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을 달궜던 촛불은 잦아들고, 이명박 정권은 그 남은 불씨를 없애느라 여념이 없다. 이명박 정권은 아고라의 논객들을 구속했고 조중동 광고중단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했으며 안티이명박을 외치는 카페의 운영진들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러면서 헌법이 보장하는 ‘결사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무의미한 권리목록으로 변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위반하고 사법부의 재판에까지 개입해서 촛불집회 참여자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 미디어의 힘을 깨달았는지 통신비밀보호법, 저작권법, 정보통신망법 등을 총동원해서 ‘표현의 자유’에 족쇄를 채우려 하고 있다. 대중매체의 상황도 비슷하다. 정부는 방송통신위원회를 앞세워 YTN과 KBS를 장악하고 MBC로 그 칼끝을 겨누며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는 ‘언론의 자유’마저 짓밟고 있다.
이런 정부에 맞서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상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용산재개발과 관련해 5명의 애꿎은 생명을 앗아갔으면서도 정부는 사과는커녕 관련된 시민사회단체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는 지역토호의 중심세력인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한국자유총연맹과 손을 잡고 ‘3대 신국민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옛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자리를 잡아야 할 시기에 우리는 낡은 것의 부활을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2008년의 전복적인 촛불은 호된 탄압을 받으며 2009년을 보내고 있고, 1년을 10년처럼 보내는 피로감은 올 해도 여전할 듯하다. 양극화를 비롯한 경제위기와 식량, 에너지 위기 등 온갖 위기가 누적되어 온전히 삶을 지키기조차 힘들고 희망적인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여러 지식인들이 이런저런 전망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2008년 거리의 전복이 기존의 모든 권위에 물음표를 붙였기 때문에 그 전망은 외로운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촛불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I. 대의민주주의는 웃음을 바라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사람이 힘에 눌리거나 설득을 당하지 않고 무조건 복종을 받아들일 때에만 권위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를 때리거나 아이와 논쟁을 벌이는 것은 권위의 상실을 불러온다. 왜냐하면 아이를 때리는 순간 부모는 권위가 아니라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고, 아이와 논쟁하는 것은 아이와 부모가 동등하다는 점을 뜻하기에 권위가 서지 않는다. 권위는 자신을 존경하는 곳에서만 확립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권위의 가장 강력한 적은 경멸이고 상대를 경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U.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듯, 권위는 웃음을 철저하게 금지한다.
2008년 촛불집회의 파괴력은 단순히 시민들이 정부의 쇠고기수입정책을 직접 반대했다는 점, 그리고 10대 청소년에서 유모차 부대까지 새로운 정치주체들이 등장했다는 점에만 있지 않았다. 촛불집회의 힘은 기존의 권위를 비웃으며 그것을 해체시켰다는 점에도 있었다. 청소년들이 권력의 핵심인 대통령을 쥐박이라 부르며 비웃었고, 아고라 논객들은 정부의 정책을 비웃었다. 카메라와 노트북을 든 누리꾼들은 신문이나 방송의 권위를 비웃었고, 전경차를 끌어내던 시민들의 밧줄이나 닭장투어, 국민토성은 경찰의 권위를 비웃었다. 아고라의 깃발은 사회운동단체들의 깃발을 비웃었고, 내가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겠다는 시민들의 결심은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비웃었다.
웃음의 전복적인 힘은 대표나 전문가들의 권위에 의지하는 대의민주주의 질서를 헝클어버렸다. 대의민주주의는 명성이나 돈, 학위를 가진 대표가 선거를 통해 가진 것 없는 유권자의 동의를 얻어 지배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같은 대표는 ‘무지한’ 유권자의 통제를 받지 않고 그들의 동의만을 구한다. 다음 선거에 유권자는 다른 대표를 뽑을 수도 있지만 그 자신이 직접 대표로 나서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를 정치인들의 손에, 경제를 기업인들의 손에, 학문을 지식인들의 손에 맡기고 시민이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대의민주주의의 충고는 촛불집회에서 그 힘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촛불 이후 시민들은 대의민주주의로 다시 돌아가거나 대의민주주의의 틀에 갇힐 수 없었다.
그러자 대의민주주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거리의 웃음을 금지하려 한다. 권력이 평범한 시민과 자신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가장 단순한 방식은 공권력을 폭력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시민을 구속하거나 폭행해서 자신을 비웃는 대가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깨닫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웃음의 힘이 배가 되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광장을 없앤다.
그리고 웃음의 전복적인 힘을 없애는 더욱더 근본적인 방법은 그 자신도 웃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복적인 힘을 가진 웃음이라도 그것이 상투화되면 웃음은 그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권력은 대의민주주의를 비웃는 웃음을 따라서 그 자신도 대의민주주의를 비웃기 시작한다. 권력이 스스로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절차마저 무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다시금 대의민주주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와 관련해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M. Kundera)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준다. 세계의 합리적인 의미를 부정하는 악마가 질서를 비웃는 신무기인 웃음을 만들어내자 천사는 그 웃음소리를 듣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어떤 것으로도 웃음의 악마적인 힘에 저항할 수 없자 천사는 악마의 전략을 따라 같이 웃기 시작했다. 악마가 웃음에 사물의 부조리를 담았다면, 천사는 웃음에 이 땅의 모든 것이 올바르고 질서를 유지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선다하는 의미를 담았다. 그래서 웃음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대중의 전복적인 웃음을 변질시키는 천사의 웃음은 기득권층이 변화를 가로막기 위해 자신의 힘을 ‘총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서구에서 68혁명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사상가 마르쿠제(H. Marcuse)는 저항이 있다 한들 기득권 체제가 바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체제가 반(反)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쿠제는 기성사회가 가장 자유로운 상상력마저도 체계적으로 남용하면서 우리 현실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왜냐하면 기성체제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자신의 상대방에게 폭력의 딱지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체제의 적은 깨끗하게 정리되어야 할 불결한 존재인 빨갱이, 좌파, 이주노동자 등의 구체적인 인격으로 나타나고, 공권력은 유색인종이나 히피, 급진적인 지식인들에게 폭력을 집중시킨다. 이런 공격성의 증가와 함께 대중매체는 사실적인 보고를 해설이나 평가와, 정보를 선전과 뒤섞어 진리를 혼동시킨다(정보화 사회는 이런 혼동의 속도를 더욱더 빠르게 한다). 그래서 이제는 정보의 독점만이 정보의 남발 혹은 왜곡이 더욱더 큰 문제를 낳는다. 이런 분석을 통해 마르쿠제는 대항운동이 권력이 강제하는 법적․초법적인 억압과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조직의 결여” 때문에 위기를 겪으리라 예상한 바 있다.
지금 우리 현실도 그리 다르지 않다. 웃음은 대의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지만 대의민주주의는 그 웃음을 왜곡시켜 다시금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 자각한 시민들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다. 웃음의 힘은 강하지만 대의민주주의의 힘 또한 쉽게 무너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그렇다면 웃음을 넘어선 또 다른 힘이 필요한 걸까?
II. 촛불집회는 카니발이었나?
2008년 촛불집회의 경험은 참여한 시민들에게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만이 아니라 즐거움도 줬다. 그런 새로운 시위문화를 주목하면서 여러 연구들이 촛불집회와 카니발을 비교했다. 분명 촛불집회는 “삶 자체가 놀이를 하는 것이고, 이 놀이는 잠시 삶 자체가 되는 것”, “웃음의 원리 속에서 구성된 민중들의 제2의 삶이며, 민중들의 축제적 삶”인 카니발과 많이 닮았다. 특히 카니발의 웃음은 양면적 가치를 가진다는 점에서, 즉 “유쾌해하기도 하고 환호작약하기도 하며 동시에 조소적이기도 하고 비웃기도 하는데, 부정하기도 하고 동시에 긍정하기도 하며, 매장되기도 하며 부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체제의 정형화된 웃음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만들 수도 있다.
러시아의 사상가 바흐찐(M. Bakhtin)이 주목했던 카니발은 일상생활의 규범과 금지들을 넘어서 새로운 의사소통과 만남의 형식을 만든다. 공식적인 진리와 지성의 엄숙함을 조롱하고 비웃는 카니발은 그로테스크한 광기를 표현하는 민중의 공론장, 민중이 벌이는 축제이다.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 몸과 마음으로 우리를 구성하는 “카니발은 대화와 공동체의 의식이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함께 참여케 함으로써 공동생활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폭력적 파괴의 형태인 혁명과 달리 카니발은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며 반항의 유쾌한 몸짓이다.” 웃음을 배제하는 혁명과 달리 카니발은 반항과 저항에 소통과 즐거움을 더한다.
그런데 촛불집회가 바흐찐이 말했던 카니발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카니발은 모든 위계질서를 파괴하며 군중을 “민중의 방식으로 조직화된 전체로서의 민중”으로 묶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 카니발의 과정에서 민중은 “그 몸의 육체적 접촉까지도 일정한 의미”를 갖고 “개인은 자신이 집단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분임을, 민중의 거대한 몸의 한 기관임을” 느낄 정도이다. 심지어 카니발은 모든 계급과 연령을 동등하게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한국의 촛불집회는 기존의 권위와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의 성인/남성 중심의 위계와 계급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청소년과 여성들은 점점 운동의 뒷전으로 밀려났고, 촛불집회를 계급의 시선으로 재단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촛불집회가 이런 위계질서와 계급적인 균열들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참여한 주체들은 개별적인 자각을 했을지언정 집단적인 자기변형을 경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용만이 아니라 그 형식을 본다면 촛불집회는 카니발과 다른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촛불집회는 인터넷이라는 개별화된 시공간을 매개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커넥터(connector)나 노드(node), 허브(hub)라는 인터넷 형식은 사람들을 하나의 민중이 아니라 사회화된 개인으로 만들었다. 이런 개인들은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서만 집단적인 흐름에 동참했다.
또한 촛불문화제나 촛불집회가 촛불산책이나 명동무한도전×2와 같은 다른 형태로 이어지며 전환되기는 했지만 이명박 정권이 물러날 것을 외치는 촛불집회의 함성은 보편적인 세계관에 도전하는 근본적인 웃음을 만들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대의민주주의의 균열선과 개별성, 세계관을 넘어설 수 있는 카니발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100일을 넘기며 진행되었던 촛불집회는 일상생활과 분리되어 있었기에 그 역동성을 확장시킬 수 없었다. ‘생활정치’라는 개념이 주장되기는 했지만 그 개념 역시 일상과 분리된 공허한 메아리로 그쳤다. 일상과 분리될 경우 웃음과 카니발의 전복적인 힘은 신데렐라의 무도회처럼 12시를 넘기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일상과 분리되지 않은 전복의 힘이 필요하다.
III. 일상을 전복하자!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밝히기도 했던 미국의 빈민운동가 사울 알린스키(S. Alinsky)는 생활 속의 변화를 추구했다. 왜냐하면 세상을 바꾸려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시작해야 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수동적인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알린스키는 기존 질서를 무조건 부정하지 말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며 때로는 넘어서는 다양한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알린스키는 재미있고 유쾌한 여러 가지 운동을 고안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자면, 빈민지역을 조직하려는 조직가는 이런 물음을 던지며 사람들을 만난다.
조직가: 저 빈민가 건물에서 살고 있습니까?
답변: 예. 그런데요?
조직가: 도대체 저기에서 왜 살지요?
답변: 무슨 말이오. 저기에서 무엇 때문에 살다니? 그럼 어디에 가서 살란 말이오? 나는 생활보호자요.
조직가: 아아, 그러면 저기에서 집세를 내고 있겠군요?
답변: 이봐요, 장난치는 거요? 웃기는군! 어디 돈 안 내고 살 수 있는 데가 있소?
조직가: 음, 저곳은 쥐나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곳처럼 보이는데요.
답변: 당연하지요.
조직가: 집주인에게 무슨 조치를 해 달라고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답변: 집주인에게 무언가 해 달라고 해 보았느냐고! 그게 싫으면 당장 나가. 집주인은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거요.
조직가: 집세를 내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답변: 십 분 안에 나를 내쫓을 거요.
조직가: 음, 저 건물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집세를 내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답변: 글쎄, 쫓아내기 시작하겠죠.……어어, 알다시피 모두를 쫓아내려면 힘이 들겠죠, 그렇지 않을까요?
조직가: 예, 아마 그렇겠죠.
답변: 이봐요, 당신, 뭔가 있는 모양인데. 좋소. 당신, 내 친구들 몇 사람 만나보시겠소. 한 잔 합시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알린스키는 미국 은행이 가난한 흑인청년들에게 대출을 거부하자 흑인청년들에게 매일 잔돈을 나눠주고 은행에 가서 예금을 하게 했다. 아무리 잔돈이라도 예금을 하겠다는 것을 막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수십 명의 흑인들이 은행 창구 앞에 서있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다른 고객들이 거래은행을 바꾸기 시작했다. 결국 그 은행은 흑인청년들에게 돈을 대출해야 했다. 그리고 백인 엘리트 계층이 자신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알린스키는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 티켓 200장 정도를 사서 흑인들에게 나눠준 뒤 그들이 배불리 식사를 하고 공연장에 가서 방귀를 뀌며 위협하는 전술을 쓰기도 했다. 또한 1971년에 일본을 방문한 알린스키는 재일동포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고 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집에서 쥐를 다 잡아서 차에다 싣고 도쿄의 긴자 거리에 가서 다 풀어 놓으시오. 거리의 잘난 사람들이 놀라면 ‘뭐 그렇게들 놀라시오. 우리는 이들과 같이 사는 데요’ 하시오”
알린스키가 이런 기발한 방법들을 쓴 것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였지만 평소에 유머감각을 강조했던 그의 철학 탓도 있었다. 알린스키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활동가들이 유머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머감각을 가져야 “확신을 가지지 않고 자유롭고 편견 없는 마음으로 탐구하며 독단적 교리를 혐오”할 수 있고 “그가 모순을 인지하고 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힘 있는 무기는 풍자와 조롱”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일본의 궁상스러운 청년 마쓰모토 하지메(松本哉)도 알린스키처럼 일상 속의 변화를 추구한다. 만국의 노동자가 아니라 만국의 가난뱅이여 단결하라, 라고 외치는 하지메는 가난뱅이를 등쳐먹는 자본주의 경제에 맞서는 방법이 재활용 가게를 만들고 빈집을 점거하며 지역에 공공공간을 확보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새로이 맺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백수청년들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쓸모없는 물건을 모으거나 동네회의에 참여하며 자신이 사는 동네를 ‘양산박’으로 만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하지메는 이렇게 얘기한다. “매일 저녁,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생중계하고 이웃의 말뼈다귀 같은 놈들을 모아 술을 마시다 보니까, 혼돈과 에너지가 넘치는 가게가 되었다.”
도심지를 불바다로 만들자는 과격한 방을 붙이고 난 뒤 길거리에 모여 숯불로 찌개를 끓여 술을 마시고, 집회신고를 낸 뒤에 아무도 참여하지 않아서 경찰을 ‘바람맞히기 데모’를 열며, 길목 좋은 곳에서 데모를 하기 위해 지방선거 후보자로 나서는 하지메의 행동은 단지 기행으로 그치지 않는 전복의 기운을 품고 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하지메는 일상적인 삶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이거다. 따분한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가 “아이고, 이런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3년만 다니고 그만둬야지, 그때는 자유롭게 살아가야지”하는 놈치고 진짜 회사를 그만 두고 자유롭게 사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안정감 위주로 무리도 안 하는 대신, 하고 싶은 일도 못한다면 해방감 있는 세상을 맛볼 수 없다.”
다른 시공간을 살았지만 알린스키와 하지메는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기존의 룰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동을 당장 시작하라. 그러면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다.
IV. 스스로 웃게 하라!
루쉰(魯迅)이 『아Q정전』에서 주장했듯이, 대중이 패배주의적인 ‘정신승리법’을 버리고 자신의 상황에 눈을 뜰 때에만 웃음은 전복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고통을 참으며 현실을 똑바로 보는 법을 익혀야 한다. 변화는 새로운 감성, 새로운 공감에 바탕을 둔 비판적인 인식을 회복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 힘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촛불집회의 결과가 어찌되었건 사람들은 정치행위에 참여할 때 느끼는 즐거움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자신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은 일상 속의 다양한 실천을 통해 새로운 감성, 새로운 이성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
모든 사건은 언제나 진행 중이기에 그 방향을 미리 점칠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새로운 감성과 이성을 가진 새로운 주체가 등장할 때에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가로막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말하고 웃게 할 때에만 민주주의는 그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활용하건 부정하건, 새로운 전술은 현실의 조건을 따라야 하지만 한 가지 전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누구를 대변하려 하지 말고 우리들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웃자!
그리고 때때로 민주주의가 고통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 고통과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뭘까? 그것이 바로 웃음이다. 영국의 작가 로렌스(D. H. Lawrence)가 ‘제대로 된 혁명’에서 노래했듯이,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