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부조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지를 보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농부들, 지주가 밀을 먹을 때 정작 자신은 짚을 씹는 농부들,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들이다. 넝마를 입고 비단과 벨벳을 짜는 노동자들, 우리가 바로 다중(multitude)이다. 공장의 소음이 순간 멈출 때, 우리는 성난 바다처럼 거리와 광장으로 뛰쳐나가리라.…매일매일 고통을 겪고 분노하는 우리 모두가 다중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에워싸고 삼킬 수 있는 바다이다. 우리가 그럴 뜻만 품는다면, 정의를 이룰 순간은 오고야 만다.”

위의 글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1842~1921)이 1880년 《반란자》라는 잡지에 실은 ‘청년에게 호소함’이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부나 권력을 얻기 위해 의학과 법학, 과학 등을 공부하는 청년들에게 크로포트킨은 함께 혁명가로 살자고 호소한다. 당신은 굶주려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챙겨 먹어라 얘기하는 의사가, 그리고 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소작인들이나 부당한 대우에 맞서 예고 없는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얘기하는 법관이 되려 하는가? 크로포트킨은 사회의 부조리함에 눈감고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수치스럽게 권력과 부를 좇지 말고 청년의 힘과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다중 속으로 들어가자고 호소한다.


크로포트킨의 호소는 어떤 이론을 따르는 주장이 아니었다. 크로포트킨 자신도 청년기에 귀족의 명예와 학자의 명성을 모두 버리고 러시아 비밀경찰의 추적을 받는 아나키스트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 자서전』은 크로포트킨이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와 그가 하필이면 아나키스트로 살려고 결심했던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크로포트킨을 혁명가의 길로 이끈 것은 지식이 공유되고 민중이 그 지식을 배울 기회를 가진다면 그들이 많은 창조적인 행위들로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위스 쥐라연합에서의 경험과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불신 때문에 아나키즘을 선택했고 평생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을 살았다. 『자서전』은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이론을 구성하고 또 그 앎이 어떻게 삶으로 실현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니 ‘청년에게 호소함’이라는 글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쓴 자전적 기록이다.

그런 점에서 『자서전』은 그동안 우리가 읽어왔던 ‘위인전’이 결코 아니다.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얘기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변화와 사람들이 겪던 비참한 현실을, 끓어오르던 혁명의 기운을 꼼꼼히 기록했다. 특히 그가 러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보고 겪은 이야기들은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도록 돕는다.

『자서전』은 《애틀랜틱》이라는 잡지에 1898년 9월부터 1899년 9월까지 연재했던 내용을 고친 글이다. 당시에 크로포트킨은 『어느 반란자의 이야기』(1885), 『빵의 쟁취』(1892), 『들판․공장․작업장』(1899)같은 책을 냈고, 『상호부조론』(1902)의 일부를 《19세기》라는 잡지에 쓰며 유럽의 아나키즘 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크로포트킨은 엘리트로 태어난 삶을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엘리트가 독점하던 것을 다중과 나누는 방식으로 다중과 함께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다.

그런데 『자서전』은 1899년부터 그가 심장질환과 폐렴으로 사망한 1921년까지 약 22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그동안 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1917년 6월 크로포트킨은 고향을 등진 지 약 40년 만에 러시아로 돌아갔다. 당시 정부가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 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자 크로포트킨은 고향으로 내려가 남은 생을 보냈다. 레닌에게 보낸 편지나 여러 기록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자서전』은 가장 논쟁적인 시기를 담고 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허나 크로포트킨이 보내는 호소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파고든다. 용산참사나 사회적 양극화같은 구조화된 부조리가 다중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사회에서 청년들은 무엇을 좇고 있는가? 『자서전』에서 우리는 뛰어난 지성만이 아니라 다중의 고통을 나누고 그런 시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청년의 영혼을 목격할 수 있다.



오전에 글을 발표할 자리가 있어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노무현이 자살했대요'라고 말하는 다른 분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농담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지만 말을 하는 분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며 이게 현실이구나 실감했다.
먼저, 그토록 싫어했지만 목숨을 버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내세에서 그가 행복한 삶을 누리길 빌고 많은 존경을 받았으면 한다.

어제 저녁 술자리에서도 화제는 노무현의 죽음이었다.
황석영이 최근 이명박을 따라다니며 벌인 코미디는 화제에 오르지도 못했다.
대중이 부여한 명예를 마치 개인의 소유물인양 권력에 빌붙어 팔아넘긴 행태는 어떠한 비난을 받아도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은 한국 현대사만큼 파란만장했고 그가 남긴 성공과 저지른 오류 모두가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그 평가가 현실권력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차단했고, 그의 유서처럼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을 책임졌다는 점에서 그의 결단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특히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수를 던짐으로써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정치가'임을 증명한 셈이다.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당당히 자기 이름으로 한국 현대 정치인의 반열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그는 어설프게 박정희 흉내나 내는 이명박이라는 사람보다 자신이 훨씬 탁월한 정치인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노무현이 남긴 유서 역시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무게를 남겼다.
황석영이라는 작가가 '구라'를 남발하고 있을 때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은 자기 그릇을 보여줄만한 '명작'을 남긴 셈이다.

그런데 나는 노무현의 자살 소식을 접하며 문득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에 좌절하여 자살하는 한 화가의 이야기이다.
평론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보며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라고 말했고, 그녀는 깊이를 채우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 결국 삶을 마감한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었고, 또 그런 만큼 그가 실패를 거듭할 때마다 많은 실망을 했다.
사실 나는 그가 당선되었을 때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즐거웠다. 한국에서 선거라는 것이 이렇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허나 그것 뿐이었다.
그가 당선되어 한국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리라 나는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혁명가가 아니라 대통령이었으니까. 대통령직이라는 권력이 사회를 바꾸리라는 기대를 나는 버린지 오래되었으니까.

아마 당분간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이라는 한 인물에 관해 얘기를 나눌 것이다.
사람의 죽음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안타까움이 지나쳐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대통령직에 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몇몇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몇 가지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부안 방폐장, 대추리, 파병, 한미FTA같은 사건들은 죽음이라는 안타까운 사실에도 그를 찬양할 수 없게 한다(그 모든 사건들이 한 개인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깊이에의 강요'에서 화가가 자살하자 깊이를 강요했던 그 평론가는 이런 글을 남겼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 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런 비평은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고통과 충격에 시달릴 유족들에게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수많은 시민들에게도 평안함이 다시 찾기를...

어제 오체투지를 다녀왔다.
8시에 시작하는 줄 알고 헐레벌떡 달려갔더니 수경스님, 문규현 신부님, 전종훈 신부님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몸을 풀고 계신다.
진행하시는 분이 9시에 출발이란다. 흑흑...
그래도 혼자 뻘쭘하게 앉아 있으니 여러 분이 관심을 가져 주신다.
특히 문규현 신부님은 친근하게 얘기도 건내주시고, 서울의 광주가 바로 용산이라며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쎄게 얘기하신다.
월요일이라 직장인은 못 나오고 단체 사람들도 다들 회의일 터이고 더구나 5-18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지만 너무 없다 싶었는데, 갑자기 스타렉스 2대가 오더니 안에서 청년들이 줄줄이 내린다. 한 1대에 많이 타기 기네스북에 도전하는지 2대인데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탔다. 정토회의 100일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친구들이라 한다. 하여간 이 친구들이 와서 여기저기 웃음꽃도 피고 분위기가 좋아졌다.

9시 출발.
5보 정도 걷고 무릎과 팔목, 이마를 땅에 붙이는 큰절을 하며 조금씩 나아간다.
10분 정도 오체투지를 하고 3분 정도 쉬고, 중간중간 10분의 휴식시간도 가지며...
세상에 3번 정도 쉬었건만 아침에 달려온 10분도 안 되는 거리를 왔을 뿐이다.
이촌역에서 신용산까지 지하철역 1구역 밖에 안 되는 거리를 하루 종일 간다.

맨정신에 아스팔트에 누워보긴 처음인 것 같다...
처음에는 아스팔트의 비릿한 냄새가 싫었지만 자꾸 접하다 보니 그도 나름의 생명을 갖고 있는 듯했다.
누워서 생각을 해보니 방바닥이 아니라 땅바닥을 이렇게 안아본 적이 있었을까 싶다.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을 실감나게 하는 것도 같고.
두 손을 쭉 뻗어 지구를 안고 지구가 나를 안아주는 느낌을 받으니 사람, 생명, 평화의 길이라는 오체투지단의 말이 저절로 이해가 갔다.
이렇게 서로 안아주고 보살피며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법인데...

서서히 걸으며 용산참사 현장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점심 때까지 오체투지를 하니 용산구 의회를 지나 용산참사 현장 근처에 도착했다.
12시부터 1시까지의 점심시간... 각시가 사온 김밥을 먹고 용산참사 현장을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1시부터 2시까지는 서로를 소개하고 생각을 나누는 시간...
용산구민이라고 소개했더니, 반응이...ㅎㅎ

1시 45분부터 다시 오체투지를 시작해서 용산참사가 일어난 건물 앞으로 갔다.
건물에서 잠시 행사를 지내고 108배를 했다.
오체투지로 108배를 하려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세지도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 속에 텅 빈다.
세게 불어오는 바람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혼들의 재림인듯, 마음 속으로 명복을 빌며 몸이 땅으로 향한다.
108배를 마치고 다시 오체투지를 시작해 남영역 미군기지 앞에서 105일 행사를 끝냈다.
힘겨운 걸음을 한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큰 절을 한 뒤에 신부님과 스님은 7시에 진행될 용산참사 미사회로 향하셨다.

어깨가 아직도 욱신거린다.
오체투지는 허리보다는 어깨에 큰 부담을 주는 듯. 엎드리고 두 손을 펴 땅에 붙이는 과정이 여간 쉽지 않다.
오후가 될수록 온 몸 근육이 갑작스런 활동에 놀라는 반응을 보이고, 호흡이 거칠어지며 아스팔트의 먼지가 콧속을 파고든다.
남자들은 가슴을 땅에 그대로 붙이다보니 갈비뼈 끝부분이 눌려 조금씩 고통을 준다(아침에 일어나니 좀 부었다).

그래도 함께 걸어 고마운 길이고, 매일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고 죄송한 길이었다.
나를 돌아보고, 내 몸을 돌아보고, 그 몸이 사는 사회를 돌아보고, 무엇을 바꿔야 할지를 생각한 소중한 시간인듯.
6월 15일에 끝나는 순례단의 행렬에 짬짬이 시간을 내어 참여해야 겠다고 맘을 먹는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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