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에 강의를 하러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캠퍼스를 걷다 보면 가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저 말은 분명 한국어가 아닌 듯한데... 중국어나 일본어 같은데... 모여서 길을 걷는 학생들 중 많은 수가 그런 언어를 쓰고 있다.
그리고 수업 때 출석부를 봐도 중국 학생이 꼭 1명 이상은 속해 있다.

어찌된 일일까 생각하다 얼마전 한겨레 기사를 하나 봤다.
"대학가마다 차이나타운 왜?"라는 기사다(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newspickup_section/347676.html).
기사를 보니 한국에 유학온 중국학생이 5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자료를 보니, 경희대가 3,267명으로 대학들 중 최고이다.
기사에 따르면, 중국 학생들이 한국으로 유학을 오는 이유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물가가 싸며 한국 기업이 중국에 많이 진출해 한국어 수요가 늘어나고 한국 드라마로 호감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방대에 유학생이 급증하는 것은 정원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탈도 많고 비리도 많은 지방대들이 유학생을 정원외로 받아 대학재정에 보탠다고 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그런데 유학생 등록금 수준은 국내 학생의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사만 봐서는 왜 중국학생들이 한국으로 오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중국 유학생이 가장 많다는 경희대에서 중국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걸 보면 한국어로 아주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이다.
수업시간에 내 말을 알아듣는 학생이 있을지 의문스럽고, 수업에 참여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도 아주 간혹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자기들끼리 중국말로 대화하느라 바쁘다.

한국의 대학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는데, 이들은 무엇하러 이곳에 왔을까?
기사에 난 것처럼 가깝고 물가가 싸고 한류 열풍 탓에 호감도가 높아졌고 돌아가서 한국기업에 취직하려고?
한국 학생들이 이런 조건 때문에 다른 유학을 떠나려 할까?

하여간 내겐 미스터리이고 한국에서 그네들이 보내는 삶도 참 궁금하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요즘 보면 우리 사회가 개념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속된 말로 무개념의 사회가 되고 있는 거죠.

소위 권력의 핵심이라는 청와대의 행정관이 관련 업체의 접대를 받고 성매매까지 나서고.
그걸 조사해야 할 경찰청장이 자신도 예전에 접대를 해봤다며 재수없으면 성매매에 걸린다고 얘기하고.
이런 얘기가 드러났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접대를 받고 성매매를 하며 자신의 힘을 마음껏 누리고 있을 겁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무개념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게 이명박 정부만의 잘못은 아닌 듯합니다.
노무현 정부가 '상식이 통하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부안과 대추리의 주민들을 짓밟는 '몰상식'을 증명했지요.
그런 몰상식을 딛고 이명박 정부가 무개념의 정부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한 번도 상식적인 정부가 들어선 적이 없는 게지요.

그리고 이런 몰상식과 무개념은 비단 정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권력이 그렇게 타락하는 동안 사회도 그 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동문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고려대의 모습에서도 그런 무개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옛날 고대 출교생 사태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교수들을 감금했다며 학생들에게 '출교'라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사건인데요.
법원이 과한 처벌이라며 출교를 무효로 만들었는데도, 이제는 대학에도 '무기정학'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네요.
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99428&gb=da
이미 졸업한 학생들까지 불러서 문제를 삼는다니 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임을 깨닫게 해주려는 걸까요?
김연아를 낳은 고대이니 그 자존심을 끝까지 세워보겠다는 걸까요?

제가 보기엔 이 역시 고대 총장이나 교수들만의 문제는 아닌 듯 싶습니다.
이미 대학은 권력이나 자본의 힘에 끌려다니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삼성 이건희 회장이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면 사태가 그렇게 가지 않았을 테니까요.
스승이 될 생각은 별로 없으면서 알량한 권위나 내세우고 있는 게 지금 대학의 모습이니까요.

브루스 커밍스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지은 [대학과 제국]이란 책을 보면
정부와 기업이 대학을 어떻게 길들여왔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카멜롯 프로젝트, 트로이 프로젝트 등 미국이 남미나 다른 제3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전략들이 대학의 프로젝트로 발주되고, 사회과학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지요. 그래서 커밍스는 "미국의 유수한 지역학․국제학 연구소들은 정확하게 국가․정보기관․재단의 결탁의 산물"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로렌스 솔리는 정부만이 아니라 기업이 대학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교육을 목적으로 기업이나 기업재단에서 대학으로 흘러 들어가는 돈은 냉전시대에 정부보조금이 학문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학문분야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령 보수적인 군수제조업체가 설립하고 재정지원을 하는 존 M. 올린 재단은 시카고대학, 예일, 스탠포드, 하버드, 콜롬비아, 조지 메이슨, 조지타운, 듀크 대학을 포함하여 일류 법과대학을 가지고 있는 몇몇 대학들에서 진행되는 ‘법률과 경제학’이라는 연구 프로그램을 후원해 주고 있다. 이 ‘법률과 경제학’은 이 재단의 극우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법철학으로서, 공화당의 분석가 K. 필립스는 자신의 저서 『부자와 빈자의 정치학』에서 ‘법률과 경제학’은 H. 스펜서와 W.G. 서머의 시각을 상기시키는 신다윈주의 ‘이론’이라고 쓰고 있다. “시장에서의 상품선택 과정은 정부의 의사결정을 대체할 수 있다”고 전도하고 있는 ‘법률과 경제학’같은 강좌가 나날이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처럼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대학의 강좌를 만들거나 그 강좌를 지원하면서 학문의 흐름을 주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은 소위 산학협동과정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보기도 합니다. 솔리에 따르면, "외국기업을 포함하여 기업들이 대학에 연구기금을 제공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경제학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납세자와 수업료에 의해서 세워진 대학연구소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그에 상당하는 건물과 장비를 갖춘 기업실험실에서 하는 것보다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은 낮은 비용으로 대학원생들을 연구보조원으로 고용하여 민간부문의 연구원들보다 훨씬 더 적은 숫자로 동일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기업이 갖춰야 할 실험장비를 대학이 마련하게 하고(그러면서 생색도 내고), 값싼 노동력인 대학원생들을 착취하는 거죠. 꿩 먹고 알 먹고란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닐까요?

또한 솔리는 한국정부가 미국 내의 한국학 연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얘기합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미국 지식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미국대학에 돈을 풀었다고 합니다. “한국연구에 대한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대학들에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장려하는 것은 한국이 미국의 학계의견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시도한 가장 두드러지고 값비싼 조치였다.” 돈을 받는 대신 한국의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연구를 삼가하고 아름다운 것만 드러내 달라는 거였죠. 그러니 우리는 미국에 한국학이 확산되어가고 있다며 기뻐하지만 사실 그 확산은 은밀한 거래일 뿐입니다.

이런 게 미국 대학만의 문제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한국대학에서 사회주의나 기타 비판적인 강좌들이 모두 사라진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학의 커리큘럼들을 두루 살펴보면 이런 영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 곳곳에 자리잡은 산학협동단지나 벤처단지 등등을 보면 이미 대학은 기업의 영향력에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학이 상식적으로 움직이길 바라는 게 어쩌면 몰상식한 건지도 모릅겠네요. 대학이 비판적 지식인들의 온실이라는 얘기는 이미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도의 성벽을 깨뜨려야 새 바람이 들어오지. 새 바람이 들어와야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지. 무엇으로 그 성벽을 깨뜨리느냐? 못할 것이 없는 정신의 포탄으로야 하지. 정신이 어디 있느냐? 사람에 있지. 사람이 누구냐 나지. 나밖에 사람은 없다. 막막한 우주에 사람은 단 하나이다. 그것이 나다. 「다른 사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알 수도 없고 임의로 부릴 수도 없다. 내가 아는 건 나요,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건 나요, 내가 죽여도 좋은건 나다. 나 뿐이다. 그럼 이것 밖에 길이 없지 않나? 불은 불로야 일어나는 것이요, 바람은 바람으로야 일으킨다. 내가 폭발을 해야만 사회의 썩은 티끌을 불어 날리는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이렇게 말하면 너는 개인으로는 아니 된다더니 다시 개인에 돌아왔구나, 순환론이로구나 할지 모른다. 모르는 말이다. 나는 개인 아니다. 나는 아버지(全體)와 같이 있는 나지, 개인이 아니다. 개인이란 건 거짓 것이다. 천지간엔 없는 「다른 사람」이란 것을 보고할 때 개인이란 것이 있지 참 삶에 개인은 없다. 내가 살려고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는 것이 개인주의지, 전체를 섬기려고 짐을 내 등에 지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향기를 채우려고 나를 제단 위에 불사르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다. 이 날까지 역사는 언제나 개인 아닌 개인의 바치는 자기희생의 피에서만 수혈을 얻어 멸망을 면해 왔다. 모든 참 생명적인 혁명은 따져 들어가면 다 어느 가슴에서 나왔다. 삶 자체의 가슴에서 나왔다."

뜨거운 가슴이 필요한 시대인 듯합니다. 오늘도 저는 가슴 덮히러 갑니다.^^


덕성여대 신문의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어제 학교에 갔더니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반독재투쟁을 벌이자며 쓴 대자보가 붙어있더군요.
대자보 내용은 http://www.20eye.net/35?srchid=BR1http%3A%2F%2Fwww.20eye.net%2F35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청년들의 행동이 필요한 시기인 듯합니다.
물론 이명박이 문제의 본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짓은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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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또는 촛불시위는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해가 진 저녁을 밝히는 촛불은 시민들이 중요한 사회적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신념의 불꽃을 뜻했다. 이런 촛불의 흐름이 한국사회에서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그동안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해 왔고 시민들이 그 과정에서 배제되어왔다는 점을 증명한다. 촛불의 구호나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는 사안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저항문화는 그 원인인 권력구조의 잘못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촛불시민의 저항을 힘으로 억누르려 하고 있다. 경찰은 상습 시위꾼을 검거한다며 촛불시민을 조사하고 인터넷 IP를 추적하고 있다(거리에 나와 중무장한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것을 상습적으로 즐길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리고 대법관이 재판과정에 개입해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다(법관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컴퓨터로 재판을 하는 게 옳다). 또한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이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집시법, 방송법, 정보통신법 등을 다수당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다(힘이 장땡이라면 국회의원을 쌈박질 순으로 뽑는 게 옳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입법, 행정, 사법체계의 삼권분립조차 무시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이처럼 저항의 이유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많은 이유들을 만드는 현실에서 과연 시민들이 촛불을 꺼야 할까? 아니 과연 촛불이 꺼질 수 있을까? 물론 정부의 강한 탄압이 일시적으로 촛불의 흐름을 주춤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결코 권력의 억압이 자유를 가둘 수 없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해 왔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독재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영원한 왕국을 건설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역사만 봐도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이 탐관오리나 왕에게 반기를 들며 수많은 반란을 일으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88만원 세대는?

더구나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는 시민들이 저항의 촛불을 내려놓을 수 없게 한다. 유럽에서는 700유로세대가 그리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옆 나라 일본에서도 2천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도쿄의 히비야공원에 모여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일자리를 달라고 구걸하는 게 아니다. 경제위기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고통을 주지 않는다. 위기는 힘을 가진 자에겐 기회였고 모든 이가 고르게 누려야 할 공동의 재산은 그동안 소수의 사람들에게 독점되어 왔다. 상위 10%의 사람들이 전 세계 부의 85%를 독점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올 정도이고, 불행히도 그런 불공정함은 지금 상태라면 더욱더 강화될 전망이다. 전 세계적인 분노는 부를 독점해 온 사람들에게 그 부를 공정하게 나눌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저항의 흐름이 뭉쳐져 촛불이 횃불로 변한다면, 어떠한 권력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바로 그렇기에 권력은 촛불이 횃불로 타오르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해를 하고 있다. 권력은 우리 88만원 세대가 거리보다 도서관에서 스펙쌓기에 열중하기를 원한다. 88만원 세대가 함께 모여 공동의 미래를 고민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서로 경쟁을 벌이기를 원한다.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바로 대안이다

따라서 그런 방해를 뛰어넘어 횃불이 되려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대화와 만남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른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

문제제기와 대안은 분리되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와 같은 신념을 품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와 우정을 쌓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만나는 과정에서, 특히 국가나 학교, 기업이 꺼리는 사람이나 모임을 만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배우지 않은 지식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만남의 과정에서 새로운 운동이 자연스레 출현할지 모른다. 그런 운동이 가능할까라고 미리 물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운동의 흐름을 미리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뜻을 드러내고 토의하는 과정이기에 운동의 방향을 예측하는 건 인간의 몫이 아니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기에 운동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문화가 운동으로 확장되고 단단해질 수 있다면, 대안사회는 꿈이 아닌 현실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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