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서의 민주주의: 자급과 공생의 정치

 

하승우

 

요즘 들어 민주주의의 핵심원리가 대의민주주의라는 주장을 자주 접한다(로버트 달R. Dahl이나 최장집같은 학자가 대표적이다). 대의민주주의를 해석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를 대의민주주의로 환원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원을 망각한 무지의 소치이다. 단순히 서구 민주주의의 뿌리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 있음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주장은 민주주의가 민중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등장했고 그 투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역사성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민주주의는 지배층이 민중에게 준 선물이 아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왕과 귀족들이 정치를 독점하고 일반 민중을 배제하고 지배하는 현상, 그래서 민중이 공동체의 정치주체로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 이 민주주의는 집회에 참여한 모든 참여자가 투표권과 발언권을 가지고 몇 시간 동안 논쟁을 벌이는 집회민주주의(assembly democracy)였고, 전문가를 배격하고 시민이 아마추어(idiotai)로 참여하는 평민 민주주의였으며, 모든 시민이 돌아가며 한번씩 공직을 맡는 교체(rotation)의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는 특정 계층이나 전문가가 정치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순환시켜야 하고 그런 순환을 거치며 민중이 정치주체로 성장하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양에는 민주주의란 말이 없는 대신 민본주의(民本主義)란 말이 있었다. 맹자(孟子)는 “지배받는 백성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것이요, 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신들은 다음으로 존귀한 것이다. 그리고 지배하는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이라 “한 나라의 군주(제후)가 그 나라의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그 군주는 곧 변혁하여 새롭게 갈아치워야 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민중을 위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이렇게 보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민주주의는 특정 계층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현상을 비판하고 민중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등장했다. 민주주의는 현실의 부조리한 정치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대안이었고, 자신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에서 배제되고 않고 주체로 서려는 꿈틀거림이었다. 이런 꿈틀거림을 무시한 채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게 지금의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래도 대의민주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가 소수의 민주주의였을 뿐이라며 대의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허나 현대의 대의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고대보다 훨씬 더 적은 수의 전유물이고 시민의 자격은 제한되며(외국인, 빈민, 이주노동자의 시민권을 생각해 보라!) 정치권력은 민중을 통제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대의민주주의가 고대의 민주주의보다 더욱더 민주적이라는 점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더구나 대의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던 서구 선진국들이 제국주의 전쟁을 일삼고 식민지를 늘렸다는 점은 그 민주주의가 타인의 땀과 피를 딛고 개화했음을 증명한다. 제 아무리 멋들어진다 한들 그것이 타자의 땀을 착취하고 피로 억누른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보편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그런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건 무지보다 더 심한 문제이다.

그리고 서구의 대의민주주의가 도입되지 않았던 때에 우리에게는 고유한 정치나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었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나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외부의 것을 무조건 배우고 수용해야만 가능한 것이 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서구가 근대로 접어들던 시기에 많은 사상가들은 ‘고대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근대라는 난쟁이’라는 은유를 자주 썼다. 근대의 사람들에게는 고대라는 유산의 크기가 너무 컸다. 스스로 움츠려 들지 않기 위해 그들이 썼던 은유가 바로 고대인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태어나 더 많이, 더 멀리 볼 수 있는 난쟁이였다. 비록 은유를 썼지만 근대인들은 결코 고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거인이 남겨놓은 정치의 원리는 무엇일까?

이 글은 대의민주주의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경험에 스며있는 민중의 정치적인 잠재력을 깨닫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나아가 반정치적 또는 비정치적이라 여겨지는 농민의 삶과 농촌공동체에서 실현되었던 중요한 정치원리를 발견하려 한다.

 

 

자연상태의 발명과 국가에 갇힌 정치

 

최근 서구 학계에서 유행하는 정치이론들은 모두 자연상태를 발명했던 홉스(T. Hobbes)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제국과 다중을 주장하는 네그리(A. Negri)나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존재에 주목하는 아감벤(G. Agamben) 모두 홉스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네그리는 『다중』(세종서적, 2008)에서 홉스가 “부르주아지에게 적합했던 사회체의 성격과 시민권의 형태”를 정의하면서 “국민국가의 형태로 유럽에서 발전할 주권의 형태”(22쪽)를 규정했다고 주장한다. 홉스는 자연상태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황이라고 전제하고 질서를 잡을 강력한 주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질서에서 합리적인 시민은 무질서로 이끌 주권을 국가에 양도하고 규율 잡힌 질서 속에서 자신의 소유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할지는 국가주권이 결정한다. 홉스는 그런 자연상태가 실제로 존재했는가보다 주권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논의를 집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정치의 물음, 즉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사라졌고 무엇이 각자의 이득을 더 많이 보장할 것인가라는 계산만이 남았다.

그런 점에서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에서 “홉스의 자연상태란 국가의 법률과는 무관한, 법 이전의 상태가 아니라, 그러한 법을 구축하고 그러한 법 속에 정주하는 예외이자 경계선”(216쪽)이라고 말한다. 홉스에게 인간은 서로에게 늑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국가가 사라지면 언제든지 사회는 자연상태로 복귀한다. 주권이 없는 곳에는 오로지 폭력과 죽음뿐이다. 바로 이런 끔찍한 예외상태를 빌미로 국가는 언제든지 민중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었다. 자연상태를 전제하는 이상 국가를 제외한 정치는 불가능했다.

네그리와 아감벤의 논의는 홉스가 자연상태를 발명하고 그것을 전쟁과 동일시함으로써 근대의 국가주권을 정당화시켰다고 본다. 홉스는 주권자와 계약을 맺는 인간의 동의가 이성과 언어, 이득과 손해의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에, 주권은 개인의 자발적인 동의라는 ‘착각’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이 자연상태는 국가와 무질서의 경계를 규정하는 국가주권을 정당화시켰을 뿐 아니라 민중이 정치의 주체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홉스는 시민들의 정치적인 성장을 돕던 사회적 관계를 지워버리고 그들을 이기적인 개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국가권력에 도전하는 순간, 언제나 무질서라는 최악의 상태가 떠오른다. 국가를 넘어선 대안, 국가를 배제한 대안은 자연상태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날 수 없다. 민중의 대안적인 상상력은 국가라는 틀 속에 갇혔다. 민주주의를 주권으로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은 국가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진정 그런 자연상태가 존재했는가? 크로포트킨(P. Kropotkin)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르네상스, 2005)에서 그런 상태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원시사회의 씨족공동체에는 서로 돕고 사는 풍조가 만연했고, 독립된 가족과 사유재산의 출현에도 공동체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나치게 집중된 부를 재분배하는 제도들(예를 들어, 포틀래취)이 만들어졌다. “인간의 삶에서 어떤 시기에도 전쟁이 정상적인 상태인 적은 없었”고, “형평성, 상호부조, 상호지지 등의 개념은 대중들이 자신의 사회조직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작용해왔고, 이는 포악한 신정제나 독재정치에 복종하고 있을 때조차 발휘”되었다(149~150쪽).

시간이 흘러 과거의 씨족 공동체가 사라지고 촌락공동체가 만들어진 뒤에도 상호부조의 생활양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특히 촌락공동체는 “공동경작이나 여러 가지 형태로 가능한 상호지지,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지식이나 인종 간의 결속 그리고 도덕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합”(163쪽)이었고, 민회라는 고유한 정치질서를 마련했다. 농민들의 민회는 인공적인 정치질서가 아니라 협동노동과 공동소유에 기반한 자연적인 정치질서였다. 민회는 촌락 공동체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민회를 통해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공동의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근대국가가 등장해 촌락공동체들을 억압하고 해산시킨 뒤에도 촌락 공동체를 재건하려는 시도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촌락공동체 제도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요구와 생각에 매우 잘 맞아 떨어”졌기에 “공동체 생활을 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습과 습속”이 농민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다(281쪽).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근대국가의 주권을 넘어설 대안이 공유제와 농민에게 있고 “현재 만연되고 있는 무모한 개인주의 체제하에서도 농민 대중들은 상호지원이라는 유산을 충실하게 유지하고 있음”(294쪽)을 주목했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홉스의 자연상태는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질서를 무너뜨리고 근대국가의 주권을 정당화하며 민중의 정치적 성장을 가로막기 위해 ‘발명된 개념’이다. 근대국가는 개인의 소유관계를 제한하고 땅의 공유와 공동작업을 통해 공동체 전체의 성장을 추구했던 공동체의 역사를 은폐하고 전통을 끊으려 했다. 그리고 사회계약에 따른 대의민주주의 역시 민중의 관심을 개인적인 소유로 전환시키고 정치를 특정 계급이 독점하면서도 지지를 받기 위한 장치였다. 거대하게 세워진 의사당이나 행정부는 민중의 일상생활과 완전히 분리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촌락공동체의 정치질서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분리되지 않았다. 민회라는 정치공간은 의회처럼 민중의 일상생활과 분리된 인공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소농의 삶과 자급․공생의 정치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실현하기 위한 윤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이 바로 정치의 생명력이다. 자연히 농민의 삶, 특히 소농의 삶은 그 삶에 맞는 정치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농민은 땅을 일구며 땅과 함께 성장하기 때문에 자연의 지혜를 알고 있었고 홉스처럼 자연을 일방적인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자연상태를 전쟁으로 몰고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농민은 인위적인 변화를 거부하며 자연적인 평화로움에 자신의 삶을 맞추려 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농민은 “폭력에 대해서는 비폭력으로, 권력에 대해서는 무저항의 자세로” 맞서고 “인간의 속성으로서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폭력이나 지배욕을 제어하는 기능”을 자연스레 배웠다(유킨도, 130쪽). 스스로 땅을 일구어 먹고 살 수 있다면 폭력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물을 대고 김을 매는 농사일은 농민들이 서로 돕고 함께 모여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그래서 소농의 삶에서는 ‘자급(自給)’과 ‘공생(共生)’이 중요한 정치원리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급을 뜻하는 아우타르케이아(autarkeia) 또는 아우타루키(autarky)는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질서를 뜻했다. 그런데 이 자급은 경제적인 자립성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한 사람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납세의 의무를 지니고 투표권을 갖는 것 외에도 공공생활이나 군사활동 등 모든 기능에서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상호협력한다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이 중요한 공동체의 결정에 반드시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공동체의 규모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 규모를 유지한다고 해서 농민의 삶이 어떠한 변화도 거부하는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농민은 여러 가지 다양한 생명 종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결코 토양에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유킨도, 85쪽)는 점도 생활을 하며 자연스레 깨달았다. 여러 다양한 생명체들이 공존하는 삶이 땅을 비옥하게 만들듯이, 여러 사람들의 서로 보살피는 삶이 공동체를 튼튼하게 한다는 점도 분명했다.

개인적인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수단이나 생산물을 독점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결국에는 자신의 삶도 망가뜨린다는 점은 삶에 깃든 지혜였다. 그래서 농민의 삶에서는 발명보다 그런 삶의 지혜를 ‘발견’하는 과정이 더욱더 중요했다. 그 발견은 얼마나 놀라운가? “제4의 눈은 그곳의 풍경 속에 조상의 영혼이 참여함을 확실히 파악하고, 타관 사람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흙 위에 아름다움을 새기고, 무심히 그것을 감상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농심(農心)이란 이러한 것이 아닐까.”(유킨도, 151쪽)

이런 깨달음이 있었기에 고대 그리스의 농민공동체는 지중해 세계의 확대와 상업의 발전을 거부했다. 울프 선드호슨(Ulf Sundhaussen)이 지적했듯이, 당시 농민들은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간계층의 미덕이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불평등을 만들어서 정치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협한다고 봤다. 상업상의 경쟁은 외부 공동체와의 전쟁을 불러왔고, 공동체 내부에서도 빈곤을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의 농민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주강현은 한국 농민공동체의 핵심을 조선 후기에 발전했던 ‘두레’에서 찾는다. 보통 30~50호 정도의 가구가 모인 두레는 단순히 서로 일을 도와주는 모임이 아니라 “사유적 요소를 극복하고 공유적 계기와 밀접하게 결합”된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왜냐하면 두레는 단순히 서로 일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았고 마을의 공유재산을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두레의 구성원들은 함께 일하며 생긴 수익금을 모아 자산을 늘리고 일정한 액수를 반드시 적립했다. “두레가 분화된 이후에는 각자 노동의 대가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조선 후기의 두레에서는 공동체적 강제가 강했기 때문에 반드시 일정 부분을 공동 적립시켜야 했다.”(99쪽) 그리고 18, 19세기에 지배층이 동계를 하나의 납세단위로 묶어 공동납(共同納)을 강화하자, 이런 세금부담은 주민들을 단합시켰고 동중답(洞中沓)과 같은 마을의 공동재산을 확대시키기도 했다. 이 공유재산은 두레와 많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공유재산은 농민들의 자급과 공생을 위한 토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두레는 촌회와도 연관되었다. 두레는 “마을의 정신적 상징인 마을굿을 모시며, 두레를 조직․운영하고, 동산(洞山) 등 공유재산을 거느리고 있으며, 촌회(村會)를 열어 공동의 일을 토의 결정”했다(84쪽) 두레는 마을굿과 공동노동의 조직과 운영, 공유재산의 관리를 위해 촌회라는 정치기구를 뒀고, 그 속에서 농민들은 정치를 경험했다(호남지방의 경우에 두레는 모정(茅亭)이라는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때때로 이 두레는 양반층의 향촌지배를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의 농민공동체를 양반들이 지배하던 봉건적인 공동체로 보는 편향된 시각은 그 내부의 정치적인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다. 양반들이 마을을 지배했다고 해도 그것이 고대부터 내려온 농민공동체 자체를 대체하지는 못했다. 양반이 주도하던 향회도 단순히 농민들을 지배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때때로 향회는 “대소민을 막론하고 빈부 모두 곤궁해지는 위기적 상황에서, 끝없는 관의 가렴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 생존을 위하여 상하가 연대”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철종 때 괴산에서는 수령의 자의적 결가책정에 대하여 반대하는 향회가 29차례나 열렸으며 각처에서 관의 부조리한 조처에 굴종하지 않고 통문을 돌려 향회를 소집, 단합된 여론을 배경으로 수령에게 시정을 요구하는 ‘읍소(泣訴)’를 감행하고 여의치 않으면 다시 감영에 진정하는 ‘의송(議送)’에 나서는 등 향회는 점차 반관적 저항을 위한 모임의 장소가 되었고 드디어 민란의 온상 구실을 하게 되었다.”(김용덕, 40쪽) 이처럼 마을 내에는 봉건적인 지배원리와 농민의 자치적인 정치원리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처럼 동서양 어느 곳에서나 농민공동체는 자기 나름의 공동체적 정치질서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런 질서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의 자연스런 조건으로 만들어졌다. 농민의 삶은 자급과 공생에 바탕을 둔 정치가 자율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임을 말해준다. 국가가 없는 곳에서 농민들은 공동체를 꾸리고 자급하며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고 삶과 일치하는 정치원리를 실현했다. 농민의 삶으로 다져진 거인의 정치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탱해 왔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의 성립은 이런 소농의 정치질서를 파괴하고 대체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와 농민공동체의 파괴

 

농민의 삶은 통제할 수 없는 범위의 확장을 거부했다. 화폐경제에 편입되기 전에는 “가족 한 사람당 농지가 얼마나 확보되는가 하는 것이 절실한 문제”였고 “자급자족 단계에 있는 농업에서는, 항상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농지가 얼마나 확보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농민의 최대 관심사”(유킨도, 108쪽)였다. 하지만 화폐경제는 이런 농민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고,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식민지화는 농민공동체를 체계적으로 파괴시켰다.

『농민의 도덕경제: 동남아시아의 반란과 생계』(아카넷, 2004)에서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은 지주와 국가에게 얼마나 빼앗겼나보다 자신에게 ‘얼마가 남는가’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농민의 생계윤리가 전통적인 농민공동체를 지배해 왔다고 본다.

이런 농민의 윤리는 호혜적인 제도들을 통해 실현되었다(스콧은 이런 호혜적인 제도들이 평등주의적이거나 이상적인 제도보다 노동력이 부족한 곳에서 노동력을 붙들어두려는 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어쨌거나 그런 생계의 도덕윤리는 “빈민에게는 생계의 사회적 권리가 있다는 것”과 “엘리트는 가난한 자들의 생계를 위한 예비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최대한 공식화는, 엘리트는 결핍의 시기에 종속자들의 생계유지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적극적인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것”(54쪽)을 분명히 했다. 마을의 공유재산은 과부나 고아들이 살아가도록 지원했고 “정상적인 시기에 ‘가장 약한 자의 생존’을 보장”(67~68쪽)했다.

하지만 서구 제국의 식민지화는 이런 도덕경제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식민권력은 공유지를 박탈했고, 세계시장 편입에 따른 곡물가격의 불안정은 생계를 위협했다. 이런 변화는 농민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을의 임야나 공유지가 사라져 마을 공동체의 보호틀이 사라졌고, 마을의 부유층은 빈곤층의 요구를 무시하며 사법기관이나 경찰을 동원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시장가격의 변동과 인구증가로 마을의 재분배 압력은 효력을 잃었다(89~90쪽). 농민의 자급적이고 서로 보살피며 살아갈 토대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도덕경제를 무너뜨리면서 식민권력은 세금으로 농민을 착취했다. 인두세와 토지세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거셌지만, 식민권력은 자신들의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의 범위를 더 넓혔다. 과거의 지배자들과 달리 “왕권에 저항할 수 있었던 지역 수장들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132쪽)던 식민권력은 근대적인 무기와 상비군을 도움을 받아 저항을 잠재웠다. 그리고 식민권력은 “분산된 지역적 관습과 절차를 좀더 동질적인 전체로 통일”시키기 위해 중앙집중화된 강력한 관료제도를 만들었다. 식민권력은 농민들의 경제적인 삶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삶도 짓밟았다.

식민지 국가의 등장과 농민공동체의 붕괴는 스콧이 관찰했던 동남 아시아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상황은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일제 식민권력은 한국 사회에 배타적 소유권을 확립했고 공유지를 박탈했다. 1919년대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은 배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했고, 많은 농민들이 소유권을 잃었다. 두레와 촌회의 전통 역시 식민권력의 침투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제 식민권력은 전쟁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세금을 걷고 이를 위해 강력한 관료제도를 도입했다.

동남아시아와 한국의 사례는 농민의 삶과 농민공동체의 정치원리가 어떻게 짓밟혔는지를 잘 보여준다. 식민권력은 최소한의 동의과정조차 거치지 않은 채 농민들을 수탈하고 공동체를 붕괴시켰다. 그러니 식민지를 경험한 곳에서 근대정치로의 전환과정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이어졌고 민중의 정치적 잠재력은 끊임없이 그 폭력에 시달렸다.

 

 

민주주의의 혁신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비극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 공유지를 박탈하고 공동체를 붕괴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세금을 걷기 위한 관료체계와 내부의 반란을 막기 위한 공권력이 강화되면서 국가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전통적인 공동체나 농민공동체의 정치원리는 낙후되거나 봉건적인 유산으로 매도당하고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민중의 몸 속에 각인된 정치적인 잠재력을 두려워하기에 권력을 가진 자들은 민중의 삶과 정치를 분리하려 한다.

그런 분리의 수단이 바로 제도화이다. 그들은 언제나 민주주의를 제도로 가두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세계 역사를 통틀어 근대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제도로 구현된 적이 있었나? 민주주의를 특정한 제도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계속 있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정치현상을 고정된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함석헌이 얘기했던 바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함석헌은 민중을 지배하는 기풍과 제도의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육신이 사는데 집 옷이 있듯이 제도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울타리다. 집은 닫기운 것이요, 닫겼기 때문에 집이지만 집 안에 오래 있으면 공기가 흐리고 독소가 생겨 사람이 죽게 되듯이 제도는 고정한 것이요, 고정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지만 제도가 오래면 사회는 반드시 해를 입는다. 그것은 생명은 쉴 새 없이 자라는 것인데 제도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를 언제나 건전하게 발전시키려면 제도를 끊임없이 고쳐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에 강건한 기풍을 세울 필요가 있다 할 때는 실질적으로는 사회제도의 혁신을 말하는 것이다. 제도를 그냥 두고 개선을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제도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성장에 맞는 제도의 혁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따라서 이제 민주주의의 과제는 단순히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제도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어디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이고 제도는 그런 성장을 반영하는 근본적인 혁신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우리의 성장을 위한 디딤돌을 찾을 것인가? 선드호슨은 “서구식 처방은 무시하고, 자신들의 과거의 결함으로부터, 또 산마리노 같은 나라의 역사로부터 배워서, 다수 인민 즉 농민계급을 민주적 정치 속으로 참여시키는 길을 선택”(169쪽)하자고 얘기한다. 그렇다, 1만년 이상을 이어온 자급자족과 지속의 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방법은 결코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는 반동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전통을 복원하고 주권의 논리로 민중을 억압하는 국가를 넘어설 대안일지 모른다. 따라서 무기력하게 대의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할 게 아니라 민중의 역동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녹아있는 정치적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

농민의 정치원리를 따르는 정치질서는 인공적이거나 가공의 정치상황을 발명하거나 상상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1만년 이상 우리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온 정치원리를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자연상태에 대한 학습된 두려움이나 국가주권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스스로 자급과 공생의 길을 개척하면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상상이 아니다. 촛불저항이 그 길을 가리키고 있다.



제대로 된 혁명

- D.H.로렌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쫓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는가를 보는 짓이란 얼마나 즐거운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를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한국의 풀뿌리민주주의운동에 관한 이론적 고찰: 시론적 연구

 

하승우

 

1. 들어가는 말

 

현재 한국 사회는 총체적인 위기를 겪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사회 양극화와 비정규직 확대, 토건국가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와 산업의 불균형, 수도권 집중화의 심화와 지방권력의 비민주성, 삼성공화국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되는 권력의 유착과 비리,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의 과도한 권력화, 전문성을 빌미로 견제를 받지 않는 관료정치의 강화 등은 묵직한 무게감으로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여기에 한미FTA 체결과정에서 드러난 정책결정과정의 비민주성은 한국 민주주의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여전히 권력이 노골적으로 횡포를 부리고 선거과정에서 비리도 발생하지만, 과거에 비해 정책결정절차가 합리화되고 있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합리적인 절차가 마련되고 있다는 점은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있다는 점으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주방폐장 주민투표에서 드러났듯이, 합리적인 절차가 비민주적인 정책결정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사용되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하승우, 2006). 사실상 지금까지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들이 초점을 맞춰 온 것은 주로 제도적인 면이었는데, 그 논의로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87년 민주화 이후 “합법적인 정치권력의 교체와 민주적 절차와 제도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민주주의의 내용은 보다 심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향을 잃은 채 공허한 하나의 수사적 이름으로 그 실질적인 내용을 잃어가고 있다.”(박주원, 2007: 177)

그리고 단순히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만으로 통합할 수 없는 다양한 균열선이 드러나고 있다. 정규직/비정규직/실업자 사이의 균열선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고, 여기에 남성/여성의 성차, 학벌사회의 격차를 더하면 그 균열선은 더욱더 복잡해진다. 또한 ‘88만원세대’처럼 세대간의 균열선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우석훈․박권일, 2007). 더구나 승자독식의 치열한 경쟁구도는 이런 균열선들을 더 깊이 파고 있다.

반면에 이런 현실의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힘이어야 할 소위 진보운동은 대중과 분리되어 영향력을 상실하고, 과거의 관성과 경직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합법주의에 매몰되고 있으며,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진보담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박래군, 2007). 최근 민주노동당의 붕괴과정에서 드러났듯이, 과거의 낡은 이념적/정파적 대립구도는 단순한 내용적인 한계를 넘어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의 한계라는 점에서 심각성을 가지고 있다.

이제 위기의 현실,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근본적인 반성 속에서 나와야 한다. 그 대안은 새로운 프레임을,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런 성찰과 반성의 계기는 전혀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릴 때 마련될 수도 있겠지만 잊혀진 것들을 재발견하고 재구성하는 것에서도 마련될 수 있다.

이 연구는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풀뿌리민주주의운동에서 그 성찰과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려 한다. 굳이 풀뿌리로 눈을 돌리는 것은 풀뿌리민주주의운동이 제도보다 사람에 주목하면서 민주주의의 주체를 기르며 총체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해 왔다는 점, 그리고 최근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풀뿌리운동(grassroots movement)과 풀뿌리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이다.

 

 

2. 풀뿌리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최근 들어 풀뿌리운동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함께 풀뿌리운동을 정의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노력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은 우리의 상식과 달리 풀뿌리운동을 바로 지역운동과 연결짓지 않는다는 점이다. 먼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하승수는 풀뿌리자치운동을 “권력을 갖지 못한 일반 대중이 스스로의 삶의 공간에서 집단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과 삶의 공간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가려는 의식적인 활동”이라 정의한다. 여기서 풀뿌리운동은 ‘지역’보다 ‘삶의 공간’으로 정의되어 “폭넓은 의미의 지역운동과는 구분”되고 있다. 즉 운동공간을 지역으로 설정한다 하더라도 전문가나 활동가 중심의 운동노선을 따르면서 사람들을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소외시킨다면 풀뿌리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하승수, 2006).

그리고 〈함께하는시민행동〉의 오관영은 풀뿌리운동의 특성을 “운동을 조직화하고 드러내는 방식”에서 찾는다. 가령 속도를 중심으로 한 운동에 대한 반성, 공간을 재조직화하기 위한 운동, 주민들과 지속적인 소통창구를 만드는 운동, 다른 언어만이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운동, 여성을 중심으로 한 운동, 제도보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 성과를 독점하지 않고 여럿이 함께 나누는 운동으로 개념화한다(오관영, 2006).

이렇게 정의할 경우 풀뿌리운동은 지역을 기반으로 삼기는 하지만 단순히 지역에서 활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풀뿌리운동으로 정의되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공유되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지역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으로만 풀뿌리운동을 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겠다. 모든 지역운동이 풀뿌리운동일 수는 없다.

그리고 풀뿌리운동은 단순히 지방에서 진행되는 운동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지방만이 아니라 수도권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풀뿌리운동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풀뿌리운동이 각각의 지방에 고립된 운동을 뜻하지도 않는다. 특히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와 세계화의 현실에서 지방은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풀뿌리운동을 공간적 차원으로 규정하기 곤란한 어려움은 이론적인 면에서도 존재한다. 지방 혹은 지역이라고 할 때 어느 정도의 규모를 풀뿌리라 정의할 수 있을까? 단순히 행정구역단위나 인구규모만으로 풀뿌리를 정의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공부방이나 놀이터처럼 행정구역으로 잡히지 않는 작은 단위에서 시작되는 운동도 있고, 지리산권역처럼 여러 행정구역에 걸쳐 진행되는 운동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지역이라는 규모를 물리적으로 설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풀뿌리운동의 규모는 운동의 이슈와 방식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소위 지역에서 활동하고 지방에 뿌리를 내리 전략으로 풀뿌리운동을 언급하는 것은 잘못된 개념정의라고 얘기할 수 있다. 풀뿌리운동을 단순히 지역에 지부를 만드는 활동으로 제한하거나 지역으로 풀뿌리운동의 활력을 제한하려는 생각을 ‘운동의 풀뿌리화’라고 부르는 것은 풀뿌리운동이 가진 특징을 오해하게 만드는 그릇된 해석이다.

풀뿌리를 공간적 차원으로 파악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풀뿌리운동을 정의해야 할까? 공간적 차원 외에 많이 쓰는 방법들은 풀뿌리를 주체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이다. 현재 개인, 주민, 시민, 민중, 대중, 다중, 계급 등 여러 개념들이 정치적 주체를 정의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 먼저 정철희는 대중을 정치주체로 받아들이면서 풀뿌리정치란 “대중의 일상적인 정치적 실천의 장에서 이들의 정치적 능력을 찾아내려는 시도”(정철희, 2003: 157)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민운동을 분석하는 사람들은 조직화된 운동에 대한 대안으로 개인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 시민과 개인을 연결짓고 생협에서 사용하는 ‘생활자’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기존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을 모두 비판하는 자율주의 쪽에서는 다중(multitude)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런데 주민운동의 관점에서 풀뿌리운동을 바라보는 이호는 주민을 “권력을 지닌 자나 전문가들로부터 대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이끌어 가야 할 주체”(이호, 2002: 47)라 명명한다. 그러면서 이호는 “주민자치운동은 특정한 이슈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해결하느냐를 통해 평가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기준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주민들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참여했는가, 그 과정을 통해 주민들이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민자치를 과정으로서 개념지웠듯이, 주민자치운동 역시 그 과정을 중요시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이호, 2002: 57)고 주장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하승수는 풀뿌리운동의 주체를 “자신의 삶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 규정하고 중요한 것은 “단지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과정을 통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치능력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사회변화를 만들어나가는 힘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고 “주체를 형성해 나간다는 것은 풀뿌리운동의 실천과정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풀뿌리운동의 목적”(하승수, 2006: 3)이라고 주장한다.

이호와 하승수의 관점은 풀뿌리운동의 주체를 주민이라 호명하지만 그 주민의 범주를 분명하고 엄격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풀뿌리운동을 주체의 문제로 정의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이는 주체를 ‘존재’의 관점이 아니라 ‘생성(becoming)’의 관점에서 고민하게 한다. 이 글은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

이 글은 풀뿌리운동의 주체를 특정한 대상으로 규정하는데 반대한다. 르포르(C. Lefort)는 민주주의의 전례 없는 혁명적 특징이 “권력의 소재지(the locus of power)를 비어 있는 장소(empty place)”(Lefort, 1988: 17)로 파악한 점이라고 주장한다. 즉 민중이 권력을 가진다고 말하지만 그 민중에 속하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민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권력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특정한 사람들로 민중을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규정이 가져올 수 있는 배제(exclusion)의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이런 '정의의 여백‘은 자칫 풀뿌리운동이 낳을지 모를 배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회생태론자인 북친(M. Boochin)은 이런 여백의 개념규정이 이런 문제를 극복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근대 도시의 거대한 규모가 마을의회운동(neighborhood assembly movement)을 구성하는데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을의회의 문은 누가 마을에 살든지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개인은 마을의회에 참여하지 않을지 모르나 그들은 참석하도록 강요당하지 말아야 한다. 그 규모를 고려하지 않고, 또는 무관심한 방관자나 나그네를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집단은 충분히 논의거리들을 가질 것이다. 고려할 점은 참석하고 참여하려는 모든 이에게 집단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마을의회의 참된 민주적 본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Bookchin 연설문)

민주주의라는 말이 애초에 민중의 지배를 가리킴에도 풀뿌리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그 민중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고대에 여성과 외국인, 아이들이 정치에서 배제되었다면, 근대에도 마찬가지로 여성과 빈민, 이주노동자, 아이들이 정치에서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풀뿌리운동은 이미 이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래서 공적인 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시민권을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한다. 만일 시대와 사회적 상황이 변해 또 다른 배제되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그들이 바로 풀뿌리가 될 것이다. 따라서 풀뿌리운동을 지역이나 지방이라는 공간적 차원으로 정의하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풀뿌리운동을 운동의 주체로 정의하려는 시도 역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오마이뉴스>와 <함께하는시민행동>의 ‘희망투어’에서 드러났듯이, 중앙에서 고조되는 시민운동의 위기담론과 달리 삶의 터전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다양한 풀뿌리운동들이 한국사회에 존재한다. 이런 경향을 볼 때 한국의 풀뿌리운동이 기존의 시민운동이 드러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풀뿌리운동만으로 한국 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초고령화, 사회적 양극화, 매갈로매니아의 사회에서 풀뿌리운동이 가진 대안적인 희망은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각한 인구집중(2005년말 전국의 48.3%)만이 아니라 사업체의 수도권 집중(2004년 기준 총사업체 수의 52%), 교육격차(지역별 학업성취도의 격차와 대학의 수도권 집중), 비정규직의 지속적인 증가 등 심각한 불균등발전은 더 깊은 고민을 요구한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난개발과 재개발 열풍 또한 고민의 틀을 확대시킬 것을 요구한다.

 

 

3. 민주화 운동의 단절과 잃어버림

 

기존의 사회운동은 풀뿌리민주주의나 풀뿌리운동이라는 개념보다 지역운동, 지역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김현우는 지역노동시장에 대한 개입, 지역경제운영을 위한 지역파트너십, 지방자치체의 정책이나 제도에 대한 개입, 사회공공성 담론에 기반한 지역이슈, 지역발전전략이나 성장기획, 지역주민과의 유대강화에서 지역사회와 노동운동의 결합이 가능하다고 주장(김현우, 2005: 86~90)하지만 풀뿌리라는 개념을 직접 사용하지 않는다.

만일 이런 관점을 따른다면, 김현우의 말처럼 이미 존재하는 지역 내의 다양한 운동자원과의 연대를 강조하지만 정작 그런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즉 일반 대중이 참여를 통해 자기변화를 경험하며 정치적인 주체로 변하는 과정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지역사회 변화전략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풀뿌리운동은 대중의 욕구나 의식을 인정하지 않고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며 소위 ‘과학적인 이론’의 틀에 삶의 방향을 맞추려는 운동과 연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의 흐름은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다양한 축을 맡았던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농민회, 크리스챤아카데미, YMCA노동교육협회,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 도시산업선교회, 야학협의회 등이 추구했던 운동은 풀뿌리운동의 틀과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1968년 9월 연세대학교에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활동을 지원하고 일꾼을 양성하기 위한 <도시문제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미국의 빈민운동가 솔 알린스키(S. Alinsky)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인 <도시문제연구소>는 지역사회개발을 위해 빈민지역 주민들을 조직화하겠다는 목적을 가졌고, 1971년 9월 더 능동적이고 강력하게 활동하기 위해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를 설립했으며, 1973년 1월에 명칭을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로, 그리고 1976년에는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로 이름을 바꿨다(한국도시연구소, 1999: 59~60).

또한 1971년에 프레이리(Paulo Freire)의 교육사상이 한국에 처음 소개되면서 기독교 교육운동 활동가를 중심으로 민중교육사상이 논의․실천되었다. 그리고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론과 더불어 선교조직 방법론으로서의 알린스키의 조직 이론이 중요한 실천원리로 자리잡았고, 이는 ‘의식화․조직화 교육’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의식화․조직화’는 이후 민중교육운동의 중요한 지향으로 설정되었다(홍은광, 2003: 119~158).

기독교와 가톨릭을 중심으로 외국의 운동이론이 수입되는 한편, 한국사회 내에서 자생적으로 이론이 구성되기도 했다. 일찍이 함석헌은 씨론을 펼치면서 민중적 관점에서 기독교와 역사를 재해석하고 민중중심의 사회운동론을 제시했다. 함석헌은 씨에게 다가가 씨과 함께 호흡해야 하고 씨이 스스로 자신의 바탈(性)을 되찾고 하나가 되도록 민중의 바다로 내려가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함석헌이 써던 수많은 글과 그가 행한 수많은 강연은 조직이 아니라 말과 글의 힘으로 변화의 흐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위당 장일순도 유교와 가톨릭, 노장 사상과 동학 사상을 바탕으로 원주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이며 신용협동조합운동, 생활협동조합운동(한살림운동)을 벌였다.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이 밝히듯이, 장일순은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관점을 세우고 생명에 대한 모심과 섬김, 살림과 무위의 사상을 밝혔다. 생전에 단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지만 장일순이 개입했던 수많은 운동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그 운동이 지켜야할 분명한 원칙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다양한 운동의 유산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상실되었다. 1970년대, 1980년대 초반까지 강조되었던 스스로 눈을 뜨기 위한 ‘의식화’, ‘조직화’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맑스-레닌주의를 따르는 의식화, 조직화로 전환되었다. 의식화와 조직화라는 말은 동일했지만 그 기본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앞의 의식화와 조직화는 대중이 자신의 조건과 세계를 인식하고 조직화를 통해 정치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강조했고, 뒤의 의식화와 조직화는 전위조직이 대중을 계몽시키고 선도하는 정치세력화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맑스-레닌주의 중심의 조직운동관은 기존의 운동과 이론에 대해서도 다른 식의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 운동의 의미를 개량주의 등으로 단순화하고 폄하했다. 사회변혁을 둘러싼 논쟁마저도 이 땅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특정 텍스트의 과학성이 쟁점의 수준과 논의의 진척에 따라서 검증되기보다는, 어떤 텍스트에 권위가 항구적으로 부여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허재영 2004: 193)가 발생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풀뿌리운동의 흐름과 이론적 논의는 점점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물론 작은 지역단위의 실험들은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지만 운동의 주된 흐름이 되지 못했고 자연히 그와 관련된 논의들도 줄어들면서 이론적인 발전이 정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연구는 알린스키와 프레이리, 함석헌, 장일순, 네 명의 사상을 추적하며 그동안의 민주주의 담론에서 상실된 내용을 복원하고 풀뿌리민주주의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놓으려 한다. 이들 네 명의 사상가는 각기 비슷하지만 다른 장에서 자기 활동을 펼쳤다. 프레이리는 브라질에서 추방된 이후 미국과 세계를 돌며 민중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알린스키는 미국 내 지역을 돌며 빈민조직화에 힘을 쏟았다. 장일순은 원주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각종 지역운동을 벌이는 한편 민청학련 등 민주화 운동에 도움을 줬고, 함석헌 역시 곳곳에 강의를 다니며 민주화운동의 불을 지폈다.

이렇게 달랐지만 시공을 초월해 서로가 만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장일순이 프레이리를 읽었음을 증명하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광산촌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던 장일순이 알린스키를 접했을 가능성도 높다. 장일순은 가톨릭센터에서 함석헌 등의 각종 지식인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 중요한 문헌들을 번역해 보급하며 이른바 ‘원주캠프’를 활성화시켰다. 그러니 함석헌도 이를 통해 알린스키나 프레이리의 이론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4. 복원을 위한 이론적 디딤돌과 고민

 

그동안 알린스키를 다룬 논문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에 《기독교사상》에 실린 글이나 그의 삶을 간략하게 조명한 글이 전부이다. 학위논문도 김규태의 “사회복지와 권력정책의 일연구 : R. 니버와 S. 알린스키를 중심으로”(1975)와 이경자의 “한국적 지역사회조직의 사회행동 모델 사례연구 :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를 중심으로”(2000)가 있을 뿐이다. 단행본으로는 알린스키의 글과 그 제자들의 글을 간추려 편역한 『S.D. 알린스키: 생애와 사상』(현대사상사, 1983)이 한글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하지만 <도시문제연구소>나 <한국도시연구소>,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 등의 단체들이 알린스키의 조직화론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지금도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은 알린스키의 이론을 중요한 이론적 틀로 삼고 있다). 예를 들어, 코넷의 트레이너인 최종덕은 코넷의 뿌리가 알린스키의 이론에 있음을 밝히면서 주민조직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알린스키의 이론이 실제 운동현장에서 많이 다뤄졌다면, 프레이리의 교육론은 그동안 교육학과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그 주된 주제는 프레이리의 대화교육론, 변증법적 교육론, 인간주의 교육사상, 비판적 문해교육 등이었다. 하지만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프레이리의 사상을 다루고 한국 운동과의 접점을 구체적으로 모색한 논문도 있는데, 홍은광의 “파울로 프레이리 교육사상의 수용과정과 한국 민중교육운동에 대한 영향”(2003)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프레이리의 교육사상을 다룬 단행본들이 계속 번역되고 있는데, 현재 한국에 번역된 프레이리의 저작은 『자유의 교육학』(아침이슬, 2007), 『교육과 의식화』(중원문화사, 2007),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마일스 호튼과 공저, 2006), 『망고나무 그늘 아래서』(아침이슬, 2003), 『교육과 정치의식』(한국학술정보, 2003), 『희망의 교육학』(아침이슬, 2002), 『페다고지』(그린비, 2003-재번역), 『프레이리의 교사론』(아침이슬, 2000), 『인생이 학교다』(분도출판사, 1988)이다. 출판연도에서 드러나듯이 1970년대, 80년대에 소책자 복사본의 형태로 돌려보는 수준에서, 2000년 이후 프레이리를 다시 조명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과거에 프레이리의 이론을 맑스주의적 계급이론으로 해석하던 편향성에서 벗어나 프레이리의 이론적 장점을 다양하게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함석헌은 신학대학원에서 주로 다루어졌고, 우찌무라 간조, 김교신을 이어 내려오는 무교회주의나 스승인 유영모에게 이어받은 씨사상 등이 조명을 받았다. 그리고 비폭력사상과 노장사상 등도 주된 연구주제였다. 종교학과 철학에서 함석헌을 간혹 주목해 왔는데, 이동수의 “함석헌과 정치평론”(2001), 문지영의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이념 연구: 함석헌의 저항담론을 중심으로”(2006)는 정치학 쪽에서 접근한 몇 안 되는 논문이다. 또한 함석헌은 《씨의 소리》를 1970년부터 시작해 약 10년간 발행했고, 그의 글을 모은 책만 해도 20권에 달한다. 함석헌의 삶을 다룬 평전도 조한서의 『평화를 사랑한 아름다운 사상가, 함석헌』(작은씨앗, 2007), 씨알사상연구회의 『씨알 생명 평화: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한길사, 2007), 김용준의 『내가 본 함석헌』(아카넷, 2006), 이치석의 『씨알 함석헌 평전』(시대의창, 2005), 함석헌기념사업회의 『다시 그리워지는 함석헌 선생님』(한길사, 2001)와 『함석헌 사상을 찾아서』(삼인, 2001), 『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 선생』(한길사, 2001), 김성수의 『함석헌 평전』(삼인, 2001) 등 여러 권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사)함석헌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ssialsori.net/)에서 함석헌과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반면에 생전에 직접 책을 짓지 않은 장일순의 경우 논문으로 많이 다뤄지지 않고 있다. 박순금의 “장일순 생명사상의 생태유아교육적 함의”(부산대학교, 2003), 이영화의 “무위당 장일순의 사상과 활동”(강원대학교, 2006), 박경빈의 “무위당 장일순의 서화에 대한 미학적 연구”(성균관대학교, 2006)가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대략적으로 다룬 논문들이다. 단행본도 장일순의 강연을 모은 『나락 한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 1997), 이현주 목사와의 대화를 엮은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삼인, 2003),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이 엮은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녹색평론사, 2004), 최성현이 일화와 글, 그림을 엮은 『좁쌀 한 알: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도솔, 2004)이 전부이다. 그리고 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http://www.jangilsoon.co.kr/)이 마련한 무위당 기념관과 여러 자료들은 장일순의 행적과 사상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외에 네 명의 사상가를 직접 다루지 않았지만 협동조합, 대안교육, 지역화폐 등의 공동체운동을 분석한 이근행의 “한국 공동체운동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2006)와 1970~80년대의 대안공동체 운동을 중심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의미를 짚고 있는 박주원의 “한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기원”(2007)도 연구의 토대로 활용될 수 있다.

이 연구는 네 명의 사상가의 얘기, 또는 그들에 관한 얘기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부분인 풀뿌리민주주의운동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각 사상가들의 이론이 방대하기 때문에 그 각각의 사상을 밝히고 정리하는 것만도 방대한 분량의 연구를 요구한다. 따라서 각 사상가들의 이론적 특징이 무엇이고 어떤 발전과정을 거쳤는지에 관해서는 이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다만 풀뿌리민주주의운동과 관련된 내용이 이들의 사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만 간략하게 언급하려 한다.

그리고 이 연구는 이들의 사상이 현실운동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보다 이들의 사상이 어떤 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운동과 맞닿아 있는가를 밝히는데 목적을 둔다. 알린스키와 프레이리, 함석헌, 장일순의 사상이 도시빈민운동, 야학운동, 비폭력 평화주의, 무교회주의, 한살림운동, 지역공동체운동 등의 현실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상이 직접 현실을 이끈다는 생각은 현실을 살아가는 주민과 민중, 씨, 민초들의 경험과 의지가 현실을 변화시킨다는 이들 사상가의 이론과 일치하기 않기 때문에, 이들의 사상과 현실운동의 접합점을 찾는 작업 역시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이 부분 역시 이후 연구의 과제로 남겨놓는다.

이 연구는 풀뿌리민주주의를 중심으로 네 명의 사상을 정리하고 그 사상들이 서로 어떤 점에서 맞닿아 있는지를 밝히는데 목적을 둔다. 각각의 사상가들은 기존의 사회운동관과 다른 독특한 관점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은 독특하지만 서로 얽혀 있다. 프레이리가 강조하는 자기의식화와 대화의 중요성은 민중(활동가도 민중이다!)의 의식에서 시작해 그 속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며 변화하는 ‘과정의 중요성’이다. 그리고 알린스키가 부각시킨 분노의 조직화와 대중에 대한 신뢰 역시 민중이 스스로 의식화, 조직화되는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함석헌의 사상도 씨이 근본적인 변화의 힘이고 외부의 일방적인 명령이나 지시보다 자연스러운 깨달음을 통해, 얼의 변화를 통해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장일순 역시 민중을 모시고 그 속으로 들어갈 때 공생의 사상이 실현될 수 있다고 봤다. 따라서 이 네 명의 사상가들은 민중을 의식화, 조직화의 대상이 아니라 그 주체로 삼고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자생적인 변화의 힘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5. 풀뿌리민주주의운동의 이론적 단초들

 

(1) 프레이리: 자기의식화와 함께함, 대화

 

이미 20세기 중반에 체게바라(Che Guevara)와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는 사회운동이 풀뿌리운동의 형태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특히 프레이리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교육학’이라고 이름지은 『페다고지(pedagogy)』에서 미래를 길들여진 현재로 재생산하려는 우파와 미래를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좌파 모두를 비판하면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주체로 서는 혁명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프레이리는 “진보적 교육자의 한 가지 과제는,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진지하고 정확한 정치적 분석을 통해서 희망을 위한 기회를 밝혀내는 것”(프레이리, 200b: 12)이라며 희망을 심어주는 교육의 역할을 강조했다.

프레이리는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내면에서 재생산되는 지배구조를 타파하려고 노력했다. 프레이리는 이런 재생산의 원인을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상황의 모순”(프레이리, 2003: 56)에서 찾고 자기의식화만이 이런 모순을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이 강조했던 전위조직이나 선도투쟁은 이런 자기의식화의 토대일 수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프레이리는 “해방교육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민중이 자기 사고의 주인으로 느끼도록 하는 데 있다”(프레이리, 2003: 158)고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혁명 지도부가 민중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민중 자신의 객관적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인식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즉 민중이 자기 자신과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에 관해 다양한 수준의 인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민중이 가진 특수한 세계관을 존중하지 못한다면 교육과 정책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프레이리, 2003: 122)

그리고 이런 자기의식화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함’이다. 프레이리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피억압자의 교육학’이라 명명한 이 책은,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부단한 투쟁 속에 있는 피억압자들(개인들이든, 민중 전체든)을 위해서(for)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with) 확립해 나가야 할 교육학의 몇 가지 측면을 제시할 것이다(프레이리, 2003: 60).

참된 교육은 ‘A’가 ‘B’를 위해, 또는 ‘A’가 ‘B’에 관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가 함께 행하는 것이다. 양측을 매개하는 세계는 양측에게 영향과 자극을 주며, 세계에 관한 개념과 견해를 형성하게 한다(프레이리, 2003: 119).

 

그렇다고 프레이리가 무조건 억압받는 사람들의 말을 듣기만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프레이리는 “민중지식의 신비화, 민중지식의 절대찬양은 민중지식의 거부만큼이나 문제가 된다”(프레이리, 2002: 133)며 무조건적인 수용이 가지는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프레이리는 “민중지식을 거부하는 것이 엘리트주의라면, 민중지식을 절대 찬양하는 것은 ‘근본주의’”(프레이리, 2002: 133)라고 비판한다. 대중의 상식에 기초하지만 그 상식을 무조건 인정하는 것은 사람들을 상식의 틀에 가두고 운동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인정이나 거부는 양자 사이의 상호연관된 관계를 보지 못하고 둘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함께한다는 것은 서로를 동일화하거나 차이를 무조건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프레이리가 비판하는 것은 민중의 지식과 지식인의 지식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다. 프레이리가 강조하는 것은 “민중의 지식과 지식인의 지식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을 극복하는 방법, 혹은 스니데르스가 ‘원시 문화’와 ‘선진 문화’라고 부른 것 사이의 변증법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법”(프레이리, 2002: 134)이다. 그리고 민중을 바라보거나 민중과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들 속에서 서로 배움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프레이리가 추구했던 사회운동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어느 한 편이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상화시켜서 일방적으로 교육하고 의식화하는 방식은 결코 사회해방을 가져올 수 없다고 프레이리는 믿었다. 필요한 것은 선전이나 의식화가 아니라 바로 ‘대화’이다.

 

대화적 행동이론에서는 주체들이 서로 협동하여 세계를 변혁하는데 참여한다. 반대화적이고 지배적인 나(I)는 지배당하고 정복당하는 당신(thou)을 단지 사물(it)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대화적인 나는 자신의 존재를 불러내는 것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안다. 또한 자신의 존재를 불러내는 당신이 또 다른 나를 구성하며, 그 나의 안에는 또 다른 당신이 있음을 안다. 이렇게 해서 나와 당신은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두 개의 당신이 되고 이 당신은 또 두 개의 나가 된다.(프레이리, 2003: 216)

 

인간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세계를 인식하고 변화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다가올 미래를 예정된 법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다. 따라서 운동의 근본적인 목적은 “‘민중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민중의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 민중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고 “혁명가의 역할은 민중을 획득하는 게 아니라 민중을 해방시키고 자신들도 함께 해방되는 데 있”(프레이리, 2003: 121)다. 교육하는 사람과 교육받는 사람은, 엘리트와 대중은, 전위조직과 민중은 서로 다른 존재일 수 없고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해방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은 공동연구자가 되어야 한다.]

프레이리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사람과 사회 속에 수동적으로 웅크린 사람이 서로 다르다고 보지 않았다. 수동적인 웅크림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이런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변화시키는 힘은 그 사람의 자기의식화와 함께 비슷한 조건에 처한 사람들의 연대에서 형성될 수 있다. 그런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함께함이고 대화이다. 이런 프레이리의 사상은 풀뿌리민중이 중요한 이유와 그들이 서로를 변화시키는 방식을 알려준다.

 

 

(2) 알린스키: 분노의 조직화와 이해관계의 인정

 

알린스키는 타고난 조직가이자 주민조직화를 위한 실질적인 전략을 제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알린스키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도 교섭을 강요할 수 있는 힘 없이는 교섭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고, 그래서 추상적인 이념보다 “어떻게 힘없고 가난하고 무관심한 시민들이 힘을 가질 수 있느냐?”에 관심을 집중시켰다(알린스키, 1983: 37). 알린스키가 보기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적인 힘 없이 빈민지역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공허한 얘기일 뿐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선과 악의 문제는 힘을 얻고난 뒤에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알린스키는 주민조직화를 통해 집단적인 힘을 구성하고 그 힘으로 국가나 기업을 압박하는 전략을 많이 세웠다. 특히 알린스키는 분노를 조직화하는 전술, “불만을 선동하는 것, 그들이 좌절을 퍼부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는 것, 오랫동안 이전의 상태를 받아들여 밑에 깔려 있는 비행을 말소시킬 기구를 만들어 주는 것 등”(알린스키, 1983: 39~40)의 조직화 전략을 자주 사용했다. 분노만큼 인간의 감정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린스키는 분노와 함께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지역조직화에 가장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알린스키는 운동이 주민들의 이해관계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을, 즉 현실이 “직접적인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권력장치의 투기장이며 그 안에서의 도덕이란 한낱 자기 이익과 정략적인 행동을 위한 수사학적 원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알린스키, 1983: 141). 따라서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자기이익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이익이 인간행위에 있어서 기본적인 추진력의 기능을 하고”, “자기이익의 중요성은 한 번도 의심되어 본 적이 없고, 인간 생활의 불가피한 요소로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알린스키, 1983: 155). 이런 알린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주민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을 변화시키는 것은 합리적인 행위이다.

분노와 이해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공공선이나 전체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는 정치의 목적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알린스키는 조직화를 위한 싸움에서 페어 플레이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권력이 불평등하게 분배된 현실에서 공정한 싸움을 한다는 것은 이미 지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알린스키가 보기에 수단과 윤리는 반드시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수단의 윤리는 그 사람이 처한 현실적인 상황과 시점에 따라 달리 평가되어야 했다(Alinsky, 1989: 26~29).

마찬가지로 알린스키가 지역조직화 전략에서 방법과 목적을 분리시키는 점은 그 전략의 민주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그러나 알린스키가 그런 전략을 주장한 것은 정상적인 방법이 통용되지 않는 상황에서였다. 오히려 타협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알린스키는 그런 타협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봤다. 알린스키가 시카고에서 조직했던 빈민운동조직인 <백 오브 더 야드(back of the yard)>이나 흑인빈민운동조직인 <우드런 지역조직(The Woodlawn Organization)>, <FIGHT(Freedom, Integration, God, Honour, Today)> 등은 이런 전술을 충실히 따랐고 큰 성공을 거뒀다. 알린스키의 주장은 단순했다.

 

자, 너희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따로 있다. 너희들은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고, 이렇게 차별대우받는 예를 깨뜨려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이 단지 조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힘이란 것은 양극점이다. 즉 돈을 가진 사람들과 사람을 가진 사람들에게로 모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너희들의 동료만이 너희들의 힘의 유일한 원천이 될 것이다. 너희들이 그것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너희들이 문제로 되는 것이다. 내가 왜 이것을 이런 방법으로, 또 저런 방법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너희들이 행동해야 한다. 그러니 당장 한꺼번에 모두 궐기하라.(알린스키, 1983: 68~69)

 

하지만 분노를 조직화하는 것만으로는 운동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떤 프로그램이 사람들을 장기적으로 조직할 수 있을까? 알린스키는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프로그램이 폭넓고 총괄적인 것이어야 하고 지역사회의 구조적 성격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주민활동가는 주민들 속의 지도자급 인물을 파악하고 주민들에게 지도자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알린스키는 “주민의 전통은 주민들의 경험이라는 직물에 얽혀 짜여 있다. 주민들의 전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편견과 믿음과 가치관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것은 민주적 행동을 방해하는 사회적 힘과 마찬가지로 건설적이며 민주적인 행동을 주장하는 사회적 힘을 확인하는 것”(알린스키, 1983: 119)이라며 지역사회의 전통을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린스키는 프레이리처럼 “개혁가들은 대중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우선 평범한 이해의 기초를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전향시키려는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는 것만큼이나 단순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이후에 나오는 조치와 전략은 그러한 용어로 이해되어야 한다”(알린스키, 1983: 124)라며 대중 속으로 들어가 함께 호흡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알린스키는 조직화 단계를 거치면서 주민들이 진정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되리라고 믿었다. 이를 위해 알린스키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강조했다. 첫째, 조직의 구성원이 처음부터 끝가지 전부 참여하게 하여야 한다. 둘째, 누구나 말하게 하고 잘못된 의견이나 반대의견이라도 묵살하지 말고 공유화하며 존중해주어야 한다. 셋째, 전체의 이익이 되고 개인의 이익이 되는 공동의 선(善)을 발견케 하고 이에 모두가 동의하게 해야한다. 넷째, 전체 구성원의 의사가 모아지고 결정되어지면, 행동방법에 대해서 협의하고 결정해서 모두가 그 결정에 따른 행동을 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다섯째, 조직된 후 곧 조직을 가동하고 진행시켜야 한다. 여섯째, 쟁점을 만들어내고 이를 다원화시켜야 한다. 알린스키는 조직은 쟁점으로부터 나오고 쟁점 또한 조직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따라서 쟁점을 만들어 내느냐 못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서 조직의 생명이 지속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이경자, 2000: 24).

설령 지역사회 속에서 활동하는 중에 비난을 받거나 어려움을 겪더라도 활동가는 신념으로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활동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대중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면 안 된다. “그는 이러한 태도와 행동들이 열악한 환경의 결과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심판받아야 할 것은 대중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환경이다. 그러므로 사회변화에 대한 개혁가들의 열망은 더욱 견고해야 한다.”(알린스키, 1983: 123) 이런 신뢰와 신념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다.

알린스키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불평등한 사회에서 스스로를 조직하고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알린스키는 활동가가 그런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어가서 사람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과정을 통해 풀뿌리 민중은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사회변화의 동력이 되며 자생적인 지도자(native leader)로 거듭나게 된다.

 

 

(3) 함석헌: 역사의식과 서로 울림, 꿈틀거림

 

김상봉은 서구철학의 타자성을 해체할 수 있는 힘을 함석헌의 역사철학에서 찾고 그것을 ‘슬픔의 해석학’이라 부른다. 고난과 슬픔은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서 하나가 되는 연관성을 만들고 “역사의 슬픔이 곧 지금 우리 자신의 아픔과 슬픔이 되는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며, 모든 주체가 그러하듯, 우리 또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감으로써 주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과 슬픔은 우리의 자기의식의 본질적 내용이다.”(김상봉, 2002: 328) 이렇게 자신에게 돌아온 자의식은 슬픔과 하나되어 단순히 체념하지 않고 불행한 현실을 부정할 또 다른 현실을 사유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자의식은 단순히 개인적인 자의식으로 그치지 않는다. 함석헌은 사람이 사회적 존재이고 “인격이란 것은 있기는 개(個)로 있으나 그 바탕(性)은 사회적인 것”(함석헌, 1979: 162~163)이라고 강조한다. 사람의 의식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개체가 아니고 전체요, 마찬가지로 “한 시대가 혼란에 빠졌다는 것은 결코 개인행동의 타락이나 어떤 제도의 깨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사회가 어지러워진 결과로 오는 것이다. 어지러움은 그보다도 전체의 산 통일이 깨지는 데서 온다.”(함석헌, 1979: 277) 따라서 고난을 겪으며 회복된 자의식은 개인적 가치를 내세우지 않고 전체의 통일을, ‘하나’의 회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심의용은 함석헌의 사상에서 고난이 “생명의 한 원리이며 동시에 생명의 길”이고 그렇게 생명을 품은 존재가 바로 씨이며 “이 씨알이 역사의 주체자”(심의용, 2005: 168)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심의용은 함석헌 사상에서 자치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서로 울림’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된다.

여기서 함석헌의 스스로 함 또는 자치(自治)는 서구적인 개인의 스스로 함을 뜻하지 않는다. 개인은 홀로 고립되지 않고 전체 속에 존재한다. 이 전체 속에서 개인은 우민(愚民)․우맹(愚氓)․민초(民草)․서민(庶民)․검수(黔首)․검우(黔愚)같은 부정적인 말에서 벗어나 씨로 성장한다. 비록 바닥에 있지만 어리석고 못나서가 아니라 그렇게 바닥에 버티면서 높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씨이라고 함석헌은 강조한다.

하지만 이 씨이 전체의 이름으로 차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함석헌은

 

하나됨은 남의 인격을 존중해서만 될 수 있는 일인데 남의 인격을 아는 것은 내가 인격적으로 서고야 될 일이다. 정말 제 노릇하는 사람은 제가 제 노릇을 할 뿐 아니라 남을 제 노릇 하도록 만든다(72). 거지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인격은 곧 자존(自尊)이다. 스스로 높임이 스스로 있음(自存)이다(함석헌, 1979: 72~73).

 

라고 강조했다. 즉 하나됨은 차이를 존중할 때 가능하고 그 차이가 분리되거나 고립된 단자로 인식되지 않고 서로 엮여진 그물망 속에 있다는 점을 인식할 때 가능하다. 더 중요한 점으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만이 남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진정한 하나됨은 내가 서고 남이 서고 우리가 설 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내 발등의 불부터 끄려 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쓰고 사는 집에 당긴 불부터 꺼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하고 “사람이 있어 역사를 낳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내다보고 거기 참여하는데서 사람의 살림이 나오는 것”(함석헌, 2002: 210~211)을 아는 역사의식을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함석헌은 전체가 단순히 부분의 합일 수 없다고 봤고 마찬가지로 전체가 나를 대체할 수 없다고 했다. 하나인 전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고, 역사 역시 인간의 인위적인 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역사는 기계적으로 반복되지 않는 사건이고 그렇기에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이론이나 교리를 절대적인 것이라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거짓이 되고, 역사는 도그마가 된다.

따라서 함석헌은 민중을 가르치고 이끌려는 사람이 아니라 민중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혁명가이고 그가 민중 속에서 하나되어 함께 호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새로운 그 무엇이 아니라 씨 속에 내포된 자기 바탈(性)을 되찾고 생명을 밝히는 것이어야 했다. 기풍과 습성의 변화 없이 제도의 변화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여기서 함석헌은 민중의 바다로 내려가야만 제대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 믿음, 그 사상이 정말 큰 것, 정말 높은 것, 정말 성한 것이 되려면 민중의 바다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거기서 단번에 증발이 되어 구름으로 된다. 시냇물이 정말 강산의 초목을 살리려면 한 번 하늘에 올라가 비로 되어 퍼붓지 않으면 아니되고, 하늘에 오르려면 골짜기 그늘 밑 돌 틈에 있어서는 될 수가 없고, 반드시 저 흙탕물 이는 돌을 거쳐 바다로 가야만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함석헌, 2001a: 242).

어떤 이론도, 어떤 도덕도, 어떤 운동도, 씨의 밸 고분지 밑까지 내려가지 않고는 역사의 진행을 서두르는 폭풍을 일으킬 수 없다.(함석헌, 2001a: 243).

 

그렇게 되면 민중은 스스로 깨어날 힘을 가지게 된다. 아니, 이미 민중은 스스로 깨어날 힘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깨어날 수 있도록 움직이고 있다. 함석헌은 이를 ‘꿈틀거림’이라는 개념으로 축약된다. 민중의 꿈틀거림이야말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강한 힘을 생성할 것이다.

 

그 꿈틀이 무서운 꿈틀이다. 그것은 사나운 겨울바다, 같은 권세 밑에 갇히는 민중의 꿈이다. 그러나 그 꿈이 터지고야 마는 봄이 온다. 삶은 절대이기 때문에 터지고야 만다. 말도 못하고 죽는 민중의 꿈틀거림은 생(生)의 항의(抗議)다. 삶의 외침이다. 삶의 음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이다. 말씀이다. 역사의 길이다. 내가 이름 없는 민중이라도 민중이기 때문에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함석헌, 1979: 20).

 

엄혹한 70년대에 함석헌은 어떻게 꿈틀거려서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을까? 함석헌은 일상 속에서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 아무리 억압적인 독재권력이라 하더라도 일상생활 전체를 장악하고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다방이든, 음식점이든, 역이든 사람들을 만나는 곳에서 대화의 물길을 만든다면 독재권력이 그것을 막지 못한다고 봤다. 함석헌은 이런 일상의 공론장이 씨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자극제가 되리라 봤다.

함석헌의 사상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아래로 내려가 씨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옆을 지키며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점이다. 씨이라는 개념에서 드러나듯이, 함석헌은 생명이 자라듯이 사회의 변화가 자연스레 이루어지리라고 봤고 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바탈의 변화가 세상을 변화시키리라고 봤다. 이 점은 다분히 관념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제도나 전문가 중심의 활동이 씨들과 괴리되어 결국은 제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 자신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내 바탈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한다. 또한 그 변화는 개인의 고독한 사색이 아니라 씨들과의 서로 울림을 통해, 꿈틀거림을 통해 이루어진다.

 

 

(4) 장일순: 모심과 공생, 무위

 

장일순의 사상은 세상을 전일적(全一的)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얘기할 수 있다. 김종철은 해월 최시형의 사상을 이어받아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사상’을 전한 것만으로도 장일순의 업적이 엄청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늘이 하늘을 먹고 산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세상만물의 순환적인 상호의존 관계야말로 성장과 개발로 대표되는 폭력적인 지배가 판치는 현실을 넘어설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상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풀뿌리 민중에 대한 모심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무위당을기리는모임, 2004: 74).

이런 전인적 관점을 가졌기 때문에 장일순은 이익과 경쟁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졌고 이 둘의 연관성을 간파했다. 장일순은 “인간이 사물에 대해서 선악과 애증을 갖게 되면, 취사선택이 있게 마련이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선호의 관념은 이(利)를 찾게 되고, 이것은 자연히 현실에서 이웃과 경쟁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무위당을기리는모임, 2004: 8)지리라고 봤다. 이익에 기반한 경쟁은 극단적인 대결로 치닫고 결국에는 생명의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우주 속의 한 부분임을 망각하고 부분적인 이익만을 쫓을 경우 균형을 잃어버린 전체는 기울어지며 파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등’과 ‘이등 이하’를 경쟁 상대로만 볼 게 아니라 이쪽이 없으면 저쪽도 없는 거니까 서로 보완해 주는, 또는 하나를 이루는 그런 관계로 봐야 하는 거라. 그런 안목이 있어야 해. 그러니까 자기보다 성적이 못한 친구를 조금도 꾸밈없이 깔보지 않고 허심하게 사랑으로 대할 줄 아는 그런 마음 바탕이 일상 생활 속에 깔려 있어야 한다 이거야. 약하게 하려면 강하게 해야 한다는 말도 그렇지. 강한 놈이 만날 강할 수 있나? 만날 주먹을 불끈 쥐고 있을 수는 없잖아? 펴야지. 주먹을 펴지 않고는 쥘 수도 없으니까. 동일한 상태가 언제까지나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거든(장일순․이현주, 2003: 360).

 

장일순은 함석헌과 마찬가지로 개체라는 것이 전체와 분리되고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다. “우선 개체라는 게 어디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주와 합일 속에 개체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를 이루면 큰일을 해낸다는 생각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야지.”(장일순․이현주, 2003: 47) 각자가 제각기 자신의 자유를 누리려면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장일순은 끊임없이 강조했다.

특히 장일순은 이미 경쟁과 파괴로 기울어진 세상에서 전체의 균형을 바로잡는 길은 내 위치를 지키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봤다. 그런 점에서 장일순은 끊임없이 활동가들에게 서두르지 말고 밑으로 기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자애, 검약, 겸손의 삶을 살면서 그런 삶의 중요성을 증명했다. 장일순은 이렇게 밑으로, 바닥으로 길 때 위로 상승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봤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세상의 어둠이 빛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썩은 세상과 어두운 현실은 단지 썩음과 어두움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움과 빛을 품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세상과 현실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보다 관계를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모시는 것이 중요해진다. 장일순은 경쟁과 시비의 논리를 극복하려면 상대를 인정하고 모실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모시고 간다는 건 병을 편안하게 해줌으로써 풀어주는 거지. 병하고 싸우면 말이지, 병은 점점 기승을 부리게 되거든.…위로해 줘야지.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있는 거라.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건을 풀어주면, 그러면 그들의 그런 행위가 없어지지 않겠어?(장일순․이현주, 2003: 241)

풀 한포기에 대한 존경심이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사라져버리는 그러한 것으로는 곤란합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또한 한포기의 풀과 같이 존경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본래 전부 위대한 것입니다(장일순, 1997: 118).

 

이렇게 나와 연결된 타자, 전체, 하나를 모시고 존경할 때 타자의 날카로움도 자연히 무디어 질 수밖에 없다. 그런 모심이 가능할 때 공동의 과제를 함께 처리할 수 있고, 전일적 관점에서 보면 모시는 것은 단순히 남을 존중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바로세우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연대와 공생에 관한 관점으로, 생협에 관한 관점으로도 이어진다. 연대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장일순은 생협이 사회운동, 시민운동과 연대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개입해야 하고 생명운동과 민중운동, 계급운동과 다양한 부문운동이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서의 연대는 단순히 특정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일시적인 연대나 서로 다른 단체의 활동을 돕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연대는 공생의 관계를, 그런 공생을 통한 무위의 변화를 전제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나뉘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학생이 되기도 하고 학생이 선생이 되기도 하는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무위당을기리는모임, 2004: 166)를 만들어야 한다(이 말은 프레이리와 유사하게 교육의 본질이 서로 대화하고 나누는 과정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장일순은 가르치는 자의 역할을 산파의 역할로 규정한다.

이런 활동들은 장일순이 강조하는 ‘무위’(無爲)와 맞닿아 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은 업을 쌓게 되고 그 업은 성과와 관련된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공생공존하는 바탕에서 조화를 이루는 생활”(장일순․이현주, 2003: 45)을 뜻하고 그런 점에서 근본으로 돌아가기 위한 ‘위무위(爲無爲)’를 뜻한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본인 도와 생명으로 돌아가려는 치열한 노력이야말로 바로 무위이다.

장일순은 몸소 나서서 운동을 지휘하진 않았지만 민청학련을 비롯한 중앙의 굵직한 저항운동과 관련되어 있었다. 장일순의 호 ‘조한알’에서 드러나듯이, 장일순은 개체와 전체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했으며 생명의 전일성(全一性)을 강조했다. 그 관계 속에서 변화는 자연스런 무위(無爲), 수동적 적극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6. 결론: 네 사상가에서 드러나는 풀뿌리민주주의운동

 

지금까지 살펴본 각각의 이론들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네 명의 사상가들 모두 민중이 변화의 주체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위조직이나 앞장서는 싸움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자각하고 조직하는 과정 속에서만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네 사람 모두 강조했다. 물론 그런 스스로 함은 아무런 자극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운동이나 활동가는 민중을 계몽하고 이끄는 역할이 아니라 민중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돕는 역할을, 조정자(coordinator)의 역할을 맡는다. 민중이 어디에 서 있고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풀뿌리민주주의운동은 민중의 구체적인 조건에서 시작하고 민중에 대한 낙관이나 비관을 미리 예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상식에서 시작해 전체적인 사회구조를 깨달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둘째, 그러기 위해 운동은 민중을 믿고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민중과 관련된 사업을 하거나 때때로 접촉한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닥으로 긴다는 것은 그들의 경험과 상식, 전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며 민중을 모시고 살릴 때 가능하다. 단순히 민중을 일방적으로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그 속에서 변화를 경험하고 배울 때 진정 민중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풀뿌리민주주의운동은 사람들이 서로 울고 서로 울리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고, 민중이 꿈틀거리며 사회를 변화시키도록 지원한다.

셋째, 활동의 구체적인 성과보다는 민중이 그 활동의 의미를 이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즉 성과보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능동성이 중요하다. 풀뿌리민주주의운동의 성과는 그것이 가진 방향과 목표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평가지표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새로운 기운을 자극했는가이다. 풀뿌리민주주의운동은 특정한 제도를 도입하거나 특정한 권력을 강화시키는 운동이 아니라 민중의 얼을 살리고 생각하게 하며 권력을 와해시킨다.

물론 네 명의 사상가는 공통점만이 아니라 차이점도 가진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즉 전일적인 세계관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함석헌과 장일순이 ‘하나’와 ‘도’를 강조하며 각 개체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했다면, 프레이리와 알린스키는 계급이나 집단의 의식과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의 그것과 대립적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을 부정적으로만 인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함석헌과 장일순이 풀뿌리민주주의운동의 근본적인 원리와 윤리를 얘기했다면, 프레이리와 알린스키는 그 원리와 윤리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는 전략과 방법을 얘기했다고 할 수 있다.

알린스키와 프레이리, 함석헌, 장일순의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나로부터의 변화’가 어떻게 큰 변화를 만드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흔히들 풀뿌리민주주의같은 지엽적인 작은 변화로 어떻게 국가 전체를 바꾸는 힘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작은 변화는 전체적인 큰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큰 바위를 쪼개는 물방울이나 나무뿌리의 힘처럼 질기고 작은 생명력이 결국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는 동력을 만든다.

※ 참고문헌

 

김경재. 1989. “함석헌의 씨사상 연구”. 《신학연구》 제 30집.

김상봉. 2002. 『나르시스의 꿈』. 서울: 한길사.

김원. 2007. “신자유주의하에서 노동조합의 균열구조 변화: 한국통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동조합 내부 정치를 중심으로”. 손호철 엮음. 2007. 『세계화, 국가, 시민사회: 세계화 정보화 시대 국가-시민사회와 정체성』. 서울: 이매진.

김종철. 1999. “나락 한알 속의 우주: 고 장일순 선생 5주기에 부쳐”. 《월간 말》 1999년 6월호.

김종철. 2007. “한미FTA, 경제성장, 민주주의”. 《녹색평론》 제 93호.

김현우. 2005. “지역사회와 결합하는 노동운동을 위한 시론”. 《노동사회》 2005년 12월호.

레이코프, 조지. 유나영 옮김. 2005. 『꼬끼리는 생각하지 마』. 서울: 삼인.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2004.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대구: 녹색평론사.

문지영. 2006.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이념 연구: 함석헌의 저항담론을 중심으로”. 《사회과학논집》 제 17집 1호.

박래군. 2007. “진보운동의 새로운 기획”.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제1차 정책포럼 발표문.

박주원. 2007. “한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기원: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에서 ‘대안공동체 민주주의 운동’의 성격과 역할”. 《기억과 전망》 통권 17호.

심의용. 2005. “초월로의 충동과 씨알에 의한 自治”. 《동서철학연구》 제 37호.

알린스키, S.D. 조승혁 편역. 1983. 『S.D. 알린스키: 생애와 사상』. 서울: 현대사상사.

오관영. 2006. “풀뿌리운동 현장보고: 희망투어 17일간의 현장 기록”.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한양대학교 제3섹터연구소 공동주최 풀뿌리정책포럼 발표문.

우석훈․박권일. 2007. 『88만원세대: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서울: 레디앙.

유경순. 2006. “서울노동운동연합의 성과와 한계”. 《기억과 전망》 통권 17호.

이근행. 2006. “한국 공동체운동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이동수. 2001. “함석헌과 정치평론”. 《한국정치학회보》 제 35집 4호.

이호. 2002. “주민자치․주민자치운동의 현황과 과제”. 시민자치정책센터 편.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서울: 갈무리.

장일순. 2005(10쇄). 『나락 한알 속의 우주: 无爲堂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 대구: 녹색평론사.

장일순․이현주. 2003.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서울: 삼인.

정수복. 2002. 『시민의식과 시민참여』. 서울: 아르케.

정철희. 2003. 『한국 시민사회의 궤적』. 서울: 아르케.

조정환. 2005. 『제국기계 비판』. 서울: 갈무리.

최종덕. 2003. “주민조직운동(Community Organization)의 회고, 원칙 그리고 비전”, URM 발제문.

프레이리, 파울로.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2002. 『희망의 교육학』. 서울: 아침이슬.

프레이리, 파울로. 남경태 옮김. 2003. 『페다고지』. 서울: 그린비.

프레이리, 파울로․호튼, 마일스. 프락시스 옮김. 2006.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서울: 아침이슬.

하승수. 2006. “왜 풀뿌리운동이 희망인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창립토론회 주제발표문.

하승우. 2006. “정부의 주민투표제도 악용과 지역사회의 역할”. ≪시민사회와 NGO≫ 제 4권 제 2호.

하승창. 2001. 『하승창의 NGO이야기』. 서울: 역사넷.

한영혜. 2004. 『일본의 지역사회와 시민운동』. 서울: 한울아카데미.

한국도시연구소. 1999. 『지역주민운동 리포트』. 서울: 한국도시연구소.

함석헌. 2001a(4쇄). 『들사람 얼』. 한길사.

함석헌. 함석헌기념사업회 엮음. 2001b. 『끝나지 않은 강연: 함석헌 미간행 강연 유고집』. 서울: 삼인.

허병섭. 2001. “주민운동 30주년의 의미”. 한국 주민(빈민)운동 30주년 기념 워크숍 주제 발제문.

허재영. 2004. “한국 자본주의 논쟁: 방법론과 텍스트의 정치학”. 조희연 편. 2004. 『한국의 정치사회적 저항담론과 민주주의 동학』. 함께읽는책.

홍은광. 2003. “파울로 프레이리 교육사상의 수용과정과 한국 민중교육운동에 대한 영향”.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석사학위논문.

Bookchin, M 연설문 인터넷 자료(http://www.web.net/~anarchos/people/bookchin.htm)

Lefort, Claude. 1988. Democracy and Political Theory. Cambridge: Cambridge Polity Press.

Lowndes, Vivien and Wilson, David. 2001. "Social Capital and Local Governance: Exploring the Institutional Design Variable". Political Studies, vol.49. 629~647.

Putnam, Robert and Feldstein, Lewis M. 2003. Better Together. New York: Simon & Schuster.



지역운동의 흐름과 노조의 개입전략

 

하승우(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① 지역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운동의 흐름

 

지역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운동의 흐름을 보는 시각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운동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지역사회에서도 다양한 주민대변형(advocacy) 단체들이 운동을 벌이고 있고, 이와 달리 ‘풀뿌리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단체들은 주민주체형 운동을 벌이고 있다. 주민대변형 단체들은 지역경실련이나 중앙 시민단체의 지역지부들이나 ‘참여’자를 붙인 단체들이라 얘기할 수 있는데, 주로 중앙정부와 관련된 이슈를 가지고 싸우거나 지방정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에 풀뿌리 운동은 특정한 이슈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운동의 과정에 주민들을 얼마나 동참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하승수는 풀뿌리운동의 주체를 “자신의 삶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 규정하고 중요한 것은 “단지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과정을 통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치능력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사회변화를 만들어나가는 힘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고 “주체를 형성해 나간다는 것은 풀뿌리운동의 실천과정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풀뿌리운동의 목적”(하승수, 2006a: 3)이라고 주장한다.

<표> 90년대 시민운동과 풀뿌리운동(오관영, 2007a)

 

90년대 시민운동

풀뿌리운동

운동 대상

사회구조(법과 제도, 정책)

사람과 생활(의․식․주)

운동 방법

하향식

(세상을 진단하고 논평하는 방식)

상향식

(자신이 원하는 일을 지가 좋아서 하는 방식)

운동의 주체

시민단체

주민

운동의 평가

성과 중심

(언론의 보도, 법제도의 변화 등)

과정 중심

(사람들과의 관계, 자기만족 등)

합의양식

선거와 관리주의

뽑기(?)와 자율주의

운동의 속도

빠름

(1년 단위 총회, 프로젝트 등)

느림

(중장기적 프로젝트, 계획 등)

이런 운동과 함께 생활협동조합운동이나 자활운동, 지역사회복지운동처럼 특정한 분야에서 운동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곳도 있다. 이런 분야의 운동들이 특수한 영역의 고립된 운동처럼 보일지 모르나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적 경제나 복지국가 차원에서 미래의 비전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지역운동의 주요한 흐름으로 봐야 한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런 다양한 운동들은 민주화와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라는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지역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95년도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는 제도정치와의 접목을 모색하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의제의 측면에서 보면, 현재 지역운동은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등 다양한 생활상의 이슈들을 주요한 의제로 만들어가고 있다. 도서관이나 보육, 학교급식은 그 의제 자체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의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주민이 참여하고 의식을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긴다. 도서관이나 놀이터, 공부방, 방과후학교 등이 일정한 공간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면, 보육이나 학교급식 등은 지역사회 내의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방식(기존의 단체들도 동참)으로 의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만들기운동처럼 다양한 의제들을 공동체 형성을 통해 해결하려는 운동의 흐름도 있다. 아파트공동체운동이나 생태공동체운동, 문화공동체운동 등은 마을만들기운동의 주요한 흐름이다. 한국에서 마을만들기운동은 눈으로 보이는 물리적인 공동체보다 사람들의 관계가 서로 어우러지며 보살핌의 망을 만드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지역운동의 중요한 주체인 여성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운동도 지역운동의 중요한 흐름이다. <대전여민회>나 서울 수유리의 <녹색마을사람들>(前<녹색삶을여는여성들의모임>)처럼 생활적인 이슈에 여성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경우는 지역운동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그리고 <여성의전화>나 <여성민우회>같은 단체들의 지부도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여성정책 분석이나 성인지적 관점에 따른 예산분석 등 지방정치에 개입할 뿐 아니라 생활문화공동체를 형성해 가고 있다.

또한 주민자치센터나 주민자치위원회를 민주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전략도 지역운동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해 가고 있다. 그리고 참여예산제도나 주민투표, 주민발의와 같은 주민참여제도를 활용하는 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도시계획이나 재개발, 주거권에 개입하려는 운동도 조금씩 활성화되고 ‘미래의 시민’인 청소년들을 지역사회의 주체로 구성하는 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또한 천안의 풀뿌리희망재단처럼 지역재단을 설립하는 운동도 추진중이다.

표>풀뿌리 시민운동사례 공모사업 수상사업(오관영, 2007b)

제1회(2003년)

풀뿌리상

주민참여형 삶터가꾸기 ‘가고싶은 놀이터 만들기’

서울 열린사회시민연합 북부시민회

풀잎상

주민과 함께한 문회유적 보전운동

경기 시흥 YMCA

풀꽃상

시민과 함께한 맹산반딧불이 자연학교의 녹지조성 및 관리

경기 분당환경시민의 모임

풀대상

협동과 자치에 기초한 생명의 도시만들기

원주 생활협동조합협의회

풀씨상

음식물쓰레기 재활용, 지역정치운동 등 여성운동

서울 동북여성민우회

특별상

지역노조와 함께하는 노동안전보건활동

노동건강연대

 

지역시민단체들의 행정∙의정 감시활동

전남 순천 YMCA 등

제2회(2004년)

풀뿌리상

주민소환제조례제정

광주시민단체협의회

풀잎상

상생의 실험대, 청주 원흥이마을 두꺼비서식지 보전운동

충북환경운동연합

풀꽃상

목포시건축물의허가등에있어장애인편의시설설치사항사전점검에관한조례 제정운동

전남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목포경실련

 

제주도 친환경우리농산물급식 추진운동

친환경우리농산물학교급식제주연대

풀씨상

원주한지문화제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

 

나눔과 참여가 아름다운 지역사회 가꾸기

대전여민회

제3회(2005년)

풀뿌리상

무등산공유화운동

광주 (사)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풀잎상

마을어린이도서관 만들기를 통한 지역공동체형성운동

대전 알짬어린이 도서관

풀꽃상

고양시 노래하는 분수대 건립 저지 활동

고양 여성민우회

 

‘즐거운 멤버’ 사업을 중심으로 한 도봉시민회 지역운동의 깊이와 향기

서울 도봉시민회

풀씨상

주민과 함께 해온 신모라지역 마을만들기 운동

부산 신모라창조어마니회

 

동네경제 활성화를 통한 지역 경제살리기

대전경실련

제4회(2006년)

풀뿌리상

품앗이로 아이를 함께 키우는 마을 만들기

서울 동대문구 품앗이 공동체

풀잎상

주민발의 조례제정을 통한 공공병원 설립운동

경기 성남시립병원추진위원회

풀꽃상

지역자치실현을 위한 의정참여활동

한국여성의전화연합 목포지부

 

살 맛 나는 임대아파트 공동체 만들기 사업

서울 관악주민연대

풀씨상

자연 속에서 사회소외계층과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들기

서울 환경을 사랑하는 중랑천 사람들

 

부산시 북구 덕천교차로 하나은행 앞 횡단보도 복원운동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 북부지역회원모임

제5회(2007년)

풀뿌리상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의 도서관을 만들어 주세요

부산 희망세상

풀잎상

마을마다 어린이도서관만들기를 통한 생활공동체기반구축

대전마을어린이도서관협의회

풀꽃상

성서공동체 FM <담장 허무는 엄마들>

(사) 성서공동체 FM

 

용인지역 이주민공동체와 함께 열어가는 다문화 지역공동체

한국CLC 부설 이주노동자인권센터 

풀씨상

지역주민이 만들어가는 건강마을 만들기

인천평화의료생활협동조합

 

2006년 지리산권 공동학습 프로그램

지리산생명연대

 

 

② 지역운동의 방향에 대한 제언

 

지역운동은 근본적으로 풀뿌리운동의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고 믿는다(중앙정치에 대한 개입은 필요하지만 중앙운동과 지역운동 사이에 일종의 ‘역할분담’이 필요하다고 본다). 풀뿌리운동은 ‘지역’보다 ‘삶의 공간’으로 정의되어 “폭넓은 의미의 지역운동과는 구분”되고 있다. 즉 운동공간을 지역으로 설정한다 하더라도 전문가나 활동가 중심의 운동노선을 따르면서 사람들을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소외시킨다면 풀뿌리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하승수, 2006). 즉 풀뿌리운동은 지역을 기반으로 삼기는 하지만 단순히 지역에서 활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풀뿌리운동으로 정의되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공유되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지역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으로만 풀뿌리운동을 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풀뿌리운동의 특징은 무엇일까?

- 풀뿌리운동은 주민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주민과 함께 가는 운동이다.

- 풀뿌리운동은 주민의 구체적인 조건에서 시작하고 주민에 대한 지나친 낙관도, 비관도 전제하지 않는다. 상식에서 시작해 주민이 전체적인 사회구조를 깨달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 풀뿌리운동은 활동가와 주민의 상호 이해와 신뢰관계 위에 구성된다. 삶의 터전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활동가가 아니라 주민들이다.

- 활동가는 주민을 끌어가는 지도자가 아니라 주민이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 활동가는 새로운 지도자를 기르는 역할을 해야지 스스로 지도자가 되면 안 된다.

- 풀뿌리운동은 느린 운동이다.

풀뿌리운동의 과제는 현재 심각한 위기를 낳고 있는 식량과 에너지의 부족, 기후온난화, 비정규직의 확산 등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운동세력과 연대를 해야 한다. 다만 그 연대는 자신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칙을 다른 운동에 확산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연대는 결코 그런 말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기존 운동의 관성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박승옥은 농업기반공사 노동조합, 전북공무원노조연맹 등이 새만금에서의 공사 강행을 지지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어려움을 얘기한다. 기업별 노조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공공적 전망을 가지기 어렵고, 해당 사업과 일자리가 직접 연계되어 있을 경우 노동조합이 사업 자체를 반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운동 역시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의미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거나(하종강, 2006: 46) 시민적 공공성을 국가와의 관계에서만 확보하다보니 역설적으로 그 재현의 구조에서 국가에 포섭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조정환, 2005: 219).

이런 구체적인 실험들을 묶을 수 있는, 생활과 세계화를 잇는 대안담론이 필요하다. ‘탈정치 생활운동’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된 말인데, 생활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강한 정치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치라는 말은 선거나 정당같은 제도화된 정치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장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을 나누고 조절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뜻한다. 한국사회는 과거 식민지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운동세력에서는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순수화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정치가 높은 선을 구현하고 악을 몰아내는 방법인양 사고되는데, 사실 정치는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한 단계씩 발전하는 불순한 개념이다. 정치에 문제가 있을 수록 더욱더 적극적으로 정치를 실현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③ 노동조합의 지역사회 개입전략에 대한 제언

 

기존의 노동조합의 지역사회 개입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많다. 예를 들어, 하승수는 단체중심, 조직중심의 접근이 노조의 지역사회 개입을 어렵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방식의 개입은 주민을 배제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기 쉬우며 ‘주민들 속으로’ 들어갈 필요성을 없애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운동 중심의 관심에서 벗어나 복지, 환경, 교육, 문화, 성평등같은 생활의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상의료, 무상교육같은 주장보다 구체적으로 그 지역사회 내의 의료와 교육현실에 대한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할 지역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또한 수평적인 의사소통과 사업진행, 몸으로 드러나는 뜻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한다(하승수, 2006). 김현우 역시 “노동운동 전반의 인식부족, 관성적 조직사업 작풍, 보수적 지반이 뿌리깊은 지역사회 분위기, 중앙집중․서울 중심으로 고착화된 운동방식”(김현우, 2005: 90)을 지적한다.

물론 몇 가지 사례로 긍정적인 결합관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김현우 외, 2006). 하지만 그런 사례들로 낙관을 하기는 어렵다. 지역사회 노동조합주의(community unionism)의 경우도 비정규직과의 결합에 소극적인 민주노총의 움직임을 볼 때 낙관하기도 어렵다. 심지어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지역적인 의제에 관해 보수적인 견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생활상의 의제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공장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그러려면 조합원과 조합원 가족을 분리하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단위노조의 틀로 사고하는 관성에서도 벗어나 지역사회라는 틀로 의제를 구성하고 정치적인 개입을 해야 한다.

각 지역에 따라 현안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어떤 의제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의제를 얘기하기 전에 그 지역에 관한 구체적인 욕구조사가 실시되어야 하고,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주체들(조직화되지 않는 주민 포함)을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욕구조사를 하고 주민지도력을 파악하는 과정 자체가 지역과 연계를 맺고 지역운동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이런 부분에 공무원 노조나 전교조가 적극적으로 결합하면 좋다.

일반론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원칙을 말할 수는 있겠다. 반드시 생활상의 구체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접근해야 하고, 지나치게 높은 이념적인 대안이 아니라 작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는 의제를 선택해야 한다. 성공의 경험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의제를 선정하고 논의하는 과정에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 주민들을 볼 때 기존의 진보/보수틀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지역사회는 권력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장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권력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지역적인 의제를 달성하려면 기존에 보수적이라 평가되는 사람들과도 연계를 맺어야 하고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념적인 잣대로 접근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념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또한 지역적인 의제를 해결했을 때 그 성과를 반드시 그 지역사회에 남겨야 한다. 보통 어떤 성과가 있으면 주요한 단체가 그것을 독점해 버리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 더 큰 연대틀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같은 편이 늘어나기 때문에 성과를 지역에 남기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노조에게도 유리하다.

 

 

 

참고문헌

 

하승수. 2006a. “왜 풀뿌리운동이 희망인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창립토론회 주제발표문.

하승수. 2006b. “지역활동에 관하여, 시민운동 경험 통해 노동운동에 드리는 제언”. 《노동사회》 2006년 5월호.

오관영. 2007a. “풀뿌리운동이 희망이다”. 2007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제1차 정책포럼.

오관영. 2007b. “오래된 미래, 풀뿌리시민운동”. 《시회공헌과 시민사회》 2007년 가을호.

강수돌. 2007.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건설자본과 마을공동체”. 한국사회포럼 ‘연구참여단체’ 발표자료집.

조정환. 2005. 『제국기계 비판』. 갈무리.

박승옥. 2007. “사회운동의 전환, 적녹연대로부터”. 한국사회포럼 ‘연구참여단체’ 발표자료집.

김현우 외. 2006. 『지역사회와 노동운동의 개입전략』.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지구지방화시대 대안적 지역발전 전략

 

하승우(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1. 지구지방화 시대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헬드(D. Held)와 여러 학자들은 지구화와 지방화를 구분하면서 지구화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활동이 국경을 가로질러 확장되어 세계 어느 한 지역의 사건․결정․활동이 먼 지역의 개인과 공동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지방화(localization)는 “특정 장소 내에서의 흐름과 네트워크가 강화되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헬드 외 2002, 37). 헬드 등의 정의를 따르다면, 시간과 공간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하부구조와 제도화, 계층화, 상호작용 양식이라는 조직적 차원도 갖추고 있는 지구화는 공동체와 국가, 사회의 모든 세력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면서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더 이상 고립된 섬은 존재할 수 없고 지구화라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전망을 구성해야 한다.

네그리(A. Negri)와 하트(M. Hardt)는 신자유주의를 “자본의 전지구적 운동과 이윤을 가장 잘 도와주는 국가규제형태”이라 정의하면서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결합을 비판한다(네그리․하트 2008, 335).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제국에서 고립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건전한 대안일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지구화를 하나의 ‘경향’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변화를 결정할 정도로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제국이라는 유령』에서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바 있지만 국가의 경계가 무뎌지고 새로운 노동형태가 출현했다는 주장은 다분히 이론적이고 은유적일 뿐이다(캘리니코스 등 2007, 77). 특히 엘린 우즈(E. M. Wood)는 “지구화의 본질은 민족국가가 가진 능력의 쇠퇴가 아니라 지구적 자본을 위해 세계를 조직화하는 민족국가의 독특한 기량”이라고 주장한다(캘리니코스 등 2007, 126~127).

해리스(J. Harriss) 등은 지구화가 세계를 통합하면서 국가적인 차원을 주변화시켰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주권국가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고 국가권력과 정치의 전면적인 변형이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가 강조하는 굳 거버넌스(good governance)나 분권 등으로 드러나는 지방화가 민주화에 실제로 기여하는지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해리스 등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런 변화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고 강조하면서 “지방의 정치적 장과 그런 장 내에서 활동하는 행위자들의 정치관행을 규정하는 담론과 제도들의 결합을 검토하고 민주화를 위한 지방정치의 함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Harriss 등 2004, 3). 즉 굳 거버넌스는 행정의 투명성과 책무성을 강화하고 그것을 측정하는 지표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를 측정하는 지표로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노드홀트(H. S. Nordholt)는 분권과정이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나 강한 국가에서 강한 시민사회로의 이행과정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노드홀트는 인도네시아의 분권과정을 분석하면서 분권과 더불어 부패가 더 늘어나고 갈등이 더 심해지는 특이한 현상의 원인을 지역의 엘리트와 인종에서 찾았다. 노드홀트는 인도네시아의 지방정부에서 관료와 정당보스, 기업가, 군부와 범죄자들의 동맹이 그림자정부로 행세한다고 비판한다(Nordholt 2004, 30~48).

그리고 김성현은 국제금융기구의 발전모델이 선거를 통해 대표성을 확보하는 정부기관을 거치지 않고 시민공동체를 직접 지원해서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적한다. 시민사회가 그 자체로 도덕성과 중립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거버넌스 자체가 가난한 빈민들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뜻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김성현 2008).

지구화는 한국처럼 수도권으로의 집중되고 중앙정부가 불균형한 발전계획을 추진하는 국가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지역사회가 다른 나라처럼 국제기구의 직접 원조를 받으며 국제기구의 정책을 국내에서 재생산하는 사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의 약화가 지역사회나 시민사회의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시장/시민사회라는 관계로 접근하면, 국가의 약화가 시민사회의 강화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시장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지구화의 영향이 국민국가의 권력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그 집중성을 약화시킨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분산된 권력이 시민사회로 넘어가 그 역량을 강화시키는 현상은 충분히 증명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지방자치제도가 중앙정부가 독점해 온 발전전략을 지역 차원에서 재검토하고 지역특성을 살리기 위한 발전의 근거를 마련했지만 획일적인 발전노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 역시 그 점을 증명한다. 신개발주의라 정의되는 과도한 개발열풍의 원인은 단지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같은 정치권력에만 있지 않다. 한국의 경제구조 자체가 개발산업, 건설업을 중심축으로 삼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인 경제구조를 바로잡지 않을 경우 지역사회는 경제적인 자생성을 가지지 못하고 중앙정부의 발전전략을 복제할 수밖에 없다.

또한 지금 세계는 전쟁 중이다. 무기를 든 병사들이 서로를 죽이는 ‘드러난 전쟁’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인 빈곤과 가뭄은 사회적 약자들의 목숨을 빼앗고,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는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현실에 내팽개쳐진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 드러난 전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옥죄며 위협하고 있다.

전쟁은 밖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내 몸 안에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광우병이나 아토피처럼 인류가 자초한 질병이나 불안한 먹거리와도 우리는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비단 신체적인 질병만이 아니다. 도시의 삶이나 직장생활 등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와 같은 정신적인 질병들도 삶의 건강함을 위협한다. 그리고 식량자급율 27%라는 한국의 현실은 삶의 질을 넘어 삶의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외부적인 생존경쟁만이 아니라 내 몸을 지키고 유지하는 ‘살기 위한 전쟁’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전쟁’만이 아니다. 미래세대는 지금 우리 세대가 물려준 ‘유산(遺産)으로서의 전쟁’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에너지 수입률은 97%이고, 수입 에너지의 상당수가 피크 오일(peak oil)에 이르고 있다는 석유이다. 더구나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높아지고 있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각종 기상이변과 지진, 황사와 사막화 등의 현상을 보면 지구가 인류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 듯하다. 이제 인류는 영화에서나 나오던 묵시론적인 종말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지구지방화라는 시대적 흐름 자체가 대안적 가능성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런 시대적 흐름은 대안을 지향하는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노력 속에서만 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발전 자체를 다시 정의하고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전략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2. 발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아마르티아 센(A. Sen)은 발전이 인간의 실질적 자유를 확장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발전은 단순히 경제적인 부를 증가시키는 것만으로 보장될 수 없고 “사회․경제적 제도(예컨대, 교육시설, 의료보호)나 정치적 권리 및 시민권(예컨대, 공공토론이나 투표에 참여할 자유)과 같은 다른 결정요인”과도 연관되어 있다(센 2001, 19). 따라서 센은 발전이 ①정치적 자유, ②경제적 편의, ③사회적 기회, ④투명성 보장, ⑤보호적 안전성이라는 다섯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센은 기존의 발전관이 주민을 수동적인 수혜자로 만들기 때문에 발전의 지속성과 효과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센의 발전관은 중요한 요소를 놓치고 있는데, 이 글은 그것이 바로 생태주의와 민주주의라고 본다. 센의 발전관에는 현재의 성장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지 않고 그가 정치적 권리와 시민권을 보장하리라고 믿는 대의민주주의는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현실에서 ‘1인 1표’의 정치적 평등은 ‘1인 1원’의 경제적 논리로 이미 대체되었다).

생태주의적 전환의 필요성은 러미스(D. Lummis) 등이 주장하는 ‘제로성장’이라는 개념에서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식량이나 환경오염, 자원고갈 등은 인류가 더 이상 성장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으로 세계를 몰아가고 있고, 최근의 여러 위기에서 드러나듯이 자본주의라는 경제시스템 자체가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러미스 등이 가난한 풀뿌리 민중들을 방치하겠다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러미스는 풀뿌리 민중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경쟁적인 발전보다 상호부조와 협력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구도완과 여형범은 생태주의를 받아들이는 생태복지국가모델과 생태적 공동체/어소시에이션의 병행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생태적 공동체/어소시에이션을 바탕으로 개발국가/자본주의 국가를 생태적으로 전환하여 생태복지국가를 만들어 가면서 동시에 국가를 넘어서서 생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자치연합을 만드는 전략”을 강조한다. 이들은 국가와 자본의 개발과 폭력에 맞서 “생태 공동체/어소시에이션의 담론과 행동이 국가와 자본을 전환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넘어설 때에만 호혜와 연대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확장”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구도완․여형범 2008, 96~100).

하지만 발전을 지상목표로 삼는 CEO 출신의 불도저 대통령과 신개발주의에 매몰된 사회에서 생태주의적 전략을 실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선진화’ 담론은 노골적으로 개발과 발전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다른 대안적 담론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한다. 대표적으로 박세일은 “지방시장보다는 국가시장으로, 국가시장보다는 세계시장으로 시장이 확대되면 될수록 분업의 세분화(특화) 가능성이 커지고, 그 결과 경제성장과 발전의 가능성도 커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박세일 2006, 23). 자연히 그의 해답은 “기업과 산업의 구조조정 강화라는 발전주의적 해결책”이 새로운 고용을 창출해서 빈곤을 해결할 것이라 주장한다(박세일 2006, 36). 생태주의가 국가와 시장을 변화시키기는커녕 ‘녹색성장’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빌미로 국가와 시장이 생태주의를 포섭하고 있다.

따라서 대안적인 발전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대안적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발주의 담론이 다른 모든 대안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은 고려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하승수는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우선에 놓는 새로운 지역발전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토건국가식 개발이 지역내총생산(GRDP, Gross Regional Domestic Product)을 증가시킬 수 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주거비용을 높이는 등 삶의 질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선전해야 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지역내 민주주의, “지역주민들의 참여에 바탕을 둔 민주적인 정치․행정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하승수 2008).

스스로 판단하고 민주적으로 실천하는 시민이 늘어날 때에만 대안적인 발전은 가능하다. 대안적인 발전관이 풀뿌리 민중의 가슴 속에 ‘상식’으로 자리잡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지속가능한 가설일 뿐 실현가능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상식으로의 자리매김은 ‘자각’을 필요로 한다. 김종철이 지적하듯이 민주주의와 물질적인 경제성장이 동시에 추구할 수 없는 목표라는 점을 자각하고 그런 전제 위에서 대안적인 발전관을 실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 대안적인 발전을 위한 디딤돌을 찾을 것인가? 선드호슨(U. Sundhaussen)은 “서구식 처방은 무시하고, 자신들의 과거의 결함으로부터, 또 산마리노 같은 나라의 역사로부터 배워서, 다수 인민 즉 농민계급을 민주적 정치 속으로 참여시키는 길을 선택”하자고 얘기한다(선드호슨 2008, 169). 1만년 이상을 이어온 자급자족과 지속의 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방법은 결코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는 반동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전통을 복원하고 주권의 논리로 민중을 억압하는 국가를 넘어설 대안일지 모른다. 따라서 무기력하게 대의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말고 민중의 역동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녹아있는 정치적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

대안적인 발전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자급과 자치의 생태 민주주의 속에서만 가능하다. 생태 민주주의라는 자신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표를 거래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와 외부의 관계망을 회복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다. 곧 닥쳐올 식량과 에너지라는 위기를 고려한다면 자급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조건이고, 민주주의 역시 자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대안적인 발전은 국가라는 틀과 잘 맞지 않고 지역사회라는 틀과 어울리는데, 지금 한국의 지역사회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대안적 발전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지역사회 역시 대안적인 조직화를 이루어야 한다.

 

 

3. 지역사회의 대안적인 조직화는 가능한가?

 

한국의 지역사회는 보통 소규모 공동체로 규정되어 왔다. 정지웅은 “지역사회란 일정한 크기의 지리적 영역을 가진 지역과 두 사람 이상의 인간집단을 뜻하는 사회의 합성어이기보다는 보통 공동체의식(community sense)을 가진 인간집단이 사는 작은 규모의 지역사회(the community)를 말한다”며 지역사회의 소규모 공동체성을 강조한다(정지웅 2005, 11). 더 나아가 최옥채는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을 부각시켜 ‘지역사회주의(communitism)’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최옥채는 지역사회가 생활공동체이자 이웃, 동네, 마을 정도의 소규모 공간이기 때문에 지역과 지역사회를 구분하면서 지역사회를 “동질성이나 자체 변화를 위한 역동성 등이 강한 주민들로 구성된 소규모 수준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최옥채 2003, 8).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지역사회를 공동체성만으로 단일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전통적인 혈연과 지연같은 귀속적인 관계가 강한 농촌과 비교하면 도시에서는 그런 영향력이 약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농촌의 지역사회는 도시보다 소규모이고(인구의 고령화와 지속적인 인구 이탈), 인근의 규모가 더 큰 지역사회(배후도시)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원활한 생활조건(학교, 시장 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소규모 공동체성만을 강조할 경우, 지역의 억압적인 노동관행이나 가부장적인 구조, 억압적인 생활방식이 지역사회의 고유함이나 특수성으로 포장될 수 있다(하비 2001, 120). 그런 점에서 정근식은 지역사회를 공동체로 표상하는 것이 “지역내 계급관계나 사회적 지배관계를 대체하거나 희석시키는 효과를 갖는 것”이라며 “공동체적 요소와 내부의 지배관계를 적절하게 포착할 수 있는 단위가 설정되는 것이 지역사회 연구에서 중요하다”고 지적한다(정근식 2003, 17).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지역사회는 도/농에 따른 구조적 차이점을 가지고 있고 단순히 공동체로 규정될 수 없으며 다양한 세력들이 영향을 주고받는 장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즉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며 그 내부의 이해관계를 단순화시키거나 다양성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물론 지역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는 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매개로 삼기 때문에 일정한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은 이미 확립된 전통이나 외부의 모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며 민주적인 의사소통구조를 확립하는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공동체성은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한 전략으로 고민되어야 하지만 새로운 정체성은 그에 걸맞는 의사소통구조를 갖춰야 하고 공동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은 지역사회의 의사결정구조나 참여구조, 지역자원을 분석하는 개념으로 사회자본(social capital)과 로컬 거버넌스(local governance)가 많이 활용되고 있다. 두 개념은 정부가 주도하지 않고 지역내 이해당사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협의해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원들이 서로 참여하고 협력하면 과거의 정부주도형 통치방식보다 더 나은 사회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서구적 개념을 비서구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작(T. Issac)과 헬러(P. Heller)는 퍼트남(R. Putnam)을 비판하면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이 ‘이미’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자발적인 결사체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국가가 강력하고 계급갈등이 첨예한 제 3세계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아이작과 헬러는 오히려 계급갈등과 사회동원 과정에서 능동적인 시민이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Issac․Heller 2003, 83~86). 마찬가지로 신희영은 사회자본이론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로는 사회조직의 특성을 측정하기 어렵고, 국가제도가 사회자본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조건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신희영 2005, 13~14). 또한 사회자본이론이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주성수 2006, 61~62).

실제로 한국에서는 자율적인 협력과 참여, 네트워크를 얘기할 수 없을 만큼 중앙의 국가권력이 지역사회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과거 군대와 경찰, 검찰 및 사법기구, 각종 정보기관 등 폭력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억압적인 국가기구들이 군과 면 단위까지 지부조직을 만들고 대책협의회를 꾸리며 활동해 왔다(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한국가톨릭농민회 1990, 66). 그리고 새마을운동협의회, 민족통일협의회, 사회정화추진협의회, 청소년선도위원회, 자유총(반공)연맹 등의 단체들도 중앙정부의 민간동원단체로서 지방권력을 분점해 왔다. 이런 단체들은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권력연합을 형성해 왔고, 이런 단체들에 소속된 지역유지들은 “시가지 개발과 관련한 각종의 개발정보는 물론이고 각종 관급공사의 수주나 지방공무원 인사도 지방관료와 유지들의 담합에 의해 좌지우지”(지수걸 2003, 27)하는 지역의 실세들이다.

특히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는 지방의 자치단체장들이 독자적인 권력구조를 확보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신희영 2005, 2). 자치단체장들은 지방의 자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중앙정부의 견제와 감독을 피하고, 중앙집권적인 행정구조와 빈약한 재정을 핑계 삼아 지역의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을 수립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지방의 단체장들은 예산을 무리하게 집행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며 인사권을 남용하는 등 각종 부조리를 일삼으며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과 대학 역시 이런 잘못된 권력구조에 편승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대안적 발전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이런 지역사회의 지배구조를 무너뜨리는 노력과 분리될 수 없다.

스퇴커(R. Stoecker)는 지역사회발전모델이 크게 ‘주민조직화(Community Organizing)’와 ‘지역개발법인(CDCs, Community Development Corporations)’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주장한다(Stoecker 2003, 495).

 

주민조직화

지역개발법인

목적

지역사회의 권력 형성하기

주택 공급과 일자리 창출

세계관

갈등: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공동의 이해관계나 관계를 맺지 못하는 제로섬 게임

협력: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관계를 맺는 윈윈 게임

전략

주민이 엘리트와 맞서도록 조직하고 권력배분의 변화를 요구

주택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거나 보조금을 받도록 엘리트와 협력

인적 자원

마을에 관한 경험을 폭넓게 활용하는 주민(대부분은 자원봉사자)

특수한 전문기술을 가진 월급을 받는 간사(대부분은 주민이 아님)

이런 차이점 때문에 두 가지 모델은 통합되기 어려운데, 스퇴커는 주민조직화가 갈등과 대결로 지역사회의 구조를 바꾸려 한다면 지역발전은 개인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복지를 향상시키는데 초점을 맞춘다고 본다. 지역개발법인은 주민조직화라는 장기적 성과보다 공공․시장․비영리민간 영역간의 효율적인 역할분담(정부보조금, 민간기부, 세금공제 등), 특히 공공영역의 지원체계와 관리체계의 변화를 주도하되 주민참여를 보장하는 지역사회 이사회(community board) 운영한다. 하지만 지역개발법인은 차츰 이윤을 위한 투자사업으로 전락하고 전문성을 강조하다보니 사회적 약자와 멀어지며 주민통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지역기반조직(community-based organization)으로서의 역할이 축소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김형용 2008).

스퇴커는 주민조직화와 지역개발법인의 모델을 통합시키려 했던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Toledo)의 실험을 분석하면서 그 통합이 쉽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스퇴커는 그 둘의 통합을 시도하는 프로그램이 일정한 성과를 거뒀으며 지역개발법인의 조직을 변화시키고 지역개발법인이 주민조직화의 방식을 끌어안을 수 있는 구조(지역사회이사회의 민주화, 지역리더 발굴 등)를 드러냈다고 평가한다(Stoecker 2003, 507~510).

빈(R.V. Veen)은 적극적인 시민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공동체 발전이라고 보면서 가난한 빈민이 교육을 통해 성장하는 시민교육과 공동체발전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빈은 보수적인 공동체의 기득권 구조를 깨려는 다양한 운동이 1960년대 미국에서 등장했으며 주민조직화, 지역재단, 지역사회만들기(community builidng)가 그 대표적인 형태라 얘기한다(Veen 2003, 585~586). 이 각각의 운동은 빈민조직화와 사회서비스 전달, 지역사회 욕구달성에 효과적으로 기여했고 교육을 중요한 방식으로 활용했다.

그런데 빈은 이런 운동이 강조하는 교육의 양태가 각기 다른 목표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억지로 통합하는 것이 좋지 않고 포괄적인(inclusive)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분명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주민들을 조직가로 양성하는 교육은 교육자의 역할이 일정 시간과 보조적인 위치로 제한되지만, 주민들의 사회의식을 향상시키는 교육은 지속적이고 상당한 수준의 개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서비스를 전달하는 교육은 직접 목표를 달성하지 않고 목표달성에 필요한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을 마련하려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운동은 제한된 지역사회 내에서 각자 재원이나 주민을 놓고 경쟁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운동을 평가절하하거나 의심하기도 한다. 따라서 빈은 공동체발전을 위한 전문적인 통합교육(integrated professional education)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Veen 2003, 593~594).

한국의 지역사회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주민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같은 전통적인 사회운동이 지역사회와의 결합을 모색하고 있고, 풀뿌리운동이라 정의되는 지역운동도 서서히 정착되고 있다(하승우 2007). 기득권세력이 지역사회를 포획하고 있어 그 사회가 자율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미국사k회처럼 다양한 형태로 지역사회 발전이 시도되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생활협동조합운동이나 빈민운동이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디딤돌을 만들어 왔고(하승우 2008), 최근에는 자활공동체나 사회적 기업처럼 지역개발법인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기구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민단체가 이와 유사한 기구들로 전환되기도 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흐름들은 한국의 지역사회가 대안적인 지역발전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주요한 자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앞서 스퇴커나 빈이 지적했던 것과 비슷한 문제들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원확보를 놓고 서로 경쟁하거나 정치적인 갈등을 회피하거나 주민참여의 중요성을 당위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따라서 대안적 지역발전전략을 위한 지역사회 조직화의 첫 단계는 각 모임이나 단체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위한 통합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다. 스퇴커가 분석한 톨레도 사례에서처럼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을 밟는다면 그 힘은 배가 될 수 있다. 지역사회의 강고한 기득권 구조나 후견주의(clientalism)를 생각한다면, 지역사회 내의 변화역량은 ‘명목상의 연대’를 넘어 실질적인 연대를 이뤄야 하고, 그런 연대는 소통과 상호이해(mutual understanding)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특정한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결합하는 ‘느슨한 연대’는 다양한 삶의 의제를 소통하며 신뢰와 우정을 형성하는 강한 연대로 발전해야 하고 이런 발전은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주민참여와 주민리더십의 형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사회적인 대안은 진공상태에서 검증되지 않고 수많은 장애요인들과 기성담론들이 훨씬 우세한 상황에서 주민들과 접촉해야 한다. 그리고 오랜 권위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지역사회는 수동성을 몸에 익혔다. 따라서 올바른 주장을 했다고 해서 주민들이 그것을 지지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빈이 강조했듯이 포괄적이고 통합된 교육프로그램들을 통해 주민들이 지역리더로 성장하도록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힘을 모아야 한다.

또한 대안적인 발전이 가능하려면 대안적인 경제의 망이 구성되어야 한다. 그 구성의 단계는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라는 개념으로 정리될 수 있는데, 그것의 성공 여부는 그것이 기존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다른 자신의 ‘사회적 시장’, ‘윤리적 시장’을 만들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사회적 경제가 기존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자신을 적응시킨다면 그것은 자신의 기반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운동이 중요하다. 협동조합운동은 사회적 일자리 사업이나 레츠(LETS), 마을만들기운동 등을 통해, 그리고 친환경급식이나 로컬푸드만이 아니라 주거, 보험,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적 관계망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런 관계망의 구성에서는 협동조합만이 아니라 협동조합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다양한 지역단체들도 참여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의 망은 국경선을 넘어 확대될 수도 있다. 그런 관계망의 확대가 공동소유의 영역을 확대시킨다면 그것은 새로운 노동과 거래(trade)의 원칙을 확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4. 결론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이념을 중심으로 탄탄한 후견주의 구조를 확립한 세력들은 신개발주의를 추진하며 지역사회를 개발의 희생양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반면에 이런 흐름을 변화시키려는 다양한 노력들은 아직 연계되지 않고 그 자체적인 힘도 미약하다.

따라서 대안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경기도 조치원에서 이장-공무원-업자의 개발동맹에 맞서 아파트 건설반대싸움을 벌였던 강수돌의 말은 이 어려움을 잘 말해준다. “우리는 저들의 개발동맹보다 훨씬 나은 ‘대안동맹’을 결성해야 한다. 우선은 마을 주민들이 더욱 똘똘 뭉쳐야 하고, 양 대학 학생과 교직원들이 나서야 한다. 그리고 환경운동과 노동운동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측면 지원하고, 소신과 실력을 겸비한 변호사 등 10명 정도가 ‘목숨’ 걸고 결합해야 한다. 진행 중인 2건의 행정소송을 수행할 팀도 필요하고, 주민의 역동성을 전면적으로 활성화할 팀이 필요하다. 생명의 대안을 향한 주민들의 생동하는 투쟁이 법정 속으로 ‘제도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군수와 도지사, 군의회와 도의회를 상대로 민원 제기와 대안의 협상을 담당할 팀도 필요하고, 언론 및 홍보를 전담할 팀도 필요하다. 이 모든 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빈틈 전략들을 활발히 구사해야 한다.”(강수돌, 2007: 201)

대안적 발전모델을 구상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은 지역사회 내외부의 다양한 운동세력들이 구체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강한 연대를 구성하고, 아직 조직되지 않은 주민들을 지역사회의 정치주체로 성장시키고 조직화하며 대안적인 발전모델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될 것이다.

참고문헌

 

강수돌. 2007.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건설자본과 마을공동체”. 한국사회포럼 ‘연구참여단체’ 발표자료집.

김성현. 2008. “국제금융기구와 빈곤축소프로그램”. 《경제와 사회》 겨울호 수록예정.

김종철. 2008. 『땅의 옹호: 공생공락의 삶을 위하여』. 대구: 녹색평론사.

김형용. 2008. “미국 지역사회개발 동향과 지역개발법인(CDCs)”. 《국제사회보장동향》 봄호.

러미스, 더글러스 지음. 김종철․이반 옮김. 2002.



 

요즘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말문이 막힐 때가 간혹 있다. 똑같은 단어를 쓰긴 하는데, 서로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달라서 얘기를 나누지만 정작 서로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얼마 전 우연히 뉴라이트쪽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건국절’과 관련된 토론회였다. 그 사람은 어두운 기억을 버리고 밝고 건강한 기억을 가지자는, 식민지의 아픈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헌법을 만들고 산업화를 이룬 ‘한강의 기적’을 기억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식민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경험이고 산업화의 기적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철저하게 짓밟은 성과이기 때문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반공주의’였다. 그 사람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이승만, 박정희의 노력이 국가보안법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보다 더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고문당하고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답했다.

그 답을 들으며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사람의 생각이 케케묵은 반공주의에서 나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념이라고 하는 그 덧없는 것을 위해 사람의 생명이 이토록 허무하게 여겨질 수 있구나, 이들에겐 목적만이 있을 뿐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구나. 이들에게 역사란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기록일 뿐 자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기 위한 계기일 수는 없겠구나. 과거를 되돌아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은 얘기를 하고 있지만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은 뉴라이트만이 아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에 관한 얘기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편의 논의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건 단지 시선의 차이로 설명될 수 없다.

촛불집회에 관한 토론회에서 만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은 촛불시위에 나오지 않았고 비정규직이라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의제를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얘기했다. 가난의 기준이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비정규직을 배제했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한 사건에 대해 그렇게 한정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떤 의도를 담고 있을 것이다.

물론 한 사건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차분하게 현실을 바라보자는 의도가 그 말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차분하게 보는 것과 현실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단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거리의 정치에 대한 열광이 제도정치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고 보수세력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독점하리라는 우려는 귀담아 들을 얘기이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결과에 대한 우려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참세상>의 집계에 따르면, 촛불집회와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이 33명이고 29명이 수배중이며 1,530명이 체포되었다(9월 3일 기준). 경찰의 과잉진압과 인권유린, 과거로 돌아간 듯한 검찰의 수사 등 엄청난 공권력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촛불의 움직임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도 시민이고 한국이 민주공화국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얘기해야 할까. 아직도 분에 못 이겨 촛불을 든다는 사람에게 우리는 현실정치에서의 패배와 냉소를 얘기해야 할까.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대의민주주의에서 비롯된 민주주의의 실패를 다시 대의민주주의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에서 정당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진보정당을 세우는 노력이 거리에서 머리가 깨지고 경찰에 짓밟힌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제도권의 정치가 자신을 얼마나 철저히 배제하는지를 절실히 깨달은 사람들에게 투표로 심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올바른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알고 믿는 건 촛불을 든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바란다는 점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선거와 관련된 얘기를 듣고 할 것이다. 내년의 보궐선거, 2010의 지방선거, 2012년의 총선... 그러면서 우리는 그 선거 결과를 가지고 촛불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고 변화에 관해 얘기할 것이다. 때로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반이명박, 반한나라당 전선을 얘기하고 그것에 촛불의 힘을 동원해야 한다고 얘기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가 잊어버리는 건 무엇일까?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한 기존의 편견을 깨려는 노력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작지만 소중하고 소박한 꿈일 것이다. 언제나 우리가 불가능의 영역으로만 밀어놓고 고민하려 하지 않았던 꿈들. 하지만 그렇게 망각된 것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풀지 않은 숙제처럼 다시 등장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언제나 편견은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시선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고 망각한다. 그러나 배제되고 잊혀진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잊게 하려는 정치가 있다면 그것을 기억해내고 받아들이려는 기억의 정치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내야 할까? 그것은 짓밟히고 무시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 사람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정치구조와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현대사를 장식했던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에서 사람들이 요구했던 바일 것이다.



나는 <GO>라는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 어느 한 편에 소속되어 그 집단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보호받는 삶을 거부하는 삐딱한 주인공들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 영화에 매력을 더하는 한 장면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투를 통해 세상을 가르쳐주는 장면이다. 다소 폭력적이지만 아버지는 주먹을 뻗어 그리는 원 안의 세상에 머문다면 안정적이지만 그 원을 벗어나면 어려움에 부딪치고 그런 어려움을 이기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아들에게 얘기한다.

하지만 강해져야 한다는 게 일방적인 폭력이어서는 안 된다. 강해져야 한다는 이름으로 자신과 타인에게 희생과 인내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이라도 쓰려는 폭력적인 합리성일 뿐이다. 그런데 <GO>는 그런 폭력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우정과 사랑이 타인과 더불어 살고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을 알려주기에 매력적인 영화이다.

사실 강해지는 방법은 몸을 단련하거나 집단을 만드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 방법 중 하나로 나는 사상(思想)을 꼽고 싶다. 조금 엉성하고 세련되지 않더라도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돈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사상은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사상은 그 뜻 그대로 마음과 눈으로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보고 내다보며 삶을 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힘, 그것이 바로 사상이다.

그래서 사상은 단순한 언어를 모아놓은 관념일 수 없다. “여러분은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열망을 가졌다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마음 속에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유익한 것입니다”라는 마틴 루터 킹의 말이나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는 체게바라의 말은 사상이 세계를 바꾸는 힘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그러니 사상의 자유는 삶과 세상의 변화를 꿈꿀 자유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런 소중한 자유를 무참히 짓밟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케케묵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잣대를 다시 들이대고 있고 사이버모욕죄라는 새로운 검열제도를 만들고 있다. 심지어 ‘국가경쟁력’을 내세워 집회나 시위를 금지하며 약자들의 저항수단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다. 저들의 논리는 철저하게 힘에만 의존하기에 폭력적이고 그렇기에 그것에는 사상이 없다. 저들은 단지 폭력을 사용해서 우리에게서 변화와 꿈을 빼앗으려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민주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동안 사상의 숨통을 조여 왔다. 우리에게 사상은 언제나 어떤 ‘~주의(~ism)’만을 뜻했고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생각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얘기해 왔다. 규범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런 다양성은 언제나 ‘~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만 인정되었다. 즉 우리는 모두가 꿈을 꾸고 사상을 누릴 자유를 얘기하지 않고 모두가 같은 꿈을 꾸거나 같은 사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더 분명하게 얘기하면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에도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를 되뇌는 것 외에 자기 사상을 만들지 못했다. 언제나 당면과제만을 생각했지 꿈을 꾸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누군가에게 아주 명쾌한 설명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추상적이고 부정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말이다. 그러니 사상의 자유가 지금 위기를 맞이한 듯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서 사상은 계속 위기를 경험해 왔다.

저들의 국가보안법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사상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비판해 왔지만, 그것을 넘어설 다른 틀을 만들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 낡은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꿀 희망의 원리를 우리는 구성하지 못했다. 자기가 내밀 수 있는 주먹의 경계 안에서만 세상을 보고 그 경계를 넘어서려 하지 않았고, 그 경계는 사상간의 넘나듦과 꿈의 공유를 방해했다.

폭력적이지 않으면서 그 경계를 넘어설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비폭력이다. 비폭력의 의미는 경찰의 공권력같은 직접적인 폭력에 맞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쇠고기 수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해지는 구조적인 폭력, 눈에 보이지 않게 천천히 우리 삶을 파괴하는 폭력에 맞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생명체에게 가하는 폭력이, 그리고 그런 폭력을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강대국’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직접적인 폭력의 구조는 비정규직의 양산이나 민영화라는 간접적인 폭력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자기 동료를 먹으며 살을 찌우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신세란 끝없는 경쟁 속에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신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간접적인 구조적 폭력에도 적극적으로 맞서는 비폭력이야말로 새로운 사상을 구현할 희망의 언어인 셈이다.

그리고 그 비폭력의 언어는 단지 인간의 것으로 제한되지도 않는다. 오체투지순례단의 눈물겨운 발걸음이 절망만 주지 않고 희망도 주는 건 주위의 다른 사물과 생명을 서로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는 단지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나 방식만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많은 희망의 언어들을 담고 있다(뉴라이트를 비롯한 케케묵은 집단들이나 정치인들이 80년대 운동권의 방식을 열심히 배워 써먹더라도 결코 베낄 수 없는 건 이런 행동 속에 담긴 마음과 사상이다). 이제 사상은 여러 가지 뜻 깊은 실천 속에 담긴 의미들로 새로이 구성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상의 자유는 단지 국가보안법 폐지로 완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상은 검열이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원래 자유로운 것이다). 사상은 국가보안이나 질서와 같은 기존의 논리를 넘어서 다른 새로운 무엇으로 나가려는 것이자 나와 세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는 개인의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상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다. 사상이 없는 감정적인 연대는 사회적인 조건이나 분위기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언제나 약하다. 하지만 사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대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우리를 세상에 내려앉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사상의 자유라 믿는다. 그것은 절망의 시대에도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이명박 대통령은 빡빡한 미국방문 일정에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만나 한미FTA 등 현안을 논의했다 한다. 연방국가인 미국에서 상원의원도 아닌 주지사를 만나 왜 한미FTA와 같은 국가간 협정을 논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미국경제가 먼저 살아나야 다른 나라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미국경제, 그 안에서 비중이 큰 캘리포니아 경제가 살아나는 것이 중요하다”며 미국경제를 걱정하는 발언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요즘처럼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도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경제까지 걱정해주니 그 따뜻한 연대감에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눈물을 흘렸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방문과 대화내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런 깜짝 이벤트는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취향인 듯하다.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고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어쨌거나 아놀드를 만나서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국내로 돌아오자마자 결연한 각오를 밝혔다. 지난 27일 “일시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목숨을 던질 그런 자세로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겠다고 말하지 않나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는 공자님 말씀을 인용하며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던져라”는 자세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28일에는 “먼 훗날 몸을 던져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한층 더 터프한 모습으로 돌아온 우리의 대통령, 우리는 박수치며 환영해야 할까?

무엇을 결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터미네이터의 장비는 곧 장만할 태세이다. 정부가 이번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에 따르면, 경찰청은 집회대응 예산으로 48억 5,400만원을 신청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만만치 않다. 야간 조명차 2대, 물대포 3대, 물보급차 4대, 차벽트럭 17대, 신형보호복 2,106벌, 무선망 수신기 3,606개, 중형소화기 255개, 소형소화기 2,106개, 첨단채증장치 3세트 등이다. 예산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업그레이드된 터미네이터 군단을 곧 거리에서 만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가 터미네이터식의 전쟁일 수 없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사회에서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고, 그래서 정치의 세계는 다양한 의견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보장해야 한다. 이상적인 정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현실 정치는 여러 협상과 타협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난 너만 구하면 된다’는 터미네이터식 발상은 정치의 세계가 구성되는 원리인 견제와 균형, 타협과 협상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영화를 보면 로봇조차도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은?).

목숨을 바쳐 일을 하겠다는 우리 대통령의 자세는 이번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가 화해와 통합을 강조한 것과 사뭇 대조를 이룬다. 대체 어떤 목표를 세웠길래 정치의 기본을 무시하고 온갖 첨단 장비로 무장하며 목숨을 바쳐 그것을 추진하겠다는 걸까? 아직 모든 게 분명하지 않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입장을 바꾸는 정부인지라 뭘 하겠다는 건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 대통령은 친절하게 라디오로 자신의 입장을 직접 밝히는 편이니 얘기를 들어보자. 귀국한 뒤의 첫 라디오연설 주제는 청년실업이었다. 그러면 청년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한 목숨 바쳐 일하겠다는 걸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자신의 경험담까지 들며 많은 얘기를 했지만 건질 만한 얘기는 이 정도인 듯하다. 세상에 경험만큼 소중한 스승은 없으니 비정규직이든, 임시직이든 무조건 취직해서 노조가 있건 없건 찍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라 일하라(월급은 제때 받으려나?). 이율곡 선생을 본받아 청년리더 10만 명을 양성하기 위해 7,500억원의 예산을 특별히 편성하겠으니 불만을 가지지 말라(1인당 750만원씩 나누나?). 그래도 국내에 일자리가 없으면 해외로 10만 명을 파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4대 보험은 되려나?)는 얘기이다.

허나 어떡하나? 실업자통계에 잡히지 않는 취업준비생까지 합치면 청년실업자는 수는 대략 15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10만을 양성하고 10만을 파견해도 청년실업율을 낮추기엔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대통령은 정말 목숨을 바칠 만한 필생의 역작을 슬며시 다시 꺼내고 있다. “4대 강 정비사업이면 어떻고, 운하면 어떠냐”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4대강을 정비하면 그것이 곧 대운하가 아니겠는가.

터미네이터를 좋아하는 명바기네이터가 돌아왔다. 그것도 예전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서 촛불시위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한반도의 생태계는 다시 한번 멸망의 날을 맞이하고 있다.



잘못된 권력에 시민들이 맞서 싸우지 않았다면 지금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우리의 신념과 자유를 짓밟을까 두려워하지만,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면 그들 역시 두 다리 뻗고 잠을 청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정치의 법칙 때문이다. 즉 제 아무리 강한 권력자라도 형식적으로는 국민의 ‘동의’를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도 어느 순간이 되면 ‘국민’ 또는 ‘시민’을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시켜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시민들은 왜 저항하는가?”라는 물음은 정치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언제나 권력의 부조리에 맞서 자유나 평등, 정의와 같은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라는 물음 역시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엄청난 권력에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지나친 권력이 있는 곳엔 언제나 시민의 저항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 역사를 살펴봐도 시민들은 언제나 저항해 왔다. 우리 헌법이 지목하는 대표적인 저항인 3․1운동과 4․19민주이념은 누가 어떻게 시작한 사건인가? 가장 억압적인 제국주의 지배나 잔혹한 독재를 경험하면서도 시민들은 각자 자기 삶의 터전에서 자발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동학농민운동이나 각종 민란, 제주도와 광주, 마산, 부산 등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저항들도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에 맞섰다는 점을 증명한다. 권력의 비리와 억압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시민들은 저항했다.

따라서 우리는 “권력이 어떻게 시민의 저항을 가로막고 그 의미를 왜곡시켜 왔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물어야 저항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다.

 

시민 없는 시민참여제도

 

한때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동안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에서 전문가나 활동가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들 역시 시민이라는 점에서 이 말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런 말을 열심히 퍼트려서 시민들이 시민사회운동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의 크기를 계속 키웠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공무원, 법관들은,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재벌과 중앙언론들은 평범한 시민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정보와 힘을 가진 채 시민들을 지배해 왔다. 관존민비(官尊民卑)라는 거짓된 상식을 널리 퍼트리면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거나 그 힘을 줄이려는 시도들을 억눌러 왔다.

시민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은 그런 시도를 잠재울 ‘시민 없는 시민참여제도’를 만들었다. 동(洞)에서 구(區), 시(市), 도(道)까지 설치된 각종 자문위원회들은 권력의 일방적인 정책결정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래서 소위 민의(民意)를 수렴한다는 절차들은 언제나 그들을 무조건 지지하는 배후세력이 되어 왔다.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말에 복종하는 자들만을 시민으로 인정하고 저항하는 자들을 시민이 아닌 폭도나 무지한 군중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化爲枳)는 말처럼, 좋은 제도들도 한국으로 건너오면 하나같이 시민참여를 가로막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도 ‘소리 소문 없이’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직접민주주의제도들이 도입되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여전히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신화’로만 얘기되고 있지만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서서히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주민발의, 주민소환, 주민투표처럼 널리 알려진 제도만이 아니라 주민참여예산제도나 시민감사옴부즈만같은 제도들도 이미 한국에 도입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은 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함께하는시민행동>의 조사에 따르면, 2002년 7월부터 2006년 6월까지 5년 동안 시민 138만 명이 총 123건의 조례를 발의했지만 그 중 원안대로 의결된 것은 12건 뿐이고, 54건은 수정된 채 의결되었다. 주민투표제도는 법 제정 이후 단 3건만 실시되었고, 3건 모두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추진한 관주도 주민투표였다. 주민소환제도는 여러 지역에서 추진했지만 실제로 소환한 곳은 경기도 하남시 뿐이다.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이라던 참여예산제도 역시 토호들의 민원청탁용 창구로 전락해 버렸다.

사실상 한국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하거나 힘을 가진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제도를 활용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들 뿐 아니라 설령 활용하더라도 그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시의 경우 주민발의를 하려면 약 14만 명의 서명이 필요하고, 서울시장을 소환하려면 약 80만 명의 서명이, 주민투표를 신청하려면 약 40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그냥 서명을 받으면 되는 게 아니라 서울시의 경우 선관위에 미리 신고한 사람들이 주민발의나 주민투표의 경우 90일, 주민소환은 120일 이내에 서명을 받아야 한다. 시보다 작은 구로 내려가도 용산참사를 빚었던 용산구의 경우, 주민발의는 90일 동안 약 4천 6백 명, 주민투표는 약 1만 7천 명, 주민소환은 약 2만 8천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돈을 주고 사람들을 사서 서명을 받지 않는다면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중앙정부는 주민발의나 주민투표, 주민소환의 내용을 정해서 시민의 참여를 차단한다. 국가의 권한이나 사무에 속하는 사항, 법률에 위반되거나 행정기구에 관한 사항, 자치단체의 예산과 관련된 내용들은 아예 투표나 발의의 대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한국의 시민참여제도는 하나같이 토호들을 위한 참여제도이거나 허수아비/꼭두각시 참여제도인 셈이다. 이렇게 힘을 가진 자들은 이런 허울뿐인 제도로 시민들의 참여의지를 꺾고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변하지 않으니 자기 몸이나 잘 간수하라는 생각을 심어 왔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입을 막으며 언제나 자신들을 통해서만 얘기하라고 강요했다.

흥미로운 점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미 자신의 발언권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직접민주주의를 싫어하며 자신을 통해서만 말할 것을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2008년을 밝혔던 촛불집회는 바로 이런 잘못된 상식에 도전했다.

 

촛불이 밝힌 시민저항의 가능성

 

보통 온라인에서의 다양한 소통이 오프라인의 활동으로 직접 연결되기는 쉽지 않다. 근본적인 면을 따지면 그것은 ‘속도의 차이’ 때문이다. 온라인에서의 정보와 논의는 망을 타고 빠른 속도로 퍼지지만 현실에서의 삶은 삶의 다양한 조건들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다. 마우스를 클릭하기만 하면 되는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의 실천은 항상 참여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오히려 시민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고 조금씩 퍼지고 있다. 경제가 나빠지면 시민들의 마음이 온통 4대강 정비사업이나 대운하로 몰릴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상과 달리, 시민들의 관심은 다양한 방면으로 퍼지고 있다(사실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고 난 뒤 그런 암울한 예상을 뒤엎은 것도 촛불문화제였다).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발언권을 가진 엘리트들은 시민들의 저항을 낮게 평가하지만, 시민들의 움직임은 그런 평가를 비웃듯이 활발해지고 있다.

촛불집회 이후 시민저항이 다양한 형태로 이미 퍼지고 있다. 비리나 부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사람들이 촛불을 손에 들고 나온다. 그러면서 촛불이 일종의 저항의 상징으로 규정되었고, 촛불을 드는 행위 자체가 저항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었다(대표적인 예가 촛불산책이다). 그리고 이런 저항은 한동안 한국사회에서 자취를 감췄던 ‘참여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작년 연말을 달궜던 명동 무한도전×2 ‘널 기다릴께’ 역시 시민들의 뛰어난 아이디어가 빛을 발했던 저항이다. 매일 2배의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생각은 경찰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추운 거리를 밝히는 횃불이 되었다. 그리고 ‘반쥐원정대’나 ‘보신각 촛불타종’ 역시 시민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드러낸 사건들이다. 기륭전자와 KBS, YTN, 여의도 등을 누비는 촛불의 발걸음은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을 예고한다.

왜 시민들은 이런 어려움을 몸소 겪으려 할까? 자신이 거리로 나서도 세상을 전혀 바꿀 수 없으리라 믿었다면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시민들은 권력을 쥔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진리, 시민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정부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열심히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을 대변한다는 세력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거리에 나서야 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더구나 시민들은 저항을 통해 권력의 억압성을 몸으로 느끼며 그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던질 즐거움과 여유도 만들어가고 있다. 권력을 조롱하고 비웃는 시민들의 저항은 기성 권위와 질서를 파괴하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에 지상의 그 어떤 권위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이 터져 나온 순간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진실이 되어 인터넷에서 무수히 복제되어 전파된다. 그렇게 시민의 웃음으로 폭발한 촛불의 힘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저항카페와 커뮤니티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자신의 취미가 이 정부와 쉽게 어울릴 수 없음을 여러 동호회들도 자각하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화면이나 텔레비전 앞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거리로 나가야 할 이유를 찾으며 시민으로 변하고 있다. 이미 진실이라는 바이러스는 온/오프를 넘나들며 사람들을 감염시키며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다만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그리고 경찰이나 검찰의 탄압을 받더라도 자신의 삶을 심하게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저항을 펼칠 방법을 시민들은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저항이 단지 권력의 나쁜 면을 폭로하거나 다그칠 뿐 아니라 우리의 공적인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 역시 고민한다. 그렇게 고민하고 스스로를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며 시민들은 다음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저항을 북돋우며 손을 맞잡을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의 시민들이 저항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세계를 보수적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저항의 흐름은 끊이지 않았다.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으려는 새로운 스파르타쿠스, 새로운 만적과 망이, 망소이들이 반란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시작해 지금 유럽 전역을 달구고 있는 시민들의 저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 군부에 맞섰던 70년대의 역사를 딛고 ‘700유로 세대’라 불리는 그리스 청년들과 시민들은 경찰과 정부에 맞서 저항을 벌이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열악한 교육환경,경제정책의 실패, 경찰의 만행 등을 비판하는 시위가 매일 이어지고 있고,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고 농민들이 국경을 봉쇄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시위는 경제위기를 맞이해 전 유럽으로 퍼지고 있다. 누가 이 저항의 불길을 다스릴 수 있을까?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의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2008)이나 에이프릴 카터(April Carter)의 『직접행동』(교양인, 2007)을 보면 인류가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지가 잘 묘사되어 있다. 굳이 두 사람의 말을 인용하자면, 진은 “시민들이 복종하지 않을 때,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거부할 때, 군인들이 총을 들지 않을 때, 기존 권력은 힘을 잃고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확신을 가지고 얘기한다. 초강대국 미국 내에서 미국에 저항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즉 백인-남성-부자에 맞서는 노동계급, 빈민, 흑인, 여성, 원주민들의 불복종과 저항들이 이런 힘을 만들고 있다.

카터 역시 대의정치에서 소외된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운동, 석유회사와 같은 다국적기업을 반대하는 불매운동이나 저항운동,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는 댐건설을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운동, 최빈국을 위해 외채탕감을 주장하는 직접행동, 다자간투자협정을 반대하는 운동, 세계무역기구(WTO)를 반대하는 운동, 토지를 요구하는 농민들의 직접행동,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원주민 공동체, 농민, 학생, 노동자, 실업자의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운동들을 얘기한다. 이런 운동을 통해 시민들은 역량을 강화하는 효과(empowering effect), 즉 “공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냄으로써 자부심과 존엄함을 얻을 수 있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며, 타인과 연대감을 고양”시키는 경험을 얻게 된다. 이렇게 담금질을 경험하며 시민은 타인의 고통에도 귀를 기울이는 세계시민으로 거듭난다.

물론 자연발생적인 시민들의 운동은 흐름을 형성할 뿐 그 힘을 집중시키지 못한다. 이미 조직화된 정당이나 단체들이 스스로를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시민들의 힘을 증가시키고 그 힘에 일정한 방향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세력들이 시민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변화의 성과를 시민들의 것으로 돌릴 때에만 그런 어울림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권력은 결코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은 시민을 이길 수 없고 속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를 속이기에 거짓을 줄이려면 정당이나 단체의 내부구조나 성격 자체가 분권화되고 투명해야 한다. 그런 자기변화 없이 시민과 어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런 점에서 반이명박 연대는 또 다른 거짓말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시민들은 이미 존재하는 방식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미 만들어진 참여제도를 활용하는 법도 그 중 하나이다. 4월에 있을 재보선이나 2010년의 지방선거를 활용하거나 기득권층의 독점물로 전락한 참여제도들을 시민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제도는 참여를 감싸는 껍데기일 뿐이다. 제 아무리 훌륭한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제도를 활용하려는 능동적인 참여의지와 그런 의지를 자극하는 정치문화가 없다면 그 제도는 쓸모 없는 것이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를 다룬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리북, 2009)에서 우리는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나누고 시민들의 통제를 받는 제도, 시민권을 실현하려는 시민들의 의지, 민회를 통한 참여의 전통과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먼 길일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역사의 경험은 저항의 불꽃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 땅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서로 나누며 함께 결정해야 한다. 시민저항의 싹은 자급(自給)과 자치(自治), 자결(自決)의 기반을 마련할 때 활짝 피어날 수 있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그런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시민저항은 언제나 권력의 거짓말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 조급하지 말고 기반을 튼튼히 다질 때이다.



한국의 현대사에 여러 비극이 있었지만 제주도 4․3만한 비극은 없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이 기념행사를 치르던 주민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 뒤 1년 동안 2,500여명의 주민이 감금되거나 고문을 당했고, 48년 4월 3일 무장대가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1954년 한라산 금족지역이 개방될 때까지 7여년 동안, 4․3사건 위원회 보고서를 따르면 제주도민의 약 10%인 2만 5천명에서 3만명이 희생당했다(그 중 86.1%가 군대나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저질러진 이 학살은 제주도민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 증언자는 누이를 산에 묻고 돌아오니 온가족이 죽어 있더라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2003년 10월 노무현 정부는 4․3에 대해 공식적으로 과거 권력의 잘못을 사과하며 상처를 달래는 듯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국방부는 교과서에서 4․3을 “남로당의 폭동지시에 의해 발생한 좌익세력의 반란”이라 규정할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 소설가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라는 작품을 ‘불온서적’으로 규정했다. 최근 벌어지는 많은 다른 일들처럼 역사의 시계바늘도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는 더 이상 역사이기를 포기하고 바늘을 멈춘 채 권력을 가진 자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역사만 노리개감이 되는 건 아니다. 제주도민들의 삶은 또다시 육지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2007년 국방부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규모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그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다.

얼마 전 강정마을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서귀포에서 제주도 올레길을 따라 걸으며 찾아간 그곳은 아름답고 고즈넉한 포구였다. 해군기지추진단이라 이름붙인 콘테이너 박스만 없다면 아주 평화로울 곳이었다.

그런 곳에, 소위 세계평화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는 해괴한 발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을까? 주민들의 반대를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해괴한 말은 핵을 사용하지 않는 대규모 재래식 폭탄을 뜻하는 ‘친환경 폭탄’처럼 기괴한 우리 현실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뒤섞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그런 말들이 우리를 속일 수는 없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 본토 상륙을 막는 최후의 전쟁기지로 사용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육지에서 건너온 우익단체의 발에 짓밟혔던 제주도는 지금 시험대에 서 있다. 한반도 최남단에 만들어지는 해군기지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리라 생각하는 무뇌아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해군기지의 건설은 외부의 정치상황, 정확히는 동북아나 국제정세가 또 다시 제주도민과 한반도 주민의 삶과 생명을 좌우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평택에서 그랬듯이 정부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것에도 호소할 길 없는 힘없는 주민들은 또다시 돈 몇 푼 쥐어든 채 쫓겨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사건이 그렇게 끝날까? 그 무엇도 자신들을 돕거나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언제나 순순히 물러나기만 할까?

최근 어느 정치인은 무더기 법안통과를 시도하며 ‘전쟁’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에게는 이 표현이 하나의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그 표현은 단지 수사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드러난 일그러진 현실의 진실인 셈이다. 정치가 극단으로 치닫을수록 비극은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방치된 세상은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그 끝으로 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호소할 곳 없는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전쟁을 막을 정치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잠들지 못하는 남도는 우리의 미래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