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글을 발표할 자리가 있어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노무현이 자살했대요'라고 말하는 다른 분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농담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지만 말을 하는 분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며 이게 현실이구나 실감했다.
먼저, 그토록 싫어했지만 목숨을 버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내세에서 그가 행복한 삶을 누리길 빌고 많은 존경을 받았으면 한다.

어제 저녁 술자리에서도 화제는 노무현의 죽음이었다.
황석영이 최근 이명박을 따라다니며 벌인 코미디는 화제에 오르지도 못했다.
대중이 부여한 명예를 마치 개인의 소유물인양 권력에 빌붙어 팔아넘긴 행태는 어떠한 비난을 받아도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은 한국 현대사만큼 파란만장했고 그가 남긴 성공과 저지른 오류 모두가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그 평가가 현실권력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차단했고, 그의 유서처럼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을 책임졌다는 점에서 그의 결단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특히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수를 던짐으로써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정치가'임을 증명한 셈이다.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당당히 자기 이름으로 한국 현대 정치인의 반열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그는 어설프게 박정희 흉내나 내는 이명박이라는 사람보다 자신이 훨씬 탁월한 정치인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노무현이 남긴 유서 역시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무게를 남겼다.
황석영이라는 작가가 '구라'를 남발하고 있을 때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은 자기 그릇을 보여줄만한 '명작'을 남긴 셈이다.

그런데 나는 노무현의 자살 소식을 접하며 문득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에 좌절하여 자살하는 한 화가의 이야기이다.
평론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보며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라고 말했고, 그녀는 깊이를 채우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 결국 삶을 마감한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었고, 또 그런 만큼 그가 실패를 거듭할 때마다 많은 실망을 했다.
사실 나는 그가 당선되었을 때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즐거웠다. 한국에서 선거라는 것이 이렇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허나 그것 뿐이었다.
그가 당선되어 한국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리라 나는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혁명가가 아니라 대통령이었으니까. 대통령직이라는 권력이 사회를 바꾸리라는 기대를 나는 버린지 오래되었으니까.

아마 당분간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이라는 한 인물에 관해 얘기를 나눌 것이다.
사람의 죽음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안타까움이 지나쳐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대통령직에 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몇몇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몇 가지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부안 방폐장, 대추리, 파병, 한미FTA같은 사건들은 죽음이라는 안타까운 사실에도 그를 찬양할 수 없게 한다(그 모든 사건들이 한 개인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깊이에의 강요'에서 화가가 자살하자 깊이를 강요했던 그 평론가는 이런 글을 남겼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 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런 비평은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고통과 충격에 시달릴 유족들에게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수많은 시민들에게도 평안함이 다시 찾기를...
 

지난 4월 29일은 용산참사 100일째를 맞이하는 날이었다. 상황이 어떠했건 5명의 주민과 1명의 경찰이 무리한 진압계획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사업비만 28조원에 달하는 큰 사업에, 역세권 개발을 통해 수조원의 개발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대기업의 욕심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 욕심에 빌붙은 용역회사와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는 정부의 욕심은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켰다. 욕심이 대화를 가로막은 상황에서 용산참사는 한국사회의 다른 개발사업들이 그렇듯이 ‘예고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건만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있다. 잠깐 들른 용산참사의 현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참사가 일어난 건물에는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경계를 섰고, 뒷건물인 촛불미디어센터 레아에는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용산 유가족과 범대위 대표단은 사건현장에서 노숙농성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어떤 해결방안이나 소통의 지점 없이 농성은 22일을 넘기고 있고, 순천향병원에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계속 안치되어 있다.


물론 그동안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건 아니다. 용산 범대위의 김태연 상황실장이 구속되었고, 박래군 공동대책위원장은 사전구속영장을 받았다.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군포연쇄살인사건을 활용해 용산사건을 무마하라는 이메일을 경찰청 홍보담당관에게 보냈다. 용산제 4구역 재개발조합은 유가족과 전철연이 불법점거, 철거방해를 하고 있다며 8억 7천만원 상당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국민참여재판은 무산되었고, 변호인단은 검찰이 수사기록의 일부를 공개하지 않자 재판에 불참했다.


이명박 정부가 정말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정부라면 이런 극단적인 대립을 해소할 방안을 스스로 마련해야 옳다. 그리고 용산참사를 가져온 원인인 일방적인 재개발정책을, 거주민에게 불리한 개발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옳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전혀 다른 쪽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용산참사를 불러온 제4구역만이 아니라 제 2, 3구역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재개발정책이 강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타운으로 지정된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재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 세입자나 거주민들이 참여할 방법이나 재개발조합을 민주화시킬 방법, 폭력적인 철거를 막을 방법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


집이 생활의 터전보다 재테크의 공간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 용산참사는 빨리 잊고 싶은 기억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상태라면 용산참사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앞으로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수 있는 한국사회의 미래이다. 그런 점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지은 조세희 작가는 “곤봉이나 군대의 총만이 폭력은 아니다. 아이가 배고파서 울 때 울음소리를 그치게 하지 않고 놔두는 것도 폭력이다. 어마어마한 폭력이 가해졌는데도 그냥 지나간다면 죄를 짓는 것”이라며 시민들이 용산참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관련된 사람들을 힘으로 몰아붙여 사건을 덮으려 하고 있다. 이미 철거가 진행된 폐허의 자리에 번지르르한 건물이 들어서면 시민들이 이 사건을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이라 정부는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과거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남을 짓밟아 성공한 사람, 멀쩡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사람들이 두 다리 쭉 펴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런 사람들이 성공의 모델로 보이지만, 그런 사회에서는 힘과 돈을 가진 사람 외에는 어느 누구도 맘 편히 살 수 없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편해지고 이 사회가 제 갈 길을 찾으려면 용산참사라는 사건을 넘어서야 한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혼이 편히 쉬고, 병원에 갇힌 사람들이 편히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세상, 돈을 내세운 개발이 없는 세상이 되어야 우리는 용산참사라는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한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2008년을 달궜던 촛불은 잦아들고, 이명박 정권은 그 남은 불씨를 없애느라 여념이 없다. 이명박 정권은 아고라의 논객들을 구속했고 조중동 광고중단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했으며 안티이명박을 외치는 카페의 운영진들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러면서 헌법이 보장하는 ‘결사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무의미한 권리목록으로 변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위반하고 사법부의 재판에까지 개입해서 촛불집회 참여자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 미디어의 힘을 깨달았는지 통신비밀보호법, 저작권법, 정보통신망법 등을 총동원해서 ‘표현의 자유’에 족쇄를 채우려 하고 있다. 대중매체의 상황도 비슷하다. 정부는 방송통신위원회를 앞세워 YTN과 KBS를 장악하고 MBC로 그 칼끝을 겨누며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는 ‘언론의 자유’마저 짓밟고 있다.

이런 정부에 맞서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상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용산재개발과 관련해 5명의 애꿎은 생명을 앗아갔으면서도 정부는 사과는커녕 관련된 시민사회단체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는 지역토호의 중심세력인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한국자유총연맹과 손을 잡고 ‘3대 신국민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옛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자리를 잡아야 할 시기에 우리는 낡은 것의 부활을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2008년의 전복적인 촛불은 호된 탄압을 받으며 2009년을 보내고 있고, 1년을 10년처럼 보내는 피로감은 올 해도 여전할 듯하다. 양극화를 비롯한 경제위기와 식량, 에너지 위기 등 온갖 위기가 누적되어 온전히 삶을 지키기조차 힘들고 희망적인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여러 지식인들이 이런저런 전망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2008년 거리의 전복이 기존의 모든 권위에 물음표를 붙였기 때문에 그 전망은 외로운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촛불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I. 대의민주주의는 웃음을 바라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사람이 힘에 눌리거나 설득을 당하지 않고 무조건 복종을 받아들일 때에만 권위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를 때리거나 아이와 논쟁을 벌이는 것은 권위의 상실을 불러온다. 왜냐하면 아이를 때리는 순간 부모는 권위가 아니라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고, 아이와 논쟁하는 것은 아이와 부모가 동등하다는 점을 뜻하기에 권위가 서지 않는다. 권위는 자신을 존경하는 곳에서만 확립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권위의 가장 강력한 적은 경멸이고 상대를 경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어버리는 것이다.[각주:1]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U.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듯, 권위는 웃음을 철저하게 금지한다.

2008년 촛불집회의 파괴력은 단순히 시민들이 정부의 쇠고기수입정책을 직접 반대했다는 점, 그리고 10대 청소년에서 유모차 부대까지 새로운 정치주체들이 등장했다는 점에만 있지 않았다. 촛불집회의 힘은 기존의 권위를 비웃으며 그것을 해체시켰다는 점에도 있었다. 청소년들이 권력의 핵심인 대통령을 쥐박이라 부르며 비웃었고, 아고라 논객들은 정부의 정책을 비웃었다. 카메라와 노트북을 든 누리꾼들은 신문이나 방송의 권위를 비웃었고, 전경차를 끌어내던 시민들의 밧줄이나 닭장투어, 국민토성은 경찰의 권위를 비웃었다. 아고라의 깃발은 사회운동단체들의 깃발을 비웃었고, 내가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겠다는 시민들의 결심은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비웃었다.

웃음의 전복적인 힘은 대표나 전문가들의 권위에 의지하는 대의민주주의 질서를 헝클어버렸다. 대의민주주의는 명성이나 돈, 학위를 가진 대표가 선거를 통해 가진 것 없는 유권자의 동의를 얻어 지배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각주:2]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같은 대표는 ‘무지한’ 유권자의 통제를 받지 않고 그들의 동의만을 구한다. 다음 선거에 유권자는 다른 대표를 뽑을 수도 있지만 그 자신이 직접 대표로 나서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를 정치인들의 손에, 경제를 기업인들의 손에, 학문을 지식인들의 손에 맡기고 시민이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대의민주주의의 충고는 촛불집회에서 그 힘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촛불 이후 시민들은 대의민주주의로 다시 돌아가거나 대의민주주의의 틀에 갇힐 수 없었다.

그러자 대의민주주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거리의 웃음을 금지하려 한다. 권력이 평범한 시민과 자신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가장 단순한 방식은 공권력을 폭력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시민을 구속하거나 폭행해서 자신을 비웃는 대가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깨닫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웃음의 힘이 배가 되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광장을 없앤다.

그리고 웃음의 전복적인 힘을 없애는 더욱더 근본적인 방법은 그 자신도 웃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복적인 힘을 가진 웃음이라도 그것이 상투화되면 웃음은 그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권력은 대의민주주의를 비웃는 웃음을 따라서 그 자신도 대의민주주의를 비웃기 시작한다. 권력이 스스로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절차마저 무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다시금 대의민주주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와 관련해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M. Kundera)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준다. 세계의 합리적인 의미를 부정하는 악마가 질서를 비웃는 신무기인 웃음을 만들어내자 천사는 그 웃음소리를 듣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어떤 것으로도 웃음의 악마적인 힘에 저항할 수 없자 천사는 악마의 전략을 따라 같이 웃기 시작했다. 악마가 웃음에 사물의 부조리를 담았다면, 천사는 웃음에 이 땅의 모든 것이 올바르고 질서를 유지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선다하는 의미를 담았다. 그래서 웃음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각주:3]

이렇게 대중의 전복적인 웃음을 변질시키는 천사의 웃음은 기득권층이 변화를 가로막기 위해 자신의 힘을 ‘총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서구에서 68혁명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사상가 마르쿠제(H. Marcuse)는 저항이 있다 한들 기득권 체제가 바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체제가 반(反)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쿠제는 기성사회가 가장 자유로운 상상력마저도 체계적으로 남용하면서 우리 현실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각주:4] 왜냐하면 기성체제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자신의 상대방에게 폭력의 딱지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체제의 적은 깨끗하게 정리되어야 할 불결한 존재인 빨갱이, 좌파, 이주노동자 등의 구체적인 인격으로 나타나고, 공권력은 유색인종이나 히피, 급진적인 지식인들에게 폭력을 집중시킨다. 이런 공격성의 증가와 함께 대중매체는 사실적인 보고를 해설이나 평가와, 정보를 선전과 뒤섞어 진리를 혼동시킨다(정보화 사회는 이런 혼동의 속도를 더욱더 빠르게 한다). 그래서 이제는 정보의 독점만이 정보의 남발 혹은 왜곡이 더욱더 큰 문제를 낳는다. 이런 분석을 통해 마르쿠제는 대항운동이 권력이 강제하는 법적․초법적인 억압과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조직의 결여” 때문에 위기를 겪으리라 예상한 바 있다.[각주:5]

지금 우리 현실도 그리 다르지 않다. 웃음은 대의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지만 대의민주주의는 그 웃음을 왜곡시켜 다시금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 자각한 시민들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다. 웃음의 힘은 강하지만 대의민주주의의 힘 또한 쉽게 무너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그렇다면 웃음을 넘어선 또 다른 힘이 필요한 걸까?

 

 

II. 촛불집회는 카니발이었나?

 

2008년 촛불집회의 경험은 참여한 시민들에게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만이 아니라 즐거움도 줬다.[각주:6] 그런 새로운 시위문화를 주목하면서 여러 연구들이 촛불집회와 카니발을 비교했다.[각주:7] 분명 촛불집회는 “삶 자체가 놀이를 하는 것이고, 이 놀이는 잠시 삶 자체가 되는 것”, “웃음의 원리 속에서 구성된 민중들의 제2의 삶이며, 민중들의 축제적 삶”[각주:8]인 카니발과 많이 닮았다. 특히 카니발의 웃음은 양면적 가치를 가진다는 점에서, 즉 “유쾌해하기도 하고 환호작약하기도 하며 동시에 조소적이기도 하고 비웃기도 하는데, 부정하기도 하고 동시에 긍정하기도 하며, 매장되기도 하며 부활하기도 한다”[각주:9]는 점에서 체제의 정형화된 웃음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만들 수도 있다.

러시아의 사상가 바흐찐(M. Bakhtin)이 주목했던 카니발은 일상생활의 규범과 금지들을 넘어서 새로운 의사소통과 만남의 형식을 만든다. 공식적인 진리와 지성의 엄숙함을 조롱하고 비웃는 카니발은 그로테스크한 광기를 표현하는 민중의 공론장, 민중이 벌이는 축제이다.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 몸과 마음으로 우리를 구성하는 “카니발은 대화와 공동체의 의식이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함께 참여케 함으로써 공동생활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폭력적 파괴의 형태인 혁명과 달리 카니발은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며 반항의 유쾌한 몸짓이다.”[각주:10] 웃음을 배제하는 혁명과 달리 카니발은 반항과 저항에 소통과 즐거움을 더한다.

그런데 촛불집회가 바흐찐이 말했던 카니발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카니발은 모든 위계질서를 파괴하며 군중을 “민중의 방식으로 조직화된 전체로서의 민중”으로 묶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 카니발의 과정에서 민중은 “그 몸의 육체적 접촉까지도 일정한 의미”를 갖고 “개인은 자신이 집단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분임을, 민중의 거대한 몸의 한 기관임을” 느낄 정도이다.[각주:11] 심지어 카니발은 모든 계급과 연령을 동등하게 바라보게 한다.[각주:12]

그러나 한국의 촛불집회는 기존의 권위와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의 성인/남성 중심의 위계와 계급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청소년과 여성들은 점점 운동의 뒷전으로 밀려났고[각주:13], 촛불집회를 계급의 시선으로 재단하려는 시도도 있었다.[각주:14] 촛불집회가 이런 위계질서와 계급적인 균열들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참여한 주체들은 개별적인 자각을 했을지언정 집단적인 자기변형을 경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용만이 아니라 그 형식을 본다면 촛불집회는 카니발과 다른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촛불집회는 인터넷이라는 개별화된 시공간을 매개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커넥터(connector)나 노드(node), 허브(hub)라는 인터넷 형식은 사람들을 하나의 민중이 아니라 사회화된 개인으로 만들었다. 이런 개인들은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서만 집단적인 흐름에 동참했다.

또한 촛불문화제나 촛불집회가 촛불산책이나 명동무한도전×2와 같은 다른 형태로 이어지며 전환되기는 했지만 이명박 정권이 물러날 것을 외치는 촛불집회의 함성은 보편적인 세계관에 도전하는 근본적인 웃음을 만들지도 못했다.[각주:15]

그렇다면 대의민주주의의 균열선과 개별성, 세계관을 넘어설 수 있는 카니발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100일을 넘기며 진행되었던 촛불집회는 일상생활과 분리되어 있었기에 그 역동성을 확장시킬 수 없었다. ‘생활정치’라는 개념이 주장되기는 했지만 그 개념 역시 일상과 분리된 공허한 메아리로 그쳤다. 일상과 분리될 경우 웃음과 카니발의 전복적인 힘은 신데렐라의 무도회처럼 12시를 넘기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일상과 분리되지 않은 전복의 힘이 필요하다.

 

 

III. 일상을 전복하자!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밝히기도 했던 미국의 빈민운동가 사울 알린스키(S. Alinsky)는 생활 속의 변화를 추구했다. 왜냐하면 세상을 바꾸려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시작해야 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수동적인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알린스키는 기존 질서를 무조건 부정하지 말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며 때로는 넘어서는 다양한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각주:16]

실제로 알린스키는 재미있고 유쾌한 여러 가지 운동을 고안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자면, 빈민지역을 조직하려는 조직가는 이런 물음을 던지며 사람들을 만난다.

조직가: 저 빈민가 건물에서 살고 있습니까?

답변: 예. 그런데요?

조직가: 도대체 저기에서 왜 살지요?

답변: 무슨 말이오. 저기에서 무엇 때문에 살다니? 그럼 어디에 가서 살란 말이오? 나는 생활보호자요.

조직가: 아아, 그러면 저기에서 집세를 내고 있겠군요?

답변: 이봐요, 장난치는 거요? 웃기는군! 어디 돈 안 내고 살 수 있는 데가 있소?

조직가: 음, 저곳은 쥐나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곳처럼 보이는데요.

답변: 당연하지요.

조직가: 집주인에게 무슨 조치를 해 달라고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답변: 집주인에게 무언가 해 달라고 해 보았느냐고! 그게 싫으면 당장 나가. 집주인은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거요.

조직가: 집세를 내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답변: 십 분 안에 나를 내쫓을 거요.

조직가: 음, 저 건물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집세를 내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답변: 글쎄, 쫓아내기 시작하겠죠.……어어, 알다시피 모두를 쫓아내려면 힘이 들겠죠, 그렇지 않을까요?

조직가: 예, 아마 그렇겠죠.

답변: 이봐요, 당신, 뭔가 있는 모양인데. 좋소. 당신, 내 친구들 몇 사람 만나보시겠소. 한 잔 합시다.”[각주:17]

또 다른 예도 있다. 알린스키는 미국 은행이 가난한 흑인청년들에게 대출을 거부하자 흑인청년들에게 매일 잔돈을 나눠주고 은행에 가서 예금을 하게 했다. 아무리 잔돈이라도 예금을 하겠다는 것을 막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수십 명의 흑인들이 은행 창구 앞에 서있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다른 고객들이 거래은행을 바꾸기 시작했다. 결국 그 은행은 흑인청년들에게 돈을 대출해야 했다.[각주:18] 그리고 백인 엘리트 계층이 자신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알린스키는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 티켓 200장 정도를 사서 흑인들에게 나눠준 뒤 그들이 배불리 식사를 하고 공연장에 가서 방귀를 뀌며 위협하는 전술을 쓰기도 했다. 또한 1971년에 일본을 방문한 알린스키는 재일동포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고 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집에서 쥐를 다 잡아서 차에다 싣고 도쿄의 긴자 거리에 가서 다 풀어 놓으시오. 거리의 잘난 사람들이 놀라면 ‘뭐 그렇게들 놀라시오. 우리는 이들과 같이 사는 데요’ 하시오”[각주:19]

알린스키가 이런 기발한 방법들을 쓴 것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였지만 평소에 유머감각을 강조했던 그의 철학 탓도 있었다. 알린스키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활동가들이 유머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머감각을 가져야 “확신을 가지지 않고 자유롭고 편견 없는 마음으로 탐구하며 독단적 교리를 혐오”할 수 있고 “그가 모순을 인지하고 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힘 있는 무기는 풍자와 조롱”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각주:20]

일본의 궁상스러운 청년 마쓰모토 하지메(松本哉)도 알린스키처럼 일상 속의 변화를 추구한다. 만국의 노동자가 아니라 만국의 가난뱅이여 단결하라, 라고 외치는 하지메는 가난뱅이를 등쳐먹는 자본주의 경제에 맞서는 방법이 재활용 가게를 만들고 빈집을 점거하며 지역에 공공공간을 확보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새로이 맺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백수청년들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쓸모없는 물건을 모으거나 동네회의에 참여하며 자신이 사는 동네를 ‘양산박’으로 만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하지메는 이렇게 얘기한다. “매일 저녁,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생중계하고 이웃의 말뼈다귀 같은 놈들을 모아 술을 마시다 보니까, 혼돈과 에너지가 넘치는 가게가 되었다.”[각주:21]

도심지를 불바다로 만들자는 과격한 방을 붙이고 난 뒤 길거리에 모여 숯불로 찌개를 끓여 술을 마시고, 집회신고를 낸 뒤에 아무도 참여하지 않아서 경찰을 ‘바람맞히기 데모’를 열며, 길목 좋은 곳에서 데모를 하기 위해 지방선거 후보자로 나서는 하지메의 행동은 단지 기행으로 그치지 않는 전복의 기운을 품고 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하지메는 일상적인 삶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이거다. 따분한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가 “아이고, 이런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3년만 다니고 그만둬야지, 그때는 자유롭게 살아가야지”하는 놈치고 진짜 회사를 그만 두고 자유롭게 사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안정감 위주로 무리도 안 하는 대신, 하고 싶은 일도 못한다면 해방감 있는 세상을 맛볼 수 없다.”[각주:22]

다른 시공간을 살았지만 알린스키와 하지메는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기존의 룰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동을 당장 시작하라. 그러면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다.

 

 

IV. 스스로 웃게 하라!

 

루쉰(魯迅)이 『아Q정전』에서 주장했듯이, 대중이 패배주의적인 ‘정신승리법’을 버리고 자신의 상황에 눈을 뜰 때에만 웃음은 전복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고통을 참으며 현실을 똑바로 보는 법을 익혀야 한다. 변화는 새로운 감성, 새로운 공감에 바탕을 둔 비판적인 인식을 회복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 힘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촛불집회의 결과가 어찌되었건 사람들은 정치행위에 참여할 때 느끼는 즐거움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자신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각주:23] 이런 깨달음은 일상 속의 다양한 실천을 통해 새로운 감성, 새로운 이성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

모든 사건은 언제나 진행 중이기에 그 방향을 미리 점칠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새로운 감성과 이성을 가진 새로운 주체가 등장할 때에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가로막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말하고 웃게 할 때에만 민주주의는 그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활용하건 부정하건, 새로운 전술은 현실의 조건을 따라야 하지만 한 가지 전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누구를 대변하려 하지 말고 우리들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웃자!

그리고 때때로 민주주의가 고통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 고통과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뭘까? 그것이 바로 웃음이다. 영국의 작가 로렌스(D. H. Lawrence)가 ‘제대로 된 혁명’에서 노래했듯이,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1. 한나 아렌트, 김동식 옮김, 『공화국의 위기』, 도서출판 두레, 1979, 165~166쪽. [본문으로]
  2. 미국의 정치학자 마넹(B. Manin)은 전문가 중심의 정치를 불신하는 추첨제도가 선거제도로 바뀐 것에서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을 찾는다. 왜냐하면 추첨제도는 누구나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했는데, 선거는 탁월한 사람들만 권력을 갖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버나드 마넹, 곽준혁 옮김, 『선거는 민주적인가』. 후마니타스, 2004, 61쪽). [본문으로]
  3. 밀란 쿤데라, 정인용 옮김, 『웃음과 망각의 책』, 문학사상사, 1992, 96쪽. [본문으로]
  4. Herbert Marcuse, One-dimensional Man(Boston: Beacon Press, 1964), pp.248~250. [본문으로]
  5. Herbert Marcuse, Counterrevolution and Revolt(Boston: Beacon Press), 1972), p.29 [본문으로]
  6. “조롱과 비웃음은 억압적 권위를 겨냥하는 무기이면서 만인을 유쾌하게 만든다. 촛불집회를 유쾌하게 만든 무수한 패러디는 웃음의 미학과 상상력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민유기, 「폭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2008년 촛불신화의 역사적 의미」, 『실천문학』 2008년 겨울호, 340쪽) [본문으로]
  7. 촛불집회 참여자를 “프랑수아 라블레가 묘사했던 신명난 군중, 통 큰 기괴와 기상천외한 유머를 한 몸에 체현한 미래의 군중”(김상준. 2008. 「대한민국 민주주의 60년을 보는 시각」,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한국사회학회 특별심포지움 발표문, 13~14쪽)으로 보거나 “촛불집회는 바흐찐이 말하는 다음․다성적 카니발(carnival)의 속성을 매우 닮아있으며, 그 주체는 단연코 개인인 동시에 대중인 인․민”(전규찬, 「촛불집회, 민주적․자율적 대중교통의 빅뱅」, 『문화/과학』 2008년 가을호, 116~117쪽)이라 얘기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8. 미하일 바흐찐, 이덕형․최건영 옮김,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아카넷, 2001, 30쪽. [본문으로]
  9. 바흐찐, 앞의 책, 36쪽. [본문으로]
  10. 정화열, 박현모 옮김, 『몸의 정치』, 민음사, 2000, 81쪽. [본문으로]
  11. 바흐찐, 앞의 책, 396쪽. [본문으로]
  12. 바흐찐의 말을 빌린다면, “여기 한 소년은 아버지의 촛불을 불어 끄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Sia ammazzato il signore Padre!(아버지는 죽어버려라!)’ 유쾌하게 아버지에게 죽음을 위협하며 그의 촛불을 끄는 소년의 이 놀라운 카니발적 외침”(바흐찐, 앞의 책, 390쪽) [본문으로]
  13. “촛불진영 내부적으로는 5월 집회초기와 달리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회세력이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10대의 참여가 거대한 촛불 대중에 묻히게 되고 10대의 문제를 의제화하지 못한 데서 나온 평가로도 볼 수 있다.”(이해진, 「촛불집회 10대 참여자들의 참여 경험과 주체 형성」, 『경제와 사회』 2008년 제 80호, 89쪽) [본문으로]
  14. 기존의 사회운동은 하나가 되는 경험보다 어떻게 촛불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것인가만 주로 고민했다. “촛불은 끝내 홈에버 매장 앞으로 오지 않았다. 짬짬이 시간 내서 십여 차례 참석한 촛불집회에서 만난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은 이방인이었다. 정규직 17년차인 나도 소외감을 느끼는데 실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10년 후 광우병을 일으킬 수 있는 쇠고기 수입 반대에는 그렇게도 열정적인 시민들이 당장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선 의외로 차가웠다.…촛불은 아름다웠지만 계급적 문제에 대해선 무력했고 둔감했다.”(이남신, 「아름다운 촛불이 홈에버 매장 앞으로 오지 못한 까닭은」, 『내일을 여는 역사』 2008년 가을호, 148쪽). 촛불집회에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참여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본문으로]
  15. “카니발은(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 말을 쓰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밝힌다) 공식적 세계관의 지배로부터 의식을 해방시켰으며, 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하였다. 두려워하지 않고, 경건함 없이, 완전히 비판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게다가 긍정적으로. 왜냐하면 카니발은 풍부하고 물질적인 세계의 시원과 형성, 변형, 그리고 새롭고 불멸하는 민중의 억누를 수 없는 힘과 영원한 승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바흐찐, 앞의 책, 424쪽) [본문으로]
  16. “나는 나 자신에게 유일하게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었던 대답만을 젊은 급진주의자들에게 해줄 수 있었다. ‘세 가지 중 하나를 하라. 첫째, 가서 통곡의 벽을 쌓고 너 자신을 위로하라. 둘째, 미쳐 버린 후에 폭탄 투척을 시작하라. 하지만 그 방법은 단지 사람을 우파로 돌아서게 만들 뿐이다. 셋째, 교훈을 얻어라. 고향으로 가서 조직화하고, 힘을 모아서 다음 전당대회에서는 너희 자신이 대의원이 되어라.’”(사울 D. 알린스키, 박순성․박지우 옮김,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아르케, 2008, 33쪽) [본문으로]
  17. 알린스키, 앞의 책, 166~167쪽. [본문으로]
  18. 이를 본 따서 국내에서도 알린스키식 운동이 시도되기도 했다. 1999년 11월 7일 이화여대 총학생회 여성위원회는 부부직원 중 여성을 먼저 퇴직시키는 농협의 성차별 정책을 바꾸기 위해 농협중앙회로 몰려가 줄줄이 10원짜리 통장을 만듦으로써 농협의 일상 업무를 마비시키자고 주장하는 공고를 붙였다(이신행, 「사회만들기로서의 주민운동」, 한국도시연구소 편, 『지역주민운동 리포트』, 한국도시연구소, 1999, 33쪽 참조). [본문으로]
  19. 알린스키, 앞의 책, 16쪽. [본문으로]
  20. 알린스키, 앞의 책, 128쪽. [본문으로]
  21. 마쓰모토 하지메, 김경원 옮김, 『가난뱅이의 역습』, 이루, 2009, 71쪽. [본문으로]
  22. 하지메, 앞의 책, 201쪽. [본문으로]
  23. “우리 시대에 새로운 또 다른 경험이 정치라는 게임에 나타났는데, 그것은 행위한다는 것이 즐거운 경험이라는 점이다. 이 세대는 18세기에 ‘공공의 행복(public hapiness)’이라 불리웠던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이들이 뜻하는 ‘공공의 행복’은 인간은 공적 생활에 참여할 때,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만 머무르고 말았을 인간경험의 한 차원을 자신에게 개방하는 것이며 이 차원은 완전한 ‘행복’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의미다.”(아렌트, 앞의 책, 246쪽) [본문으로]

[대안지식연구회]의 정치사회비평에 쓴 글입니다.
충분히 얘기를 다루지는 못했지만 지금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좀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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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재보궐 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예상대로 한나라당의 패배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1명, 진보신당 1명, 무소속 후보 3명이 당선되었고, 경기도 시흥시장도 민주당 후보가 차지했다. 시도의원 선거에서도 서울시 광진구에서 한나라당 후보 1명이 시의원으로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강원도에서 무소속 후보가, 전라남도에서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구시군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1석도 얻지 못했고 민주당이 2석, 민주노동당이 1석, 무소속이 2석을 차지했다.

그 전에 치러진 경기도 교육감 선거까지 고려한다면 집권 여당의 완전한 패배라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약 1년이 지난 뒤에 치러졌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그동안의 정부정책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거 결과만 보면 민심은 이명박 정부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그 점은 계속 떨어지던 투표율이 올라갔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왜 투표에 환멸을 느끼던 유권자들이 의식적으로 투표소를 찾았을까? 투표에 참가하지 않으면 이미 조직화된 표를 가진 여당 후보가 당선될 터이니, 이를 막기 위해 유권자들이 의식적으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정치에 대한 환멸이 참여의 관심으로 변한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된 걸까? 한나라당이 참패를 했으니 정치의 희망이 생긴 걸까?

작년 초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난 뒤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촛불의 실패 또는 패배’를 얘기했다. 제도정치로 이어지지 못하는 촛불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왔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과 촛불의 목소리가 선거로 이어졌으니 이제 진보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걸까?

오히려 선거 이후 이명박 정부는 지난 노동절 집회와 촛불 1주년 기념집회를 무참히 짓밟았다.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221명이 연행되었고, 용산철거민대책회의가 용산에 설치했던 천막도 기습 철거되었다. 선거결과로 드러난 민심에도 이명박 정부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더욱더 철저히 탄압하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지난 5월 2일 법무부와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 장관이 발표한 대국민담화문은 그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 푼의 관광수입도 아쉬운 때입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실날같으나마 도처에서 경제의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 폭력시위로 국력을 낭비할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우리는 지난해 무분별한 시위로 많은 국력을 낭비했습니다. 값비싼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올해에도 이러한 상황이 재발된다면 정부는 부득이 법에 따라 단호히 조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푼의 관광수입도 아쉬우니 시위를 벌이지 말라는 논리가 참으로 터무니없지만, 실제로 연행된 사람들은 48시간을 꼬박 갇혀 있다 석방되었으니 단호한 법의 집행이라 하겠다. 앞으로 정부는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를,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민심을 폭력이라 규정하고 탄압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는 지역토호의 중심세력인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한국자유총연맹과 손을 잡고 ‘3대 신국민운동’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정부는 민심을 따르기는커녕 자신이 민심을 만들고 조작하겠다는 강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점은 과거와 달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대국민담화문에 동참했다는 점에서도 그러난다. 왜냐하면 개정될 통신비밀보호법이나 저작권법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사이버 법치주의’를 실현하고 ‘사이버 민심’을 조작할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와 기득권층은 아예 민심이 형성될 수 있는 장을 없애고 과거처럼 순종하는 국민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미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 및 시위의 자유 등 시민의 온갖 기본권이 위협을 받고 있으니, 이런 흐름은 단지 가능성으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비극은 민심을 거역하는 정부가 이명박 정부만의 특징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권력을 장악한 정부는 언제나 민심을 거역하고 민심을 억누르고 조작해 왔다. 그리고 좌/우를 떠나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그런 과정에 동참하며 이득을 누려왔다. 언제나 민심은 민중의 가슴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통계수치나 지식인들의 전문용어, 정치인들의 공약(空約)으로만 드러나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과거의 정부보다 조금 더 노골적일 뿐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에서 권력을 쥔 자들은 이런 흐름을 계속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재보궐 선거에서 몇 번을 패배해도 3년 반 뒤의 대통령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이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보다 박근혜라는 보수정치인에 대한 지지로 전환되리라 예상하고 있다. 즉 한국의 기득권층은 대표선수만 바꾸면 이권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니 민심 따위가 어찌 무섭겠는가?

그렇다면 한국의 진보는 이런 분위기를 바꾸고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는 민중의 가슴에서 민심을 끌어낼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을까? 촛불 1주년을 기념하는 많은 자리에서도 나는 그런 대안들을 잘 찾을 수 없었다. 진보의 위기는 바로 그 점에 있고, 그런 점에서 위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며칠 전 경기도 시흥시에 사는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무소속 시민후보로 출마한 후보 사무실에서 자원봉사를 하는데, 어처구니 없는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이 시민후보를 지지한다고 공식 선언했는데, 선관위에서 그런 내용을 선거홍보물에 넣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당 대표들이 지지연설하는 것도 금지하겠다는 방침이라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법이다. 

정당이 자체적으로 결의를 해서 자기 후보를 내지 않고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는데, 그 사실을 유권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불법이라니? 이런 한심한 일이 생기고 있는 게, 우리나라의 선거법이고 선거관리의 실상이다.

공직선거법 84조는 전가의 보도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이 시흥시장에 출마한 무소속 최준열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 민정례
시흥시

선관위에서 근거로 들고 있는 법조항은 공직선거법 제84조이다. 이 조항은 "무소속후보자는 특정 정당으로부터의 지지 또는 추천받음을 표방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선관위는 이 조항을 근거로 야3당이 시민후보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표방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무소속으로 출마한 사람이 특정한 정당으로부터 암묵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고 표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취지이다. 예를 들면 선거를 앞두고 정당을 탈당한 후보가 선거운동을 하면서 "사실은 00당은 나를 지지하고 있고, 나는 당선되면 복당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을 문제삼는 조항인 것이다.

따라서 여러 정당이 공식결의를 해서 한 후보를 지지하기로 한 경우를 염두에 둔 조항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번 시흥시장 선거처럼, 정당의 공식 조직에서 결의하여 선거공조 차원에서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은 공직선거법 84조의 입법취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관위의 해석을 납득할 수 없다.

더구나 2007년에 국민중심당에서 선관위에 질의했을 때에, 중앙선관위는 '대통령선거에서 - 정당과 무소속 후보자간에 선거공조를 위하여 후보자를 단일화하는 경우 사퇴한 후보자나 그 정당의 대표자 또는 간부 등이 단일화된 후보자나 그 정당의 선거대책기구의 간부나 구성원 또는 연설원이 되는 것은 공직선거법 제84조에 위반되지 아니할 것임'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번 시흥시장 선거에서는 야3당이 무소속후보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선거홍보물에 넣지도 못하고 하고, 진보정당 당대표가 지지연설을 하는 것도 금지하겠다고 한다.

선관위는 지지를 허락해야 한다

이미 시간적으로 선거홍보물에 야3당의 지지사실을 넣기는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관위는 야3당 당대표자들의 지지연설이라도 허용해야 한다. 정치활동을 하는 정당이 지지를 한다는데, 그것을 표현조차 못하게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자의적인 잣대로 선거법을 해석한다면 선거 자체를 불공정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우리나라 선거판에서 신진세력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기득권 정당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선거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시흥에서 시도하고 있는 노력들이 더욱 가치가 있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이번 4·29 보궐선거를 보면서, 기초지방선거 정당공천제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론적으로야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기초지방선거 정당공천제는 너무 폐해가 크다. 이번에 시흥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도 한나라당, 민주당의 예비후보자들은 공천에 목을 맸다. 민주당의 경우에는 정세균 대표가 참석해서 사무실 개소식을 해 놓고, 그 다음날 후보가 사퇴하고 새로운 후보가 공천을 받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당공천=당선이라는 등식이 깨지지 않는 이상 우리나라 지방자치는 '주민자치'가 아니라 '기득권 정당들의 잔치판'을 벗어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승수 (제주대학교 법대 교수)

경인일보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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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냉소적인 말이 유행했다. 뼈 빠지게 일해 모은 재산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사람들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다른 무엇을 바쳐도 좋다고 믿었다. 경제만 살아난다면 독재자가 출현하건, 생태계가 파괴되건, 기본적인 노동권이 무시되건 상관없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는 경제를 살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게 되었다. 왜 경제를 살려야 할까? 정말 경제만 살아난다면 정말 우리는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어쨌거나 그렇게 모든 걸 바쳤건만 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는 경제 살리기에 대한 믿음을 산산조각내고 있다. 그런 실패는 특정한 정책의 실패나 외부환경의 변화만이 아니라 경제를 잘못 이해한 것에서도 비롯되었다. 원래 경제란 말은 오이코스(oikos), 즉 가계(家計)라는 말에서 나왔다. 쉽게 얘기해 경제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살림살이’를 뜻했다. 가족들이 다른 일을 하는데 지나치거나 궁핍하지 않도록 적절한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가정살림의 지혜이듯, 공동체의 경제는 적절한 규모를 지키며 시민들이 정치나 문화에 관심을 쏟게 하는 지혜를 갖춰야 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의 경제 살리기는 살림의 규모를 키우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려면 삶이 튼튼하게 세계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그동안 우리 삶은 주가와 부동산 거품에 실려 둥둥 떠다녔다. 살림살이는 내실을 다지는 것을 포기하고 거대한 권력이나 자본에 살림을 팔거나 맡기는 식으로 흘러갔다. 그러다보니 우리 삶은 외부환경의 변화에 휘둘리는 근본적인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사실 삶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좋은 방법은 바로 정치이다. 어느 정도의 규모가 적절한 살림인지, 특히 가족이 아니라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결정하는 건 경제가 아니라 정치의 몫이고 민주주의의 몫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힘과 부, 기질이나 문화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어울려 살기 위해 필요한 합의요, 공동체를 튼튼하게 하는 기본조건이다.

우리의 경제 살리기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 그런 기본조건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경제 살리기가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들기는커녕 빈부의 격차를 더욱 늘리고 있고 서로간의 합의를 무시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의 위기가 나의 기회라고 믿는 잘못된 경제적 계산이 함께 하는 정치적 자유를 대체했다. 윤리와 합의를 지키는 것이 어리석은 짓으로 여겨지는 세상,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혼자 많은 부를 챙기더라도 이런 세상에서는 온전히 삶을 유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경제를 살리는 과정은 정치나 민주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 시민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없을 때 그 공동체는 온전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공동체 차원에서 그런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과 동등하게 살아가며 밥을 먹을 수 있는 공동체의 수단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똑같이 교육을 받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며 경쟁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을 만든다. 그러니 삶이 위기에 처할수록 정치에 무관심할 게 아니라 오히려 정치에 더욱더 관심을 쏟아야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스스로 밥숟갈을 놓으며 끼니를 걱정해 왔던 셈이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경제는 기업가에게 맡겨두고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자는 잘못된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 삶이 지금 이 모양이다. 그러니 아직도 청와대 비서관이 성매매를 하다 잡혔는데 경찰청장이 이를 두둔하고, 부패청산을 내세웠던 정부가 뒷구녕으로 구린 돈을 받는다. 에이, 더러운 잡놈들 하며 정치를 더욱더 멀리 할수록 세상은 더욱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지난 경기도 교육감 선거는 12.3%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투표율의 하락이 곧 민주주의의 위기는 아니지만 그런 무관심은 치명적이다. 공적인 것에 대한 관심만이 우리 삶을 온전히 지킬 수 있게 한다. 당장 지금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작가세계]에 쓴 글입니다.
요즘 분위기 돌아가는 걸 보면 심상치 않네요.
인터넷에서도 망명객과 난민들이 늘어날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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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라는 저잣거리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저잣거리에서 청년들에게 앎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가를 가르쳤다. 왜 그는 학교가 아니라 시장 저잣거리에서 청년들을 가르쳤을까? 당시 소피스트들이 돈 많고 힘있는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생활하던 것과 비교하면 소크라테스의 삶은 아주 엉뚱했다.

하지만 그에겐 그렇게 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앎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구두공은 구두를 만드는 삶에서, 목수는 나무를 깎고 다듬는 삶을 통해 자신의 지혜와 탁월함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지혜와 탁월함을 서로 견주는 과정에서 시민들은 공동체의 앎과 공공성을 구성했다. 이렇게 앎이 삶과 분리되지 않았을 때에만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좋은 시민이 될 수 있기에 청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되물어야 했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청년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도왔다.


소크라테스의 무대였던 그리스의 저잣거리 아고라(agora)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질문들이 오고가는 정치적인 장이기도 했다. 서로 가진 것을 나눠야 하는 삶의 필요가 만든 아고라는 앎과 삶이 함께 숨을 쉬는 만남의 장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만나 물건의 가치를 흥정하고 따지는 과정에서 앎의 폭은 더욱더 넓어졌다. 그리고 아고라에서 열리는 민회는 개인의 고민을 넘어 전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며 앎의 깊이를 더하는 소통의 장이었다.

고대 그리스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장이 서는 곳은 만남과 소통의 장이었다. 먹거리가 있고 축제가 있고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곳이 장이었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정보와 지혜를 나누고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할 수 있는 공간도 바로 장이었다. 이런 장은 일제 식민지와 군사독재의 탄압을 받으며 사라지거나 물건만 사고 파는 시장으로 변질되었지만 만남과 소통의 필요성은 그런 장의 부활을 기다려 왔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출현은 이런 장을 부활시켰다. 인터넷은 새로운 만남과 소통을 가능하게 했는데, 데이터로 구성된 이 세계에서는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고 그 범위도 확장되었다. 더구나 디지털 카메라나 캠코더의 등장, 자유자재로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환경 등은 만남과 소통의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인터넷은 이전 사회의 시․공간 개념을 뛰어넘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 있다.

이런 속도와 새로움에 힘입어 인터넷은 아고라로 대표되던 고대의 직접민주주의를 부활시키려 한다. 현대의 아고라에서는 내가 굳이 광장으로 나가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전자민주주의(teledemocracy)는 단순한 투표를 넘어 시민들이 많은 양의 문자와 영상정보를 서로 교환하며 의견을 나눌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텔레데모크라시](거름, 1994)를 쓴 아터튼(Christopher Arterton)은 인터넷이 커뮤니케이션과 대화, 정보교류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한국처럼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가 뿌리를 내린 곳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소통과 만남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인터넷은 그런 제약을 극복하도록 돕는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나이나 성별, 장애를 감추고 자신이 원하는 인물로 탈바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터(Mark Poster)는 컴퓨터 글쓰기가 고정된 역할을 없애고 기존의 위계질서를 혼란에 빠뜨려서 의사소통을 새롭게 배치하고 주체가 속한 시공간을 변화시켜서 주체를 분산시킨다고 본다.[각주:1] 이런 재배치와 분산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상상된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권력과 돈, 지식이 지배하는 현실세계에서는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들도 인터넷에서는 빛을 발하는 고수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인터넷 세계에서는 청소년들이 어른들과 동등하게 맞짱을 뜨며 논쟁을 벌일 수 있다(이명박 대통령 탄핵서명운동을 발의한 고교생 안단테를 보라!). 몇 살이냐를 따지고 초딩, 고딩이라 비난하기도 하지만 현실세계만큼 나이가 폭력적으로 상대방의 입을 막지는 못한다. 이렇게 누리꾼들은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고 현실에서는 만들기 어려운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도 사라진다. 미네르바같은 이가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할 수도 있고, 일반 대중이 진중권을 공격하기도 한다.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공격하는 방식을 문제삼을 수는 있지만 뒤집어 보면 그것은 전문가가 대중에게 개입하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작용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의견을 말하는 순서도 먼저 로그인한 순서를 따르니 각각의 의견이 똑같이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인터넷에서의 만남은 이미 만들어진 위계질서를 뛰어넘을 수 있다.

또한 인터넷은 소통의 방식도 새로이 재구성한다. 옛날에는 직접 참여한 사람들만 그 내용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은 여러 의견과 실천을 저장해서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도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은 정보를 직접 검색할 수 있고 자신의 견해를 보태어 위키피디아(http://www.wikipedia.org/)처럼 집단지성을 구현하거나 UCC로 재창조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아무리 하찮은 개인이라도 모든 지식에 접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꿈을 기술적으로 실현했다.[각주:2] 또한 동시에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토론에 동시에 참여하며 토론을 이끌어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소통은 기존의 시․공간 개념을 뛰어넘는다.

이렇게 다른 점도 그 장의 성격은 옛날 아고라와 비슷하다. 옛날 아고라처럼 인터넷에서도 물건을 사고 팔고 정보와 의견을 나눌 뿐 아니라 비슷한 취미와 정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뭉치기도 한다. 내가 관심을 두는 취미생활이나 상품 구매에 대한 품평과 정치적인 사안이 맞물릴 수 있다는 점은 그런 세계의 총체성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각주:3] 삶의 공간이기에 인터넷은 여러 가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의 참여를 자극하고 독려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권위적인 사회, 권력과 자본, 언론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시민들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2008년을 뜨겁게 달군 촛불집회이고, 미디어다음의 아고라(http://agora.media.daum.net/)는 그 변화의 중심에 섰다. 실제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던 대통령의 탄핵이 인터넷에서는 백  만명을 넘기는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촛불집회에 나가면 아고라라고 적힌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 사회, 문화를 토론하는 공간이 마치 정당이나 시민단체처럼 깃발아래 뭉쳤으니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촛불집회만이 아니라 그 뒤를 이은 촛불산책이나 명동 무한도전×2도 그런 변화를 반영한다. 아고라와 블로그, 카페 등의 인터넷 공간에서, 그리고 길거리와 광장, 학교와 동네같은 현실 공간에서도 변화의 싹은 조금씩 계속 자라고 있다. 이제 시민들은 영웅이나 지도자가 자신을 대신해주길 바라지 않고 스스로 주권(主權)을 행사하려 한다.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한 자기 모습을 반성하면서 책이나 교과서에서 외우기만 했던 민주주의나 민주공화국을 구체적인 삶의 물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각주:4]. 단지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인터넷은 현실세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가상‘현실’로 성장하고 있다.


인터넷 권력이동

2008년 미국 선거에서 오바마는 흑인으로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아주 먼 미래에나 가능하리라 믿었는데 오바마는 그런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오바마의 정치적인 성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오바마는 블로그 형태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유권자들과의 적극적으로 소통을 시도했고, 1천만 명이 인터넷 공간에서 오바마를 지지했다. 이 유권자들이 자발적으로 오바마의 전략과 정책을 복사해서 다른 곳으로 퍼날랐고, 그 중 3백만 명은 홈페이지를 통해 선거자금을 내기도 했다. 오바마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만드는 사이트(Social Network Site)인 페이스북(http://www.facebook.com/)과 마이스페이스(http://www.myspace.com/), 트위터(http://www.twitter.com/)와 동영상 제공 사이트인 유투브(http://www.youtube.com/) 등에 자신의 정보를 올리고 사람들이 이것을 자유로이 활용하게 했다.

물론 오바마가 선거에 인터넷을 활용한 최초의 정치인은 아니다. 그런데 오바마는 인터넷을 단순한 홍보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했다. 선거정보와 정책이 가공되고 복제되어 무수히 퍼져나감으로써 오바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선거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각주:5] 오바마만이 아니다. 유투트에서 진행되었던 정책토론회 역시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받았다. 2007년 미국 대선을 다룬 유투브 정책토론회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후보자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각 후보당 평균 조회수는 민주당이 약 8만 건, 공화당이 약 1만 6천 건이나 되었다.[각주:6] 그리고 이런 관심은 후보자들의 사이트나 블로그 방문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사람들은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다루는 이슈들, 국회나 청와대같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만이 정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고라의 저잣거리는 그동안 우리가 정치의 장이라고 믿어온 공간이 아주 좁은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시시껄렁한 동영상이나 드라마 등을 공유한다고 여겼던 유투브가 정책토론회를 진행하고, 블로거나 UCC가 독립언론을 외치며 블로거 저널리즘을 만들고 있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파워블로그들의 영향력은 정치인이나 기자와 맞먹거나 그것을 능가하고 있다. 그리고 블로그와 블로그를 이어주는 메타블로그의 등장으로 블로그 전문사이트도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다. 올블로그(http://www.allblog.com/)와 같은 메타블로그는 개별 블로그를 서로 묶어주면서 이용자들이 의견을 공유하고 덧붙어 더욱더 풍성한 콘텐츠를 만들게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각주:7]

이런 환경에서 스스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하여 판단을 내리고 그런 판단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려는 시민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인터넷은 정보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췄기 때문에 굳이 내가 정보를 만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자유로이 복사, 활용할 수 있게 했다(인터넷에서는 내가 직접 글을 쓰지 않아도 내 생각과 비슷한 사람들의 글을 퍼오는 것만으로 내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새로운 흐름은 ‘웹 2.0’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되고 있다. 기존의 인터넷이 정보를 제공하는 일차적인 역할만을 담당했다면, “웹2.0에서의 웹은 콘텐츠와 서비스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이용자 스스로가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정보는 양방향으로 소통하게 된다. 플랫폼으로써의 웹! 이것이 곧 웹2.0이다.”[각주:8] 그러니 ‘웹 2.0세대’라는 말은 인터넷에 능한 세대만이 아니라 현실의 부조리에 항의하고 참여하는 능동적인 시민세대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고라의 논객 권태로운 창은 이를 “21세기의 시민 민주주의”라 부르기도 했다.[각주:9]

웹2.0의 정신인 개방과 공유, 참여는 능동적인 시민의 가치와 어울린다. 웹2.0의 정신은 자신을 드러내며 개방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과 정보를 타인과 나누며 그것을 바탕으로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고 있다. 이 정신은 정보와 가치를 독점하며 대중을 계몽하고 이끌려 했던 기존의 사회운동이 가지지 못한 개방과 공유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한 블로거는 여기에 연결과 협업을 덧붙여 웹 2.0의 정신을 주장하기도 한다. “연결 = 경계를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자. 협업 =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시작하고 함께 완성하자. 나는 운동의 기본 중의 기본이 소통과 조직화라고 생각한다. 소통과 조직화를 위한 필수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위와 같은 개방, 공유, 참여, 연결, 협업의 정신이다.”[각주:10] 물론 이 정신이 누리꾼들의 삶에 지금 온전히 반영되고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많은 점에서 아직 인터넷은 가능성의 장으로 남아있고 이 정신은 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필요로 한다.

어쨌거나 인터넷은 현실의 장애물이 소통과 만남을 방해하는 한국사회에서도 새로운 장으로 떠올랐다. 과학수사대(CSI)를 능가하는 누리수사대, 공무원이나 학자를 능가하는 집단지성, 종이신문의 폭과 속도를 앞지른 블로그 저널리즘, 시사잡지를 능가하는 메타블로그 등은 대중의 참여문화를 퍼뜨리고 발전시키는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인터넷의 힘이 강해지는 만큼 현실의 권력과 자본은 그 힘을 길들이려 한다.


인터넷 디아스포라의 출현과 식민화

인터넷의 힘이 가상을 넘어 현실로 침투할수록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과 자본의 반격도 거세진다. 아고라에서 활동하던 권태로운 창이나 미네르바와 같은 누리꾼들을 수사하거나 체포, 구속하는 것은 그 반격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터넷의 힘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그 이전부터 있어 왔다. 이미 2007년에 정부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추진한 바 있고, 지금도 4월 국회 통과를 목표로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제안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수사기관의 감청대상을 확대하고 통신사업자가 의무적으로 감청설비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만일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수사기관은 법원의 영장 없이도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의 휴대전화기록이나 IP, 로그기록 등을 통신사에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 4월 1일 통과된 저작권법 개정안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불법 복제물을 올리는 인터넷 게시판에 대해 3회 이상 삭제 명령을 내린 뒤에 게시판을 최대 6개월동안 폐쇄시킬 수 있게 했다. 또한 정보통신망법안 개정안은 불법정보의 유통을 막는다는 취지로 불특정다수에게 제공되는 정보를 통신사가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상황은 더욱 심각한데, 현행 공직선거법은 선거 180일 전부터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글 또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금지한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범하는 것이다. 후보들간의 상호비방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 조항은 시민들의 정치적인 표현을 근본적으로 제한한다(실제로 선관위는 이 조항에 따라 UCC활용을 막았다). 더구나 이 법은 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의 선거운동도 금지해서 미래시민의 정치참여를 원천봉쇄한다.

이런 법안들이 다소 어지러운 인터넷 세계를 정화시키리라 기대하는 순진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면 그 힘은 언제나 강자보다 약자를 향해 행사되어 왔다(용산참사는 그 점을 비극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니 이런 법안들이 인터넷 세계를 공평하게 만들 것이라 기대하는 건 헛된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는 듯하지만 권력을 가진 자의 판단에 따라 이런 조항들은 악법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아렌트(H. Arendt)는 전체주의 국가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국가가 그 범죄를 정하고 모든 시민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한 바 있다.[각주:11] 독일 나치즘이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난민으로 만들었듯이, 이런 법안들은 수많은 누리꾼들을 인터넷 디아스포라[각주:12]로 만들 수 있다. 만일 현실세계라면 이런 법안들은 시민에게 정치적인 추방령을 내려 그들을 디아스포라로 만드는 법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법에 따라 경찰과 검찰은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구속하고 카페를 운영하는 운영진들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기 글을 지우거나 서버를 외국 사이트로 옮기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권력이 인터넷의 자유로움을 억압한다면, 자본은 그 자유로움을 변질시킨다. 자본은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을 사유화된 공간으로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을 기업의 마케팅 공간으로 변질시키거나 저작권을 내세워 디지털의 속성인 자유로운 복제를 사유화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이런 현상은 18세기의 인클로저 운동처럼 공유지인 인터넷을 사유화된 공간으로 바꾸고 있다. 권력이나 자본과 결탁해 독점적인 위치를 누려온 언론사들 역시 여론형성과 전파에 미치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을까 걱정하며 인터넷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려 애쓴다.

그리고 대형 포털회사들이 인터넷 세계를 관장하면서 여러 문제점들을 낳고 있다. 일단 누리꾼들이 네이버와 같은 대형 포털을 이용하다보니 그곳의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각주:13] 김헌식은 ‘포털 매트릭스’에 포획된 포털 네티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들이 활동하는 공간은 다른 곳이 아니라 포탈 공간이기 때문이다. 포털은 미디어의 블랙홀이다. 결국 포털은 대중을 다중으로 해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포털 대중을 만들어 냈다. 기존의 대중문화는 해체되고 포털 대중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각 매체로 분산되었던 것이 포털 안에 집적되어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 낸다.”[각주:14] 실제로 누리꾼들은 포털 사이트에서 토론이나 포털기자단에 참여하기보다 주로 실시간 검색어를 클릭하거나 커뮤니티 게시판의 글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블로그를 활용하는 방식도 자료저장(41.6%)이나 개인적인 기록공간(36.4%)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블로그의 일부 콘텐츠를 비공개를 설정하는 경우도 많다. 즉 누리꾼들 스스로가 블로그를 사적인 공간으로 인식하고 블로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네트워크(SNS)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는 능동적인 시민이 출현하기 어렵다.[각주:15]

이렇게 권력과 자본이 자유로운 생활공간를 장악하는 현상을 하버마스(J. Habermas)는 ‘생활세계의 식민화(colonization of life world)’라 불렀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공론장이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이제까지 의문시되지 않았던 주제를 다루며 공개적인 토론으로 비판적 공개성을 확립했다고 본다. 즉 공론장에서는 지위가 없는 사람들도 토론을 통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여론으로 정부나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수용성이 높고 침투성이 강한 대중매체(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등)의 발달과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의 성장이 이런 공론장을 점점 변질시켰다고 본다.[각주:16] 대중매체와 문화산업의 발달은 공중에게서 발언권과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관심을 제거할 뿐 아니라 사생활에도 개입하고 그 삶을 조작한다. 하버마스의 견해를 빌린다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론장의 출현은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을 극복하고 새로운 비판적 공개성을 확립하는 듯했지만 체계의 힘이 이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고 있다. 이런 식민화는 개방과 공유, 참여, 연결, 협업이라는 웹2.0의 정신을 파괴한다.

아직 결말이 나진 않았지만 권력이 누리꾼들을 디아스포라로 내몰고 자본이 인터넷 공간을 사유화하고 식민화하려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열심히 즐긴 당신, 떠나라는 그들의 요구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망명을 떠나지 말고 그들을 망명보내기

문화는 순간적인 변동보다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된 경험과 삶으로 구성된다.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이 불붙은 능동적인 시민참여의 문화 역시 그런 경험과 삶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현실의 권력과 자본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갑갑하고 두려워 짐을 싸 떠날 생각을 한다면, 능동적인 시민의 문화는 구성될 수 없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고 쟁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떠남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를 파괴시킬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권태로운 창은 아고라를 “모든 것의 근원이자 부활의 노래”인 바다라고 불렀다. 그의 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인터넷이 새로운 아고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옛날 아고라가 반역과 반란의 장이기도 했듯이, 누리꾼들은 인터넷을 식민화하려는 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 개입은 인터넷만의 저잣거리만이 아니라 실제 세계의 저잣거리에서도 등장해야 한다.

물론 2008년에 촛불집회가 몇 달 동안 이어졌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지 못한 걸 보면 실제 세계의 개입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짐을 싸 떠나야 할 사람은 시민이 아니라 부패한 권력자와 자본가들이다. 설령 디아스포라로 떠돌지라도 언젠가는 그들을 몰아내고 다른 시민들과 함께 자유롭고 억압이 없는 공동체를 만들고 말리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전두환이 아직도 발을 붙이고 사는 이 사회에서 그들이 망명을 떠나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다.

  1. 마크 포스터. 『뉴미디어의 철학』(민음사, 1994), 219~222쪽. [본문으로]
  2. 마크 포스터. 같은 책, 140쪽. [본문으로]
  3. 촛불집회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인터넷 동호회 82cook의 김수진은 이렇게 얘기한다. “요리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어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회원들의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요리에서 삶의 지혜, 주부들의 너무나 큰 관심사인 시댁 문제, 패션, 자식교육 등으로 옮겨갔고, 급기야는 그 관심사가 확대되면서 삶의 거의 모든 분야를 접할 수 있는 커다란 커뮤니티가 되었다.”(김수진. 「여성들이 뿔났다」. 『창작과 비평』 2008년 가을호. 102쪽). [본문으로]
  4. “그동안 나라 돌아가는 것에 무관심했던 점에 대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개인주의자였던 내가 ‘우리’라는 개념을 마음속에 품게 됐으며, ‘우리’나라에서 살아갈 후손들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하게 박혔다.”(김수진. 앞의 글. 107쪽) [본문으로]
  5. “웹에서 오바마 강세현상에 대해 미국 네티즌들은 오바마와 마니아(mania)의 합성어인‘오바마니아’, 버락(Barack) 오바마와 민주주의(democracy)를 합친 Barackacy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지지할 정도였다.”(송경재․민희. 「미국 유튜브 정치(YouTube Politics)의 시민참여: 한국적 함의를 중심으로」. 『정보화정책』 2008년 여름호. 51쪽). [본문으로]
  6. 송경재․민희. 앞의 논문. 50쪽. [본문으로]
  7. 이호영․정은희. 「블로그를 중심으로 본 디지털 콘텐츠의 사회적 확산」. 『KISDI 이슈리포트』. 17쪽. [본문으로]
  8. http://actionbasecamp.net/ [본문으로]
  9. 나명수. “이것이 아고라다”. 『창작과 비평』 2008년 가을호. 94쪽. [본문으로]
  10. 앞의 웹사이트. [본문으로]
  11.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박미애 옮김. 『전체주의의 기원1』(한길사, 2006), 192~201쪽. [본문으로]
  12.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본래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사전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diaspora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돌베개, 2006), 13쪽). [본문으로]
  13. 양적인 측면에서는 네이버가 전체 57.6%의 블로그를 유치하고 있으며 게시물(포스트)의 경우도 59.4%를 차지함으로써 전체 블로그 시장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이호영․정은희, 앞의 논문, 15쪽) [본문으로]
  14. 김헌식. 『포털 매트릭스: 포털 제국과 문화의 위기』(로크미디어, 2008). 27쪽. [본문으로]
  15. 이호영․정은희. 앞의 논문, 20~24쪽 [본문으로]
  16. “그것들은 공중을 시청자로서 자신의 궤도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공중으로부터 ‘성숙’의 거리, 즉 말하고 반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대중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표면상으로만 공론장이다. 게다가 대중매체가 그 소비자에게 보증하는 사적 영역의 고결함도 역시 환상이다.…공중은 비공공적으로 논의하는 소수 전문가들과 공공적으로 수용하는 소비대중으로 분열된다.”(하버마스. 한승완 옮김. 공론장의 구조변동](나남출판, 2001), 280~285쪽) [본문으로]

경희대에 강의를 하러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캠퍼스를 걷다 보면 가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저 말은 분명 한국어가 아닌 듯한데... 중국어나 일본어 같은데... 모여서 길을 걷는 학생들 중 많은 수가 그런 언어를 쓰고 있다.
그리고 수업 때 출석부를 봐도 중국 학생이 꼭 1명 이상은 속해 있다.

어찌된 일일까 생각하다 얼마전 한겨레 기사를 하나 봤다.
"대학가마다 차이나타운 왜?"라는 기사다(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newspickup_section/347676.html).
기사를 보니 한국에 유학온 중국학생이 5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자료를 보니, 경희대가 3,267명으로 대학들 중 최고이다.
기사에 따르면, 중국 학생들이 한국으로 유학을 오는 이유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물가가 싸며 한국 기업이 중국에 많이 진출해 한국어 수요가 늘어나고 한국 드라마로 호감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방대에 유학생이 급증하는 것은 정원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탈도 많고 비리도 많은 지방대들이 유학생을 정원외로 받아 대학재정에 보탠다고 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그런데 유학생 등록금 수준은 국내 학생의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사만 봐서는 왜 중국학생들이 한국으로 오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중국 유학생이 가장 많다는 경희대에서 중국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걸 보면 한국어로 아주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이다.
수업시간에 내 말을 알아듣는 학생이 있을지 의문스럽고, 수업에 참여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도 아주 간혹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자기들끼리 중국말로 대화하느라 바쁘다.

한국의 대학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는데, 이들은 무엇하러 이곳에 왔을까?
기사에 난 것처럼 가깝고 물가가 싸고 한류 열풍 탓에 호감도가 높아졌고 돌아가서 한국기업에 취직하려고?
한국 학생들이 이런 조건 때문에 다른 유학을 떠나려 할까?

하여간 내겐 미스터리이고 한국에서 그네들이 보내는 삶도 참 궁금하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요즘 보면 우리 사회가 개념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속된 말로 무개념의 사회가 되고 있는 거죠.

소위 권력의 핵심이라는 청와대의 행정관이 관련 업체의 접대를 받고 성매매까지 나서고.
그걸 조사해야 할 경찰청장이 자신도 예전에 접대를 해봤다며 재수없으면 성매매에 걸린다고 얘기하고.
이런 얘기가 드러났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접대를 받고 성매매를 하며 자신의 힘을 마음껏 누리고 있을 겁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무개념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게 이명박 정부만의 잘못은 아닌 듯합니다.
노무현 정부가 '상식이 통하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부안과 대추리의 주민들을 짓밟는 '몰상식'을 증명했지요.
그런 몰상식을 딛고 이명박 정부가 무개념의 정부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한 번도 상식적인 정부가 들어선 적이 없는 게지요.

그리고 이런 몰상식과 무개념은 비단 정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권력이 그렇게 타락하는 동안 사회도 그 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동문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고려대의 모습에서도 그런 무개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옛날 고대 출교생 사태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교수들을 감금했다며 학생들에게 '출교'라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사건인데요.
법원이 과한 처벌이라며 출교를 무효로 만들었는데도, 이제는 대학에도 '무기정학'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네요.
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99428&gb=da
이미 졸업한 학생들까지 불러서 문제를 삼는다니 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임을 깨닫게 해주려는 걸까요?
김연아를 낳은 고대이니 그 자존심을 끝까지 세워보겠다는 걸까요?

제가 보기엔 이 역시 고대 총장이나 교수들만의 문제는 아닌 듯 싶습니다.
이미 대학은 권력이나 자본의 힘에 끌려다니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삼성 이건희 회장이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면 사태가 그렇게 가지 않았을 테니까요.
스승이 될 생각은 별로 없으면서 알량한 권위나 내세우고 있는 게 지금 대학의 모습이니까요.

브루스 커밍스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지은 [대학과 제국]이란 책을 보면
정부와 기업이 대학을 어떻게 길들여왔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카멜롯 프로젝트, 트로이 프로젝트 등 미국이 남미나 다른 제3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전략들이 대학의 프로젝트로 발주되고, 사회과학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지요. 그래서 커밍스는 "미국의 유수한 지역학․국제학 연구소들은 정확하게 국가․정보기관․재단의 결탁의 산물"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로렌스 솔리는 정부만이 아니라 기업이 대학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교육을 목적으로 기업이나 기업재단에서 대학으로 흘러 들어가는 돈은 냉전시대에 정부보조금이 학문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학문분야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령 보수적인 군수제조업체가 설립하고 재정지원을 하는 존 M. 올린 재단은 시카고대학, 예일, 스탠포드, 하버드, 콜롬비아, 조지 메이슨, 조지타운, 듀크 대학을 포함하여 일류 법과대학을 가지고 있는 몇몇 대학들에서 진행되는 ‘법률과 경제학’이라는 연구 프로그램을 후원해 주고 있다. 이 ‘법률과 경제학’은 이 재단의 극우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법철학으로서, 공화당의 분석가 K. 필립스는 자신의 저서 『부자와 빈자의 정치학』에서 ‘법률과 경제학’은 H. 스펜서와 W.G. 서머의 시각을 상기시키는 신다윈주의 ‘이론’이라고 쓰고 있다. “시장에서의 상품선택 과정은 정부의 의사결정을 대체할 수 있다”고 전도하고 있는 ‘법률과 경제학’같은 강좌가 나날이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처럼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대학의 강좌를 만들거나 그 강좌를 지원하면서 학문의 흐름을 주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은 소위 산학협동과정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보기도 합니다. 솔리에 따르면, "외국기업을 포함하여 기업들이 대학에 연구기금을 제공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경제학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납세자와 수업료에 의해서 세워진 대학연구소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그에 상당하는 건물과 장비를 갖춘 기업실험실에서 하는 것보다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은 낮은 비용으로 대학원생들을 연구보조원으로 고용하여 민간부문의 연구원들보다 훨씬 더 적은 숫자로 동일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기업이 갖춰야 할 실험장비를 대학이 마련하게 하고(그러면서 생색도 내고), 값싼 노동력인 대학원생들을 착취하는 거죠. 꿩 먹고 알 먹고란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닐까요?

또한 솔리는 한국정부가 미국 내의 한국학 연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얘기합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미국 지식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미국대학에 돈을 풀었다고 합니다. “한국연구에 대한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대학들에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장려하는 것은 한국이 미국의 학계의견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시도한 가장 두드러지고 값비싼 조치였다.” 돈을 받는 대신 한국의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연구를 삼가하고 아름다운 것만 드러내 달라는 거였죠. 그러니 우리는 미국에 한국학이 확산되어가고 있다며 기뻐하지만 사실 그 확산은 은밀한 거래일 뿐입니다.

이런 게 미국 대학만의 문제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한국대학에서 사회주의나 기타 비판적인 강좌들이 모두 사라진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학의 커리큘럼들을 두루 살펴보면 이런 영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 곳곳에 자리잡은 산학협동단지나 벤처단지 등등을 보면 이미 대학은 기업의 영향력에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학이 상식적으로 움직이길 바라는 게 어쩌면 몰상식한 건지도 모릅겠네요. 대학이 비판적 지식인들의 온실이라는 얘기는 이미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도의 성벽을 깨뜨려야 새 바람이 들어오지. 새 바람이 들어와야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지. 무엇으로 그 성벽을 깨뜨리느냐? 못할 것이 없는 정신의 포탄으로야 하지. 정신이 어디 있느냐? 사람에 있지. 사람이 누구냐 나지. 나밖에 사람은 없다. 막막한 우주에 사람은 단 하나이다. 그것이 나다. 「다른 사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알 수도 없고 임의로 부릴 수도 없다. 내가 아는 건 나요,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건 나요, 내가 죽여도 좋은건 나다. 나 뿐이다. 그럼 이것 밖에 길이 없지 않나? 불은 불로야 일어나는 것이요, 바람은 바람으로야 일으킨다. 내가 폭발을 해야만 사회의 썩은 티끌을 불어 날리는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이렇게 말하면 너는 개인으로는 아니 된다더니 다시 개인에 돌아왔구나, 순환론이로구나 할지 모른다. 모르는 말이다. 나는 개인 아니다. 나는 아버지(全體)와 같이 있는 나지, 개인이 아니다. 개인이란 건 거짓 것이다. 천지간엔 없는 「다른 사람」이란 것을 보고할 때 개인이란 것이 있지 참 삶에 개인은 없다. 내가 살려고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는 것이 개인주의지, 전체를 섬기려고 짐을 내 등에 지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향기를 채우려고 나를 제단 위에 불사르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다. 이 날까지 역사는 언제나 개인 아닌 개인의 바치는 자기희생의 피에서만 수혈을 얻어 멸망을 면해 왔다. 모든 참 생명적인 혁명은 따져 들어가면 다 어느 가슴에서 나왔다. 삶 자체의 가슴에서 나왔다."

뜨거운 가슴이 필요한 시대인 듯합니다. 오늘도 저는 가슴 덮히러 갑니다.^^


덕성여대 신문의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어제 학교에 갔더니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반독재투쟁을 벌이자며 쓴 대자보가 붙어있더군요.
대자보 내용은 http://www.20eye.net/35?srchid=BR1http%3A%2F%2Fwww.20eye.net%2F35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청년들의 행동이 필요한 시기인 듯합니다.
물론 이명박이 문제의 본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짓은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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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또는 촛불시위는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해가 진 저녁을 밝히는 촛불은 시민들이 중요한 사회적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신념의 불꽃을 뜻했다. 이런 촛불의 흐름이 한국사회에서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그동안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해 왔고 시민들이 그 과정에서 배제되어왔다는 점을 증명한다. 촛불의 구호나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는 사안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저항문화는 그 원인인 권력구조의 잘못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촛불시민의 저항을 힘으로 억누르려 하고 있다. 경찰은 상습 시위꾼을 검거한다며 촛불시민을 조사하고 인터넷 IP를 추적하고 있다(거리에 나와 중무장한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것을 상습적으로 즐길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리고 대법관이 재판과정에 개입해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다(법관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컴퓨터로 재판을 하는 게 옳다). 또한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이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집시법, 방송법, 정보통신법 등을 다수당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다(힘이 장땡이라면 국회의원을 쌈박질 순으로 뽑는 게 옳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입법, 행정, 사법체계의 삼권분립조차 무시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이처럼 저항의 이유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많은 이유들을 만드는 현실에서 과연 시민들이 촛불을 꺼야 할까? 아니 과연 촛불이 꺼질 수 있을까? 물론 정부의 강한 탄압이 일시적으로 촛불의 흐름을 주춤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결코 권력의 억압이 자유를 가둘 수 없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해 왔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독재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영원한 왕국을 건설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역사만 봐도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이 탐관오리나 왕에게 반기를 들며 수많은 반란을 일으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88만원 세대는?

더구나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는 시민들이 저항의 촛불을 내려놓을 수 없게 한다. 유럽에서는 700유로세대가 그리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옆 나라 일본에서도 2천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도쿄의 히비야공원에 모여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일자리를 달라고 구걸하는 게 아니다. 경제위기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고통을 주지 않는다. 위기는 힘을 가진 자에겐 기회였고 모든 이가 고르게 누려야 할 공동의 재산은 그동안 소수의 사람들에게 독점되어 왔다. 상위 10%의 사람들이 전 세계 부의 85%를 독점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올 정도이고, 불행히도 그런 불공정함은 지금 상태라면 더욱더 강화될 전망이다. 전 세계적인 분노는 부를 독점해 온 사람들에게 그 부를 공정하게 나눌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저항의 흐름이 뭉쳐져 촛불이 횃불로 변한다면, 어떠한 권력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바로 그렇기에 권력은 촛불이 횃불로 타오르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해를 하고 있다. 권력은 우리 88만원 세대가 거리보다 도서관에서 스펙쌓기에 열중하기를 원한다. 88만원 세대가 함께 모여 공동의 미래를 고민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서로 경쟁을 벌이기를 원한다.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바로 대안이다

따라서 그런 방해를 뛰어넘어 횃불이 되려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대화와 만남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른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

문제제기와 대안은 분리되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와 같은 신념을 품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와 우정을 쌓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만나는 과정에서, 특히 국가나 학교, 기업이 꺼리는 사람이나 모임을 만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배우지 않은 지식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만남의 과정에서 새로운 운동이 자연스레 출현할지 모른다. 그런 운동이 가능할까라고 미리 물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운동의 흐름을 미리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뜻을 드러내고 토의하는 과정이기에 운동의 방향을 예측하는 건 인간의 몫이 아니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기에 운동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문화가 운동으로 확장되고 단단해질 수 있다면, 대안사회는 꿈이 아닌 현실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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