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예비평]에 쓴 글이다.
글 중간중간이 엉성한데 그냥 내버려 뒀다.
그 공백을 채우는 건 읽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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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소개
1. 고공크레인으로 들려진 사람들
크레인으로 올라간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들은 건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90년이었다. 노동조합을 주도하던 수십 명의 노동자를 식칼로 난자했던 끔직한 테러사건과 육해공에서 병력을 동원한 경찰의 미포만 작전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들이 82미터 높이의 크레인에 올랐다. ‘골리앗 투쟁’이라 불리는 이 싸움에서 노동자들은 “새벽과 한밤중에 헬기까지 동원한 정부의 무력진압에 우리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천대와 우리의 비애에 울분을 느끼고 급기야 투신하려는 동지들을 서로가 감싸안으며 자제시키고 있습니다. 저희도 저 밑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회사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노조가 유린되고 정부에 의해 천대받는 현실에서 골리앗 위에 있는 우리 전원은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서지 않기로 결의하였습니다”라고 부르짖었다. 전국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동조파업을 하고 울산으로 내려와 연대투쟁을 벌였고, 크레인에 오른 이들은 5일동안 단식투쟁까지 벌였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벼랑끝 투쟁이었고, 노동자들의 자존심을 건 싸움이었다.
당시에 나는 대학 선배들과 함께 서울지하철 선전전을 나갔다. 선배는 즐거운 어린이날에 크레인 위의 아빠를 맘 조리며 지켜봐야 하는 아이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 드라마같은 비극에 귀를 기울이는 승객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무관심했다. 승객들이 일어난 자리엔 우리가 뿌린 유인물이 놓여 있었다.
크레인 위로 올라가야만 했던 사람들의 절박함은 저녁 시간 지하철로 퇴근하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법으로 금지되던 시기라 진실을 알리는 목소리가 위험했을 수도 있지만 외면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불편에 가까웠다. 사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넥타이부대가, 권력층과의 협상에 바빠진 운동의 지도부가 현장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는 점은 같은 해 7월부터 9월까지의 노동자대투쟁에 대한 반응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보통 사람들’로 포장된, 반공과 중산층을 내세운 지배 이데올로기는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람들을 분리시켰다. “나는 너희와 달라 또는 달라야 해”라는 구분이 “우리도 당신이다”라는 선언을 가로막았다. 힘겨운 싸움은 13일 만에 막을 내렸다.
당시 골리앗 투쟁을 이끌었던 이갑용씨는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골리앗(고공농성)에 오를 거라면 계획을 잘 잡아야 한다. 절대 혼자 올라가선 안 되고, 여럿일 경우 고공에서 어떤 일을 할지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한다.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다. 투쟁일기 같은 것을 적어도 좋다. 어떤 경로로 침탈할 수 있는지 면밀히 살펴 대비해야 하고,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투쟁이 때를 가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겨울의 고공농성은 되도록 피했으면 한다. 초여름에도 견디기 어려운 하늘 위의 날씨인데 겨울에는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고공단식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단식은 지상에서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배변 문제 때문에 최소한으로 음식을 조절하다 단식으로 가기도 하고, 음식을 다 아래로 집어던지고 결사항전을 각오하기도 하는데, 고공 단식만은 말리고 싶다.”
하지만 그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크레인에 올라야 했다. 살 곳을 강제로 빼앗긴 철거민들은 망루를 세우고 그 위에 올랐다. 지상에서 살 곳을 빼앗기고 내몰린 사람들은 하늘 가까운 망루와 크레인에서 안식처를 찾아야만 했다.
20세기의 소설같은 비극은 21세기 한국에도 계속 재현되었다. 절대 혼자 올라서는 안 된다는 그 크레인을, 초여름에도 견디기 어렵다는 그 크레인을 한진중공업 故김주익 위원장은 혼자 올랐다. 골리앗 투쟁이 노조간부들을 식칼로 찌르고 헬기와 해군함정으로 진압하는 노골적인 폭력에 맞섰다면, 김주익 위원장의 투쟁은 노조간부들을 매도하고 고발하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은밀한 폭력에 맞섰다. 골리앗 투쟁이 빨갱이로 매도당했다면, 김주익 위원장의 투쟁은 무관심으로 외면당했다.
지상에서 35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는 가장 강력한 태풍이라 불리던 매미를 견디며 무려 12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였다.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인 나라에서 김주익 위원장은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들에게 손해배상 가압류에 고소고발로 구속에 해고까지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노동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무정책을 이 투쟁을 통해서 바꿔내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승리할 때까지 이번 투쟁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라 부르짖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야 했다. “휠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도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긴 채.
세상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태풍 매미의 강력함을 연일 방송했지만 그 태풍을 견디며 한 사람이 크레인 위에 버티고 있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를 인터뷰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죽음을 택하고 나서야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며 눈물을 훔쳤고, “35m 상공에서 100여 일도 혼자 꿋꿋하게 버텼지만 세 아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아픈 마음을 숨기지 못한 아버지. 그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겨진 아이들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준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도, 정치인도 아니구요. 그저 평범한, 한 일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유서 속에 그 휠리스 대목에 목이 메인 이 분은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휠리스보다 덜 위험한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서, 아버지를 잃은, 이 위험한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건넸습니다. 2003년 늦가을. 대한민국의 노동귀족들이 사는 모습입니다.”라는 故정은임 아나운서의 멘트는 그의 죽음 뒤에도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이 역시 한국에서는 일상이 되어버린 소설같은 현실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크레인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크레인으로 들려질 수밖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지상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위험한 곳에 그들은 둥지를 틀어야만 했다. 높은 크레인을 오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희망을 품었을까? 이번에 올라가면 다시 지상에 발을 디딜 수 있을 거라 생각할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간 사람들을 왜 우리는 보지 못했을까? 크레인으로 들려진 사람들의 꿈은 지상에서 꾸역꾸역 일상을 사는 우리들의 꿈과 달랐을까? 왜 우리는 눈을 감았을까?
이 외면의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고 희망을 얘기할 수는 없다. 그동안 크레인에서 떨어진 땀과 고통의 눈물이 지상으로 스며들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은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희망은 과거의 절망을 인정하고서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고통의 기억만을 부여잡자는 건 아니다. 모든 희망이 다 이루어졌다면 아마 희망이라는 말도 소용없을 것이다. 희망이 필요한 건 우리 사회가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연꽃이 썩은 연못에서 피듯 희망도 절망 속에 핀다. 이제 희망을 얘기할 시간이다.
2. 타지 않은 버스에 관한 이야기
희망버스에 관한 얘기를 할 텐데, 미안하게도 나는 ‘아직’ 희망버스를 타지 못했다. 갓 돌을 지난 아이를 데리고 희망버스를 타기엔 여유가 없었다. 경험하거나 목격하지 않은 사건에 관해 말을 꺼내는 건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고향이 부산이고 영도는 내가 힘겹게 고등학교 시기를 버티던 장소였다. 한진중공업은 당시 내 아지트였던 태종대에 가기 위해 지나쳐야만 했던 곳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변하지 않은 그 곳 사람들, 그 곳 지리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사실 직접 경험하면 알게 될 만한 이야기를 경험하지도 못한 내가 간접적으로 얘기한다는 건 꽤나 주제넘은 짓이다. 그럼에도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건 희망버스 참가기가 아니라 희망버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망버스를 달리게 하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나도 궁금했다.
타보지 않았기에 버스를 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희망버스를 기획한 사람들이 만든 『깔깔깔 희망의 버스』(후마니타스, 2011년)를 읽으며 웃음은커녕 눈시울만 붉혔다. 시인의 예찬이 없어도 그동안 집회현장, 추모집회에서 발표된 김진숙 씨의 말과 글은 이미 한 편의 문학이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희극을 예감하는 사람을 보며 나는 깔깔깔 웃을 수 없었다. 어느 대목에서 깔깔깔 웃어야 할지 좀 난감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타지 않은 버스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희망버스를 탔던 사람들이 언론에 기고하거나 인터넷에 올려놓은 글들을 검색해서 읽어봤다. 그러면서 희망버스 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희망을 찾으러 떠난 사람들이 있었고 직접 부산으로 가지는 못했어도 각지에서 희망을 지지하고 보살폈던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희망버스는 부산으로 떠난 버스가 아니라 부산에서 전국으로 떠난 버스였던 셈이다.
인터넷에서 접한 대부분의 글들은 희망버스에서 희망을 발견했고 그 희망을 일깨워준 소금꽃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1박 2일을 내어 희망버스를 탄 사람들, 그들에게 온갖 물건과 마음을 건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 1만 명 이상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신문과 잡지들이 앞을 다투어 특집을 기획했고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그런 얘기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영의정 버스(청소년 활동가들의 버스), 퀴어버스, 장애인연대버스, 농민-노동자 연대버스가 등장했다는 점은 기억해 둘만하다. 숨어야 했던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손을 잡는 건 어떤 모순과 비판꺼리가 있더라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단지 위로하거나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뭔가를 서로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개인이든, 단체이든)의 수가 늘어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시국회의와 만민공동회에서 시민들은 서로의 말과 생각을 나눌 뿐 아니라, 양말을 나누고 밥을 나누고 약을 나누고 음악과 미술, 웃음과 눈물을 나눴다. 무한경쟁의 시대, 자기 앞가림만 강요하는 시대에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뭔가를 나눈 기억은 우리가 존엄한 사람으로 살도록 도울 것이다. 사실 그동안 어느 집회장을 가든 그런 나눔은 하나의 문화였지만 이제 그 나눔이 일상을 집회의 장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되었다.
인터넷을 뒤지다보니 희망버스를 욕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몸소 부산으로 내려가 간만에 완장 차고 어깨에 힘준 어버이연합도 있고, 똥오줌 못 가리는 대학생들도 있었다. 종북좌파, 빨갱이 색출에 여념이 없는 구국시민들도 있고, ‘영도주민’이라며 희망버스를 절망버스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인터넷 댓글에 자주 등장했다(내가 영도주민이라도 제법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영도 주민일까?). 어쨌거나 그들도 자신이 존재해야 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나름 애쓰고 있었다.
그렇게 애쓰는 이들보다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든 사람들은 희망버스를 ‘타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버스를 못타 못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희망버스를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었다(내 눈엔 비아냥으로 보였다). 스머프 마을의 똘똘이 스머프를 보는 느낌이랄까. 사람들은 분주히 일하고 있는데 옆에서 가르치고 충고하려 드는 불편한 사람들. 눈 앞의 사람에게 직접 묻지 않고 몇 푼의 얄팍한 지식에만 의존하려는 사람들.
단지 불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런 얘기를 보며 90년대 초반의 고백논쟁을 떠올렸다. 당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과 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에서 일했던 신지호 씨는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라는 글로 고백운동(?)의 테이프를 끊었다(그는 얼마 전 폭탄주 음주토론으로 술 먹으면 말 더 잘한다는 상식을 굳이 몸소 증명했다). 그 뒤로 운동권이었다는 사람들의 간증이 이어졌고 그 사람들이 지금은 뉴라이트라는 기괴한 이권모임(이념모임이 아니다!)을 꾸리고 있다. 희망버스를 비아냥대는 이들의 행보는 이런 과거와 다를까?
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 소장은 2011년 8월 2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희망버스에서 희망을 찾을 수가 없다”고 얘기했다. 한진중공업의 문제는 조선산업의 문제이고,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조선사업의 구조조정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을 잘 아는 노조의 합의와 판단을” 김진숙씨가 “시민들의 상식에서 동떨어져” 무시하고 있고, 조남호 회장이 무리하게 경영하지 않았는데도 진보가 이런 판단을 계속 무시한다면 “국민 다수와 대부분의 기업주들은 진보의 집권을 ‘한국의 재앙’이자 ‘절망’으로 여기지 않겠는가”라고 그는 물었다. 아울러 “정리해고 없는 세상은 사회주의”이고 “‘정리해고 철폐’라는 우상을 숭배해선 결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2010년 제주인권회의에서도 이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참 불편했는데 그 때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반복했다. 그 때도 그랬지만 이 인터뷰를 보며 왜 그가 ‘진보논객’이라 불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과거에 운동경력이 있으면 모두 진보라 불려야 할까? 그러면 김문수나 신지호, 이재호 씨도 모두 진보정치인이라 불러야 한다(그렇게 부르면 아마도 보수를 자처하는 그 사람들은 화를 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진보가 참으로 가볍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세 치 혀에 진보가 놀아날 수 있다면, 나는 진보를 버리고 싶다. 그리고 집권을 위해서 진보가 현실과 타협을 한다면, 그런 진보가 집권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진보가 망하는 걸 나는 기다리겠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겨레신문》과의 2011년 8월 4일 인터뷰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해결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희망버스는 정리해고 철폐라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외치고 있다”며 “좀 더 현실적인 목표를 주장해야 한다”고 주문하는 방송통신대 김기원 교수의 말도 불편했다. 그의 진심이 김대호 소장보다는 조금 더 우리 사회에 닿아 있음을 알지만 회사 쪽과 함께 대책을 찾아봐야 한다는 얘기는 참 한가로운 얘기로 들렸다. 그렇게 함께 대책을 논의할 수 있다면 누가 높은 크레인에 오르겠는가?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공리(公理)는 현실과 상식이라는 말로 재단될 수 없다. 한국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비현실과 비상식이 지배하는 우리 현실을 어찌 현실이라 부를까. 노동운동이 민주노조를 세우기 위해 어렵사리 마련한 복수노조 허용방침은 허용 이후 불과 한 달만에 322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만들어지는 쾌거(?)를 이뤘다고 한다. 노동조합이 새로 만들어졌다니 기뻐할 일이지만 이 노조들 중 대부분의 노조가 회사 측이 만든 노조라고 한다(대표적인 것이 삼성 에버랜드의 노동조합이다). 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이 어렵사리 만든 노동조합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각 대학의 노동자들이 만든 산별노조는 이화여대나 연세대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개별노조에 교섭권을 빼앗길 처지라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상식을 얘기할 수 있을까? 경북 구미의 전자부품업체 KEC는 노조의 파업에 맞서 1년이나 직장폐쇄를 한 뒤에, 공장으로 복귀한 노조원들에게 파업가담 정도에 따라 다른 색깔의 티셔츠를 입히고 정신교육을 시키고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현실적인 상식을 따라야 할까?
이런 비현실은 노동자만의 일이 아니다. 노동자에게 해고가 살인이라면, 농민에게는 땅의 포기가 곧 살인이다. 땅 없는 농민이란 말 자체가 모순이다. 하물며 농민들에게는 올라갈 크레인조차 없다. 허나 농업을 산업으로 보고 취사선택하듯이 이쪽 산업을 저쪽 산업과 거래하는 사람들에게는 땅의 포기가 곧 살인이라는 말도 우상이나 비현실적인 얘기로 들릴 것이다. 자살하는 농민들이 목숨으로 증명하는 공리를 우리는 비현실적이라며 외면해야 할까? 그런 외면이 부메랑처럼 우리의 삶을 파고들지는 않을까? 이 현실에서 눈을 돌린다면 우리가 대체 어떤 대안을 얘기할 수 있을까?
기득권층이 좌지우지하는 ‘말로만 공화국’에서 정의로운 공리는 불가능한 것을 상상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희망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기득권층의 상상에 맞서는 정의로운 상상이다.
나는 김진숙 씨가 크레인에 텃밭을 만들고 식물을 키운다는 얘기를 들으며 감탄 또 감탄을 했다. 고공에서도 지상에서의 삶이 이어질 뿐 아니라 그곳이 지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사회운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3. 위로와 희망의 사회운동
그동안 여러 학자들이 촛불집회나 희망버스를 보며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분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 등을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분리보다 일터와 삶터의 분리, 일상과 제도의 분리, 활동가와 시민의 분리, 그로 인한 운동의 선택과 집중전략이 더욱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민운동은 그 시작부터 전문가 중심이었고, 노동운동은 80년대부터 대기업 남성 정규직 노동자 중심이었다. 이것은 최근에 갑자기 불거진 문제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부진이 시민들의 능동성을 강화시켰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운동이 공감하지 못하거나 채우지 못한 부분을 시민들이 직접 채우려 뛰어들고, 운동이 주목하지 않던 주체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전문가나 지식인들처럼 거시적인 전망이나 정책을 제안하지는 못하지만 시민들은 어떤 사건에 공감하거나 분노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다. 이런 시민들의 공감과 분노, 직접행동이야말로 사회를 달구는 군불이다. 이렇게 보면 시민사회운동과 시민의 직접행동이 서로를 멀리할 이유는 없고 외려 서로 끌고 당기며 돌봐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득권층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시민과 운동을 이간질한다. 기득권층이 공격하는 건 시민사회운동이 아니라 그 운동에 관심을 둔 시민들의 마음이다. 경찰의 방패와 캡사이신이 공격하는 건 정의로운 장에 서려는 시민들의 의지이다.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건 기득권층만이 아니다. 촛불집회 때와 마찬가지로 반짝하고 불타올랐다 수그러드는 건 사건 속의 사람들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 사건에 콩놔라 팥놔라 훈수두기 좋아하는 지식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였고 지금도 그렇다(지식인들이 할 역할은 훈수가 아니라 참여이다).
시민들의 직접행동은 시민사회운동을 대체하려는 게 아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고 사실 대체는 불가능하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전업 활동가로 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직업적인 시민사회운동의 노하우와 조직력은 시민들에게 부족한 힘을 제공할 수 있다. 반면에 조직운동이 둔감해진 일상의 영역을 시민들의 직접행동은 활성화시킬 수 있다. 시민사회운동이 일상을 제도화하고 시민의 직접행동이 제도가 일상으로 스며들도록 발판을 마련한다면, 이렇게 서로가 상대방의 활동에 주목하며 힘을 실어줄 수 있다면, 모두의 힘이 강해질 수 있다.
시간 되면 뛰어들었다 시간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는 건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없는 ‘공백’을 메워주고 ‘전망’을 제안하는 시민사회운동단체의 역할은 중요하다. 따라서 그런 단체들의 힘이 빠지지 않도록, 국가나 자본에 휘둘리지 않도록 기반을 단단하게 다져줘야 한다. 하루에 밥 한 숟갈씩, 일주일에 담배 한 갑, 소주 한 병, 그렇게 모은 정성은 단체에게 힘을 줄 수 있다. 인권센터를 짓는데 힘을 보태고 사회적 파업기금을 모으고 강정마을 후원주점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서 이미 그런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배우 김꽃비와 제작자 김조광수, 감독 여균동이 보여준 ‘I ♡ CT85, GANG JUNG’의 퍼포먼스도 그런 선언이 아닐까? 그에 앞섰던 배우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도 마찬가지이다. 드라마와 영화보다 우리 현실이 더 드라마같고 영화같다는 점을 배우와 감독들도 깨닫기 시작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연대는 다양한 형태로 실현되어 왔고 더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희망버스를 ‘촛불의 진화’라고 부르는 게 좀 불편하다. 왜냐하면 진화라는 말은 발전이라는 말처럼 과거를 부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버스는 진화가 아니라 ‘개화’이다. 희망버스는 더 이상 그들을 나와 다른 사람으로 외면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선언이다.
죽은 그가 나일수도 있음을, 크레인에 들려진 사람이 나의 친구, 나의 형제․자매, 나의 부모․자식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희망은 싹을 틔울 수 없다. 희망버스는 권력과 자본이 만든 경계를 허물고 “그가 나일 수 있다”고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선언하도록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위기는 사람들에게 다시 ‘공통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모든 차이를 무로 만드는 공통성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서의 공통성. 나는 당신과 다르다가 아니라 나도 언젠가는 당신의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공통성, 그렇기에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깨달음. 유럽의 ‘브뤼셀 아고라’, 뉴욕의 ‘제너럴 어셈블리’, 한국의 ‘희망버스’는 그런 공통성과 깨달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런 선언은 확산되고 계속 소통되고 있다. 여전히 신문이나 TV는 이런 선언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지만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타고 소식은 돈다. 주류 언론매체는 여전히 이권에 목을 매고 있지만 사람들의 대화는 늘어나고 수다스러워지고 있다. 김진숙씨가 핸드폰을 들고 크레인에 오른 것도 김주익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허나 희망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이 글을 쓰다 몇 년 만에 아는 동생을 만났다. 동생은 부산에서 경찰로 일한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둘째 얘기가 나왔다. 희망버스를 막고 대기하는 일을 하다 아이가 유산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말을 해줄까 단어를 찾았지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희망버스가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는 글을 쓸지라도 아이를 잃은 동생에게 희망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문제도 동생의 문제도, 시민과 경찰의 문제도 아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비극을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으니 우리의 탓이 아니다. 허나 그렇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는 없다. 비극은 소리없이 찾아와 희망을 비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품으면서도 세심하게 서로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함께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함께할 사람, 함께 하고픈 사람에게로 연대가 넓어질 수 있다.
아픈 이들에게 필요한 건 충고나 동정이 아니라 ‘위로’이다. 힘을 가진 자들의 사회는 위로를 나약하다 말하지만 자신을 약하다 생각하지 않고 타자를 동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누는 위로는 결코 약하지 않다. 위로는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무게를 덜고 같이 일어설 수 있게 한다.
얼마 전 루시드폴의 노래 ‘고등어’를 우연히 듣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눈 감지 않고 따뜻하게 손 잡으며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라고 얘기하는 연대만큼 강한 것이 있을까?
나는 ‘결사항전’, ‘사수’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결의를 보여주기에 좋은 말이지만 그것은 나의 선택을 제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크레인에 오르는 운동도 필요하지만 크레인에 오른 사람을 살아 내려오게 하는 운동도 필요하다. 지지하고 격려하는 운동도 필요하지만 위로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운동도 필요하다.
김진숙 씨는 크레인 위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주익 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주익 씨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주익 씨가 살아생전 마지막 봤던 세상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습니다.” 이 힘에 우리의 힘을 보태야 한다. 날마다 내려오는 연습을 하는 그 사람이 살아 내려올 수 있도록.
4. 파란 나라와 빨간 나라
우리 아이는 지금 15개월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니 지금 현재만큼 미래가 걱정이다. 일본 대지진에 이어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사고를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전 세계적인 탈핵 움직임에도 원자력 르네상스를 부르짖는 이상한 나라, 핵발전소의 고장이 잇따르는데도 괜찮다며 안심하라고 강요하는 나라, 사계절은 옛말이고 열대 폭우가 내리는 나라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니 걱정이 태산이다.
요즘 아이랑 같이 ‘뽀로로와 함께 노래해요’를 자주 본다. 동요가 쭉 나오는데 그 중엔 ‘파란나라’라는 동요도 있다. 대학 때는 이 노래를 ‘빨란 나라’로 바꿔서 부르기도 했는데. 사실 색깔이야 빨갛든, 파랗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한번 해 보고 온 세상 모두가 손을 잡고 함께 바꿔갈 수 있다면.
사실 온 세상이 한 가지 색깔만 가져야 한다는 건 끔찍한 상상이다. 색깔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손을 잡고 어떤 나라를 상상하고 그 나라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는 점이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