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요일, 온 가족이 모여 장을 보러 간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올라가니 마트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코너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식을 하고 물건을 고르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삑삑거리는 계산대를 지나 짐수레를 가득 채운 침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이다.

이렇게 대형할인마트에서 쇼핑하는 장면은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 슈퍼맨이 일한다는 슈퍼마켓, 좌판과 작은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인 재래식 시장과 달리 대형할인마트는 그 휘황찬란한 근대성을 자랑한다.

세계 최초의 대형 할인마트는 1962년에 생긴 미국의 월마트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1993년 11월 이마트가 처음 문을 열면서 대형할인마트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 수와 판매액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 전체 소매시장에서 대형마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16.6%로 추정되고 있다(더구나 이마트, 홈플러스 상위권 회사의 점포수가 161개로 전체 할인마트의 47.1%, 매출액은 12.7조원으로 할인마트 매출액의 54.1%를 차지한다). 수치로 보면 감이 잘 오지 않지만 채 400개를 넘지 않는 대형할인마트가 한국 전체 소매시장의 16.6%를 차지하고 있다니 엄청난 일이다.

사람들은 왜 대형할인마트를 찾을까? 대형할인마트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대형할인마트는 싸다?

 

맞벌이 부부들은 주말에 한꺼번에 장을 보기 위해 대형 마트를 찾는다. 이른 새벽까지도 문을 열고, 늦은 시간이면 김밥이나 초밥, 반찬거리가 몇 백원씩 할인되니 어찌 아니 좋을쏘냐. 공장에서 만든 물건들의 값은 밖에서 사는 것보다 싸고 물건이 워낙 많아 돌아다니지 않아도 웬만하면 마트에서 모든 것을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 시식코너에서 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고(한 때는 인터넷에서 마트에서 밥을 공짜로 먹는 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방해를 받지 않고 물건들을 서로 비교하며 살 수 있으니, 공간도 비좁고 물건도 많지 않은 소형 가게와 비교하면 대형 마트가 소비자에게 훨씬 편리할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외부와 단절된 환한 조명과 경쾌한 음악까지 틀어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대형할인마트들은 매장에 진열하는 품목을 꾸준히 늘리며 공간의 복합화를 추진해 왔다. 이제는 단순히 먹거리나 가정용품같은 생필품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의류매장이나 전자제품코너같은 공간들을 갖춰서 사람들의 발길을 유도한다. 이제는 기름을 넣는 주유소 기능까지 대형할인마트들이 한다고 하니, 마트에 들리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없을 정도이다.

대형할인마트들은 직접 공장이나 산지와 거래하며 중간유통마진을 없애서 할인된 가격에 상품을 제공한다고 한다(어떤 대형마트는 자기 매장보다 더 싼 가격으로 파는 곳이 있다면 신고를 하라고 할 정도이다). 싼 가격에 상품을 제공하니 누군들 마트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가격을 곰곰이 따져 보면 대형할인마트에서는 공장에서 만든 물건의 가격이 농산물의 가격보다 훨씬 싸다. 왜 그럴까?

앞서 봤듯이 대형할인마트는 몇 안 되는 기업이 많은 매장을 내며 소매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을 무기로 중소기업이나 공장에게 낮은 가격을 강요한다. 슈퍼마켓과 마트에서 파는 물건이 똑같지만, 마트는 슈퍼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상품을 공급받는다. 한 조사에 따르면 대형마트와 백화점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의 86%는 불공정거래를 경험했지만 거래를 중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참는다고 한다. 마트의 싼 가격은 중소기업을 희생시킨 대가이다. 마트에서 물건을 싸게 살수록 부모님의 월급봉투도 얇아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농산물은 공장의 물건처럼 마음대로 가격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산지의 가격을 아무리 낮춘다 하더라도 농산물의 가격은 협상하고 강요해서 결정하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직접 생산한 농산물이나 주변 농가의 것을 가져와서 파는 재래시장의 가격이 마트의 가격과 비슷하거나 싼 경우가 많다. 가끔 농산물 할인행사를 해도 그건 신선도가 떨어진 농산물을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해서이다.

더구나 마트는 한 가정이 필요한 만큼 작은 단위로 상품을 팔지 않거나 작은 단위일 경우 비싸게 가격을 매긴다. 그래서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면 언제나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많은 양을 사기 마련이다. 그러니 상품 하나하나의 가격은 싸다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필요한 것 이상으로 돈을 쓰게 만든다.

그러니 대형할인마트의 할인은 중소기업이나 농민의 몫을 빼앗는 ‘착각’이거나 과소비를 하게 만드는 ‘환상’일 뿐이다.

 

대형마트와 웰빙

 

<지식채널e>의 ‘구멍없는 구멍가게’는 대형할인점과 동네 구멍가게를 비교한다. 대형할인마트가 늘어날수록 경쟁력 없는 작은 구멍가게들은 문을 닫는다. 2001년 이후 1만 1,400개의 구멍가게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리고 구멍가게를 애용하는 한 할아버지는 소주 1, 2병 사러 마트 갈 수도 없고 왕창 물건을 살 돈도 없다며 “조금 비싸지만 구멍가게는 외상도 되고”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은 더 비싸게 물건을 사야 하는 이 가혹한 진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대형할인마트의 서비스가 구멍가게보다 더 좋을까?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의 서비스가 대형할인마트보다 나쁠까? ‘말만 잘하면 공짜’라는 말처럼 구멍가게에는 주인과 손님의 ‘흥정’이 있었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은 부족한 주머니를 넉넉한 인심으로 채울 수 있었다. 마트에 홀로 놓인 전자저울 대신 구멍가게에는 주인의 ‘눈대중’이, 부족한 사람에겐 한 가지 더 얹어주는 ‘마음’이 있었다. 자주 들리는 ‘단골손님’은 후한 대접을 받았고 때로는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기도 했다.

그러니 동네의 구멍가게는 단순히 물건만 구매하는 곳이 아니었다. 구멍가게는 가게에 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꽃이 피는 공간. 추운 겨울날이면 난로 주위에 모여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공간이기도 했다. 개인적인 얘기부터 마을일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구멍가게의 역사를 장식했고 구멍가게는 관계를 만드는 공간이었다.

이제 구멍가게가 사라지면서 단골과 흥정, 외상이라는 말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 대형할인마트는 인심을 저울로, 흥정을 정가로, 단골을 포인트로 대체한다. 그 속에는 살가운 관계가 숨을 쉴 공간이 없다.

더구나 한꺼번에 많기 사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마트에 가는 사람은 없다. 모두들 차를 몰고 마트에 가고 그러다보니 주말이면 마트 주변 도로는 온통 주차장으로 변한다. 그렇게 주차장으로 변하면 그 매연은 마트가 위치한 곳에 사는 주민들이 모두 들이마셔야 한다. 그러니 그 편리함도 다른 것을 희생하고서만 얻을 수 있는 장점이다. 그런데도 대형할인마트의 서비스가 구멍가게보다 더 나을까?

김재인의 『대한민국 경제 빈곤의 카운트다운』(서해문집, 2008)에 따르면, 대형마트 하나가 생기면 약 150개의 점포가 사라진다고 한다. 대형 마트가 350개 정도가 되니 약 5만 개의 점포가 사라진 셈이다. 이렇게 대형할인마트는 동네의 구멍가게들의 문을 닫고 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없앤다.

그래서 2008년 3월 5일에는 <대형마트 규제와 중소상인 육성을 위한 지역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 대형마트 입점 규제(인구수와 재래시장과의 거리를 고려할 것), 대형마트 영업 규제(중소상인에게 영향을 주는 품목 제한, 오후 8시부터 오전 10시까지 영업 규제), 처벌규정 강화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대형할인마트와 비정규직 노동자

 

대형할인마트에서는 누가 일을 할까? 마트의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거나 물건을 진열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심지어 마트는 직접 고용하지 않고 외부의 용역회사에서 필요한 인력을 데려다 쓰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2007년 6월에 시작된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후마니타스, 2008)는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내 아이들만큼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 살게 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은 차가운 현실의 벽 앞에 무너지고 있다.

물론 비정규직 문제가 대형할인마트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이고 그 비율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날 전망이다. 문제는 대형할인마트의 수가 늘어날수록 중소기업이나 농민, 구멍가게의 희생이 늘어나고, 그렇게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 취업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형할인마트가 전체 소매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날수록 그런 악순환을 막을 가능성도 줄어든다.

얼마 전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같은 대형할인마트들은 미국산 쇠고기를 다시 팔겠다고 밝혔다(심지어 어느 마트는 미국산 쇠고기를 호주산으로 표기해 판매하기도 했다). 마트들은 저마다 가격을 낮추는 가격경쟁을 벌이며 사람들의 발길을 유도하고 있다. 이윤을 늘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만들고 팔려 한다는 점에서 미국산 쇠고기와 대형할인마트는 동일한 논리에 서 있다.

우리 삶을 바꾸는 변화를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마트보다 재래시장이나 구멍가게를 찾는 것에서부터 조그만 변화는 시작된다.



얼마 전 청와대는 한 달에 한번이나 격주에 한번씩 ‘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라는 코너로 대통령이 라디오에서 연설을 한다고 밝혔다. 인터넷과 웹 2.0의 시대에 대통령은 왜 케케묵은 라디오를 선택했을까? 그리고 방송사의 PD들이나 언론단체들은 대통령이 라디오에서 말 좀 하겠다는데 왜 난리를 치며 반대할까? 도대체 라디오가 뭐 길래?

 

괴벨스의 입

 

세계 최초의 라디오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무선으로 전신 신호를 주고받는 단순한 기계였다. 라디오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보통 독일의 마르코니(G. Marconi)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세르비아 출신의 미국 과학자 테슬라(N. Tesla)가 처음 발명했다. 한때 발명왕 에디슨(T.A. Edison)과 일을 하기도 했던 테슬라는 마르코니보다 먼저 라디오를 발명하고 1897년에 미국 특허를 출원했지만 1904년 마르코니에게 특허권을 빼앗긴다(에디슨은 우리가 위인전에서 받았던 좋은 이미지와 달리 이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어쨌거나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탄생한 라디오는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괴벨스(P.J. Goebbels)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독일 나치당의 선전장관으로 활동하던 괴벨스는 독일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라디오를 활용했다. 나치는 독일의 모든 가정에 라디오를 보급하고 그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와 자신들의 계획을 국민들의 귀에 반복해서 불어넣었다(나중에 괴벨스는 세계 최초로 정기TV방송을 시작했고 올림픽을 그 기회로 삼았다).

당시의 라디오는 ‘괴벨스의 입’이라 불렸다. 괴벨스는 “우리는 방송중계를 통해서 민중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청취자에게 우리 집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서 조형적인 그림을 전달해야 한다. 지도자의 연설을 준비하는 도입 연설을 언제나 내가 맡아 하면서, 청취자에게 우리 대중집회의 마법과 분위기를 전달하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요아힘 C. 페스트 지음, 안인회 옮김, 『히틀러 평전』, 푸른숲, 723~724쪽). 라디오는 연설만이 아니라 각종 집회의 분위기도 그대로 각 가정으로 전달했다. 집에 있는 사람들도 마치 나치당의 집회에 와 있는 것처럼 함께 호흡하며 흥분과 전율에 몸을 떨었다.

거짓말도 자꾸 들으면 진실처럼 들리듯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라고 괴벨스가 자신 있게 말할 정도였다.

한때 자신들의 이웃이었던 유대인들을 무조건 잡아가고 가둘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거짓말 탓이었다. 심지어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할 때조차도 국민들은 독일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소년병들이 그 거짓 승리를 위해 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그렇지 속지 않았다면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패배한 전쟁에 내보낼까).

라디오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효과는 또 다른 사건으로도 증명되었다. 1938년 10월 미국 CBS방송국의 PD였던 오슨 웰즈(O. Welles)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자신이 쓴 『화성침공』이라는 드라마 대본을 방송했다. 외계인의 침입을 알리는 속보가 나오자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짐을 싸서 피난을 떠나거나 총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 사건은 라디오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시켜 줬다.

그래서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원하는 바대로 그들을 조종하기 위해 라디오를 이용했다.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언제나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의 귓속으로 바로 전달할 수 있으니 누군들 그 힘을 이용하고 싶지 않을까? 인터넷의 시대에 좀 구리긴 하지만 라디오를 이용하려는 권력자의 발상은 이런 의도를 담고 있다.

일본의 작가 요시미 슌야(吉見俊哉)는 『소리의 자본주의』(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5)에서 그 의도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현대사회에서 라디오가 소통보다 일방적인 주장을 전하며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을, 나아가 사회적 현실의 성립을 거의 전면에 걸쳐 점령해버렸다”는 점은 분명하다(25쪽). 라디오를 통과한 소리는 장소를 초월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세계를 동질화시킨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매개이자 “‘소리’를 부르주아적인 기호로서 유통시키고 소비해가려는 사회적 전략”인 ‘소리의 자본주의’를 구성했다(45쪽).

 

당신의 취향, 라디오

 

영화 <아는 여자>에서 이연(이나영 役)의 취미는 라디오 듣기이다. 이연은 말 그대로 라디오를 들으며 일하고 휴식을 취한다. 버스기사나 택시운전사처럼 혼자 일하는 사람들에게 라디오는 작은 즐거움을 준다.

현대사회에서 라디오는 상품과 초대권이 뿌려지는 행운의 장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정겨운 얘기가 공유되며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이는 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운과 기억을 통해 라디오는 아직 살만한 현실이라며 사람들을 ‘위안’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과 정겨운 이야기들은 우리의 마음을 다독이며 위로한다.

그런데 그렇게 긴장이 풀어지면서 슬그머니 광고 메시지가 끼어든다. 텔레비전과 달리 라디오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요즘은 인터넷을 이용해 보이는 라디오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흘러나오는 전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누가 노래와 사연을 고르고 왜 그런 물건을 상품으로 주는지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냥 라디오의 ‘수다’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맡길 뿐이다.

피카르트(M. Picard)는 그런 수다가 사물 속에 깃든 신성(神性)인 ‘침묵’을 파괴한다고 얘기했다. 잡스러운 소리를 생산하는 라디오가 침묵의 모든 영역을 점령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서히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간다. “인간의 모든 느낌, 의욕, 지식이 라디오에 의해서 생기고 인간 자체가 라디오를 통해서 비로소 인격체가 된다. 라디오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이 생긴다. 라디오를 통해서 처음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느낀다.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려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어떤 사람 혹은 일거리를 필요로 하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된다.”(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침묵의 세계』, 까치, 201쪽)

라디오가 전달하는 많은 메시지에 익숙해지면 그 무엇도 판단할 수 없고, 의미 있는 말조차 수다에 묻혀버린다. 결국 “라디오는 인간을 더 이상 말에 귀 기울이지 않도록 길들인다. 그것은 곧 인간이 인간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인간을 당신으로부터, 당신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당신을 떼어놓는다는, 따라서 사랑으로부터 당신을 떼어놓는다는 뜻이다.”(같은 책, 209쪽)

 

볼륨을 높여라!

 

그런데 이런 라디오도 한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이크를 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라디오는 전혀 다른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예술가 찰리 채플린(C. Chaplin)은 자신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 라디오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히틀러를 꼭 빼닮은 주인공은 히틀러 대신 마이크를 잡고 괴벨스의 입을 통해 자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비행기와 라디오 방송은 우리를 더욱 가깝게 연결 시켰습니다. 이러한 발명의 진짜 의도는 인간의 선함에 전 지구적 형제애와 우리 모두의 화합을 호소하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내 목소리가 세계 방방곡곡에 울려 퍼져나가 인간을 고문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가두는 제도에 희생된 수백만의 절망하고 있는 남녀노소에게까지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채플린이 마이크를 잡는 순간 라디오는 괴벨스의 입에서 자유의 나팔수로 변한다.

이처럼 현실에서 강제로 입막음을 당한 사람들은 권력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신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그 논리에 도전하는 발신자가 되기도 한다. 영화 <볼륨을 높여라>에 등장하는 마크(크리스챤 슐레이터 役)도 발신자의 입장에서 위안이 아니라 ‘비판’을 가한다.

캄캄한 지하실, 레너드 코헨의 “Everybody knows”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면 고등학생 마크는 디제이 ‘해피 해리’로 변신한다. 마크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세상과 학교, 가족, 친구들에 대한 불만은 무형의 전파를 타고 비슷한 응어리를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마크의 독백은 학교 친구들의 호응을 얻으며 어느새 ‘해적방송’으로 성장한다. 진실은 바이러스처럼 퍼진다(실제로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무선라디오를 기반으로 한 지역공동체와 네트워크가 구성되었다).

영화 <라디오스타>에서도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열정을 잃어버린 락가수 최곤(박중훈 役)이 조그만 도시의 라디오 DJ를 맡으면서 마을에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아니, 사실은 최곤이 DJ 역할을 성실하게 하지 않아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마이크를 잡으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일방적으로 방송을 내보내던 라디오는 어느 순간 마을의 소식통이 되고 사람들이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라디오는 잡스런 소리가 아니라 의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가 된다.

이런 이야기는 영화 속에만 있지 않다. 전파법이 개정되어 소출력라디오방송이 허용되면서 한국에서도 마을라디오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의 <마포 FM>이 대표적인 예이다(http://www.mapofm.net). 마포 주변에서 FM 100.7Mhz에 주파수를 맞추면 들을 수 있는 <마포 FM>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와 함께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있다.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L양장점’, 여성주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꽃다방’, 장애인들이 마이크를 잡는 ‘함께쓰는 희망노트’, 노점상인들을 위한 ‘희망마차’ 등의 프로그램은 그 성격을 잘 보여준다.

라디오 자체는 비어 있는 물건이다.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파시즘의 매체로, 아니면 민주주의의 매체로도 활용될 수 있다. 그것은 침묵을 파괴하는 소외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희망을 기르는 공동체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진정한 라디오스타는 누구일까?



국가 없는 삶은 어떨까?

 

촛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정부의 원천봉쇄와 언론의 왜곡, 순종적인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촛불은 꿋꿋이 버티고 있다. 하지만 촛불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라는 안타까운 목소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아마도 그 안타까움은 이명박 정부가 계속 시민들의 요구를 거부하며 버틴다면 아무런 대안이 없다는 생각 때문인 듯하다.

옛날 같으면 어금니 꽉 깨물며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혁명’을 일으키자고 외쳐볼 만도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도 지났다. 비폭력을 외치는 목소리는 단지 두려워서가 아니라 정당한 방식으로 저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우리의 정당성도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과거보다 더 나은 인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혁명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혁명의 길을 찾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런데 그 과제를 풀기란 쉽지 않다. 정부에는 아직 여러 장의 카드가 남은 있는 듯한데, 이쪽은 정부와의 협상이나 정치세력의 조직화라는 애매한 카드만 남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과제를 속 시원히 풀어줄 대안적인 정당이나 정치조직을 찾기도 어렵다. 옛 길은 포기되었건만 새로운 길은 보이지 않으니 이 막막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막막함은 우리의 인식이 기성의 정치논리에 길들여져 있어서 생긴다. 우리의 상상력이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현실은 그리 막막하지 않다. 이미 저들은 물대포와 경찰특공대, 폭력진압까지 일삼은 허약한 권력일 뿐이다. 아니 저들은 권력이라고 칭하기에도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초등학생들까지 “쥐를 잡자 찍찍찍”을 외치는 상황에서 저들은 이미 권위를 잃어버린 폭력, 폭력밖에 가지지 못한 공권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조건 폭력에 똑같이 힘으로 맞서고 누르려 하는 건 어리석은 시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 권력을 넘어선 상상력이다.

 

국가라는 짐승 안에서 살아남기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은행나무, 2006)는 상상력의 별로 인도하는 나침반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우에하라는 이명박 정권 하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세상에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개(展開)해봐”라며 누구에게나 들이대는 우에하라의 거침없는 발언이 흥미롭지만 정말 나의 공감을 끌어낸 것은 책 전반에 깔려 있는 세계관이다.

우에하라는 국가에게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사람을 저희들 맘대로 국민으로 만들어놓고 이래저래 세금을 뜯어 간다니까. 그러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피지배층이라는 얘기야? 정말 웃기고 있어.”라는 우에하라의 얘기는 단순하지만 많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국가에 요구하고 국가로부터 어떤 확답을 받아내려 할까? 권력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배신해 왔으니 이제 그 지긋지긋한 믿음을 버릴 때도 된 듯한데, 아직 의식은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에하라는 이런 우리들에게 타협하지 않는 불복종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익숙한 상식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이 보일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어떡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지배의 논리에 포섭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를 반복해서 부를 게 아니라 그 법의 테두리 밖으로 나가 국가라는 짐승을 길들여야 한다. 우리 안에 갇혀서는 짐승의 위협에 굴복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 밖으로 나가 짐승을 굶기면 그 놈도 말을 듣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문을 열고 나가는 방법은 뭘까? 국가폐지를 목표로 삼는 정치조직을 만들거나 이념을 구성하면 될까? 하지만 국가를 없애겠다던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는 단순히 조직이나 이념만으로 국가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점을 이미 증명했다. 어떤 완성된 청사진을 가지고 현실을 그에 맞춰가는 방식으론 이제 사회를 변화시키기 어렵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방향에 맞추지 말고 각자가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국가 없는 삶을 대비해야 한다. 무엇을 기대하거나 기다리지 말고 마음으로 믿고 그렇게 살면 된다.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라는 우에하라의 외침은 권력에서 벗어난 실질적인 변화의 잠재력을 말해준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는 말은 그런 개개의 변화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더구나 이 변화의 과정은 유쾌하다. 촛불집회가 이미 증명했듯이, 저항과 즐거움은 얼마든지 결합할 수 있다. 분명한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즐거우면 사람들은 계속 저항에 나설 것이다. 어린 지로가 우에하라의 삶을 이해할 수 없어도 “춤을 추다보니 이게 또 무지하게 즐거웠다. 국가는 없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의식적인 선전이나 선동이 아니더라도 함께 즐기는 가운데 자연스레 서로의 삶이 녹아들고 대안이 뭉쳐질 수 있다. 엠마 골드만이 말했듯이 내가 춤을 출 수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망설인다. 국가 없이 과연 살 수 있을까? 국가가 없으면 무질서와 혼란이 우리 삶을 위협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물음은 학습된 상식일 뿐이다. 국가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더 평화로운 삶을 누렸다. 『남쪽으로 튀어!』는 그 삶을 ‘유이마-루’라고 부른다. “‘유이마-루’라는 건 서로 품앗이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예전부터의 풍습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요다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집도 섬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해 지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야에야마 땅에 온 뒤로 사람들이 귀찮을 만큼 친절하게 대해주던 것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이곳이라면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한마디로 사유재산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는 것이다. 모든 물건이 섬사람 모두의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두레와 품앗이 같은 좋은 전통이 있고, 아직도 그런 전통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니 국가와 결별하는 것이 홀로 남겨지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국가와 헤어지면서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만남을 경험할 수 있다.

‘단지’ 소설일 뿐인데, 그 얘기에 너무 흥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같은 얘기를 조금 다르게 얘기해 보자.

 

다중과 함께 세계공화국으로

 

네그리(A. Negri)와 하트(M. Hardt)의 『다중』(세종서적, 2008)은 ‘제국’이 지배하는 시대에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을 찾는다. 낯설었던 ‘다중’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건 우리 사회에서도 다양한 정치주체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실제로 이번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다중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있다).

제국의 시대에 권력은 한 국가가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 작용하고 그 정점에는 초강대국 미국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자본의 세계화는 거침없이 세계 곳곳을 정복하고 있고,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사막화와 같은 생태계 파괴 역시 국경선을 넘어섰다. 이런 세계에서 한 국가의 권력자조차 마음대로 끌어내리거나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네그리와 하트는 이런 물음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제 아무리 강하다 해도 “지배하는 권력은 언제나 피지배자들의 동의나 복종에 의존한다. 주권의 권력은 따라서 언제나 제한된다.” 이미 제국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에 다중의 삶 역시 국가주권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다.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했듯이, 여전히 유효한 다중의 무기는 “노예상태에 놓인 자신들의 지위를 거부하고 그 관계에서 빠져나오겠다는 위협”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전 민족을 이끌고 이명박 정부에서의 탈출을 도와줄 모세가 필요할까? 네그리와 하트는 모세가 아니라 내부의 차이를 서로 소통하고 함께 행동하면서 공통된 것(the common)을 ‘생산’하는 다중이 그런 역할을 스스로 맡으리라 본다. 심지어 그런 다중의 저항은 제국의 주권까지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를 자율적으로 구성할 것이라 그들은 예상한다. 지금 당장은 그렇지 못해도 다중은 그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아마 네그리와 하트도 한국의 촛불집회를 봤으면 틀림없이 놀라자빠졌을 것이다.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잠재력이야말로 차이를 소통하고 공통된 것을 생산하려는 거대한 일렁거림이 아닌가. 촛불을 서울광장으로 제한하려는 해석들이 있지만 사실 촛불은 서울광장만이 아니라 전국 각 지역에서 밝혀졌고, 심지어 전 세계에서도 밝혀졌다. 그리고 촛불이야말로 하나로 뭉쳐지면 큰 불꽃을 이루지만 실은 제각기 다른 불꽃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니 촛불이야말로 최종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 국민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된다. 복종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만 있다면 저항의 불꽃은 낡은 세계를 불태우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

특히 네그리와 하트는 “저항의 변화 형태들과 경제적․사회적 생산의 변형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응”을 강조하며 저항주체가 출현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네그리와 하트는 ‘비물질 노동’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문제해결, 상징적․분석적 과제들 그리고 언어적 표현 등과 같이 일차적으로 지적이거나 언어적인 노동”이나 “(미소를 지으며 서비스하는) 법률적 지원 노동, 항공 승무원들,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이 대표적인 비물질 노동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비물질 노동의 생산양식과 다중의 저항양식이 결합하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리라 본다.

현재 촛불집회는 스스로 학습하며 대운하, 민영화, 공영방송 등으로 자신의 의제를 확장하고 있지만 기륭전자, 이랜드, 미조직 노동자와 같은 여러 다양한 저항과 효과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아마도 “협력적 의사결정과정, 대등하게 결합된 친연집단들(affinity groups) 등등의 다양한 중요한 실험들”이 아직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한계는 단지 촛불집회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끊임없이 촛불집회의 동력을 대의민주주의로 흡수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들은 자신들이 의제를 제안하고 제한하려 한다. 한편으로 대의민주주의를 보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네그리와 하트는 그런 주장이 왜 뒤쳐진 것인가를 잘 지적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대의민주주의가 “다중을 통치(정부)에 연결하는 동시에 분리”하는 두 가지 모순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다중을 제국에 묶어둔다고 비판한다. 대의민주주의는 다중에게 “민중의 지배라는 통제된 소량의 약을 주고 이에 의해 다중의 무시무시한 과잉을 예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의민주주의는 다중을 제국의 내부로 포섭하려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정치 시스템의 전환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모두 다 똑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라는 우에하라의 외침은 운동 이상의 그 무엇을 요구한다. 그러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며 국가주권의 틀에 갇히지 말고 새로운 틀을 구상해야 한다.

이왕 지르는 거 국경선을 벗어나 원대한 뜻을 품어보는 것이 좋겠다. 세계공화국, 얼마나 그럴싸한가. 이미 18세기에 칸트(I. Kant)가 『영구평화론』에서 그 터를 닦기도 했으니 전혀 생뚱맞은 얘기는 아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니 가능/불가능을 논하기가 어렵고, 똥인지, 된장인지를 알아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찍어먹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에서 국가사회주의나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 자유주의를 넘어설 대안으로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의 이념을 제안한다. 고진에 보기에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복지국가나 사회민주주의도 더불어 약해지자 자유주의나 종교 원리주의가 판을 치는데 이를 바로잡을 선택은 바로 어소시에이션이다.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려는 운동”인 어소시에이션을 오래된 미래로 제안한다.

『남쪽으로 튀어!』의 유이마-루처럼 어소시에이션은 호혜의 원리에 바탕을 둔 대안사회를 지향한다. 이 이념은 이미 맑스(K. Marx)와 프루동(P. Proudhon)이 공감했던 것으로 화폐와 자본주의에 맞서 “대체통화, 신용, 그리고 생산-소비협동조합(어소시에이션)의 연합”을, 대중을 약탈하고 재분배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국가에 맞서 세계공화국을, 민족이라는 거짓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네이션에 맞서 자유의 상호성을 주장한다.

고진은 이런 어소시에이션의 이념이 칸트에서 이미 드러났다고 얘기한다. 그 사회는 바로 “칸트적으로 말하면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다루는’ 사회”이다. 그리고 실제로 칸트는 “상인자본의 지배를 거부한 소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을, “그 이후에 출현할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션이즘의 핵심을 파악”했고 국가들이 그들의 주권을 양도함으로 “‘영구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연합을 제창”했다.

네그리와 하트에게 다중의 힘이 생산양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면, 고진의 이념은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으로서 현실을 이상으로 인도한다. 규제적 이념은 우리가 조금씩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그런 이상이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 수 있지만 꿈 없는 인간이 무슨 낙으로 살겠는가? 설령 실현되지 않는 꿈이라 해도 꿈이 있기에 인간은 희망을 품을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네그리와 하트와 달리 고진은 다중의 잠재력에만 의지하려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진은 네그리와 하트가 국가의 독자성을 무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중의 자기소외로서 있는 국가는 다중이 자기통치하는 것에 의해 지양될 것이라는 아나키즘의 논리입니다. 여기에서는 국가의 자립성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다중의 반란은 국가의 지양보다 국가의 강화로 귀착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진의 말에 따르면 국가는 그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변화시키려는 실천전략은 내부의 노력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외부에서 지양하는 힘, 즉 “국가를 ‘위로부터’ 꼼짝 못하게 하는 시스템”을 요구한다. 그래서 고진은 “국제연합을 강화․재편성”해서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위로부터의 운동을 연계시키는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를 주장한다.

이제 촛불도 이런 어소시에이션의 이념에 따라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넘어 자급과 자치의 삶을 강화시킬 대안경제를 구상하고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며 타자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다루는 상호성의 체계를 구성하면 어떨까? 이미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러 생활협동조합과 지역화폐의 실험은, 지역의 풀뿌리공동체의 실험들은 그런 맹아를 품고 있으니 전혀 허황된 얘기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국가주의 틀에 너무 오랫동안 사로잡혀 왔기 때문에 외부로 운동을 확장하고 글로벌 커뮤니티, 글로벌 어소시에이션을 구상하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어쨌거나 내부를 단단하게 다지고 외부와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자세가 갖춰진다면 촛불의 힘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다중의 능동적인 저항과 자본=네이션=국가를 대체하는 어소시에이션의 이념은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이제 꿈을 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그 삶을 살아야 한다.

 

땅에 뿌리내리기

 

김종철은 『땅의 옹호: 공생공락의 삶을 위하여』(녹색평론사, 2008)에서 공생공락의 삶을 강조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대안의 삶을 사는 건 특별한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요한 건 사안을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태의 핵심을 직시하고, 우리가 정말 지향해야 할 ‘선진사회’란 대체 무엇이며,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근원적으로 사색할 줄 아는 비판적 능력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능력을 회복한다면 우리는 일상 자체를 바꿀 수 있다.

그런데 네그리나 하트, 고진과 달리 김종철은 그런 일상적인 변화 속에서 땅과 농민의 존재를 강조한다. 좋은 세상이란 스스로 밥을 차려먹고 스스로 결정하는 세상이고, 그런 세상의 가장 바탕이 농경문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인간다운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옹호하거나 옹호하려고 하는 가치들은 본질적으로 거의 예외 없이 농경문화라는 근본 토양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 평등한 관계와 민주주의에 대한 강렬한 욕구, 노동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의식, 개인적 자율성, 자치와 자립, 비폭력주의, 협동과 연대, 상호부조와 보살핌 등등, 아무리 인간정신이 경멸을 당하는 짐승스러운 상화에서도 우리가 끝끝내 옹호하고자 하는 이러한 윤리적 덕목들은, 따지고 보면,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이후 형성되고 확립되어온 마을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싹트고 강화되어온 가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고진처럼 NAM이라는 어소시에이션을 새롭게 만들고 네그리와 하트처럼 비물질 노동과 조응하는 새로운 운동을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오래되고 소박한 원리이다. 단지 농경이 먹거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농경문화는 일 만년 이상 인류가 생활해온 삶의 방식이고, 농민들의 삶은 그 자체가 서로 보살피고 협동하는 관계를 구성하고 공동체를 유지해 왔다. 농촌공동체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버리지 않고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개인이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왔다. 농업을 산업의 하나로 보고 부가가치만을 논하는 시대에 김종철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며 땅을 옹호한다.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자본이나 국가의 압력에 시달리지 않고 미래를 구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와의 연대도 마찬가지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념을 대지 않아도 ‘대동(大同)세상’, 즉 “사람들이 밥을 같이 먹는 세상, 즉 한 식구로 사는 세상”이면 전 세계의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다. “혈연, 지연, 부족, 인종, 종파,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따위를 따지지 않고 그냥 세상 사람들이 같이 밥을 먹는 세상”, 사람을 가리지 않고 밥을 함께 먹는 세상, 그것이 바로 대안사회이다.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다.

더구나 이제는 우리의 욕망을 그대로 유지한 채 후손들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일찍이 간디는 “지구는 모든 사람의 기본욕구를 위해서는 풍요로운 곳이지만,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곳”이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장기적인 지속성의 토대 위에서 차별없이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 대한 비전”이 필요하고 그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농업중심의 순환적 생활방식에 토대를 둔 사회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척결해야 할 것은 세계의 ‘낙후된’ 사회의 가난이 아니라, 세계의 ‘선진’ 사회의 풍요로움”이라는 말은 언제나 풍요로움과 선진화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농촌공동체에 바탕을 둔 생태적이고 소박한 순환사회만이 우리 세대만이 아니라 미래세대의 대안적인 삶도 보장할 수 있다.

물론 자본과 국가는 끊임없이 이런 대안을 거부하며 우리의 삶을 압박할 것이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충돌, 침략은 우리 삶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저들의 계략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런 침략은 “지배자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지 결코 민중과 민중 사이의 대결일 수는 없다는 가장 근본적이되 흔히 간과되고 있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과 국가의 싸움에 휘말리지 말고 우리의 삶을 꾸준히 살고 대안을 실현하면 된다.

우에하라가 또 다른 삶을 찾아 떠나면서 지로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그래,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살자. 그러면 언제든 새로운 관계를 만날 수 있다. 김종철의 말처럼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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