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 쓴 서평이다.  

거의 수정되지 않고 올라갔고 맨 뒤의 문단만 짤렸다.
악의적으로 쓴 부분은 아니고 좀 걱정되어서 쓴 글인데 오해가 있었을라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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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에 대한 평이 아니라 그 강연을 풀이한 최장집 교수의 책에 관한 서평이다. 최장집 교수가 베버를 해석하는 방식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이 글은 베버보다 최장집 교수에게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아렌트나 하버마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베버의 이론이나 합리성 개념의 문제점과 한계를 이미 지적한 바 있고, 권력과 폭력을 구분하지 않는 정치관이 현실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왔으니 굳이 베버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궁금한 건 한국정치의 미래를 논하면서 최장집 교수가 베버를 끌어들인 이유이다. 최장집 교수가 최근 한국사회에 베버라는 유령을 부활시킨 첫 번째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 현실에서 좀 더 시급하게 읽혔으면 하는 정치철학자”로 막스 베버를 꼽은 이유는 매우 궁금하다. 최장집 교수가 다른 사상가들을 빼고 굳이 베버를 먼저 얘기하는 건 그에게 기댈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이 따지고 싶은 건 베버의 이론 자체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베버를 논의하는 ‘맥락’과 최장집 교수의 ‘판단’이다.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최장집 교수가 주장하는 내용은 사뭇 상식적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좋은 정치인’이 필요 없다고 얘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부정적인 사람들조차도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얘기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오독(誤讀)’이다. 최장집 교수가 단지 좋은 직업정치인 몇 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라는 사람의 문제를 다루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치시스템의 문제를 얘기한다. 좋은 정치인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들을 제안하고 발전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책의 중심주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당의 동원기구(머신)와 의회정치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이런 오독을 온전히 독자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은 최장집 교수가 “새로운 직업 정치가들이…직업 정치인으로서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와 관련해 더없이 중요하다”는 식의 얘기를 계속 흘리기 때문이다. 소명의식을 가진 정치인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듯하지만 그 정치인의 범주는 정당머신을 가진 정당정치인이다. 정치인의 범주를 매우 좁게 보면서도 그냥 정치인이라 얘기하니 착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와 정치인의 필요성도 같은 차원에서 다뤄 오해를 낳는다.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더디다’와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을까? 물론 민주주의 하에서도 좋은 정치인은 필요하다. 하지만 좋은 정치인들이 시민을 대신하는 정치체제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최장집 교수는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관료화된 강력한 국가가 그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3자 관계의 구조를 갖기 때문”에 차이점을 가지지만 고대의 민주주의와 현대의 민주주의가 “지도자-대중의 관계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허나 민주주의는 지배양식이 아니라 민중이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형태이다. 말의 뜻 그대로 민중이 지배권을 가져야 민주주의라 불릴 수 있다. 제 아무리 좋은 정치결과를 낳더라도 민중이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군주정이나 귀족정이라 불려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와 구분되는 건 민중이 정치인을 선택하는 만큼 그를 몰아낼 수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시민들이 탁월한 정치지도자를 쫓아낼 수도 있고 전쟁에 이긴 개선장군을 처형할 수도 있는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있는 정치체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정치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좋은 정부형태라 불리는 것은 힘과 부를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의 손에 정치공동체의 운명을 맡기는 것보다 민중들이 정치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이런 공리(公理)를 무시한 채 정치를 설명하니 자꾸 헷갈린다.


최장집 교수가 자주 인용하는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자신의 구상을 ‘폴리아키’라 불러 오독을 막는데, 최장집 교수는 자기 구상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니 오독이 생긴다. 더구나 자기 얘기와 일치하지 않는 논의를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부르니 오독은 더욱더 심해진다. 그러니 엉킨 매듭을 풀어야 하는 사람은 최장집 교수인 것 같다.



한국시민이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한다?


독자의 오독이 있다면 최장집 교수의 오독도 존재한다. 최장집 교수는 이렇게 얘기한다. “오늘의 한국 상황에서 정치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런 경향이 사회에 널리 확산돼 있다는 점일 것이다.…권력을 권위주의와 동일시하고 정치를 탐욕과 타락을 상징하는 인간 행위로 이해하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경향은,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 체제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잘 운영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은 다르다.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 비판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상황이 부정적이지 않은가? 투표할 수 있고 선거가 치러지니 부정적이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민주주의를 따진다면 프랑스 사상가 루소의 말처럼 우리는 4년에 한번 투표하는 날에만 정치공동체의 주인이 될 뿐이다.


정치와 경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공공영역이 사유화되는 한국의 정치는 매우 부정적이다. 개발의 속도전에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 한국의 현실은 매우 부정적이다. 인사청문회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정치상황은 충분히 부정적이다. 감시와 벌금으로 얼룩진 삶을 사는 활동가들에겐 지금의 정치가 꽤 부정적이다. 그리고 다른 통로로 자신의 의견을 얘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부정적이다. 이것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아니다. 부정한 것을 부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자고 얘기하니 아Q의 정신승리법이라도 쓰자는 것일까?


그리고 정녕 사람들이 권력을 부정적으로 ‘이해’할까? 오히려 사람들은 권력이 중요한 힘이자 자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이고 권력이 아니라 부패이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부정하기 때문에 권력을 탐욕과 타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친 의심이나 열정이 아니라 합리적인 감시이다.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이것이 오독인지 의도된 계산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주장이 정치엘리트의 활동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대중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는 어려우니 엘리트들이 정치를 대신해야 한다는 식이다. “베버는 국가나 정당같은 자율적 정치조직이 인민주권, 인민의 이니셔티브를 통해 운영되고 그로 인해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민주주의도 어디까지나 정치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고, 인민은 엘리트를 선출하는 수동적 역할 이상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도로 절제된 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베버의 이런 주장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도로 절제된 이해”라니 그 판단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최장집 교수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것인 듯하다. “베버에게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자신의 목적의식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대중이 그에 호응해서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지도자-대중의 관계, 즉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이를 추종하는 대중의 열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배-정당성의 상호관계에 기초를 둔 통치 체제이다. 바꾸어 말하면 민주적 리더십이란 카리스마적 권위의 한 유형인 것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타당하려면 시민은 부정되어야 한다. 미국식 정치관과 소련식 정치관이 매우 다른 듯하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기반 위에 있다. 슘페터의 정치공학과 레닌의 전위당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최장집 교수는 “국가기구의 관료화와 자본주의 시장 구조의 독점화가 가져오는 제약적 힘에 대응하면서 역동성을 만들어”내려면 정당머신을 가진 지도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허나 베버가 지적했듯이, 관료제는 ‘수동적 민주주의’의 출현, 즉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평준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제 아무리 뛰어난 정치지도자라 하더라도 지배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할지언정 그들의 역량을 끌어내지는 못한다.


관료제는 단지 권력을 독점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평준화한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좋은 정치는 쇠창살 안에 갇힌 무기력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진정 행복일까? 시민들이 누려야 할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을 정치인들이 계속 독점해야 할까? 참여는 사람들의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공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을 밟으며 정치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늘어날텐데 최장집 교수는 이런 과정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정치학자의 현실감각?


정치학자로서 최장집 교수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균형을 얼마나 잡고 있을까? 최장집 교수는 2010년 9월 정치인 손학규 씨의 후원회장을 맡았고 얼마 전에는 손학규후원회 대표 명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한 몸 던져 지역주의를 깨트리려 했던 것처럼 손학규의 국민통합을 위한 노력이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습니다”라는 지지의 인사말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장집 교수는 손학규 씨를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만들려 하는 것일까?


손학규 씨의 진심을 파악하기란 어렵지만 적어도 뉴라이트전국연합과 한나라당의 일원이었던 손학규 씨의 신념윤리를 높이 사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간의 행적을 보면 “사건의 전체 구조, 내지는 맥락에서 행위자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상상하고, 그가 원래 바라는 목표와 관련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판단력, 사려 깊음”을 의미하는 책임윤리를 그에게 기대하기도 어려운 듯하다. 그런데도 왜 손학규일까?


그리고 그동안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 왔음에도 뜬금없이 손학규와 노무현을 연장선상에 놓는 최장집 교수의 말은 자신의 책임윤리를 거스르지는 않더라도 신념윤리를 상당 부분 훼손한 듯하다(성공회대에서 비정규직 행정직원들이 해고되었는데도 외부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주장해온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있는 걸 보면 이런 윤리의 불균형은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A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문제인데 이를 B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A가 아니었으니 무조건 A를 고쳐야 한다고 고집하는 건 신념이 아니라 집착과 모순이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다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다는 방패를 동시에 팔려는 사람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강력한 지도력과 민주주의를 모두 팔려는 최장집 교수의 입장도 그런 모순에서 벗어나기 못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을 내려놓아야 입장이 분명해지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 책의 내용과 분량은 책세상 출판사의 문고판시리즈와 비슷하다. 허나 판형이나 가격은 책세상 출판사의 문고판이 훨씬 좋다. 불필요한 지면낭비를 줄인다면 훨씬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앞으로 나올 시리즈는 합리적으로 편집되길 기대한다.

4월 22일에 열린 인권도시 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이다.
강현수 교수의 '도시에 대한 권리', 은우근 교수의 '인권 거버넌스 실현으로서 인권도시'라는 발표문에 대한 토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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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제문 잘 읽었습니다. 도시라는 공간에 대한 권리가 다양한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분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만큼 도시민들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다양한 논의와 방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논의에는 공감이 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뭐랄까요, 맛있다는 사탕을 입에 넣었더니 달달하긴 한데 뭔가 이물감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 점에 관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보편성의 함정: 누가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제임스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서 ‘하이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빌어 사회공학적인 설계가 자신의 유토피아적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하려 했는지를 비판합니다. 민중을 위한다는 수많은 계획들이 실패한 이유는 민중을 배제한 채 민중을 위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스콧은 민중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지(經驗知)인 메티스를 접목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제인 제이콥스 역시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대규모의 계획보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가 엮이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도시가 어떤 종류의 내재적이고 기능적인 질서를 갖는지 알지 못한 채 도시의 겉모습을 계획하거나 어떻게 하면 도시에 마음에 드는 질서정연한 외관을 부여할지 골몰하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라는 게 제이콥스의 생각인데요.[각주:1]


그렇다면 인권도시, 인권거버넌스의 내용 말고 그것이 뿌리를 내리고자하는 도시의 특징과 그 속의 질서가 먼저 논의되어야 할텐데, 오늘 발제문들은 그 반대의 느낌을 줍니다.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내용보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내용이 강조되는데, 저는 이런 방식으로 도시가 정말 변할 수 있을지 좀 의문입니다.


그리고 광주라는 지역이 가지는 고유한 의미는 무엇이지? 광주항쟁이 벌어졌던 공간이다, 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은우근 교수님의 발제문에서도 “80년 5․18당시 민중을 주변으로 몰아낸 힘과 30여년이 지난 오늘 민중을 주변으로 몰아낸 힘은 어떻게 다른가? 이 문제가 인권도시운동에서 전략적 고민의 출발점이어야 한다고 본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 조례추진과정에서도 “광주의 역사적 정체성과 관련해서 지니는 의미에 대한 논의가 없었으며, 조례 제정 당시에도 공청회 등 여론 수렴을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다”고 적혀있습니다. 광주의 정체성과 인권을 연결시키는 과정에 광주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하고 그 와중에 어떤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지,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이 없다면 인권은 ‘발명품’으로서의 역할만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계획단계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쁜 집을 지어놨으니 들어와서 이쁘게 살아라”는 얘기 역시 사는 사람의 욕구와 권리를 침해합니다. 브라질에서 참여예산제도가 시작된 이유도 바로 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참여하며 실제로 권한을 행사한다면 사람들은 변할 것이다. 잘 만들어진 완성품이나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한국에 참여예산조례가 소개된 이후 전국적으로 110개가 넘는 조례가 제정되었지만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는 조례는 4, 5개에 그치고 있다는 현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인권도시나 인권조례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나의 도시?: 일상성과 일상의 변화


저는 도시가 변화한다는 건 결국 도시민들의 일상이 변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강현수 교수님의 발제문에서 강조되는 르페브르 역시 그 일상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죠. 르페브르는 일상을 ‘혁명 시도가 실패하는 원인이자 결과’라고 했는데요. 단순히 사회체제의 변화만으로는 일상의 변화를 동반하지 못하고 이렇게 변화되지 않는 일상은 ‘혁명의 방호벽’으로 존재한다고 얘기합니다. 인권과 평화의 대학이라 불리는 성공회대에서도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사태해결에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 일상은 참으로 완고한 것이기도 합니다.


일상이 변하지 않는 한 실제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기력증에 빠지게 됩니다. 모순적인 양면을 가진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일상을 바꾸려면 대안적인 일상이 필요한데, 현재의 도시공간은 대안적인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하는가? 공정하고 윤리적인 가치가 생활의 동선으로 구현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할까? 이런 부분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대부분의 도시들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두 개의 도시입니다. 구심과 신도심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발전하고 있는 곳은 전국을 통틀어 하나도 없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인권도시와 인권거버넌스는 어느 도시를 위한 것일까요? 설령 제도의 의도는 그렇지 않더라도 실제 현실에서는 신도심을 위한 담론으로 활용될 여지가 많습니다. 특히 권리들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 예를 들어 재산권과 주거권이 충돌할 때, 환경권과 문화권이 충돌할 때, 인권담론이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인가? 구체적인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 필요합니다.

  1. “뉴욕 이스트할렘East Harlem의 어느 주택단지에는 눈에 확 띄는 직사각형 모양의 잔디밭이 있는데, 이 잔디밭은 단지 주민들의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단지를 자주 방문하던 어느 사회복지사는 자기 생각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사람들이 이 잔디밭을 자주 입에 올리고, 또 끔찍하게 잔디밭을 싫어하면서 그걸 없애 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유를 물으면 으레 “저걸 어디에 써요?”라든가 “누가 저게 필요하대요?”같은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결국 하루는 다른 사람들보다 말을 잘하는 어느 주민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누구도 이곳을 지을 때 우리가 뭘 원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은 우리 집을 헐어 버리고는 우리는 여기로 밀어넣고 친구들은 다른 데다 밀어 넣었죠. 여기는 커피 한 잔이나 신문 하나 구할 데도 없고 50센트 빌릴 데도 없어요. 누구 하나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 신경도 안 써요. 그런데 높은 사람들이 와서는 잔디밭을 보고 한마디씩 하지요. ‘참 예쁘군요! 이제 가난한 사람들도 누릴 거 다 누리는군요!’라고요.” [본문으로]
 

한국사회에서 선거는 공무원들이 들어가면 안 되는 ‘금단의 영역’이다. 공직을 맡은 사람이 특정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돕는 행위는 법적으로 금지된다. 국민을 대신해 중요한 정책들을 집행하는 책임을 맡기 때문에 공무원들은 정치논리가 아니라 법률과 규칙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진정한 관료는 ‘분노도 편견도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면 부패한 권력층은 끊임없이 선거에 공무원들을 동원해 왔다. 아직도 ‘관권선거’라는 말이 언론매체에 등장할 만큼 동원의 뿌리는 깊다. 위계질서에 따라 상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고 인사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또는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연고주의 때문에, 사실상 한국의 공무원들은 어느 한 편에 설 것을 요구받아 왔다. 사회가 민주화되어도 이런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개입과 정치참여의 차이점


이런 상황에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명제는 현실을 감추고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즉 중립성은 마치 공무원들이 중립을 지키는 것처럼 시민들을 착각하게 만들거나 정치논리에 영향을 받지 않는 행정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공무원들이 참여하는 것을 금지해왔다.


물론 공무원들이 수동적으로 동원만 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권력층의 비리를 폭로하고 때로는 권력층과 적절히 타협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직을 그만두고 선거에 출마해서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폭로나 변신은 개인의 선택과 결단으로 머물렀고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공직사회와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밝히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행동이다. 반면에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밀실에서 은밀히 이루어지고 사회의 이득보다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행동이다. 그러니 공무원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사실 사회적으로 중요한 계획을 짜고 결정하는 권한이 행정당국에 집중된 한국사회에서 공무원은 이미 정치의 중요한 주체이다. 따라서 ‘올바른 정치’가 실현되도록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설령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지지하더라도, 그런 중립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공무원은 정치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시민으로서 투표할 권리를 통해 사회와 행정시스템을 변화시켜야 공무원의 역할을 올바로 정할 수 있다.



시민 공무원의 생각이 중요하다


미국의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제 2차대전 당시 수백만 명의 유태인 말살계획을 이끌었던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뒤 ‘악의 평범함’에 관해 얘기했다.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은 악의 화신이나 전쟁에 미친 사람이 아니라 옆집 아저씨, 평범한 공무원처럼 보였다. 아이히만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책임감있게 일했을 뿐이라며 항변했다. 아렌트는 그 모습을 보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 잘못된 부조리에 대해 언제나 마음속으로만 반대를 하는 것이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혹시 내 속에도 아이히만이 없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공직사회에 뿌리내린 권위주의와 관존민비의식, 반공이데올로기, 개발이데올로기, 연고주의 등은 합리적인 판단과 공감어린 연대를 가로막는다. 공무원들도 시민으로서 판단하고 행동하며 이런 아이히만들을 몰아내야 한다.


국내외에서 큰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시민 공무원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얼마전 성공회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담은 글을 올렸다.
오늘 성공회대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그동안 나만 불편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성공회대 부총장을 맡고 계신 사회복지학과 이영환 교수가 글을 올렸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학내 피케팅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담은...
http://www.skhu.ac.kr/board/boardread.aspx?idx=13514&curpage=1&bsid=10017

학교측의 공식적인 입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방적인 피케팅, 참으로 유감입니다'라는 제목이다.
글을 읽다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학교의 행정직원이 "원래 학과장을 보조하는 조교에서 출발하였고, 후에 사회진출을 준비하는 졸업생들이 학과 일을 보좌하면서 여러 가지 업무능력 신장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를 담은 직책"이라는 점을 대학에 20년 이상 있었지만 처음 들었다.
앞으로 학교에 계신 직원분들을 만나면 얘기를 드려야 할 것 같다. 사회진출을 준비하시라고...
심지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마음으로 기간을 2년으로 정했다니...
참 놀라운 마음이시다...

또 하나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계약이 만료되어 사회로 진출하게 된 상황(정말 사회로 진출한다고 생각한 걸까)이 "일방적이고 살인적인 부당해고"가 아니라고 얘기하는 점이다.
"학교측에 공식적인 대화제의 한 번 없이, 일방적으로 우리 대학을 부도덕한 대학으로 매도하는 것"이 불만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식적인 대화제의 한번 없이 집단행동을 시작할까?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는 얘기이다.

마지막으로 놀라운 점. "교수들의 봉급수준이 항상 바닥권을 헤어나지 못할 만큼 아껴써야만 살림이 가능한 대학입니다.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 대학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성공회대 교수들의 봉급수준이 얼마이길래 바닥권을 헤어나는지 모르겠지만 교수봉급이 낮은 건 교수들이 학교측에 요구해야 할 얘기이지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사람들에게 해야 할 얘기는 아닌 듯하다.
살림을 아껴쓴다는 것하고 착취하고는 또 무슨 상관이 있는지.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신 분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듯 싶다.

그런데 참으로 의아한 일은 이 얘기를 학교 홈페이지에 올린 분이 수구 꼴통이나 신자유주의의 신봉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외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분이다.
한겨레신문의 사외이사이기도 하고, 구제역 살처분을 비판하는 분이기도 하시며, 한국의 빈곤문제가 매우 심각하고 구조적이기 때문에 비정규직 등의 빈곤은 불공정한 제도적 편견의 산물이라고 외부에서 주장하는 분이기도 하시다.

이 분 외에도 성공회대에 비정규직 문제를 '외부에서' 비판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들이나 여러 교수들은 외부활동을 많이 할 뿐 아니라 언론 인터뷰에서도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비정규직의 '편에 서겠다'고 공언했던 사람들이다.
그 많은 교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또 하나 의아한 점이 있다.
성공회대에서 비정규직 문제로 집단행동이 시작되면서 여러 신문사에 보도자료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경향신문에 성공회대 대학원생이 글을 쓴 것 외에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왜일까?
기자들이 너무 바빠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그래도 희망인건 학생들이다.
성공회대 홈페이지 커뮤니티에 가면 학생들이 계속 글을 올리고 있다.
외부에서 다뤄지든 말든 내부에서의 논의는 계속 끓어오르고 있다.
학교측은 100도씨가 되길 기다리는 걸까?
'인권과 평화의 대학'의 진면목을 보여주길 위해?

미국의 지식인 마셜 버만(Marshall Berman)은 [맑스주의의 향연] (이후, 2001)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많은 지식인들이 각자의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일상 생활의 문제와 흐름에서 단절돼 있는 것이 지식인들의 직업적 위기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특별한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다른 어떤 정치운동보다도 민중에 주목하고, 민중을 존중하며, 민중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민중의 요구에 관심을 기울이며, 민중을 뭉치게 해, 자신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우게 한다는 사실에 특별한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우리가 민중의 구체적 삶과 연결지점을 잃어버린다면, 장차 민중의 삶을 한데 묶을 사상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민중이 세계를 바라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처럼 민중들을 인식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민중이 자기 자신들을 인식하거나 세계를 변화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거리의 신호들을 읽지 못하는 한, 그 잘난 [자본론]을 읽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내가 버만을 좀 좋아하는 건 그가 '거리의 지식인'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성공회대 사건을 보면서 버만의 지적이 아주 명쾌하고 올바르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다.
밖으로 아무리 비정규직과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떠들어도 결국은 자신의 일상이 그와 단절되어 있다면, 자신의 생활근거지에서 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욕구에 주목하고 그들과 더불어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제아무리 똑똑하고 좌파이론에 박식한 사람들일지라도(성공회대 교수들이 학교에서 진행하는 수업 커리큘럼을 보면 이론적인 면에서조차도 별로 노력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지만) 그들은 진보적일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말로만 진보를 떠드는 자들을 좀 솎아내거나 그들이 스스로 반성하며 갱생의 길을 걷게 해야 할 듯 싶다.
말로만 떠드는 사람들, 이제 좀 지겹지 않은가...

나는 성공회대를 다니지 않는다.
허나 성공회대의 이름을 자주 듣곤 했다.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성공회대의 지식인들을 통해서 그 이름을 자주 들었다.

그러다 올초 성공회대에 관한 새로운 얘기를 듣게 되었다.
성공회대에 근무하던 계약직 행정직원이 비정규직으로 계약이 만료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참 안타깝게도 학교는 이런 입장을 내세웠다고 한다.


마지막 문장이 눈에 띤다.
"건실하게 열심히 일하시는 직장인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개뿔....

어제 3월 30일엔 성공회대 계약직 행정직원 정규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 선언문을 발표했다.
계약기간이 남은 4인 역시 계약기간 종료와 더불어 학교를 떠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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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 계약직 행정직원 정규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출범 선언문

   

지난 2월 28일 학내 계약직 행정직원 6인이 계약만료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계약기간이 남은 4인 역시 계약기간의 종료와 함께 학교를 떠나게 될 예정이다. 이에 대하여 학교 측은 효율적인 학사행정업무를 위한 개편과정에서 발생된 불가피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비정규직의 ‘해소’를 위해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모순적인 과정이었으며, 학내 구성원과의 대화를 차단한 채 진행된 비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임이 밝혀졌다.

  이에 대하여 학교는 법적으로 그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가 근거로 삼고 있는 (소위) 비정규직법은 비정규직을 합법적으로 해고하기 위함이 아니라, 비정규직의 근로환경을 보호하고 또 그들의 능력을 기꺼이 인정하여 정규직화하기 위함에 있다. 그러나 지금 이곳 인권과 평화의 대학 성공회대에서 비정규직법이 악용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목도하고 있으며 이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러한 일방적인 학사행정 개편과정에서 안정적인 학사행정업무를 받지 못한 학생들, 기존 업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고용된 근로학생들, 업무혼선을 겪은 정규직 직원들 및 교수들은 또 다른 피해자가 되었다.

  이에 여기 모인 당사자와 참가자들은 학교의 무리한 학사행정개편 및 비정규직 해고를 통한 정규직화에 반대하며, 기존 계약직 행정직원의 정규직화를 통해 일련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의 출범을 선언한다. 이는 인권과 평화라는 학교의 교육이념이 지금 바로 이곳에서부터 지켜져야 한다는 시급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의 요구사항을 학교 측에 제출하는 바이다.

  하나, 학교 측은 일방적인 고용승계 회피 및 행정파행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라!

하나, 계약 만료자를 포함한 계약직 행정직원을 전원 정규직화하라!

하나, 직원․학생․교수 등 학교 구성원들에 대한 민주적이고 체계적인 의사소통 체계를 마련하라!

  우리는 학교 측이 이 요구사항을 성실히 듣고 대화하며, 진정성 있는 조치를 취할 때까지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다. 또한 ‘더불어 사는’ 성공회대의 교육이념을 지키기 위해 학내 구성원과의 연대를 통해 지속적인 공동행동에 나설 것을 선포한다.

 

  2011년 3월 30일

성공회대학교 계약직 행정직원 정규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일반대학원사회학과, 일반대학원사회복지학과, NGO대학원비정부기구학, NGO대학원정치경제학과, 문화대학원14기, 26대 총학생회, 영어학과, 디지털컨텐츠학과, 다함께, 역사철학회, 애오라지, 아침햇살, 뿌리, 짜이집, 사람세상, 꿈꾸는슬리퍼, 성공회대비정규직문제해결을위한네트워크, 나눔가게, 따뜻한밥한끼캠페인단, 단추카레, MR CREW, 진영종(영어학과 교수), 김혜인(영어학과 교수), 서영표(연구교수), 김성경(연구교수), 김용한(외래강사), 유해정(외래강사), 김동한(외래강사), 김진환(외래강사), 안진걸(외래강사), 김명희(외래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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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집회 때 배포된 선언문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정규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한 성공회대의 지식인들 때문이다.

그렇게 진보적이고 인권과 평화를 위한다는 성공회대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너나 없이 떠드는 성공회대에서 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한 지식인들이 교수, 외래강사 통틀어 '딱' 10명이다.
교수: 영어학과 진영종, 김혜인
연구교수: 서영표, 김성경
외래강사: 김용한, 유해정, 김동한, 김진환, 안진걸, 김명희

밖에서 그렇게 비정규직 문제를 떠들었던 교수들의 이름이, 성공회대를 대표한다는 진보적 교수들 이름이 하나도 없다.
눈을 의심했다. 눈을 비볐다. 설마...
그런데도 없다...

물론 학내 사정이야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잘리고 앞으로 잘려나갈 직원들이 약자임에는 틀림없다.
전후 사정 다 따지더라도 밖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던 지식인들이 침묵한다는 건 참 우습고 부끄러운 일이다.

앞으로 성공회대에 속한 지식인들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볼 생각이다.
당신은 당신이 떠들어대는 그 내용을 어떻게 살고 있냐고.
그때 당신은 어디 있었냐고.

진보?
살지도 못하면서 떠들지도 마라.

굳바이, 성공회대.
큰 기대도 없었지만 쓰린 가슴 추스리며 돌아선다.
 

2007년 11월, 내가 맡던 수업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해 얘기해줄 특강강사로 임재성 씨를 처음 만났다. 재성씨는 병역을 거부하고 감옥을 택한 이유와 스스로 총을 내려놓았던 사람들에 관해 얘기했다. 그 학기에 학생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시간이었고 여러 학생들이 수업 후기를 남겼다. 모두가 그의 얘기에 공감한 건 아니었지만 그 목소리는 학생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목소리가 듣는 상대를 고려하는 절제된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학생들의 곱지 않은 시선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야 했던 재성씨를 온전히 보지 못하고 섣불리 감동을 얘기했던 건 아닐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슬펐다. 그는 대체복무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36개월 합숙복무면 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섞인 한이 마음을 후볐다. 그리고 “그날 널 보내면서 정신 반쯤 나간 아버지”, “창살 안에서 삶은 달걀이랑 우유 맛있게 먹어주던 내 새끼”, “규정이 아니라면서도 허용한 순경 아저씨”라는 비극적인 풍경을 담은 아버지의 편지를 읽으며 울컥 눈물이 났다.


또 책을 덮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병역이란 주제 앞에서는 이성이 마비되는 우리 사회”에서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로, 평화학을 공부하는 연구자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를 마주하는 게 버거워서는 아니다. 재성씨는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신념의 성격, 거부하는 행위의 범위, 대체복무의 용인 여부 등과 같은 기준으로 병역거부를 구분하고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체제의 언어’로 병역거부에 접근하는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나 역시 그동안 체제의 언어로 병역거부를 논했던 건 아닐까? 그냥 싫어서 군대를 거부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미안하고 슬프고 부끄러워지기도 오랜만이다. 하지만 재성씨는 우리가 이런 마음만 가지고 책을 덮기를 원치 않는다. 외려 자신과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사는 시민임을 강조한다. “감옥행까지 감수할 정도로 강고한 평화주의 신념을 가진” 투사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그는 누구나 관심을 가져야 할 평화의 언어를 전하려고 노력한다. 이 책은 공감의 능력과 감수성을 잃어버린 메마른 사막에서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돕는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돕고 있다. 군대가 약한 나라는 망할지라도 군대가 없는 나라가 망한 경우는 없다. 내가 겨눈 총부리가 내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먼저 총을 내리려는 사람들, 폭력에 “마취되지 않는 감수성을 통해서 폭력의 맨 얼굴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는 시민들이다. 자신을 돕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모순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허나 가해의 기억이 병역거부를 평화의 권리로 인정하게 만들었던 독일과 달리 피해의 기억을 가지고서도 “더욱더 강력한 무장을 갈구하면서 병역거부를 범죄시”하는 한국의 군사주의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더구나 비인도적인 무기로 분류된 집속탄을 비롯해 온갖 무기를 수출하며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에서의 병역거부는 일상적인 삶보다 총체적인 거부와 대안적인 삶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거부의 권리를 일상 속에 뿌리내릴 방법은 여전히 과제이다.


재성씨를 내게 소개했던 이조은씨도 병역을 거부하고 지금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날이 따뜻해지면 우리 아들을 데리고 조은씨를 면회하러 가야겠다.


 

볼프강 작스와 여러 사람들이 지은 『反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은 참으로 불편한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 그리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온 말들이 실제로는 세뇌당한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발전, 환경, 평등, 도움, 시장, 요구, 한 세계, 참여, 계획, 인구, 생산, 진보, 자원, 과학, 사회주의, 생활수준, 국가, 기술 등 뭔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디딤돌이라 ‘배워온’ 말들이 실제로는 우리 삶을 지배해 온 언어들이다. 더구나 우리가 지금 당장 이런 말들의 의미를 바로잡고 새로운 말을 찾지 않는다면 미래세대는 이런 성찰의 기회마저 누리지 못한다는 점을 알지만, 지금 누리는 생활수준을, 또는 앞으로 누리려는 생활수준을 포기할 수 없기에 마음은 더욱 불편해진다.


이상기온과 구제역, 조류독감 등의 재앙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개발에 심취한 나라, 국민소득 몇 만불에 목을 매는 나라 한국에서 이 불편한 책은 너무 늦게 번역된 듯하다. 19명이 토해내는 말의 무게가 우리의 안락함을 쿡쿡 찌르지만 우리의 마비된 몸이 이런 자극에 반응할지는 의문이다. 허나 말에도 힘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마지막일지도 모를 선택을 내려야 한다.



1. 계획된 파괴(발전)와 의도된 정치(경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엄마, 아빠의 아이이지만 우리와는 다른 존재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울음’이라는 한 가지 언어로만 표현하기에(다행히 요즘은 ‘웃음’으로도 표현한다) 아직까지 그 속내를 알 수 없지만, 내 판단으로 이 아이를 재단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구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그래서 나는 인간복제를 믿지 않는다). 새로 탄생한 생명은 언제나 기존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를 만들고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니 지구상의 모든 사회를 비교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오만함이자 엄청난 폭력이다. 온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감히 그런 말을 입에서 꺼낼 수조차 없다.


인류의 비극은 이런 기준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자기 분에 넘치는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고, 희망은 이런 사람들의 힘을 빼앗고 세상의 다양함을 회복시키려는 사람들이 등장했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과정이 반복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껏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예전의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파괴적인 역사가 20세기에 시작되었다.


‘발전’의 뜻을 풀이하는 구스타보 에스테바의 글을 읽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발전은 1949년 1월 20일에 시작되었다. 그날 세계 20억 인구는 저발전인이 되었다. 까놓고 말해서 그때부터 사람들은 온갖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남들의 현실로 자기를 비추는 뒤집힌 거울로 일그러졌다.” 이 문장이 눈에 밟혀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이 미국사회를 기준으로 삼아 발전과 저발전을 나누는 순간, 미국이 인류의 발전을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순간 미국‘과는 다른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덜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나의 선언으로 전 세계는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뉘었다.


서구사회는 간절히 도움을 바란다면 기꺼이 뒤를 봐주겠다며 ‘키다리아저씨’를 자처했다. 반면 그 외의 사회들은 발전된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고 외부의 구원에 매달려야 했다. 아프리카 남부 수단의 알리에르 대통령이 종글레이 운하를 건설하기 위한 토론회에서 한 말은 이런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몽둥이를 들고라도 국민을 낙원으로 몰고 가야 한다면 우리는 국민을 위해서 또 우리 다음에 올 후손을 위해서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이 실현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은 은폐되었다. 즉 미국 로스앤젤레스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에 맞추려면 지구가 다섯 개나 필요하다는 점, 로스앤젤레스시에도 엄청난 빈부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은 은폐되었다. 그러니 이런 변화가 자연스러울 리 없다.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속여서 벼랑 끝으로 몰아붙여야 이런 변화는 가능하다.


따라서 ‘발전하지 않을 권리’를 무시하고 발전권만을 강요하는 발전이데올로기의 힘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에서 나온다. 경제발전은 기업이 아니라 정부의 몫이기에, “정치적 구상으로서의 경제”라는 표현은 본질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이 책에 따르면, 경제발전의 원래 이름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파괴의 정치이다.


사막 위에 스키장과 세계 최대의 쇼핑몰을 세운 기적의(?) 두바이는 이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아카이브, 2010)에 따르면, 이미 두바이의 “국가와 사기업은 거의 일심동체가 되었”고 “두바이의 고위 관리자들은 정부의 핵심 직책을 맡는 동시에 알막툼이 지배하는 주요 부동산 개발회사를 경영한다.” 그리고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우리식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상식과 달리 빈곤과 빈민이라는 개념도 원래는 정치적인 개념이었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pauper 곧 빈민의 대립항을 부자로 본 것이 아니라 potens 곧 세도가로 보았다. 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빈민은 자유인으로 여겨졌고 그의 자유는 오직 세도가에 의해서만 위협받는다고 여겨졌다.” 부는 내게 없는 것을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고, 돈의 힘이 아니라 돈 없이 살 수 없게 만들고 그 돈을 필요하게 만드는 힘이 가난한 이들을 지배한다. 그러니 빈부라는 개념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경제가 아니라 정치로 풀어야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2. 진보의 강박(기술)과 타자없는 관료주의(도움)


따라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 파이를 키워도 더 나은 세상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동안 인간사회의 생산력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밥을 굶고 병들어 고통을 받고 추위에 몸을 떤다. 조금만 더 참으면 새로운 미래가 온다지만 그 미래는 언제나 미래일 뿐 실현되지 않는다. 진보가 내세우는 미래는 현재를 정당화시키는 ‘알리바이’이다.


그러니 자기 눈앞의 사람이나 사건을 방치한 채 열심히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진보이고, 옆집 사람 얼굴도 모르면서 지구 반대편 소식에 몰두하는 것도 진보이다. 백 명이 일할 자리를 기계화시켜 다섯 명만 일하게 하는 것도 진보이고, 서울-부산을 오가는 시간을 몇 십분 줄이려고 산을 깎고 터널을 뚫는 것도 진보이다. 이렇게 진보적인 일들이 우리의 삶터와 일터, 생태계를 파괴해 왔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진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무한히 발전할 과학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기대한다. 허나 이런 진보는 “모든 도덕적 제약과 윤리적 맥락으로부터 ‘해방된’, 오로지 지적이고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일 뿐이다.


오토 울리히는 이제 진보에 대한 헛된 기대를 접어야 한다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공업체제의 효율성을 그렇게 칭송하고 공업기술의 높은 생산성을 그렇게 떠들어대지만, 거기에는 아직도 많이들 모르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효율성과 생산성은 자신들이 노력을 기울여서가 아니라 이미 자연이 이룩해놓은 것을 약탈하는 방식을 통해서만(지구에 있는 이른바 자유재의 내부화), 또 자연에, 제3세계에, 미래 세대에게 비용을 어마어마하게 떠넘기는 방식을 통해서만(오염물질과 쓰레기문제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비용의 외부화) 실현된다. 높은 생산성을 가졌다는 공업체제는 지구에 얹혀사는 기생식물인 셈이다. 인류 역사에서 기생식물도 그런 기생 식물은 유례가 없었다.”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스미스 요원의 말처럼 과학기술로 무장한 인류가 메뚜기떼처럼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특별히 더 파괴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활 자체가,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지구를 폐허로 만든다. 이익에 눈 먼 기득권층과 민주주의의 토대라는 고상한 중산층이 지구를 파괴하는 메뚜기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자신들이 기생하고 있다는 점을 감추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전 세계로 수출한다. 도움과 원조가 이 수출품의 상표이다.


너무나 이타적인 그들은 눈 앞의 비참한 광경을 외면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누가 누구를 왜, 그리고 어떻게 도와야 할까? 책을 읽으며 또 한 문장에 가슴이 울린다. “가난한 사람의 존재는 굳이 자기가 가난해지지 않으면서도 자기 영혼을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가난이 삶의 필수조건은 될 수 없지만 가난의 존재는 그 가난을 목격하는 존재들에게 윤리를 되새기게 만든다. 아주 단순한 그 윤리는 내가 누리는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를 묻는다. 도움은 그런 윤리적인 관계에서나 가능하다.


그러나 발전이데올로기 속에서 도움은 받는 사람의 입장이나 문화를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선물로 변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주는 척만 해도 그것을 왜 주는지, 어떤 종류의 선물인지, 받는 사람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도움으로 규정한다.” 이런 “도움은 자기 문명 곧 서구 문명의 업적을 살리는 노력으로 뻗어나간다.” 이 속에 타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타자가 사라지면서 이런 타자들로 구성되는 공적인 공간도 사라지고, 그럴수록 도움은 “관료주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


원빈과 안성기가 등장하는 국제기구의 광고는 아름다운 멘트로 채워지지만 그 실상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폰트놋과 아이완디는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활동하는 국제기구를 이렇게 묘사한다. “유엔, 비정부기구, 외국 도급업체, 주요 구호기관 등의 일급 숙소와 사무실에 대한 수요는 토지 가치 인플레이션의 상당 부분을 조장하며, 고위 공무원과 군벌들의 전략적인 토지강탈도 자극하고 있다. 국제조직들은 높은 수준의 물리적 안전 뿐 아니라,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가난한 나라에서 쉽게 구하기 힘든 제1세계 수준의 사치를 추구한다.”



3. 익숙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요즘은 대안이라는 말처럼 식상하게 느껴지는 말도 없다. 이미 너무나 많은 대안들이 유행처럼 휩쓸고 지나간 한국사회에서 대안은 쇼핑몰에 전시된 상품 같다. 대안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끼리끼리 모여 숙덕거리며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질타한다. 너희들이 우리의 대안을 가로막고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파괴한다고.


허나 『반자본 발전사전』의 글쓴이들은 생태학이나 지속가능성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생태담론을 걱정하고 때로는 비판한다. “1990년대부터 바야흐로 펼쳐지는 생태 관료주의 담론”은 “희귀한 자연 자원의 관리를 목적으로 삼는 생태학”을 내세우며 “지역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하는 생태학과 충돌”해 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볼프강 작스는 이런 흐름이 “지구상에 울긋불긋하게 존재하는 문화의 다양성을 새롭게 위협하는” “생태 식민주의”라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글쓴이들은 대안발전이나 내생발전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에스테바는 이렇게 되묻는다. “추진력이 정말로 내생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다채로운 문화와 다양한 가치 체계에서 원동력이 나오는 것이라면 발전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는가와는 무관하게 거기서 필연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지리라고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도 없고, 심지어 추진력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리라고 믿어야 할 이유도 없다. 제대로 따라가면 내생 발전이라는 개념은 온 세계를 하나의 문화 모델로 덮어씌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마련이므로 발전이라는 관념 자체를 허물어뜨릴 수밖에 없다.”


사전이라는 제목답게 이 책은 개념의 잘못된 정의를 바로잡고 원래 뜻을 밝혀 준다. 발전은 “두 개로 나뉜 세계”이고 빈곤은 “특정한 문명의 발명품”이며 자원은 “재생되지 않는 자연”이다. 그리고 평등은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이고 도움은 “세련된 간섭”이며 참여는 “교묘한 통제의 방법”이다. 진정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이런 조작된 언어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요구를 드러낼 말을 찾고 직접 행동해야 한다.


이제 말과 행동이 바뀌어야 한다. 발전이데올로기를 없앨 방법은 “탈경제 운동의 활성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치적 통제”이다. 그러려면 정치에 개입하는 주체의 범위나 그들간의 관계도 달라져야 한다. “공정한 분배의 규칙이 각자에게 몫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는 땅에게도 땅의 몫을 주고 바다에게도 바다의 몫을 주고 숲에게도 숲의 몫을 주고 물고기에게도 새에게도 짐승에게도 각자의 몫을 주는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헤아려야 한다. 땅에게도 제 몫을 주려고 극도의 가난을 받아들인 공동체는 사실 이런 식으로 엄청난 ‘잉여’를 지키면서 공동의 부를 공유한 셈이다. 공동의 부에 대해 우리가 먼 옛날부터 가져온 생각과 환경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이제 막 또는 다시금 이해하려는 내용이 합쳐지면 정말로 새로운 ‘부’의 관념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


나도 요즘 그동안 몰랐던 세계에 눈을 뜨고 있다. 우리 동네의 ‘거친 청년들’(?)이 나의 친구들이다. 우리 사회의 발전기준으로 보면 엄청나게 뒤처진 친구들이다. 대부분은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고 최후의 밑천이라는 몸도 별로 좋지 않다. 가족이나 사회의 보살핌은 딴 나라 이야기이고, 어릴 적부터 알바를 전전하며 세상의 쓴맛을 경험해온 청년들이다.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들은 ‘살처분’이라는 해괴한 명칭으로 산 생명을 땅에 파묻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경제를 걱정하는 위선을 떨지 않는다. 배움과 기술에서 떨어져 있기에 이들은 날것의 상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 친구들을 통해 나는 세상을 온전히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딱히 하는 일은 없다. 같이 밥 먹고 담배 피고 술 마시고 가끔 책도 읽으며 한마디씩 말을 섞는 게 전부다. 이 친구들을 ‘발전’시킬 생각은 전혀 없다. 이 친구들이 스스로 ‘성장’하길 바랄 뿐이다. 가끔 그런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 내 인맥에서는 매우 자연스럽지만 그 친구들의 인맥에서는 너무나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데려와 같이 밥 먹고 술을 마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뒤섞이고 서로의 간격이 조금씩 좁혀지길 기대한다.


때로는 발전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가 이들의 성장을 참아주거나 기대하지 않기에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폭력적인 우리 사회가 이 친구들의 마음에 새긴 상처들은 이들이 다른 선택보다 익숙한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고 성장을 방해한다. 그리고 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건전한 사람들의 편견’은 이런 친구들이 없어져야 자신들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런 폭력과 편견이 만나 이들의 곤경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허나 잘 만든 공장식 농장이 구제역 한방에 도살장으로 변하듯, 발전에 미친 사회는 퇴보 한방으로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할 수 있다. 그 지옥에서도 살아갈 힘을 가진 이들은 모범생이 아니라 바로 이 친구들이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 이 친구들과 친하게 지낸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징글맞게 살아야 이 사회가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삶의 다양성만이 사회를 지속시키는 힘이라는 점을 나는 요즘 새삼스레 배우고 있다. 그리고 교육을 받을 권리, 학교에 다닐 권리도 중요하지만 교육을 받지 않을 권리, 학교에 가지 않을 권리도 필요하다는 점을 배운다. 모두가 서로에게 무한한 관심을 쏟는 따스한 사회에서도 혼자 앉아 고독을 즐길 벤치가 필요하다는 점도. 이제 익숙한 것에서 좀 벗어나면 좋겠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괴롭힐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있다.
이게 요즘 나의 모토이다.

강자와 맞붙어 싸울 때 가장 큰 두려움은 질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적당히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투기는 사라지고 적당한 변명만이 남는다.
그리곤 더욱더 냉소적이 된다.

승리가 아니라 괴롭힘이 목적이라면 어떨까.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주겠어.
너네들이 지긋지긋해할 정도까지 내가 괴롭혀주마.
그러다보면 강자도 자기 마음대로 세상이 굴러가진 않는다는 걸 조금은 느끼게 되고, 앞으로 똑같은 일을 벌이더라도 한번쯤은 이렇게 해도 괜찮을지를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냉소보다 비판의 힘을 더 믿게 되지 않을까?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만 둬라가 아니라 이기지 못하더라도 처절하게 괴롭히자.
부끄럽지 않게 세상을 산다는 건 그런 거다.
 

지금 서울시에서는 학생인권조례를 주민발의로 제정하려는 서명운동이 한창이다. 조례안을 발의하기 위해 필요한 서명인 수는 만 19세 이상 유권자의 1%, 약 8만 2천명이다. 수치로만 보면 1%가 그리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8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을 곳도 마땅치 않고 서명을 받는 형식도 매우 까다로워 애써 서명을 받아도 무효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웬만한 광역자치단체에서 주민발의로 조례를 제정한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동안 주민발의로 조례를 제정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서울시에서도 2004년 3월 약 14만 6천명의 서명을 받아 학교급식조례제정청구서가 제출되었고, 2010년 3월에도 서울광장조례개정안이 주민발의로 청구되었다. 가끔은 현실이 되기에 이런 사건은 불가능이 아니라 기적이라 불린다. 1999년 8월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도입된 주민발의제도는 조례를 제정하고 개정할 시민의 권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참여민주주의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이 한창인 와중에 다른 한편에서는 무상급식을 반대하기 위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민투표 실시를 주장하고, 실제로 2011년 1월 보수단체들이 본격적인 주민투표 청구운동에 들어갔다. 주민투표를 청구하려면 6개월 이내에 서울시 유권자의 5%, 약 41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하기에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보수세력이 제도를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2004년 7월에 주민투표법이 제정된 이후 시민들이 직접 주민투표를 청구한 사례는 한 건도 없고 모두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청구했다는 점에서 주민투표법의 한계는 분명하다. 허나 주민투표법은 지방자치단체의 주요결정사항에 관해 주민의 직접참여를 보장해서 행정의 민주성과 책임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그냥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좋아하기에도 애매한 닭갈비이다.


주민발의제도와 주민투표제도는 주민소환제도와 함께 참여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린다. 이 제도들은 선거에서 대표를 선택하는 수동적인 선택을 넘어 시민이 직접 법안을 발의하고 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 현실에서는 이런 민주주의의 꽃이 시들시들하고 아름답게 피어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참여민주주의의 역설


참여민주주의의 ‘역설’이라는 게 있다. 민주주의는 항상 모든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유리할 것 같지만, 조직화된 세력이 선거과정에 개입해서 여론을 몰아가거나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 야합하면 오히려 다수의 시민들이나 약자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 이런 결정이 내려지는 과정 자체는 민주적인 절차를 따르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문제삼기도 어렵다. 결국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민중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민중이 지배를 당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처럼 참여가 민중의 권리를 강화시킬 수도 있지만 때로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기득권층의 결정을 정당화하며 악용될 수도 있다. 1인 1표로 계산되는 대의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쪽수’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런 힘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당연히 과정이 무시된다. 수능시험 한 번에 그동안의 노력이 판가름되듯이, 선거 당일의 투표결과에 따라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진다.


민주화의 속도가 빠르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런 역설이 한국사회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미국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현실이다(이를 빌미삼아 직접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진보를 가장한 보수학자들도 더러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영화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지사로 일했던 캘리포니아주를 예로 들 수 있다. 민주당 주지사를 주민소환제도로 소환해서 해직시키고 공화당의 슈워제네거가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미국에는 서명과 운동을 대신하는 전문회사들이 있을 정도이니 돈만 있으면 사적인 이해관계를 민주적인 여론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민관협력사업이나 마을만들기 등을 통해 시민참여가 시민동원으로 변해버렸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적인 제도가 ‘민중의’ 지배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시킨다.


교사의 인권과 학생의 인권이 서로 충돌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면 인권의 의미가 뒤죽박죽되듯이, 참여의 성격을 가리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뒤죽박죽된다. 한 때는 신새벽에 남 몰래 쓰는 단어가 민주주의였고, 참여민주주의제도가 도입되면 세상이 바뀔 거란 기대도 있었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런 기대를 배반하고 있다. 그리고 배반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현실을 비관한다. 허나 정말 현실의 문제일까?


이란의 마지드 라흐네마(Majid Rahnema)는 참여를 “교묘한 통제의 방법”이라 부른다. 원래 참여는 “다르게 살고 다르게 어울린다”는 윤리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상향식 참여를 강조하며 시민의 힘을 동원하려는 정부의 전략은 참여의 의미를 대규모 공사나 정부를 지지하는 대중집회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서 조작된 참여와 자발적인 참여는 구분되기 어려워졌다.


특히 라흐네마는 경제발전 영역에서 참여가 더 이상 정부에게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을 뿐 아니라 외려 정치적․경제적으로 매력적인 구호로 변하고 “새로운 투자수단으로, 더 큰 효율성을 낳는 수단”, “훌륭한 기금마련 수단”, “민간부문을 개발사업에 곧장 끌어들일” 방법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런 문제점은 참여민주주의제도가 처음부터 가진 한계였다. 왜냐하면 참여민주주의는 정부가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는 ‘정부=공권력, 민중=권력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참여민주주의는 정부가 자신의 권력을 쪼개어 시민에게 넘겨주는 것을 참여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인민주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권력은 정부가 아니라 민중에게 있다. 제 아무리 억압적인 지배를 당하는 민중이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에게는 권력이 있다. 제도로는 잡히지 않지만 힘으로 느껴지고 사람들 사이에 울림을 가져오는 그런 정치적인 행위가 있다. 이런 행위를 권력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왜 우리는 그런 행위를 권력이라 부르지 않을까? 라흐네마는 이를 “유럽 좌파의 전통에서 나온 권력 관념에 크게 영향을 받아 참으로 문제가 있는 권력 관념이 전통적․향토적 권력관념을 밀어냈다”고 지적한다. 때로는 참여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조차도 민중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려 들면 거북해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상식을 가진 풀뿌리 민중이 선구적 지도자들이 내놓은 해법에 결국은 동의하지 않을 때 민중이 협조하지 않거나 노골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아직 의식이 깨지 않았거나 반혁명 세력에게 놀아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 어떤 명분을 대더라도 이런 모습은 민중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민주적인 태도이다.


그러니 참여민주주의라는 세련된 말에는 모순이 담겨 있다. 민주주의가 제 몫을 다하려면 우리를 세뇌시킨 이런 잘못된 상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정부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이지 정부가 스스로 권력을 만들지는 못한다.


만일 민주주의가 민중의 지배를 보장한다면 그 사회의 법을 제정하고 바꿀 권리도 민중의 손에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법치주의가 성립될 수 있다. 인민주권을 전제하지 않은 법치주의는 기득권층의 기만적인 통치술일 뿐이다.



법에 가로막힌 주민발의, 정부에 가로막힌 주민투표


정부가 모든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한 근대국가에서 법을 제정하고 바꿀 힘은 민중의 손에 있지 않다. 민중이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입법의 영역은 그나마 조례 정도이다. 미흡하지만 이런 점에 조례의 중요성이 있다. 주민이 발의할 수 있는 조례는 민중이 자기 자신을 입법자로 여기도록 만든다. 지역의 법인 조례는 입법자와 그 법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일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앙의 법률과 다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주민발의로 조례를 만드는 힘은 지방의회나 지방의원이 아니라 지역사회 곳곳의 공론장과 시민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단순히 조례만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게 아니라 그 운동 과정에서 많은 소규모 공론장들이 만들어지고 그 이후의 다양한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점 때문에 한국의 중앙정부는 주민발의에 강력한 금지조항을 달아두었다. 지방자치법 제 13조는 ‘법령을 위반하는 사항’, ‘지방세와 사용료, 부담금의 부과․징수 또는 감면에 관한 사항’, ‘행정기구의 설치․변경에 관한 사항 또는 공공시설의 설치를 반대하는 사항’에 관해 주민발의를 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다. 즉 시민들이 아무리 노력해서 조례를 제정/개정하더라도 그 조례가 법률을 어기면 자동적으로 폐기된다. 우리농산물을 쓰도록 규정한 학교급식조례안이 세계무역기구(WTO)협정을 위반한다며 거부되거나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서 학생인권조례안을 막으려는 정부의 태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태도가 계속 나타나는 건 조례가 중앙의 법률을 넘어서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렵사리 주민발의를 통해 조례안이나 개정안을 제출하더라도 지방의회의 심의를 거치면서 그 내용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주민발의된 조례들을 살펴보면, 발의된 원안대로 지방의회에서 의결되는 사례가 드물고 대부분이 수정되어 의결된다. 시민들이 온 힘을 다해 서명을 받고 조례안을 제출해도 지방의회를 거치며 빛바랜 개살구로 변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한계는 주민투표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주민투표법은 법령에 위반되거나 재판중인 사항, 국가 또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권한 또는 사무, 예산․회계․계약 및 재산관리 사항, 지방세․사용료․수수료․분담금 등 각종 공과금의 부과 또는 감면에 관한 사항, 행정기구 설치․변경, 공무원 인사․정원 등 신분․보수에 관한 사항, 동일한 사항에 대하여 주민투표가 실시된 후 2년이 경과되지 아니한 사항 등에 대해 두루두루 주민투표를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장은 주민투표를 쉽게 요구할 수 있지만 시민들이 투표를 청구하기는 매우 어렵게 만들어 놓고 있다. 그래서 주민투표제도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정책을 합리화하거나 정책에 면죄부를 주는 제도로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렇게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서도 자신을 민주적이라 포장하는 제도들이 시민의 ‘착각’을 유도한다. 이 제도들은 시민이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는커녕 자신의 한계를 깨닫도록 만든다. 한국사회에서 “해봐도 소용없다”는 회의주의는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학습된 경험이다. 민주적이라 평가되는 제도들도 이런 경험을 바로잡기는커녕 그것을 강화시키곤 한다.


제도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제도의 변화가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고 그런 과정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수단일 수 있지만 제도는 언제나 악용될 위험을 항상 가진다. 그래서 직접행동의 정치가 중요하다. 그런 제도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야 제도가 원래의 취지를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직접행동은 제도 없이도 기적을 일으킨다.



왜 직접행동이 필요한가?


주민투표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이미 시민들은 주민투표를 시작했다. 즉 제도 이전에 이미 정치행위가 있었다. 2000년에 고양시장이 백석동에 55층의 주상복합건물을 세우려 하자 시민들은 이에 반대해 주민총회를 열고 자발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고양시에 사는 세대 중 43.3%가 투표에 참여했고(그 전해의 고양시장 보궐투표 참여율은 23.1%였다), 88.05%의 시민이 건물신축에 반대했다. 비록 법적인 효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시민들은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지방자치단체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도시계획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2003년과 2004년의 부안방폐장(방사성폐기물처리장)반대운동에서도 주민투표가 정부의 근거없는 비방을 없애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앙정부가 온갖 강압과 회유, 속임수를 썼지만 시민들은 소규모 공론장을 형성하며 자기 목소리를 냈고 결국 외부의 시민단체와 연대해 주민투표운동을 벌였다. 이 투표 역시 72.04%의 시민이 참여했음에도 법적인 효력을 갖지 못했지만 부안시민의 91.83%가 방폐장에 반대한다는 점을 증명했다.


고양시와 부안의 사례에서 보이듯 제도 없이도 시민들은 기적을 일으켰다. 아니 어쩌면 제도가 없었기에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민들은 ‘제도가 없음’을 통해 그 제도의 정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온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안의 주민투표과정을 지켜봤던 한 활동가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주민투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민들이 준비해야 했습니다. 참여하지 않으면 주민투표가 성사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주민들이 참여했습니다. 우편요금을 아끼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2만 가구가 넘는 집들로 투표안내문을 일일이 전달했습니다. 투표에 필요한 투표함, 기표대도 모두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참여의 폭과 열기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시민사회와 종교계가 연대했습니다. 40명의 변호사들이 부안 주민투표의 성사를 위해 투표소마다 배치되어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전국의 시민사회와 종교계에서 6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부안 주민투표의 실무를 돕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경험을 변화시키며 권력이 제도에 있지 않고 자신들에게 있음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시민은 정치의 수동적인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정치의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참여는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주민투표에서의 참여와 질적으로 다르고, 이런 참여야말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권력이다.


제도와 운동의 관계를 설명한 말 중에서 나는 함석헌 선생의 비유를 가장 좋아한다. “육신이 사는데 집 옷이 있듯이 제도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울타리다. 집은 닫기운 것이요, 닫겼기 때문에 집이지만 집 안에 오래 있으면 공기가 흐리고 독소가 생겨 사람이 죽게 되듯이 제도는 고정한 것이요, 고정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지만 제도가 오래면 사회는 반드시 해를 입는다. 그것은 생명은 쉴 새 없이 자라는 것인데 제도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를 언제나 건전하게 발전시키려면 제도를 끊임없이 고쳐야 한다.” 집이나 옷에 몸을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 몸에 집이나 옷을 맞춰야 한다.


민주적인 제도를 얘기하는 전문가들은 많지만 더불어 함께 시민을 만들려는 시도는 부족하다.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민주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금방 생명력을 잃고 화석처럼 굳어져 새로운 민주주의의 등장을 가로막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직접행동을 벌이는 시민들 속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민주적인 제도는 그런 권력의 뒷받침을 받을 때에만 참뜻을 실현할 수 있다.



※ 참고한 글


하승우,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한양대출판부, 2004)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 1979)

볼프강 작스 외, 『반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

김현․이호, “주민자치”, 시민의 신문 편집부, 『한국시민사회운동 15년사: 1987~2002』(시민의 신문, 2004)

하승수, “생명과 평화, 자치의 공동체로”, 《빛두레》제 659호(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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