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선거제도는 대의민주주의라 불린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우리의 뜻은 대의(代議)되고 있는가? 지방의원, 단체장, 국회의원, 대통령은 우리를 대신해서 주요한 현안을 해결하고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가? 권력은 적절히 나눠져서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잡고 있는가? 선출되는 공무원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선출되지 않는 공무원들을 잘 관리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대의제 민주주의라 불릴 수 있다. 한국은 진정 대의민주주의 국가인가?

 

배가 침몰해서 많은 청소년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정치인과 공무원들은 시민을 대신하기는커녕 책임을 떠넘기느라 바쁘다. 대의민주주의 국가라면 시민이 그런 무능과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데, 정말 그러한가? 시민들의 분노가 권력을 바꿀 수 있는가?

 

비극은 우리가 그런 국가에 살지 않는데 그런 국가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서, 그런 착각으로 현실의 폭력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힘을 가진 자들은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 정치가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소용없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이 수준이 힘을 가진 자들에게 가장 유리하기 때문이다.


선거, 매번 똑같다.


선거(選擧)는 가려서 올린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선거를 통해 대표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후보자가 다른 후보자보다 더 똑똑하고 능력 있는지를 가리는 게 아니라 정치무대에 올라가서 내 의견을 제대로 대리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매번 우리를 배신한다. 한참을 욕하다가 선거 당일이 되면 울며 겨자먹기로 투표한다. 최악이 안 되면 다행이고, 최악이면 술을 들이킨다. 정치하는 인간들도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시민의 가슴이 뛰길 원치 않는다. 그냥 표만 찍어주길 원한다. 니들이 찍지 별 수 있겠냐, 그런 똥배짱이다. 이런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세월호 사건으로 지방선거 국면이 주춤하고 있다. 사실 정당공천을 하네, 마네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한국의 특성상 지방선거는 중앙권력에 대한 심판론이 지배한다. 정책선거, 지역후보, 이런 건 그냥 말 뿐이다. 사실 지역당(local party)이 불가능하고, 지역언론도 제대로 없는 한국 현실에서 지방선거는 중심에 설 수 없는 변방의 선거이다. 당연히 지역의 중요한 현안도 논의되지 못하고 온갖 개발공약만 난무한다. 선거가 개발을 부르짖는 공약들을 부추기고,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착각은 선거가 끝나면 주민들을 몰아내는 폭력으로 변한다.

 

그러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르는 건 아주 나쁜 일이다. 만약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일까? 아니, 한국에는 정치에 관심이 아주 많기 때문에 무관심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후보자들 중에서 가려서 뽑을 사람이 없는 건 유권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하나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민주주의‘들’이 있다. 당연히 선거제도도 여러 가지이다. 어느 하나가 잘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데, 그게 민주주의인데 새로운 투표방법이나 대표자 선출방식을 도입하는 건 한국사회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우리는 투표를 하자는 투표독려행위까지 법으로 금지하려는 나라에 살고 있다.

 

정치판이 변하지 않는 데에는 우리의 ‘이율배반’도 한 몫을 한다. 우리는 후보들이 우리 의견을 대변해주기를 ‘내심’ 기대한다. 그런데 표가 보이면 어디든 달려갈 것 같은 사람들이 우리 편에는 거의 오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찍지 않을 것이라 믿는 합리적인 행위자이다. 당연히 오지 않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화를 내는 우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선거 이후를 바라보자!


선거도 중요하지만 선거 이후가 더 중요하다. 정책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책을 보자는 것은 후보자나 선거캠프가 얼마나 똑똑한지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선거 이후에 뭘 하려 하는지를, 그것을 통해 좋은 삶이 가능한지를 따져보자는 거다. 이 편, 저 편을 나누는 목소리에서 사라지는 건 정책이고 선거 이후이다. 여야 할 것 없이 말들의 잔치이고 이후를 얘기하지 않는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으려면 그 공약을 뜻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 한 명 달랑 당선된다고 정책결정이 내려지는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선거‘까지’만 얘기한다. 사실 선거를 통해 어떤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끝나는 순간 선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기성 정치인들이 선거를 통해 진심이든 뻥이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면, 새로운 정치를 바란다는 우리는 늘 익숙한 사람들 사이를 헤맨다. 당연히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복직을 하더라도 기업의 주인으로 복귀하지 않는 이상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제 손으로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자들이 노동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굴욕을 감수하고 공장에서 일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외국이 자신들의 천국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기에 그들은 국내에서 세게 나가고 공권력을 포섭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노조를 깨려고 한다.

 

마찬가지이다. 이제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살겠다고 결의할 수는 없을까? 노동자가 기업의 주인일 수는 없을까? 다른 나라, 다른 기업을 만들어 우리끼리 재밌게 살면, 그들도 좀 머리를 숙이지 않을까? 맨 날 제왕적 대통령제라 욕하면서 대통령 제도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 태도를 버리고 헌법 자체를 뜯어고칠 수는 없을까? 검사나 판사, 공무원들을 또라이라고 욕하면서 그 또라이들에 의지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역할을 축소시킬 수는 없을까? 우리가 정당을 만들 수는 없을까? 경찰이 깡패라고 욕하지 말고 경찰서장을 우리 손으로 뽑을 생각을 할 수는 없을까? 선거 이후를 보며 칼을 벼리는 정치는 불가능할까?

 

민주주의는 민중이 좋은 정치인이나 정당을 뽑거나 민중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이 권력을 가져야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할 정치인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정당이 아니라 우리가 조직화되어야 하고, 그런 관계맺음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다. 선거판을 보며 던지는 질문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삶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질문을 바꾸고 우리의 행동을, 우리의 삶을 바꾸자.

 

곧 '도서출판 삶창'에서 나올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가제)에 실린 모임 후기이다.

대화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각자 후기를 쓰기로 했는데, 이건 내 후기...

-------------------------------- 

모임을 마치고 난 뒤 가장 큰 변화는 가족과 함께 옥천으로 이주를 했다는 점이다. 꼭 이 모임 때문에 이사를 한 것은 아니다. 2006년부터 수도권을 떠나야 제대로 지역을 고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도권을 제외하면 곳곳에서 마을이 무너지고 있는데, 살만한 곳을 끼고 마을 운운하긴 싫었기 때문이다. 삶이 앎을 받쳐주지 못하면 언젠가는 폭삭 내려앉을 것 같았다.

 

이 모임을 진행하는 중에도 어디로 내려갈까 계속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그러다 애초에 계획에 없던 옥천으로 이사를 한 건 우연한 선택이었다. 옥천이 가장 이상적이어서 옥천을 택한 건 아니었다. <옥천신문>이 있다는 점, 주민들의 다양한 시도가 있다는 점, 농촌과 소도시라는 점이 옥천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고 일을 찾기도 어려운 옥천을 선택한 건 역설적이지만 당장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옥천으로 내려오기까지 몸도 힘들었고 맘고생도 심했지만 오고난 뒤엔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짐정리가 대충 끝나고 난 뒤에는 옥천 시내를 천천히 걸어다닌다. 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때로는 혼자서. ‘거리가 왜 이리 한산하지’라고 생각했다가 ‘내가 참 붐비는 곳에 살았구나’로 생각을 고쳐먹고, 지방에 강연을 가기 위해 여러 번 차를 바꿔 타며 ‘왜 이리 불편하지’라고 생각했다가 ‘그동안 참 편리한 곳에 살았구나’라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오니 직접 손을 대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거참, 번거롭네’라고 생각했다가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의 손을 빌리며 살았구나’라며 반성한다.

 

옥천에 와서도 계속 느끼는 건 안전한(?) 지역이 없다는 거다. 한국 어디건 지역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개발사업이 들어온다. 열심히 마을을 만들어도 이런 노력을 한 번에 밀어버리는 것이 바로 개발사업이다. 이 사업은 우리가 발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미 발전의 극단을 달리는 수도권에 살고 있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지방에 내려가면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건 외지인의 땅이다. 농사를 짓지도, 살지도 않는 사람들이 땅을 소유하고 있다. 살지 않으니 이런저런 계획만 잡히면 냅다 땅을 판다. 토지문서만 있고 주인이 없는 땅은 지역을 힘들게 만든다.

 

그리고 마을에 아무리 좋은 말을 갖다 붙여도 지금의 마을은 불안하다. 이웃끼리 얼굴 알고 수다떨며 잔치도 열고,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건 서로의 관계가 좋을 때이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충돌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 얼굴과 수다와 잔치는 고통으로 변한다. 나는 천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걸 경험했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편이다. 비단 마을만 그럴까? 시민사회단체나 마을과 공동체를 얘기하는 기업, 협동조합에서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환상은 자꾸 깨진다. 다행이다.

 

또한 마을에서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대체 누구를 만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자급하는 삶이 아니라면 아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마다 마음도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를 알면 눈이 올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계단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를 알면 왠지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같은 마을에 살지 않아도 박영길 샘을 알고 난 뒤 청소노동자가 보이기 시작하고, 김신범 샘을 알고 난 뒤 마을에 있는 기업들이 보이기 시작해 고민이 많아진다. 모든 관계는 친밀하고 가깝다고 하나 모든 관계를 그렇게 만들어야 할까, 그리고 그걸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든다.

 

사실 나는 마을과 관계를 강조하지만 그것을 통해 모든 걸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친밀한 관계 속엔 나름의 독도 있다. 그 아름다움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불편한 것들은 모두 감춰진다.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것들만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는 것들만 나눈다. 누군가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순간 그 사람은 왕따가 되고 마을에서 밀려난다. 왕따를 만들어 단합되는 마을은 마을운동이 아니다. 불편한 타자와도 공존할 수 있을 때에만 마을은 마을운동이 될 수 있다. 사실 그 불편함이란 것의 속내는 결국 이기적인 것이 아니던가. 더 이상 불편해지기 싫다는, 때때로 고통을 통해 맞보는 기쁨이 싫어지고 그냥 편해지고 싶다는. 이기적인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아니지만 그것을 이기적이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 문제들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이기적인 불편함을 보편타당함으로 포장하려 할 때 무리한 논리가 만들어지고 편견과 강압이 생긴다.

 

이 모든 문제가 개인의 탓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장벽들이 개인의 편견을 재생산하고 확대시킨다. 마을이 이런 편견과 구조적인 문제 밖에 존재한다고 믿는 건 큰 잘못이다. 이 모임에서 확인한 건 개인의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들이 그렇게 마을을 몰아가기도 한다는 점이다. 개인과 구조,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지금의 사회분위기는 개인을 지나치게 몰아세운다. 개인의 가능성이 구조를 뛰어넘을 수도 있지만 그건 가능성일 뿐이다. 마치 그 가능성이 보편적인 것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다양성을 파괴한다. 마을이 만능의 법칙처럼 논의되면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 모임에서 많이 논의된 바는 바로 이 다양성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함께 사는데,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색깔만을 골라낸다. 아이 하나가 자라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듯이, 마을이 제대로 서려면 다양한 운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역 내에선 복지 따로, 노동 따로, 교육 따로, 모두가 따로따로이다. 이러니 체계를 갖추고 밀어붙이는 정부와 기업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뭉쳐도 시원찮을 판에 쪼개지고, 마을만들기사업은 이해관계까지 만들어 단체들이 비슷한 사업을, 선정될 만한 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이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의 성장을 지원해줘야 정부와 기업에 맞설 힘을 만들 텐데,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말로만 떠드는 연대로는 지역의 작은 개발사업조차 감당하기 어렵다. 이렇게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 무슨 마을의 힘을 논하나.

 

그리고 우리는 아직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 강정마을이나 밀양, 청도의 마을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참여한 적은 있으나 그 싸움이 우리의 싸움은 아니다. 뭔가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싸움이지 우리의 뜻과 의견을 실현할 공격적인 싸움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은 이런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좋은 진지여야 하는데,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마을은 마치 행정이 지역 속에 투입한 ‘트로이의 목마’같다. 행정의 언어가 마을의 언어를 대체하고 행정의 관점이 마을의 경계를 정한다. 행정과 기업의 자원이 마을을 움직일 동력을 만들고, 행정의 지표로 마을의 활동이 평가를 받는다. 놀라운 건 마을이 스스로 이런 순응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니 이제 마을 쪽에선 비판이나 감시, 투쟁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렵다. 현실은 개판인데 주옥같은 말만 들린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는데 벌써 무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이 모임 때문에 마을에 대한 생각과 걱정이 더욱더 많아졌다. 그러니 마을운동과 공동체운동을 지지하는 내게 이 모임은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떠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심각한 단면이 드러났다. 내가 앞으로 마을운동과 공동체운동을 등진다면 그건 이 모임의 탓이다.

 

그래도 나는 마을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들을 연계하고 공유지를 늘려가는 일에 계속 관심을 두며 활동할 것이다. 비어 있는 곳이기에 누군가는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옥천으로의 이주는 그런 활동을 더 정색하며 하겠다는 결의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현의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사고현장에는 사람의 접근이 금지되고, 내부상황에 대한 보도는 통제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대기에 노출되었고, 국내의 버섯과 녹차에서 세슘이 검출되고 있다. 그리고 원자로를 식힌 바닷물이 다시 바다로 매일 수백 톤씩 쏟아지면서 수산물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되고 있다.

 

옥천은 일본 원자력발전소 사고에서 비교적 안전한 곳이다. 그리고 한국의 원자력발전소들이 대부분 바닷가에 있기 때문에 한국의 사고에서도 비교적 안전하다. 그래서 옥천 주민들은 이런 문제에 비교적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런데 실상을 따지면 그렇게 안심하기 어렵다. 원자력발전소는 아니지만 대전에는 우라늄을 가공해서 핵연료로 만드는 한국원자로연구소가 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사용하는 연료들 대부분을 이곳에서 가공한다. 그리고 대전의 한국원자력연구원 안에는 정부나 병원 산업체에서 사용되고 남은 폐기물을 보관하는 방사능폐기물관리공단이 있고, 연구를 위한 원자로도 가동되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 옥천읍까지의 거리는 20km를 조금 넘는다. 보통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면 원전 반경 20km 내의 주민들은 긴급대피된다. 그리고 후쿠시마 사고 이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원전 반경 30km로 긴급보호조치계획을 확대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니 대전에서 사고가 나면 옥천도 긴급대피구역에 포함된다.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만일 사고가 터진다면 옥천도 이 끔찍한 재앙에서 자유롭지 않다.

 

더구나 충청남도 금산에는 우라늄 매장지역이 있다. 작년에 이 광산을 개발하려다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우라늄 가격과 사용량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개발시도는 계속 있을 예정이다. 우라늄 광산이 개발되면 방사선이 유출되고 광물찌꺼기가 주위를 오염시키기 때문에, 보통 주거단지와 멀리 떨어지게 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 광산과 주거지가 가장 가까운 거리는 65km인데, 금산과 옥천의 거리는 그보다 훨씬 가깝다. 그러니 광산개발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수 없다.

 

원자력과 방사능만이 아니다. 2013년 국립환경과학원이 발표한 「2011년 전국 화학물질 배출량 조사결과」에 따르면, 전국 발암물질 배출량 총 7921톤 중 충청북도가 3109톤(전체의 39.3%)으로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청주의 오창공단에는 발암물질을 배출하는 공장들이 주택가에 버젓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청주 지역의 유해물질을 다루는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화재가 폭발사고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충북발전연구원이 2013년에 발표한 「충청북도 유해화학물질 위험성 완화방안」보고서에 따르면, 옥천에도 유독물질과 발암물질을 다루는 기업이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옥천군민이 안전하다고 믿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방사능이나 화학물질은 공기 중으로 빠르게 퍼진다는 점에서 관리하기 매우 어려운 물질이고 또 위험한 물질이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2013년 중앙정부도 화학물질관리법을 전면 개정하고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그리고 충북도청은 청주권역에서 실시하고 있는 화학물질 배출을 줄이는 SMART 프로그램을 충북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다. 옥천군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현재까지의 논의과정을 살펴보면 그런 계획을 찾기 어렵다.

 

옥천은 수질보전을 위해 개발이 제한되고 관리되는 청정지역이지만 주위에는 많은 위험요인들이 있다. 그러니 나와 가족, 지역의 안전을 마냥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계획에만 의존하지 말고 주민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행정구역상 우리 지역은 아니더라도 주의를 기울이며 다른 지역 주민과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안심하며 살 수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