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의 ‘진짜 시험대’가 필요하다


6․2 지방선거가 끝났다. 선거 결과에 대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지만 한나라당의 패배라는 사실 외에 진보정치의 성과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선거에서의 승리를 무엇으로 판단해야 옳을까? 중요한 쟁점의 부각, 후보자 당선비율, 비례대표 정당지지율, 이런 기준들이 얘기되고 있지만, 이런 기준들은 부르주아정치의 기준과 얼마나 다를까? 승리를 판단할 수 있는 진보정치의 기준은 아직 세워지지 않은 듯하다.

유권자들이 꿨던 꿈은 이번 선거를 통해 얼마나 현실이 되었을까? 4대강 사업이 중단되고 삼성과 같은 재벌이 해체되고 남북한의 긴장이 완화되는 꿈은 얼마나 실현되었나? 그리고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 4년 후의 지방선거 때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은 유권자는 얼마나 될까? 몇몇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들이 정치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정치혁명은 아직도 과제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하니 진보정치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후보가 당선된 3곳의 구청이 진보정치의 미래에서 중요한 시험대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단일후보가 당선된 여러 지역에서도 공동정부를 구성하는 새로운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실험을 진보적으로 이끌 수 있을까?


한 가지 좋은 방법은 과거에서 교훈을 찾는 것이다. 이미 민주노동당은 울산 동구와 북구에서 단체장으로 선출되고 의회에서도 다수당을 구성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경험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고, 공식적인 평가도 찾기 어렵다. 다른 무엇보다도 의원의 의정활동이나 구청장의 구정활동을 평가하는 기준이 없다는 점은 큰 문제점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과거의 경험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무엇이 진보적 지방자치의 걸림돌이고 그 걸림돌을 제거할 방법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공동정부 구성과 관련해서는 과거의 정치권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인수위나 주요한 몇몇 자리에 몇몇 사람이 들어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특히 민주당의 지역조직은 한나라당과 크게 다르지 않고 여러 가지 이해관계에 묶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정부 구성에만 관심을 쏟다가는 큰 코를 다칠 수 있다. 진보정치의 시험대를 만들기는커녕 구태의연한 권력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 수도 있다. 그러니 밀실에서 타협을 하거나 정책을 만들지 말고 공개된 광장에서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진보정치의 파트너는 후보를 단일화한 정당이 아니라 지역의 주민들이다. 그러니 주민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참여예산제도를 비롯해 이미 조례로 도입된 각종 제도들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고 복지관과 도서관, 주민자치센터 등의 시설들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시작부터 진보정치는 뭔가 다른 점을 주민들이 실감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주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구호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이다. 주민들의 삶이 바뀌어야 진보적 지방자치가 가능하다. 그러니 주민들이 움직이는 동선, 주민들이 일하고 소비하며 쉬는 공간, 주민들이 만나고 소통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야 한다. 특히 당선된 교육감들과 더불어 미래의 시민인 청소년들이 지역에서 시민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중을 기약하지 말고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과제들부터 하나씩 해결해가야 한다.


사실 이런 과제들을 4년 안에 모두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4년을 보지 말고 8년, 12년을 장기적으로 보면서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가면 주민들도 기꺼이 진보정치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려 할 것이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브이의 가면과 옷을 입고 등장한다. 여주인공은 말한다. “그는 당신이고 저이기도 했어요. 그는 우리 모두였어요.” 우리에게도 아름다운 밤이 필요하다.

 

선거 끝! 정치 끝?

: 축하의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이르다



6․2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완패로 끝이 났다. 한나라당은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자리를 지켰지만 서울시 내 25개 구청장 중 단 4개만을 차지했다. 서울시의회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전체 106석 중 27석을 차지했다. 경기도에서도 한나라당은 31개 시장․군수 선거에서 단 10개를 차지했고, 도의회 전체 124석 중 42석을 차지했다. 어렵게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자리를 지키긴 했지만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기는 어렵게 되었다.


허나 한나라당의 완패가 ‘선거의 승리’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번 선거결과를 보면 한나라당이 빠진 자리를 대부분 민주당이 채웠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 공천과정 때 민주당 내부에서는 전략공천, 이중당적, 공천뒤집기 등의 잡음이 터져 나왔다. 개혁정당의 공천과정에서 벌어지면 안 될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투표가 권력을 이겼다”는 민주당 정세균 대표의 말은 본질을 감추려는 시도이다.


교육감 선거에서는 곽노현, 김상곤 등의 진보교육감 후보들이 6명이나 당선되며 교육정책의 변화를 예고했지만 정치인을 뽑는 선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여러 지역에서 착실히 활동을 해 왔던 풀뿌리 후보들이 중앙정치의 바람에 밀려 낙선한 점은, 그리고 민주당이라는 이유만으로 검증되지 않은 후보들이 다수의 표를 얻은 상황은 그 불안함을 예고한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정당득표율을 봐도 비슷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더욱더 불안한 건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이기려는 ‘반MB연합’, 선거연합이 선거 이후에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상급식 찬성, 4대강 반대 외에 ‘반MB연합’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며 공통의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당선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민주당 후보로 단일화했고 그렇게 당선된 지역에서 야권연대는 어떤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 지금처럼 단체장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지방자치제도 하에서 공동지방정부는 어떻게 작동될까? 특히 단체장만이 아니라 지방의회에서도 민주당이 많은 의석을 확보한 상황에서 권력분점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번 선거에서 표를 몰아줬던 지역주민들은 이런 권력구조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이런 정치구조에 대한 논의 없이 무조건 단일화한 지역일수록 선거의 후폭풍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선거 결과는 한나라당과 청와대의 오만함과 독선에 경고를 보냈다는 점만을 보장할 뿐이다. 그마저도 저들이 정책을 얼마나 변화시킬지는 지켜봐야 할 부분이고 어쩌면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어서 여론을 바꾸고 조작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니 선거로 경고했으니 알아서 하겠지라며 손을 놓을 게 아니라 더욱더 적극적으로 각각의 사안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리고 민주당이나 다른 정당이 집권한 지역에서도 후보들이 제대로 일하는지 감시해야 한다. 무상급식이나 4대강사업 반대 외에 지역사회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사실 무상급식은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한나라당 후보들조차 공약으로 내걸 정도로 많은 예산이나 정책전환이 필요하지 않은 공약이고, 4대강사업 반대는 국책사업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지방정부의 간섭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민주당 후보들이 내건 공약들을 살펴보면 그 규모만 작을 뿐 4대강사업과 비슷한 형태의 개발공약들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쓸데없는 개발사업들로 지역토호들의 배를 불리지는 않는지, 선거를 도왔다는 이유로 특혜를 받는 사람들은 없는지, 내가 낸 세금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틈틈이 지방자치단체의 홈페이지에 들려서 지역사회의 비전이 제대로 만들어지고 정책이 집행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가끔 지방의회에 방청을 가서 뽑아준 의원들이 제 몫을 다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지역의 학교와 복지관, 도서관, 주민자치센터 등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겉만 뻔지르르하고 속은 곯아서 우리 삶을 위협하는 정책은 없는지 계속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경기도지사, 서울시장을 지지했던 표의 수라면 주민들이 직접 조례를 발의할 수 있고 중요한 정책에 관한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도 있다. 만일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이 선거 때 약속했던 것과 다른 행동을 하거나 실패할 정책을 추진한다면 주민소환제도를 통해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다.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정치인들이 긴장하며 일꾼 역할을 제대로 한다.


잘 뽑아줬으니 정치인들이 알아서 잘 하리라고 믿는다면 큰 착각이다. 주인이 일을 제대로 시키지 않으면 머슴들은 주인을 깔보기 마련이다. 그러면 “갈아봤자 소용없다”는 우리사회의 정치불신은 또다시 높아질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늘어났다면, 지금 우리는 그런 불신과 냉소를 가라앉힐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


 

투표율을 높이고 싶다면 기권의 권리를 달라!

: 거짓 선거판을 거부하고 시민주권을 보장하는 기권란을 만들자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시도의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율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투표율이 지나치게 낮으면 선거의 정당성이 사라지니, 선관위는 시민들에게 투표를 권유할 뿐 아니라 상품권이나 컴퓨터 등을 경품으로 주는 변칙적인 방법까지 쓰고 있다. 하지만 그런 편법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지는 의문이고, 이런 편법들은 선거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더욱더 왜곡시킬 수도 있다.


특히 이런 선관위의 편법은 투표율이 낮은 이유를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찾는다. 허나 사람들이 투표장을 찾지 않는 건 투표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투표할 사람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내가 사는 용인시만 하더라도 세 명의 시장후보가 있는데, 세 명 모두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한나라당, 민주당의 후보는 국회의원이 공천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선출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 다른 한 명의 후보인 현직시장은 인사비리로 이미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세 명 모두에게 께름직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운데, 이 세 명을 놓고 사람들이 투표장에 가서 투표를 하고 싶을까?


더구나 시장만이 아니라 도의원, 시의원, 교육의원을 놓고 봐도 비슷한 마음이다. 홍보물을 보면 이런저런 경력을 써놓았지만 선뜻 지지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선거 끝나고 나서 정당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비례대표도 께름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이 용인시만의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마음에 들지도 않는 사람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뽑아야 하는 선거를 민주주의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렇게 뽑을 사람이 없는데도 투표하고픈 마음이 생길까?


따라서 정말 투표율을 높이고 싶다면 기권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진정 시민이 주권자라고 여긴다면 시민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후보를 찾을 때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자를 거부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하나 만들어서 시민들이 지금 나온 후보들 모두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드러낼 수 있도록 보장하면 된다. 이런 선거를 거부하겠다는 시민들의 마음이 드러날 수 있도록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만들자.


시민들 다수가 기권란에 기표하면 선거를 다시 치르도록 해야 한다. 주권은 정치공동체의 틀을 만들 권리이다. 한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응당 시민들의 주권을 보장해야 한다. 선거는 시민이 일꾼을 고르는 자리이지 일꾼이 시민들에게 뭘 해주겠다며 유혹하는 장이 아니다. 더구나 그들이 쓰는 예산은 시민들이 낸 세금이지 그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 마련한 돈이 아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예산을 제대로 써야 시민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다.


이미 2008년도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때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 선거가 끝나고 유야무야 넘어갔다. 정치인들이 이런 주장을 반길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야 마음대로 권력을 만끽할 수 있으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제도개선을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도 그런 사례가 없다면 우리가 지금 만들면 되고, 민주주의란 특정한 모델이 아니라 민중이 지배하는 방식이니 우리 실정에 맞게 만들면 된다. 그리고 선거를 다시 치를 비용이 문제라면 그런 후보자들을 공천한 정당이 그 비용을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당원들이 내는 당비보다 국고보조금으로 정당을 운영하면서도(2008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정당의 당원들 중 당비를 내는 사람은 7.1%에 불과하다) 선거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정당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면 정당도 더욱더 신중하게 후보자를 공천하지 않을까?


그들이 권력을 쥐고 있어 선거제도를 바꿀 수 없다면 우리가 직접 뜻을 밝히자. 기표소에서 기권란을 그리고 그곳에 기표를 하자. 그렇게 기표하면 잘못 찍어서 생긴 무효표와 구분되니 우리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다. 투표율을 높이면서도 수동적으로 지금의 선거판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의 정치의지를 드러낼 수 있다. 그렇게 감시하는 시민들의 눈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당선된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고 멋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대학이 처한 상황은 위기가 아니다. ‘이미’ 대학은 파국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올해 3월의 김예슬 선언은 대학을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로 묘사했다. 누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심지어 대학이 손수 땅장사를 하거나 용역노동자들을 착취하기도 하니 막장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그 실상은 이미 드러났고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파국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대학과 윤리


얼마 전 경희대의 한 여학생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막말을 한 사건이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마치 심각한 문제가 터진 것처럼 난리이지만 이미 윤리가 사라진 대학에서 무슨 패륜을 논하는가? 불법비자금 조성으로 형을 선고받은 대학이사장이 ‘대학개혁’을 내세우며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현실에서 어떤 윤리를 얘기할 수 있을까? 용역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이나 휴식공간조차 제공하지 않고 이에 항의하면 해고하는 대학에서 어떤 윤리를 얘기할 수 있을까?


지금의 대학이 비윤리적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사건들을 디딤돌로 삼아 대학이 자신의 윤리를 정의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해야 옳다.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위선의 막을 걷고 자신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그것이 윤리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윤리라는 언어의 모순을 드러내고 진정한 윤리를 실천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만일 대학이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자신의 윤리를 증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예슬은 대학생이 대학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이미 증명했다. 그리고 《녹색평론》 2010년 5․6월호에는 미국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을 거부하자고 외치는 존 테일러 개토(J. Y. Gatto)의 ‘바틀비 프로젝트’라는 흥미로운 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 개토는 “시위도 필요 없고, 돌을 던질 필요도, 반대를 위한 정치활동을 할 필요도 없다”고 얘기하며 답안지에 “나는 이 시험을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자고 주장한다. 만일 시험을 거부한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으면 어떻게 하냐는 물음에 개토는 이렇게 답한다. “대학은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업이다. 고객을 필요로 하는 사업체인 것이다.” 그러니 고객이 애써 대안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거부의사를 밝히면 기업이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윤리이다.


지금은 대학이 이런 거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등록금이 계속 오르면 굳이 국내대학을 다닐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교육개방으로 곧 외국대학들(막강한 경쟁업체들!)이 국내에 캠퍼스를 만들기 시작하면 누가 국내대학을 다니려 할까? 지금은 중앙일보라는 일개 신문사가 만든 ‘대학평가’에 목숨을 걸고 있지만 그런 방식이 계속 통할까? 따라서 거부가 계속 이어진다면 대학은 대안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대학 밖의 다양한 학문공동체들이 늘어난다면 대학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세미나팀, 생활공동체, 학회 등 다양한 공동체들이 활동하며 대학의 변화를 자극할 수 있다. 이런 대학 밖의 공동체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학생들에게는 대학에 끊임없이 새로운 학문을 요구해야 한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겠다는데 대학이 이를 말릴 수 있을까?


기죽지 말고 나의 요구, 우리의 요구를 ‘당당하게’ 대학에 요구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대학생 선언, 대학원생 선언이 빛을 볼 수 있는 때이다. 더 많은 선언이 새로운 윤리를 만들 수 있다.


대학과 협동


선언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언어가 아니듯 대학은 대학생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대학기구에서 일하는 노동자, 프랜차이즈 업체과 용역업체, 위탁급식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대학교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대학강의의 절반을 도맡는 시간강사도 노동자이고, 자신을 특권층이라 믿는 교수들도 사실은 고용된 노동자일 뿐이다. ‘미래의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과거의 학생운동은 학교 밖으로 나가 공장에서 ‘노학연대’를 외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의 대학이야말로 노학연대가 필요한 최전선이다. 이미 그런 흐름이 드러나고 있다. 고려대와 연세대, 이화여대, 동덕여대, 성신여대 등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이 청소용역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얘기를 나누는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연대의 범위가 더욱더 넓어져 강사와 교수들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면, 대학을 바꿀 든든한 힘이 될 수 있다.


연대가 꼭 과거의 이념적인 방식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그런 점에서 대학생협의 구성과 발전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8년에 처음 만들어지고 현재 전국 22곳의 대학에서 활동하는 대학생협(
http://www.univcoop.or.kr/)은 좋은 본보기이다. 대학구성원들이 공동출자해서 만든 대학생협은 매점, 서점, 식당 등으로 조합원들의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관계망을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협동은 이념이 아니라 생활로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할 수 있다.


지금의 대학에 가장 절실한 부분도 바로 협동이다. 서로가 자신의 몫을 내놓고 서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며 함께 할 일을 찾으면 된다. 학생들은 강좌만이 아니라 생활에서 여러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받고 다양한 자원활동에 열정을 쏟는다. 교수와 강사들은 학교가 ‘정한’ 강좌 외에 자신있는 강좌를 열어 학생만이 아니라 지역주민들도 초대한다. 노동자들 역시 자기 업무와 연관된 생활의 지혜를 가르치고 대학의 현안을 얘기하며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캠퍼스 근처의 상인들이나 지역주민들도 참여한다면 협동의 관계망이 더욱더 넓어질 수 있다. 누가 ‘멍석’만 깔아주면 이런 논의들이 이어질 수 있고,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대학당국 없이도 대학을 운영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흐름이 순조롭게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족벌과 기업이 지배하는 대학은 이런 자율적인 흐름을 가로막으려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고, 승자독식의 사회질서는 관계를 끊고 경쟁을 강요할 것이다. 하지만 생활로 엮인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공동체는 외부의 힘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대학이 우리를 버린다면, 우리도 대학을 버리자. 비우면 채울 것이 보인다.




기계님의 블로그(http://blog.jinbo.net/Darae/?pid=11)에서 퍼왔습니다.


지난 4월을 마지막으로 한양대 연구소를 그만뒀다.
여러가지 고민이 들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대학에 남아있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를 쫓으며 살지는 않았지만 프로젝트에 묶인 삶이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했다.
이제 당분간은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생각이다.

앞으로 40대의 시간을 새로운 대학을 만드는데 바칠 생각이다.
대학 내에서 대학을 넘어서는 방법, 대학 밖에서 새로운 대학을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찾아보려 한다.
많은 사람들과 공간들을 서로 엮고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준다면 충분히 가능할 듯하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힘차다.
가자!

 

한국은 죽음이라는 사건에 너무 민감하다. 죽음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사회의 모든 쟁점과 논쟁을 중단시키며 시민들의 관심을 빨아들인다. 일단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다른 얘기를 꺼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람이 죽은 마당에 정치는 무슨”이라며 도덕이 현실을 압도하고 시민들에게 추모를 강요한다.


천안함 침몰 이후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지방선거라는 중요한 정치결정이 불과 한 달 남짓 남았는데도 주요한 쟁점들에 관한 논쟁이 제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4대강 사업이라는 희대의 살상극이, 자연의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려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의 관심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수병들의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 MBC방송국에서는 낙하산 인사를 반대하는 파업이 한 달을 넘기고 있건만, 다른 언론들은 새만금방조제의 역사를 찬양하고 천안함의 병사들을 영웅으로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비리와 사법부의 스캔들이 매일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부패한 공화국인데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나라를 위한 추모와 성금의 열기가 뜨겁다.


지금까지 천안함 유족 성금이 250억 원을 넘고 조문객도 6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누군들 젊은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애도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개인이 그런 애도의 마음을 품는 것과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물론 칼로 도려낸 것처럼 그런 일이 분리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늘어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관심을 적절히 분산시켜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사건 앞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국가는 가치있는 죽음과 가치 없는 죽음을 구분하면서 존중받을 수 있는 삶의 대상을 정하려 한다. 국가는 병사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용사’로 추앙하지만 삼성반도체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불러온 박지연씨의 예고된 죽음을 은폐한다.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몰고 강바닥을 헤집으며 강의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면서도 ‘강 살리기’라는 말을 쓰듯이 국가는 자신에 맞서는 생명들의 죽음을 은폐하거나 왜곡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죽음만을 선택해서 그것을 미화한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유리한 것만 부각시켜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려 할 것이다.


이런 강력한 죽음의 정치에 맞서는 방법은 죽음의 의미를 애써 깎아내리거나 그것에 맞서는 것보다 국가가 은폐하고 감추는 죽음을 드러내고 저항하는 죽음, 억울하게 죽어간 죽음들을 소환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가오는 5월이 중요하다. 80년 5월, 91년 5월 등 우리의 현대사를 결정지었던 중요한 사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을 추모하는 것은 국가의 부조리와 실패를 드러내는 중요한 정치행위가 될 수 있다. 권력에 희생되고 짓밟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현실로 소환해서 우리는 새로운 권력을 구성해야 하는 필요성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권력에 맞서 우리는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사건은 의례적인 행사가 되면 그것이 지닌 전복적인 의미를 잃어버린다. 국가는 이런 사건들을 단순한 연례행사로 만들어서 그 의미를 축소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흐름에 맞서는 다양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서울에서 큰 행사를 치르는 것보다 지방에서 다양하고 작은 행사들을 치르면서 ‘저항의 지방화’를 모색해야 한다. 각 지방에서 시민들이 부패하고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어떤 저항을 펼쳤는지를 알리고 바로 지금 우리가 그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 우리의 무기인 말과 사상의 힘을 살려서 권력의 폭력에 맞서야 한다.


곧 500만 추모객의 애도를 받았던 노무현 대통령의 1주기가 찾아온다. 추모의 물결에 휩쓸려 때를 놓치지 않으려면 먼저 상황을 이끌어가야 한다. 이번 지방선거가 선거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단지 선거운동에만 집중한다면 진보정당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삼성을 생각한다』(사회비평, 2010)가 어느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비자금을 폭로하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섰을 때와 비교하면 지나치다고 느낄 만큼 관심이 뜨겁다. 광고나 서평 하나 제대로 실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판매고가 10만부를 훌쩍 넘었다고 한다.


삼성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 책이 나올 때까지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삼성특검이 어이 없이 끝나고 이건희 회장이 사면을 받고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으로 돌아다닐 때까지 10만의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김용철 변호사가 배신자, 매국노로 욕을 먹고 그의 양심선언을 도왔던 신부님들이 한직으로 물러날 때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태안주민대책위의 성정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삼성반도체의 박지연씨가 23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을 때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지 금서(禁書)에 대한 유혹일까? 어떤 이유로 문제의 책이 잘 팔리는 걸까? 사람들은 삼성의 실체를 잘 몰라서, 그래서 그 실체를 공부하려고 책을 사보는 걸까?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으며 열심히 읽는 걸까?



공화국을 꿈꾸는 왕국의 국민들


아직도 한국을 공화국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공화국이라 부르기에 이 나라는 너무나 불공평하다. 가진 놈들이 더 무섭다고 이 나라의 부자들은 서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삼성그룹만 해도 CJ그룹, 새한그룹, 한솔그룹, 신세계그룹과 한 가족이고, 사돈까지 따지면 대상그룹, LG그룹, 중앙일보, 동아일보까지 한 가족이다. 이런 가족관계는 삼성만이 아니라 다른 재벌들에게도 일상이다. 가족관계로 서로에게 보험을 들 뿐 아니라 이들에게는 일이 생기면 즉각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정부가 있다.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상식이 될만큼 둘의 관계는 끈끈하다. 시민들의 관계가 평등해야 공화국이라 부를 수 있을 터인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정반대이다.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이런 부조리에 분노해야 할 터인데, 우리 사회의 풍경은 아주 차분하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삼성의 성공을 시기해서 일부러 흠집을 잡는다고 생각하고 부패를 사실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부패를 인정하더라도 그런 부패가 삼성만의 일도 아니고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우려면 그 정도의 부패는 어쩔수 없다고 얘기한다.

이럴 때를 대비하는 ‘준비된 선수들’도 있다. 삼성에서 문제가 터져 나올 때마다 삼성을 비호하는 지식인들이 있다. 자문교수라는 은밀한 관계를 통해, 때로는 사외이사라는 공식직함을 통해, 때로는 기업의 프로젝트를 통해 기업의 돈을 받는 지식인들이 적잖이 많다(경향신문 취재팀이 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을 보면 그 점이 잘 묘사된다).

예를 들어, 서울대 사회학과의 송호근 교수는 어떨까? 그는 삼성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한국인의 평등지향적 심성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인정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문화,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와 자신의 거리를 좁히려는 열망이 “삼성전자를 세계 50대 기업에 진입하게 만든 경영 기법과 노력에 대한 관심보다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하고, 다른 재벌들은 놔두면서 유독 삼성만을 견제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고 지적한다(송교수에게 이 책을 왜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냈는가라고 물으면 그것도 평등지향적 심성 탓일까?)(송호근, <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


심지어 삼성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나서서 삼성을 먼저 생각하고 챙기기도 한다. 삼성이 최고의 기업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 그래서 너무나 위험한 사람들이 삼성에 대한 공격을 막는데 앞장선다. 심지어 삼성에게 착취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조차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래도 ‘우리 기업’이라며 슬쩍 돌아선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그 끈적끈적한 논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


하지만 어떤 논리로 방어하더라도 공화국의 가장 큰 적은 부패이다. 왜냐하면 공화국은 시민들의 덕성이 공동체에 생명력을 계속 공급하고 시민들이 스스로 정한 법과 규칙을 따르는 나라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공화국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있을 때에만 지속될 수 있다.


그런데 부패는 시민들의 덕성을 타락시키고 법과 규칙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법을 피하는 방법이 ‘능력’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공화국은 부패한 왕정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공화국 시민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왕국의 신민들은 자기 환상을 깨려 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위험한 경험주의


어떤 사안을 비판하다보면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으라는 반박을 듣곤 한다. 어찌 보면 지당하신 말씀이다. 대안 없이 비판만 하면 어쩌란 얘기인가? 그러나 다르게 보면 이런 얘기는 심각한 폭력이기도 하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조차 하지 못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이미 현실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지금 현실이 다른 현실의 출현을 가로막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 사상가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이를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경험주의(ideological empiricism)라고 불렀다. 지금 존재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이런 경험주의는 새로운 현실의 출현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것을 이상으로 만든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믿는 인간을 ‘일차원의 인간(One-dimensional Man)’이라 부르며 이런 인간형을 벗어날 힘을 예술에서 찾았다. 긍정적인 것을 전복시키는 부정의 언어, 인간의 사유를 형성하는 시의 언어가 그 힘이다(허버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문학의 종언이 선언되었고, 시의 언어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문학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을 보여주는데 열중하고 때로는 가족이라는 낭만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그래 이게 현실인데 어쩔 거냐’ 아니면 ‘엄마, 아빠, 가족찾기’이다. 현실을 뛰어넘어 전복적이고 초월적인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언어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이다. 통계자료와 조작된 언어들을 사용하는 세련된 글만이 경험주의의 승인을 받는다. 하지만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변화를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부조리를 고발하는 통계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죽어가는 생명의 고통을 통계와 사회과학의 언어들이 표현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사실과 정보를 접할수록 우리는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변화를 불신하고 냉소한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은 옛말이고 머리와 가슴 모두가 싸늘하게 식은지 오래이다.


삼성그룹은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온 뒤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4월일이 되어서야 내부 게시판에 반박글을 올리고 그룹블로그(
www.samsungblogs.com)를 새로 만들어 공식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듯이 근거없음의 연속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충분한 입증자료가 있다”, “국가기관을 통해 조사를 진행했다”라는 예상된 답변들이 나온다. 싸늘하게 식은 가슴을 숫한 거짓말들이 뒤흔드니 누가 감히 도전하겠는가?


이계삼은 사상가 후지타 쇼조(藤田省三)의 표현을 빌어 우리의 현실주의를 질타한다. “오늘날 이 어이없는 현실이 현실로서 승인되는 것은 아마도 쇼조의 표현처럼 우리들의 인간성에서 본성(nature)의 영역,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천부의 감각이나, ‘상식’이라는 이성적 현실감각, 혹은 ‘양심’이라는 도덕적 감각, 그것도 아니면 그저 ‘분노’와 같은 자연스러운 야생의 정서가 거세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거세한 이른바 ‘현실주의’의 압도적인 질주가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이 모든 파행의 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이계삼, '우리들의 현실주의, <녹색평론> 2010년 3/4월호)


삼성을 생각하는 우리의 자세도 마찬가지이다. 머리로 제아무리 삼성을 생각하고 삼성가의 비리를 추적해도 우리의 몸이, 우리의 생활이 삼성에 젖어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삼성불매운동이 중요하다. 고작 불매운동으로 그 거대한 삼성그룹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이미 이 현실에 포섭되어 있다.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인류 역사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삶들이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눈에 얼마나 무모한 일로 보였는지.



삶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사상가 톨스토이(L. Tolstoy)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서 현재의 생활에 질질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 삶을 살게 되면 너는 사랑의 왕국이 다가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랑의 왕국이 다가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네 생활을 폭력이 아닌 사랑 위에 세워야 한다."(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위대한 인생>)


그런 점에서 삼성을 제대로 생각하려면 삼성불매운동이 필요하다. 삼성불매운동을 한다고 삼성딱지가 붙은 상품을 모두 버리고 다른 재벌가의 신상품을 살 필요는 없다. 새로운 상품을 사지 않고 오래 버티는 것도 불매운동의 한 방법이다.


현명한 불매운동도 필요하다. 삼성그룹의 비자금과 이건희 일가의 수입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삼성전자제품이나 삼성의 의류가 아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삼성카드 등의 제2금융권에서 비자금을 축적하고 전횡을 일삼아 왔다. 이런 자금줄을 틀어막아야 삼성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더구나 삼성생명의 유가증권시장 상장이 5월로 예고되니 삼성생명과 삼성그룹의 실체를 알리며 압박을 가해야 한다.


그리고 삼성은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에버랜드의 위치를 흔드는 것도 필요하다. 삼성에버랜드의 작년 영업실적을 보면 레저부문이 약화되고 급식 및 식자재를 취급하는 외식사업부의 실적이 10.9%나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니 에버랜드 이용 안하기도 중요하지만 에버랜드 외식사업부나 그와 관련된 ‘에버푸드’라는 브랜드를 실패하게 만드는 것도 이건희 일가를 압박하는 좋은 방법이다.


이런 일이 몇몇 사람이나 몇몇 시민단체, 노동조합의 힘만으로 이뤄지기는 어렵다.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공동으로 노력할 때 재벌이라는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다. 이런 노력들이 성공하면 GMO FreeZone만이 아니라 삼성 FreeZone을 선언할 수도 있다. 상상해 보자. 우리 마을에서는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재 보험사들이 명함을 내밀지 못하고 삼성카드 가맹점이나 삼성카드를 쓰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홈플러스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면 즐겁지 않을까? 이런 다양한 노력들이 모여서 6개월 정도 자금줄을 죄면 삼성그룹이나 이건희 일가도 태도를 좀 바꾸지 않을까? 국민들에게 정신차려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네들부터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그리고 삼성에 집중하면 다른 재벌들도 같이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돈으로만 세상을 주무를 수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알려주자. 냉소하지 말자. 지금은 분노해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불매를 넘어 자급(subsistence)의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불매와 자급의 틈을 메우는 힘이 바로 협동조합이다. 소비자생협들이 대기업의 유통망을 벗어난 삶을 가능케 하고, 생산자협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삶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재벌 없이도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우리가 가진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협동의 힘을 실현할 때 다른 삶은 현실이 된다.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꿈을 꾸자.

삼성이 나쁘고 삼성 돈을 받아먹는 정치권이나 언론사가 나쁘다는 얘기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나 <프레시안>의 "삼성을 생각한다" 특집 기사들을 통해 많이 얘기되었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이 그냥 이야깃거리로 끝난다면 몇 년 뒤에 또다시 이런 추악한 얘기들을 듣게 될 터, 이제 우리의 실천이 필요하다.

며칠 전 스물세 살 꽃다운 박지연 씨의 죽음은 우리가 멈추면 안 될 또 다른 이유를 마련해 주었다. 그동안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 중 여러 사람들이 백혈병으로 사망하거나 투병을 하고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반올림에 따르면, 확인된 암 발생자만 22명이고 탈모와 유산, 무월경 등의 증상은 수없이 발견되지만 삼성전자는 단 한 건의 산업 재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아무런 산업 재해도 없는데 사람들의 건강이 나빠지고 목숨을 잃을까.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얘기를 믿을 수 있을까? 단지 기업 내부가 썩어서라기보다는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목숨과 건강이 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삼성을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더 나쁜 것은 삼성이 그런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을 생각은 전혀 없고 돈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는 식의 태도 말이다. 한 푼이 아쉬워 젊은 아들과 딸을 공장으로 보내야 했던 부모들의 아픈 마음을 마지막까지 헤집어버리는 그 태도, 대체 삼성 내에서 어떤 명령을 받고 무엇을 보고 배웠길래 그들의 태도는 그럴까?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와 책임성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삼성전자만이 아니다. 2007년 태안반도를 기름으로 도배했던 삼성중공업은 어떠한가? 지난 2월 26일에는 태안군의 성정대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안 주민 중 네 번째 자살이라고 한다. 특히 성 위원장은 서울고등법원이 삼성중공업의 배상 책임을 56억 원으로 제한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 결정에 대한 항소마저 기각되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기름 유출 사고 이후 태안의 마을에서 암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고 하지만 삼성중공업이 이를 책임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니 이미 많은 비극들이 예고되고 있다.

▲ 태안 기름 유출 사고 직후, 인근 굴양식장의 모습. ⓒ인디코

사실 이런 비상식적인 사건들이 삼성과 관련해 계속해서 일어났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2005년 2월 서울중앙지검은 삼성SDI의 전·현직 직원 12명이 이건희 회장 등 삼성 관계자 8명을 형사 고소한 사건을 기소중지했다. 고소 이유는 개인의 휴대전화를 몰래 복제해서 사람들의 위치를 추적했기 때문이다. 위치를 추적당한 사람들은 노조를 만들려고 했었고, 위치 추적을 한 휴대전화의 발신지는 삼성SDI의 수원공장이었다. 이 정도면 누가 위치를 추적했는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검찰은 "'누군가' 고소인들의 휴대전화를 복제한 사실은 밝혀졌으나, 그 '누군가'를 찾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누군가'를 기소 중지했다"고 밝혔다. 지금 우리가 나서서 바로잡지 않으면 이런 어이없는 일들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삼성 불매 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번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의 김성균 대표의 글(☞관련 기사 : "삼성 불매 펀드, 100억 원을 넘었습니다")처럼 삼성 불매 운동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미 삼성 불매 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삼성그룹의 상품을 사지 않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삼성이 꿈쩍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잠깐 뒤로 물러난 이건희 회장이 국민들에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훈계하며 슬그머니 자리로 복귀하고 해체되었던 전략기획실이 다시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약간 따끔하긴 하지만 아직은 숨통이 막힐 만큼 답답하지 않은 게다. 따라서 이제는 그 숨통을 확 죄어줘야 한다.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등의 제2금융권에서 비자금을 축적하고 전횡을 일삼아 왔다. 이런 자금줄을 틀어막아야 삼성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더구나 삼성생명의 유가증권시장 상장이 5월로 예고되고 국내 투자자만이 아니라 외국인 투자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삼성생명과 삼성그룹의 실체를 알리며 압박을 가해야 한다. 삼성생명을 중심에 놓고 삼성이 운영하는 보험, 카드 등의 시장 점유율을 떨어뜨리고 앞으로도 그 점유율이 계속 떨어질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예고해야 한다.

그리고 삼성은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 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에버랜드의 위치를 흔드는 것도 필요하다. 삼성에버랜드의 작년 영업 실적을 보면 레저 부문이 약화되고 급식식자재를 취급하는 외식 사업부의 실적이 10.9퍼센트나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니 에버랜드 이용 안 하기도 중요하지만 에버랜드 외식사업부나 그와 관련된 '에버 푸드'(☞바로 가기)라는 브랜드를 실패하게 만드는 것도 이건희 일가를 압박하는 좋은 방법이다. 에버랜드의 사업에 관심을 두고 불매 운동을 벌이자.

이렇게 삼성 일가의 자금줄을 죈다면 삼성 불매 운동은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나 진알시(진실을 알리는 시민)같은 단체만이 아니라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소액 주주 운동에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참여연대이나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은 주주총회장에서 이건희 일가의 막무가내 행동을 막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동단체나 시민단체도 회사의 급식 회사를 확인하고 조합원이나 회원들에게 불매 운동을 알리는 메일과 편지를 보내서 동참을 유도하면 좋겠다.

또 30만 명이 넘는 조합원을 가진 소비자 생활협동조합들도 불매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 좋겠다. 소비자 생협의 매장에서 삼성카드를 다루지 않고 조합원에게도 삼성카드를 해지하고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재 등을 이용하지 말자고 권유하면 좋겠다(삼성카드는 가맹점 수수료율이 높기로 유명하니 이번 기회에 그런 불공정함도 바로잡자).

삼성 불매 운동에 찬성하는 단체들이 단체 홈페이지와 블로그에 "삼성 불매 운동에 동참합니다"라는 배너를 달고 동참 단체들이 등록하는 홈페이지를 만들면 그 힘을 증명할 수 있다.

이런 노력들이 성공하면 '삼성 FreeZone'을 선언할 수도 있다. 상상해 보자. 우리 마을에서는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재 보험사들이 명함을 내밀지 못하고 삼성카드 가맹점이나 삼성카드를 쓰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홈플러스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면 즐겁지 않을까? 이런 다양한 노력들이 모여서 6개월 정도 자금줄을 죄면 삼성그룹이나 이건희 일가도 태도를 좀 바꾸지 않을까? 국민들에게 정신 차려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네들부터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그리고 삼성에 집중하면 다른 재벌들도 같이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돈으로만 세상을 주무를 수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알려주자. 냉소하지 말자. 지금은 분노해야 할 때다.
삼성불매 소비자주권 선언을 널리 퍼뜨리면 좋겠습니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
조직적인 운동도 필요하겠지만 우리 각자의 다짐어린 선언도 필요합니다.
아래의 선언문을 각자 자기 나름대로 바꿔서 선언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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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사이에 삼성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 걱정스럽긴 합니다.
이미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삼성의 온기를 구분할 재간은 나에게 없을 것 같지만,
적어도 삼성의 로고가 찍힌 완성품이나 홈플러스, 에버랜드, 삼성의료원, 삼성카드, 삼성생명, 세콤 등등을 앞으로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삼성의 성장은 발전의 상징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자본권력의 사악함의 상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탈법과 불법의 경계가 없는 한 인간이 다시 경영에 복귀하는 건, 상식적인 수준에서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저
상식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약속대로 경영진에서 물러날 때까지, 삼성그룹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져서 자본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삼성제품을 구입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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