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떡볶이가 한국의 정치논쟁의 소재로 등장했다. 서민과 소통하는 정부를 만들겠다며 이명박 대통령은 시장에 가서 떡볶이를 먹고 탁구를 치며 시민들과 시간을 보냈다. 이에 민주당은 떡볶이 먹고 어린애 안아준다고 서민의 어려움이 풀리는가라고 물으며 그 시간에 차라리 기업을 설득하라고 비판했다. 서민들이 자주 다니는 곳이 시장이니 서민적인 정치 이미지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시장이겠지만, 선거나 중요한 정치적 고비 외엔 정치인들의 코빼기조차 볼 수 없는 곳이 바로 시장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서민들이 자주 군것질거리로 삼는 떡볶이지만 정치인들이 자기 이미지 만들 때 말고 평상시에도 먹을지 의심스러운 것이 떡볶이다.

사실 대통령이 저잣거리로 나서 시민들과 소통을 하겠다는 걸 비판할 사람은 없다. 하물며 자신의 대통령 선거 공약이었던 한반도 대운하도 포기하고 서민을 위해 팔 걷고 나서겠다는데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말이 많고 사람들의 눈길이 곱지 않은 건 바로 소통의 방식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시장을 찾았을 때 상인들이 입을 모아 요구한 건 대형마트의 진출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대기업들의 중형 마트까지 등장해 동네 구멍가게까지 위협하고 있으니 어렵사리 만난 대통령에게 가난한 상인들이 그런 요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공정한 대통령은 대형마트와 재래시장이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답했다.

말은 좋지만 엄청난 시장점유율을 바탕으로 싼 가격에 물건을 들여오는 대형마트와 영세상인들의 공생이 정말 가능할까? 대형마트 하나가 들어서면 최소한 150개의 가게가 사라진다고 한다. 그러니 웬만한 시장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셈인데, 이 둘의 공생을 얘기할 수 있을까?

자고로 소통이란 건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보며 기꺼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려는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하다. 상대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돌아오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소통은 답을 내려 주는 게 아니라 다양한 얘기가 오갈 수 있도록 막힌 곳을 뚫어주는 것이다. 더구나 정치적 소통은 사회적 약자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며 함께 아픔의 원인을 찾고 그것을 해결하려 할 때 가능하다.

그렇게 보면 지금 한국 정치에는 소통이 없다. 이 대통령의 소통불능을 비판하는 민주당 역시 소통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민주당이 발표한 '뉴민주당 플랜'을 보면 뉴민주당이 아니라 뉴라이트 플랜 같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욕심은 '중도개혁주의'라는 해괴한 방향으로 향했다.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할 복지국가를 만들자고 얘기하지만 경제성장을 해야 분배가 가능하니 경쟁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결과의 평등보다 사전적 기회의 평등을 확대한다는 '기회의 복지'라는 개념은 본심을 드러낸다. 민주당이 내세우는 '생활밀착 정당' 역시 소통과는 무관한 그네들의 말잔치이다.

사실 이런 소통불능은 이 대통령과 민주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선진당의 이회창 총재는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옥탑방이라는 말을 모른다고 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한나라당의 정몽준 최고위원은 2008년에 버스비가 70원이라고 얘기해 누리꾼들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서민과 소통하려면 서민의 경험에서 얘기를 풀어가야 하는데, 대단한 엘리트 출신인 한국 정치인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 서민정치가 되려면 서민들이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는 한국의 정치구조는 그런 가능성을 차단한다. 지방선거마저도 정당공천제로 꽁꽁 묶여 있어 평범한 시민이 정치인으로 성장할 기회를 막는다. 그러다보니 서민을 위한다는 정치만 있지 서민의 정치는 한국에 없다.

현재 한국의 소통은 꽉 막혀 있다. 빨리 그 맥을 뚫지 않으면 시장에 나가 악수를 하고 떡볶이를 먹어도 소용이 없다.

사상은 그것이 뿌리를 내리는 환경에 맞춰 자신의 형태를 조금씩 바꾼다. 사상의 본뜻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는 없겠으나 그 뜻이 드러나는 방식과 강조점은 조금씩 바뀌는 듯하다. 이것을 ‘변화’라 얘기하기는 어렵겠고 일종의 ‘접목’ 또는 사상을 현실에 ‘접붙이는’ 과정으로 봐야 할 듯하다.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아나키즘의 역사, 아나키스트의 삶을 봐도 그런 접붙이기가 드러나고 있다.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일본 군국주의의 성장을 보며 반전평화운동을 강조했고 그런 군국주의 성장을 방치했던 무능한 의회주의를 반대하며 직접 생산을 통제하는 생디칼리즘을 자기 신조로 삼았다. 이런 성격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빠른 산업화 과정을 밟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출현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개화에 앞장섰던 만큼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은 선진 제국의 문물과 사상을 빠르게 받아들였던 듯하다.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중국사회의 봉건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령 왕조나 군벌, 보수적인 유교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노장사상이나 고대 사상이 강조했던 이상사회의 모습을 자기 속에 품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류스페이는 전통사상과 아나키즘을 뒤섞어 중국식 아나키즘을 만들려 했던 것 같다. 신세기파 역시 서구 문물을 빠르게 수용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 충(忠)이나 효(孝), 족(族)을 강조하는 중국 전통과 단절하려 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고 약육강식의 민족주의를 완화시키는 방식으로 아나키즘의 상호진화론을 수용했다. 민족주의는 한국 아나키즘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이자 그것을 한계짓는 요소이기도 했다. 아나키즘은 대동사상을 비롯한 민족주의운동과 손을 잡으면서 그들을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그만큼 국가나 민족을 부정하는 성격이 약화되기도 했다. 신채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인상적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으니 이를 특색이라 칭하면 노예의 특색이다.” 신채호가 뜻한 바는 분명 왕이나 특정 인물의 나라가 아니겠으나 조선의 의미는 우리가 밝혀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이렇게 조금씩 나라마다 그 특성이 다르기는 했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로를 집어삼키려 으르렁 거리던 시절에도 아나키스트들은 국경을 넘어, 애국심이라는 틀을 넘어 서로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실천을 공유했다. 인상적인 구절을 소개하면, “중국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일본 아나키스트의 활동, 일본과 중국 아나키스트의 지원을 받아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한인 혁명가들, 아나키즘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조직들, 상하이노동대학이나 푸젠성 농촌자위운동에 참여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연합 활동 등이 그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이들의 초국가주의 연대의식은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매우 이채로운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45쪽)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떠한가?

역사가 뒤엉켜 있기에 동아시아의 민중들이 함께 고민하고 미래를 모색해야 할 다양한 과제들이 있다. 식량, 에너지, 생태 등 식민지/제국의 관계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연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민중이 공동의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동아시아의 민중이 상호부조를 실현하며 국가가 아닌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 방법은 있을까? 만일 그런 방법이 있다면, 우리는 과거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

신문을 뒤적이기가 무서울 정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점점 배제되어 버려지고 있고, 그 속도마저 계속 빨라지고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철거민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동네에서 버려지고 있고,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해 온 공장에서 버려지고 있다. 농업선진화라는 이름 아래 농민들은 평생 일궈온 땅에서 내몰리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동안 쥐꼬리만큼 받아오던 복지혜택에서조차 내몰리고 있다. 한국사회의 필요라는 이름 아래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들은 인간이 아니라 도구처럼 쓰였다 버려지고 있다. 학력 신장이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은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얼마 전 신문기사에 따르면 생활비 마련을 위해 청소년들이 성매매에 내몰리고 있다.

사진: 뷰앤뉴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이런 사람들에게 ‘테러리스트’, ‘불법 점거’, ‘폭력시위단체’, ‘떼잡이들’, ‘무능한 인간’, ‘좌익’, ‘패륜’, ‘매국노’같은 딱지를 붙이며 그런 버림을 정당화하고 있다. 심지어 21세기에 ‘빨갱이’나 ‘간첩’이라는 말마저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기득권층과 그들을 보호하는 공권력은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거나 그 기준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이 사회 밖으로 거칠게 내몰고 있다(경찰청은 철거민들을 테러리스트로 보고 대응하는 훈련을 하는가 하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용산참사가 공권력 발동을 주저하게 만들어 한탄스럽다며 쌍용차 평택공장에 즉각 공권력을 투입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단지 버려지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서 더욱더 두려운 건 아니다. 두려운 건 이런 배제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과 이를 바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희망이 있다면 버티며 미래를 준비해 보겠지만, 희망조차 꿈꿀 수 없다면 미래는 불가능하다. 앞으로의 일이 이미 결정된 세계에서는 더 이상 희망(希望)이나 미래(未來)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상황에서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희망의 목표나 기준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목표나 기준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시야가 정치를 청와대나 국회, 몇몇 정당들, 몇몇 시민사회운동단체들로 제한되어 정치의 부정적인 면밖에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치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자 시야를 아래로 낮춰 풀뿌리나 지역공동체 차원의 긍정적인 정치를 보려 하면 그런 점은 한국 사회 전체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을 듣기 십상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국가 차원의 정치나 제한된 대안이라 여기는 지역 차원의 정치 모두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정치의식은 갈증을 호소하며 무작정 사막을 헤매고 있다. 하지만 방향을 알려주는 좌표가 없기에 헤맨다고 한들 오아시스를 찾을 가능성은 낮고 까마귀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그래서 새로운 좌표를 알려줄 새로운 정치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새로운 프레임은 무조건 새로운 말을 끌어다 쓴다고 갖출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수정치가 생활밀착형 정치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서 새로운 프레임을 갖추는 게 아니다. 생태나 평화, 자치같은 말을 정당의 구호로 끌어들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 검찰이 ‘공안’이라는 말 대신 ‘민생’이라는 말을 써서 ‘공안정국’, ‘공안부’ 등의 이미지를 바꾸려 해도 그 속성을 바꿀 수 없는 점과 같다. 프레임은 단어가 아니라 관점을 가리킨다. 보는 방법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이듯이 새로운 관점을 갖춰야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관점은 새로운 상황, 즉 버려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 기득권층의 정치전략이 ‘한 가족’, ‘하나의 공동체’라는 말을 쓰며 사람들을 한데 뭉치려 했다면, 이제 그들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내버리고 있다. 철거민이 테러리스트로 불리는 순간, 노동조합이 폭력시위단체로 불리는 순간 그들과는 어떠한 타협이나 협상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이들은 다시 공동체로 들어올 수도 없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전략은 ‘버림받음’이라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갖춰야 한다. 새로운 관점이라 해서 인터넷과 같은 과학기술에만 의존하거나 과거의 모든 것을 낡은 것으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시선이다. 내가 익숙한 높이와 방향에서, 그리고 내가 속한 정파(이념이 아니다!)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그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그렇지 않으면 자기 귀에 익숙한 단어만을 조합해 풀뿌리 민중의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익숙한 오해와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백날 소통을 떠들어 봐도 자신의 오만함과 확신만 더할 뿐이다.

그렇게 다양한 목소리를 더욱더 많이 듣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고, 정치의 구조 자체를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오는 방식으로 바꿔나갈 때 그 관점은 새로운 이념으로 구성될 수 있다. 어려운 말이나 새로운 말을 쓰며 폼 잡을 게 아니라 낡은 언어라도 그것의 진정성을 보여줄 때 우리는 민중의 가슴과 소통할 수 있다.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을 차근차근 준비하지 않는다면 무너질 사랑탑만 쌓는 격이다.

그리고 그 관점과 이념은 기존과는 다른 정치전략을 가져야 현실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시국선언이나 대변형 운동은 기본적으로 기득권층이 사회적 포섭전략을 쓸 때에나 힘을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을 버리려 하는 지금의 기득권층은 그런 소리를 들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기자회견을 열고 보도자료를 뿌려도 방송이나 신문에서 보도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모일 수 없도록 광장만 잘 틀어막고 있으면 된다는 게 그들의 상식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단결투쟁’, ‘결사항전’같은 구호도 잘 먹히지 않는다. 그 투쟁의 치열함이나 처절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버려지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사회에서 버려지는 사람들의 단결은 그 뒤에 버려지게 될 사람들의 연대가 아니라 그들의 외면이나 냉소를 낳기 쉽기 때문이다.

현실의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움직일 것이라 기대하는 건 큰 착각이다. 관계가 우리의 희망이기는 하지만 그 희망은 그 관계망이 어느 정도 다져진 뒤에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대에는 서로의 관계가 반드시 좋은 쪽으로만 드러날 수 있다고 미리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정치전략은 버려지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모색할 수 있는 터전을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 터전이 국가인가, 지역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우리를 언제쯤 버릴까 가슴 졸이며 그 날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과감히 그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모색할 양산박을 하나씩 만들어야 희망과 미래를 꿈꿀 수 있다. 그래서 무한경쟁에서 밀려났기에 버려져야 할 무능한 존재라는 딱지를 스스로 떼어내고 자신을 중요한 정치주체라 여기도록 만들 과정을 만들어 줄, 디딤돌을 놓아 줄 정치전략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민중은 아우성을 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설 것이다.



신동엽 시인은 노래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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