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씨의 [행동하는 양심]을 읽다 문득 든 생각이다.


브라질 열대우림에서 천연고무를 채취하는 세링게이루들은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지주와 기업가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 운동을 이끌다 암살범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치코 멘데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역대 정부들은 아크리 주에 값싼 땅이 넘쳐난다고 말했을 뿐, 그 땅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빠뜨렸습니다.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숲은 계속해서 사라져갔고, 우리는 매일 땅을 잃어갔습니다. 그래서 투쟁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늘 비난받으며 선동가라는 딱지나 붙여지는 게 우리가 원했던 것이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투쟁은 권리를 지키고자 했던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길이었고, 생존 자체였습니다.”

그곳이나 이곳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실제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권리를 잃고 사막처럼 생명이 말라버린 땅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미 사람들과 생명이 살고 있는 땅이 공터로 불리고,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재개발 대상지로 불린다. 

이렇게 내몰리다 자기 땅과 보금자리를 지키려 입을 열고 주먹을 불끈 쥔 사람들은 그곳이나 이곳이나, 그 때나 지금이나 비난받고 선동가, 빨갱이, 떼잡이라 욕을 먹고 테러리스트라 불리며 버림받는다. 살기 위해 부딪치는 사람들이 법치주의라는 그물에 갇혀 메마른 땅으로 끌려간다.

푸근한 인상을 가진 우리 이웃들이, 이웃집 사람들이 하루하루 어딘가로 사라진다.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있을까?

세링게이루들의 힘든 싸움에서 또 하나 발견한 점. 세링게이루들은 경제적 자립을 위해 천연고무를 스스로 팔고 수익금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세웠다. 치코 멘데스는 암살될 때까지 샤푸리 농업노동조합의 의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곳이나 이곳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대안은 이미 분명하지 않을까? 왜 그들은 치코 멘데스를 암살해야 했을까? 무엇이 무서웠을까?


나는 도서관이 좋다.
케케묵은 책냄새보다는 책장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목적없는 방황을 좋아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지식인들의 고질병 중 하나인 '책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늘어나는 책값을 감당하지 못한 현실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이사할 때 책을 싸는 게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요즘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도서관에 책을 신청해서 본다.
지역도서관에 신청할 때도 있고 학교도서관에 신청할 때도 있고.
좋은 책이라면 신청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는 즐거움도 있고...

도서관을 애용하는 또 다른 이유는 목적없이 책장 사이를 헤매다 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원래 찾으러 간 책 옆에 꽂혀 있는 책에 꽂혀 그 책을 빌려 도서관을 나올 때가 종종 있다.

오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세 권이다.
원래는 각시를 위해 '인권의 발명'이란 책을 빌리려 했으나 어쩐 일인지 책장에 꽂혀 있지 않았다.

첫번째 고른 책은 조희연 등이 엮은 '한국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동학'이다.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가 학진과제로 수행한 개별 연구들을 묶은 책이라 내용이 아주 튼실하지는 않지만 몇몇 글들은 흥미로울 듯해서 빌렸다.
주된 관심은 김동춘 교수가 쓴 '민주화 이후의 지구화 국면에서 한국의 계급구조화'이다.
목차를 보니 이광일 선배의 '민주화 전후 지역정치와 사회경제적 독점구조의 재구성'이라는 글도 눈에 띈다.
예전에 토론회 때 잠깐 읽은 적이 있는데 마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다른 한 권은 내가 좋아하는 일본 사상가 후지따 쇼오죠오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이다.
기회가 되면 한국 뉴라이트들의 정신세계를 밝히는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그럴 가치조차 없을 듯해서 미뤄왔다.
신지호를 비롯한 여러 인간들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는데 도움이 될 듯해서 빌려왔다.
쓰루미 슌스케의 책과 서로 엮여있는 책인데, 우리 사회에서도 한번 전향연구회를 만들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여간 글을 쓸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뉴라이트들을 까발리는 글을 한번 써볼까 생각중이다.

책장 사이를 헤매다 발견한 수확이다.
박현주씨가 쓴 '행동하는 양심'.
각시의 권유로 불복종에 관한 연재를 고민하고 있는데, 한발 앞서 그 내용을 잘 묶어냈다(올 7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
미국의 프리덤 라이더스와 함께 남미의 치코 멘데스, 인도의 칩코운동, 간디의 소금행진 등을 흥미롭게 잘 썼다.
이미 잘 다룬 책이 나와 있기에 불복종에 대한 연재는 포기하고 다른 기획으로 바꿔야 할 듯.
하지만 '법원이 시민불복종을 재판할 수 있는가'라는 다소 문제적 제목의 논문을 쓰고 있는 관계로 시민불복종에 관한 고민을 정리하는 건 필요할 듯 싶다.
불복종이라는 부정의 개념 말고 긍정의 개념을 새로이 만드는 것도 흥미로울 듯 싶다.

어쨌거나 오늘 도서관을 헤맨 결과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이 책들에 대한 구체적인 리뷰는 다음 기회에...^^
[경인일보=]지난 주 주민소환투표가 실시된 제주도에 다녀왔다. 도지사의 소환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투표에 제주도민의 단지 11%만이 참여했다. 유권자 수의 3분의 1을 넘기지 못하면 개표하지 못한다는 법규에 따라 11%의 주민들이 내린 결정은 찬반 여부를 밝히지도 못한 채 묻혀버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참담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단지 투표율이 낮아서가 아니었다. 이번 주민소환투표는 유권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하는 '비밀선거'의 원칙을 어겼다. 김태환 도지사는 소환을 당한 뒤에 노골적으로 주민들의 투표불참을 유도했다. 도지사는 선관위의 공보물에서도 "주민소환에 반대한다면 투표는 안하셔도 됩니다"라며 "투표장에 가지 말아 달라"고 얘기했다. 자연히 투표장에 가서 투표를 한 사람들은 주민소환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실제로는 '공개투표'가 이루어진 셈이다. 개표는 되지 않지만 투표율은 공개되고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살다보니 시민의 권리인 투표는 부담스러운 짐이 되었다.

더구나 행정조직들이 조직적으로 투표를 방해했다는 주장들이 있고, 마을 이장이 투표를 방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제주의 소리'에 따르면, 제주도 선관위는 총 31건의 위반사례를 적발했고 이 건수는 그동안 총선, 대선 때의 선거법 위반 건수보다 더 많다고 한다. 도지사의 일방적인 정책결정이 주민소환의 이유였던 만큼 공권력은 철저히 중립을 지켜야 했건만 그러지 않아 '관권선거'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하지만 11%라는 낮은 투표율을 공개투표와 관권선거의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소환 청구 때는 7만7천367명이 서명을 했는데, 투표를 한 사람의 수는 4만6천76명이었다. 그러니 소환을 청구한 사람들조차 모두 투표를 하지 않은 셈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했는데, 그런 모습은 부족했다. 자연히 투표에 나선 사람들만 고스란히 그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더구나 제주도 밖의 사람들은 이번 주민소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영리병원이나 해군기지, 케이블카라는 사안이 나와 무관한 듯하나 이런 사업들은 분위기를 타기 마련이다. 특히 한국처럼 다른 지역의 사례를 모방하기 좋아하는 곳에서 그런 분위기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제주도 주민소환투표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나 이미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이다.

하지만 힘을 모아 함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노력해야 했을 사람들조차 투표에 무관심했다. 한나라당의 독주에 맞선다고 외치던 정당들조차 주민소환과 관련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성명서 한 장 제대로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투표가 무산된 뒤에야 한나라당을 공격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을 뿐이다. 한국의 정당들은 권력에만 관심을 둘 뿐 머슴이 주인을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앙의 여론싸움에만 관심을 가질 뿐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결정들을 항상 무시한다.

그러니 지방의 머슴들은 갈수록 오만해진다. 지난 8월 서울시는 탈시설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는 장애인들에게 불법농성이라며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가 나중에 그 결정을 철회했다. 그 뒤에 전주시와 청주시도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만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해야 한다는 공문을 관련 기관에 내려보냈다. 장애인도 응당 시민이고 권력의 주인인데 한국의 머슴들은 마치 주인을 머슴처럼 취급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주인이 머슴의 일에 무관심하면 안 된다. 그런 무관심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부정과 부패의 수렁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주인을 얕잡아보는 머슴은 오만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머슴만 탓하지 말고 주인임을 선언하고 주인답게 행동해야 한다. 중앙정치의 혼탁함만 탓하지 말고 내가 사는 지역의 정치에 관심을 두고 오만한 머슴들을 심판해야 한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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