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불안』(에이지21, 2009)이라는 책의 제목은 참 기이하다. 모두가 불안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하는 시대에 저자인 폴 호켄Paul Hawken은 불안과 축복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축복받은 불안』은 궁금증을 자극한다.

그런데 책의 원제를 보면 저자의 의도가 약간 드러난다. 보통 ‘blessed ignorance’라는 표현을 ‘모르는 것이 약’으로 번역하듯이, 원제목인 ‘blessed unrest’는 ‘불안한 것이 약’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호켄은 지구 생태계가 위기에 처하고 인류의 삶의 불안해지는 만큼 그 위기와 불안을 바로잡으려는 다양한 운동들이 자연스레 활성화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보지 않거나 믿지 못하고 불안에 사로잡혀 현실에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불안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메시지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지구를 살리는 아래로부터의 면역운동

 

불안에 찌든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듯 호켄은 생태계 파괴에 맞섰던 브라우어와 카슨,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했던 파크스와 소로, 고유한 문화를 지키려던 부족민과 이름 없는 사람들에 관해 얘기한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운동들, 예를 들어 환경파괴기업을 감시하는 ‘파수꾼 단체Keeper group’, 기업과 프로젝트, 제도, 지역을 감시하는 ‘감시 단체Watch group’, 현장에서 직접 환경을 보호하는 ‘친구단체Friends organization’,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방어꾼 단체Defenders’, 기업광고나 홍보기업의 숨은 진실을 폭로하는 ‘문화방해자Culture jammers’, 슬로우 푸드운동, 사회적 기업 등 수많은 운동들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설명하는데 많은 분량을 사용한다. 세상이 위기에 처하는 만큼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운동들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호켄은 이런 운동들이 몸에 침입한 병균을 치료하고 몸을 회복시키는 면역체계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병에 걸리면 몸이 알아서 치료를 시작하듯이, 이런 다양한 운동들은 정치적인 부패나 경제적 질병, 생태계 파괴와 같은 지구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인간의 몸이 하나이나 팔과 다리, 가슴 등의 역할이 다르듯이, 이 운동 또한 각자가 관심을 두는 중점적인 의제에 따라 지구상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그러면서도 이런 운동들은 서로 네트워크로 접속되어 불공정이나 부조리에 맞서는 힘을 더욱 늘리고 있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초국적 기업에 맞설 만큼 때로는 그 힘이 강력해지기도 한다.

과거의 경직된 운동과 달리 이런 운동들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시민들의 필요와 지식에 의존해 삶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려는 흐름,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흐름, 아래로부터 민주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흐름을 존중하고 그 흐름에 힘을 더하고 있다. 호켄은 이 운동이 “지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모든 인간에 대한 공평함의 필요성”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바람직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형태가 제각각이지만 호켄은 이 운동들이 환경보호, 사회정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토착문화라는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로 얽혀있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환경보호운동은 지구를 죽이는 병적인 정책에 대한 인류의 면역반응으로, 사회정의운동은 가족과 문화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경제적/법적 병원균에 대한 면역반응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고유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만 자연과 사람이 함께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기에 토착문화는 이런 다양한 운동들이 서로 결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호켄은 이런 세 가지 큰 흐름이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주도하는 힘이라고 본다.

운동의 형태가 작고 다양하기 때문에 큰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다. 호켄은 그런 회의적인 평가가 일면 타당하기도 하지만 이런 운동이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고 사람들이 운동에 깔린 다양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미 수많은 운동이 실제로 활성화되고 있고 그러면서 운동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지 소로스나 빌 게이츠, 고든 무어, 클린턴 같은 강자들도 기부금을 내거나 재단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이렇게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면역체계가 강해져서 지구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호켄이 책 뒤에 붙인 부록은 이런 가능성이 단지 공상일 수 없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다.

다만 호켄은 “면역반응이 현재는 아주 많이 불완전해서 많은 실패를 거듭할 것”이고 “어떻게 함께 작용해야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인정한다. 인간의 면역체계가 질병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듯이, 이 운동도 분명 실패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호켄은 이런 운동이 성공하려면 ‘자아인식능력’, 즉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함께 모여 행동해야만 인류는 불안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행동, 소비행태를 바꾸는 과정에서만 자치와 시민의 힘은 치료되고 복원될 수 있다.

 

 

대안은 무수히 많다!

 

인류가 당면한 여러 가지 위기들을 두려워만 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로 나서자고 주장하는 점에서 호켄의 얘기는 충분히 귀담아 들음직 하다. 사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호켄만이 아니다. 가령 에이프릴 카터April Carter는 『직접행동』(교양인, 2007)에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사회운동을 소개하며 새로운 민주주의의 등장에 주목한다. 호켄이 아래로부터 다양한 운동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핀다면, 카터는 지구화라는 현상과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이 어떻게 직접행동이라는 개념 속에서 만날 수 있을지를 다룬다.

그리고 리처드 스위프트Richard Swift는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이후, 2007)에서 권력의 중앙집중화로 무기력해진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심각해진 사회적 양극화를 해결한 방법이 바로 ‘강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생태민주주의가 개인의 욕망과 권력을 극대화하려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단초가 될 것이고 남반구 전역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민중의 노력이 강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을 것이라고 스위프트는 기대한다.

각기 다른 개념에 주목하지만 호켄과 카터, 스위프트 모두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불안을 벗어나려는 풀뿌리 민중의 자발적인 투쟁과 그들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지구의 파괴를 막고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리라 기대한다. 허울 뿐인 세계화나 무분별한 개발과 발전에 매달렸던 헛된 꿈보다 지역의 고유성에 바탕을 둔 자치와 자급의 삶이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대안의 부재보다는 대안에 대한 냉소나 무관심이 우리의 삶을 더욱더 위태롭게 한다.

 

 

여전히 이념은 필요하다!

 

그런데 호켄과 카터, 스위프트는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해 조금씩 다른 입장을 보인다. 카터가 자유민주주의를 보완하려 하고 스위프트가 자유민주주의를 강한 민주주의로 대체하려 한다면, 호켄은 그 질서에 강하게 도전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켄은 운동의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유주의의 토대를 다진 하이에크의 사상을 공진화coevolve의 관점에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현실에서 더욱더 분명해지고 있듯이, 부조리하고 왜곡된 정치/경제 질서를 그대로 둔 채 다양성만 강조하는 건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최상은 아니기 때문에, 자아인식능력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사회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분석할 때 성장할 수 있다. 좋은 활동들의 리스트가 자동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피하려 하기에 호켄은 세계화가 작은 문화를 사라지게 할 수 있지만 그만큼 다양성을 장려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가령 환경보호론자와 토착민이 정치적인 동맹관계를 맺어 “환경보호단체는 정치적 캠페인 조직경험이나 정부 및 언론동원능력 등 자원을 제공하고, 원주민단체는 조상들이 살아온 땅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라는 명분을 제공한다”면 환상의 콤비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분명 이런 국제적인 역할분업이 분명 초국적기업의 나쁜 영향을 가로막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이런 분업은 그런 현상이 벌어지게끔 한 세계의 불평등한 지배구조 자체를 바로잡지는 못한다. 즉 지금 당장은 병에서 회복될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평생의 건강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축복은 아직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고 불안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 풀뿌리 민중의 투쟁이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고 힘을 모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국가권력과 초국적 자본의 힘을 없애고 생명의 힘으로 삶의 터전을 다시 구성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가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듯하다. 가속화되고 있는 파괴의 흐름을, 생명의 터전을 파괴하는 삽질을 막으려면, 적절한 시간에 저항의 힘이 살아나야 한다. 호켄은 생태학적 복원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를 치워주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과정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미 사라진 언어를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듯이, 한번 파괴된 생태계는 쉽게 복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인간의 면역체계처럼 유기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기에 여전히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있는 이념을, 전일적인 관점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사회운동이 이데올로기에 집착해 다양성과 활력을 상실한 건 사실이지만 역사를 거치며 누적되어온 그 희망은 여전히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오래된 희망에 새로운 기를 불어넣고 살리는 건 단순히 낡은 틀을 부여잡는 것만으로 되지 않고 근본적인 혁신을 요구한다(한국의 경우도 맑스주의가 풍미했던80년대 이전의 다양하고 풍부했던 지적 전통과 다양한 운동들을 다시 평가하고 되살려야 한다).

물론 호켄이 이 점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호켄 스스로도 웬델 베리의 말을 인용하며 여러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패턴을 위한 해결책solving for pattern’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시대는 축복의 길잡이가 될 좌표를 요구한다. 그래서 이념의 시대는 아직 가지 않았고 가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지행네트워크의 첫 책이 나왔다.
다른 삶을 꿈꾸며 이명원, 오창은씨랑 함께 공간을 만든지 벌써 2년이 지나갔다.
그 2년의 세월 동안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토론을 하며 나눴던 고민들이 이 책에 담겼다.
출판사의 책소개가 조금 거창해서 부담을 느끼고, 책 앞 오창은씨의 지행 소개가 조금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가 그런 꿈을 꿨다는 생각도 든다.

책의 제목은 2007년 겨울에 진행했던 청년특강의 제목 '아닙니다,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을 땄다. 원제는 너무 길어 책에 들어가기 힘들어서리...^^;;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님이 '강렬한' 추천사를 써 주셨다. 보통 추천사는 책의 내용이나 필자들에 관한 얘기를 하기 마련인데, 김종철 선생님은 이명박 정부와 한국의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을 추천사에 담아주셨다. 정작 지행 얘기는 맨 마지막 문단 뿐이라는..ㅎㅎ
http://jihaeng.net/home/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453

맨 마지막 에필로그는 내가 썼다.
'지식협동조합을 제안한다'는 글인데, 아직 분명하게 구상이 잡히진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그것을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제안 형태의 글을 써봤다.
지행의 앞날도 지식협동조합이라는 것을 구체화시키는 형태로 잡힐 듯하다.

어쨌거나 다소 두꺼운 책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고 그만큼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김남곡 지음, 『진보를 연찬하다』(초록호미, 2009년)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직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지만 우연히 선생님 책을 접하고 한편으로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었기에 그 고마움을 전할 겸 무작정 글을 씁니다.

요즘 들어 대체 진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한때 진보적인 민족작가라 불렸던 황석영 씨가 이명박 대통령을 따라다니고, 자신을 진보적이라 주장하던 사람들이 생전 그렇게 비판하던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를 미화하거나 정치적 기회로 삼고. 그런 모습을 보며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대체 무엇인지, 그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걸 유연함이라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원칙을 버린 변절이라 비판해야 할지, 그런 혼돈 속에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혼란이 꼭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거의 만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소위 진보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눌 때 간혹 당혹스러움을 감축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자기가 진보적이라 믿는 걸까, 그리고 최소한 자신이 말한 바는 지키며 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진보적이라 불리는 정치세력들이 보이는 그 강한 배타성과 고통의 불가능,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써도 좋다는 생각들. 그런 것들은 언제나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당혹스러움과 혼란에 빠져있던 터라 선생님의 책이 반갑고 고마웠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답답함을 많이 풀 수 있었습니다. 책의 제목인 연찬(硏鑽)이란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서로 맞서려는 방식의 토론이나 다수결에 의한 결정방식이 아니라, 단정(斷定)하지 않고 끝까지 진리를 함께 규명해가는 방식”인 연찬은 “누가 옳은가를 서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같은 방향으로 서서 무엇이 진리인가를 함께 물어가고 끝까지 규명해가는” 것이라 하셨지요. 나는 선이고 반대편은 악이기에 서로 말을 섞을 필요가 없고 그렇게 섞지 않는 게 올바른 태도라는 생각은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소통을 가로막아 왔습니다. 진보라 불리던 사람들도 맑스나 엥겔스같은 사람들의 ‘원전’에 맞춰서 모든 걸 판단하려 들었지 소통의 자세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연찬은 진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연찬방식이야말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말에 공감하고 또 공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보 역시 “특정한 사상이나 실천을 고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굳어져서 완고한 것은 진보가 아니다. 진리를 향해 고정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라는 말씀도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틀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하셨지요.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면 보수, 시장을 규제하는 국가의 역할을 진보라 부르던 낡은 틀에서 벗어나 “인간의 궁극적 진화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사회와 인간 그 자체의 변화에 대해 낙관적이며 그것을 위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부단히 혁신하려는 ‘열린 사고’의 실천을 ‘진보’라고 부르고 싶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감했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여러 가지 글을 모은 책이라 하지만 글 전체에 그런 연찬의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질과 의식, 제도와 자아,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두루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 “물질적 생산력과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 그리고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혁명이 서로 보완․조화되는 새로운 진보의 지평”을 열려는 치열한 고민이 앞서 가는 선배님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런 진보의 방향과 더불어 선생님은 진보적인 제도와 의식을 실천할 방법도 알려주셨지요. 선생님이 진보의 방법을 크게 세 가지로 알려주셨지요. 첫째는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침범하지 않도록 그 경계를 자유롭고 평등하게 정하는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 둘째는 자연과 조화되는 생산력을 발전시켜 물자를 넉넉히 해서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발전시키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셋째는 의식을 혁명해서 다른 사람을 침범하는 행동의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기중심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정리하자면 제도, 물질, 의식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변화가 필요하고 선생님은 세 번째 의식이 가장 중요한 진보의 조건이라 지적하셨습니다. 더불어 분노와 증오보다 사랑과 협동을 통해 점점 더 삶의 범위를 넓혀가는 변화가 진보라는 지적은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진보의 방향과 방법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건 보수만이 아니라 분명 진보에게도 문제가 있을 겁니다. 선생님은 그 문제를 “자유로운 개성의 신장을 바탕으로 한 평등사회로서 주로 연대․공존․상생의 상호작용이 내용으로 되는” 횡적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소유의식과 차별의식에 바탕을 둔 종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점에서 찾으시더군요. 이런 종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협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을 전개하는 사람들도 동료들을 배반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우리 사회의 운동가들이 뼈저리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로 진실한 인간, 진실한 사회를 원한다면 자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지적 또한 가슴에 깊이 새겼습니다.

특히 저는 그런 횡적인 삶의 방법으로 공동의 ‘마을지갑’을 만들자는 말씀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마을의 가족들이 일해서 얻은 것 중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을 제하고 자유의사에 따라 남는 이익을 마을지갑에 넣어 모은다는 생각은 참 좋았습니다. 야마기시회의 공동체원리와 비슷하지만 우리 전통과 맞닿아 있는 듯해서 좋았습니다. 선생님은 이렇듯 연찬과 다양한 접합으로 우리가 걸어갈 길을 더 분명하고 풍부하게 보여주셨지요.

그런데 선생님의 연찬이 중도(中道)를 향하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나름의 삶을 통해서 진리 그 자체도 ‘중도’(中道)요, 진리에 이르는 길도 ‘중도’라고 생각하고”,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도, 한 사람의 관념계의 변화도 바로 이 ‘중도’를 발견하고 실현해가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뉴라이트나 뉴레프트가 “인간에 대한 본질적 성찰과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움”을 갖춘다면 서로의 공통분모를 키워 좌와 우가 제대로 자기 역할을 맡을 기반을 만들 것이라 기대하셨지요. 그러면서 이런 “새로운 진보와 보수의 연대, 인간화의 길과 선진화의 길의 연대, 세계화의 길과 지방화의 길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명박 정부 하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하기에 의식적으로 선진화와 인간화를 합쳐 중도를 찾으려 하신 듯합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선진화’가 민주주의 제도와 물질적 조건을 더욱 개선하는데 강조점을 둔다 하더라도, 성숙한 시민의식, 즉 ‘상생 협력’의 의식을 결코 경시할 수 없고 경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또 ‘인간화’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시정하고 ‘인간의 향기’가 느껴지는 삶과 의식에 그 강조점을 둔다 해도 민주주의 제도와 물질적 조건들을 결코 경시하거나 배척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진보나 보수가 각각 최선의 길이라고 여기는 ‘인간화’와 ‘선진화’의 길이 사실은 크게 다른 길이 아니라는 공동의 자각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이 선진화와 인간화가 서로 배치되거나 대립하는 목표가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침투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필요한 때이다. 이렇게 될 때 상생과 협력의 대통합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보수는 지속가능한 번영을, 진보는 실현가능한 새로운 문명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 숨은 선생님의 속뜻을 헤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생각이 단순히 좌와 우를 뭉뚱거리자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압니다. 아마 남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를 강요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쪽으로 다가서는 것을 ‘신뢰’라고 여기시기에, 신뢰 없는 우리 사회에 신뢰와 희망을 만들기 위해 먼저 몸을 낮추신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세상의 변화란 게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믿기에 그렇게 주장하신 거라 믿습니다. 인류가 문명의 길을 걷고 있다면 자본주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선진화도 인간화와 만날 수 있다고 믿으시는 거겠죠.

선생님의 진심을 의심하거나 무시하진 않지만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자본주의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끊고 인간을 생명없는 기계로 만드는 ‘악마의 맷돌’이라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증명해온 바입니다. 자본주의의 생산력이란 것이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자본주의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살리는 ‘좋은 생산’이나 협동의 경제가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흉내를 내고 협동을 이용할 수 있을 지언정 그 정신을 자본주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요.

물론 연찬은 옳고 그름을 미리 정하지 말고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물어가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파괴하는 참됨, 사람을 죽이는 참됨이 가능하지 않듯이 그 연찬에도 어떤 ‘결의’가 필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떤 듯을 품는가에 따라 묻고 답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얼마 전 생명평화탁발순례단과 함께 오체투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고작 하루를 지내고 그에 관해 얘기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지만, 오체투지를 하며 진정 우리가 소통해야 할 대상은 보수가 아니라 바로 생명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싫어하던 아스팔트조차도 이마를 대고 있으니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느껴지더군요. 아스팔트에 누우니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가슴이 뭉클했던 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렇게 지구를 안아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지구의 숨통을 틀어막고 살을 파내어도 당신은 이렇게 모진 우리를 떠받치고 있구나,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껴안고 평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생명, 지구와 함께 연찬의 장을 펼쳐야 하겠지요.

그리고 저는 좋은 생산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자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진화 담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구조를 강화시킬 뿐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함께 누리는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급할 수 있어야 자치할 수 있는데, 선진화는 그런 자급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대외의존도는 97년 IMF 외환위기 전에 약 50% 정도였는데, 지금은 70%를 넘나든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세계화의 바람이 불수록 의존도는 심해지고, 한미FTA가 실현되면 그런 흐름은 걷잡을 수 없겠지요. 그러니 선진화와 인간화가 손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진보가 더욱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상황은 그런 당위가 빛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보수는 이념적인 보수가 아니라 기득권층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보수가 선생님의 말처럼 단지 시장의 자율성을 보장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일까요? 재벌들에게 특혜를 주고 그들이 온갖 죄를 저질러도 사면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국가를 동원해서 자기 이익을 취할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더구나 보수라면 적어도 자기 전통과 자주성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져야 할 텐데, 이 땅의 보수에게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미국식 합리성(요즘은 글로벌 스탠다드)을 따르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미국과 하나 되는 걸 더없는 영광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이 땅의 아이들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목숨을 잃어도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무슨 보수입니까? 제가 보기엔 그들은 보수가 아니라 기득권층입니다. 오랜 시절 자신들이 누려왔던 특권을 단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더 많은 특권을 가지려 그들은 사회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화물연대> 故박종태 씨가 요구했던 건 건당 920원하는 배달수수료를 30만원, 3만원도 아니고 단지 30원 인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용산 철거민들이 요구했던 건 수 억원의 보상금이 아니라 다른 곳에 둥지를 틀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건 극단적인 내몰림이었고, 그 결과 어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떤 이는 망루에 올랐다 공권력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야만을 그대로 둔 채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런 기득권층을 내버려두고 진보만 변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물론 선생님의 말처럼 분노와 증오만으론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가 동일한 차원에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 십년 살아온 삶의 터전을 하루 아침에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 망루에 올라간 부모가 까맣게 탄 시체로 돌아오는 걸 보는 사람들, 아침에 깨워서 보낸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 아들이 분노와 증오를 품는 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는 생명을 그 파괴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라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구조화된 폭력이 존재합니다.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구조의 문제가 있고 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분노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구조와 그것을 무조건 지키려는 기득권층에 더욱더 분노하는 게 오히려 문명의 역사를 여는 길이 아닐까요?

선생님은 뉴라이트나 뉴레프트가 그런 극단을 바로 잡아 중도의 길을 열어 가리라 기대하시지만 그건 그냥 희망사항일 듯합니다. 아시겠지만 뉴라이트라 자처하는 자들 역시 분명한 자기 이념 없이 기득권층에 빌붙어 떡고물이나 주워 먹으려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원로들이 조화나 협력처럼 누구나 좋아할만한 단어가 아니라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그 극단에 서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사람들이 더욱더 분노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현실’을 내세운 알리바이를 깰 수 있지 않을까. 청년들이 한다면 욕을 먹을 말들을 원로들이 해야 하지 않을까. 중도를 얘기하며 정도(正道)를 걷는 분도 있어야 하겠지만 극단을 고집하며 사도(邪道)를 걷는 분도 있어야 새로운 대안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아쉬움이 들 때가 많습니다.

다행히 조세희 선생님같은 분이 계셔서 아쉬움을 달래곤 합니다. 2005년 농민대회가 열리던 날에도, 2009년 용산참사가 벌어졌던 현장에도 선생님은 달려와 우리 사회의 야만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증언이 있기에 우리는 그 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단단하게 제 길을 걸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부대껴야 우리 시대의 진정한 연찬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남주 선생님이 자신의 시에서 노래했듯이 사상은 “썩고 병들어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는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는 그런 세상”에서 태어나고, 그렇기에 사상의 머물 곳은 “한두 놈이 얼굴 빛내며 밝히는 상아탑의 서재”나 “한두 놈이 머리 자랑하며 먹물로 그리는 현학의 미로”도 아니고 “노동의 대지이고 거리와 광장의 인파 속이고 지상의 별처럼 빛나는 반딧불의 풀밭”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진보는 보수가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 자기 자리를 마련할 때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힘을 얻게 됩니다. 진보가 배워야 할 것은 보수의 싱크탱크나 여론몰이 전략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의 마음에 깃든 ‘진심(眞心)’이라 생각합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꿈을 잃어버립니다. 저는 꿈꾸는 자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아마 선생님과 저도 서로 연찬할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논하며 맺었던 말을 그대로 남깁니다. “이상 두서없이 선생님의 글을 함께 읽으면서 느꼈던 소회를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선생님의 뜻을 오해했거나 왜곡한 부분이 있다면 저의 부족함 탓이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고, 더욱 건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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