 팀을 짜서 현장 활동을 하고 이를 정리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시민으로서의 삶이 왜 중요하고, 시민의 권리를 조직하는 법이나 그것을 지키기 위해 민원을 넣거나 압력을 행사하는 법,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고용계약서를 써야 하는 이유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정작 학교에서의 내 삶은 그 앎을 반영하지 못했다. 학교를 관두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앎을 반영하지 못하는 삶이었다. 앎과 삶의 모순, 이 커다란 간극을 해결하지 않고 나 스스로도 그 간극을 메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대체 어떤 교육이 가능할까? 하물며 시민교육이라니.


물론 대학 밖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대거 수업을 맡으며 기존의 교육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도입한 것은 학내에 많은 활력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서로의 주체성을 존중하고 살리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교육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학점을 매기고 받는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가? 내용을 함께 기획하고 실천했다면 이미 평가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지 않은가? 이런 모순을 해결하지 않은 채 민주 시민이 되라고 하니 일시적인 경험이 장기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다. 팀을 구성하는 목적이 학점 경쟁을 위해서라면 TV의 오디션 프로그램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대학생들의 현실과 대학을 바꾸기 위해 대학 안과 밖이 어떻게 연계되었던가? 사학 재단의 소유물로 둔갑한 공공재인 대학을 바꾸기 위해 시민교육에 참여했던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은 어떤 역할을 했던가? 만일 시민교육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그 학교의 교과과정이나 교칙이 엄청난 변화를 겪어야 했을 텐데, 지금도 그런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걸 보면 그 과정의 한계를 느낄 수 있다.


대학만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 진행되는 민주시민교육을 봐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교육을 받아서 어디에 어떻게 써먹으란 얘기인가? 청소년들이 노동기본권에 대한 교육이나 인권교육을 받는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어디에 써먹으란 얘기인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유소나 편의점의 사장이나 점장, 매니저에게 그것을 써먹을 수 있을 것인가? 학생이나 교사들이 민주시민교육을 받는다손 치더라도 비민주적으로 운영되는 학교에서 그 내용을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까?


정치와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공공 영역이나 공론장은 계속 줄어드는데, 권리를 교육받은 시민들은 늘어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건 공리이지만,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공리는 분노보다 냉소를 낳기 쉽다. 이 냉소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 다른 권리 목록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의식화와 교육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물음에 대한 모범 답안은 없다. 다만 내가 관심을 가지는 역사는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안창호 선생과 이승훈 선생은 학교를 세웠다. 평범한 사람들이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둥글게 둘러앉아 삶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다면 일제가 아닌 어떤 다른 국가로부터도 독립할 수 있을 거라고, 자치와 자급이 이루어진다면 일제가 물러가지 않아도 이미 독립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들은 판단했다.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우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총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겠지만, 중요한 건 백성들이 깨어나는 것입니다라는 오산학교의 설립 정신은 그 고민을 말해 준다.


비록 안창호, 이승훈 선생의 이상촌 계획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그들이 학교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바는 원주나 홍성으로 이어져 지금도 역사를 이어 가고 있다. 그들의 계획에서 눈에 띄는 점은 학교와 협동조합, 지역사회를 하나의 체계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해서 살림살이를 해결하고 이런 관계망이 지역사회를 단단하게 만든다면 이상촌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구상했다.


의식과 교육이 아니라 생활이, 직접 그렇게 살아 보는 경험이, 그리고 그런 앎을 반영하고 삶을 고양시키는 앎이 식민지라는 현실을 극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그들은 기대하지 않았을까? 방관자의 자세에서 벗어나 그 문제를 내 것으로서 삼아 참되고 실속 있게 행한다는 무실역행務實力行, 서로의 사랑을 도탑게 하라는 정의돈수情誼敦修는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제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는 이승훈 선생의 말 역시 우리가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를 알려 준다. 지금 필요한 건 삶과 괴리된 앎이 아니라 삶으로 단단하게 뭉쳐질 수 있는 앎과 그런 앎의 관계이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물음과 깨달음, 같은 세계에 사는 동료 시민과의 구체적인 만남과 관계, 이 관계를 바탕으로 스스로 만들어 가는 세계, 이런 것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지 않을까?


나는 이 말들을 사랑으로 살림살이(경제)를 살고 우정으로 정치하자고 풀이하고 싶다. 정치가 사랑의 장이 아니라 우정의 장인 것은 연인이 아니고 친구여야 몰입하지 않고 거리를 지키며 서로의 잘남을 뽐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우정을 맺으며 산다면, 저들의 과잉을 경계해야 하겠지만 마냥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오늘 그린비노조분들과 점심을 같이 먹었다.
아주 즐겁게...
몇가지 해프닝이 있어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더운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 불쾌지수가 높고 같은 공간에서 지리한 신경전을 펼쳐야 하는 그린비노조는 더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힘겨운 싸움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하나씩 매듭을 지어가면 좋을 것 같고, 그러려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내가 이 싸움에 관심을 가진 건 단순하다.
부당한 이유로 징계를 받은 노동자가 있고, 내가 그곳과 책을 냈다는 관계를 맺고 있어서이다.
제 아무리 좋은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내 일상과 가까운 곳에 있는 노동자들과 손을 잡지 못한다면 멀리 있는 곳과는 더 손을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노동과 생산을 얘기하는 게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대의적인 명분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그렇게 부조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번 고개를 돌리면 또 고개를 돌리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다.
무엇이 승리일지는 모르지만 그 싸움이 싸우는 사람들에게 기쁘게 남는 걸 보고싶다.
그러면서 나도 힘을 얻고 싶다. 우리가 믿고 싸우는 바가 옳을 뿐만 아니라 무기력하지 않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기에 우리도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정말 고마운 건 힘겹게 싸우는 노동자들이다.

사실 이 싸움에는 무엇이 승리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노조의 단협이 승리한다해도 여전히 출판사의 실권은 그들에게 있을 터이니.
가장 궁극적인 대안은 노동자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안이 어느날 선물처럼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지리한 싸움을 겪으며 서로의 관계가 더 단단해지고 그 싸움을 함께 할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런 터전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 믿는다.
자기 노동의 결과물에 자기 이름조차 싣지 못하는 이 소외된 상황이 사라져야 주체적인 노동이 시작될 거라 믿는다.
땡땡책협동조합 역시 이런 싸움이 하나씩 승리할 때 자리를 잡아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 싸움이 꼭 이겼으면 좋겠다.

우리가 얼마나 큰 힘을 실어줄 수 있겠나.
힘들 때 옆에서 잡아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고.
다음주까지 그린비출판사 분회에 따뜻한 말, 함께 하자는 말 많이 건네주면 좋겠다. 그러면 단체협상도 힘을 얻지 않겠나.
힘을 모으면 좋겠다.
너와 나, 우리를 위해...

그린비출판사분회 블로그: http://blog.jinbo.net/gblu/ 


한편으로는 인권을 강화시킨다는 조례들이 하나둘씩 제정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본권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제정되고 있지만 학생들의 인권이 향상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외려 청소년들의 자살 소식만 전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은 강제로 철거되고 있고, 어느 작업장에선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거나 밀려나고 있다. 인권도시가 논의되고 있지만 도시의 중요한 공적 공간들은 하나둘씩 사유화되고 있다.

 

지금껏 인권도시나 인권조례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 아니기에 조심스럽지만, 인권기본조례나 인권 관련 조례들이 기존의 다른 조례들의 어려움들을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조례와 자기입법


작년에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정된 인권 관련 조례들을 아는 시민들이 얼마나 될까? 일단 그런 조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제도를 사용할 마음을 먹을 텐데, 주민의 몇 % 정도가 조례를 알까? 그리고 인권기본조례의 대상은 이미 권리를 누리는 사람보다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일 텐데, 그 사람들을 위한 배려는 있는가? 또한 인권을 침해하고 있거나 침해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조례를 알고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있을까?

 

이런 과정이 마련되려면 적극적인 ‘공지(公知)’가 필요하다. 시민들은 인권기본조례가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어디서, 어떻게 인지할 수 있을까? 버스나 지하철 광고판에 실리나? 시민들이 자주 오가는 시장이나 마트에 공지되나? 차별받는 대상자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에 조례가 제정되었음을 공표하나? 홈페이지에 공지를 띄우거나 플랑카드 몇 장 걸어놓는 것으로는 시민들이 제도를 인지할 수 없다.

 

그리고 제도를 안다 할지라도 대부분의 조례들이 규정하는 인권의 내용은 헌법이나 국제인권조약, 국제관습법 등을 근거로 삼는다. 그런데 헌법이나 국제인권조약, 국제관습법을 들춰본 시민들이 얼마나 될까? 권리보다 의무를 먼저 배우는 한국사회에서, 보장보다는 박탈을 먼저 경험하는(대부분의 학교가 그렇지 않은가!) 한국사회에서 인권은 참으로 먼 얘기이다. 그리하여 누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잘 모를 수밖에 없는 얘기이고, 실감을 느끼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닌 양 몸에 잘 맞지 않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례안의 공개가 아니라 조례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팜플릿이나 동영상 등이 필요할 텐데, 그런 과정이 제대로 준비되고 있나? 주민참여에 관한 여러 조례들이 시민들의 언어로 구성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는 인권기본조례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특히 인권조례라면 더욱더 시민들의 문화와 가치를 고려해야 할 텐데, 표준안이나 잘 알려진 사례를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조례가 자치법규로서의 가치를 이미 상실하고 있다.

 

인권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시민이다. 정부는 보호와 증진의 의무를 가지고 있을 뿐 실질적인 변화는 시민의 몫이다.

 

 


인권위원회와 주민참여


지금까지 대부분의 조례안들은 인권위원회를 전문가와 활동가들로 구성하도록 규정한다. 그런데 외부의 전문가와 활동가들이 해당 지역사회를 정말 전문적으로 알고 있을까? 어떤 공간, 어떤 사건이 주민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강화시킨다는 점을 외부인이 어느 정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 인권감수성이나 인권의 가치는 보편적인 것이라 지역주민들이 계몽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인권이 좀 특수한 분야일 수도 있다. 대중의 상식이 편견과 선입견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인권을 강요할 힘이 제도에서 나오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제도가 시민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없앨 수 있는 건 아니다. 설령 억누른다 하더라도 제도는 ‘분리’나 ‘격리’의 방법을 쓸 수 있을 뿐 ‘통합’을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서 시민들이 함께 어울려 살려면 서로간의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최후의 방법으로 분리를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역시 당사자들의 선택이어야 한다).

 

주민참여예산제도에서도 예산처럼 전문분야에 어떻게 일반 주민들을 참여시키는가라는 물음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어찌 보면 바로 그런 물음 때문에 주민참여예산제도는 평범한 시민들을 지역회의나 예산위원회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공공예산의 활용을 ‘시혜’가 아니라 ‘권리’로 여기려면 나와 우리가 결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권기본조례에서도 이 부분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서울시학생인권조례가 표류하는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제도는 권한을 가진 사람(한국의 경우 대부분은 장長)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조례가 법률의 하위개념인 상황에서 조례의 힘은 법률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게 제한된 것이니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조례는 원래 취지대로 조금 더 자기입법의 과정으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럴 경우 조례는 사문화되어 없어질 수 있지만 자기입법의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아직 인권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고, 그 사람들이 참여과정을 통해 인권에 관해 ‘공적으로 사유하기’를 기대한다면, 교육 이후에 역할을 주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토론을 벌이며 자신의 편견을 깨우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우리 지역사회에 누가 사는지, 뭘 하며 먹고 사는지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주민참여예산제나 사회적 경제, 마을만들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인권기본조례는 이런 다른 조례들과 어떤 연관성을 만들어가고 있나? 그런 사례는 거의 없는 듯하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그런 부분을 통합적으로 다룰 기관이 없고 행정체계가 이런 복합성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마을만들기와 참여예산제가 따로 또 같이 가야 하는데 대부분 분리되어서 진행되고 있다. 허나 일은 사안별로 따로따로 진행되더라도, 인간의 삶은 통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권도시와 관련된 정책이나 제도들은 민(民)의 활동을 흉내 내지 않으면 좋겠다. 거의 대부분의 인권조례안이 그렇지만 민간이 이미 하고 있는 영역을 관이 복제할 필요가 있을까? 지방정부가 인권과 관련된 정책과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민간이 할 수 없는 영역, 예를 들어 청소년 노동기본권을 강화시키려면 청소년들을 교육시킬 게 아니라 행정구역 내에 있는 사업장의 책임자들을 소집해서 교육시켜야 한다. 그래야 실질적으로 인권이 향상될 수 있다. 이렇게 편의점이나 작업장 등의 공간을 관리하는 사람들(소위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감수성이 바뀌어야 실질적으로 지역 내의 인권이 향상될 수 있는데, 이는 지방정부의 몫이 크다. 진정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한다면 지방정부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참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강, 2005년)에서 공적 영역의 몰락과 정치의 사유화를 비판한다. 모든 것이 개인화되고 공적 공간이 분리되어 게토화될 때 시민의 삶 역시 몰락한다. 과거에는 공적인 이데올로기가 사적인 것들을 식민화시켰다면 지금은 “사적인 것들이야말로, 사적인 관심과 걱정, 추구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내몰아버리면서 공적 공간을 식민화하고 있다.”는 게 바우만의 생각이다. 이런 공적인 것의 사유화는 참여 역시 매우 사적인 활동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참여는 매력적이지 않다. 공적인 삶이 사라진 세계, 공공영역이 몰락한 세계에서 참여는 점점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으로 변한다. 더구나 무한경쟁, 승자독식을 강요하는 한국사회는 참여를 낭비로 만든다. 사생활이 아니라 공적 삶이 기본이고 사적(private)이란 타자의 부재, 타자에게 드러나고 들려지는 경험을 박탈당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우리는 사생활을 먼저 챙기도록 교육받고 훈육되어져 왔다. 먹고 입고 생활하는 과정이 철저히 개인화되고 한정된 자원을 놓고 무한경쟁하는 사회에서 참여는 거부된다.

 

이런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참여를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사람들이 참여를 꺼린다는 지적은 이런 구조를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다. 구조를 바꾼다는 것이 어떤 혁명을 뜻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공통성(the common)을 확보하는 것일 수 있다. 서로를 대면하고 타자와 더불어 존재할 세계가 사라진다면, 공통성은 사라지고 참여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는 일방적으로 규정되어온 공공성(公共性)의 재구성과 무관하지 않다. 즉 인권기본조례는 공적인 삶의 재구성, 공공성의 재구성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공공성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민에게 강요하거나 보장할 수 없는 부분이다. 외려 사람들의 관계가 관행과 규범, 도덕으로 묶일 때, 서로가 서로의 관계를 의식할 인권은 확립될 수 있고, 정부의 제도는 때때로 그런 관계성을 침해하고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관이 일방적으로 규정해온 공공성에서 민의 주도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지금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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