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제 13회 인권영화제 개막식에 다녀왔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장소사용을 허가했다 취소하고 경찰이 무대설치를 방해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영화제는 개막했다.

용산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개막작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용산만이 아니라 흑석동, 성남 등 전국 곳곳에서 뉴타운과 재개발 열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 4구역에서만 약 47조원의 엄청난 이윤을 볼 수 있으니 힘 있는 자들은 악착같이 개발을 하려 든다. 세입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개발계획, 그들을 위협하는 용역깡패, 용역의 불법적인 활동을 묵인하는 공권력, 한국사회에서 40년 이상 반복되어온 야만이다. 철거촌은 한국의 게토이자 수용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 2006)에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풍경을 기록한다.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아렌트는 이 살인마가 평범한 공무원으로 성실히 일했다고 보면서 타인과 소통하지 않고 생각 없이 법과 명령을 따르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비극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명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재판정에 세운 것이 일종의 정치쇼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비극의 책임은 아이히만만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과 그들의 이웃들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와 협력해서 유대인의 명단을 작성하고 기차에 태워 수용소로 보내고 심지어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던 사람들은 바로 유대인과 이웃들이었다. 아렌트는 이들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나치의 계획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영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서 나는 수많은 아이히만들의 모습을 보았다. 철거민들을 끌어내고 방패로 찍는 전경들, 6명의 죽음을 책임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찰과 그들을 사면한 검찰, 그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아이히만이고 우리 시대의 무사유를 대표한다.

그와 함께 나는 우리 각자의 아이히만도 발견했다. 그 이웃들이 유대인을 외면했듯이 우리 역시 함께 살던 주민들이 철거민으로 규정되는 순간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던가. 나의 일상을 지속시키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묵인하지 않았던가. 보편적인 정의의 원칙에 따라 현재의 부조리를 거부할 인간 최후의 권리를 우리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았던가. 아직 시신을 모시지도 못한 유족들의 절규에 귀를 막지 않았던가.

강력한 야만의 힘을 꺾으려면 우리 자신이 문명의 정치, 살림의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희망이 우리 내부에서 싹틀 수 있도록 인간이길 포기하지 말고 고통받는 타자와 손을 잡아야 한다. 영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며 되묻는다. 우리는 인간인가?


진보의 위기’라는 말이 지난 몇 년간 유행어처럼 되풀이되었다. 위기라는 말의 등장보다 더욱더 긴장감을 주는 것은 좀처럼 그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한국의 진보는 위기를 불러온 원인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보는 위기의 원인을 정치개혁이나 민생정책의 실패에서 찾거나 정부와 언론의 ‘진보 흔들기’에서 주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더 낫다”는 한탄(恨歎)까지 나오는 걸 보면 시간이 위기를 해결해주기는 어려울 듯하다. 도대체 얼마나 무능하다고 여겨졌으면 차라리 부패가 더 낫다고 얘기할까? 어쨌거나 이런 한탄은 진보의 위기가 매우 근본적인 것임을 알려준다.만일 무능함만이 문제라면 진보는 자신의 능력을 길러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소위 진보인사라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리 능력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무능한 사람들이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나선 게 실제로 위기를 불러왔을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진보의 실패는 무능함보다 무책임함과 종파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속 빈 진보의 무책임함

 

무엇이 진보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박정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김영삼, 김대중이 진보였고, 김영삼보다는 김대중, 김대중보다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진보이다. 진보는 어느 정도 상대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적인 진보와 함께 이념적 진보(좌파)는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다양한 사상들, 즉 사회주의, 아나키즘, 생명사상 등을 뜻한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같은 정당들은 상대적인 진보주의자들을 자유주의자라 부르며 자신들과 구별을 짓고 진정한 진보를 자처해 왔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의 교체는 사회가 진보에서 보수로 흘러가고 있음을 뜻한다. 상대적인 흐름이 바뀌더라도 이념적 진보가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으면 사회 전체의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이념적 진보의 뿌리는 매우 약하다. 소위 ‘원전’을 들이밀며 누가 더 노선에 충실한가를 따지고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데 힘썼지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회를 강화시키려는 진보의 노력은 그동안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의 위기는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따져보면 이념적 진보는, 특히 사회주의 세력은 1989년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자기 이념을 새로이 구성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사회주의 전략은 ‘혁명’과 ‘집권’을 강조했는데, 그럴 가능성이 없다보니 진보는 자기 이념을 구체화시킬 필요가 없었다. 이념을 외치기만 하고 정작 그 이념의 쓸모를 밝히지 않은 채 한국의 진보는 민중에게 무조건 자신을 따르라고 외쳤고 따르지 않는 민중을 비난해 왔다. 더구나 그 이념을 설명하는 언어들조차 이미 낡은 것들이었다. 진보는 국가나 자본을 비판하는 것 외에 딱히 자신의 대안적인 담론을 만들지 못했고, 새로운 주체를 발굴하거나 성장시키지도 못했다. 그러니 무능력보다는 오히려 무책임함이 한국 진보의 특징이라 하겠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무책임함은 이념의 기준을 좌에서 우로 옮긴 소위 뉴라이트(어떤 점이 new인지 도통 알 수 없지만)나 권력의 떡고물을 따라다니는 소위 진보인사들의 모습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념을 자신의 삶으로 녹여내지 않았기에 그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 이익에 맞춰 입장을 바꿀 수 있었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박박 기며 삶을 이념에 맞추려 했던 사람들을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마치 대단한 애국자인양 미화해 왔다. 민중이 바보가 아닌 이상 어찌 이런 진보를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신좌파는 없다!

 

물론 이런 문제가 한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이런 문제가 드러났고 그 과정에서 신좌파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도 신좌파가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좌파가 존재하려면 구좌파가 정치세력으로 미리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신좌파의 등장을 설명하려면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와 체제 내로의 흡수, 그에 따른 좌파 내부의 이념적, 정책적 갈등을 함께 얘기해야만 한다. 그런 갈등이 진보정당의 정강이나 정책을 바꾸고 새롭고 대중적인 사회운동이 권위적이고 관료화된 구좌파의 의사결정구조를 비판하면서 신좌파는 형성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조건들이 없었다. 아직도 빨갱이라는 비난이 등장하는 한국사회에서 좌파는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아직도 머나먼 과제이고, 좌파 내부의 갈등은 이념이나 정책 갈등보다 정파의 싸움에 가까웠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차이가 아니라 잘못이라 비난하니 비판이나 대결은 곧바로 분열로 이어졌다. 이념이 추상의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런 갈등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웠다. 겉으론 대단한 이념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인물을 따르거나 특정한 원칙만 고집하며 정파의 이익을 따지기 때문에 타협이 안 되면 보따리를 싸서 떠나버린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정치경쟁이 있을 수 없다.

분명히 억압적인 사회 환경이 정파의 비밀스런 대립을 강화시킨 면도 없지 않지만 한국의 진보는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서구의 신좌파는 ‘대항문화(counter-culture)’운동과 결합해 권위주의적이고 교조적이며 가부장적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했다. 아래로부터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자발성이 신좌파의 성장을 도왔다. 하지만 한국의 진보는 권위주의와 교조주의, 가부장주의만이 아니라 학벌과 연고주의에서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 Lakoff)는 진보가 자기 프레임(frame)을 개발하지 못하면 보수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는 오히려 ‘이익집단’이라는 보수의 프레임에 갇혀 버렸고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단체들의 비리사건들은 그런 프레임을 정당화시켰다. 자연히 시민운동으로 대표되던 NGO와 사회운동단체, 진보정당 모두의 사회 신뢰도가 함께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의 진보는 ‘녹색’이라는 대안가치마저도 ‘저탄소 녹색성장’에 빼앗겨 버릴 정도로 자신의 프레임을 확장시키지도 못했다(이제는 ‘공동체’라는 가치마저 시장에 빼앗길지 모른다).

 

관점의 진보가 필요하다!

 

자기 가슴과 몸으로 진보의 내용을 새로 채우지 않는다면 진보정치의 가능성은 없다. 자신을 진보라 주장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많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경우는 드물다. 말만 뻔지르르하고 실제 사는 모습은 개판인 경우가 많고,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자신의 진보성을 풀어내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러니 진보의 이념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보다 조금 더 상대적으로 진보한 사람은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위기의 시대는 그런 상대적인 진보로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경제위기와 식량, 에너지 위기의 시대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념적 진보가 새로운 틀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는 마음이 미래의 해법일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보의 관점이 새로워져야 한다. 자신은 내버려둔 채 남을 변화시키겠다는 건 오만한 발상이다. 일찍이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진보에게 바닥으로 기어라고 말했다. 오만함을 버리고 낮은 시선에서 민중의 삶을 바라보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만나고 반기고 사랑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책임감을 지닌 진보적 리더십은 혁명을 이끄는 전위조직이 아니라 더불어 살려고 치열하게 움직이는 모임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이나 청년실업을 비롯한 사회현안을 해결하는 것은 분명 진보의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정규직으로의 전환, 무상교육, 무상의료같은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정책들이 민중의 조건 없는 지지를 받으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그런 정책들이 실현될 수 있는 자발적인 문화를 만들고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을 끌어내지 못하는 한 그런 정책들은 지지의 기반을 만들 수 없다. 그러니 구좌파/신좌파의 무의미한 논쟁에서 벗어나 즐거운 진보의 양산박을 만들어야 한다(최근 일본청년 마쓰모토 하지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런 필요성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관점과 삶의 변화가 쉽게 이루어지리라 기대할 순 없다. 허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진보가 망한들 우리네 살림살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한국의 기득권 보수만큼 부패할 뿐 아니라 무능한 세력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지 않으면 쓰러진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에 많은 얘기를 쏟아놓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기간에 했던 실수와 실패까지도 미화하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우려했던 바이지만 그야말로 깊이를 강요하는 글들을 접할 때마다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같이 사는 사람 덕분에 민주노총 부산지부에 계신 김진숙 선생님의 글을 읽었다.
내가 읽은 글 중 가장 '깊이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본인은 선생님이 아니라 노동자라며 이런 호칭을 거부하겠지만 그 분이 쓰신 글들은 힘든 일 잊고 좋은 것만 기억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니 어찌 선생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널리 함께 읽고 싶어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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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도 없고 수련회도 없는 휴일은 외려 잠이 일찍 깨요.
아무 일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저는 평화가 실감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걸까요.
아무 일도 없는 이상한 토요일.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속보가 뜨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 뇌출혈로 입원”
검찰조사가 시작되면 입원으로 시작해서 휠체어나 마스크가 구명보트처럼 등장하는 꼴을 늘 봐오긴 했습니다만
당신은 그런 쇼를 할 사람은 아닌지라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10여분 후 “노무현 전대통령 사망한 듯”이라는 자막이 뜨고 그제서야 뒹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날이 일구 우일구하기 여념없는 시시껍절한 방송이 중단되고 속보가 이어지더군요.
경호원, 사저뒤편, 부엉이 바위, 세영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심폐소생술, 열상 따위의 일상과 밀접하지 않은
단어들이 바퀴벌레처럼 툭툭 튀어나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정신적 공황상태까진 아니었지만 불면 탓으로 약간 멍한 채로 이틀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 부산역까지 가긴 했으나 조문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선뜻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문상객들의 거리낌없는 몸놀림이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잠이 안오대요.
다음 날 다시 부산역엘 갔습니다.
역 광장을 또 빙빙 돌다가 그냥 돌아가면 다시 닥칠 불면의 밤이 성가셔
문상객들의 뒤에 얼른 붙어 섰습니다.
방명록에 몇 줄 쓰기도 했습니다. 잠을 자야하니까.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보통 변호사 접견은 재판 전날 와서(사실 재판 전날도 안 오는 변호사도 많습디다만)
재판절차를 일러주고 이빨도 맞추고 하는데 재판날짜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기였던지라
많이 의아했던 만큼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보통은 재소자들이 한 시간 이상씩 주리를 틀면서 기다리는데.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변호사가 접견을 와선 재판이야긴 한마디도 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다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정치권으로 갔고,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변호사비용을 거침없이 떼먹고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직하면 갚으마. 유전 발견하면 갚으마. 보물선 찾는대로 갚으마. 막연한 약속이 선임비였던 시절이었으니.
그게 인권변호사의 당연한 책무였으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실감이었어요.
 
그 시절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는데.
공돌이 공순이 편을 들어주는 가장 직책 높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있어 우린 수갑을 차고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때 직감적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재판장 앞에서 수갑을 찬 채 잔뜩 주눅 든 우리를 향해, “피고인은 무죕니다.”
외쳐 줄 사람이 이젠 없겠구나.
이제 재판에서 지더라도 찾아가 울 데도 없겠구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부엉이바위인 크레인 위에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당신을 잊었습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어서 혼자 진행했던 1심 재판에서 당연히 지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왜 항소를 안했어요?” 라는 질문에 “항소가 뭔데요?” 라고 되묻던 저에게
“노동자가 항소를 알면 그건 노동자가 아니지.” 하던 말도 잊었고,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함께 했던 소모임도 잊었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내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던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었고,
어느 날은 밤에 오라 길래 밤에 찾아갔더니 그날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기일이라고
변호사 사무실 구석에 조촐한 제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그 뭉클하던 밤도 잊었고,
함께 같은 거리를 달리던 6월 항쟁도 잊었고,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걸판지던 뒤풀이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때였습니다.
 
노동조합 조합원 교육에 초청을 받았는데 앞 시간 강사가 당신이었더군요.
당신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던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난 참 어색하기가 짝이 없습디다.
그냥 모른 척 할라고 했습니다만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굳이 손까지 내미시더군요.
그때 대답을 했거나 웃기라도 좀 했으면 지금 잠을 이루기가 좀 쉬었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출마한 대선에서 전 4번을 찍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외포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1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큰언니가 전화를 했더군요.
“이 노무헤니가 그 노무헤니지? 니 벤호사. 그 사람 찍었다. 너 인쟈 깜빵 안가지? 복직두 되갓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제가 왜 “내 변호사”를 놔두고 4번을 찍었는지 우리 큰언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거예요.
2번과 4번의 극심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도 이리 막막한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그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은 저의 재주로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차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혀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이 1/3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습디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조중동이랑 열심히 싸우셨습니다만 우리에겐 조중동이랑 한편처럼 보인 거.
 
 “야~ 기분좋다!” 시며 봉하로 가셨을 때 오리농법보다 더 중요한 일은 농민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왜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했는지.
그리고 전용철, 홍덕표 그들의 죽음에 당신이 늦게나마 사과를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봉하마을을 갔을까요. 아마 갔겠지요.
그리고.. 김 주익 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 얘긴 못했을 거예요.
말로 꺼내긴 크나큰 상처였으니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말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하셨습니다.
2003년도 한진중공업에서 저는 한꺼번에 두 명의 지기이자 동지를 잃었습니다.
김 주익은 600여명 조합원의 명퇴에 맞서 2년을 싸웠고 노사가 합의를 했고
그 합의를 회사가 번복을 했고 그래서 크레인에 올라갔고 그 크레인 위에 129일을 매달려 있다가
아시다시피 목을 맸습니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시대는 정말 지났을까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에게 종종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조각인 것을..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대에 그 꿈은 가장 허황되고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때론 우리가 품은 꿈이 너무 초라했고 궁색했습니다.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짤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격상됐고 그들은 언론과 자본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조차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주의를 꾸짖으십디다만 동료가 수백 명씩 짤리는 걸 목격한 노동자가 비정규직에게 내밀 손이 남아 있겠습니까.
저 살아남는데 써야지.
 
징역을 살 때 만난 사형수가 있었어요. 이 여잔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개털이었는데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샴푸나 속옷을 사달라는 거예요.
출소한 사람들이 쓰다만 물건들도 다 그 여자 차지였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 게 도덕의 눈으로 보자면 참 추접스럽습디다.
그 여자 집행되고 보니 샴푸나 속옷 나부랭이가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옵디다.
백분의 일도 못쓰고 죽었죠. 생에 대한 나름의 집착이었던 거죠.
샴푸 생길 때마다 빌었겠죠. 이거 다 쓰고 죽자.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벼랑에서 그런 심정으로 잔업하고 철야를 합니다.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정규직의 삶을 그딴 식으로 저축하면서.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변호사비용을 이제 그만 갚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시혜나 은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적이 될 거라면 호적수이고 싶었습니다.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열정도 전만 못하고 진정성마저 잃어 그리 되진 못했습니다.
그게 참 부끄러워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고 남은 자들은 동네북이 되어
초딩들마저 두들겨대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크레인엘 올라가고 굴뚝엘 기어 올라가도 언놈 하나 눈길주는 놈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입 달린 사람은 죄다 침이 마릅디다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저 같은 노동자들은 당신의 시대에 대부분 절감해야 할 원가가 되어
구조조정 당했고 효율화를 위해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짤렸으나 당신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짤렸습니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24년의 세월 동안 전 아직 복직도 못한 해고노동자로 찌질한 50대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뜨겁고 바른.
만고 씰데없는 소립디다만 그래서 대통령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지금도 해요.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떠돌던 예감이 당신의 죽음으로 확연해집니다.
한 시대가 갔다는..
 
이제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양한 가도가 보이고 그 길을 편하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외칠 때, 그 외침에 뒤돌아보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몰라요.
 
만 명이 울어주면 천국에 간다했던가요.
천국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진심으로.
김주익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당신의 시대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울었던
죽음들입니다.
 
당신처럼 벼랑 끝에 내몰렸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죽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야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너무 미워서.
아무리 야속하고 미워도 그런 바람은 품지 말걸 그랬다 싶어요.
애증도 부질없어 졌습니다.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기형도의 시처럼
떠돌다 때때로 부딪히겠지요.
이제 변호사비용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 같은 것도 합격하지 마시구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변절이라 손가락질 할 일 없이, 당신은 절더러 경직되었다거니 세상을
모른다거니 한심해 할 일 없이.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그래서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
그 멋진 말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남다른 정의감 그대로 만날 수 있길.
다시는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이렇게 미어질 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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