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에게서 황당한 소식을 접했다. 한 언론사의 저작권을 담당하는 법무법인이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에게 많은 액수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는 소식이었다. 단체 홈페이지 뉴스DB 게시판에 기사를 무단게재했다는 이유로 수천 만원의 배상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 소식이 알려지고 파문이 확산되자 언론사는 이 게시판이 공익을 위해 운영되었고 배상 청구 이후에 뉴스게재를 중단했기에 소송과 배상을 포기하겠다고 단체에 통보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었다고 마냥 즐거워할 일은 아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정된 저작권법에 따르면 기사를 축약하거나 부분발췌를 해도 위법이고 홈페이지에 기사프레임을 링크하는 것도 위법이다. 심지어 출처를 밝혀도 저작권법을 피할 수 없다고 하니, 한 마디로 아예 신문기사에 손을 댈 생각을 말라는 얘기이다. 심지어 불법 복제물을 올리는 인터넷 게시판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3회 이상 삭제 명령을 내린 뒤에 게시판을 최대 6개월 동안 폐쇄시킬 수 있다. 한마디로 이는 언론사가 여론을 형성하는 기능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자 정부가 이를 도와 시민들을 ‘사이버 추방’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더욱더 기가 막힌 일은 일부 법무법인들이 기업의 저작권 고소 대행을 맡아 무차별적으로 ‘묻지마 저작권 고소’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일공유사이트에서 영화나 음악을 파는 청소년들을 상대로 합의금 장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그러다보니 법을 이용해 돈을 버는 변호사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지난 4월 서울의 한 법무법인은 대표 변호사 부인 명의로 출판업체를 차린 뒤 이곳 직원 30명에게 저작권 침해 사건 고소장 작성 등 법률 사무를 맡기고 그 합의금을 회사에 분배했다가 검찰에 불구속 입건되기도 했다. 이런 장사꾼들이 판을 치다보니 인터넷이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얘기는 이제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다.

애초에 인터넷이란 공간은 정보의 복제와 유통, 가공이 자유롭다는 장점 때문에 활성화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글이나 음악, 그림, 사진을 지인들과 함께 나누며 소통하고 새로운 컨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인터넷은 ‘자유와 소통의 공간’으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그 공간에도 자물쇠가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이버 자물쇠가 채워질수록 IT강국이라는 한국의 위상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사실 저작권이라는 권리 자체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어떤 사물이나 지식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하나의 상품을 만들려면 여러 사람의 힘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하나의 이론을 완성하려면 과거와 현재의 많은 이들이 머리를 모아야 한다. 하물며 땅을 비롯한 자연은 어느 누구의 배타적인 소유물이 될 수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소유권을 존중한다. 하지만 농사를 짓지도 않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해서 그 땅을 놀리고 황폐화시키고, 생활이 아니라 투기를 목적으로 무한정 집을 사모아도 그 소유를 무조건 인정해야 할까?(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에 따르면, 한국의 집부자 1위는 무려 1,083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성실한 노동의욕과 건전한 윤리의식까지 갉아먹도록 방치한다면 우리 사회가 건강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런 세상을 우려해서인지 이미 16세기 조선시대에 정여립((鄭汝立)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을 외치며 천하가 모두의 것이라 선언했고, 약 170년 전 프랑스의 사상가 프루동은 “소유란 도둑질이다”라고 외쳤다. 인터넷 공간은 이들이 꿈꿨던 공유가 가능한 최후의 보루이니 그곳의 자유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변호사의 천국 미국에서는 변호사가 흡혈귀에 비유된다고 한다. 미국을 따라갈 생각이 아니라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일부 법무법인들은 묻지마 고소를 반성하고 이를 스스로 바로잡아야 한다. 적어도 인간으로 살고 싶다면 말이다.


아직 2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명박 정부를 특징짓는 아이콘은 바로 '컨테이너'일 듯 싶다.
200년년 부산 APEC회의 때가 최초라고 하지만 컨테이너로 길을 막고 그 사이를 용접하는 그 놀라운 발상은 작년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위키피디아에 '명박산성'이 등록될 만큼 이것은 참으로 한국의 '고유한' 현상이라 할 만하다.
일단 당선된 이상, 권력이 결코 시민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된다는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 준 사건이었다. 명박산성에서 컨테이너는 소위 한국의 국가성격이 여전히 소통보다 '불통(不通)'임을 잘 증명해 주었다.

촛불집회 때 컨테이너의 용도를 잘 깨달았던지, 이명박 정부는 그 다음부터 컨테이너를 방어를 넘어 공격적인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200일 째를 접어들고 있는 '용산에서의 국가폭력'에서도 컨테이너가 등장했다.
경찰특공대를 태운 컨테이너가 크레인에 의지해 철거민들의 농성장을 짓이겼고 결국은 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제는 가난도 범죄라고 얘기하며 국가는 철거민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만들고 특공대를 투입했다.
죽은 사람이 여섯 인데,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은 채 200일 째를 맞이하고 있다.
컨테이너가 고공진압 때 사용될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상상력, 명박산성을 뒤이은 이명박 정부의 아이콘이다.

용산 때 그 효과를 깨달았는지 정부는 쌍용자동차에도 용산에서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컨테이너를 사용했고 역시나 경찰특공대를 이것에 태웠다. 
노동자들의 저항이 있을 줄 알면서도 이 컨테이너에 타야 했던 경찰특공대의 마음은 어땠을까?
용산과 비슷한 참사가 또 다시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왜 컨테이너에 타야 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쌍용자동차 노조원 2명이 추락해서 중경상을 입었다고 한다.
생명에 지장이 없어 다행이지만 무리하고 폭력적인 진압이 있는 곳에 희생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명박정부는 공권력을 마치 사권력처럼 사용하고 있다.
공권력은 공적으로 정당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 규모와 과정도 공식적이어야 한다.
크레인에 컨테이너를 묶어 고공진압의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반대하면 무조건 진압한다, 명령에 따르기 싫으면 나가라, 이런 식의 일방적인 권력행사는 공권력이 아니라 사적인 권력의 속성이다.
더구나 이 사권력은 철저히 기업들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고 있다.
그들에게 시민은 없고 시민들의 등골을 빼먹는, 그러면서 뒷돈을 대주는 기업들만 있을 뿐이다.

소통도 싫다, 반대도 싫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가 이런 정부의 말을 계속 따라야 할 이유도 없다.

이제 한국에서 컨테이너는 국가폭력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컨테이너에 짐을 싸서 이 땅을 떠나야 할 날이 올지 모른다는 점도 깨달았으면 한다.
지금 이런 식으로라면...

식민지 시대 한국의 지식인들은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해방이 되고 난 뒤에 그들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었을까? ‘국사(國史)’를 배워온 우리들에게 그 사회는 그냥 민족‘국가’였고, 대학의 세미나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뒤에는 민족이 사회주의로 바뀌었을 뿐 대안은 여전히 ‘국가’였다. 이호룡의 『한국의 아나키즘』(지식산업사, 2001)은 1910년대 이후 한국의 지성사가 발전해온 과정을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조망한다는 점에서 국사를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호룡은 우리가 근대의 지성사를 파악할 때 첫 단추를 잘못 꿰었기 때문에 한국의 근대사상 연구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를 수용한 시기와 수

용한 동기가 잘못 파악되었고, 사회주의의 조류가 다양하다는 점을 알지 못했으며, 공산주의 수용의 사상적 배경을 놓쳤고, 1920년대 초 사상계의 분화를 잘못 이해했다고 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우리는 한국 근대의 사회주의 운동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설령 안다고 해도 매우 편향되게 그 역사를 파악했다는 지적이다.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2004)가 그동안 억눌려져 왔던 사상의 단면을 드러낸 것은 맞지만, 그 역시 빙산의 일각일 뿐 빙산을 드러내는 작업은 훨씬 더 많은 역사적인 추적과 분석을 요구한다. 이호룡은 이런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외의 사상을 그 아류로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사상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식민지 시기 한국의 민중에게는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던 사회진화론을 극복할 사상체계가 필요했고, 이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사회주의와아나키즘이 함께 소개되었다. 그리고 대동사상이나 사회개조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를 대체할 사회의 원리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이호룡은 한국사회가 이미 1880년대부터 아나키즘을 접했고 19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호룡은 1910년대 사회주의의 주류가 아나키즘이었다고 주장한다. 1905~1920년 동안 일본, 중국에서 아나키즘운동이 활발했고 그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도 자연히 아나키즘운동이 대세였다는 해석이다.

사실 내 관심은 1919년 3월 1일 이후 한국사회의 민심(民心)과 운동이 어떻게 변화했는가이다. 닭이냐 달걀이냐, 아나키즘이냐, 사회주의냐를 떠나 어느 문헌에서건 3․1운동을 한국사회의 운동에서 핵심적인 변화의 지점으로 지적하기 때문이다. 3․1운동으로 드러난 민중의 폭발적인 힘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론이 아니라 경험으로 학습하게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 힘에 주목하며 의식화, 조직화의 길로 나서게 된다. 아마도 아나키즘이 그 과정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민중의 힘에 주목했던 사상이자 우리 몸에 익은 상호부조의 전통을 반제국주의 사상과 잘 결합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호룡은 책에서 “‘문화정치’가 시행됨에 따라 언론․출판․집회․결사․사상 등의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자유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한국인에게도 주어졌고, 그 합법공간을 이용하여 아나키즘 선전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조금 더 깊은 고민을 요구하는 듯하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사건은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의 창설이다. 이호룡은 조선노동공제회의 주축이 아나키즘 세력이었다고 얘기한다. 이는 사회주의운동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 그가 책에서 인용하듯이, 공제회의 기관지인 《공제》에 아나키즘 관련 글이 올라온 것도 사실이고, 보통 사회주의 계열로 분리되는 서울청년회의 김명식 등이 아나키즘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노동공제회의 구체적인 활동 상황을 추적하는 것 또한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을 듯하다.

어쨌거나 이호룡은 일제 강점기에 아나키즘이 주된 사회운동의 흐름으로서 존재했음을 선언한다.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겨누며 아나키즘은 한국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이호룡은 얘기한다. “한국 사상계는 다양성을 상실하고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극단적인 좌우 대립으로 치달았다. 좌우 대립을 완충시킬 수 있는 제3의 사상의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민족의 사상적 통합에 많은 문제점이 초래되었다.” 민족의 사상적 통합에 많은 문제점이 초래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사상적 좌표가 상상력 없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아나키즘은 새로운 상상력을 줄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역사의 과정을 밟았다면 어땠을까라는 공상보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라는 상상에서 아나키즘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누구와 함께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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