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본의 선거로 자민당은 소위 '55년 체제'(1955년부터 시작된 자민당과 사회당의 양당체제)의 끝을 보게 되었다(1993년 오자와가 자기 계파 의원들을 이끌고 자민당을 탈당하면서 삐그덕거리긴 했지만). 그러니 약 49년의 장기집권체제가 무너진 셈이다.
다소 삐그덕거리긴 했지만 일본 특유의 연합으로 권력을 유지할 줄 알았건만 일본 사회 내에서도 변화의 물결이 불고 있는 셈이다.
오바마의 당선 이후 이어지는 변화의 물결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오바마나 민주당을 혁신세력이라 부를 수 없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다른 인물이긴 하지만 그 인물들이 표방하고 있는 미래가 우리 세계의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오랜 권력독점의 역사가 끝났다는 점에서 이 변화는 주목을 받을 만하다.

특히 내가 재미있어 하는 점은 풀뿌리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늘상 미국과 일본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미국정치와 일본정치의 보수성을 얘기하며 풀뿌리운동이 전국정치를 바꾸지 못하는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고 얘기했던 사람들, 지역사회의 변화가 사회 전체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며 그 한계를 논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떤 새로운 논리를 개발할지 사뭇 궁금하다.
물론 오바마나 민주당의 승리를 풀뿌리의 힘으로만 해석하는 건 분명 억지이다.
변화에 대한 열망이나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분명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변화와 소통을 꿈꾸는가, 기성정치에 환멸을 느껴 투표하지 않지만 자신의 정책에 공감해 투표할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그것은 아래로부터 조직된 풀뿌리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아래가 보수화되어 있다면 아무리 변화를 외치고 소통을 해도 그것이 선거에서의 지지로 드러나지는 않을 터이니...
그러니 밑바닥을 흐르는 변화의 기운은 분명 풀뿌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가 한국의 풀뿌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일단 정치를 무거운 과제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인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래로부터 꾸준히 밀고 나가는 힘이 있어야 어느 시점에서 그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정치적인 중립성'이라는 신화가 풀뿌리단체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그 중립성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물론 중립성의 틀을 벗어던지는 것이 특정 정당에 대한 선거지지로 곧바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정당들이 풀뿌리단체들이 조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전 세계 어느 정당에나 계파는 있지만 계파끼리의 소통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서로를 증오하는 문화는 우리 사회의 누적된 업보이니 그런 문화를 변화시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내가 아니면 절대로 안 된다는 식의 논의, 나는 참이요 진리며 다른 의견은 위선이고 악이다라는 식의 논의도 사라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런 변화된 모습을 갖추기 전까지 풀뿌리운동의 활동이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그러니 정당에 대한 지지보다는 정책에 대한 지지를 드러내고, 어느 쪽이 풀뿌리운동의 활동에 도움을 줄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선거연합은 후보자 나누기가 아니라 그런 정책의 공유를 통해서, 그리고 그런 정책을 실현하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당의 역할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 풀뿌리운동은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데, 그런 변화의 과정에서 권력의 형태도 함께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과 정책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한다. 좀 지겹고 신물이 나고 별로 희망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많은 얘기를 나누고 투표나 선거에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
단 선거나 투표만이 희망인 듯 얘기하지 말고 그런 정치행위를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자 하는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담긴 진정한 희망을 끌어내야 하고 그 희망을 정책화시키도록 해야 한다.
풀뿌리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며 정치를 논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풀뿌리운동이 지원해야 한다.

시흥시장보궐선거, 제주도 주민소환투표에서 드러나듯이 풀뿌리 사람들의 자신감은 아직까지 10% 근처를 헤매고 있다. 권력의 분명한 잘못이 드러나고 충분히 그것을 심판할 수 있을 때도 사람들은 변화를 선택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사람들의 마음은 변화와 대안을 추진할만큼 자신감을 품지 않고 있다.
현실의 정치는 진공상태가 아니어서 무수한 관계와 많은 일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참여를 수없이 강조해도 그것이 곧바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관심이 직접적인 정치행동으로 이어지도록 중간에 많은 징검다리를 놓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돌다리 하나만 두드려보고 돌아서지 않도록, 자신감을 가지도록 손을 잡아주고 등을 두들겨주고 어깨도 걸어보며 함께 가야 한다.
그런 자신감을 불어넣는 방법은 여러가지일 것이다. 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는 인문학도 그런 방법의 하나이고, 마쓰모토 하지메처럼 지역사회에서 구체적인 변화를 목적으로 삼는 행동계획(action-plan)도 중요하다고 본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감의 원천도 필요하지만 나는 눈에 보이는 자신감도 필요하다고 본다. 국가나 시장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풀뿌리가 자립할 수 있다면 자신감은 더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풀뿌리운동이 서로 나누고 보살피는 '공유의 공간'을 확장시켜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이 개별적인 이해관계로 부서지지 않도록, 공동체의 이해관계(이를 공공성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를 이해하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참여하라고 목 아프게 외치지 않아도 사람들은 참여할 것이다( 나는 참여예산제의 활성화도 어느 정도 그런 부분에 있다고 믿는다).
풀뿌리운동의 애매함은 공동체에 기반한 운동이 이미 공동체가 와해된 곳에서 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점에 있을 수 있는데, 다시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은 사람간의 관계를 잇는 것만이 아니라 그 관계를 물질화시키고 규범과 제도로 만들 터전이 필요하다.
한때 위에서 내리꽂는 방식으로 'NGO센터'나 '도서관' 등이 논의되기도 했는데,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방식의 공유영역 확장 운동이 중요하다.
이런 영역이 확장되는 만큼 나는 사람들의 자신감도 더욱더 강해지리라 믿는다. 실제로 운영해보고 만들어보고 토론하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강해지고 희망을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내리라 믿는다.

다 쓰고 보니 일본의 선거와 그리 관계가 없는 듯하기도 하지만...^^;;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부활되고 난 뒤 주민자치의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어 왔다. 하지만 풀뿌리민주주의보다 풀뿌리보수주의라는 말이 신문지상을 더 많이 장식하고 있듯이, 한국의 주민자치는 여전히 혼탁한 시궁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슷한 축제나 랜드마크가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마다 넘쳐나고 건설비리에서부터 인사청탁까지 온갖 부조리들이 넘쳐나다 보니, 관변단체와 각종 이익단체들이 지역의 발전전략을 좌우하다보니, 주민자치를 얘기하면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냉소이다.

그리고 주인공이어야 할 주민들이 정작 자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당장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세상에, 수도권으로 모든 게 집중되어 자체 역량도 없는 상황에서 무슨 자치냐는 볼멘 목소리가 한국 주민자치의 현주소이다. 오히려 자치보다는 중앙의 개발전략에 밥 숟갈 하나라도 얹으려는 욕망이 한국의 지역사회를 장악하고 있다. 주민자치는 무관심이 아니라 이익에 대한 뜨거운 갈망에 휘둘리고 있다.

하지만 점점 변화하는 생태계 변화가 증명해주고 있듯이 지금 이대로라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살아남아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주민자치


이제 더 이상 주민자치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그동안 우리가 민주주의를 추상적인 개념, 원론적인 이념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되돌이표를 찍고 있다. 왜 주민자치가 중요한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위기와 공포에서 구출해 땅에 뿌리내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를 조금 더 근본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아도 정치인들이 알아서 나라를 이끌고 기업인들이 알아서 경제를 발전시키리라 기대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국민의 건강과는 무관하게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고 기업이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일감을 외주용역에 맡기는 이 시대에 그런 기대는 엄청난 착각일 뿐이다. 더 이상 국가는 우리 삶을 보호하지 못하고 기업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남이 알아서 우리 삶을 관리해주던 시기는 이제 지나갔다.

더구나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식량위기, 에너지위기가 우리 사회를 덮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태계 파괴로 쌀과 밀, 콩, 옥수수같은 곡물수입이 중단되거나 줄어든다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까? 전기가 끊기고 교통이 중단되고 슈퍼와 할인마트의 진열대가 텅텅 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식량위기와 에너지위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찾아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고 그런 위기가 한 국가를 넘어 지구 전체를 덮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삶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지금부터라도 자치와 자급의 기반을 닦아나가야 한다. ‘거버넌스(governance)’나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가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는 건 이런 세상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사람의 살림살이가 둘로 나뉘지 않듯이 정치와 경제는 삶의 두 단면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주민자치는 여러 가지 선택사항 중의 하나가 아니라 가장 필수적인 사항 중 하나이다. 직접 참여하고 토론하며 함께 지역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면서 위기에 대처하고 대안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나의 행복, 우리의 행복, 미래세대의 행복은 능동적인 주민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삶은 가능하다


보통 우리는 대안을 고민할 때 큰 그림을 그리는데 익숙하다. 작은 마을보다 국가나 세계적인 차원을 고민하지 않으면 왠지 쪼잔해 보인다. 그러나 이제 그런 쪼잔함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그런 쪼잔한 흐름들이 서서히 대안으로 힘을 기르고 있다. 다만 그런 사례들은 중앙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모를 뿐이다.

동네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철암과 부산 반송, 대전의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공간을 넘어 지역공동체의 소통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광주, 울산, 대전의 참여예산제는 시민들이 예산이라는 전문적인 영역에서도 역할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부안에서는 유채꽃으로 바이오디젤을 만들고 햇빛발전소로 전력을 생산하는 에너지농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전북 진안은 귀농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고 있고, 소비자생활협동조합과 여러 사회적 기업들은 도시와 농촌을 잇는 대안적인 유통체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안성과 원주의 의료생활협동조합들은 지역공동체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고, 대전한밭레츠는 지역화폐를 활성화시키며 관계의 그물망을 이어가고 있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얘기해도 이미 많은 실험들이 진행 중이다.

이런 실험들을 볼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는 대안을 볼 때 그 규모를 보는데 익숙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과정과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열정이다. 도서관, 예산, 발전같은 키워드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봐야 한다. 각기 다른 사례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핵심은 있다. 그건 바로 주민들이 직접 자기 목소리를 내며 나와 타자의 구분을 넘어서 지역공동체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민자치의 핵심은 뭘까?


주민자치의 핵심은 주민들의 ‘욕구’(needs)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냥 참여하세요라고 당위적으로 설득하지 말고 참여를 통해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자기지역공동체를 이해하고 자신의 욕구를 확장시켜 우리의 욕구로 만들어야만 대안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주민들의 실천지(實踐知), 경험지(經驗知)가 지역발전모델에 반영되어야 한다. 남이 만들어주거나 남을 따라하는 모델은 그 지역의 고유함을 발전시킬 수 없다.

그리고 반드시(!) 주민들이 권한을 가져야 한다. 이미 너무 많이 속아왔기 때문에 ‘자문회’이나 ‘공청회’로는 주민들을 모을 수 없다. 참여는 권한을 가질 때에만 활성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권한은 분리된 개인의 자격이 아니라 서로 서로 관계로 이어진 사람들의 자격, 우리의 자격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속에서 소통과 토론, 성장의 기회가 마련될 수 있다.



13일 장애민중연대 현장활동단이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사실 장애운동에 잘 모르는 내가 강연을 한다는 건 상당히 부담스럽다.
그쪽이 내게 강연을 부탁한 건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실은 대학의 공공성과 관련된 글 때문인 듯하다.
어쨌거나 강연을 소개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김도현씨나 제법 친분이 있는 단체인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장애운동에 대해 공부를 좀 해야 했다.
장애운동을 공부할 때 가장 좋은 입문서는 도현씨의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인 듯하다.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장애를 바라보지 않고, 장애를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점으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설명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다양한 자료를 통해 장애문제를 입체적으로 조망해주는 이 책을 읽다 보면, 장애인을 장애우로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 여성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여성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 장애인 내부의 다양한 차이, 장애인을 시설에 가둬서는 안 되는 이유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장애운동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이다.
97년 에바다 사건 때부터 장애운동을 해온 도현씨의 내공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쨌거나 벼락치기로 공부를 해도 여전히 내용은 부실하다.
허나 앞으로 장애운동에 대해서도 공부를 좀 하라는 취지로 이해하고 대강의 강연문을 작성해 봤다.
앞부분은 사람에 쓴 글을 약간 수정했고, 뒷부분은 새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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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의 다른 기원

 

유럽의 대학들은 낭만의 공간이나 취업시장이 아니라 치열한 논쟁의 장으로 등장했습니다. 왜냐하면 대학은 당시 교단의 독단적이고 획일적인 종교해석에 도전해 학문의 자유를 외치며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학은 몇몇 뛰어난 교수가 일방적으로 학생을 지도하지 않고 교수와 학생의 ‘공동체(universitas)’를 만들려 했습니다. 초기 대학은 학생과 선생이 서로 상대방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진행했기 때문에 ‘토론 공동체’라 불렸다. 그러니 대학의 정체성은 어느 누군가가 정해줄 수 없었고, 대학을 구성하는 여러 구성원들이 함께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대학이 위치한 지역사회로 그런 교육이 확장되기도 했습니다. 학교 캠퍼스 공간은 높은 담으로 지역사회와 분리되지 않고 지역공동체 속에 자리를 잡았고, 대학생은 능동적인 지역시민이었습니다. 주민들에게 개방된 대학은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토론과 논쟁을 자극했고, 그렇기에 대학의 학풍은 지역사회의 분위기와 여론을 결정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마련된 능동적인 정치행위는 때론 국가권력과 대립하면서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이 자리를 잡은 지역사회는 혁명적인 사상의 근원지였고 때론 실제 혁명의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대학은 특정 교단이나 인물의 소유물이 아니라 지역의 공적인 공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혁명성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대학은 국가의 ‘억압’이나 자본의 ‘유혹과 조작’에 시달렸고, 대학 내부의 ‘권위주의’와 ‘부패’는 대학의 공동체성을 뒤흔들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 원래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몸부림쳤던 사건이 바로 1968년 전 세계를 뒤흔든 대학생들의 반란입니다. 미국에서는 대학생들이 베트남전과 징병을 반대하며 주방위군과 충돌했고, 대자본이나 권력과 연결된 대학 당국에 항의하기 위해 대학을 점거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대학생들은 교과과정과 교실, 그리고 대학 생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요구했다. 일본의 대학생들은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마오쩌뚱의 포스터를 정문에 내걸었습니다. 폴란드의 대학생들은 “자유 없이 학문 없다”고 외치며 군대와 충돌했습니다. 프랑스의 대학생들은 다시금 대학을 토론과 자치를 위한 코뮌으로,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유럽 대학에서 드러나는 자유로움과 연대성은 68년의 사건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지요.

그런데 한국 대학의 역사는 서구와 다른 과정을 밟아 왔습니다. 대한제국과 식민지기에 한국의 대학은 ‘서구 따라잡기’와 ‘식민지 엘리트 양성’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즉 시대정신을 밝히는 토론공동체라는 원래의 정신은 무시된 채, 형식적인 교과과정과 같은 껍데기만 이식되었던 거죠. 우리의 것은 시대에 뒤쳐진 낡은 것으로 여겨졌기에 대학교육은 외국물을 먹은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학생이 외우고 따르는 것을 뜻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은 토론과 혁명적인 사상의 근거지가 아니라 서구제국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배우는 공간이었습니다(식민지 시기 대학생들이 공부했던 사회주의 사상도 이런 이데올로기의 일종이었죠).

그래서 대학의 교육과정을 성실히 따르는 사람들은 엘리트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대학은 출세와 권력획득의 수단이 되었고, 지배이데올로기를 배우고 신분상승을 꾀하는 보수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엘리트 구조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대로 이어져 ‘동문들의 공화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수도권으로 집중된 한국사회의 자원은 서울대학과 지방대간의 격차를 늘려 학벌사회를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 뿌리를 내려온 학생운동의 역사는 이런 지배의 역사에 대항하는 운동의 흐름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공간 자체가 지배이데올로기에 포섭되거나 사유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생운동도 그런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대학이라는 공간을 비운 사이에 그곳은 더욱더 지배이데올로기를 착실히 다져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한국의 대학에서 희망을 얘기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국가의 학문정책이 한국연구재단(학술진흥재단)을 통해 지식인들의 논의방향을 규정하고 자본의 산업전략이 ‘산학협동’이라는 이름으로 대학 공간 곳곳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수들은 지배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에 바쁘고, 대학의 직원들은 외주용역노동자들과 연대는 커녕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쁩니다. 대학생들 역시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대의식을 과감히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대학의 공공성을 논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2. 대학, 니들이 공공성을 알아?

 

최근 대학들이 공공성을 회복하겠다며 시도하는 여러 사업들이 있기는 합니다. 가장 많이 얘기하는 사업은 담장허물기와 도서관의 개방입니다. 대학의 담장을 허물어 주민들이 캠퍼스를 공원이나 운동장으로 자유로이 이용하게 하고 도서관의 자료를 열람하게 하는 것은 대학공간을 지역주민들과 공유하는 좋은 방안으로 얘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업들은 생색내는 것으로 그치고, 이런 시설 개방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거의 없습니다.

담장허물기나 도서관 개방 외에도 대학들은 학생들의 졸업작품전시회나 행사, 대학 축제 등을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문학강좌를 개최하기도 합니다.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 지역주민들에게 인터넷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거나 지역의 저소득층 자녀들과 대학생들을 연계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대학생과 지역주민의 삶이 서로 연계되고 대학의 교육과정이 지역사회에 개방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런 사업들은 대학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고 대학의 공공성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것보다 일시적으로 지역주민들에게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생들을 동원하는 수준에 그치고 대학의 교육과정이나 대학운영이 지역사회와 연관성을 맺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잘라 말하자면 대학이 지역사회를 ‘위해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대학과 지역사회를 여전히 나눠서 생각한다는 점을 뜻합니다. 대학 자체의 경계나 엘리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역사회와 대학의 공공성이 자연스럽게 섞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대학이 지역주민이나 지역사회의 발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쪽은 지방자치단체와의 ‘사업’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 대학들이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영어마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의 산학협동과정이 지역의 중소기업이나 대기업과 손을 잡고 진행되기도 하고, 대학이 지역사회에 직접 투자해서 사업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대학이 이렇게 지역의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2008년 정부가 법을 개정해 사학재단이 적립금을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연세대와 이화여대 학생들은 ‘부자학교 펀드감시단’을 구성해 학교 측에 적립금 투자 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상태라면 대학과 지역사회의 결합은 긍정적인 영향보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것은 대학이 그 결합의 의미를 공공성보다 자기 살을 찌우는 사업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대학을 연대의 공간으로 만들기

 

국가나 대학이 자연스럽게 공공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대학의 공공성은 단순히 대학이 지역사회에 몇 가지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서 생기지 않습니다. 대학이 지역사회와 섞이며 소통하고 새로운 변화의 기반을 닦는 일을 담당할 때에만 대학의 공공성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학을 구성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여러 형태의 운동을 통해 공공성을 조금씩 실현해가야 합니다.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는 2001년부터 장애라는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대학을 만들자며 ‘무장애대학 만들기 운동’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비장애인들이 장애인 문제를 이해하려는 이 운동은 장애인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통해 대학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운동이고 제도적인 변화는 이런 운동의 목표를 조금씩 실현하는 듯 보입니다. 예를 들어, 2007년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이나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은 고등교육에서 입학거부만이 아니라 수업참여나 교내외 활동을 배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장애학생지원센터의 설치 및 운영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는 장애인 대학생들의 이동 편의와 학습 지원을 위해 1천 600백명의 대학생도우미를 대학에 배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도우미들은 같은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들을 선발해서 이동을 돕거나 강의 내용을 대필하는 등의 역할을 맡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4천명에 달하는 장애인 대학생의 숫자에 비하면 그 수가 부족한데도, 오히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예산안에서 중증장애인 학습을 돕는 대학생 도우미 예산을 2008년에 비해 4억원이나 삭감(26억에서 22억원)했습니다. 제도변화는 주로 지체장애인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시․청각 장애인의 어려움은 여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주로 편의시설이나 도우미같은 하드웨어나 지원에만 초점을 맞출 뿐 대학 구성원들의 인식변화를 목표로 삼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장애대학이 만들어지려면 대학을 구성하는 주체들이 차이와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대학 공간 자체를 평등한 공간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해리포터>라는 영화를 아실 겁니다. 현실 세계에서 해리 포터는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잘 집중하지 못하는 ‘이상한’ 아이입니다. 하지만 호그와트 학교에서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 ‘머글’이라 불리며 ‘덜 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사는가에 따라 똑같은 사람도 달리 평가됩니다. 사람이 가진 능력은 똑같은데, 어떤 세계에서는 그것이 ‘비정상’으로, 어떤 세계에서는 ‘탁월한 능력’으로 평가받지요.

이처럼 ‘차이’는 그냥 다르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획일적인 사회에서는 차이가 차별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장애인이 경쟁의 기준과 규칙을 짜기 때문입니다. 비장애인이 짠 경쟁게임에서 장애인이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비장애인 중심의 구조를 짜 놓고 장애인에게는 시혜의 관점을 들이댑니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몇 개를 대학 내에 마련해 놓고 도우미 몇 명을 붙여주고 그걸로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구조의 변화를 요구하면 ‘형평성’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이렇게 되면 차이는 ‘분리’를 불러오게 됩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분리되어 대학교라는 공적인 장에서도 서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장애인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어도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학창시절을 보내게 될 겁니다.

따라서 차이를 인정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전체를 보며 그 차이를 낳는 구조적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 원인을 찾지 못하면 대학은 언제나 ‘비장애인의 공간’일 수밖에 없고 장애인대학생의 수업권 이외의 더 큰 권리들을 발굴하거나 확장시킬 수 없으며, 대학이 다른 대학이나 지역사회의 장애민중들을 배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구조적 원인이 장애인만이 아니라 기존의 비장애인마저도 ‘무능한 인간’,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회의 지배적인 기준들을 바꾸지 않으면 타자와의 관계가 파괴될 뿐 아니라 결국 내 삶도 버려지게 됩니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를 ‘쓰레기가 되는 삶’(wasted life)라고 표현했습니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서로의 삶이 관계를 맺고 행복해지기는커녕 더욱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쓰레기처럼 내버려지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라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을 해체하고 승자독식의 피라미드를 더 높이 세우고 있습니다. 장애인/비장애인의 분리 외에도 학점과 영어능력 등 스펙에 따라 대학생들의 삶도 정해지고 있습니다. 승자독식의 피라미드는 경쟁을 더욱더 가속화시키고 타인에 대한 배려나 연대를 무의미한 감정으로 만듭니다. 따라서 이제는 그런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대학생들이 서로 연대해야 합니다.

대학이 차별의 공간에서 ‘차이와 연대’의 공간으로 바뀌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일단 대학의 의사결정과정에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의 결정과정이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논리적인 합리성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분노와 폭발하는 열정도 필요로 합니다. 요즘 현실공간이나 인터넷에서 자기 논리나 이익을 분명하게 밝히는 똑똑한 대학생들은 늘어나지만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대학생들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합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거짓된 경계를 부수고 우리의 이해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장애인대학생과 비장애인대학생이 서로의 현실에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이 구성될 때 민주주의는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대학의 교과과정이 바뀌어야 합니다. 공감하고 소통하려면 서로의 의사전달수단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교과과정에는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만 있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소통할 수 있도록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없습니다. 소통은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내 속의 생각은 언어만이 아니라 몸짓으로, 수화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표현을 듣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학생만이 아니라 대학의 구성원들, 교수, 직원들도 이런 소통과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마련될 때 대학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대학이 위치한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도 필요합니다. 한국처럼 교수협의회, 직원노조가 사학재단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구조에서는 학생들끼리 아무리 연대해도 그 힘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대학이 위치한 지역사회가 대학의 의사결정과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하고, 반대로 대학이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2004년에 ‘목포시건축물의허가등에있어장애인편의시설설치사항의사전점검에관한조례’가 주민발의로 통과되면서 최초의 장애인 관련 조례가 제정되었습니다. 이 조례는 신축되는 대형건물에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할 때 반드시 사전점검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조례는 지역사회의 대학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의 내부가 보수화되었다면 대학의 외부를 변화시켜 대학을 압박할 수 있고, 지역사회가 보수화되었다면 변화된 대학이 지역사회의 변화를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려면 지역사회와 대학의 경계가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지역사회는 최근 ‘사회적 경제’의 흐름과 더불어 노동권을 보장하는 공간으로도 변신하고 있습니다. 다시 우리 삶의 속도를 회복하는 운동과 장애인이 시설을 벗어나 지역사회 속으로 통합되는 운동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노동하기에 적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가르는 기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기준에 맞서고 기준에 저항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함께 연대해야 합니다.

 

 

4. 눈을 가린 정의에서 눈을 뜬 연대로

 

정의의 여신 아스트레이아는 두 눈을 가리고 한 손엔 저울을, 다른 손엔 칼을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 눈을 가리고 공평하게 판단해서 잘못을 없애는 것을 정의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정의는 두 눈을 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을 지켜볼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쪽 입장, 저쪽 입장을 골고루 반영해서 결정하는 게 정의가 아니라 자기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가 듣고 판단을 내릴 때 정의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가린 정의’보다 ‘눈을 뜬 연대’를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을 위해, 우리를 위해 연대해야 합니다. 승자독식의 피라미드를 아무리 올라가도 그 끝은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끝은 이미 소수의 정해진 사람들이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규칙을 짜는 사람들과 싸우지 않으면 남에게 짓밟혀 쓰러지거나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을 짓밟아야 하는 고통에 시달려야 합니다. 누구도 그런 걸 원하지 않지만 우리가 규칙을 짤 수 없기에 친구들과 싸워야 합니다. 타자의 고통과 슬픔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같은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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