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운동의 흐름과 노조의 개입전략

 

하승우(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① 지역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운동의 흐름

 

지역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운동의 흐름을 보는 시각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운동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지역사회에서도 다양한 주민대변형(advocacy) 단체들이 운동을 벌이고 있고, 이와 달리 ‘풀뿌리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단체들은 주민주체형 운동을 벌이고 있다. 주민대변형 단체들은 지역경실련이나 중앙 시민단체의 지역지부들이나 ‘참여’자를 붙인 단체들이라 얘기할 수 있는데, 주로 중앙정부와 관련된 이슈를 가지고 싸우거나 지방정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에 풀뿌리 운동은 특정한 이슈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운동의 과정에 주민들을 얼마나 동참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하승수는 풀뿌리운동의 주체를 “자신의 삶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 규정하고 중요한 것은 “단지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과정을 통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치능력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사회변화를 만들어나가는 힘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고 “주체를 형성해 나간다는 것은 풀뿌리운동의 실천과정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풀뿌리운동의 목적”(하승수, 2006a: 3)이라고 주장한다.

<표> 90년대 시민운동과 풀뿌리운동(오관영, 2007a)

 

90년대 시민운동

풀뿌리운동

운동 대상

사회구조(법과 제도, 정책)

사람과 생활(의․식․주)

운동 방법

하향식

(세상을 진단하고 논평하는 방식)

상향식

(자신이 원하는 일을 지가 좋아서 하는 방식)

운동의 주체

시민단체

주민

운동의 평가

성과 중심

(언론의 보도, 법제도의 변화 등)

과정 중심

(사람들과의 관계, 자기만족 등)

합의양식

선거와 관리주의

뽑기(?)와 자율주의

운동의 속도

빠름

(1년 단위 총회, 프로젝트 등)

느림

(중장기적 프로젝트, 계획 등)

이런 운동과 함께 생활협동조합운동이나 자활운동, 지역사회복지운동처럼 특정한 분야에서 운동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곳도 있다. 이런 분야의 운동들이 특수한 영역의 고립된 운동처럼 보일지 모르나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적 경제나 복지국가 차원에서 미래의 비전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지역운동의 주요한 흐름으로 봐야 한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런 다양한 운동들은 민주화와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라는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지역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95년도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는 제도정치와의 접목을 모색하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의제의 측면에서 보면, 현재 지역운동은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등 다양한 생활상의 이슈들을 주요한 의제로 만들어가고 있다. 도서관이나 보육, 학교급식은 그 의제 자체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의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주민이 참여하고 의식을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긴다. 도서관이나 놀이터, 공부방, 방과후학교 등이 일정한 공간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면, 보육이나 학교급식 등은 지역사회 내의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방식(기존의 단체들도 동참)으로 의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만들기운동처럼 다양한 의제들을 공동체 형성을 통해 해결하려는 운동의 흐름도 있다. 아파트공동체운동이나 생태공동체운동, 문화공동체운동 등은 마을만들기운동의 주요한 흐름이다. 한국에서 마을만들기운동은 눈으로 보이는 물리적인 공동체보다 사람들의 관계가 서로 어우러지며 보살핌의 망을 만드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지역운동의 중요한 주체인 여성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운동도 지역운동의 중요한 흐름이다. <대전여민회>나 서울 수유리의 <녹색마을사람들>(前<녹색삶을여는여성들의모임>)처럼 생활적인 이슈에 여성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경우는 지역운동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그리고 <여성의전화>나 <여성민우회>같은 단체들의 지부도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여성정책 분석이나 성인지적 관점에 따른 예산분석 등 지방정치에 개입할 뿐 아니라 생활문화공동체를 형성해 가고 있다.

또한 주민자치센터나 주민자치위원회를 민주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전략도 지역운동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해 가고 있다. 그리고 참여예산제도나 주민투표, 주민발의와 같은 주민참여제도를 활용하는 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도시계획이나 재개발, 주거권에 개입하려는 운동도 조금씩 활성화되고 ‘미래의 시민’인 청소년들을 지역사회의 주체로 구성하는 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또한 천안의 풀뿌리희망재단처럼 지역재단을 설립하는 운동도 추진중이다.

표>풀뿌리 시민운동사례 공모사업 수상사업(오관영, 2007b)

제1회(2003년)

풀뿌리상

주민참여형 삶터가꾸기 ‘가고싶은 놀이터 만들기’

서울 열린사회시민연합 북부시민회

풀잎상

주민과 함께한 문회유적 보전운동

경기 시흥 YMCA

풀꽃상

시민과 함께한 맹산반딧불이 자연학교의 녹지조성 및 관리

경기 분당환경시민의 모임

풀대상

협동과 자치에 기초한 생명의 도시만들기

원주 생활협동조합협의회

풀씨상

음식물쓰레기 재활용, 지역정치운동 등 여성운동

서울 동북여성민우회

특별상

지역노조와 함께하는 노동안전보건활동

노동건강연대

 

지역시민단체들의 행정∙의정 감시활동

전남 순천 YMCA 등

제2회(2004년)

풀뿌리상

주민소환제조례제정

광주시민단체협의회

풀잎상

상생의 실험대, 청주 원흥이마을 두꺼비서식지 보전운동

충북환경운동연합

풀꽃상

목포시건축물의허가등에있어장애인편의시설설치사항사전점검에관한조례 제정운동

전남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목포경실련

 

제주도 친환경우리농산물급식 추진운동

친환경우리농산물학교급식제주연대

풀씨상

원주한지문화제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

 

나눔과 참여가 아름다운 지역사회 가꾸기

대전여민회

제3회(2005년)

풀뿌리상

무등산공유화운동

광주 (사)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풀잎상

마을어린이도서관 만들기를 통한 지역공동체형성운동

대전 알짬어린이 도서관

풀꽃상

고양시 노래하는 분수대 건립 저지 활동

고양 여성민우회

 

‘즐거운 멤버’ 사업을 중심으로 한 도봉시민회 지역운동의 깊이와 향기

서울 도봉시민회

풀씨상

주민과 함께 해온 신모라지역 마을만들기 운동

부산 신모라창조어마니회

 

동네경제 활성화를 통한 지역 경제살리기

대전경실련

제4회(2006년)

풀뿌리상

품앗이로 아이를 함께 키우는 마을 만들기

서울 동대문구 품앗이 공동체

풀잎상

주민발의 조례제정을 통한 공공병원 설립운동

경기 성남시립병원추진위원회

풀꽃상

지역자치실현을 위한 의정참여활동

한국여성의전화연합 목포지부

 

살 맛 나는 임대아파트 공동체 만들기 사업

서울 관악주민연대

풀씨상

자연 속에서 사회소외계층과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들기

서울 환경을 사랑하는 중랑천 사람들

 

부산시 북구 덕천교차로 하나은행 앞 횡단보도 복원운동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 북부지역회원모임

제5회(2007년)

풀뿌리상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의 도서관을 만들어 주세요

부산 희망세상

풀잎상

마을마다 어린이도서관만들기를 통한 생활공동체기반구축

대전마을어린이도서관협의회

풀꽃상

성서공동체 FM <담장 허무는 엄마들>

(사) 성서공동체 FM

 

용인지역 이주민공동체와 함께 열어가는 다문화 지역공동체

한국CLC 부설 이주노동자인권센터 

풀씨상

지역주민이 만들어가는 건강마을 만들기

인천평화의료생활협동조합

 

2006년 지리산권 공동학습 프로그램

지리산생명연대

 

 

② 지역운동의 방향에 대한 제언

 

지역운동은 근본적으로 풀뿌리운동의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고 믿는다(중앙정치에 대한 개입은 필요하지만 중앙운동과 지역운동 사이에 일종의 ‘역할분담’이 필요하다고 본다). 풀뿌리운동은 ‘지역’보다 ‘삶의 공간’으로 정의되어 “폭넓은 의미의 지역운동과는 구분”되고 있다. 즉 운동공간을 지역으로 설정한다 하더라도 전문가나 활동가 중심의 운동노선을 따르면서 사람들을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소외시킨다면 풀뿌리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하승수, 2006). 즉 풀뿌리운동은 지역을 기반으로 삼기는 하지만 단순히 지역에서 활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풀뿌리운동으로 정의되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공유되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지역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으로만 풀뿌리운동을 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풀뿌리운동의 특징은 무엇일까?

- 풀뿌리운동은 주민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주민과 함께 가는 운동이다.

- 풀뿌리운동은 주민의 구체적인 조건에서 시작하고 주민에 대한 지나친 낙관도, 비관도 전제하지 않는다. 상식에서 시작해 주민이 전체적인 사회구조를 깨달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 풀뿌리운동은 활동가와 주민의 상호 이해와 신뢰관계 위에 구성된다. 삶의 터전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활동가가 아니라 주민들이다.

- 활동가는 주민을 끌어가는 지도자가 아니라 주민이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 활동가는 새로운 지도자를 기르는 역할을 해야지 스스로 지도자가 되면 안 된다.

- 풀뿌리운동은 느린 운동이다.

풀뿌리운동의 과제는 현재 심각한 위기를 낳고 있는 식량과 에너지의 부족, 기후온난화, 비정규직의 확산 등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운동세력과 연대를 해야 한다. 다만 그 연대는 자신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칙을 다른 운동에 확산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연대는 결코 그런 말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기존 운동의 관성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박승옥은 농업기반공사 노동조합, 전북공무원노조연맹 등이 새만금에서의 공사 강행을 지지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어려움을 얘기한다. 기업별 노조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공공적 전망을 가지기 어렵고, 해당 사업과 일자리가 직접 연계되어 있을 경우 노동조합이 사업 자체를 반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운동 역시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의미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거나(하종강, 2006: 46) 시민적 공공성을 국가와의 관계에서만 확보하다보니 역설적으로 그 재현의 구조에서 국가에 포섭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조정환, 2005: 219).

이런 구체적인 실험들을 묶을 수 있는, 생활과 세계화를 잇는 대안담론이 필요하다. ‘탈정치 생활운동’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된 말인데, 생활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강한 정치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치라는 말은 선거나 정당같은 제도화된 정치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장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을 나누고 조절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뜻한다. 한국사회는 과거 식민지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운동세력에서는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순수화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정치가 높은 선을 구현하고 악을 몰아내는 방법인양 사고되는데, 사실 정치는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한 단계씩 발전하는 불순한 개념이다. 정치에 문제가 있을 수록 더욱더 적극적으로 정치를 실현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③ 노동조합의 지역사회 개입전략에 대한 제언

 

기존의 노동조합의 지역사회 개입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많다. 예를 들어, 하승수는 단체중심, 조직중심의 접근이 노조의 지역사회 개입을 어렵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방식의 개입은 주민을 배제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기 쉬우며 ‘주민들 속으로’ 들어갈 필요성을 없애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운동 중심의 관심에서 벗어나 복지, 환경, 교육, 문화, 성평등같은 생활의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상의료, 무상교육같은 주장보다 구체적으로 그 지역사회 내의 의료와 교육현실에 대한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할 지역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또한 수평적인 의사소통과 사업진행, 몸으로 드러나는 뜻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한다(하승수, 2006). 김현우 역시 “노동운동 전반의 인식부족, 관성적 조직사업 작풍, 보수적 지반이 뿌리깊은 지역사회 분위기, 중앙집중․서울 중심으로 고착화된 운동방식”(김현우, 2005: 90)을 지적한다.

물론 몇 가지 사례로 긍정적인 결합관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김현우 외, 2006). 하지만 그런 사례들로 낙관을 하기는 어렵다. 지역사회 노동조합주의(community unionism)의 경우도 비정규직과의 결합에 소극적인 민주노총의 움직임을 볼 때 낙관하기도 어렵다. 심지어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지역적인 의제에 관해 보수적인 견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생활상의 의제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공장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그러려면 조합원과 조합원 가족을 분리하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단위노조의 틀로 사고하는 관성에서도 벗어나 지역사회라는 틀로 의제를 구성하고 정치적인 개입을 해야 한다.

각 지역에 따라 현안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어떤 의제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의제를 얘기하기 전에 그 지역에 관한 구체적인 욕구조사가 실시되어야 하고,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주체들(조직화되지 않는 주민 포함)을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욕구조사를 하고 주민지도력을 파악하는 과정 자체가 지역과 연계를 맺고 지역운동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이런 부분에 공무원 노조나 전교조가 적극적으로 결합하면 좋다.

일반론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원칙을 말할 수는 있겠다. 반드시 생활상의 구체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접근해야 하고, 지나치게 높은 이념적인 대안이 아니라 작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는 의제를 선택해야 한다. 성공의 경험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의제를 선정하고 논의하는 과정에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 주민들을 볼 때 기존의 진보/보수틀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지역사회는 권력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장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권력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지역적인 의제를 달성하려면 기존에 보수적이라 평가되는 사람들과도 연계를 맺어야 하고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념적인 잣대로 접근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념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또한 지역적인 의제를 해결했을 때 그 성과를 반드시 그 지역사회에 남겨야 한다. 보통 어떤 성과가 있으면 주요한 단체가 그것을 독점해 버리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 더 큰 연대틀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같은 편이 늘어나기 때문에 성과를 지역에 남기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노조에게도 유리하다.

 

 

 

참고문헌

 

하승수. 2006a. “왜 풀뿌리운동이 희망인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창립토론회 주제발표문.

하승수. 2006b. “지역활동에 관하여, 시민운동 경험 통해 노동운동에 드리는 제언”. 《노동사회》 2006년 5월호.

오관영. 2007a. “풀뿌리운동이 희망이다”. 2007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제1차 정책포럼.

오관영. 2007b. “오래된 미래, 풀뿌리시민운동”. 《시회공헌과 시민사회》 2007년 가을호.

강수돌. 2007.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건설자본과 마을공동체”. 한국사회포럼 ‘연구참여단체’ 발표자료집.

조정환. 2005. 『제국기계 비판』. 갈무리.

박승옥. 2007. “사회운동의 전환, 적녹연대로부터”. 한국사회포럼 ‘연구참여단체’ 발표자료집.

김현우 외. 2006. 『지역사회와 노동운동의 개입전략』.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지구지방화시대 대안적 지역발전 전략

 

하승우(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1. 지구지방화 시대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헬드(D. Held)와 여러 학자들은 지구화와 지방화를 구분하면서 지구화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활동이 국경을 가로질러 확장되어 세계 어느 한 지역의 사건․결정․활동이 먼 지역의 개인과 공동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지방화(localization)는 “특정 장소 내에서의 흐름과 네트워크가 강화되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헬드 외 2002, 37). 헬드 등의 정의를 따르다면, 시간과 공간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하부구조와 제도화, 계층화, 상호작용 양식이라는 조직적 차원도 갖추고 있는 지구화는 공동체와 국가, 사회의 모든 세력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면서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더 이상 고립된 섬은 존재할 수 없고 지구화라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전망을 구성해야 한다.

네그리(A. Negri)와 하트(M. Hardt)는 신자유주의를 “자본의 전지구적 운동과 이윤을 가장 잘 도와주는 국가규제형태”이라 정의하면서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결합을 비판한다(네그리․하트 2008, 335).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제국에서 고립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건전한 대안일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지구화를 하나의 ‘경향’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변화를 결정할 정도로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제국이라는 유령』에서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바 있지만 국가의 경계가 무뎌지고 새로운 노동형태가 출현했다는 주장은 다분히 이론적이고 은유적일 뿐이다(캘리니코스 등 2007, 77). 특히 엘린 우즈(E. M. Wood)는 “지구화의 본질은 민족국가가 가진 능력의 쇠퇴가 아니라 지구적 자본을 위해 세계를 조직화하는 민족국가의 독특한 기량”이라고 주장한다(캘리니코스 등 2007, 126~127).

해리스(J. Harriss) 등은 지구화가 세계를 통합하면서 국가적인 차원을 주변화시켰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주권국가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고 국가권력과 정치의 전면적인 변형이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가 강조하는 굳 거버넌스(good governance)나 분권 등으로 드러나는 지방화가 민주화에 실제로 기여하는지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해리스 등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런 변화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고 강조하면서 “지방의 정치적 장과 그런 장 내에서 활동하는 행위자들의 정치관행을 규정하는 담론과 제도들의 결합을 검토하고 민주화를 위한 지방정치의 함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Harriss 등 2004, 3). 즉 굳 거버넌스는 행정의 투명성과 책무성을 강화하고 그것을 측정하는 지표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를 측정하는 지표로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노드홀트(H. S. Nordholt)는 분권과정이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나 강한 국가에서 강한 시민사회로의 이행과정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노드홀트는 인도네시아의 분권과정을 분석하면서 분권과 더불어 부패가 더 늘어나고 갈등이 더 심해지는 특이한 현상의 원인을 지역의 엘리트와 인종에서 찾았다. 노드홀트는 인도네시아의 지방정부에서 관료와 정당보스, 기업가, 군부와 범죄자들의 동맹이 그림자정부로 행세한다고 비판한다(Nordholt 2004, 30~48).

그리고 김성현은 국제금융기구의 발전모델이 선거를 통해 대표성을 확보하는 정부기관을 거치지 않고 시민공동체를 직접 지원해서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적한다. 시민사회가 그 자체로 도덕성과 중립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거버넌스 자체가 가난한 빈민들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뜻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김성현 2008).

지구화는 한국처럼 수도권으로의 집중되고 중앙정부가 불균형한 발전계획을 추진하는 국가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지역사회가 다른 나라처럼 국제기구의 직접 원조를 받으며 국제기구의 정책을 국내에서 재생산하는 사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의 약화가 지역사회나 시민사회의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시장/시민사회라는 관계로 접근하면, 국가의 약화가 시민사회의 강화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시장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지구화의 영향이 국민국가의 권력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그 집중성을 약화시킨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분산된 권력이 시민사회로 넘어가 그 역량을 강화시키는 현상은 충분히 증명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지방자치제도가 중앙정부가 독점해 온 발전전략을 지역 차원에서 재검토하고 지역특성을 살리기 위한 발전의 근거를 마련했지만 획일적인 발전노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 역시 그 점을 증명한다. 신개발주의라 정의되는 과도한 개발열풍의 원인은 단지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같은 정치권력에만 있지 않다. 한국의 경제구조 자체가 개발산업, 건설업을 중심축으로 삼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인 경제구조를 바로잡지 않을 경우 지역사회는 경제적인 자생성을 가지지 못하고 중앙정부의 발전전략을 복제할 수밖에 없다.

또한 지금 세계는 전쟁 중이다. 무기를 든 병사들이 서로를 죽이는 ‘드러난 전쟁’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인 빈곤과 가뭄은 사회적 약자들의 목숨을 빼앗고,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는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현실에 내팽개쳐진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 드러난 전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옥죄며 위협하고 있다.

전쟁은 밖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내 몸 안에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광우병이나 아토피처럼 인류가 자초한 질병이나 불안한 먹거리와도 우리는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비단 신체적인 질병만이 아니다. 도시의 삶이나 직장생활 등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와 같은 정신적인 질병들도 삶의 건강함을 위협한다. 그리고 식량자급율 27%라는 한국의 현실은 삶의 질을 넘어 삶의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외부적인 생존경쟁만이 아니라 내 몸을 지키고 유지하는 ‘살기 위한 전쟁’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전쟁’만이 아니다. 미래세대는 지금 우리 세대가 물려준 ‘유산(遺産)으로서의 전쟁’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에너지 수입률은 97%이고, 수입 에너지의 상당수가 피크 오일(peak oil)에 이르고 있다는 석유이다. 더구나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높아지고 있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각종 기상이변과 지진, 황사와 사막화 등의 현상을 보면 지구가 인류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 듯하다. 이제 인류는 영화에서나 나오던 묵시론적인 종말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지구지방화라는 시대적 흐름 자체가 대안적 가능성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런 시대적 흐름은 대안을 지향하는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노력 속에서만 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발전 자체를 다시 정의하고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전략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2. 발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아마르티아 센(A. Sen)은 발전이 인간의 실질적 자유를 확장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발전은 단순히 경제적인 부를 증가시키는 것만으로 보장될 수 없고 “사회․경제적 제도(예컨대, 교육시설, 의료보호)나 정치적 권리 및 시민권(예컨대, 공공토론이나 투표에 참여할 자유)과 같은 다른 결정요인”과도 연관되어 있다(센 2001, 19). 따라서 센은 발전이 ①정치적 자유, ②경제적 편의, ③사회적 기회, ④투명성 보장, ⑤보호적 안전성이라는 다섯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센은 기존의 발전관이 주민을 수동적인 수혜자로 만들기 때문에 발전의 지속성과 효과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센의 발전관은 중요한 요소를 놓치고 있는데, 이 글은 그것이 바로 생태주의와 민주주의라고 본다. 센의 발전관에는 현재의 성장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지 않고 그가 정치적 권리와 시민권을 보장하리라고 믿는 대의민주주의는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현실에서 ‘1인 1표’의 정치적 평등은 ‘1인 1원’의 경제적 논리로 이미 대체되었다).

생태주의적 전환의 필요성은 러미스(D. Lummis) 등이 주장하는 ‘제로성장’이라는 개념에서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식량이나 환경오염, 자원고갈 등은 인류가 더 이상 성장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으로 세계를 몰아가고 있고, 최근의 여러 위기에서 드러나듯이 자본주의라는 경제시스템 자체가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러미스 등이 가난한 풀뿌리 민중들을 방치하겠다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러미스는 풀뿌리 민중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경쟁적인 발전보다 상호부조와 협력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구도완과 여형범은 생태주의를 받아들이는 생태복지국가모델과 생태적 공동체/어소시에이션의 병행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생태적 공동체/어소시에이션을 바탕으로 개발국가/자본주의 국가를 생태적으로 전환하여 생태복지국가를 만들어 가면서 동시에 국가를 넘어서서 생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자치연합을 만드는 전략”을 강조한다. 이들은 국가와 자본의 개발과 폭력에 맞서 “생태 공동체/어소시에이션의 담론과 행동이 국가와 자본을 전환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넘어설 때에만 호혜와 연대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확장”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구도완․여형범 2008, 96~100).

하지만 발전을 지상목표로 삼는 CEO 출신의 불도저 대통령과 신개발주의에 매몰된 사회에서 생태주의적 전략을 실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선진화’ 담론은 노골적으로 개발과 발전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다른 대안적 담론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한다. 대표적으로 박세일은 “지방시장보다는 국가시장으로, 국가시장보다는 세계시장으로 시장이 확대되면 될수록 분업의 세분화(특화) 가능성이 커지고, 그 결과 경제성장과 발전의 가능성도 커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박세일 2006, 23). 자연히 그의 해답은 “기업과 산업의 구조조정 강화라는 발전주의적 해결책”이 새로운 고용을 창출해서 빈곤을 해결할 것이라 주장한다(박세일 2006, 36). 생태주의가 국가와 시장을 변화시키기는커녕 ‘녹색성장’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빌미로 국가와 시장이 생태주의를 포섭하고 있다.

따라서 대안적인 발전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대안적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발주의 담론이 다른 모든 대안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은 고려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하승수는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우선에 놓는 새로운 지역발전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토건국가식 개발이 지역내총생산(GRDP, Gross Regional Domestic Product)을 증가시킬 수 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주거비용을 높이는 등 삶의 질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선전해야 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지역내 민주주의, “지역주민들의 참여에 바탕을 둔 민주적인 정치․행정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하승수 2008).

스스로 판단하고 민주적으로 실천하는 시민이 늘어날 때에만 대안적인 발전은 가능하다. 대안적인 발전관이 풀뿌리 민중의 가슴 속에 ‘상식’으로 자리잡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지속가능한 가설일 뿐 실현가능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상식으로의 자리매김은 ‘자각’을 필요로 한다. 김종철이 지적하듯이 민주주의와 물질적인 경제성장이 동시에 추구할 수 없는 목표라는 점을 자각하고 그런 전제 위에서 대안적인 발전관을 실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 대안적인 발전을 위한 디딤돌을 찾을 것인가? 선드호슨(U. Sundhaussen)은 “서구식 처방은 무시하고, 자신들의 과거의 결함으로부터, 또 산마리노 같은 나라의 역사로부터 배워서, 다수 인민 즉 농민계급을 민주적 정치 속으로 참여시키는 길을 선택”하자고 얘기한다(선드호슨 2008, 169). 1만년 이상을 이어온 자급자족과 지속의 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방법은 결코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는 반동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전통을 복원하고 주권의 논리로 민중을 억압하는 국가를 넘어설 대안일지 모른다. 따라서 무기력하게 대의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말고 민중의 역동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녹아있는 정치적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

대안적인 발전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자급과 자치의 생태 민주주의 속에서만 가능하다. 생태 민주주의라는 자신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표를 거래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와 외부의 관계망을 회복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다. 곧 닥쳐올 식량과 에너지라는 위기를 고려한다면 자급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조건이고, 민주주의 역시 자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대안적인 발전은 국가라는 틀과 잘 맞지 않고 지역사회라는 틀과 어울리는데, 지금 한국의 지역사회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대안적 발전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지역사회 역시 대안적인 조직화를 이루어야 한다.

 

 

3. 지역사회의 대안적인 조직화는 가능한가?

 

한국의 지역사회는 보통 소규모 공동체로 규정되어 왔다. 정지웅은 “지역사회란 일정한 크기의 지리적 영역을 가진 지역과 두 사람 이상의 인간집단을 뜻하는 사회의 합성어이기보다는 보통 공동체의식(community sense)을 가진 인간집단이 사는 작은 규모의 지역사회(the community)를 말한다”며 지역사회의 소규모 공동체성을 강조한다(정지웅 2005, 11). 더 나아가 최옥채는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을 부각시켜 ‘지역사회주의(communitism)’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최옥채는 지역사회가 생활공동체이자 이웃, 동네, 마을 정도의 소규모 공간이기 때문에 지역과 지역사회를 구분하면서 지역사회를 “동질성이나 자체 변화를 위한 역동성 등이 강한 주민들로 구성된 소규모 수준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최옥채 2003, 8).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지역사회를 공동체성만으로 단일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전통적인 혈연과 지연같은 귀속적인 관계가 강한 농촌과 비교하면 도시에서는 그런 영향력이 약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농촌의 지역사회는 도시보다 소규모이고(인구의 고령화와 지속적인 인구 이탈), 인근의 규모가 더 큰 지역사회(배후도시)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원활한 생활조건(학교, 시장 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소규모 공동체성만을 강조할 경우, 지역의 억압적인 노동관행이나 가부장적인 구조, 억압적인 생활방식이 지역사회의 고유함이나 특수성으로 포장될 수 있다(하비 2001, 120). 그런 점에서 정근식은 지역사회를 공동체로 표상하는 것이 “지역내 계급관계나 사회적 지배관계를 대체하거나 희석시키는 효과를 갖는 것”이라며 “공동체적 요소와 내부의 지배관계를 적절하게 포착할 수 있는 단위가 설정되는 것이 지역사회 연구에서 중요하다”고 지적한다(정근식 2003, 17).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지역사회는 도/농에 따른 구조적 차이점을 가지고 있고 단순히 공동체로 규정될 수 없으며 다양한 세력들이 영향을 주고받는 장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즉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며 그 내부의 이해관계를 단순화시키거나 다양성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물론 지역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는 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매개로 삼기 때문에 일정한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은 이미 확립된 전통이나 외부의 모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며 민주적인 의사소통구조를 확립하는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공동체성은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한 전략으로 고민되어야 하지만 새로운 정체성은 그에 걸맞는 의사소통구조를 갖춰야 하고 공동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은 지역사회의 의사결정구조나 참여구조, 지역자원을 분석하는 개념으로 사회자본(social capital)과 로컬 거버넌스(local governance)가 많이 활용되고 있다. 두 개념은 정부가 주도하지 않고 지역내 이해당사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협의해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원들이 서로 참여하고 협력하면 과거의 정부주도형 통치방식보다 더 나은 사회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서구적 개념을 비서구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작(T. Issac)과 헬러(P. Heller)는 퍼트남(R. Putnam)을 비판하면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이 ‘이미’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자발적인 결사체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국가가 강력하고 계급갈등이 첨예한 제 3세계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아이작과 헬러는 오히려 계급갈등과 사회동원 과정에서 능동적인 시민이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Issac․Heller 2003, 83~86). 마찬가지로 신희영은 사회자본이론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로는 사회조직의 특성을 측정하기 어렵고, 국가제도가 사회자본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조건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신희영 2005, 13~14). 또한 사회자본이론이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주성수 2006, 61~62).

실제로 한국에서는 자율적인 협력과 참여, 네트워크를 얘기할 수 없을 만큼 중앙의 국가권력이 지역사회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과거 군대와 경찰, 검찰 및 사법기구, 각종 정보기관 등 폭력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억압적인 국가기구들이 군과 면 단위까지 지부조직을 만들고 대책협의회를 꾸리며 활동해 왔다(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한국가톨릭농민회 1990, 66). 그리고 새마을운동협의회, 민족통일협의회, 사회정화추진협의회, 청소년선도위원회, 자유총(반공)연맹 등의 단체들도 중앙정부의 민간동원단체로서 지방권력을 분점해 왔다. 이런 단체들은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권력연합을 형성해 왔고, 이런 단체들에 소속된 지역유지들은 “시가지 개발과 관련한 각종의 개발정보는 물론이고 각종 관급공사의 수주나 지방공무원 인사도 지방관료와 유지들의 담합에 의해 좌지우지”(지수걸 2003, 27)하는 지역의 실세들이다.

특히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는 지방의 자치단체장들이 독자적인 권력구조를 확보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신희영 2005, 2). 자치단체장들은 지방의 자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중앙정부의 견제와 감독을 피하고, 중앙집권적인 행정구조와 빈약한 재정을 핑계 삼아 지역의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을 수립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지방의 단체장들은 예산을 무리하게 집행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며 인사권을 남용하는 등 각종 부조리를 일삼으며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과 대학 역시 이런 잘못된 권력구조에 편승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대안적 발전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이런 지역사회의 지배구조를 무너뜨리는 노력과 분리될 수 없다.

스퇴커(R. Stoecker)는 지역사회발전모델이 크게 ‘주민조직화(Community Organizing)’와 ‘지역개발법인(CDCs, Community Development Corporations)’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주장한다(Stoecker 2003, 495).

 

주민조직화

지역개발법인

목적

지역사회의 권력 형성하기

주택 공급과 일자리 창출

세계관

갈등: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공동의 이해관계나 관계를 맺지 못하는 제로섬 게임

협력: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관계를 맺는 윈윈 게임

전략

주민이 엘리트와 맞서도록 조직하고 권력배분의 변화를 요구

주택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거나 보조금을 받도록 엘리트와 협력

인적 자원

마을에 관한 경험을 폭넓게 활용하는 주민(대부분은 자원봉사자)

특수한 전문기술을 가진 월급을 받는 간사(대부분은 주민이 아님)

이런 차이점 때문에 두 가지 모델은 통합되기 어려운데, 스퇴커는 주민조직화가 갈등과 대결로 지역사회의 구조를 바꾸려 한다면 지역발전은 개인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복지를 향상시키는데 초점을 맞춘다고 본다. 지역개발법인은 주민조직화라는 장기적 성과보다 공공․시장․비영리민간 영역간의 효율적인 역할분담(정부보조금, 민간기부, 세금공제 등), 특히 공공영역의 지원체계와 관리체계의 변화를 주도하되 주민참여를 보장하는 지역사회 이사회(community board) 운영한다. 하지만 지역개발법인은 차츰 이윤을 위한 투자사업으로 전락하고 전문성을 강조하다보니 사회적 약자와 멀어지며 주민통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지역기반조직(community-based organization)으로서의 역할이 축소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김형용 2008).

스퇴커는 주민조직화와 지역개발법인의 모델을 통합시키려 했던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Toledo)의 실험을 분석하면서 그 통합이 쉽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스퇴커는 그 둘의 통합을 시도하는 프로그램이 일정한 성과를 거뒀으며 지역개발법인의 조직을 변화시키고 지역개발법인이 주민조직화의 방식을 끌어안을 수 있는 구조(지역사회이사회의 민주화, 지역리더 발굴 등)를 드러냈다고 평가한다(Stoecker 2003, 507~510).

빈(R.V. Veen)은 적극적인 시민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공동체 발전이라고 보면서 가난한 빈민이 교육을 통해 성장하는 시민교육과 공동체발전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빈은 보수적인 공동체의 기득권 구조를 깨려는 다양한 운동이 1960년대 미국에서 등장했으며 주민조직화, 지역재단, 지역사회만들기(community builidng)가 그 대표적인 형태라 얘기한다(Veen 2003, 585~586). 이 각각의 운동은 빈민조직화와 사회서비스 전달, 지역사회 욕구달성에 효과적으로 기여했고 교육을 중요한 방식으로 활용했다.

그런데 빈은 이런 운동이 강조하는 교육의 양태가 각기 다른 목표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억지로 통합하는 것이 좋지 않고 포괄적인(inclusive)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분명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주민들을 조직가로 양성하는 교육은 교육자의 역할이 일정 시간과 보조적인 위치로 제한되지만, 주민들의 사회의식을 향상시키는 교육은 지속적이고 상당한 수준의 개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서비스를 전달하는 교육은 직접 목표를 달성하지 않고 목표달성에 필요한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을 마련하려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운동은 제한된 지역사회 내에서 각자 재원이나 주민을 놓고 경쟁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운동을 평가절하하거나 의심하기도 한다. 따라서 빈은 공동체발전을 위한 전문적인 통합교육(integrated professional education)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Veen 2003, 593~594).

한국의 지역사회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주민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같은 전통적인 사회운동이 지역사회와의 결합을 모색하고 있고, 풀뿌리운동이라 정의되는 지역운동도 서서히 정착되고 있다(하승우 2007). 기득권세력이 지역사회를 포획하고 있어 그 사회가 자율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미국사k회처럼 다양한 형태로 지역사회 발전이 시도되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생활협동조합운동이나 빈민운동이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디딤돌을 만들어 왔고(하승우 2008), 최근에는 자활공동체나 사회적 기업처럼 지역개발법인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기구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민단체가 이와 유사한 기구들로 전환되기도 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흐름들은 한국의 지역사회가 대안적인 지역발전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주요한 자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앞서 스퇴커나 빈이 지적했던 것과 비슷한 문제들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원확보를 놓고 서로 경쟁하거나 정치적인 갈등을 회피하거나 주민참여의 중요성을 당위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따라서 대안적 지역발전전략을 위한 지역사회 조직화의 첫 단계는 각 모임이나 단체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위한 통합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다. 스퇴커가 분석한 톨레도 사례에서처럼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을 밟는다면 그 힘은 배가 될 수 있다. 지역사회의 강고한 기득권 구조나 후견주의(clientalism)를 생각한다면, 지역사회 내의 변화역량은 ‘명목상의 연대’를 넘어 실질적인 연대를 이뤄야 하고, 그런 연대는 소통과 상호이해(mutual understanding)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특정한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결합하는 ‘느슨한 연대’는 다양한 삶의 의제를 소통하며 신뢰와 우정을 형성하는 강한 연대로 발전해야 하고 이런 발전은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주민참여와 주민리더십의 형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사회적인 대안은 진공상태에서 검증되지 않고 수많은 장애요인들과 기성담론들이 훨씬 우세한 상황에서 주민들과 접촉해야 한다. 그리고 오랜 권위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지역사회는 수동성을 몸에 익혔다. 따라서 올바른 주장을 했다고 해서 주민들이 그것을 지지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빈이 강조했듯이 포괄적이고 통합된 교육프로그램들을 통해 주민들이 지역리더로 성장하도록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힘을 모아야 한다.

또한 대안적인 발전이 가능하려면 대안적인 경제의 망이 구성되어야 한다. 그 구성의 단계는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라는 개념으로 정리될 수 있는데, 그것의 성공 여부는 그것이 기존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다른 자신의 ‘사회적 시장’, ‘윤리적 시장’을 만들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사회적 경제가 기존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자신을 적응시킨다면 그것은 자신의 기반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운동이 중요하다. 협동조합운동은 사회적 일자리 사업이나 레츠(LETS), 마을만들기운동 등을 통해, 그리고 친환경급식이나 로컬푸드만이 아니라 주거, 보험,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적 관계망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런 관계망의 구성에서는 협동조합만이 아니라 협동조합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다양한 지역단체들도 참여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의 망은 국경선을 넘어 확대될 수도 있다. 그런 관계망의 확대가 공동소유의 영역을 확대시킨다면 그것은 새로운 노동과 거래(trade)의 원칙을 확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4. 결론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이념을 중심으로 탄탄한 후견주의 구조를 확립한 세력들은 신개발주의를 추진하며 지역사회를 개발의 희생양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반면에 이런 흐름을 변화시키려는 다양한 노력들은 아직 연계되지 않고 그 자체적인 힘도 미약하다.

따라서 대안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경기도 조치원에서 이장-공무원-업자의 개발동맹에 맞서 아파트 건설반대싸움을 벌였던 강수돌의 말은 이 어려움을 잘 말해준다. “우리는 저들의 개발동맹보다 훨씬 나은 ‘대안동맹’을 결성해야 한다. 우선은 마을 주민들이 더욱 똘똘 뭉쳐야 하고, 양 대학 학생과 교직원들이 나서야 한다. 그리고 환경운동과 노동운동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측면 지원하고, 소신과 실력을 겸비한 변호사 등 10명 정도가 ‘목숨’ 걸고 결합해야 한다. 진행 중인 2건의 행정소송을 수행할 팀도 필요하고, 주민의 역동성을 전면적으로 활성화할 팀이 필요하다. 생명의 대안을 향한 주민들의 생동하는 투쟁이 법정 속으로 ‘제도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군수와 도지사, 군의회와 도의회를 상대로 민원 제기와 대안의 협상을 담당할 팀도 필요하고, 언론 및 홍보를 전담할 팀도 필요하다. 이 모든 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빈틈 전략들을 활발히 구사해야 한다.”(강수돌, 2007: 201)

대안적 발전모델을 구상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은 지역사회 내외부의 다양한 운동세력들이 구체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강한 연대를 구성하고, 아직 조직되지 않은 주민들을 지역사회의 정치주체로 성장시키고 조직화하며 대안적인 발전모델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될 것이다.

참고문헌

 

강수돌. 2007.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건설자본과 마을공동체”. 한국사회포럼 ‘연구참여단체’ 발표자료집.

김성현. 2008. “국제금융기구와 빈곤축소프로그램”. 《경제와 사회》 겨울호 수록예정.

김종철. 2008. 『땅의 옹호: 공생공락의 삶을 위하여』. 대구: 녹색평론사.

김형용. 2008. “미국 지역사회개발 동향과 지역개발법인(CDCs)”. 《국제사회보장동향》 봄호.

러미스, 더글러스 지음. 김종철․이반 옮김. 2002.



 

요즘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말문이 막힐 때가 간혹 있다. 똑같은 단어를 쓰긴 하는데, 서로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달라서 얘기를 나누지만 정작 서로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얼마 전 우연히 뉴라이트쪽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건국절’과 관련된 토론회였다. 그 사람은 어두운 기억을 버리고 밝고 건강한 기억을 가지자는, 식민지의 아픈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헌법을 만들고 산업화를 이룬 ‘한강의 기적’을 기억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식민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경험이고 산업화의 기적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철저하게 짓밟은 성과이기 때문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반공주의’였다. 그 사람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이승만, 박정희의 노력이 국가보안법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보다 더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고문당하고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답했다.

그 답을 들으며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사람의 생각이 케케묵은 반공주의에서 나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념이라고 하는 그 덧없는 것을 위해 사람의 생명이 이토록 허무하게 여겨질 수 있구나, 이들에겐 목적만이 있을 뿐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구나. 이들에게 역사란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기록일 뿐 자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기 위한 계기일 수는 없겠구나. 과거를 되돌아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은 얘기를 하고 있지만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은 뉴라이트만이 아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에 관한 얘기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편의 논의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건 단지 시선의 차이로 설명될 수 없다.

촛불집회에 관한 토론회에서 만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은 촛불시위에 나오지 않았고 비정규직이라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의제를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얘기했다. 가난의 기준이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비정규직을 배제했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한 사건에 대해 그렇게 한정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떤 의도를 담고 있을 것이다.

물론 한 사건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차분하게 현실을 바라보자는 의도가 그 말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차분하게 보는 것과 현실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단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거리의 정치에 대한 열광이 제도정치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고 보수세력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독점하리라는 우려는 귀담아 들을 얘기이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결과에 대한 우려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참세상>의 집계에 따르면, 촛불집회와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이 33명이고 29명이 수배중이며 1,530명이 체포되었다(9월 3일 기준). 경찰의 과잉진압과 인권유린, 과거로 돌아간 듯한 검찰의 수사 등 엄청난 공권력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촛불의 움직임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도 시민이고 한국이 민주공화국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얘기해야 할까. 아직도 분에 못 이겨 촛불을 든다는 사람에게 우리는 현실정치에서의 패배와 냉소를 얘기해야 할까.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대의민주주의에서 비롯된 민주주의의 실패를 다시 대의민주주의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에서 정당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진보정당을 세우는 노력이 거리에서 머리가 깨지고 경찰에 짓밟힌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제도권의 정치가 자신을 얼마나 철저히 배제하는지를 절실히 깨달은 사람들에게 투표로 심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올바른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알고 믿는 건 촛불을 든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바란다는 점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선거와 관련된 얘기를 듣고 할 것이다. 내년의 보궐선거, 2010의 지방선거, 2012년의 총선... 그러면서 우리는 그 선거 결과를 가지고 촛불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고 변화에 관해 얘기할 것이다. 때로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반이명박, 반한나라당 전선을 얘기하고 그것에 촛불의 힘을 동원해야 한다고 얘기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가 잊어버리는 건 무엇일까?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한 기존의 편견을 깨려는 노력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작지만 소중하고 소박한 꿈일 것이다. 언제나 우리가 불가능의 영역으로만 밀어놓고 고민하려 하지 않았던 꿈들. 하지만 그렇게 망각된 것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풀지 않은 숙제처럼 다시 등장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언제나 편견은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시선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고 망각한다. 그러나 배제되고 잊혀진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잊게 하려는 정치가 있다면 그것을 기억해내고 받아들이려는 기억의 정치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내야 할까? 그것은 짓밟히고 무시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 사람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정치구조와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현대사를 장식했던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에서 사람들이 요구했던 바일 것이다.



나는 <GO>라는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 어느 한 편에 소속되어 그 집단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보호받는 삶을 거부하는 삐딱한 주인공들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 영화에 매력을 더하는 한 장면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투를 통해 세상을 가르쳐주는 장면이다. 다소 폭력적이지만 아버지는 주먹을 뻗어 그리는 원 안의 세상에 머문다면 안정적이지만 그 원을 벗어나면 어려움에 부딪치고 그런 어려움을 이기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아들에게 얘기한다.

하지만 강해져야 한다는 게 일방적인 폭력이어서는 안 된다. 강해져야 한다는 이름으로 자신과 타인에게 희생과 인내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이라도 쓰려는 폭력적인 합리성일 뿐이다. 그런데 <GO>는 그런 폭력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우정과 사랑이 타인과 더불어 살고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을 알려주기에 매력적인 영화이다.

사실 강해지는 방법은 몸을 단련하거나 집단을 만드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 방법 중 하나로 나는 사상(思想)을 꼽고 싶다. 조금 엉성하고 세련되지 않더라도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돈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사상은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사상은 그 뜻 그대로 마음과 눈으로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보고 내다보며 삶을 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힘, 그것이 바로 사상이다.

그래서 사상은 단순한 언어를 모아놓은 관념일 수 없다. “여러분은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열망을 가졌다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마음 속에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유익한 것입니다”라는 마틴 루터 킹의 말이나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는 체게바라의 말은 사상이 세계를 바꾸는 힘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그러니 사상의 자유는 삶과 세상의 변화를 꿈꿀 자유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런 소중한 자유를 무참히 짓밟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케케묵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잣대를 다시 들이대고 있고 사이버모욕죄라는 새로운 검열제도를 만들고 있다. 심지어 ‘국가경쟁력’을 내세워 집회나 시위를 금지하며 약자들의 저항수단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다. 저들의 논리는 철저하게 힘에만 의존하기에 폭력적이고 그렇기에 그것에는 사상이 없다. 저들은 단지 폭력을 사용해서 우리에게서 변화와 꿈을 빼앗으려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민주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동안 사상의 숨통을 조여 왔다. 우리에게 사상은 언제나 어떤 ‘~주의(~ism)’만을 뜻했고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생각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얘기해 왔다. 규범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런 다양성은 언제나 ‘~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만 인정되었다. 즉 우리는 모두가 꿈을 꾸고 사상을 누릴 자유를 얘기하지 않고 모두가 같은 꿈을 꾸거나 같은 사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더 분명하게 얘기하면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에도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를 되뇌는 것 외에 자기 사상을 만들지 못했다. 언제나 당면과제만을 생각했지 꿈을 꾸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누군가에게 아주 명쾌한 설명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추상적이고 부정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말이다. 그러니 사상의 자유가 지금 위기를 맞이한 듯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서 사상은 계속 위기를 경험해 왔다.

저들의 국가보안법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사상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비판해 왔지만, 그것을 넘어설 다른 틀을 만들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 낡은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꿀 희망의 원리를 우리는 구성하지 못했다. 자기가 내밀 수 있는 주먹의 경계 안에서만 세상을 보고 그 경계를 넘어서려 하지 않았고, 그 경계는 사상간의 넘나듦과 꿈의 공유를 방해했다.

폭력적이지 않으면서 그 경계를 넘어설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비폭력이다. 비폭력의 의미는 경찰의 공권력같은 직접적인 폭력에 맞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쇠고기 수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해지는 구조적인 폭력, 눈에 보이지 않게 천천히 우리 삶을 파괴하는 폭력에 맞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생명체에게 가하는 폭력이, 그리고 그런 폭력을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강대국’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직접적인 폭력의 구조는 비정규직의 양산이나 민영화라는 간접적인 폭력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자기 동료를 먹으며 살을 찌우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신세란 끝없는 경쟁 속에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신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간접적인 구조적 폭력에도 적극적으로 맞서는 비폭력이야말로 새로운 사상을 구현할 희망의 언어인 셈이다.

그리고 그 비폭력의 언어는 단지 인간의 것으로 제한되지도 않는다. 오체투지순례단의 눈물겨운 발걸음이 절망만 주지 않고 희망도 주는 건 주위의 다른 사물과 생명을 서로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는 단지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나 방식만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많은 희망의 언어들을 담고 있다(뉴라이트를 비롯한 케케묵은 집단들이나 정치인들이 80년대 운동권의 방식을 열심히 배워 써먹더라도 결코 베낄 수 없는 건 이런 행동 속에 담긴 마음과 사상이다). 이제 사상은 여러 가지 뜻 깊은 실천 속에 담긴 의미들로 새로이 구성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상의 자유는 단지 국가보안법 폐지로 완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상은 검열이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원래 자유로운 것이다). 사상은 국가보안이나 질서와 같은 기존의 논리를 넘어서 다른 새로운 무엇으로 나가려는 것이자 나와 세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는 개인의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상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다. 사상이 없는 감정적인 연대는 사회적인 조건이나 분위기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언제나 약하다. 하지만 사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대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우리를 세상에 내려앉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사상의 자유라 믿는다. 그것은 절망의 시대에도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이명박 대통령은 빡빡한 미국방문 일정에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만나 한미FTA 등 현안을 논의했다 한다. 연방국가인 미국에서 상원의원도 아닌 주지사를 만나 왜 한미FTA와 같은 국가간 협정을 논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미국경제가 먼저 살아나야 다른 나라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미국경제, 그 안에서 비중이 큰 캘리포니아 경제가 살아나는 것이 중요하다”며 미국경제를 걱정하는 발언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요즘처럼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도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경제까지 걱정해주니 그 따뜻한 연대감에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눈물을 흘렸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방문과 대화내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런 깜짝 이벤트는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취향인 듯하다.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고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어쨌거나 아놀드를 만나서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국내로 돌아오자마자 결연한 각오를 밝혔다. 지난 27일 “일시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목숨을 던질 그런 자세로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겠다고 말하지 않나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는 공자님 말씀을 인용하며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던져라”는 자세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28일에는 “먼 훗날 몸을 던져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한층 더 터프한 모습으로 돌아온 우리의 대통령, 우리는 박수치며 환영해야 할까?

무엇을 결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터미네이터의 장비는 곧 장만할 태세이다. 정부가 이번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에 따르면, 경찰청은 집회대응 예산으로 48억 5,400만원을 신청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만만치 않다. 야간 조명차 2대, 물대포 3대, 물보급차 4대, 차벽트럭 17대, 신형보호복 2,106벌, 무선망 수신기 3,606개, 중형소화기 255개, 소형소화기 2,106개, 첨단채증장치 3세트 등이다. 예산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업그레이드된 터미네이터 군단을 곧 거리에서 만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가 터미네이터식의 전쟁일 수 없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사회에서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고, 그래서 정치의 세계는 다양한 의견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보장해야 한다. 이상적인 정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현실 정치는 여러 협상과 타협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난 너만 구하면 된다’는 터미네이터식 발상은 정치의 세계가 구성되는 원리인 견제와 균형, 타협과 협상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영화를 보면 로봇조차도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은?).

목숨을 바쳐 일을 하겠다는 우리 대통령의 자세는 이번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가 화해와 통합을 강조한 것과 사뭇 대조를 이룬다. 대체 어떤 목표를 세웠길래 정치의 기본을 무시하고 온갖 첨단 장비로 무장하며 목숨을 바쳐 그것을 추진하겠다는 걸까? 아직 모든 게 분명하지 않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입장을 바꾸는 정부인지라 뭘 하겠다는 건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 대통령은 친절하게 라디오로 자신의 입장을 직접 밝히는 편이니 얘기를 들어보자. 귀국한 뒤의 첫 라디오연설 주제는 청년실업이었다. 그러면 청년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한 목숨 바쳐 일하겠다는 걸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자신의 경험담까지 들며 많은 얘기를 했지만 건질 만한 얘기는 이 정도인 듯하다. 세상에 경험만큼 소중한 스승은 없으니 비정규직이든, 임시직이든 무조건 취직해서 노조가 있건 없건 찍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라 일하라(월급은 제때 받으려나?). 이율곡 선생을 본받아 청년리더 10만 명을 양성하기 위해 7,500억원의 예산을 특별히 편성하겠으니 불만을 가지지 말라(1인당 750만원씩 나누나?). 그래도 국내에 일자리가 없으면 해외로 10만 명을 파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4대 보험은 되려나?)는 얘기이다.

허나 어떡하나? 실업자통계에 잡히지 않는 취업준비생까지 합치면 청년실업자는 수는 대략 15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10만을 양성하고 10만을 파견해도 청년실업율을 낮추기엔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대통령은 정말 목숨을 바칠 만한 필생의 역작을 슬며시 다시 꺼내고 있다. “4대 강 정비사업이면 어떻고, 운하면 어떠냐”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4대강을 정비하면 그것이 곧 대운하가 아니겠는가.

터미네이터를 좋아하는 명바기네이터가 돌아왔다. 그것도 예전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서 촛불시위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한반도의 생태계는 다시 한번 멸망의 날을 맞이하고 있다.



잘못된 권력에 시민들이 맞서 싸우지 않았다면 지금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우리의 신념과 자유를 짓밟을까 두려워하지만,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면 그들 역시 두 다리 뻗고 잠을 청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정치의 법칙 때문이다. 즉 제 아무리 강한 권력자라도 형식적으로는 국민의 ‘동의’를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도 어느 순간이 되면 ‘국민’ 또는 ‘시민’을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시켜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시민들은 왜 저항하는가?”라는 물음은 정치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언제나 권력의 부조리에 맞서 자유나 평등, 정의와 같은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라는 물음 역시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엄청난 권력에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지나친 권력이 있는 곳엔 언제나 시민의 저항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 역사를 살펴봐도 시민들은 언제나 저항해 왔다. 우리 헌법이 지목하는 대표적인 저항인 3․1운동과 4․19민주이념은 누가 어떻게 시작한 사건인가? 가장 억압적인 제국주의 지배나 잔혹한 독재를 경험하면서도 시민들은 각자 자기 삶의 터전에서 자발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동학농민운동이나 각종 민란, 제주도와 광주, 마산, 부산 등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저항들도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에 맞섰다는 점을 증명한다. 권력의 비리와 억압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시민들은 저항했다.

따라서 우리는 “권력이 어떻게 시민의 저항을 가로막고 그 의미를 왜곡시켜 왔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물어야 저항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다.

 

시민 없는 시민참여제도

 

한때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동안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에서 전문가나 활동가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들 역시 시민이라는 점에서 이 말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런 말을 열심히 퍼트려서 시민들이 시민사회운동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의 크기를 계속 키웠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공무원, 법관들은,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재벌과 중앙언론들은 평범한 시민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정보와 힘을 가진 채 시민들을 지배해 왔다. 관존민비(官尊民卑)라는 거짓된 상식을 널리 퍼트리면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거나 그 힘을 줄이려는 시도들을 억눌러 왔다.

시민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은 그런 시도를 잠재울 ‘시민 없는 시민참여제도’를 만들었다. 동(洞)에서 구(區), 시(市), 도(道)까지 설치된 각종 자문위원회들은 권력의 일방적인 정책결정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래서 소위 민의(民意)를 수렴한다는 절차들은 언제나 그들을 무조건 지지하는 배후세력이 되어 왔다.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말에 복종하는 자들만을 시민으로 인정하고 저항하는 자들을 시민이 아닌 폭도나 무지한 군중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化爲枳)는 말처럼, 좋은 제도들도 한국으로 건너오면 하나같이 시민참여를 가로막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도 ‘소리 소문 없이’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직접민주주의제도들이 도입되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여전히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신화’로만 얘기되고 있지만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서서히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주민발의, 주민소환, 주민투표처럼 널리 알려진 제도만이 아니라 주민참여예산제도나 시민감사옴부즈만같은 제도들도 이미 한국에 도입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은 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함께하는시민행동>의 조사에 따르면, 2002년 7월부터 2006년 6월까지 5년 동안 시민 138만 명이 총 123건의 조례를 발의했지만 그 중 원안대로 의결된 것은 12건 뿐이고, 54건은 수정된 채 의결되었다. 주민투표제도는 법 제정 이후 단 3건만 실시되었고, 3건 모두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추진한 관주도 주민투표였다. 주민소환제도는 여러 지역에서 추진했지만 실제로 소환한 곳은 경기도 하남시 뿐이다.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이라던 참여예산제도 역시 토호들의 민원청탁용 창구로 전락해 버렸다.

사실상 한국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하거나 힘을 가진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제도를 활용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들 뿐 아니라 설령 활용하더라도 그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시의 경우 주민발의를 하려면 약 14만 명의 서명이 필요하고, 서울시장을 소환하려면 약 80만 명의 서명이, 주민투표를 신청하려면 약 40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그냥 서명을 받으면 되는 게 아니라 서울시의 경우 선관위에 미리 신고한 사람들이 주민발의나 주민투표의 경우 90일, 주민소환은 120일 이내에 서명을 받아야 한다. 시보다 작은 구로 내려가도 용산참사를 빚었던 용산구의 경우, 주민발의는 90일 동안 약 4천 6백 명, 주민투표는 약 1만 7천 명, 주민소환은 약 2만 8천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돈을 주고 사람들을 사서 서명을 받지 않는다면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중앙정부는 주민발의나 주민투표, 주민소환의 내용을 정해서 시민의 참여를 차단한다. 국가의 권한이나 사무에 속하는 사항, 법률에 위반되거나 행정기구에 관한 사항, 자치단체의 예산과 관련된 내용들은 아예 투표나 발의의 대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한국의 시민참여제도는 하나같이 토호들을 위한 참여제도이거나 허수아비/꼭두각시 참여제도인 셈이다. 이렇게 힘을 가진 자들은 이런 허울뿐인 제도로 시민들의 참여의지를 꺾고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변하지 않으니 자기 몸이나 잘 간수하라는 생각을 심어 왔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입을 막으며 언제나 자신들을 통해서만 얘기하라고 강요했다.

흥미로운 점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미 자신의 발언권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직접민주주의를 싫어하며 자신을 통해서만 말할 것을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2008년을 밝혔던 촛불집회는 바로 이런 잘못된 상식에 도전했다.

 

촛불이 밝힌 시민저항의 가능성

 

보통 온라인에서의 다양한 소통이 오프라인의 활동으로 직접 연결되기는 쉽지 않다. 근본적인 면을 따지면 그것은 ‘속도의 차이’ 때문이다. 온라인에서의 정보와 논의는 망을 타고 빠른 속도로 퍼지지만 현실에서의 삶은 삶의 다양한 조건들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다. 마우스를 클릭하기만 하면 되는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의 실천은 항상 참여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오히려 시민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고 조금씩 퍼지고 있다. 경제가 나빠지면 시민들의 마음이 온통 4대강 정비사업이나 대운하로 몰릴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상과 달리, 시민들의 관심은 다양한 방면으로 퍼지고 있다(사실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고 난 뒤 그런 암울한 예상을 뒤엎은 것도 촛불문화제였다).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발언권을 가진 엘리트들은 시민들의 저항을 낮게 평가하지만, 시민들의 움직임은 그런 평가를 비웃듯이 활발해지고 있다.

촛불집회 이후 시민저항이 다양한 형태로 이미 퍼지고 있다. 비리나 부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사람들이 촛불을 손에 들고 나온다. 그러면서 촛불이 일종의 저항의 상징으로 규정되었고, 촛불을 드는 행위 자체가 저항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었다(대표적인 예가 촛불산책이다). 그리고 이런 저항은 한동안 한국사회에서 자취를 감췄던 ‘참여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작년 연말을 달궜던 명동 무한도전×2 ‘널 기다릴께’ 역시 시민들의 뛰어난 아이디어가 빛을 발했던 저항이다. 매일 2배의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생각은 경찰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추운 거리를 밝히는 횃불이 되었다. 그리고 ‘반쥐원정대’나 ‘보신각 촛불타종’ 역시 시민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드러낸 사건들이다. 기륭전자와 KBS, YTN, 여의도 등을 누비는 촛불의 발걸음은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을 예고한다.

왜 시민들은 이런 어려움을 몸소 겪으려 할까? 자신이 거리로 나서도 세상을 전혀 바꿀 수 없으리라 믿었다면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시민들은 권력을 쥔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진리, 시민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정부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열심히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을 대변한다는 세력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거리에 나서야 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더구나 시민들은 저항을 통해 권력의 억압성을 몸으로 느끼며 그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던질 즐거움과 여유도 만들어가고 있다. 권력을 조롱하고 비웃는 시민들의 저항은 기성 권위와 질서를 파괴하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에 지상의 그 어떤 권위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이 터져 나온 순간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진실이 되어 인터넷에서 무수히 복제되어 전파된다. 그렇게 시민의 웃음으로 폭발한 촛불의 힘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저항카페와 커뮤니티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자신의 취미가 이 정부와 쉽게 어울릴 수 없음을 여러 동호회들도 자각하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화면이나 텔레비전 앞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거리로 나가야 할 이유를 찾으며 시민으로 변하고 있다. 이미 진실이라는 바이러스는 온/오프를 넘나들며 사람들을 감염시키며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다만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그리고 경찰이나 검찰의 탄압을 받더라도 자신의 삶을 심하게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저항을 펼칠 방법을 시민들은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저항이 단지 권력의 나쁜 면을 폭로하거나 다그칠 뿐 아니라 우리의 공적인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 역시 고민한다. 그렇게 고민하고 스스로를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며 시민들은 다음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저항을 북돋우며 손을 맞잡을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의 시민들이 저항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세계를 보수적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저항의 흐름은 끊이지 않았다.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으려는 새로운 스파르타쿠스, 새로운 만적과 망이, 망소이들이 반란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시작해 지금 유럽 전역을 달구고 있는 시민들의 저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 군부에 맞섰던 70년대의 역사를 딛고 ‘700유로 세대’라 불리는 그리스 청년들과 시민들은 경찰과 정부에 맞서 저항을 벌이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열악한 교육환경,경제정책의 실패, 경찰의 만행 등을 비판하는 시위가 매일 이어지고 있고,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고 농민들이 국경을 봉쇄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시위는 경제위기를 맞이해 전 유럽으로 퍼지고 있다. 누가 이 저항의 불길을 다스릴 수 있을까?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의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2008)이나 에이프릴 카터(April Carter)의 『직접행동』(교양인, 2007)을 보면 인류가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지가 잘 묘사되어 있다. 굳이 두 사람의 말을 인용하자면, 진은 “시민들이 복종하지 않을 때,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거부할 때, 군인들이 총을 들지 않을 때, 기존 권력은 힘을 잃고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확신을 가지고 얘기한다. 초강대국 미국 내에서 미국에 저항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즉 백인-남성-부자에 맞서는 노동계급, 빈민, 흑인, 여성, 원주민들의 불복종과 저항들이 이런 힘을 만들고 있다.

카터 역시 대의정치에서 소외된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운동, 석유회사와 같은 다국적기업을 반대하는 불매운동이나 저항운동,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는 댐건설을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운동, 최빈국을 위해 외채탕감을 주장하는 직접행동, 다자간투자협정을 반대하는 운동, 세계무역기구(WTO)를 반대하는 운동, 토지를 요구하는 농민들의 직접행동,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원주민 공동체, 농민, 학생, 노동자, 실업자의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운동들을 얘기한다. 이런 운동을 통해 시민들은 역량을 강화하는 효과(empowering effect), 즉 “공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냄으로써 자부심과 존엄함을 얻을 수 있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며, 타인과 연대감을 고양”시키는 경험을 얻게 된다. 이렇게 담금질을 경험하며 시민은 타인의 고통에도 귀를 기울이는 세계시민으로 거듭난다.

물론 자연발생적인 시민들의 운동은 흐름을 형성할 뿐 그 힘을 집중시키지 못한다. 이미 조직화된 정당이나 단체들이 스스로를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시민들의 힘을 증가시키고 그 힘에 일정한 방향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세력들이 시민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변화의 성과를 시민들의 것으로 돌릴 때에만 그런 어울림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권력은 결코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은 시민을 이길 수 없고 속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를 속이기에 거짓을 줄이려면 정당이나 단체의 내부구조나 성격 자체가 분권화되고 투명해야 한다. 그런 자기변화 없이 시민과 어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런 점에서 반이명박 연대는 또 다른 거짓말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시민들은 이미 존재하는 방식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미 만들어진 참여제도를 활용하는 법도 그 중 하나이다. 4월에 있을 재보선이나 2010년의 지방선거를 활용하거나 기득권층의 독점물로 전락한 참여제도들을 시민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제도는 참여를 감싸는 껍데기일 뿐이다. 제 아무리 훌륭한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제도를 활용하려는 능동적인 참여의지와 그런 의지를 자극하는 정치문화가 없다면 그 제도는 쓸모 없는 것이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를 다룬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리북, 2009)에서 우리는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나누고 시민들의 통제를 받는 제도, 시민권을 실현하려는 시민들의 의지, 민회를 통한 참여의 전통과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먼 길일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역사의 경험은 저항의 불꽃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 땅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서로 나누며 함께 결정해야 한다. 시민저항의 싹은 자급(自給)과 자치(自治), 자결(自決)의 기반을 마련할 때 활짝 피어날 수 있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그런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시민저항은 언제나 권력의 거짓말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 조급하지 말고 기반을 튼튼히 다질 때이다.



한국의 현대사에 여러 비극이 있었지만 제주도 4․3만한 비극은 없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이 기념행사를 치르던 주민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 뒤 1년 동안 2,500여명의 주민이 감금되거나 고문을 당했고, 48년 4월 3일 무장대가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1954년 한라산 금족지역이 개방될 때까지 7여년 동안, 4․3사건 위원회 보고서를 따르면 제주도민의 약 10%인 2만 5천명에서 3만명이 희생당했다(그 중 86.1%가 군대나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저질러진 이 학살은 제주도민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 증언자는 누이를 산에 묻고 돌아오니 온가족이 죽어 있더라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2003년 10월 노무현 정부는 4․3에 대해 공식적으로 과거 권력의 잘못을 사과하며 상처를 달래는 듯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국방부는 교과서에서 4․3을 “남로당의 폭동지시에 의해 발생한 좌익세력의 반란”이라 규정할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 소설가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라는 작품을 ‘불온서적’으로 규정했다. 최근 벌어지는 많은 다른 일들처럼 역사의 시계바늘도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는 더 이상 역사이기를 포기하고 바늘을 멈춘 채 권력을 가진 자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역사만 노리개감이 되는 건 아니다. 제주도민들의 삶은 또다시 육지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2007년 국방부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규모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그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다.

얼마 전 강정마을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서귀포에서 제주도 올레길을 따라 걸으며 찾아간 그곳은 아름답고 고즈넉한 포구였다. 해군기지추진단이라 이름붙인 콘테이너 박스만 없다면 아주 평화로울 곳이었다.

그런 곳에, 소위 세계평화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는 해괴한 발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을까? 주민들의 반대를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해괴한 말은 핵을 사용하지 않는 대규모 재래식 폭탄을 뜻하는 ‘친환경 폭탄’처럼 기괴한 우리 현실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뒤섞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그런 말들이 우리를 속일 수는 없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 본토 상륙을 막는 최후의 전쟁기지로 사용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육지에서 건너온 우익단체의 발에 짓밟혔던 제주도는 지금 시험대에 서 있다. 한반도 최남단에 만들어지는 해군기지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리라 생각하는 무뇌아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해군기지의 건설은 외부의 정치상황, 정확히는 동북아나 국제정세가 또 다시 제주도민과 한반도 주민의 삶과 생명을 좌우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평택에서 그랬듯이 정부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것에도 호소할 길 없는 힘없는 주민들은 또다시 돈 몇 푼 쥐어든 채 쫓겨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사건이 그렇게 끝날까? 그 무엇도 자신들을 돕거나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언제나 순순히 물러나기만 할까?

최근 어느 정치인은 무더기 법안통과를 시도하며 ‘전쟁’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에게는 이 표현이 하나의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그 표현은 단지 수사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드러난 일그러진 현실의 진실인 셈이다. 정치가 극단으로 치닫을수록 비극은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방치된 세상은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그 끝으로 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호소할 곳 없는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전쟁을 막을 정치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잠들지 못하는 남도는 우리의 미래이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법치주의’(法治主義)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편은 법치주의의 원칙에 따라 불법 행위가 드러나면 엄하게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강하게 밝혀 왔다. 그리고 다른 편에서는 법의 잣대에 현실을 끼워 맞추는 형식적인 법적용이고 국민을 법의 적용대상으로만 보는 오만한 발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한 편이 법에 따른 집행만을 강조한다면, 다른 편은 누가 법을 정하고 해석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군사독재 시절의 터무니없는 말은 교과서에서 사라졌지만, 현실은 이런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12월, 한미FTA와 관련된 문건을 유출했다는 혐의를 받던 정창수 씨가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징역 9개월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구속되었다. 그리고 올 1월에는 삼성그룹의 ‘X파일’ 사건을 폭로했던 노회찬 씨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구형받았다.

응당 국민도 그 내용을 알아야 할 FTA관련 문건을, 그것도 공청회나 토론회에서 이미 드러난 내용의 문건을 유출한 것이 구속의 이유일 수 있을까? 그리고 언론사와 대기업 간부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전․현직 검찰간부에게 떡값을 준 엄청난 비리를 폭로한 것이 처벌의 대상일까?

공공의 이익을 심하게 해치는 사건들을 폭로해서 사회적인 쟁점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잇달아 징역형을 선고받고 있다. 물론 법이 정한 과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이 없었다면 그런 중요한 사안들이 논의조차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행동은 사회에 이로웠다. 더구나 정치과정이 그 내용을 감추며 국민을 속이려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법부가 더러운 거래와 연관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문제는 법치가 아니라 ‘법의 권위’인 셈이다.

그런데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검찰과 법원은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법을 앞세운 칼날을 겨누고 있다. 검찰은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람을 무리하게 구속해서 수사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일 검찰은 조선․중앙․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말자는 운동을 이끈 혐의로 기소된 누리꾼 16명에게 업무방해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구형했다. 시민이나 소비자로서 자기 의견을 드러내고 운동을 펼친 것이 처벌의 대상이라니, ‘소비자운동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외친 랄프 네이더는 미국에 태어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할 일이다.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판결들이 권력의 영향을 받아왔다는 점이다. 한국의 사법부는 항상 ‘소신’을 강조해 왔지만, 그 소신은 시민이 아니라 권력이나 자본으로 기울어졌다. 힘없고 약한 시민들이 냉혹한 법의 심판을 받았다면,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은 국가나 경제에 기여해 왔다는 핑계로 후한 면죄부를 받아 왔다(영화 <공공의 적>의 강철중 검사처럼 권력에 맞서는 법관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일 뿐이다).

법은 강자와 약자가 같은 울타리 내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합의이다. 그런 법이 제 역할을 못하니 힘을 가진 자들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은 법이 무서워 자꾸 피하려 한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하고 조롱해서 그들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이에 약자들은 강자에게 분노와 복수심을 품으며 법을 무시한다. 각자가 능력껏 자기 삶을 알아서 지켜야 하는 곳에서 법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법치주의만을 강조하는 것은 법의 권위를 더 빨리 파괴할 뿐이다. 법을 무너뜨리는 것은 시민들이 아니라 바로 검찰과 법원이니, 자기 집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다. 외부의 혼란이 아니라 내부의 부조리가 법과 법치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법치주의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바로 정의와 평등이다. 헌법이 보장하듯이 법의 권위가 시민으로부터 나오고 법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할 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법을 지킬 것이다. 법의 뿌리를 지키려는 법관들의 소신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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